석현(石峴) 이용익李容翊은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기에 고종의 최측근 근왕주의 정치인, 친러파 관료, 외교관, 경제관료,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 설립자이다. 


이용익(李容翊) 齋木寬直/위키백과 wikipedia | public domain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용익 암살 죽음에 대해 궁금해서 찾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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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http://m.cafe.daum.net/shogun/NaM4/34

이용익을 죽인 김현토는 일제의 밀정이었나?

작성자삼한일통|작성시간16.05.05|조회수611


온라인 상에서 이용익에 대해 검색해보니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김현토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김현토의 총을 맞고 병사하신 후, ...]

라고 되어있는데 


김현토에 대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근현대인물자료>를 보면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이        름     김현토 ( 金顯土 ) 

민 족 구 분     한국인

이       명     웨르트로페트로프스치, 顯昌 干齊

생 년 월 일     1867-11-06

출   신  지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 관청리官廳里 444 (본적)

현   주  소     하얼빈 마가구馬家溝  문화가文化街 24호 원내1호

경력및활동     27세경 러시아령에 들어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극동고려공산당에 입당.

                 1923년 8월 하얼빈 馬家溝 文化街 24호 원내1호에서 은거 중임.

참 고 문 헌     용의조선인명부


강화태생의 사람으로 27세 쯤에 러시아에 거주하여 러시아에서 살았던 인물입니다. 심지어 용의조선인명부에서 나온 기록인걸로 보아 일제의 앞잡이는 아닌걸로 보입니다.


정교가 쓴 『대한계년사』의 일부를 보면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1906년(광무10, 병오)


이용익(李容翊)을 러시아에서 암살하다.

앞서 이용익은 프랑스 수도 파리(Paris, 巴里)로 가서, 그 나라에게 보호해달라고 애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러시아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 彼得堡)로 가서 전(前)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관 서기(書記)였던 아무개를 찾아갔다. 우리나라 전국 광산 ? 삼림 및 황무지를 러시아인에게 허가해주겠다며 그 사람에게 보호해달라고 요구하고, 황제의 재가(裁可)를 얻었음을 의미하는 '계(啓)'자가 찍힌 공문을 보여 주었다. 이용익은 두서너 해 전에 러사이 수도로 유학 갔었던 강화(江華)의 선비 김현토(金顯土) <나이가 30살 남짓이다>에게 통역을 요청하며, 부귀를 보장하겠다고 그를 꾀었다. 하지만 그 일이 미처 성사되지 못했는데, 그 아무개는 유럽의 어떤 공사관 서기로 전근 가버렸다.

이용익은 크게 실망하여, 다시 러시아 외무부의 한 관리를 찾아 그 문제를 의논했다. 김현토는 만나보기로 약속한 그 날짜에 먼저 이용익과 함께 여관으로 가서 그 사람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김현토가 품안에서 권총을 빼내어 이용익에게 쏘았으나,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급히 몸에서 단도 <당시 러시아 수도에서는 무기의 매매를 금지했다. 김현토는 손재주가 꽤 있어서, 일찍부터 지니고 다니던 부서진 권총을 수리하고 또 일본인 상점에서 단도 한 자루를 구입했다>를 뽑아내어 이용익을 마구 찔렀다. 여관 안에서는 놀라 소동이 벌어졌다. 러시아 순사(巡査)가 빨리 가서 구했으나, 이용익은 병원으로 실려 간 지 겨우 30분이 지나 죽었다.

김현토는 러시아 경무청(警務廳)에 봍잡혔다.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李鍾浩)가 법원에 고소하여, 복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재판이 열린 날, 김현토는 이용익이 나라를 팔아먹은 죄를 극렬히 논하며 물 흐르듯 거침없이 응대했다. 법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은 모두 김현토가 옳다고 칭찬하며 앞다투어 조화(造花)<러시아 풍속에서는 무릇 재판할 때, 칭찬할 만한 일로 벌어진 소송에서 정직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조화를 던진다. 조화는 베와 비단 및 종이 따위를 잘라서 꽃무늬로 채색한 것이다>를 던지니, 쌓인 조화의 높이가 김현토의 키와 나란할 정도였다. 그리고 김현토를 위해 앞다투어 변호하는 사람이 십수 명이었다. 그 가운데 한 변호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동양의 성인(聖人) 공자의 말에,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은 누구든지 그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철석같이 지킨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법관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무릇 이용익은 한국의 나라를 어지럽힌 신하요 어버이를 해친 자식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즉 김현토와 같은 의로운 선비는 무죄 석방해주어야 옳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채를 보냈다. 김현토는 드디어 석방되었다.

얼마 안 있어 한 러시아 사람이 김현토에게 알려주기를, "그대가 만약 이곳에 오래 머무른다면, 반드시 이종호로부터 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이찌하여 여기를 떠나지 않습니까?" 하고는, 이어서 김현토에게 여비를 주었다. 김현토는 마침내 불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海蔘威)로 갔는데, 여비 등을 주며 그를 전송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러시아 수도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기까지 한 소년이 김현토를 수행하였는데,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이웃한 여관에 머물고 있던 사람이 수십 일이 지나서 김현토에게 와 말하기를 "이종호가 나에게 많은 돈을 보내어, 복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돈을 물리쳤지만 그대의 뒤를 몰래 살핀 것은, 그대가 혹시 이용익과 무슨 원한 관계의 일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제게 들어서였습니다. 그대의 동정을 살펴보니, 이용익을 죽인 것은 참으로 충성심에서 우러난 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내가 어찌 차마 의로운 선비에게 해를 가하겠습니까? 그러나 이후에도 역시 당신을 해치려고 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나는 여기를 떠나 하얼빈(Harbin, 哈爾賓)으로 갑니다." 했다. 그 이름을 물어보니, 바로 안중근(安重根)이었다. 김현토는 그 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


일단 해당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부분은

1. 이용익이 러시아로 간 이유는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한 것.

2. 김현토의 명분은 나라를 팔아먹은 죄인 이용익을 죽였다는것.

3. 수많은 이들이 변호를 했다는것.

4.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가 보낸 자객이 김현토에게 실토하니(물론 돈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안중근.


위 4가지입니다.


심지어 놀라운 사실은 이범진이 국권이 피탈당하면서 자결을 하기전에 편지를 보낸 인물이 김현토였다는 점입니다.


「이범진(李範晉)의 자결(自決) 순국과 러시아와 미주 한인사회의 동향(動向)」이라는 반병률(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논문을 보면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1) 이범진의 편지와 기부금
자결을 결심하면서 이범진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동양학원(Eastern Institute) 한국어강사인 김현토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범진은
편지에서 “나-국사에 대하야 어대까지던지 하려 하였더니 이에 들으매 원동 각처에 당파의 형세가 한인과 일인 보다 더 심하다 하니 큰
일은 이미 그르고 또한 평일에 바라던 바-아니라. 나의 사는 것이 차라리 죽난 것만 갓디 못한 고로 이제 자처하노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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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의 동양학원 학원강사 김현토라고 하네요.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김현토는 일제의 밀정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다.

●이용익은 고종의 측근이지만 민중의 지탄을 받는 인물

●이범진, 안중근 등은 오히려 김현토를 호의적으로 보고 있음.

●일제는 김현토를 감시의 대상이자 위험한 안물로 봄.


"이용익도 독립운동 하려고 한건데 왜 죽였나?"

다만 웹상에서 김현토에 대해 잘못 알려진 이유는 분명하겠네요.

"이용익도 독립운동 하려고 한건데 왜 죽였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당시의 시각에서 이용익은 그리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한 대신이었다.

이정도로 답하는게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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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걸순, [연해주 한인사회의 갈등과 정순만의 피살] 중에서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제 34집 (2009.12)

대동공보 1909년 4월 24일자 제국통신

정순만의 양성춘 살해 사건은 기호파와 평안도파의 갈등과 대립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평안도파에 속한 인물은 차석보, 양성춘, 유진률, 정재관, 김성무, 이강, 함동철 등이었고,   기호파는 정순만, 윤일병, 김현토, 안한, 강순기, 권유상 등이었다. 정순만 등 기호파에서는 김성무가 미국에서 대동공보에 연조한 돈을 , 그리고 윤일병은 정재관이 미주 태동실업회사의 돈을 착복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김현토는 평안도 인사들이 불공평하다고 비판하였다.     이와 더불어 정순만은 평안도파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였는데 그 구성원은 안한, 강순기, 권유상 등이었다.  그리하여 1909년 11월에는 대동공보가 정간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한인의 국한 연구를 대표하는 계봉우禹(1880.8.1. ~ 1959.6.5.) 기호파(경기도파)와 북도파(함경도파) 분파의 원인으로 정순만의 양성춘 살해, 김현토의 이용익 암살 기도사건으로 보면서도 그 근본 원인은 주의나 정견의 차이가 아니라 기호사람들이 이전의 사색당쟁에서 얻은 선천적 수단으로 해외사엄의 영도권을 잡으려는 것이라거나, ‘봉건적 영웅들에게서 흔희 보게 되는 수령 다툼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함경도 출신으로 기호인과 일정한 거리가 있었고, 또한 러시아에 거주하며 국학을 연구한 계봉우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라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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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평화회의의 첫 번째 특사 이용익李容翊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던 대한제국의 특사는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에 앞서 원래 이 회의에 참석할 특사로 선발되었던 인물이 바로 이용익이었다.


  만국평화회의는 세계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열린 국제회의로 제1차 회의는 1899년에 개최된 바 있다. 2차 회의는 원래 1906 8월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다가 사정상 1년 연기되어 1907 6월에 개최되었다. 


  대한제국은 1905 10월말 러시아 측으로부터 헤이그에서 열릴 국제회의에 초청한다는 의사를 전달받았지만 그 이전부터 이 회의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5 7월 한국주재 일본공사는 궁중에서 평회회의를 위한 비밀회의가 개최되었다는 첩보를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1905년 9월 그가 국외 망명을 감행한 것은 만국평화회의를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용익은 9 11일 황제의 밀지를 가지고 상해에 도착하였으며 9 29일 러시아를 향해 출발하였다. 


  프랑스 파리를 거쳐 1905년 11 27일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여 러시아 외무대신 람스도르프와 여러 차례 회견하는 등 외교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에서 저격미수 사건까지 겪는 등 불행이 겹치는 바람에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용익은 1906 3 8일 상해에 도착하였으며 곧바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여 이곳의 교민사회를 근거지로 해서 장기적 항전을 준비하였다.  그는 이 무렵 헤이그에 건너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밀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회의는 연기되었고 그는 1907 2 24일 블라디보스톡에서 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이러한 임무를 완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서 이상설과 이준이 급히 특사로 선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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