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中原)을 두렵게 한 고조선(古朝鮮) 거수국(渠帥國), 산융(山戎)

산융(山戎)의 대표적 문화는 옥황묘(玉皇廟) 문화로 알려져 있는데 북경시(北京市) 연경현(延慶县) 근가보향(靳家堡鄕) 옥천묘촌(玉泉庙村)을 중심으로 발굴되었고 그곳에 산융 문화진열관(山戎文化陈列馆)이 세워졌다.

 

                                      산융 문화진열관(山戎文化陈列馆)

                                     산융문화(山戎文化) 분포도

옥황묘(玉皇廟) 문화는 서주(西周) 말기(末期 ; 기원전 8세기 초)에 등장해서 춘추(春秋) 후기(後期 ; 기원전 5세기 초)에 사라졌는데 인접한 중산국(中山國), 동호(東胡)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문화는 하북성(河北省), 연산(燕山) 지역 군도산(軍都山)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장가구(長家口), 동쪽으로는 승덕(承德), 대릉하(大陵河) 유역을 경계로 분포하고 있다.

 

1. 옥황묘(玉皇廟) 지역은 옛 무종국(無終子國)이다.

 옥황묘(玉皇廟)는 옥전(玉田)이라 불렀고 옛 이름이 유주(幽州), 옛날 무종국(無終國)으로, 무종국에 무종산(無終山)이 있고 조하(潮河)가 흘러나간다. 무종자국(無終子國)은 산융(山戎)이 세운 국가이고 현재 하북성((河北省) 당산시(唐山市) 옥전현(玉田縣)에 위치하였고 중원 왕에게 자작(子爵)의 벼슬을 받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땅이 되었다


"산융(山戎), 북융(北戎), 무종(無終)의 세 이름은 실제로는 하나다."

[ 춘추좌전(春秋左傳) 장공莊公 30년조 (BC 664)의 두예(杜預)의 주석(注釋) ]

전북대 배진영(裵眞永) 교수는 춘추초기(春秋初期 ; BC 8세기경)에는 고죽(孤竹)은 옛지명을 이었을 뿐이고 북방민족인 산융(山戎) 집단에 속하거나 그 갈래(支族)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현재 무종(無終), 영지(領地), 고죽(孤竹)은 산융족(山戎族)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2. 산융(山戎)은 중원(中原) 제국(諸國)을 두렵게 하였다.

                                          

"저들은 보병(步兵)이고, 우리는 전차(戰車)이니, 그 침노(侵擄)함이 우리보다 나은 것이 두렵도다." [ 춘추좌전(春秋左傳) 은공(隱公) 9년조 (BC 713) ]

오강원(吳江原)에 의하면 보병전(步兵戰)에 능하다는 것은 짧은 병기(兵器)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고 짧은 병기를 사용하는 것은 북방민족의 특징이라고 한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옥황묘 문화의 청동단검문화와 산융(山戎)의 기록이 어느 정도 일치함을 보여준다.

 

                          옥황묘(玉皇廟)   유병식동검(有柄式銅劍)

                                    오르도스(Ordos)  청동단검

                                       하가점상층문화 청동 단검

옥황묘 문화는 유병식동검(有柄式銅劍)을 사용하였다. 유병식동검을 중국사학계에선 '비수식직인청동단검(匕首式直刃靑銅短劍)'이라 부른다. 옥황묘 유병식동검은 오르도스의 청동단검의 영향을 받아 동물무늬가 새겨져있고 검이 짧다.

 

산융(山戎)은 강대하여 끊임없이 남하해서 중원을 침범하였고 악(), (), (), () 등 중원(中原) 제국(諸國)과 여러 차례 대규모 전쟁이 발생했고 이것은 산융(山戎) 통연(山戎痛燕) 즉 산융(山戎) 이 연()을 아프게 한다.‘ 이라 한다.

 

                                              산융 전사 모형도

25세 남자 묘()에서 남자는 허리춤에 유병식청동단검(有柄式铜短劍)과 동삭도(铜削刀)를 차고 양귀에는 스프링 형태 금귀고리로 치장을 하였다. , , , 개 등은 제물로 순장(殉葬)이 되었는데 그중 가장 많이 개가 순장이 되었다. 순장은 산융(山戎) 문화의 기본특징이고 중원문화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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