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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수도이자 마한제국의 수도 직산은 섬서성 보계시일대이다.| 백제영토

history author | 조회 61 |추천 0 | 2016.07.19. 17:34

 

長平郡永安中置。治玄氏城。

  領縣二

  戶五千四百一十二

  口二萬二千七百七十八

  高平永安中置。治高平城。

  玄氏二漢、晉屬上黨郡治。有羊頭山。

북위서

장평군은 치소가 현씨성이다. 현이 2개 있는데 고평현은 치소가 고평성이다.

  告平城遗址 位于县城西15公里的敷水镇西南2公里、秦岭电厂东北240米,新西潼公路北约150米处的平坦耕地上,西距大华公路100米。据清《华阴县志》记载:“敷水南山石山之敷谷有告平城。相传武王伐纣告太平于此。”据《魏书·地理志》载,称为高平城。1988年9月文物普查发现告平城遗址范围:现有城墙残迹,东西约45米,南北380米,呈南北走向,残墙高约2—4米,夯土层厚约8—12厘米,平夯内夹杂有鹅卵石,为周代古城遗址

阴晋城遗址_互动百科

고평성유적은 화음현성 서쪽 15km부수진 서남 2km에 있다. 화음현지에 부수남산의 석산의 부곡에 고평성이 있다고 한다. 위서 지리지에도 고평성이라고 한다.

 

대청광여도

중국학계에서 북위 고평성을 화음현 서쪽 15km로 본다면, 직산은 그곳의 서남쪽에 있어야 하고 려후성과 려양은 동쪽에 있어야 한다.

稷山,在县南五十五里。《左传》曰“晋侯理兵于稷,以略狄土”,即此地也。

원화군현지(당나라지리지)

직산은 직산현 남쪽 55리에 있다. 진(晋)제후가 직에서 병력을 집결시켜 적인들을 공격하였다고 기록된 바로 그곳이다.

。壬午,晋侯治兵于稷以略狄土,立黎侯而还。

春秋

 古黎国、《春秋》曰“晋荀林父灭潞,立黎侯而还”,今县东十八里黎侯城是也。汉为潞县之地,後魏太武改潞县为刈陵县,隋开皇十八年改刈陵为黎城县

진나라제후가 에서 병력을 집결시켜 적인들의 땅을 공격하여 려후를 세우고 돌아왔다.옛날 려국은  진나라제후가 려후를 세웠던 곳인데 려후성이 현동쪽 18리에 있고 한나라가 로현이라고 했다.수나라때는 려성현이라고 했다.

적인들 즉 훈족 혹은 동호가  려후성을 점령했는데 진나라가 군대를 그곳 가까운 직산에서 집결시킨뒤 적인들을 몰아내고 려후를 다시 세워주었다는 것인데  고려시대의 지리지를 분석해보면 직산즉 전주위례성은 화양즉 화산의 남쪽에 있어야 하는데  화산남쪽에서 군대를 집결시켜 동북쪽으로 진격하여 고평성(화음현서쪽 15km)을 넘어서 려후를 구원했다라고 하면 먼가 들어맞는다..

그런데


魏郡,高帝置。莽曰魏城。屬冀州。戶二十一萬二千八百四十九,口九十萬九千六百五十五。縣十八:鄴,故大河在東北入海。館陶,河水別出為屯氏河,東北至章武入海,過郡四,行千五百里。斥丘,莽曰利丘。〔一〕沙,內黃,清河水出南。〔二〕清淵,〔三〕魏,都尉治。莽曰魏城亭。〔四〕繁陽,〔五〕元城,〔六〕梁期,黎陽,莽曰黎蒸。〔七〕即裴,侯國。莽曰即是。〔八〕武始,漳水東至邯鄲入漳,又有拘澗水,東北至邯鄲入白渠。

전한서

위군은 고제가 설치했다. 기주에 속한다. 장수는 동쪽으로 한단에 이른다. 구윤수가 있는데 동북으로 한단에 이르러 백거에 들어간다.려양현이 있다.


 원나라의 장안성고지도에서 백거를 찾았다. 따라서 진나라 당시의 한단은 백거입구서쪽에 있다.


그렇다면 전한서에 나온 위군일대는 현재의 운양현서쪽 조진일대에서 서안시즉 장안성일대임을 예측할수 있다.그럼 려양의 구체적인 위치는 몰라도 서안시와 조진사이에 있었을 것이라 유추할수 있다.

려양현즉 고평성의 동쪽에 있어야할 려양이 원나라고지도를 바탕으로 지리를 구성하면 이상하게 고평성에서 한참 서쪽으로  지금 서안시와 조진사이에 있어야 한다..

중국학계의 주장과 달리  조진을 공격하려면  서안시 서쪽어딘가에 장평이 있어야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게다가 그곳에서 서쪽에 직산이 있는 것이 더 지리개념이 어울린다.

 

송나라고지도에서 둔구의 위치는 알고 있다..둔구는 전욱성과 연관된 것으로 정현즉 화현일대이다.

요도와 평양이 분리해서 그려진 것을 보면 현재  요도왕촌의 서남쪽에 당시의 평양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이미 중국학계가 송나라고지도를 이해하고 제대로 된 지도를 그렸다..

요도와 벌개로 평양의 위치를 보계시 동쪽의 미현과 부풍일대로 표기했다...송나라고지도와 비교해보면  직산은 보계시혹은 그 남쪽으로 추정될수 있다.

대명일통지에서 명나라 보정부관련 자료에서 연경이라고도 하며 북위때 낙랑군이었다고 하는 곳이 바로 현재의 보계시인데,, 백제군이 처음 남하하여 점령한 곳이고 원래는 마한제국의 수도였던 곳은 바로  현재의 보계시일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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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보정부는 처음에 섬서성 보계시였다가 지금 장안시로 이동되고 다시 장안동남쪽으로 이동된다

화산과 화양이란 지명을 분석해보았는데 보계시 남쪽에 고대의 화산이 있지 않았나 추정되어 대청광여도를 보니 과연 보계시일대에 고대의 오악산(숭산,화산,형산,등등)중 하나인 산이 있었다고 그려져 있었다..화양은 곧 화산의 남쪽이니 보계시가 고대의 직산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려후성을 훈족과 동호가 점령한 것처럼, 직산역시 마한제국즉 말갈제국이 먼저 점령하고 후에 백제에 의해 점령된 것이다.

[주몽과 소서노, 허깨비 사랑] 내용중

연타발과 소서노 이야기에 가장 근접한 기록으로 매우 일관성있게 여러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록은 ‘부여의 왕 또는 부여의 왕자가 공손도(公孫度 : ? ~ 204)의 딸과 결혼하여 요동 만주 일대에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내용이다.

『北史』에는 “동명의 후손 구태(仇台)는 어질고 신의가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우고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얻어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처음에 백(百) 집의 사람을 거느리고 강을 건넌[濟] 까닭에 백제(百濟)라 한다. (『北史』卷94 「百濟」).”고 적고 있다.

『수서(隋書)』의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두 기록 모두 부여왕의 후손인 구태(仇台)가 공손도의 딸과 결혼하여 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있다. 문제는 그 시기가 AD 2세기말~3세기 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구태라는 분은 누구인가?

『삼국사기』와 『후한서』에는 AD 120년을 전후로 하여 고구려왕이 마한과 예맥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尉仇台)가 군사 2만을 이끌고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격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大祖大王 ; 『後漢書』卷115).   이 기록들에서 나오는 위구태가 바로 구태인 듯 보이지만 활동 시기가 맞지 않아서, 위구태는 (구태와는 분명 관계가 있는 사람이지만) 구태는 아니다. 부여계의 왕 이름들은 비슷한 경우가 많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2권 백제는 없었다 참고).

그런데 진수의 『삼국지』와 『북사』의 기록을 보면 공손도는 구태와 함께 동으로는 고구려를 치고 서로는 오환을 공격하여 요동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AD 190년경에는 이들은 중원으로 진출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려고 하고 있다( 삼국지 위서 공손도전『三國志』「魏書」公孫度傳 ).   이 때 한나라는 동탁(董卓 : ? ~192)의 집권 시기였다. 『삼국지』에 따르면 당시 구태의 후손 가운데 권력자는 울구태(蔚仇台)라고 한다.   따라서 이 울구태라는 분이 공손도의 따님과 결혼하는 구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태 또는 구태는 다른 왕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이름으로 사용할 때는 울구태가 정확하다. 물론 민족 시조 가운데 한 분의 휘(諱)를 함부로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정확한 성을 알기가 어려우므로 ‘부여왕 울구태’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로 이 분이 백제(반도부여 또는 남부여)의 시조이다.

부여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한 책이 없어서 부여왕의 계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삼국지』(부여전)나 『후한서』(부여전), 『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토대로 보면

부여왕은 위구태(尉仇台) - 부태(夫台) - 울구태(蔚仇台) 등의 순서로 왕위가 승계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진수의『삼국지』에 따르면, 공손도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① 공손연(公孫延) … ② 공손도(公孫度 : ?~204) … ③ 공손강(公孫康 : 204~) … 공손공(公孫恭) … ④ 공손연(公孫淵 : ?~238)

그러면 공손도의 가계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 요동 반도를 장악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당시 요동반도의 지배자인 공손역(公孫□)과 공손도의 아버지 공손연이 종씨(宗氏)라는 데 있다. 공손역과 공손연은 동성(同姓)이지만 직계 가족 관계에 있지는 않았다. 공손연(公孫延)은 세력가(勢力家)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도망다니는 신세였다. ([주] □은 王 + 或)                       공손역의 아들 이름은 공손표(公孫豹)로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공손도(公孫度)의 어릴 때 이름이 공손표(公孫豹)였기 때문에 공손역은 공손도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했다고 한다(『三國志』「魏書」公孫度傳). 즉 공손도는 공손역의 양아들인 셈인데 공손역의 후광으로 높은 벼슬에 오르고 후일에 요동태수가 된다. 그런데 공손도가 요동태수가 되는 시기는 동탁(董卓 : ?~192)의 집권 시기에 해당한다. 즉 AD 190년을 전후로 공손도(公孫度)는 요동반도를 장악하고 『삼국지』의 영웅이자 위(魏)나라 무제(武帝) 조조(曹操)는 그를 무위장군(武威將軍)에 임명하지만 요동반도는 중국의 중앙정부와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정부에 가까운 상태였다.

조조(曹操 : 155~220 : 위나라 무제)의 집권기(후한 헌제)에는 부여왕이 요동에 속하기를 요구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이 기록은 『후한서』나 『삼국지』에 그대로 나오고 있다. 『삼국지』에는 “부여왕 울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복속되었고 당시 구려(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했는데 공손도는 부여가 두 적 가운데 위치하므로 종실(宗室)의 딸을 울구태에게 시집보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 라고 한다.

이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결국 구태는 바로 부여왕(扶餘王) 울구태(蔚仇台)이며 소서노의 부군(夫君)이 되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이 분은 현직 부여왕이자 백제의 건국시조이다. 그런데 드라마 ‘주몽’에서는 일 개 상단의 행수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중원 천하를 제패하려고 했던 공손도를 약삭바른 장사꾼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공손도라고 하니 독자들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사실은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한 인물이다. 바로 나관중『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로 공손강(公孫康)의 아버지요 공손연(公孫淵 : ?~238)의 할아버지인 인물이다. 공손강은 관도대전(200)에서 대패한 원소(袁紹 : ?~202)의 아들 원희(袁熙 : ?~207)와 원상(袁尙 : ?~207)이 피신해왔을 때 이들의 목을 베어(207) 조조에게 보낸 그 사람이다.  

대부분의 경우 공손씨는 한족(漢族) 계열로 보고 있으며 연나라 왕실을 구성한 가문이기 때문에 드라마 ‘주몽’에서 공손도를 일개 상단으로 묘사한 것은 작가의 중대한 실수이자 앞으로 뒷감당하기가 매우 힘든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소서노와 주몽의 결혼이라는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우리는 상당한 혼란에 빠진다. 이 기록상에 나타난 등장인물 가운데 존재가 확인되는 사람은 AD 2세기 인물인 우태(울구태)와 소서노인데 소서노와 주몽의 사랑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고구려의 건국 연대가 AD 2세기 후반 ~ AD 3세기 초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고구려는 3세기 쯤에 이르면 이미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중원의 강력한 지배자인 위나라와 일전을 겨룰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우태(優台,于台)는 원래 부족의 우두머리 의미였는데 일반 행정을 담당하는 관직명으로 부여,고구려에서 사용됨]  


당시 고구려의 세력 변화 과정을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보면 이 점을 확연히 알 수 있다.

『한서(漢書)』에는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징발하여 오랑캐들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고구려인들이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고구려인들을 강박하자 그들은 오히려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 …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오히려 피살되었다( 한서 권99 왕망전 시국4년『漢書』卷99 「王莽傳」始國四年).” 라는 기록이 있어 고구려가 이미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 때가 BC 1세기말이다. 또 같은 기록에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로 '예맥'을 사용하고 있다.

『후한서』에는 “(AD 118년) 고구려 왕이 마한과 예맥 등의 기병을 이끌고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왕은 왕자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후한(後漢)의 주군 군사들과 함께 고구려 군을 격퇴하였다(『後漢書』卷115).”라고 하는데 이 기록은 그대로 『삼국사기』에 나타나고 있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大祖大王). 고구려가 강력한 세력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AD 238년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가 공손강?공손연를 정벌할 당시 고구려는 사마의?관구검의 위나라 군대와 공조하여 공손씨(연나라)를 멸망시켰다. 238년 당시 공손강(공손도의 아들)?공손연 부자와 그의 혈족 대부분 참수당했다.

연나라가 멸망한 후 고구려는 신속히 요동으로 진출하여 자주 위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AD 242년 고구려 동천왕은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하여 위나라와 대치하고 한반도 남부지역도 경략한다. 이것이 결국 위나라 - 고구려의 요동전쟁(AD 246)으로 나타난 것이다. 고구려는 한때 수도가 함락당하는 국가적 위기에 처했으나 밀우, 유옥구, 유유 등의 영웅적인 투쟁으로 한족(漢族)의 위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수도를 탈환하였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東川王).

당시 위나라 군대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을 가진 국가라고 할 수 있는데 고구려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굳건히 대치함으로서 한족(漢族)의 침략으로부터 요동과 만주를 보호했던 것이다.


[백제 고이왕, 우태]

한국에서 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흔히 “마한의 한 군장국가인 백제국(百濟國)으로부터 발전하여 기원 전후에 초기국가를 형성한 백제는 3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대국가를 이룩하였다. … 3세기 중엽 고이왕(古?王 : 234~286) 대에 이르면 대외적으로 정복사업을 활발히 하고 대내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 이에 백제는 고이왕 때에 이르러 광대한 정복국가를 이루고 고대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던 것이다. 『주서(周書)』나 『수서(隋書)』에서 백제의 시조를 구이(仇台)라고 하는데 이 구이는 바로 이 고이(古?)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이왕대에 백제의 시조적인 발전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변태섭 『한국사통론』79쪽].” 라고 배워왔을 것이다. 위의 서술은 한국 사학계가 말하는 일반적인 성과를 모아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즉 AD 3세기 중엽 백제는 고이왕 대에 이르러 전반적인 체제 정비가 있었으며 바로 구이(仇台 ) 또는 구태(仇台)라는 분 즉 부여왕 울구태(우태)가 백제를 건설한 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분이 우리가 알고 있는 드라마 ‘주몽’의 우태이다.
(*주 台는 '태', '대', '이'로 읽을 수 있다.)

백제의 왕실 계보를 보더라도 무언가 심각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만 보더라도 백제는 ① 온조왕 - ② 다루왕 - ③ 기루왕 - ④ 개루왕(128~166) - ⑤ 초고왕(166~214) - ⑥ 구수왕 - ⑦ 사반왕 - ⑧ 고이왕(236~286) 등으로 일목요연하게 왕위계승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고이왕의 경우는 전혀 납득하기 어렵다. 즉 고이왕은 사반왕의 아들이 아니고 전혀 엉뚱하게 ④ 개루왕(128~166)의 둘째 아들이자 초고왕166~214)의 아우로 한참 올라가 버린다. 그러면 고이왕의 수명이 거의 1백 50살은 되어야 한다. 심각한 정치변화가 백제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2권 참고).         

그런데 고이왕의 즉위원년(236)은 위나라 황제 조예가 공손연의 토벌을 명한 해이고 그 이듬해(237) 위나라 명장 관구검(?丘儉 : ? ~255)은 요동 입구인 요수로 출병했으나 가을장마 때문에 부득이 철군했다가 238년 사마의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서 공손연을 토벌하고 공손연의 남은 가족과 고위 인사 또는 장수들을 색출하여 70여 명을 참형에 처한다. 이로써 공손연의 사돈인 요동부여(남부여)도 거의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공손씨와 결혼동맹을 맺은 부여왕 울구태 세력은 요동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나라의 침공에 대해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울구태(蔚仇台)의 남부여(요동부여)는 미래를 대비하여 상당한 세력이 2십년 이상 한반도쪽으로 내려갔을 가능성이 크다(AD 228[?]년 연나라 내부의 정변도 있어 이것도 부여계의 이동을 촉진했을 것이다). 이 때만 해도 압록강 하구를 고구려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하(南下)에는 큰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고이왕대(236~286)에는 여러 가지 제도의 정비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도 있겠지만 남부여에서 시행되던 많은 제도들이 반도부여에 그대로 이식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국 백제(百濟)는 사실은 부여의 분국(分國), 남부여(南扶餘)라는 것이다. 백제왕들은 일관되게 부여의 시조이신 동명왕(東明王)에 제사를 지내고 있고 개로왕(蓋鹵王 : 455~475)이 북위의 황제에게 보낸 국서(473)에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그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옛 정의를 돈독히 존중 하였습니다”라고 하고 있다(『삼국사기』).

더욱 중요한 점은 북위의 사서인 『위서(魏書)』이전의 중국의 역사서 예를 들면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진서(晋書)』『삼국지(三國志)』등을 보면 백제(百濟)가 나오지 않고 부여(夫餘)라고만 나온다. 즉 중국의 여러 역사서들 가운데 백제와 동시대에 가까운 기록들인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진서(晋書)』등에는 백제(百濟)라는 말이 없다.

중국 사서들 가운데 백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서가 바로 5세기 중반 남북조 시대 『송서(宋書)』인데 여기서 말하는 송나라(420~478)는 사마씨의 동진(東晋)을 이은 한족의 왕조이다. 그리고 이 『송서(宋書)』를 포함하여 『남제서(南齊書)』『위서(魏書)』등에는 백제가 등장한다. 따라서 적어도 AD 5세기 중엽까지도 백제보다는 부여로 인식했다는 말이거나 아니면 백제가 현실적으로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미한 소국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6세기에 이르러 백제는 다시 남부여(538 : 성왕 16년)로 바뀐다. 실제로 백제라는 말이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1백년도 채 안된다는 말이다.

즉 부여의 시조와 백제의 시조가 같다는 말이고 다만 그 중시조(中始祖)는 울구태(蔚仇台)이며 반도에 일찍 남하했던 무리들이 온조와 비류라는 것이다. 후일 이들이 요동과 만주지역의 부여세력과 연합하여 부여계의 국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 우리가 아는 대국 백제의 실체이다. 이것을 확인하게 하는 기록이 『삼국사기』(제사편)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 이르기를 백제는 매년 사중월(四仲月: 2, 5, 8, 11)에 왕이 하늘과 5제(五帝)의 신을 제사한다. 그 시조 구태(仇台 : 또는 우태)의 묘(廟)를 나라의 도성(都城)에 세우고 4계절로 제사한다고 하였다[생각건대 『해동고기(海東古記)』에는 시조 동명(왕)이라 하고, 혹은 시조 우태(優台 또는 우이)라 하였으며, 『북사(北史)』 및 『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왕)의 후손으로 구이(仇台)라는 이가 있어 나라를 대방(帶方)에 세웠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시조를 구태(仇台 또는 구이)라 하였다.](『三國史記』雜志 祭祀)”

『삼국사기』의 편찬자는 다른 것은 혼돈스럽지만 백제의 시조가 동명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백제는 부여와 다르지 않은 나라라는 것이다(이 점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고구려도 고씨 부여라고해도 될 것이다). 그러면서 동명왕에 대한 제사와 부여왕 울구태(구태 또는 우태)에 대한 제사는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잡지 제사조에 보면, 백제의 경우 대개 동명제를 왕의 즉위시 처음으로 맞는 새해 정월에 지내는데 이것은 태양신(조국신 : 조상신)에 대한 제사를 의미하는데 반하여, 실질적인 시조인 구태제는 1년에 네 번을 지내고 있다.


출처; 김운회(동양대 교수) 블로그 "역사카페"(다음)

참고 : 졸저 『대쥬신을 찾아서』(해냄 : 2006) 제 2 권
16. 백제는 없었다.
17.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 네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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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와 공손도], [발기와 공손도]

[출처] 우리역사의 비밀 www.coo2.net 게시판 정성일 (2007-03-19 16:53:23, Hit : 1243, Vote : 54)

북사와 수서에 의하면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구태는 누구인지 추적해야 겠습니다.
'구태'왕을 알려면 '공손도'를 알아야 합니다.
삼국지 '공손도'전을 읽어도 '구태'라는 사람이 없는데 북사와 수서의 내용이 잘못 된 것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 고국천왕, 산상왕시기의 '발기'라는 사람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국천왕, 산상왕 시기의 '발기'는 고구려의 왕위를 이어야 할 적장자이면서도 불초하다는 사유로 왕위을 잇지 못하고 동생들에게 왕위를 빼앗깁니다.
두번씩이나 왕위를 빼앗긴 불초한 사유란 구태와 발기가 동일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 공손도는 부산의 적(부여)을 공격하여 몰아내는데 부여가 또 다시 나타나는 것은 공손도의 사위인 '발기'가 그 땅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발기가 고구려와의 싸움에 패하고도 비류수 강가에 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역학관계 때문입니다.
고국천왕 사후 동생 연우가 산상왕에 즉위하자 '발기'가 공손도에게 병사 3만을 빌려 고구려를 쳐들어 가지만 패하고 왕의 동생 '계수'가 왕을 죽이지 않고 자살하도록 하지만 '발기'는 자살하지 않고 공손도의 배려로 대방고지로 이동합니다.
후한서의 '부여'왕이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왕의 선조라는 말이 없습니다..

고국천왕과 산상왕 시기의 발기는 음이 같지만 한자가 분명이 다른 것으로 삼국사기는 적고 있습니다. 산상왕 즉위년 발기는 공손도에게 병사3만을 빌려 고구려을 침입해 동생 계수에게 패배해 배천에서 자살하고 발기가 자살하자 계수가 슬피 울고 시체를 묻어 주었다는 내용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서 대로만 해석해서는 진실을 발견하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저의 주 관점은 '공손도'와 '구태', '공손도'와 '발기'가 유사한 상황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네티즌 자유게시판에 게시하였으니 참고하시고, 끝으로 안파견ㅋ님의 의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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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노가(涓奴加)와 소수맥(小水貊); 발기와 공손강】

개국 2530(197)년 5월, 고려는 고국천왕이 붕어하자 제위 계승 다툼으로 큰 내란에 휩싸인다.

1-a. (故國川王) 十九年, 中國大亂, 漢人避亂來投者甚多, 是漢獻帝建安二年也. 夏五月, 王薨.
-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故國川王)
(고국천왕) 19년, 서토가 대란하여, 많은 토인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에) 귀순하여 왔는데,
이 때가 서토 유한국주 협 건안 2년이다. 5월 여름에 왕이 붕어하다.

1-b. 山上王, 諱延優(一名 位宮), 故國川王之弟也.... 故國川王之薨也, 王后于氏 秘不發喪,... 至翌日
質明, 矯先王命, 令群臣, 立延優爲王. 發岐聞之大怒, 以兵圍王宮,... 延優閉門三日. 國人又無從
發岐者. 發岐知難, 以妻子奔遼東. -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山上王)
산상왕의 이름은 연우(일명 위궁)요, 고국천왕의 아우이다.... 고국천왕이 붕어하자 왕후 우씨는
발상을 비밀에 부치고... 이튿날 날이 샐 무렵 선대왕의 유명이라 속여, 군신으로 하여금 연우를
세워 왕으로 삼게 하였다. 발기는 (연우가 거짓 유명으로 제위에 올랐음을)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들로 왕궁을 에워쌌다.... 연우는 3일동안이나 궁문을 닫아 지켰고, 국인들도 발기를 따르지
않으니, 발기는 자신의 처지가 어려움을 깨달고, 처자를 데리고 요동으로 도망하였다.

이 발기의 난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산상태왕 원년에 일어나, 개전 초기 발기의 친위군이 국내성을 3일
동안이나 포위 공격하는등 크게 위세를 떨쳤으나, 이후 또 다른 아우 계수가 이끄는 정부군에 의해
점차 진압 되어 갔으며, 발기는 결국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자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고 한다.

2-c. 伯固死, 有二子, 長子拔奇, 小子伊夷模. 拔奇不肖, 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建安中,.. 拔奇怨爲
兄而不得立, 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 還住沸流水.- (三國志 魏書 高句麗傳)
(신대왕) 백고가 죽으니 두 아들이 있었다. 장자는 발기요, 소자는 이이모라 했다. 장자 발기가
불초하니 국인들은 이이모를 공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건안 중에.... 발기는 형으로써 제위에
오르지 못함을 원망하여, 연노가와 더불어 각각 장수와 하호 삼만여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
투항하고, 비류수에 돌아와 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발기의 반란에 가담 했던 연노가涓奴加(통전에서는 소노가消奴加)를 주목하게 된다.
연노가는 연노부의 커칸(大加=大韓)으로 수장(王.侯)을 의미하며, 연노부는 고려를 구성하는 5개 지방
행정구역의 하나이다.

3-d.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 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 (삼국지 위서 부여전 三國志 魏書 夫餘傳)
공손도가 해동을 점거하고 그 새력을 넓히자, 부여왕 위구대(위구태,위구이)는 요동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고려와 선비가 강성하여, 공손도는 부여가 두 나라 사이에 있으므로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부여를 백제와 연결하여 서술한 글이 다수 있다.)

공손도가 요동에 웅거한 때는 개국 2522(189)년으로 이 시기에는 고려와 선비가 강성하여 계속된 출병과
요동제민의 항거로 사실상 요동전역이 황폐화 하였는데, 공손도가 요동출신 군벌로써 요동을 장악하고,
아울러 요동제군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무렵 뜻밖에 고려에 내전이 발생하여 발기와 연노부의 수장이
고려 정부군에 쫓기어 피신하여 오니 공손도가 대희하여 그 딸(종녀)를 연노가에게 준 듯 하다.

3-e. 建安中, 公孫康出軍擊之, 破其(高麗)國, 焚燒邑落.- (三國志 魏書 高句麗傳)
건안 중에 공손강은 군대를 보내어 (고려를) 침략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3-f. 建安 中, 公孫康 分屯有縣以南荒地 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 (三國志 魏書 韓傳)
건안 중에 공손강이 둔유 이남의 황폐한 땅을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고 공손모, 장창등을 보내어
유민들을 블러 모으고, 군대로 한예를 벌하니 옛 백성 들이 차츰 다시 돌아왔다.

요동군의 고려 침략과 대방군 설치는 공손강이 그 아비 공손도의 뒤를 이어 요동을 차지한 개국 2537
(204)년 이후의 일로 보인다. 발기의 군은 요동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에게 대패하여 발기는
자결하고 연노부는 고려 조정에 투항하여 고향인 비류수로 돌아간듯 하다. 공손강은 비록 뜻한 바는
얻지 못하였으나, 고려 내분을 이용하여 낙랑내 대방 지역을 차지한듯 하다.

4-g. 有小水貊. 句麗作國, 依大水而居, 西安平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依小水作國, 因名之爲
小水貊. - (三國志 魏書 高句麗傳)
소수맥이 있다. 고려는 대수에 의거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서안평 북쪽에 소수가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의 다른 족속이 이 소수에 나라를 세워, 그로인해 소수맥이라 하였다.

발기의 반란군이 공손도에 투항하고 요동의 지원군을 얻어 재차 고려를 치기까지 요동에 다년간 거하
였는데 혹 이들이 요동 서안평 소수가에 주둔하여 이들을 일컬어 소수맥이라 불렀는지 모르겠다.
(삼국지에 소수맥을 왕망 이전의 사실로 기록하여, 혹자는 소서노의 비류 백제라 하고,혹자는 동부여
대소의 이제가 세운 갈사국이라고도 하여,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서울.호남.일본지역의 전방후원분과 구태백제


근초고왕 세력은 남하한 부여족(구태백제)이다

 
구태백제는 광개토태왕비에 '이잔'와 '왜'로 기록되어 있고, 온조백제(비류백제와 통합)는 [백잔]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광개토태왕비에 따르면 광개토태왕은 백제한성과 웅진(공주)을 중심으로 충청도지역을 수군으로 공격하고 속리산에서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백제한성은 온조백제세력의 중심지고, 웅진은 구태백제세력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구태백제는 웅진을 중심으로 전라도지역과 일본열도를 복속시켰고, 한성백제까지 반강제적으로 통합하여 백제가 본격적으로 정복전쟁에 나서는 근초고왕때부터 온조백제계에서 구태백제계로 왕조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근초고왕부터 강력한 정복국가의 특성이 나타나고 백제왕의 성씨가 부여씨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참고로 『삼국유사(북부여)』의 기록에는 “古記(고기)에 이르되 전한서에 宣帝(선제) 신작 3년 임술 사월 팔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 : 대요(大遼) 의주(醫州) 경게지역임]에 내려와서 오룡거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을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해모수(解慕漱)라 이름하였으며 아들을 낳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 : sun)로 씨(氏)를 삼았다.”고 한다.

  더구나 이후 백제의 정치조직 안에는 유목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직제(좌·우현왕제)라든가 ‘어라하’, ‘건길지’ 같은 북방 유목민 계열의 호칭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본다면 백제는 부여의 분국 또는 남부여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특집3], [특집4] 참고).  
 
중국문헌은 구태백제에 대해 고두막한의 후손으로 부여왕이며, 대방(황해도)에 구태백제를 개국하고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했다. 즉, 「북사」와 「수서」를 인용하면, “동명(고두막한=졸본부여 개국=북부여 5대 단군)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탁이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그리고 무덤양식도 일본의 인덕왕릉과 서울 강동지역의 고분군들의 무덤양식(전방후원분)은 북방유목민족의 무덤양식으로 동일하다. 서울 석촌동 무덤양식은 고구려의 적석총양식으로 온조백조계 무덤양식임을 알 수 있다.따라서 서울강동지역의 무덤양식이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것은 온조백제를 통한 강력한 북방기마민족이 남하하여 일본열도까지 정복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서울 강동지역의 무덤양식(전방후원분)이 마한지역에 해당하는 전라도 지역과 일본열도에 분포되어 있는 이유다. 근초고왕계로 교체된 백제가 강력한 기마군대로 마한과 가야,일본열도를 복속시켰음을 말해주는 것이다[윤복현]. 


세계 최대 규모의 서울 강동지역의 전방후원고분-일본 전방후원분의 원형이다.
무덤양식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구려무덤양식인 서울석촌동 적석총무덤양식의 세력에서 전방후원분 무덤양식의 세력으로 백제의 왕권이 교체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온조백제계에서 구태백제계로 교체되었다는 증거다.
 

[전라도 지역에 많이 분포된 전방후원분]

구태백제계로 교체된 근초고왕의 마한정복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사학자들은 일본 인덕왕릉의 무덤형태가 전라도에서 발견되니 일본이 지배한 흔적이라고 왜곡하나, 이미 서울 강동지역에서 그 원형이 발견된 이상 인덕왕릉의 주인들 또한 고대 백제세력임이 입증된 것이다.


 
[무덤양식자료보기
http://blog.daum.net/hanquk/682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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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쥬신]일본은 부여족의 나라( 김운회 동양대 교수)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미스테리는 진구황후(神功皇后)와 오우진천황(應神天皇 : 진구황후의 아드님)에 관한 것이다. 진구황후와 오우진천황은 일본 역사의 여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구황후의 업적은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구황후는 실존인물로 볼 수 없는 가공의 인물이며 다른 사람의 업적으로 일본에서 창조된 인물이다. 결국 근초고왕이 진구황후의 탈을 썼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면 일본의 실질적인 초대천황(오우진천황)은 근초고왕의 아드님이거나 처남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일본 최초의 통일 국가는 4세기 경의 야마도(大和) 왕국으로 그 시조는 호무다(品陀) 즉 오우진(應神)천황이다. 도쿄대학의 이노우에미쓰싸다(井上光貞) 교수는 “오우진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한다[井上光貞 『日本國家の起源』(岩波書店 : 1967)]. 따라서 오늘날 일본은 오우진 천황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흔히 일본인들이 야마도 정신(일본 정신) 또는 야마도의 혼(魂)이라고 하는 그 정신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진구황후가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까지 정벌해서 조공을 받을 만큼 대단한 인물로 기록되어있다(그러나 진구황후가 활약한 시기를 비교해보면 다른 사서에서는 진구황후에 대한 기록이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구황후 49년에 진구황후가 이라다께 목라근자 등을 보내어 탁순국(卓淳國 : 대구)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고 남가라(南加羅 : 김해), 비자현(比自炫 : 창녕), 녹국(㖨國 : 경산), 안라(安羅 : 함안), 다라(多羅 : 합천), 탁순(卓淳 : 대구?), 가라(加羅) 등의 7개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고해진(古奚津 : 강진?)과 제주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근구수왕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비리(比利 : 완산), 벽중(辟中 : 김제) 등의 4읍도 항복하였다.

  그런데 이 업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하는데다 이 시기가 백제(남부여)의 세력이 현재의 경상도 지방에 미친 시기이고 이들의 집결지가 낙동강 상류로 알려진 탁순(대구?)이라는 점도 진구황후의 업적이 근초고왕의 업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백제의 위치와 백제의 멸망


[신당서(新唐書)]에서 백제의 위치를 기록하기를

直京師東六千里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직경사동육천리이영빈해지양 서계월주 남왜 북고려 개유해내지 기동신라야)

해석하면"백제는 경사(당나라 수도)에서 동쪽으로 6천리 남짓한 바닷가 양지쪽에 위치하는데, 서쪽은 월주, 남쪽은 왜, 북쪽은 고려(고구려)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이들 나라모두 바다를 건너야 간다. 그리고 동쪽은 신라이다."
 
즉, 국경은 중국의 월주지역,일본열도, 북쪽의 고구려와 경계하고 있는 백제는 당나라 수도에서 동쪽으로 6천리 정도가면 바닷가(서남해)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고, 백제 동쪽(경상도)으로 신라가 위치한다는 소리다.
 
또한,『구당서』에서 백제영역을 이르기를 “백제국은 동북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까지 이르고 있다(『舊唐書』卷 199 上 「列傳」第149 東夷)”라고하여  부여 세력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과 중국까지 진출했음을 뜻한다.
 
[구당서]의 기록은 동명(고두막한)의 후손으로 만주에서 남하하여 온조백제를 통합한 후 마한과 일본열도를 복속하고 해상제국으로 성장하여 결국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는 구태백제의 영토를 두고 하는 말이다.
 
또한 기록에 "서쪽은 바다를 건너"했으니, 중국대륙에서 백제가 개국했다는 소리는 헛소리며, 한반도3한이 존재한 당시에 기록한 [삼국지-동이전]이나 [한단고기]의 기록에 의거, 이미 마한54개국의 하나였던 백제(온조백제)에서 출발했고, 구태백제가 남하하여 온조백제를 통합했기 때문에 마땅히 백제본국은 한반도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하겠다.

한반도(백제본국)을 중심으로 중국.일본.동남아에 이르는 22백제담로 
중국영토는 동성왕이 시해당한 이후 친 동성왕계 제후들이 고구려에 복속하여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백제 22담로]-담로제도는 복속지역에 대한 통제력 강화와 지역의 생산물 수취를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근초고왕때부터 담로제가 본격화되어 영역을 분정하고 지방관을 파견해 각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였다.
담로제는 한성시대에서 웅진도읍기까지 시행되었고, 영역의 신축에 따라 가감이 있어 웅진도읍기에는 22담로가
있었다. 담로에는 단군조선시대처럼 왕족을 파견해 다스리게 하였다.


담로제는 사비시대에 방·군·성(현)제[城()制〕로 재정비되었다. 이것은 중앙집권력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방이라는 광역의 행정구역이 만들어졌다는 것과 성(현)의 수가 크게 증대된 것을 들 수 있다. 웅진도읍기의 22담로제와 비교할 때 행정구역의 수가 대폭 증대된 것이다.
 


비문해석"대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하고 새긴 비"-백제본국이 한반도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백제 수도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소정방이 새긴 백제 정벌비 

백제본국 후기수도-부여
 
당나라 수군의 백제정벌
 
<신라 본기 제 5 태종무열왕의 본문 해설,삼국사기>

3월 唐高宗(당고종)은 좌무위대장군 蘇定方(소정방)을 神丘道行軍大摠管(신구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고 金仁問(김인문)을 副大摠管帥(부대총관수)에 左驍衛將軍(좌효위장군) 劉伯英(유백영)등은 水陸軍(수육군) 13만명으로 백제를 토벌하는 勅書(칙서)를 내리시니 王(무열왕)은 우夷道行軍摠管(우이도총관)이 되어 장병으로 하여금 聲援(성원) 하였다 여름 5월 26일 왕은 金庾信(김유신), 眞珠(진주), 天存(천존)등을 서울에서 장병을 출동시켜 6월 18일 南川停(남천정:경기도 이천)에 도착하였다. 蘇定方(소정방)은 萊州(래주:산동성 액현)에서 출발하여 船舶(선박:배)을 띄워 천리의 물길을 따라 동쪽(한반도 서해)으로 내려왔다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백강에서 벌어진 당나라와 싸운 백제부흥전쟁 


만주를 당나라에 넘기고 대동강이남에 그친 신라의 반민족적 통일 


당나라가 한반도까지 삼키려들자, 백제.고구려유민과 합세한 신라와 당나라 전쟁

[결국 당나라를 끌어들인 신라의 반민족적 통일전쟁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다]

[출처 네이버 지식] 구태백제는 누가 주장하였고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비공개 답변채택률 0%   2006.08.10 1:06

 
질문자인사 답변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요

 

구태백제설은 1997년에 재야사학자 한순근님에 의하여 처음으로 제기되었고,  이 학설에 동조하는 사학자는 강단사학자는 한분도 없고 재야사학자 몇분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 원광대학교만 한순근님의 학설을 교내 인터넷에 올려 소개해 준 적이 있는 정도입니다.             이 학설은 기존의 사학자들이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중국의 사서에 백제의 시조로 적혀 있는 구태를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 우태와 동일시 하거나 또는 백제 고이왕과 동일시 하였으나, 사서 내용과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생겨난 학설입니다.

 

종전의 학설은 구태는 우태라고 보았으나, 비류, 온조는 기원 전후에 걸쳐 생존한 인물인데 반하여 구태는 2세기가 되어야 비로소 나타나는 인물이고 부여왕으로 나오기 때문에 우태와 생존시기나 역할이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존시기상의 차이점을 극복하고자 고 이병도님은 3세기 초에 존재한 백제 고이왕이 바로 구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제 고이왕은 백제 왕 중 하나이지 백제의 시조라는 내용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종전에 주장한 백제사 학자들의 이 같은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순근님은 중국의 정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 있는대로 구태는 백제의 시조 중 하나이고, 공손씨가  한반도에 대방군을 설치하고 韓倭를 통제하기 위하여 만주에 있던 부여 무리를 한반도 서,남부로 이동시키면서 기존의 마한, 백제를 정복하면서 생겨났고, 이 나라가 기존의 온조백제와 마한을 점령하고서도 마한과 온조백제를 계속 존속시키되 후왕을 보내거나 담로를 보내어 실질적인 통치를 하고 나라 이름은 남부여 또는 종전처럼 백제로 불렀다고 주장합니다.           이 학설은 당시 중국정사와 고구려, 모용씨, 진,우문씨, 단씨, 백제의 외교상 역학관계를 연구하여 내린 결론이나, 강단사학계는 선듯 이를 받아들이지 못아고 있습니다.

 

구태백제 학설은 한순근님이 지은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십시요.  

-경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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仇台百濟(仇台百濟:일명 南夫餘 또는 伊國)

[광개토왕비문에는 구태백제가 "이잔(伊殘)" 또는 "왜(倭)"로 적혀 있다. 구태백제는 언제 건국되었고, 부여 무리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우도록 공손씨(公孫氏)가 도운 것은 무슨 이유인가? 구태백제가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된 배경은 무엇인가?]

 

1). 개설

 

구태백제는 부여왕(夫餘王) 위구태(尉仇台)가 부여 무리를 거느리고 한반도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이다. 흠정만류원류고(欽定滿流原流考)에는 당회요(唐會要)를 인용하여 백제는 본래 부여(夫餘)의 별종(別種)이고,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었는데 고구려에 패하자 백가(百家)를 이끌고 건너왔다고 하여 백제(百濟)라 부르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또 책부원구(冊府元龜)를 인용하여 구태(仇台)의 성(姓)이 위(尉)로 적혀 있고, 통고(通考)를 인용하여 백제(百濟)는 후한말(後漢末) 부여왕(夫餘王) 구태(仇台)가 세운 나라라고 적혀 있으며, 삼국지(三國志)나 북사(北史), 수서(隋書) 등에는 구태(仇台)가 후한(後漢) 말(末) 경의 인물이라고 적혀 있다.

 

「冊府元龜晉簡文帝咸安二年正月百濟遣使貢方物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按百濟爲夫餘王尉仇台之後故以夫餘爲姓.後略) 通考百濟卽後漢末夫餘王仇台之後..後略」「唐會要 百濟本夫餘之?種 當馬韓之故地 其後有仇台者 ??麗所破 以百家濟因號百濟 東北至新羅」欽定滿流原流考 卷三 部族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태(仇台)가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백제를 세웠다고 적혀 있다. 이 대방고지는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A.D 204년경에 지금의 항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이다. 일부 사학자는 이 대방고지(帶方故地)를 북경 동쪽 계(?) 동쪽 방면 또는 남만주(南滿洲) 금주(錦州) 방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태백제가 세워진 대방고지는 후한(後漢)이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한 지금의 항해도 지방이지 계(?) 동쪽 방면이나 남만주 금주 방면이 아니다.

위구태(尉仇台)가 세운 구태백제는 후에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중국의 사서에 요서지방(遼西地方)과 중국동해안지방(中國東海岸地方)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고 적혀 있는 백제는 구태백제이다. 일부 사학자는 비류백제(沸流百濟)와 구태백제를 혼동하여 요서지방(遼西地方)과 중국동해안지방(中國東海岸地方)으로 진출한 백제를 비류백제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사(北史)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등에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고 적혀 있는 백제는 비류백제가 아니고 구태백제이다.

 

2). 건국 경위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적혀 있는 구태백제(仇台百濟)에 관한 문구를 살펴본다.

「북사 및 수서에도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仇台)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요동태수 공손탁이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위 문구에 의하면 백제(百濟)의 시조(始祖) 구태(仇台)는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의 사위였다.

그렇다면 구태(仇台)는 어떤 인물인가? 

중국의 사서(史書)와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를 대비하면 백제(百濟)의 시조(始祖) 구태(仇台)는 부여왕(夫餘王) 위구태(尉仇台)이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始立國於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東夷?國.」 北史 列傳第八十二 百濟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차츰 강성해져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東明之後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於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東夷?國.」隋書 列傳第四十六 百濟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내속하였다. 후한 말에 현도태수 공손탁이 요동 땅을 넓히니 바깥의 오랑캐들이 무서워하며 복속하였다. 부여왕 위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내속하였다. 때에 고구려와 선비가 강하였는데, 공손탁은 고구려와 선비 사이에 있는 부여에 종녀를 처로 주었다. 夫餘本屬玄?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 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 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三國志 魏志 東夷傳 卷30 夫餘 [註 三國史記 百濟本紀, 隋書, 北史 등에는 公孫度의 딸로 적혀 있고, 三國志 夫餘傳에는 公孫度의 宗女로 적혀 있다.]

 

3) 구태백제(仇台百濟) 건국의 시대적 배경

 

그렇다면 부여왕(夫餘王) 위구태(尉仇台)는 왜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설치한 대방군(帶方軍)으로 이동하여 백제를 건국하고 백제의 시조가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한(漢) 나라의 고구려 포위전략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A.D 44년에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는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하기 위하여 청천강(淸川江) 이남 지방을 점령하여 그곳에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 몇 년 뒤 A.D 48년에 후한(後漢)은 고구려 북쪽에 있는 부여(夫餘)와 통교(通交)하여 부여를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시켰다. 

고구려는 이에 보복하여  A.D 49년에 선비(鮮卑)와 같이 후한(後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지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모본왕 2년(A.D 49년) 봄 장수를 시켜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다. 요동태수 채동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二年春 遣將襲漢 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동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지가 고구려에 점령되므로써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및 청천강(淸川江) 이남 지방에 설치되었던 낙랑군(樂浪郡)은 모두 소멸되었다.

그후 A.D 104-106년경에 후한(後漢)은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지방을 다시 점령하여 한군현을 재건하였고, 고구려가 재건된 한군현을 공격하자 A.D 120년에 부여왕(夫餘王)은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후한(後漢)에 보내어 한(漢).부여(夫餘) 동맹(同盟)이 결성되었고, 부여(夫餘)는 이 동맹에 따라 고구려가 한군현(漢郡縣)을 공격하였을 때 왕자(王子) 위구태(尉仇台)와 군사 2만 명을 보내어 한(漢) 나라를 도왔다.

 

「태조대왕(太祖大王) 69년(A.D 121년) 12월 왕이 마한, 예맥의 1만여 기병과 같이 현도을 포위하니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 한병과 합력하여 막아 싸워 왕군이 대패하였다. 十二月 王率馬韓.濊貊一萬餘騎 進圍玄?城 扶餘王遣子위구태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그 뒤 A.D 136년에는 부여왕(夫餘王)이 후한(後漢)을 방문하여 동맹관계를 강화하였고, A.D 190년경에 공손탁(公孫度)이 요동(遼東)을 장악하였을 때 위구태(尉仇台)는 요동군(遼東郡)에 내속(內屬)하였다. 공손탁(公孫度)은 부여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공손탁(公孫度)의 딸(종녀?)을 위구태(尉仇台)의 처(妻)로 주었다.

그후 후한(後漢)은  부여(夫餘)와 같이 고구려(高句麗)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후한(後漢)과 부여(夫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고구려(高句麗)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다. 후한(後漢)은 강성해진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도 포위하기 위하여 A.D 204년에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은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지(荒地)를 점령하여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였다.

 

「건안중에 공손강은 둔유현 이남 황지에 대방군을 두고 공손모와 장창 등을 보내어 유민들을 수집하고, 군사를 일으켜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후 왜와 한 (관련 업무는) 대방군에 속하였다.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 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 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 倭韓遂屬帶方」三國志 

 

이때 후한(後漢)이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한 것은 한(韓)과 예(濊)가 강성(强盛)해져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하기 위하여 청천강(淸川江) 이남 지방에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이 소멸되고 없자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다시 포위(包圍)하기 위한 것이다.

공손강(公孫康)은 대방군(帶方郡)만으로는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包圍)하고 한(韓), 예(濊), 왜(倭)를 통제하는 것이 벅차자 위구태(尉仇台)가 거느린 부여(夫餘) 무리를 한반도로 이동시켜 부여 무리가 한반도를 장악하게 하므로서 부여 무리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하고 한(韓), 예(濊), 왜(倭)를 통제하였다.

위구태(尉仇台)는 공손씨(公孫氏)의 지원을 받아 부여(夫餘) 무리를 이끌고 대방군(帶方郡 : 대방고지)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仇台百濟)를 세우고, 온조백제(溫祚百濟)와 마한(馬韓)을 정복하였다. 구태백제가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夫餘)라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위구태(尉仇台)가 부여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우고 온조백제와 마한을 정복한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초고왕(肖古王) 39년(A.D 204년) 겨울 10월 혜성이 동쪽 우물에 나타났다. 冬 十月 星?于東井」

「초고왕(肖古王) 40년(A.D 205년) 가을 7월 태백이 달을 범하였다. 秋 七月 太白犯月」

 

온조백제 항(項)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초고왕(肖古王) 39년 10월조 문구는 위구태(尉仇台)가 부여(夫餘)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동남쪽 방면 즉 공손강(公孫康)이 항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으로 왔다는 뜻이고, 초고왕(肖古王) 40년 7월조 문구는 위구태(尉仇台)가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하였다는 뜻이다.

구태백제(仇台百濟)의 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태(仇台)가 처음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백제를 세웠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구태백제의 수도는 대방군(帶方郡)에 있지 않았다.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의 시조(始祖)가 구태(仇台)라고 적혀 있고,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는 고마(固麻 : 웅진)에서 다스렸다고 적혀 있으며(治固麻城),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는 수도를 고마(固麻)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號所治所曰固麻). 이를 보면 구태백제의 수도는 웅진(熊津)에 있었다. [註 한원(翰苑) 소인(所引) 괄지지(括地志)에 "國東北六十里 有熊津城 一名 固麻城"이라 적혀 있다. 즉 웅진을 일명 고마성이라 불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구태백제의 건국은 후한(後漢)의 고구려 포위 전략 및 한(韓), 왜(倭) 통제 정책과 관련이 있다.

 

4). 구태백제(仇台百濟) 역사

 

가. 대방고지(帶方故地)로 이동하여 온조백제(溫祚百濟)와 마한(馬韓) 정복

 

위구태(尉仇台)는 A.D 204년 10월에 공손강(公孫康)이 지금의 항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 : 帶方故地)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仇台百濟)를 세운 후 다음해 7월에 온조백제(溫祚百濟)와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정복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온조백제는 초고왕(肖古王) 이전에는 왕 명칭이 "0婁王"이다가 초고왕 때부터 갑자기 高"나 "仇"가 들어가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는 초고왕 때 온조백제의 왕통(王統)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 영락(永樂) 6년조에는 구태백제(仇台百濟)가 "伊殘(이잔)" 또는 "倭(왜)"로 비하(卑下)되어 적혀 있고, 百殘(백잔 : 온조백제 지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부여 무리의 대방군 이동

 

나.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과 형제(兄弟)의 나라가 됨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과 온조백제(溫祚百濟)를 정복한 구태백제(仇台百濟)는 온조백제 초고왕(肖古王) 재위시기에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과 형제의 나라가 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천황본기(欽明天皇本紀) 2년조에는 임나(任那 : 대마도)의 왜(倭)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 구수왕(仇首王) 재위시기에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고 적혀 있다.

 

「흠명천황 2년 가을 7월 백제는 안라일본부가 신라와 더불어 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 나솔 비리막고, 나솔 선문, 중부 나솔 목리매순, 기신 나솔 미마사 등을 보내어 안라에 가서 신라에 온 임나의 집사를 소환하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안라일본부의 하내직이 신라와 내통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왕은 임나에게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 귀수왕이 당시의 한지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서 형제가 되었다. 이에 나는 그대를 자제로 알고 그대는 나를 부형으로 알았다". 같이 천황을 섬겨 강적에게 항거하였다.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집안을 온전히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선조가 전의 한지와 화친할 때 한 말을 생각하면 해와 같이 밝은 바 있다. 이후 이웃과 화친을 닦아서 이웃나라에 후하게 하였다. 秋七月 百濟聞安羅日本府與新羅通計 遣前部奈率鼻利莫古 奈率宣文 中部奈率木리昧淳 紀臣奈率彌麻沙等(紀臣奈率者 盖是紀臣娶韓婦所生 因留百濟爲奈率者也 未詳其父 他皆效此也) 使于安羅 召到新羅任那執事 謨建任那 別以安羅日本府河內直 通計新羅 深責罵之(百濟本記云 加不至費直 阿賢移那斯 佐魯麻都等 未詳也) 乃謂任那曰 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 與故旱岐等 始約和親 式爲兄弟 於是 我以汝爲子弟 汝以我爲父兄 共事天皇 俱距强敵 安國全家 至于今日 言念先祖 與舊旱岐 和親之詞 有如교日 自玆以降 勤修隣好 遂敦與國

 

야마대연맹과 형제의 나라가 됨

 

 

다. 7개 가야국(加耶國)을 평정하고 4읍(邑)을 항복 받음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본기(神功皇后本紀) 49년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기(奈解尼師今紀) 13년조에 의하면 구태백제(仇台百濟)는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과 온조백제 군사를 동원하여 7개 가야국을 평정하고 4읍(邑)을 항복받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은 A.D 249년이 되나, 이 사건은 초고왕 (~A.D 214년) 재위 시기에 일어났으므로, 실제 이 일이 일어난 시기는 A.D 208년경이다.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 황전별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았다. 구저 등과 같이 군사를 정돈하여 탁순국에 건너가서 장차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때에 어떤 사람이 "군사가 적으면 신라를 깨칠 수 없다. 다시 사백과 개로를 보내어 군사를 증가할 것을 청하여라"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목라근자와 사사노궤[原註 이 두 사람은 성을 알수 없는 사람이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에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백과 개로와 함께 가게 하였다. 모두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서 파하고 비자화본, 남가라, 록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가서 남만의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때 그 왕인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사를 끌고 와 모였다.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4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四九年 春 三月 以荒田別.鹿我別爲將軍 則與久?等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新羅 更復奉上沙白.蓋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沙沙奴?[是二人不知其姓人也但木羅斤資者百濟將也] 領精兵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火本.南加羅.喙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 仍移兵西廻至古奚津 屠南蠻 ?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 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 比利.?中.布彌支.半古四邑 自然降服」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13년(A.D 208년) 봄 2월 서방의 군.읍을 순시하고 열흘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여름 4월 왜인이 국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았다. 十三年 春二月 西巡郡邑 浹旬而返 夏四月 倭人犯境 遣伊伐飡利音 將兵拒之」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14년(A.D 209년) 가을 7월 포상팔국이 공모하여 가라를 침범하니 가라 왕자가 와 구원을 요청하므로 왕은 태자 우노와 이벌찬 이음을 시켜 육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 구원하여 8국의 장군을 쳐죽이고 포로 되었던 6천 명을 탈환하였다.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註 포상팔국은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勿稽子傳)에는 골포(骨浦 : 마산), 칠포(柒浦 : 칠원), 고사포(古史浦 : 고성?) 등으로 적혀 있고, 삼국유사 물계자조(勿稽子條)에는 보라국(保羅國), 고자국(古自國 : 고성), 사물국(史勿國 : 사천) 등으로 적혀 있다.]

 

A.D 208년경에 일어난 사실이 신공황후본기(神功皇后本紀) 49년조(A.D 249년)에 적혀 있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저자가 왜(倭)가 백제 초고왕 , 구수왕 때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는 것을 은폐(隱蔽)하기 위하여 신공황후본기의 백제 관련 기사를 연도 순서대로 적지 않고 모두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에 늦추어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위 신공황후본기에는 백제와 야마대연맹 연합군이 비자화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록국(록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고 4개 읍을 항복받았다고 적혀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기(奈解尼師今紀) 14년조에는 신라가 (아라)가라를 구원하였다고 적혀 있다. 같은 사실이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勿稽子傳)과 삼국유사 물계자조(勿稽子條)에도  적혀 있다. 이후 5세기 말까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가야 관련 기사가 사라진다. 이는 그 기간 동안 가야가 백제의 세력권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야 방면에서의 공격을 신라의 사가(史家)들이 왜(倭)와 같은 세력인 구태백제를 멸시하여 왜인(倭人) 내지 왜병(倭炳)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가야국 복속시킴

 

 

라. 부여(夫餘)를 백제분국으로 만듬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古?王) 5년조에 의하면 구태백제는 A.D 238년에 장춘(長春) 방면의 부여(夫餘)를 분국(分國)으로 만들었다.

 

「고이왕(古?王) 5년(A.D 238년) 봄 2월 부산(註 부여)으로 사냥 가서 50일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대궐 문기둥에 낙뢰가 있었다. 황룡이 그 문에서 날아 나왔다. 古?王 五年 春 二月 田於釜山 五旬乃返 夏 四月 震王宮門柱 黃龍自其門飛出.」

 

위 부산(釜山)의 ‘부(釜)’는 부여(夫餘)를 뜻하는 고대말 불달(해님<天帝>의 아들이 사는 땅)을 한자로 적으면서 해님을 뜻하는 불(不)을 부(不)로 읽고 뒤에 같은 음(音)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고, 산(山)은 들을 뜻하는 고대말 "달(達)"을 뒤에 한자로 적으면서 산(山)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사냥은 동족을 평정할 때 은유법으로 사용된 말이고, 낙뢰(震)는 임금을 뜻하는 辰(龍)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며, 황(黃)은 역(易)에서 중앙 또는 수도를 뜻하고, 용(龍)은 임금을 뜻한다. 위 문구의 의미는 백제왕이 2월에 부여로 출병하여 50일만에 돌아왔고, 4월에 부여를 다스릴 분국왕(分國王)을 임명하였다는 뜻이다.

A.D 238년에 위구태(尉仇台)가 부여(夫餘)로 출병한 것은 위(魏) 나라의 사마의(司馬懿 : 사마중달)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위구태의 인척되는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衍)을 토벌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위구태는 장춘(長春) 방면의 부여로 출병하여 부여를 지킨 후 부여를 떼어 내어 구태백제(仇台百濟)의 분국(分國)으로 만들고 분국왕(分國王)으로 간위거(簡位居)를 즉위시켰다. 삼국지(三國志) 부여전(夫餘傳)에는 위구태가 죽은 후 간위거가 즉위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尉仇台死,簡位居立),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은유법으로 적혀 있는 문구에 의하면 간위거는 이때 즉위하였다.

구태백제가 장춘 방면의 부여를 분국(分國)으로 만든 것은 그때까지 요동(遼東)의 공손씨(公孫氏)와 구태백제가 동맹세력이었는데, 공손씨(公孫氏)가 위(魏) 나라에 토벌됨으로써 장춘 방면의 부여가 고립되자 고구려와 위나라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부여를 구태백제왕이 직접 관장하지 않고 분국왕을 두어 관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A.D 246년에 부여의 간위거왕(簡位居王)은 위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丘儉)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군량미(軍糧米)를 공급하였다. A.D 238년부터 구태백제와 위나라는 적대국이 되었는데, 간위거왕(簡位居王)이 구태백제의 적대국인 위(魏) 나라에 군량미를 공급한 것으로 보아 장춘 방면의 부여는 위나라의 이간전술에 넘어가 A.D 246년경부터 구태백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정춘 방면의 부여를 분국으로 만듬

 

마. 요서지방(遼西地方) 진출

 

A.D 313 - 314년경에 구태백제는 모용씨(慕容氏)와 동맹을 맺고 요서(遼西)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 그 위치는 당(唐) 나라 재상(宰相) 두우(杜佑)가 지은 통전(通典)에 당나라 때 유성군(柳城郡)과 북평군(北平郡) 사이라고 적혀 있다. [註 백제의 요서 진출은 모용씨의 고구려 포위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서 한군현(漢郡縣) 장의'낙랑군과 대방군의 모용씨 영역으로 이동' 항 참조]

 

「그 나라는 본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는 고구려와 더불어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其國本與句麗在遼東之東千餘里 晋世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南史 百濟傳

「그 나라는 본래 요동의 동쪽에 있는 고구려와 더불어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地矣 自置百濟郡」梁書 百濟傳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에 군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당나라)의 유성군과 북평군 사이에 있었다. 晋時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通典 百濟傳 [註 당의 북평군은 난하 방면이고, 유성군은 조양 방면이다.]

「백제는 본래 요동의 동쪽에 있는 고구려와 더불어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여 다스렸다. 백제의 치소는 진평군 진평현이 있던 곳이다.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宋書 百濟傳 [註 진평(晋平)은 요서(遼西)에 있는 지명이 아니고 강좌(江左)에 있는 지명이다. 그리고 진평군(晋平郡) 진평현(晋平縣)은 백제의 군현 이름이 아니고 송(宋) 나라가 A.D 468년에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방면에 설치하였다가 송.백제 사이가 벌어진 A.D 471년에 폐지한 군현 이름이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살펴보건데 백제는 신라와 이웃하였다. 수서에는 백제가 남으로 신라와 접한다고 하고, 당회요에는 백제의 동북에 신라가 있다고 하여 모순을 보인다. 백제의 경계를 살펴보면 서북으로는 지금의 광녕현, 금현, 의현에서 남으로 바다 건너 동으로 조선의 항해도, 전라도, 충청도 등에 이른다.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길다. 유성에서 북평까지 백제 땅에서 보면 신라는 그 동남에 있고, 경상도(서부경남 지칭)에서 웅진(공주)까지 백제 땅에서 보면 신라는 그 동북에 있다. 그 북쪽으로는 물길과도 이웃한다. 謹案百濟與新羅壤地相錯隋書云南接新羅唐會要言東北至新羅考百濟之境西北自今廣寧綿義南踰海蓋東極朝鮮之黃海忠淸全羅等道東西狹而南北長自柳城北平計之則新羅在其東南自慶尙熊津計之則新羅在其東北其北亦與勿吉爲隣也.」 欽定滿洲源流考 卷9 疆域2

 

요서지방에 진출(A.D 313~314년)

 

바. 강좌(江左) 방면 중국동해안지방에 진출

 

A.D 316년에 구태백제는 양자강하류(楊子江下流) 중국동해안지방에 진출하여 (송나라 때) 진평군(辰平郡)을 둔 자리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왕(比流王) 13년조에는 그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비류왕 13년(A.D 316년) 봄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 왕도의 우물이 넘치고 검은 용이 우물 가운데서 나타났다. 比流王 十三年 春 早 大星西流 夏 四月 王都井水溢 黑龍見其中」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地矣 自置百濟郡」梁書 百濟傳

 

위 문구 중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는 것은 백제 대장군(大將軍)이 서쪽으로 진출했다는 뜻이고, 왕도의 우물(井)이 넘쳤다는 것은 백제가 강성해졌다는 뜻이며, 검은(북쪽 지칭) 용(龍:후왕 지칭)이 왕도(王都)의 우물(井) 가운데서 나타났다는 것은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지방의 백제 대장군(大將軍)이 바다를 통하여 왕도(王都)로 와서 후왕(侯王)으로 임명되었다는 뜻이다.

 

중국동해안지방에 진출(A.D 316년)

 

사.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구태백제(仇台百濟) 지배층이 일본으로 피신함

 

백제는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피하였으나 구태백제가 A.D 313-314년에 고구려의 적국(敵國)인 모용씨(慕容氏)와 동맹을 맺은 후부터 백제와 고구려는 적대관계로 변하였다.

A.D 369년에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보기병(步騎兵)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주둔하여 온조백제의 민가(民家)를 약탈함으로써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일어난 전쟁은 A.D 371년에 구태백제를 등에 업은 온조백제가 평양(平壤)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戰死)시킴으로써 이 전쟁은 백제가 승리하였다.

그후 A.D 392년 7월에 광개토왕은 온조백제를 공격하여 10여 성을 빼앗고 같은 해 10월에 관미성을 빼앗았다.

 

「진사왕 8년(A.D 392년) 여름 5월 초하루 정묘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에 고구려왕 담덕이 군사 4만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간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八年 夏五月丁卯朔 日有食之 秋七月 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 三國史記 百濟本紀 [註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해 온조백제가 광개토왕에게 항복한 내용이 나오지 않으나, 온조백제는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온조백제는 수도 방어의 요지인 관미성(關彌城)이 함락당한 후 고구려의 공격에 수도를 방어할 힘이 없었는데도 고구려는 온조백제의 수도를 점령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이는 온조백제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해 11월에 구태백제는 기각숙니(紀角宿?) 등 장군을 온조백제로 보내어 진사왕(辰斯王)을 죽이고 아신왕(阿莘王)을 세우므로써 온조백제는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진사왕이 죽은 내용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상세히 적혀 있다.

 

「응신천황 3년(A.D 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이 귀국의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를 보내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 등은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三年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 故遣紀角宿? 羽田矢代宿? 石川宿? 木?宿? ?讓其无禮狀 由是 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等便立阿花爲王而歸.」일본서기 [註 일본서기 응신천황(應神天皇) 3년조에는 구태백제왕과 진사왕과의 관계가 응신천황과 진사왕과의 관계로 적혀 있다. 즉 응신천황과 구태백제왕이 동일인물로 적혀 있다. 이는 일본서기를 만들 때 멸망한 구태백제 존재를 말살하고, 구태백제왕이 한 일을 마치 대화왜(大和倭) 천황이 한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진사왕 8년 겨울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돌아갔다. 冬十一月 薨於狗原行宮」 三國史記 百濟本紀

 

온조백제가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자 광개토왕은 구태백제를 괴멸시켜야 온조백제를 계속 복속시킬 수 있다고 보고 그때부터 4년간 전쟁준비를 한 후 A.D 396년에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금강하류(錦江下流)에 상륙하여 구태백제의 수도(首都) 등지를 점령하였고, 이어서 보기병(步騎兵)으로 아리수(한강)를 건너 온조백제를 다시 항복받았다. 이때 수도 웅진(熊津) 등지가 점령당하자 구태백제 지배층은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광개토왕비문과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우리의 속국이어서 조공을 바쳐 왔는데 왜(倭)가 신묘년(A.D 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00.신라를 깨뜨리고 그들을 신민으로 만들었으므로, 영락 6년에 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이잔국을 토벌한 후 대군을 남진시켜..중략..왕은 발연히 대노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아리수(한강)를 건너 선봉부대를 보내어 그 도성을 핍박하니 백잔왕이 곤핍하여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바치고 귀복하였다. 백잔왕은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백잔왕이 처음에 깨닫지 못한 허물을 용서하고 뒷날 정성스레 순종할 것을 다짐받았다. 이 싸움에서 백잔국의 58성 700촌을 얻고 백잔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사를 되돌려 도성으로 돌아왔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0 以辛卯年倭來渡 破百殘00新羅 以爲臣民以 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伊殘國 軍南進..中略..其國城0不0義敢出00 王威赫怒渡阿利水 遣刺迫城 00000便國城 百殘王困逼 獻0男女生九一千人細布千匹 殘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先迷之愆錄 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村七百 將殘王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廣開土王碑文 永樂六年條 [註 구태백제를 비하(卑下)하여 이잔(伊殘)으로 적혀 있고, 온조백제를 비하하여 백잔(百殘)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응신조왜(應神朝倭)는 왜(倭)로 적혀 있으며, 구태백제도 응신조왜(應神朝倭)와 동일세력이라고 비하하여 왜(倭)로 적혀 있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왔다. 帝躬率水軍 攻取熊津.林川.蛙山.槐口.伏斯買.雨述山.進乙禮.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期早朝祭天 以環」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註 이때 광개토왕이 거느린 고구려 수군(水軍)이 점령한 지역은 구태백제의 수도가 있는 웅진(熊津 : 공주)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방이고, 금강(錦江) 이남 지방은 점령하지 못하였다. 이때 구태백제 지배층은 일본으로 피신해 있다가 A.D 399년에 왜(倭)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A.D 400년에 광개토왕의 반격을 받아 임나가라(任那加羅 : 대마도)가 점령당하고 이어서 구주왜(九州倭)와 대화왜(大和倭)마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므로서 실패하였다. 그후 A.D 404년에 왜(倭)와 구태백제 잔존 무리들은 고구려의 대방계(帶方界)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광개토왕이 임나연정(任那聯政)을 설치하여 왜(倭) 통제를 강화하자 구태백제는 A.D 405년에 아신왕(阿莘王)을 암살하고 인질(人質)로 와 있던 전지(?支)를 백제로 보내어 백제왕으로 즉위시켜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하였다. 광개토왕이 임나연정을 설치하여 왜(倭) 통제를 강화하자 왜(倭) 지배층은 금강(錦江) 이남 지방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후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멸망하고 백제가 A.D 487년에 대마도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를 세우자 돌아갔다. 이 무렵 전라도 지방에 일본(日本) 천황가(天皇家)의 무덤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생겨난 것은 왜(倭) 지배층이 금강(錦江) 이남 지방으로 피신해 있었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 8년조에도 아신왕(阿莘王)이 광개토왕에게 패배한 사실이 적혀 있다.

 

「응신천황 8년(A.D 397년) 봄 3월 백제인이 내조하였다[백제기에 말하였다. 아화가 왕이 되어 귀국에 무례하였다. 때문에 우리의 침미다례(제주도?), 현남, 지침, 곡나, 동한(가야 지역)의 땅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의 수호를 다시 하였다. 八年春三月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 无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 支侵 谷那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일본서기 [註 이때 광개토왕이 가야(加耶) 지방과 제주도 등지를 빼앗았던 것은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해상통로 차단과 남해(南海)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다.]

 

온조백제는 A.D 396년에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으나, 다음해 A.D 397년에 아신왕(阿莘王)이 아들 전지(?支)를 왜왕(倭王 : 구태백제왕 지칭)에게 인질로 보내고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

 

아. 구태백제(仇台百濟)의 반격과 광개토왕의 재반격

 

영락 9년(A.D 399년)에 응신조(應神朝) 왜(倭) 군사가 신라를 침범하였다. 이를 보면 구태백제와 응신조(應神朝) 왜(倭)는 A.D 396년에 고구려에 빼앗긴 남해(南海)의 제해권을 A.D 399년 이전에 도로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구태백제와 응신조(應神朝) 왜(倭) 군사가 신라를 공격하자 광개토왕은 영락 10년(A.D 400년)에 보기병(步騎兵) 5만을 보내어 신라를 침범한 왜(倭)를 물리치고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 : 대마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영락 9年(A.D 399년) 기해 백잔은 맹세를 어기고 왜인과 더불어 화통하였다. 왕이 남쪽으로 평양에 내려가 순시하는데, 마침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께 고하되 왜인들이 그 국경에 가득하고 성지를 파괴하니 노객은 백성을 위하여 왕을 찾아 뵙고 명을 청한다고 하였다. 九年 己亥 百殘違誓與倭密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0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000其忠00遣使環告以00」廣開土王碑文

「10년 경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관병이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가 가득하였다. 관병이 이르자 왜가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관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하였다. 안라인 수병이 신라성 0성을 점령해 있었다. 왜가 가득차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안라인 수병이 口口에 가득차 있었다. 왜가 록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口口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이어 좌군은 담로도를 경유하여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경유하여 무장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안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十年 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 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口其中官(兵)方至倭賊 退(제2면9행)官兵  跡而越來攻來背 急追至任那 加羅從拔城 城卽歸服安 羅人戍兵新羅城口城 倭滿倭潰城(제2면10행)被我攻滅 無遺倭遂擧 國降死者十 之八九臣 率來安羅人 戌兵滿假口 口倭欲敢戰與록己呑卓淳 (제3면1행) 諸賊謀口口 官兵制先直取卓淳而左軍由淡路島 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 斯諸賊悉自潰 (제3면2행) 遂分爲郡安 羅人戌兵昔 新羅寐錦未 有身來口口 口國岡上廣 開土境好太王口口新羅寐錦口口僕勾 (제3면3행) 口口口口朝貢.」[註 파란색 글자는 비문징실로 보충한 것임]

「한번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를 격파하였다(註 영락 10년 사실). 왜인(註 응신조 왜 지칭)은 백제(註 구태백제 지칭)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註 영락 9년 사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술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오다(註 영락 6년 사실). 때(註 영락 10년)에 백제, 신라, 가라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 평양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와 伊, 倭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一自渡海 所至擊破倭人 倭人百濟之介也 百濟先與倭密通 使之聯侵新羅之境 帝躬率水軍 攻取熊津 林川 蛙山 槐口 伏斯買 雨述山 進乙禮 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 期早朝祭天 以環 時則 百濟新羅駕洛諸國 皆入貢不絶 契丹平凉皆平服 任那伊倭之屬 莫不稱臣」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註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영락(永樂) 6년조, 9년조, 10년조 사실이 함께 뒤섞여 적혀 있다. 광개토왕비문에는 구태백제가 이잔(伊殘) 또는 왜(倭)로 적혀 있고,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구태백제가 이(伊) 또는 왜(倭)로 적혀 있다. 이 이(伊)는 부여 무리라는 뜻으로 부여 무리가 이주하여 세운 구태백제 또는 구태백제계(仇台百濟系) 무리가 이세(伊勢), 대화(大和) 등지로 이주하여 소국(小國)을 세우고 근국(根國)의 명칭을 사용한 무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왜(倭)는 서.남해 섬, 대마도, 일본열도 등지에 거주한 왜(倭) 무리 또는 이들과 같은 세력인 마한(馬韓)이나 구태백제(仇台百濟)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그후 영락 14년(A.D 404년)에 구태백제(仇台百濟)는 왜(倭)를 동원하여 고구려 대방계(帶方界)를 공격하였다.

 

「영락 14년(A.D 404년) 갑진 왜가 대방의 경내로 침입하여...석성... 배들이 줄을 이었다..인솔하여..평양..(왜적의) 선봉과 서로 만났다..태왕이 군사들에게 왜구의 길을 막고 시살토록 하니 왜구는 궤패되었고 무수히 죽였다. 永樂 十四年 甲辰 以倭00 侵入帶方界 0000石城0聯船 000率000平壤000鋒相遇 王幢要截0刺 倭寇潰敗斬殺無數」[註 위에 나오는 대방(帶方)과 석성(石城)의 위치는 어디인지 불명이다. 한국의 사학자들은 대체로 항해도나 경기북부 지방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위서(魏書)에는 대방(帶方)과 석성(石城)이 모두 대릉하 방면에 있고, 대방(帶方)은 낙랑군(樂浪郡)에, 석성(石城)은 건덕군(建德郡)에 각 속해 있다. 이곳은 광개토왕에게 배앗긴 백제의 요서분국(遼西分國)이 있던 곳이다.]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는 영락(永樂) 10년(A.D 400년)부터 임나연정(任那聯政)의 통제를 받고 있었는데, A.D 404년에 왜(倭)가 고구려 대방계(帶方界)를 공격하였다는 것은 임나연정의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전쟁에서도 왜(倭)가 패배함으로써 구태백제와 광개토왕간의 10여년에 걸친 지루한 전쟁은 광개토왕의 승리로 끝이 났고, 광개토왕은 임나연정을 통하여 왜(倭)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에 일본으로 피신해 있던 구태백제 지배층과 일본열도왜 지배층은 구태백제 지역 중 A.D 396년에 광개토왕에게 점령되지 않은  금강(錦江) 이남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 참고:광개토왕 즉위 후 구태백제(仇台百濟)가 고구려에 일방적으로 패배한 원인 -

A.D 392년 이전까지는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점령하거나 국경 부근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다가 광개토왕이 즉위한 A.D 392년부터 A.D 404년까지는 백제가 고구려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였다. 이는 광개토왕의 탁월한 외교술과 전략.전술 때문이다.

광개토왕 재위 시 구태백제의 전략.전술 과 고구려의 전략.전술을 비교해 보면, 구태백제는 보병전술(步兵戰術)과 기마전술(騎馬戰術)을 주전술(主戰術)로 사용하였고 상륙전술(上陸戰術)은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보조(補助)하는 전술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륙전술에 동원된 배는 왜(倭)가 사용하는 소정(小艇)이었고, 이 소정에는 대략 20-30명 정도가 승선(乘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륙전술에 동원된 왜(倭)는 수천 명을 넘지 못하였다. 반면에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까지는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주로 사용하다가 광개토왕 때부터 해상전상륙전에 대비하여 대규모 병력이 승선할 수 있는 대함(大艦)과 수군(水軍)을 대량으로 보유하였다. 그 결과 광개토왕 때부터 고구려 수군(水軍)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水軍)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해졌다. 

A.D 392년에 고구려 수군(水軍)이 한강하류(漢江下流) 방면에 상륙하여 한강 이북에 있는 10여 성(城)을 빼앗고 관미성(關彌城)으로 통하는 양도(糧道)를 끊어 관미성을 고립(孤立)시킨 것, A.D 396년에 고구려 수군(水軍)이 금강하류(錦江下流) 방면에 상륙하여 구태백제의 본거지인 웅진(熊津) 등지를 괴멸시킨 것, A.D 400년에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 임나가라(任那加羅 : 대마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본열도왜를 복속시킨 것, A.D 404년에 대방계(帶方界)로 침입한 왜(倭)를 물리친 것 등은 고구려 수군(水軍)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水軍)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하였기 때문이다.

 

자. 구태백제왕(仇台百濟王)이 한반도 백제 지역 통치

 

A.D 396년에 있은 광개토왕의 구태백제 공격 이후 일본으로 피신한 구태백제왕(仇台百濟王)은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하기 위하여 A.D 405년 3월에 아신왕(阿莘王)을 암살한 후 왜왕(倭王 : 구태백제왕 지칭)에게 인질로 와 있던 전지(?支)온조백제왕으로 즉위시켜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하였다.

A.D 407년에 전지왕(?支王)의 서제(庶弟) 여신(餘信)을 내신좌평(內臣佐平)에,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內法佐平)에, 해구(解丘)를 병관좌평(兵官佐平)에 각 임명하였다.

A.D 408년에 상좌평(上佐平) 제도를 만들어 여신(餘信)이 상좌평에 앉아 백제의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모두 장악하였다.

A.D 416년경에 구태백제왕(仇台百濟王) 여영(餘映)이 전에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의 장군으로 있다가 A.D 400년에 광개토왕에게 귀복한 백제장군들을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시기고 중국동해안지방을 수복하였다.

진서(晋書)나 송서(宋書)에는 이 무렵 백제왕의 이름이 여영(餘映)으로 적혀 있다. 양서(梁書)에는 여영이 온조백제 전지왕(?支王)이라고 적혀 있으나, 여영은 진서에 의하면 A.D 416년에, 송서에 의하면 A.D 420년과 424년에 각 백제왕으로 나오는데, 전지왕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A.D 420년에,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A.D 414년에 죽었으므로 여영은 전지왕이 아니다.

A.D 420년에 구태백제왕 여영은 전지왕과 구이신왕을 각 제거하여 온조백제의 대(代)를 끊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이신왕(久?辛王)이 A.D 427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으나, 구이신왕본기(久?辛王本紀)에 구이신왕(久?辛王)의 즉위와 사망사실만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구이신왕은 A.D 420년에 전지왕(?支王)이 제거될 때 같이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毘有王) 29년조에 의하면 A.D 455년에 백제에 내란이 일어나 비유왕이 죽었다.

 

「비유왕(毘有王) 29년(A.D 455년) 봄 3월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 흑룡이 한강에 나타났다. 잠간 동안 구름과 안개가 끼어 캄캄하더니 날아가 버렸다. 왕이 돌아갔다. 毘有王 二十九年春三月 王獵於漢山 秋九月 黑龍見漢江 須臾雲霧晦冥飛去 王薨.」 [註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로 적혀 있으나 진서(晋書), 송서(宋書), 남사(南史) 등에는 여영 다음 백제왕이 여비(餘毗)로 적혀 있으므로,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아들이 아니다.]

 

위 문구는 온조백제계(溫祚百濟系) 장군들이 그 해 3월에 수도 한산(漢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의 규모가 매우 커서 비유왕이 진압하지 못하자 그해 9월에 흑룡(黑龍 : 요서분국장군 지칭)이 출동하여 한강을 통하여 수도로 와서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이때 비유왕이 반란군의 의하여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때 반란을 일으킨 온조백제계 장군들은 개로왕기(蓋鹵王紀) 21년조에 나오는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萬年) 등으로 보이며, 이들은 비유왕을 죽이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그후 A.D 475년에 고구려 군사를 끌어들여 개로왕을 죽였다.

A.D 458년에 개로왕은 백제본국의 군사를 중국동해안분국으로 보내었다. 이때부터 A.D 463년 사이에 백제는 난하(?河) 서쪽 요서지방(遼西地方)을 다시 수복(收復)하여 A.D 465년에 그곳에 조선태수(朝鮮太守), 광양태수(廣陽太守) 등을 두었다.

 

차.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김

 

A.D 475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이 점령되고 개로왕(蓋鹵王)이 피살당하자 문주왕(文周王)은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A.D 479년에 동성왕(東城王)이 즉위한 후 백제의 국력이 다시 강화되었다.

동성왕은 A.D 487년에 대마도를 평정하고 다음해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을 세운 후 백제본국(百濟本國) 군사와 대화왜( 大和倭) 군사를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으로 보내어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당항한 고구려는 일년에 한번 보내던 북위(北魏) 사신을 이 해부터 A.D 495년까지 일년에 2-3번씩 보내며 북위(北魏)와의 동맹관계를 강화하였다.[참고 : 북위에 사신을 보낸 회수(回數) : 장수왕 76년(A.D 488년)  2월, 4월, 윤8월(3회). 77년(A.D 489년) 2월, 6월, 10월(3회). 78년(A.D 490년) 7월, 9월(2회). 79년(A.D 491년) 5월, 9월(2회). 문자명왕(文咨明王) 원년(A.D 492년) 6월, 8월, 10월(3회). 3년(A.D 494) 정월, 7월(2회). 4년(A.D 495년) 2월, 5월(2회).]

 

 카. 중국동해안지방 확장

 

백제는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다시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를 세우고 그 해 백제본국(百濟本國) 군사와 대화왜(大和倭) 군사를 요서지방(遼西地方)과 중국동해안지방(中國東海岸地方)으로 보내어 백제의 군사력을 강화한 후 북위(北魏)를 물리치고 산동성(山東省) 방면에 성양태수(城陽太守)와 청하태수(靑河太守)를 강소성(江蘇省) 방면에 광릉태수(廣陵太守) 등을 각 두었다.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임시로 건위장군 광양태수를 장사 고달이 겸하게 하고, 건위장군 조선태수를 사마 양무가 겸하게 하고, 선위장군을 참군 회매가 겸하게 하였으니, 이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註 A.D465-471년) 중에도 송조에 사자로 갔습니다. 이제 신의 사신으로 험한 바다를 무릅써고, 지극한 마음으로 찾아가니, 관작을 내리심이 마땅하니, 삼가 선례대로 관작을 내려주십시오..중략...고달은 일찍부터 본받을 만 함이 뚜렸하고 공무에도 부지런하여 임시로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삼았고, 양무는 뜻과 행실이 맑고 공무에 그침이 없어 임시로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삼았고, 회매는 뜻이 굳고 부지런하며 본 받을만하여 임시로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삼았습니다. 조서를 내려 그대로 받아들이고 군호도 내렸다.후략. 牟大又表曰 臣所遣 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長史臣 高達 行建威將軍 朝鮮太守 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 兼參軍臣會邁 等三人 志行?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 今任臣使 冒涉波險 尋其至效 宜在進爵 謹依先例 各假行職 且玄澤靈休 萬裡所企 況親趾天庭 乃不蒙賴 伏願天監特愍除正 達邊效夙著 勤勞公務 今假行龍?將軍帶方太守 茂志行淸壹 公務不廢, 今假行建威將軍 廣陵太守 邁執志周密 屢致勤效 今假行廣武將軍 淸河太守 詔可 竝賜軍號, 除太守..後略」 南齊書 百濟傳  [註 광양태수는 계 방면이다. 廣陽國 高帝燕國 昭帝元鳳元年?廣陽郡 宣帝本始元年更?國 縣四 ?..方城,廣陽,陰?. 漢書]

「건무 2년(A.D 495년)에 모대가 사람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기를..중략..지난 경오(A.D 490년)에 험윤(북위.고구려 연합군 지칭)이 뉘우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숙이 쳐들어 왔으므로, 臣이 사법명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번개같이 들이치니 흉리(북위.고구려 연합군을 비하한 말)가 크게 당황하여 마치 바다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크게 무너지며 달아나는지라 뒤쫓아 가며 베니 쓰러진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흉리의) 예기가 꺾이고 흉한 행동을 거두게 되어 이제 영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습니다..중략..지금 임시로 사법명을 정로장군 매라왕에 찬수류를 안국장군 벽중왕에, 해례곤을 무위장군 불중후에, 목간나는 전에도 군공이 있고 또 배를 공략한 공이 있는지라 광위장군 면중후에 각 임명하였으니 제수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또 표문에는 "용양장군 낙랑태수를 장사 모유가 겸하게 하고, 건무장군 성양태수를 사마 왕무가 겸하게 하고, 진무장군에 조선태수 장새를, 양무장군에 진명을..중략..각 임명하였으니 성조(남제)에서도 임명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대로 임명하고 군호도 내렸다.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臣自昔受封 世被朝榮 ?荷節鉞 克攘列? 往姐瑾等?蒙光除 臣庶鹹泰 去庚午年 ??弗悛 ?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屍丹野 由是?其銳氣 鯨暴韜兇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褒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 邁羅王 贊首流?行安國將軍 ?中王 解禮昆?行武威將軍 弗中侯 木幹那前有軍功 又拔台舫 ?行廣威將軍 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 行振武將軍 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賜軍號」 南齊書 百濟傳

「고구려,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노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三國史記 列傳 第6 崔致遠傳

 

타.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 상실

A.D 501년에 반란이 일어나 왜(倭)가 지원한 무령왕(武寧王)이 승리하여 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 이 정변으로 동성왕(東城王)이 죽고, 동성왕계(東城王系)인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 출신들은 몰락하였다. 이에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에 있던 백제장군들이 백제본국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에 귀복함으로써 백제는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을 상실하였다.

 

「문자호태열제는 명치라고 개원하였다. 11년(A.D 502년)에 제, 노, 오, 월의 땅이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文咨好太列帝 改元明治 十一年 齊魯吳越之地 屬我至 是國疆漸大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백제가 영유하던 곳을 요서,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는데, 그 속현으로 산음, 좌월이 있었다. 문자제 명치 11년(A.D 502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 군현을 고쳐 송강(상해 서남), 회계(강소성 소주), 오월, 좌월, 산월, 천주(복건성 복주)라 했다. 12년(A.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 진평, 등지를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百濟所領曰遼西晋平 江南有越州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四曰左越 至文咨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暑郡縣 曰松江會稽吳越左越山越泉州 十二年 移新羅民於泉州 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晋平等 百濟郡廢」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는 천감시대(A.D 502년~)에 백제가 고구려에 공파(攻破)되어 남한(南韓)으로 옮겨갔다고 적혀 있어 고기(古記) 내용과 부합한다.

天監元年(A.D 502년) 進太號征東將軍 尋?高句驪所破 衰弱者累年 遷居南韓地梁書 百濟傳

이로 인하여 백제의 국력이 약화되어  백제의 위상(位相)은  낮아지고 대화왜(大和倭)의 위상은 높아져,  백제는 대화왜의 종주국(宗主國) 위치에서 대화왜의 지원을 받는 처지로 위상이 역전되었다.


하. 수도를 사비
(泗?)로 옮김

성왕 16년(538년)에 수도를 사비(泗?)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그 뒤 무왕(武王) 때 백제는 일시적으로 익산(益山)을 임시수도 또는 별궁(別宮)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註 익산에 "王宮址""王城址""王陵" 둥의 유적이 있고, 王宮坪에서 백제 5부 중 중부를 상징(象徵)하는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일본의 "觀世音應驗記"에 "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新營精舍"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枳慕密地"는 익산으로 추정된다.] 의자왕(義慈王) 20년(A.D 660년)에 백제는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출처 coo2.net 게시판    역사연구 (2003-11-11 13:57:22, Hit : 774, Vote : 21)


산책님께는 죄송합니다만, 본토는 대륙이 맞습니다. 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일대는 대륙의 황하 화북성이고, 광동성 일대가 후대의 도읍지인 사비성, 웅진성 일대입니다. 백제의 왜국으로의 출병은 대륙에서 열도로 수십번 출병하기 힘들다 했는데, 그렇게 친다면 가야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하지만 정작 가야의 본토 역시 대륙입니다. 앙자강 남쪽의 절강성 이남지대... 단지 반도에도 가야가 존재했으니 반도가야를 거쳐가는 중계지역으로 삼아 열도에 진출이 가능했죠. 백제가 열도로 진출한 것은 본토에서 직접 군사를 열도로 출병했다기 보다는 본토의 군사를 징발하여 반도 백제의 심장부에 이동시켜 반도백제의 병력과 합세하여 열도로 갔거나 자체적으로 반도백제의 병력을 출병시킨 뒤에 그 공백을 후일 대륙의 병력으로 일부 충당했다고 보는 게 더 상식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대륙의 수도에서 반도로 수도를 옮겼다는 것 부터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한 나라의 수도라는 건 그 성의 크기에 있어서도 거대할 뿐 아니라 천도는 나라의 중대한 사안인데 대륙에서 좁은 반도의 현 공주 일대로 옮겼다는 게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되죠. 게다가 현 공주 부여 일대에는 백제의 수도라 하기에는 그 유적이나 유물이 너무나도 보잘 것 없이 적습니다. 무령왕릉이라 일컸는 것도 실은 무령왕릉이 아닌 일가 왕족의 무덤이구요. 더불어서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을 한 것은 광동성일대 백제향의 지역이니 더 그렇죠.

저로선 좀 놀라운 게 백제의 본토가 반도라고 본다는 건 준 반도사관인데 이거 뭔가 좀 말이 안되는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산책님의 견해가 누구와 일치하냐면 이도학 교수나 김성호와 흡사하거든요. 이도학 교수나 김성호도 백제가 본토 및 수도가가 반도인 것으로 보고 백제영토가 대륙에 있었던 것은 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평소 산책님의 글에서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만, 이건 뭔가 좀 아니다 싶어서 몇자 적습니다. 아무래도 산책님의 전공분야가 열도관련이다보니 반도를 수도가 있던 본토로 잘못보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이것은 저만의 주장이 아닌, 여러 재야사학사이트에서도 본토가 대륙이다라는 건 여러가지 증거들을 근거로 한 것이기에 드리는 말씀이니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산책님의 고견이라던지 이런 부분들은 평소 높게 삽니다만, 이번 경우는 산책님께서도 학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시기에 순간적으로 실수하신 거라고 봅니다.
사서를 보더라도 흑지상지의 부흥운동 지역은 수도와 그리 멀지않은 가까운 지역이라 적고 있습니다. 게다가 의자왕의 무덤이 북망산 일대이고 부흥운동이 일어난 지역은 대륙인데 상식적으로 반도가 수도가 될 수가 없죠.

앞으로도 이와 관련해서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산책님의 견해대로 반도가 위례성시대 이후 중기 백제의 수도였다고 친다면, 현 강단및 일반 국사교과서에서 일컫는 수도인 현 공주, 부여 일대에서 백제왕족 및 귀족들의 무덤이 최소 수십개에서 최대 수백개도 넘게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재위 왕들 및 왕비의 무덤만 계산하더라도) 가짜 무령왕릉 달랑 하나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시피 인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요. 수백개에서 수십개의 왕릉이 발견되려면 그 만큼의 땅을 점유해야 하는데 현 공주 부여의 지역크기에선 불가능합니다. 일반인의 무덤 하나가 차지하는 크기만 해도 1평이 넘는데, 왕릉이라면 그것보다 몇수십배는 더 큽니다.

참고로 제가 찾아본 백제의 수도가 언급된 글들은

율곤학회 게시판에서 웅진이란 단어로 검색했고, 지금 이곳 우리 역사의 비밀의 우리역사-백제란에서 웅진, 사비로 검색하거나 지도자료입니다.

예를들어서 백제의 중후기 수도를 반도로 비정한다면 신라와 당의 백제 공격시 상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대륙의 당과 신라가 반도로 침공을 한다는 공식이기에 말이 안됩니다. 중후기 수도인 사비, 웅진이 반도에 있었다면 당연히 그시대의 백제 지명이 반도에 존재해야 하나 반도에는 없고 대륙엔 존재합니다.(백강, 주류성 등등) 정작 백제 멸망시 백강, 혹은 백마강의 위치는 황하 이남 안휘성 하남성 인접 지역입니다.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일대는 현 하남성 일대로 확실하게 굳어진 상태이고, 비류백제의 수도인 미추홀은 광동성이나 안휘성 안읍 인근 일대로 비정됩니다.
후기 수도인 웅진, 사비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인데 광동성, 안휘성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고대사산책 (2003-11-11 15:57:43)  
강단의 반도사관은 대륙백제군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5세기말의 북위와의 전투도 海戰이라고 하는 자들 있잖아요.

기마민족인 북위가 기병 수십 만을 배에 태워오다 황해에서 백제와 해전을 했다는 애들 만화보다 더 웃기는 소리를 학설이라고 하는...

근본적으로 위는 대륙 북방의 기마민족으로 배와는 사돈의 팔촌도 넘은 세력이라 양자강도 못넘어 남제를 제압을 못한 세력이지요. 강도 못넘은 세력이 바다씩이나? 말도 안되...

더구나 대륙세력이 바다를 건널 때는 반드시 산동의 동이족들의 힘을 빌렸는데 주로 등주, 래주 등지의 세력이지요. 이게 진한인들이고 요서백제 영역인데...수군을 동원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요.

위가 바다 건너 백제를 칠 동기도 없고 능력도 없고...사실무근...

백제본국이 반도에 있었다고 하면 반도사관? 이건 아닙니다. 인식을 고치셔야 할 듯...대륙사관도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요.

박창범 교수의 논문에서 양자강 남쪽으로 나타나는 신라를 서신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정확히 강남백제와 영역이 일치하고 가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단정하기 어려워요...
고대사산책 (2003-11-11 16:01:10)  
5세기말의 백제와 위의 전투는 남제서에 나오다시피 동성대왕의 백제군과 북위와의 육전이었고 요서백제 영역에서 있었던 사건들임...
심재호 (2004-04-08 22:04:58)
그러고 보니, 역사 스페셜에서도 무령왕릉 발굴의 허점을 밝힌 방송이 나간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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