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후(韓侯)와 고조선(古朝鮮) 2

 

시경(詩經) 한혁(韓奕)에 한후(韓侯)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한혁(韓奕) 내에 지명(地名)으로 양산(梁山), 분왕(汾王)이 나옵니다.

려왕(厲王)이 성질이 사납고 잔악하며 막돼먹어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한후(韓侯) 땅인 체()로 도망하여 보호를 받고 살다가 14년 후 죽었다. 려왕(厲王)은 분수(汾水)가 흐르는 한후의 땅으로 도망하여 분왕(汾王)이라고도 불렸다.

 려왕(厲王)의 아들, 선왕(宣王)이 다음 왕으로 올랐는데 한후(韓侯)를 달래기 위해 려왕(厲王)의 조카 딸을 한후(韓侯)에게 보내어 통혼(通婚)을 한다. ()의 병사들이 한성(韓城)을 완성했는데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에 성주(成周)를 만들 때 은()의 병사들을 동원한 것처럼 한후(韓侯)가 연()을 멸()하고 연()의 병사에게 성()을 쌓게 한 것이다.

()나라 이동도

 

[출처] 나동현(羅洞鉉), 중국북방이족과 이맥 고구려(6) 2절 만리장성(萬里長城)과 이족(夷族)

()나라 이동

소공(召公) 첫 수도 소(; 기산(岐山)), BC 1027

→ ①차 이동 소( ; 옹현(雍縣), 환곡(桓曲))

→ ②차 이동 기( ; 태원(太原))

→ ③차 이동 소( ; 옹현(雍縣), 환곡(桓曲))

→ ④차 이동 조성( 胙城 ; 골주(滑州), BC 760년 전후

→ ⑤차 이동 기( ; 태원(太原)), BC 662년 전후

→ ⑥차 이동 마읍(馬邑), BC 320년 전후

→ ⑦차 이동 계( ; 연산(燕山), 북경(北京)지방)

→ ⑧차 이동 무양( 武陽 ; 이현(易縣) 부근), 팽창기 소왕(昭王) BC 311~ 279년 중


산융 분포도

위 산융 분포도는 고조선 변한 영역에 포함된다.  산융이라 중원에서 칭한 족속은 동이일 것이다. 

()의 요동(遼東)에서 소금이 나는데 이를 이라 하지 않고 라 한다. <관자(管子)>

산염(山鹽)을 끓여서 정제하므로 ‘() 삶을 자라 하며 태원(太原)을 그래서 이적(夷狄)들이 대로(大鹵)라 함은 큰 소금밭을 말한다.

 선왕(宣王) 4년이 무렵 낙읍(洛邑)과 호경(鎬京)을 중심으로 할 때 태행산맥 동쪽의 여()와 요()를 포함한 북쪽 분수(汾水)를 따라 태원(太原)의 위쪽 부근이 유도(幽都, 유주(幽州))가 되고 북국(北國)이며 한후(韓侯)가 거느린 추()와 맥()이 사는 곳인데 적적(赤狄), 백적(白狄), 장적(長狄)으로 불린 지역이었다.

 한후(韓侯)가 주()를 방문하는 경로에 양산(梁山)을 지나 호경(鎬京)에 가는데 양산(梁山)은 하수(河水)와 분수(汾水)가 만나는 하서(河西)지방이니 그 북쪽에 한후가 있고 또 한후가 백만(百蠻), 추맥(追貊), 북국(北國)을 다스리는데 북국(北國)은 화하인(華夏人)들이 낙수(洛水), 경수(涇水)의 북쪽과 분수(汾水) 중북부를 말하고 있으니 이 지역을 한후가 다스렸음이 확실하다.

 중국은 태행산맥(太行山脈)을 기준으로 산동과 산서로 나뉘어 지는데 동쪽에 사는 오랑캐를 동이(東夷)라 하였다. 태행산맥(太行山脈)의 갈래인 여량산맥(呂梁山脈)이 분하(汾河)를 따라 뻗어있고 여량산(呂梁山)이 있다.


한후(韓侯)와 고조선(古朝鮮)

 

증산도, 참 진리의 세계 http://blog.naver.com/gnbone/220270570656 참조한 글입니다.

 시경(詩經) ‘한혁(韓奕)’편을 깊이 생각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한혁(韓奕)은 한후(韓侯)하는 인물을 칭송하여 지은 시인데 우리의 상고사(上古史)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겨례와 관련된 부분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임금께서 한후(韓侯)에게 퇴()와 맥()을 맡기셨다. 한후가 엄()과 북쪽 나라들을 모두 맡아 이로서 그 수장()이 되었다. ”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한후(韓侯)가 퇴(; ‘읽기 가능)와 맥()을 다스리는 통치자임을 알 수 있다. 여기 퇴()은 기록에 잘 보이지 않아 알기는 어렵지만 맥()과 함께 예()가 동북방을 대표하는 족으로서 예맥(穢貊)이라는 하나로 통칭한다.   

신용하 교수님은 고대 중국인들은 ’,’’,’’,’등으로 음차 표기했다가 변음되어 (Ye)’ 발음하게 되었다.‘고 하였고   고() 윤내현 교수님은 ()가 예()로 소리가 변화되기 쉬운 점에서 퇴()는 예()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어쨌든 퇴()가 예()가 아니더라도 예맥(穢貊)에 속한다고 본다.

 예맥(穢貊)은 동이(東夷)이므로 이 들을 다스리는 한후는 고조선족(古朝鮮族)임을 알 수 있다. 한후는 엄()과 북쪽 나라들도 다스렸다고 하였는데 이 지역은 사기(史記) 조세가(趙世家) 조양자(趙襄子)의 산동 일대와 그 북쪽이다. 한후의 통치 영역은 중국의 북쪽에서 동쪽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수많은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백만(百蠻) 즉 수많은 오랑캐라고 표현했다.

 시경에서 한후는 주나라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제후인 것처럼 노래하고 있지만 이것 사실일 수 가 없다. 한후는 수많은 거수국을 거느린 대국이었지만 후세에 중원이 천자의 나라로 행세하며 춘추필법(春秋筆法) 즉 대의명분을 밝히는 논법으로 왜곡하여 기록한 것일 뿐이다.



 서주(西周) 여왕(厲王) (BC 855 ~ BC841), 100 여개가 넘는 도시국가들이 나타날 때라 연()나라는 소국으로 태행산맥(太行山脈) 서쪽, 지금의 태원(太原) 부근에 도읍을 하고 있었다

그 동쪽의 산동반도에는 동이(東夷)의 국가들이, 지금의 북경 일대는 변한(弁韓; 번조선(番朝鮮))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변한의 도읍은 안덕향(安德鄕, 현재 하북성 당산시(唐山市))이었다. 이러 시대를 배경으로 한후 (변한의 단군)와 주나라 왕 사이에 인척관계가 맺어지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한후가 장가를 들었는데 주여왕(周厲王)의 생질입니다. 저 큰 한성은 연나라 군사가 완성하였다.”

韓侯取妻 汾王之甥. 溥彼韓城 燕師所完.

 한후는 연나라와 인척관계를 맺었는데 주()나라 분왕(汾王)의 조카를 아내로 맞아 연나라의 사위가 되었으며 연의 병사들이 한후의 큰 성을 완성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분왕(汾王)()나라 여왕厲王)을 말하는데 성질이 사납고 잔악하며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 막되어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분수(汾水)가 흐르는 한후의 땅으로 도망하여 얻은 이름이다.

 

한후에 관하여는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두 번의 기록이 보인다.

 ()나라 성왕(成王) 12(재위: 기원전 1,100년경)

왕병(王兵)과 연나라 병사들이 한성(韓城)을 지었다. 왕이 한후에게 (작위를) 명하였다.

()나라 선왕(宣王) 4(기원전 824)

왕이 명하여 궤보(蹶父)를 한()에 보냈다. 한후가 내조하였다.

 

성왕의 병사와 연의 병사들이 한후의 성을 지었다고 한혁에서과 같은 내용을 말하였다.

궤보(蹶父)를 한()에 보내고 또 한후가 주나라에 온 것은 한혁의 내용처럼 한후가 궤보의 딸과 혼인하였기 때문에 서로 오고 간 것이다.

 위 두 기록에 보이는 한후는 시간적으로 270년의 차이가 있으므로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 확실한데도 한혁에는 두명의 한후가 각각 있었던 일을 특정한 한명의 한후에 관한 일인 것처럼 기록하였다.

 사학자들 가운데 한후(韓侯)를 주()나라의 제후국인 한나라 제후로 보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일 수 가 없다. 한나라가 제후국이 된 것은 전국시대가 시작된 서기전 403년으로 진()나라가 한(),(),()로 나뉜 때부터 이다. 그러나 한후는 그 보다 이런 4 ~6백년전의 인물이다.

또한 한나라는 공국(公國)인 진()나라가 셋으로 나누어진 작은 나라로 후국(侯國), 백국(伯國) 아래 자국(子國)이었다.   만약 한혁(韓奕)의 한후(韓侯)가 제후국 한()의 통치자였다면 한후(韓侯)’가 아닌 한자(韓子)’로 불러야 마땅하다.   실제로 주()의 제후국이었던 한()의 통치자들은 한무자(韓武子), 한선자(韓宣子), 한경자(韓 子) 등으로 불렸다.

끝으로 한후(韓侯)가 누구인지 고찰해 보면 한혁(韓奕), 죽서기년(竹書紀年)에 한후의 나라를 한()이라고 하였는데 한후는 삼한(三韓) 가운데 중국의 북쪽 및 동북쪽을 다스린 변한(弁韓), 변한의 단군(檀君, Dangur)이다.  

대한(大韓)의 기원, 한후(韓侯)

大韓民國, 三韓(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 


시경(詩經) ‘한혁(韓奕)’편과 동한(東漢)시대의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서주(西周) 왕실과 동성인 희성(姬姓)으로서 한()나라의 제후였던

환숙(桓叔)의 후손과 관련된 성씨는 모두가 희성(姬姓)의 후예로서 한씨(韓氏)이다. 옛날 ()주의 선왕(宣王) 때에 또한 한후(韓侯)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연()나라에서 가까웠다고 하였다.

옛 시경(詩經)넓고 넓은 한성(韓城)은 연나라 군사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고 하였다. 그 후에 (한후(韓侯)) 한국(韓國)의 서쪽에서도 ()을 한()이라고 하였는데 (한국(韓國)) 위만(衛滿)에게 공벌(攻伐)받아 바다로 옮겨가 살았다고 했다.

 

此皆韓後姬姓也. 中亦有對韓侯的記載: ‘昔周宣王亦有韓侯, 其國也近燕, : 普彼韓城, 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 [ 한왕부저(漢王符著) 잠부론(潛夫論) ]

 

한후(韓侯)는 후대의 진()나라에서 분리된 전국시대의 한()나라와는 다르다.

주평왕(周平王) 14(기원전 757)에 진()(한후(韓侯)) 한국(韓國)을 멸망하였다.

平王十四年  晉人滅韓. [ 금본죽서기년(今本竹書紀年) ]

 

시경(詩經) 한혁(韓奕)韓西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이병도(李丙燾), 한서(韓西)한동(韓東)’의 오기 라고 했다. 한후(韓侯) 한국(韓國)

조선(朝鮮)의 한씨(韓氏)를 다르게 인식함

2. 윤내현(尹乃鉉), 한서(韓西)고조선 한국의 서쪽에 있던 기자조선

3.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 ; 1765~18140), ‘한후(韓侯) 한국(韓國)’이 위만에게

공벌당해 바다로 옮겨갔다.

4. 잠부론전교정(潛夫論錢校正)의 해당 주에서는 한서(韓西)는 조선(朝鮮)의 오기다.“

라고 했다. [ 청대(淸代) 왕계배(汪繼培) ]

5. 주선왕(周宣王) 때의 한국이 동천하여 조선(朝鮮)을 이루고 조선왕을 위만에게 공벌당해

남천하고 삼한을 형성했다. [ 명대(明代) 곽조경(郭造卿) ]

 

 정형진 선생은 적어도 기원전 756년 이후 기자(箕子)가 서로부터 왔다 해도 왕통이 기자(箕子)에서 한국(韓國)의 한씨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大韓)의 한()이라고 부르는 동북아시아에서의 뿌리이고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으로 한()을 붙이게 되었다.” 라고 강조한다. (, 三韓)은 바로 단군조선이 해체된 이후 그 후예들에 의해서 다스려진 나라였다.

 

역사학자인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 19011977)시경(詩經)’ 한혁(韓奕)편에 나오는 한국(韓國)은 처음에 섬서성(陝西省) 한성현(韓城縣)에 있다가 하북성(河北省) 고안현(固安县)으로 이동했고 다시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하북성(河北省랑방시(廊坊市고안현(固安县대한채촌(大韓寨村)  입구

북경(北京)에서 남동쪽으로 40km 즘에 하북성(河北省) 랑방시(廊坊市) 고안현(固安县) 대한채촌(大韓寨村)있다. 대한채(大韓寨)는 다른 말로 하면 '대한성(大韓城)'인데 한성(韓城)이 토성으로 남아있다. 이 마을은 회족(回族)들만이 집단을 이뤄 살고 있는데 인구는 약 1,300여 명쯤 되고 이들 회족들은 아직도 한족과 통혼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역으로 관련있어 보이는 선우(鮮于)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968년 역사학자 천판(陳槃)이 펴낸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라는 책이었다. 기존 사서를 근거로 중국 중원에 산재했던 춘추시대 170여 소국의 역사를 비정한 역사책인데, 바로 선우라는 항목이 있다.

선우(鮮于) 일명 중산(中山)이라 한다. 회남자(淮南子)는 우()는 혹 우()라 했다. 선우(鮮于)는 그 선조가 자성인데(其先子姓), 기자는 조선에 봉하고(以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 핑산(平山) 추정)에 봉했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과 봉지 우()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 (子孫因合 鮮于爲氏)”

 

19735최근 천진(天津) 무청현(武淸縣) 고촌(高村)에서 동한(東漢)시대의 선우황(鮮于璜) 비석(碑石)이 발굴되었다. 비석은 높이 2.45m, 81, 두께 12되었다.

 비문(碑文)에는 전서(篆書)로 연희 8(환제 연희延熹 8; AD 165)과 상단에 한나라의 안문태수 고 선우황비(漢故雁門太守鮮于璜碑)’ 그리고 “(선우)의 이름은 황이며, 자는 백겸인데, 그 조상은 은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君諱璜 字伯謙 其先祖出于殷箕子之苗裔~)” 라고 했다.”

 

중국 역사학자 리쉐친(李學勤)

최근 톈진(天津) 우칭셴(武淸縣) 가오춘(高村)에서 발굴된 선우황(鮮于)비는 선우씨는 상나라 기자(箕子)의 후예다’(鮮于氏系商箕子後裔)라고 했다.”

선우(鮮于)는 은()의 후예=기자(箕子)의 후예이다

산융(山戎)의 대파 (동총冬蔥)와 콩 (융숙戎菽), 유비무환(有備無患)

 

견융(犬戎) 또는 융적(戎狄)이 서주(西周)나라 유왕(幽王)을 공격하여 죽이고 왕비 포사(褒姒)는 사로잡고 서북도읍 풍호(豐鎬)B.C 770년에 점령하였고 이후 서주는 멸망하였다.

제희공(齊禧公, B.C.730~698 재위) 25(B.C 707)에 산융(山戎)1만의 병력으로 연(), ()을 지나 제()를 침공한다. 산융(山戎 ; 북융(北戎), 북적(北狄), 융적(戎狄)) 여기서 소패왕 정장공(鄭莊公, 재임 B.C 743~701)의 아들 홀()과 제희공(齊禧公)의 연합군이 침공한 산융(山戎)을 격파한다.

 

산융(山戎)의 대파 (동총(冬蔥))와 콩 (융숙(戎菽))

 

                           콩 (융숙(戎菽))                         대파 (동총(冬蔥)

관자 내언(管子·內言)에 산융(山戎)에는 동총(冬蔥)과 융숙(戎菽)이 있는데 지금 수확한다그래서 천하에 퍼졌다.” 기록되어 있다.

山戎有冬蔥戎菽今伐之故其物布天下

 사기(史記)에 ()는 북으로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고죽국(孤竹國지역까지 갔다가 융숙(戎菽)을 얻어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623융숙(戎菽)이 콩대두(大豆이에요.

    숙(菽 콩 숙)은 콩으로 대두(大豆大荳), 완두(元豆)이다어리석은 사람을 일러 숙맥’(菽麥)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콩과 보리라는 뜻이지요콩의 원산지는 한반도와 남만주로 고조선의 콩이 제나라를 통해 중원으로 전해졌어요.

    동총(冬蔥)은 冬 겨울 동’, ‘蔥 파 총‘ 으로 겨울대파 즉 추운 겨울에 수확하는 대파를 말한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동총은 몸의 한기를 없애주고 면역력을 강화시켜 준다대파는 혈관 건강에 특효라는 비타민 함량이 높다비타민 P는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만들어 혈관 비타민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대파 특유의 냄새를 만드는 성분인 알리신(Allicin)은 혈관을 넓혀 혈전 생성을 막고 혈압을 떨어뜨리는 작용을 한다풍부한 칼륨 성분은 체내 나트륨 배출을 촉진해 콜레스테롤과 혈압의 수치를 낮춰준다.

 

주례(周禮동관(冬官고공기(考工記)에 (가까이에 강한 오랑캐가 있었는데갑옷과 투구를 익숙하게 잘 만들었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오랑캐는 연산(燕山북쪽 일대 분포한 산융(山戎)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고사(故事) 거안사위(居安思危) 유비무환(有備無患)

 

춘추시대 진()나라 사마(司馬)를 지낸 위강(魏絳)이라는 인물이 있어요. 위장자(魏莊子)로도 불렸어요. 춘추시대, ()나라는 초()나라와 패권(覇權)을 다투고 있었다. 君主

 

()나라 도공(悼公) 4(기원전 569), 산융(山戎)이 세운 무종자국(無終子國)의 군주 가부(嘉父)가 맹락(孟樂)이라는 사신을 진()나라에 파견하여 호랑이와 표범 가죽을 바치면서 여러 융족들을 대표해서 화친를 청했다. 위강(魏絳)은 도공(悼公)을 잘 설득해서 산융(山戎) 무종국(無終子國)과의 융화정책을 펼친다.

 

()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있는 약소국인 정()나라는 눈치를 살피면서 나라를 보존해야 했다. ()나라와 초()가 정()나라 땅에서 싸우게 되는데 정간공(鄭簡公)은 진도공(晉悼公)에게 초()나라와 화의를 청해서 화의가 성사되고 모든 나라는 군대가 철수한다.

정간공은 진도공에게 악대(樂隊)와 전차(戰車) 백대와 여악(女樂)을 선물로 보냈다. 여악(女樂)은 궁궐이나 관청에 소속되어 연회를 베풀 때 악기를 타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는 미인을 말한다. 옛날에는 적대국, 적대자에게 정사(政事)를 멀리하고 술과 여자에게 빠지게 하기 위해 여악계(女樂計) 즉 미인계를 많이 사용했습지요.

 진도공은 큰 위강(魏絳)에게 악대의 반을 내려서 공을 치하하려고 했는데 위강(魏絳)은 이 선물을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라.’ 고 했는데, 생각하면 대비를 할 수 있고, 대비가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게 됩니다. 감히 이로써 왕께 경계하시라고 권고합니다.”

書曰, 居安思危. 思則有備, 有備無患, 敢以此規.

 명심보감에는 남달리 귀여움과 사랑을(총애寵愛) 받거든 치욕(恥辱)(이 닥칠 것)을 염려하고, 안락하고 편안하게 지낼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한다

得寵思辱 居安慮危

 

 


중원(中原)을 두렵게 한 고조선(古朝鮮) 거수국(渠帥國), 산융(山戎)

산융(山戎)의 대표적 문화는 옥황묘(玉皇廟) 문화로 알려져 있는데 북경시(北京市) 연경현(延慶县) 근가보향(靳家堡鄕) 옥천묘촌(玉泉庙村)을 중심으로 발굴되었고 그곳에 산융 문화진열관(山戎文化陈列馆)이 세워졌다.

 

                                      산융 문화진열관(山戎文化陈列馆)

                                     산융문화(山戎文化) 분포도

옥황묘(玉皇廟) 문화는 서주(西周) 말기(末期 ; 기원전 8세기 초)에 등장해서 춘추(春秋) 후기(後期 ; 기원전 5세기 초)에 사라졌는데 인접한 중산국(中山國), 동호(東胡)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문화는 하북성(河北省), 연산(燕山) 지역 군도산(軍都山)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장가구(長家口), 동쪽으로는 승덕(承德), 대릉하(大陵河) 유역을 경계로 분포하고 있다.

 

1. 옥황묘(玉皇廟) 지역은 옛 무종국(無終子國)이다.

 옥황묘(玉皇廟)는 옥전(玉田)이라 불렀고 옛 이름이 유주(幽州), 옛날 무종국(無終國)으로, 무종국에 무종산(無終山)이 있고 조하(潮河)가 흘러나간다. 무종자국(無終子國)은 산융(山戎)이 세운 국가이고 현재 하북성((河北省) 당산시(唐山市) 옥전현(玉田縣)에 위치하였고 중원 왕에게 자작(子爵)의 벼슬을 받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땅이 되었다


"산융(山戎), 북융(北戎), 무종(無終)의 세 이름은 실제로는 하나다."

[ 춘추좌전(春秋左傳) 장공莊公 30년조 (BC 664)의 두예(杜預)의 주석(注釋) ]

전북대 배진영(裵眞永) 교수는 춘추초기(春秋初期 ; BC 8세기경)에는 고죽(孤竹)은 옛지명을 이었을 뿐이고 북방민족인 산융(山戎) 집단에 속하거나 그 갈래(支族)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현재 무종(無終), 영지(領地), 고죽(孤竹)은 산융족(山戎族)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2. 산융(山戎)은 중원(中原) 제국(諸國)을 두렵게 하였다.

                                          

"저들은 보병(步兵)이고, 우리는 전차(戰車)이니, 그 침노(侵擄)함이 우리보다 나은 것이 두렵도다." [ 춘추좌전(春秋左傳) 은공(隱公) 9년조 (BC 713) ]

오강원(吳江原)에 의하면 보병전(步兵戰)에 능하다는 것은 짧은 병기(兵器)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고 짧은 병기를 사용하는 것은 북방민족의 특징이라고 한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옥황묘 문화의 청동단검문화와 산융(山戎)의 기록이 어느 정도 일치함을 보여준다.

 

                          옥황묘(玉皇廟)   유병식동검(有柄式銅劍)

                                    오르도스(Ordos)  청동단검

                                       하가점상층문화 청동 단검

옥황묘 문화는 유병식동검(有柄式銅劍)을 사용하였다. 유병식동검을 중국사학계에선 '비수식직인청동단검(匕首式直刃靑銅短劍)'이라 부른다. 옥황묘 유병식동검은 오르도스의 청동단검의 영향을 받아 동물무늬가 새겨져있고 검이 짧다.

 

산융(山戎)은 강대하여 끊임없이 남하해서 중원을 침범하였고 악(), (), (), () 등 중원(中原) 제국(諸國)과 여러 차례 대규모 전쟁이 발생했고 이것은 산융(山戎) 통연(山戎痛燕) 즉 산융(山戎) 이 연()을 아프게 한다.‘ 이라 한다.

 

                                              산융 전사 모형도

25세 남자 묘()에서 남자는 허리춤에 유병식청동단검(有柄式铜短劍)과 동삭도(铜削刀)를 차고 양귀에는 스프링 형태 금귀고리로 치장을 하였다. , , , 개 등은 제물로 순장(殉葬)이 되었는데 그중 가장 많이 개가 순장이 되었다. 순장은 산융(山戎) 문화의 기본특징이고 중원문화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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