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주말 드라마가 이병헌, 김태리 주인공으로 방영되고 있습니다. 

제작비가 약 400억원이나 들었고 넷플릭스와의 방영권 계약 체결로 전 세계 190여 개국에서 동시 방송하게 된다는 것에 놀랍고 화제가 되었지요.

고애신 배역을 맡은 김태리가 조준하고 있는 모습.



여기 아무개 의병(義兵)에 대한 얘기가 있다.

뜨겁고 의로운 이름, 의병(義兵)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무명의 의병(義兵)을,

노비로 백정으로 아녀자로 유생으로 천민으로 살아가던 그들이 원한 단 하나는

돈도 이름도 명예도 아닌, 제 나라 조선[朝鮮]의 '주권'이었다.

[미스터 션샤인]은 흘들리고 부서지면서도 엄중한 사명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이름 없는 영웅들의,

유괘하고 애달픈, 통괘하고 묵직한 항일투쟁사다.


'미스터 선샤인 Mr. Sunshine' 뜻에 대해 알아볼까요?   네이버에 검색해보면  "미국 의회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브라이언 웨스버리가 2009년 말 처음 사용한 용어로, 한국을 세계 경제에 밝은 미래를 가져다줄 수 있는 국가" 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한국 경제가 돋보인 측면도 있지만, 신흥국 가운데 첫 G20정상회의 의장국으로 그만큼 기대를 모은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스터 선샤인 [Mr.sunshine] (한경 경제용어사전, 한국경제신문/한경닷컴 )


역사 시간에 구한말이라 배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애매한 단어네요. 조선 말기도 대한제국 시기도

아닌 것이. 독립 운동을 한 집안은 3대가 망한다고 이런 서글픈 얘기가 있지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대한제국 시기 의병 (동학농민혁명, 을미의병(을미왜변, 을미사변), 을사의병(을사능약), 정미의병(고종 퇴위))은 일제 강점기 독립군이나 광복군으로 이어집니다. 조선 말기 의병은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1984년 7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하고 고종 황제를 포로로 사로잡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 정권을 수립하고 갑오왜란, 갑오경장, 갑오개혁을 일으킵니다.  갑오개혁의 연장에서 을미개혁을 하게 되고 체감할 수 있는 단발령, 머리카락을 짧게 자를 것을 하게 됩니다.  예전에 신체는 부모님께 물러받은 것으로 목숨은 내줘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것이 양반, 유생의 생각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 것을 수치로 생각했던 시대였어요.  그리고 일본 낭인(사무라이)에게 명성황후, 민비(민자영)가 시해, 살인을 비참하게 당합니다.  그러면서 의병 운동이 본격적으로 막이 오르게 되고 일본군과 정부에 탄압받던 동학혁명군도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의병운동은 항일구국 즉 일본에 항거하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입니다. 

구한말 의병운동을 깊이 연구해 온 역사학자인 연세대 오영섭 연구교수는   "현재 의병운동 연구는 일반 민중에 의한 의병운동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병 지도부를 꾸린 유림층과 병사를 구성한 평민층이 연합했다는 것"이라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중앙에는 고종(1852~1919)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수많은 대신들이 있었다. 이 대신들은 다들 지방에 자기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각자 근거지에 수많은 마름, 소작인들이 있었기에 쉽게 전력화·무력화할 기반을 지녔다. 고종이 위에서부터 내려보내는 항일구국 움직임, 일반 민중이 가지고 있던 원초적인 항일의지가 맞물리면서 의병이 일어났다고 본다." 

그는 "그런데 현재 연구는 이러한 고종의 역할은 싹 빼고 의병운동을 이야기한다"며 "교과서 역시 의병운동을 철저하게 일반 민중에 의한 자발적인 항일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병은 군사집단이다. 총, 총알 등 무장을 갖추고 밥을 먹이려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 엄청난 돈을 재야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마련할 수는 없었다.   고종을 비롯해 그 측근 대신들과 연결된 지방 부호들이 그 돈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박경리 소설 '토지'에 이러한 이야기가 잘 묘사돼 있다. 결국 의병은 중앙에 포진한 고종과 그 측근의 구국의지가 재야에 있는 유림·농민 등 민중의 항일의지와 합쳐지면서 일어났다고 봐야 한다.     " 이회영 선생은 국내에 있을 때 의병 조직에 엄청난 자금을 지원했다. 주변에 있는 부호들에게도 '의병에게 자금을 지원하라'고 독려했다. 

그렇게 하느라고 엄청난 고통을 겪었는데 성과가 별로 없어서 고민했다고 측근들이 써둔 기록에도 나온다.   조선의 부호·지주층이 해외로 망명하는 과정에서 들고 간 재산이 독립군을 키우는 1차적인 재원이 된 셈이다." 

조금 빗나간 얘기지만 2차 동학혁명 경우, 전봉준에게 내린 고종의 거의(擧義) 밀서 등 새로운 사료들이 발굴되면서 동학의 2차 봉기는 일본에 맞선 고종과 동학의 연합항전이었음이 새롭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오 교수는 "당대 의병운동은 실패할 소지를 100% 안고 시작했던 것"이라며 "의병장 최익현(1833~1906)의 경우 '내가 패배할 것을 안다. 그렇지만 나는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니 목숨을 걸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의병은 그런 것이다. 현실적으로 패배할 것을 뻔히 알고,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안다. 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 가치 있는 인간 존재로서 자신을 나타내려는, 궁극적인 가치 실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활동인 것이다." 



경주 황남대총 비단벌레로 장식한 말안장 가리개

[퍼옴] 비단벌레 [緋緞,Chrysochroa fulgidissima] http://blog.daum.net/sa55jung/11289641

사오정 2007.03.22 19:15

비단벌레 [緋緞,Chrysochroa fulgidissima] 

딱정벌레목 비단벌레과의 곤충.
 
학명  Chrysochroa fulgidissima
분류  딱정벌레목 비단벌레과
크기  몸길이 30∼40mm
색  몸빛깔 초록색 또는 금록색
서식장소  울창한 삼림지대
분포지역  한국(남부·중부)·일본·중국·타이완·인도차이나

 

몸길이 30∼40mm이다. 몸빛깔은 초록색 또는 금록색이며 화려한 광택이 난다. 매우 화려한 곤충으로 손꼽힌다. 앞가슴등판과 딱지날개(굳은날개)에 붉은색의 가로 줄무늬가 굵게 나 있다. 몸의 배면은 금록색이고 가슴과 배의 중앙부는 금적색이다. 머리 앞쪽이 넓고 날개 뒤쪽은 좁아 오각형처럼 보인다. 수컷은 겹눈이 튀어나오고 배끝이 삼각형으로 파여 있으며 몸의 양쪽에 연한 털이 암컷보다 많다.

 

울창한 삼림지대에 서식한다. 유충은 벚나무·팽나무·가시나무 등의 물관부를 먹어들어가는 해충이며 생활사나 습성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성충은 7월부터 나타나고 가끔 밤에 불빛에 날아들기도 한다. 희귀종으로서 채집을 삼가야 하며, 특히 유충이 자라기 어려으므로 특별히 보호하기 위해서 환경부에 의해 보호종으로 지정되어 있다.

 

성충의 딱지날개는 장식물로 이용된다. 한국의 경우 경주의 신라시대 고분에서 이 벌레의 토막이 발견되었고 중국에서는 벌레에 금속 테두리를 씌워서 복장의 장신구로 사용했다. 일본의 호류사[法隆寺]에는 이 벌레의 딱지날개로 장식한 장롱의 일종인 옥충주자(玉蟲廚子)가 남아 있다. 한국(남부·중부)·일본·중국·타이완·인도차이나 등지에 분포한다.

 

 

금화충(金花蟲), 녹금선(綠金蟬), 길정충(吉丁蟲) 등이라고 하는 비단벌레. 날개가 특히 오색영롱해 옷감이나 마구류 등을 장식하는데 사용하기도 했으며, 비아그라성 약물로도 쓰였다

 

 

[국립경주박물관] 1600년 만의 부활한 비단벌레장식 말갖춤(玉蟲裝飾馬具) 기증식 및 전시

 

 

 

 

 

 

비단벌레장식 말안장

 

 ▲ 금속공예가인 야석(野石) 최광웅(崔光雄.64)씨가 최근 복원한 경주 황남대총 출토 말안장 뒷가리개. 국립중앙박물관이 마련한 '고고학이 찾은 비단벌레의 신비' 특별전(12월19일-2007년 2월28일)에 출품된다

 

예부터 매미나 비단벌레 같은 곤충은 “재생과 부활”의 상징으로 옷이나 마구(馬具) 등의 장식에 사용되었다. 특히 매우 화려한 곤충인 비단벌레는 옛 중국에서 금속 테두리를 씌워 옷의 장신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옛 전통시대에 화려한 장식품으로 쓰였던 비단벌레가 어떠했는지 그 신비로운 세계에 빠져 보자.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는 2007년 2월 28일까지 고고관에서 <고고학이 찾아낸 비단벌레의 신비>라는 특별전시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문화재 속에 담긴 다양한 곤충의 의미를 되새겨보기 위한 목적에서 경주 금관총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비단벌레날개장식 유물과 그 제작과정을 조명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또한 곤충이 우리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 고고학을 통해 곤충의 여러 가지 모습을 살펴보려는 목적에서 이번 전시가 기획되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으로 금관총, 황남대총 등에서 나온 진품 13점, 복원품 3점, 비단벌레 표본 등 총 20여 점이 있고, 구석기시대 지층에서 발굴된 ‘곤충 화석’도 선보인다.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있었으나 요즘에 환경부가 보호종으로 지정할 만큼 희귀종이 된 비단벌레는 어떤 곤충일까. 신라인은 비단벌레(玉蟲, Jewel beetles)를 옷감이나 마구류의 장식에 사용했다. 장식품에 사용된 비단벌레는 겉 날개에 철, 구리, 마그네슘 등의 금속성분을 포함하고 있어 형형색색의 광택을 발산한다. 그래서 수많은 곤충 중에서 비단벌레는 ‘왕의 곤충’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비단벌레는 중국 명나라 약학서 <본초강목>, 일본 에도시대 곤충 관련 책자 <왜막삼재도회> 등에서 남녀의 사랑을 깊게 하는 미약(媚藥)이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이러한 비단벌레가 새겨진 유물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1921년이다. 경주 금관총에서 비단벌레 날개가 새겨진 말안장꾸미개와 발걸이(말을 탈 때 발을 딛고 오르는 부분)가 출토되었다. 이후 1973년 경주 황남대총에서 비단벌레 날개가 장식된 말안장꾸미개, 발걸이, 말띠드리개, 허리띠꾸미개 등의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예를 들어 허리띠꾸미개 뒷부분에 검게 변한 비단벌레 날개가 세로로 층층이 깔려 있다. 말안장꾸미개의 경우 1천 마리 분의 비단벌레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 화석을 통해서 본 최초의 곤충, 비단벌레와 비단벌레가 장식된 유물, 비단벌레 장식 말갖춤의 복원 등이 전시되었다. 관람객들은 국내에서 알려진 비단벌레의 표본을 비교 관람할 수 있으며, 비단벌레 날개가 빚어내는 빛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유물로 신라 왕릉에서 출토된 비단벌레날개가 장식된 허리띠꾸미개,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말안장가리개 등이 출토지별로 전시되고 있다.

요즘 화두가 되는 주제 중에 곤충의 능력을 활용하거나 모방하는 '곤충 테크놀로지’라는 분야가 있다. 과학자들은 인공적으로 합성할 수 없는 물질을 만들거나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감각과 기능을 갖고 있는 곤충을 이용해 인류의 손이 아직 미치지 못한 최대의 자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처럼 신라인이 비단벌레를 가지고 여러 가지를 장식하거나 생활에 이용했다는 것을 이번 전시는 잘 보여준다. 우리 모두 가족들과 함께 비단벌레가 쓰인 유물들을 보며 신라문화의 화려한 면모에 빠져 보자.

최근 모 드라마 '신사임당, 빛의 일기' 가 신사임당 주인공으로 이영애씨로 하여 방영되고 있더래요.  5만원 권 지폐에 신사임당이 들어가 있습니다.

 많이 들어봤는데 과연 신사임당에 대해 한번 자세히 살펴보더래요.

신사임당申師任堂 에서 사임당은 호인데 이름은 신인선(師任堂申仁善)이다.

사임당은 중국 은나라 걸왕을 폐하고 주나라를 건국한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흠모하여 자신의 호로 삼인데 조선시대에는 자칫 역모로도 3족이 멸할 수 있십더.

사임당 가게도

 

 

아바이 신명화(申命和)는 장인 이사온(李思溫)과 기묘사화에 참여하였고 관직을 단념하고 강릉 향리에 은거하였다.  기묘사화는 살짝 알아보겠습니다.

 

http://blog.naver.com/apforhis  2006.10.12

기묘사화, 기묘명현 己卯名賢

 

기묘사화는 중종 때에 일어난 사화입니다.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고자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사람을 대거 등용합니다. 그래서 현량과를 실시하고 소격서를 폐지하는 등의 개혁정치를 시도합니다만 그들의 사상자체는 너무 급진적이었는지 기존의 훈구파 (중종등극의 공신들)들의 반감을 사게됩니다. 그러던 중 연산군의 폐위와 중종등극에 관한 공신록에서 훈구파 자신들의 공훈이 대거 삭제되자 반감이 극에 다다른 훈구대신 남곤, 심정 등에 의해 탁핸되어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사림들은 우배 또는 사사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을 기묘사화라고 하는데 이때 기존의 훈구세력에게 희생된 신진사림들을 일컫어 바로 기묘명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사임당의 아버지였던 신명화도 이 신진 사림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었으나 정국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한 이유로 원래는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처벌받았어야 했으나 정상참작이 되어 화를 면한 것입니다.

 

아바이 신명화(申命和)는 평산 신씨 시조 신숭겸의 19대손이다.

고조부 신개 세종대왕와 재위 시 위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증조부 신자승 성균관 대사성은 태종의 딸 정선공주와 남이 장군사이에서 태어난 큰딸과 혼인했다. 조부 신숙권은 영월군수를 역임했다.

아버지 신명화는 41살에 소과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임진왜란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은 그의 9촌 조카였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 14대 방손이 된다.

 

신사임당 신인선의 외가는 용인 이씨 집안이다.

세조 때의 원종공신(原從功臣) 이유약(李有若)의 손자인 이사온(李思溫)

이씨의 증조부 최치운은 세종대왕 재위시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조부 최응현은 형조참판을 지냈다.   강릉 오죽헌을 지은 사람이 용인 이씨의 외조부 최치운이며, 최치운은 아들 최응현에게 최응현은 사위 (용인 이씨) 이사온에게, 이사온은 사위 신명화에게 주었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덕수 이씨로 사대부 집안이었다.

덕수 이씨 이기, 이행 형제의 조카인 이원수 당시 이원수는 이렇다 할 관직도 없었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두 당숙이 영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한 고관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난했다. 이원수는 돈령부사 이명진의 4대손으로 할아버지 이의석최만리의 사위로 현감을 지냈고, 증조부 이추는 대제학 윤회의 사위로 군수를 역임한 바 있다.

 

신사임당의 자년 5남3년인데 그 중에  첫째 이선, 둘째 이번, 셋째 아들 대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이이, 넷째 문인 화가로  이우, 다섯째 이번, 문인화가 딸 이매창이 있다. 

 

아버지 신명화(申命和)공의 집은 한성(漢城)이었고 어머니 이()씨의 친정은 강릉 북평촌이다. 어머니 이씨는 외조부 생원(生員) 이사온(李思溫)과 외조모 최()씨 사이에서 난 무남 독녀라 항상 친정 부모를 모시고 강릉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임당(師任堂)도 어려서 늘 어머니의 친정인 북평촌에서 살며 외조부의 교훈과 어머니의 훈도 아래서 자랐다. 안견(安堅=세종 때 사람)의 화풍을 본받아 산수 포도 풀벌레 등 여러 가지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동시대의 여성으로는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등 있다.

 

쿠르드는 고대시대 미타니(Mitani) 왕국이라 불렀다. 프리기아인이 마케도냐에 이웃으로 있을 때 브리지(Brige)라 불렸고 아나톨리아(Anatolia) 소아시아로 이주해서 프리기아로 불려졌다. Brige 는 Breg 단어와 관련있고 언덕이라는 의미이고 유사 단어로는 Gora 가 있다. 헤르도투스가 언급하길 '아르메니아는 프리기아로 부터 온 정착자' 라고 한다. 킴메르가 침입해서 수도 고르디온(Gordion) 이 696 BC 에 함락되었다. Xenophon 은 Gordyne (Corduence) 언급했고 오느날 Gordyne 이라는 지명이 있고 쿠르드인이 살고 있다.

멸족위기의 차탕족과 그들의 순록

카테고리 : 몽골의 자연과 동물 | 작성자 : 파도

차탕족(Tsaatan)이라는 몽골내 소수민족이 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순록과 함께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구수 200명 가량이라 겨우 명맥을 이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사는 곳은 몽골 북서부 홉스골이라고하는 큰 호수부근의 원시 타이가숲 지역이다. 그리고 그들이 키우는 사슴을 타이가순록이라고 부르는데 이 또한 숫자가 몇 백마리(200~700)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이들 순록은 유일하게 차탕족으로 부터 가축으로 길들여진 종이며 그들과 함께 살면서 사람소변으로 부터 소금을 섭취하고 늑대의 습격을 피한다. 차탕족은 순록에게서 젖과 고기를 얻고 이동수단으로 이용한다.

 

200명 밖에 안되는 극소수의 이 종족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몽골 샤머니즘의 성지라는 홉스골지역에 살면서 순록을 타고다니며 인디언 천막과 흡사한 곳에서 사는 모습의 오래된 영화를 TV를 통해 보면서 부터이다. 갸냘픈 듯한 순록을 타고다닌 것 부터 호기심이 발동하였었다. 그리고 이웃블로거 캉스독스님의 몽골사슴에 관한 질문과 요청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진 : 타이가 순록)

 

몇년 전 홉스골 호수를 방문하였을 때 관광객을 상대로 수공예품을 파는 그들을 본적이 있다. 보통은 순록의 먹이 허부츠(이끼종류)를 따라 2주~10주단위로 거처를 옮기기 때문에 깊은 숲속이 그들의 터전이다. 아마도 여름철에는 순록의 먹이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없기도 하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내려와 쉽게 돈벌이를 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모기를 극히 싫어하며 추운곳에 사는 순록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바이러스질환에 감염되는등의 부작용으로 죽거나 도망하는 일도 일어난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런 세속의 접촉을 거부하고 숲속 깊은 곳에서 고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긴 하다.

 

당시 공예품을 파는 좌판을 펼쳐두고는 아이에게 글쓰기 책으로 열심히 공부시키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아마도 그 어머니는 아이를 자기처럼 숲속생활을 하도록 두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을 하였다. 도시화와 문명화는 이렇게 그들을 바꾸고 있었다. 지금의 차탕족 부모들이 자식들을 모두 도시로 보내고 그 자식들이 다른 종족과 결혼할 20~30년 후의 근미래에는 기록에서나 차탕족과 타이가순록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최근 외부세계와의 교류가 많아 지고 몽골정부의 지원정책에 힘입어 자식들이 하나 둘 울란바토르로 유학을 떠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사는 홉스골지역은 몽골에서 2번째로 큰 호수가 있는 지방이며 그 호수의 이름이기도 하다. 제주도 1.5배 크기로서 동서폭 약30km 남북길이 136km가량이고 바이칼호수와 직선거리 20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실지로 홉스골 물이 바이칼로 흘러가는 상류 수원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물길은 1000km가량 떨어져 있다. 수면의 높이는 해발 1645m 최대 수심 262m이다. 한 여름에도 물의 수온이 얼음처럼 차가워 물고기가 거의 살지 못한다. 잡티하나 보이지 않는 호수의 물은 깊은 바닥으로 인해 어둡게 보이고 경사가 가팔라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고산 산악지대로서 한여름에도 밤이면 영하로 떨어지고 겨울철 영하 40도로 내려가는 극한의 툰트라기후이고 원시의 타이가 침엽수림이 빽빽히 들어찬 곳이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그중 최고봉은 3,492m 높이의 러시아 국경방향 뭉크사리닥이라는 산이다.

 

 (사진 : 홉스골Hovsgol 호수) 

 

차탕족은 당나라(A.D. 618-907) 문헌에 언급된 기록이 있고 두카족(Dukha) 으로도 불리며 투르크족의 직계후손으로 알려져있다. 그들은 오르츠라고 하는 삼각뿔 형태의 천막을 치고 생활하는데 인디언의 것과 매우 흡사하다.

 

이를 근거로 이들이 2만년전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인디언의 조상이라고 추측 하는 경우도 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유래에 관하여는 여러학설이 있고 원추형 천막을 사용하는 부족은 그 중 일부라서 관련을 단정할 만한 연구는 없다. 그냥 심증만 간다고 해야 하겠다.

 

참고로 한민족과도 관련이 있다는 투르크족은 기원전 3세기부터 남시베리아, 카자흐 및 바이칼일대에 살았던 유목민인데 흉노의 별종으로서 현재 터키, 카자흐스탄, 우즈벡, 위구르등 튀르크어파를 모어로 하는 여러 국가로 분리되어 있다. 이들 모두 투르크족 국가로 분류된다. 동양권에서는 돌궐족으로도 불렸는데 6세기말 동으로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 흑해연안까지 아우르는 영토기준 역대 10위의 대제국을 이룬적도 있었을 정도로 세력이 광대하였다.

 

하여간 이 지역에서 오랜 새월동안 차탕족은 순록을 가축으로 기르며 숲속에서 수렵으로 생존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인구와 순록의 숫자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현재 추정되는 부족수는 200여명 50여가구이며 그들과 생활을 같이하는 순록은 가구당 7~70마리 정도라고 하며 타이가숲을 통털어 200여마리(몽골전체 700여 마리) 밖에 안된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렇게 부족한 개체수는 근친교배로 이어지고 그 결과 결함이 있는 새끼의 출산이 많다. 이는 역시 적은숫자로 부족내 혼인만을 해온 차탕족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순록의 개체수가 감소하는 결정적 이유로 지목되는 것은 차탕족들이 가축인 순록을 식량으로 쓰기 위해 예전보다 더 많이 죽이기 때문이다. 이는 몽골전역의 광산개발로 인한 자연환경의 변화로 인해 수렵해 먹을 야생동물이 감소한 결과이다. 극한의 상황이 아니면 늙거나 병든 순록만을 잡아서 고기로 사용하였지만 지속적으로 악화된 상황으로 막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환경적 요인은 포식자인 주변의 늑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기에 순록을 공격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한다. 순록으로서는 천적이 둘씩이나 생겨버린 꼴이다. 또 한가지 요인을 더 들자면 외부인과의 접촉이 늘면서 중국인들이 순록의 뿔, 꼬리 및 성기를 찾고있다. 뿔을 짜르게 되면 생식기능의 저하가 일어나 번식률이 떨어지는 것으로 의심하고있고 최근에는 그들도 녹용채취에는 조심을 한다고 한다.

 

(사진 : 무스moose를 사냥하는 차탕족 / 출처 : 내셔널지오그래픽 http://news.nationalgeographic.com/news/2004/11/photogalleries/reindeer_people/photo5.html)

 

위 사진은 무스(moose, 말코손바닥사슴)또는 엘크라고도 불리우는 현존하는 최대의 사슴으로써 몸집이 황소만 하다. 몸길이 2.5~3m, 어깨높이 1.4~1.9m, 몸무게 360~640kg 가량이다. 사진의 무스는 이보다 훨씬 더 큰놈이다. 정확한 이름을 갖지못하고 무스나 엘크로 혼용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몽골사람들의 소문으로는 코끼리 보다 큰 놈도 있다는데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이런 희귀 종류는 차탕족의 순록과 마찬가지로 개체수가 백이 안될 정도로 극히 적다. 사슴은 통상 큰뿔과 맛있는 고기로 인해 사냥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포식자 늑대의 먹잇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차탕족과 순록에 대한 전문 사진을 찍어온 사람이 있어서 그의 사진을 좀 퍼왔다.

* 사진출처 : http://www.hamidsardar.com/portfolios/dark-heavens/platinums/ , Hamir Sardar作

 

맨 끝의 사진은 차탕족 무당이 굿하는 모습이다. 이 무당은 순록을 70마리 가지고 있으니 부자인 듯 한데, 최근 사냥거리가 별로 없어서 할 수 없이 순록을 도축하고 있다고 한다.

 

부연해서 설명할 것이 한가지 더 있는데 홉스골지역은 몽골샤머니즘의 성지이다. 필자가 아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날 신내림을 받으러 홉스골에 한달간 휴가를 내고 갔다온적이 있었고 곧바로 직장을 그만두고 무당이 되었다. 우리나라 무당과 시스템(?)이 매우 흡사하였다. 몽골은 전세계 샤머니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기록상으로만 따지면 원조라 하겠으나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 도처의 샤머니즘 흔적이 있으니  증명할 수는 없겠다.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차탕족과 타이가순록이 앞으로도 계속 생존하였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이고 우리가 그 생활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만 볼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몽골정부나 세계자연보호단체 같은 곳에서 인류자연유산을 보호하는 개념에서 그들이 굳이 도시로 나가지 않아도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다. 

참 하나 빼먹은 것이 있어서 다시 왔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무스(말코손바닥사슴)를 유럽 일부국가에서는 엘크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북아메리카와 우리나라에서는 이 사슴을 엘크로 부르지 않고 와피티 사슴을 엘크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양록 농장에서 사슴 뿔(녹용)을 얻기 위해 키우는 엘크들은 무스가 아니라 북미나 러시아에서 가지고 온 와피티들입니다.즉 유럽(스칸디나비아 국가)과 미국에서 엘크라고 부르는 사슴은 전혀 별개의 종입니다. 참고로 무스는 최대 800kg까지 자라며, 와피티(한국인들이 말하는 엘크)는 500kg까지 자랍니다. 한우가 보통 500kg이 되면 도축하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의 사슴들입니다. 거듭 파도님의 깊은 마음과 헌신적인 블로그 운영에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파도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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