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김정민 박사님 '고대사 한국어 일본어 몽골어 카자흐어의 유사성 ' 강의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 이름은 몽골어이고 신라와 가야는 투르크어이다는 내용입니다. 

신라 가야 

신라 가야 

신라 가야

신라 가야

고인골 모계 DNA 분석표

[퍼옴] 압록수(강), 중국 대륙에 흐르는 확고부동한 증거들

성헌식의 ‘대고구리’…청년 시절에 도망 다니는 미천태왕 기록서 방증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4-12-07 23:39:08

 ▲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스카이데일리

[학력]
△경남 밀양 출생
△성균관대학교 졸업

[약력]
△사단법인 우리문화선양회 우리역사교육원 대표 역임
△인터넷신문 플러스코리아(www.pluskorea.net) 역사칼럼리스트
△(현) 인터넷신문 역사복원신문(www.historynews.kr) 편집인
△(현) 인터넷신문 고구리역사저널(www.greatcorea.kr) 편집인
△(현)사단법인 고구려역사문화 보전회 사무국장
△(현)강원도 인재개발원 강사
△(현)경기도 개발연구원 의정포럼 강사
△(현)구리시청 민방위교육 강사
△(현)구기고등학교 역사체험호라동 강사

[저서]
△천년 만에 밝혀진 안시성 살수







폭군 봉상왕이 창조리에 의해 폐위되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고구리의 태왕은 서천태왕의 아들인 고추가 돌고와 을씨의 소생인 을불(乙弗)로 이가 바로 그 유명한 미천(美川)태왕이다. 성품이 아랫사람들에게 너그럽고 후했으며, 지략이 있고 능히 무리들을 절제하였다. 미천태왕의 출생과 어릴 적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278년 정월, 서천태왕이 밤에 연회를 베풀고 있던 중 갑자기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가 나면서 작은 개 모양의 불빛이 돌고(咄固) 태자의 침전으로 날아들었다. 천문을 관장하던 태사는 “천랑성(天狼星)이 궁중으로 떨어졌으니, 반드시 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해 10월 을씨가 을불을 낳으니 오색구름이 궁궐을 감싸고 향기가 그윽했다. 을불은 기골이 장대한 우량아로 태어났으며, 기이한 영웅호걸처럼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칭송했다고 한다.
 
숙신을 정벌한 달가가 양맥으로 떠날 때 아우 돌고를 함께 데리고 갔다. 서천태왕은 돌고의 아들 을불을 품에 안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이들을 전송했다. 당시 을불은 불과 3살이었는데도 달가 백부가 필히 크게 이길 것이라고 말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런 이유로 첫 싸움에서 얻은 땅 알하(戞河)를 을불읍으로 삼고 돌고가 직접 다스리게 했다.
 
281년에는 4살짜리 을불을 태자로 삼고 이듬해에는 을불의 탄생을 예견했던 태사를 스승으로 삼아 효경을 가르쳤고, 을불은 나이 아홉 살에 능히 말 타고 활쏘기까지 했다. 하루는 태왕에게 “무(武)만을 좋아하고 예(禮)를 모르면 꼭 일우 백부 같아집니다. 그래서 저는 예를 익히고 효를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아뢰니, 서천태왕은 크게 놀라면서도 기뻐하며 그렇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서천태왕이 붕어하고 등극한 봉상왕은 293년 9월에 아우 돌고가 딴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로 사약을 내려 죽일 때, 을불은 좌보 상루의 집에 있었고 상루는 집안사람인 재생과 담하를 시켜 을불을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불안감을 느낀 을불은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모의 집으로 달아나 숨어서 머슴살이를 했다.
 
 ▲ 밤새 방죽에 돌을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한 을불 <이미지=필자제공>

음모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해 을불을 심하게 부려먹어 무척 고생스러웠다. 그 집 옆에 방죽이 있었는데 개구리가 울면 을불로 하여금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지시했다. 을불은 밤새도록 기와조각이나 돌을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했고, 낮에는 땔감나무를 하라고 하니 잠시도 쉬지를 못했다.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을불은 1년 만에 음모의 집에서 도망쳐 동촌(東村)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장사를 하게 되었다. 하루는 배를 타고 압록(鴨淥)에 이르러 소금을 가지고 강의 동쪽에 있는 사수촌(思收村)에 사는 사람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 집 노파가 소금을 달라고 해서 한 말가량을 주었는데도, 또 달라고 청하니 이번에는 주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노파가 원망하며 자신의 신발을 소금주머니에 숨겨놓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을불은 소금을 팔러 길을 나섰는데 노파가 쫓아와 소금주머니를 뒤져 신발을 찾아내고는 관가에 을불이 자기 신발을 훔쳤노라고 무고해버렸다. 이에 압록의 지역관리는 신발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에게 곤장을 치고는 풀어주었다. 이 시절 을불은 얼굴이 삐쩍 마르고 파리해지고 의복은 남루해 사람들은 을불을 마주하고도 그가 왕손임을 몰라보게 되었다.
   
 ▲ 죄 없는 을불을 신발도둑이라고 무고한 사수촌의 노파 <이미지=필자제공>

이 무렵 국상 창조리는 곧 폭군 봉상왕을 폐하고 새 태왕을 세우려고 하던 참이었다. 창조리는 을불이 왕손이면서도 검소하고 인자해 조부 서천태왕의 뒤를 이을만하다고 여기고는, 조불과 소우 등을 시켜 산으로 들로 을불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마침내 비류수(沸流水)에 이르러 배 위에 한 청년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비록 얼굴은 야위었으나 풍채나 행동거지가 보통이 아님을 보았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 아닌가 생각하고는 그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지금 주상이 무도해 국상이 군신들과 함께 왕을 폐하려고 합니다. 왕손께서는 행동이 검소하고 인자하며 사람을 사랑하므로, 조상의 유업을 이을 수 있다 하여 저희들을 보내 맞아오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을불은 이들을 의심하여 “"나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시오”라고 말하자, 소우 등은 “지금 왕이 인심을 잃은 지 오래여서, 실로 나라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이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컨대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소우 등은 을불을 모시고가 군신의 예를 거행하고는 오맥남(烏陌南)의 집으로 맞아들였다.
 
봉상왕과 후산(候山) 북쪽에서 사냥하다가 이 소식을 듣은 창조리가 무리들에게 “나와 뜻이 같은 분은 따라 하시오”라고 말하고는 갈대 잎을 모자에 꽂으니 모두들 따라했다. 이윽고 창조리가 “지금 주상은 무도합니다. 을불대왕이 덕이 있으니 그를 추대하고 싶소이다”라고 말하자, 모두들 크게 기뻐하며 손뼉치고 발을 굴렀다. 이에 그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하고는 별궁에 가두고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그리고는 곧 을불을 맞아 옥새를 올리고 태왕위에 오르게 했다.
 
을불이 곤장을 맞은 압록수는 어디인가?
 
을불이 소금장사를 하다 노파에게 고발을 당해 곤장을 맞은 곳인 압록수(鴨淥水)는 과연 어디일까? 식민사학계에서는 이 압록수를 지금의 압록강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을불이 압록의 동쪽에 있는 사수촌에서 노파에게 봉변을 당하게 되는데, 이 말은 압록수가 남북으로 흘렀다는 말인 것이다. 지금의 압록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지 않은가!
 
당시의 압록수이 어느 강인지는 아래 <신당서 열전 145-동이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번역)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海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원문) 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鸭头, 号鸭渌水, 历国内城西, 与盐难水合, 又西南至安市, 入于海。而平壤在鸭渌东南, 以巨舻济人, 因恃以为堑。
 
<한서지리지>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海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漢書地理志: 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 신당서의 기록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압록수와 고구리의 도성들 <이미지=필자제공>

위 기록에 근거하면 압록수 변에 국내성, 평양성, 안시성, 서안평이 모두 위치해야 지리비정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식민사학은 압록수를 현 압록강, 국내성을 집안, 평양성을 평양, 서안평을 압록강의 하구 단동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국내성(집안)은 압록의 북에 있으며, 평양성(평양)은 압록강이 아닌 대동강변에 있고, 안시성은 요하 강변으로 비정하였으므로 이 지리비정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비류수는 산서 남부에 있는 강 <이미지=필자제공>

압록수를 현 산서성을 가로지르는 분하에 가져다 놓고 위 신당서의 지리비정을 하면 희한하게도 신당서의 기록과 딱 맞아 떨어진다. 또한 <한서지리지>에 압록수는 2,100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현 분하의 길이인 716km와 크게 차이가 없다. 즉 중국과 일제는 이러한 지명 조작을 통해 우리의 역사 강역을 축소시키고 왜곡하는 작태를 부렸던 것이다.
 
을불이 소우에게 발견된 비류수는 어디인가?
 
을불이 소우 등에게 발견된 비류수는 244년 위나라의 1차 침공 때 동천태왕이 관구검의 1만 군사 중 3천 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비류수를 검색하면 강수(絳水)가 나오는데 그 설명은 다음과 같다.
 
강수(绛水) : 1) 근원은 산동성 황현 동남쪽 20리 장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황현 동쪽에서 황수하와 합해져 바다로 들어간다. (源出山东黄县东南二十里张山,北流经县东合黄水河入海)
 
2) 산서성 곡옥현 남쪽에 있는 일명 백수 또는 비수(沸水)로 근원은 강현 서북쪽 강산 아래에서 나와, 곡옥현 남쪽까지 서북류해 회수로 들어간다. <수경주> 강수는 강산에서 나와 서북류해 회수로 흘러간다. (在山西曲沃县南, 一名白水 又名沸水, 源出绛县西北绛山下, 西北流至曲沃县南入浍水, 《水经注》绛水出绛山, 西北流注于浍。)
 
3) 근원은 산서성 둔류현 서남 팔십리 반수산의 남쪽에서 나와 8개 샘이 솓는 여의에서 나와 합쳐져 동류해 로성현 경계 교장촌까지 흘러 장하로 들어간다. <수경주>의 소위 진수이다. <청일통지> 수경주에 강수는 있고 람수는 없는데, 그 강수의 흐름은 모두 지금의 람수이고 별도로 진수가 있는데 곧 강수의 흐름이라 현재 부·현의 모든 지리지와 맞지 않는다. <위서지형지>에 강수가 있고 역시 람수도 있으나 지금의 물길은 같다.
 
 ▲ 대청광여도 산서성 남부에 그려진 염지 <이미지=필자제공>

(源出山西屯留县西南八十里盘秀山之阴, 八泉涌出如珠, 合而东流 至潞城县界交漳村入漳. 水经注谓之陈水, <清一统志>水经注有绛水而无蓝水, 其绛水所行之道, 皆今蓝水也, 而别有陈水, 则今绛水所行之道也, 与今府县诸志不合, 惟魏书地形志有绛水, 又有蓝水, 与今水道相同。)
 
4) 사천성 간양현 성 북쪽에 있는 지금의 강계하를 말한다. (在四川简阳县城北,今曰绛溪河,《寰宇记》绛水在州南,色赤如绛,故名,王洙九州要记云,州在赤水之北是也。)
 
 ▲ 운성염지에서 생산되고 있는 소금 <사진=필자제공>

비류수는 위 4가지 강수 중에 2)번으로, 산서성 남부 운성시의 동쪽에 있는 강현에서 나와 임분시의 남쪽 곡옥현 남쪽을 흐르는 회수로 들어가는 작은 물길이었던 것이다. 도망 다니는 을불의 행적으로 보아 압록수와 비류수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일대에서 활동하던 을불이 소금장사를 했다고 했는데, 그 소금은 바로 산서성 남부 운성염지(運城鹽池)에서 생산된 소금을 말하는 것이다.


“온달과 온군해는 중앙아시아에서 왔다”

[중앙일보] 입력 2012.11.06 00:38 / 수정 2012.11.06 00:43
 
연대 지배선 명예교수, 카자흐스탄 학술회의서 주장
“옛 소그디아 왕국 온씨, 온달·온군해와 혈연관계”
고구려·통일신라와 교류 … 경주 괘릉 등에 흔적 남아
 
고구려의 ‘바보 장군’ 온달(溫達)과 신라 김춘추의 호위 무사 온군해(溫君解)가 중앙아시아 옛 소그디아 왕국의 왕족과 혈연관계라는 주장이 나왔다.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지배선 명예 교수는 1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고려대 러시아 CIS연구소·유라시아국립대 공동 주최로 열린 한-중앙아 국제학술회의서 이 같은 내용의 ‘한반도 역사에 나타난 소그디아인 온씨 2명’학설을 발표했다. 그는 지난해 백산학회지에 ‘온달의 중앙아 출신’설을 제기한 데 이어 올해 온군해를 추가했다.

 

지 교수는 “온달은 당시 강(康)국이라 불리던 소그디아의 왕족 출신이 고구려 여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삼국사기』 권 45 ‘온달전(溫達傳)’의 ‘온달의 얼굴이 멍청해 웃음거리가 됐다…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다녔다’는 기록은 “신분 질서가 엄한 고구려에서 오늘날 다문화 가정 출신 자녀가 겪은 것과 같은 어려움을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새로 찾아낸 『삼국유사』 ‘진덕왕본기(眞德王本紀) 2년 기사’를 인용, “김춘추를 호위하며 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는 갓과 옷 차림’으로 위장, 고구려 병사의 칼을 대신 맞고 죽은 온군해도 소그디아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통일신라 8세기경 제작된 경주 괘릉의 무인석상. 연세대 지배선 교수는 “얼굴은 서역인이고 의상은 소그디아 스타일”이라고 말했다(왼쪽 긴 사진). [중앙포토] 흥덕왕릉 무인석상의 뒷모습. 오른쪽에 보이는 작은 뒷주머니는 ‘포체테’라 불리는 전형적인 소그디아 스타일이라고 지 교수는 말한다(오른쪽 가장 위). 행낭을 지고 여행하는 소그디아 사람의 인형. 7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국가박물관 소장(오른쪽 가운데).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역사학자들이 긴급 대담을 했다. 왼쪽부터 코지로바 카자흐스탄 유라시아 대학 교수, 지배선 연세대 명예교수, 알리세프 우즈베키스탄 고등교육부 산하역사연구소 위원, 미나라 키르키즈 한국대학 교수(오른쪽 가장 아래).

지 교수는 두 온씨가 소그디아 왕족이라는 근거로 중국 사서인 『전당문(全唐文)』 권999 ‘康國王烏勒伽傳(강국왕오륵가전)’, 『북사(北史)』 권 97 ‘강국전(康國傳)’, 구당서 권 198, 위서 관씨지에 있는 ‘소그디아는 강국(康國)이라 불렸으며 그 왕족은 온씨’라는 기록을 들었다. 지 교수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해 고구려·신라·백제의 사서, 중국 사서에서 온씨는 오로지 소그디아에만 있다”고 설명했다.

소그디아인의 기질에 대해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이곳 왕들은 호탕하고 용맹하다. 대부분 용사다…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전투할 때 그들 앞에 나타날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신당서(新唐書)』 권 221 ‘강전(康傳)’에는 “남자 20세가 되면 이익을 도모할 수만 있으면 안가는 나라가 없었다”고 썼다. 요컨대 용맹했던 소그디아 왕족들이 국제적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 온달과 온군해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지 교수는 “고구려는 돌궐과 관계가 깊었으며 돌궐의 지배 아래 있던 소그디아와의 교류도 활발했다”며 “ 현재 사마르칸트에 있는 소그디아 왕국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고구려 사신이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 아울러 “소그디아인은 통일 신라까지 진출했으며 그 증거가 경주 괘릉과 흥덕왕릉의 서역인 무인상”이라며 “지난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대 복식사 연구자가 무인상의 허리띠 위로 드리운 복장, 포체테라 불리는 작은 뒷주머니가 전형적인 소그디아 스타일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학술회의에 참가한 우즈베키스탄의 알리세프 박사(역사학)는 “고대 무역사에 따르면 소그디아인의 활동 영역이 한반도까지 미쳤을 것”이라며 “고구려가 소그디아로 사람을 보냈으니 소그디아인이 고구려에서 결혼해 온달을 낳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카자흐스탄의 코지로바 바시에브나 박사(역사학)도 “고대무역 연구에 따르면 소그디아가 고구려로 보이는 나라와 거래한 기록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소그디아(Sogdia)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5~8세기에 융성했던 나라. 소그디아인들은 이란계로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무예에 능하고 이재에 밝아 흉노·돌궐·위구르 등 주변 유목국가를 넘나들며 다양하게 교역했다. 소그디아어는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을 지배했던 대 돌궐제국에서 공용문자로 쓰일 정도였다. 


 

본 글은 송동근 박사님 '고구려 무쿠리' (흰두루) 책에 있는 자료이다.

대륙인 고려 무쿠리高麗(畝俱理) "당唐저서 범어잡명梵語雜名 기록"

무굴제국은 몽고의 후손들이 세운 우즈베크 공화국에서 태어난 바부르로부터 시작한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ddleway49&logNo=110082700288
러시아인들이 우즈베크 공화국 으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들 역사적 아이러니한 순환구조가 아닐수없다


무굴 제국
http://ko.mythology.wikia.com/wiki/%EB%AC%B4%EA%B5%B4_%EC%A0%9C%EA%B5%AD
무굴 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본래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티무르의 5대 직계후손으로, 1483년 2월 14일 우즈베크(Uzbek)의 시르 천(川) 상류 페르가나에서 태어났다.[4][5] 그의 아버지의 왕국은 중앙아시아 바다크샨(Badakshan)에 있는 페르가나의 조그마한 공화국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1).무굴은 몽골인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이다.
한반도의 고대와 서역간의 직접문명 중국 실크로드보다 앞선 몽골리안 루트 교류가 
고대 서역의 몽골로이드mongoloid 동서양간 교류를 이끌었던 고아시아인들
동양서양 반씩 닮은 위그르인

(2).내몽고內蒙古(현재 중국 영토 내몽고자치구)에 있다는 이른바 "고구려 성터"
만주국시대의 지도에 고려성(高麗城)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몽고학자 헤페를레가 발표
몽골지역에서 6개의 고구려 성터 발견
성터는 동몽골에서 바이칼 호수근처의 중서부 몽고지역에 걸쳐 


(3).중국 당나라때 예언(禮言)이 저술한 [범어잡명]
중국어 학습 자료에도 (상대적 언어)산스크리트어로 정렬
중문편배적범문학습자료中文編排的梵文學習資料에도 고려 무쿠리高麗畝俱理mu ku ri 라는 국명을 중국인 스스로가 명백한 기록이 존재 한다 (한국의 고구려가 지방정권이면 당나라 덕종(德宗) 때에 편찬한 『범어잡명(梵語雜名)』기록은 중국 당나라 역사는 가짜가 된다 

(4).

11세기 이전에 인도에는 역사는 있어도 역사서가 없었다
무굴 제국 시기에 형성된 문화는 인도 역사에서 황금기를 누렸다. 특히 건축,문학,음악 등은 힌두 문화와 터키-페르시아계 문화의 융합으로 오늘날 인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5).고대 비잔틴 역사에 Mouxri로 쓰여 있는 
“무쿠리(畝俱理; 木骨閭)”가
어느 나라인가에 관해 서양학자들 사이에 설이 분분했으나 
최근에야 이것이 “한반도 Korea”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6).당나라 덕종(德宗) 때에 편찬한 『범어잡명(梵語雜名)』에서도
당의 예언(禮言)이 저술한 [범어잡명]에는 "고려(高麗), 무구리(畝俱理)"로 되어 있고, 그 아래 고대 산스크리트어가 표기되어 있다. 


(7).아직 소멸되지 않고 남아 연관 있는 
코리아,불가리아,헝가리아Hungária ,몽골리아, 
카레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이있는 
루마니아 북서쪽 헝가리아 국경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도시명칭은 헝가리 귀족 카롤리(Károlyi)에서 유래하였다 
러시아인를이 코리안을 칭할때 카레이스키라는것은 
이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62]고구려 불고기貊炙(맥적), 너구리貊라면의 뿌리,Elbenkü= 山獺 B

 



**앞의 A~
몽골과 코리아(高句麗)의 기원지 북대흥안령 Ergune시(多勿都) 스텝 일대에서는 너구리를 맥(貊)이라고 부르고, 이 지역 『동물도보』에는 학명이 Ussurian Racoon Dog인 「貊」의 별명을 수달(水獺)에 대한 산달(山獺)이라고 하며, 몽골어로 Elbenkü라고 한다고 적어놓았어요.

여기가 내몽골이어서 「貊」 에 관한 호칭을 몽골어와 중국어로 모두 함께 쓴 겁니다.

1999년 가을에 훌룬부이르 대학교 생물학과 황학문(黃學文; 몽골족)교수가 “한국인들은 참 웃깁니다!”라며 일러준 사실이지요.

몽·한의 핵심 기원지인 이곳(Ergune Steppe)에서는 이렇게 뻔한 걸 가지고 왜 그리 “貊이 아주 뭔지 모르겠노라”며 오래 호들갑들을 떨고 있느냐는 거였지요.

그 동안 현지인인 헤룽쟝 성 동물자원연구소 박인주(朴仁珠; 조선족) 교수의 이런 오랜 현장조사 결과 보고서를 그이를 직접 한국으로 초청해[강원대 성경일 교수] 발표해 듣게도 하고, 심지어는 조선조의 몽골어사전인『몽어류해』(蒙語類解)[ 下 「走獸」]에서도 너구리인 맥(貊)을 「얼벙쿠(Elbenkü) : 山獺」이라고 적고 있다는 우리의 전거(典據)까지 직접 들이대며 기회 있을 때마다 관계분야 연구자들에게 설명을 해온지가 벌써 10여년이 훨씬 넘었지요.

그런데도 아직까지 한국사학계는 복지부동-요지부동으로 반응이 전혀 없습니다. 한국몽골학회도 매일반이었지요. 생존경쟁이 치열한 학문생태계에서 우선 눈치껏 제대로 살아남기에만 바빠서 일까요? 이 중대한 문제가 엄연히 사실임이 밝혀질 수도 있는 판에 어쩌려고 이러는지 들 모르겠습니다.

이런 게 하나 둘이 아니긴 하지요. 정도문제는 있겠지만 이런 연구들에 꼭 천재적 재질이 요구되는 건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실은 관계 사료(史料)들이 지천(至賤)으로 널려있는 유적현지에 가서 모든 산술(算術)을 다 젖혀두고 오로지 멍청하게 연구에 치열하게 몰두만 한다면, 누구나 이내 도출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결과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국내 일각에선 요즈음 중국사학계의 역사 제국주의적 조류를 맹렬히 비난하기들도 하지만, 이점을 제외한 그네들의 유연하고 기민한 새로운 학문발전 결과 수용 자세는 실로 진정코 파격적이어서 정말로 놀랍고도 부러울 따름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정보화 사회에 들어서조차도 이처럼 무작정 한사코 완고하기만 한 한국사학계 풍토에서는, 본질적으로 크게 왜곡된 민족사가 바로 서는 게 오히려 기적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나 지금 내 이야기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맥(貊)이지요.

왜냐고요? 「貊」-너구리 사냥꾼 출신들인 맥족(貊族: Qori족)이 맥국(貊國)=고(구)려국=맥고려(貊高麗: Mongol)국을 창업했고, 이들이 「대장금」이라는 유명한 한국 역사드라마의 한류바람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고구려 불고기 「맥적」貊炙을 만들어 먹던 맛한류의 본족이어서랍니다. 「貊라면」-너구리라면에도 몽·한합작 맛한류(味韓流~味汗流)가 직접 접맥되는 셈이네요.

너구리 사냥꾼이 잡은 너구리고기(貊肉)를 만주 원산의 콩으로 쑨 메주로 담근 장(醬)과 마늘양념에 얼버무려 삭혀 구워낸 고구려 불고기가 본래 「맥적」의 본체가 아니었는지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고구려 유적들과 맥국(貊國) 터가 있는 강원도 춘천의 「고구려 불고기」貊炙은 감칠맛이 썩 좋습니다. 물론 회맛은 예국(濊國) 터가 있는 동해안 강릉의 그것이 일품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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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채혁
qorian6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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