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 복음의 씨앗, 왕길지(王吉志, Gelson Engel·1864∼1939) 호주선교사

 

  언양제일교회는 100년이 넘은 오래된 교회이다.   이 교회는 1902년 삼남면 덕천역(德川驛) 수남(水南)마을에서 수남교회로 시작해서 교인이 늘자 언양읍성 남문 밖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덕천역은 삼남읍 교동리 수남마을의 덕천고개 서북쪽에 설치됐던 역참(驛站)인데 이 역은 양산의 위천역(渭川驛), 울산의 굴화역(堀火驛), 경주의 잉보역(仍甫驛, 인보(仁甫))을 연결하여 조선시대 언양현 물류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덕천고개를 넘어 진등(長嶝, 陣嶝) 산등성이를 따라 가다보면 교동리 진장마을이 나오는데 이 곳에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 생가가 있다.

 

  그렇다면 이 언양읍성에 도대체 어떻게 복음이 전파된 것일까?   그 시작은 부산·경남 지방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한 독일 출신 왕길지(王吉志, Gelson Engel·1864∼1939) 호주선교사로부터 비롯됐다.

    왕길지는 아내 클라라 베스(Mrs. Clara Math)와 세 아이 넬슨(Fred Nelson), 허비(Herbert), 도라(Dora)와 함께 호주 멜버른(Melbourne)에서 출발하여 1900년 10월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어를 공부하고 풍습을 익혔다.   그는 그 달 말에 한국어 발음을 연습해서 축도 즉 축복기도를 시도했고 3~4개월이 지나 1901년 초에는 한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천재적 소질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한국이름을 왕길지(王吉志)로 정했는데 “엥겔”과 “왕길”의 발음이 비슷했고 그 이름에 “최고로 좋은 뜻”을 전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는 부산진교회에 사역을 하면서 1901년 6월 순회선교사로 울산, 언양, 장기(지금의 포항 구룡포), 감포, 경주 등을 말을 타고 돌며 전도에 나섰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6월 6일 목요일 장기에 살고 있는 교인 ‘김 서방네’ 심방을 갔다가 언양을 거쳐 통도사에서 1박을 한 후 교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경상도 동부일대 순회 전도

  왕길지는 당시 번화한 읍성인 언양읍내에서 점심을 먹고 통도사 쪽으로 향했다.   그 일행이 수남마을 벚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말 고삐가 풀려 말이 달아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일행이 마을에 들어가 말을 찾던 중 말이 정희조(鄭喜祚)라는 사람의 콩밭에 들어가 밭작물을 훼손한 사실을 알게 됐다.   왕길지는 “밭 피해를 보상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희조(鄭喜祚)는 “말 못하는 짐승이 한 것을 어찌 그리 하겠소”하고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 때 왕길지는 ‘한국인의 예’가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1년 후 교동리 밭주인 정희조는 언양의 첫 신자가 되어 자신의 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았다  그것이 1902년 9월 15일의 일이다.   이러한 일화는 왕길지의 일기에서만 확인된 게 아니다.   정희조의 증손자 정길원(언양평강교회) 집사의 가계사 구술에서도 그 일치함이 확인됐다.   정희조는 훗날 부산 동래 안평교회 설립에도 관여한다.

 

  이렇게 울주지역 중심교회가 된 당시 수남교회는 인근 반천, 보은, 궁근정(지금의 상북)에 교회를 분리 개척하고 그래도 교인을 감당할 수 없자 읍성 남문 앞 지금의 교회 터로 이전한다.   와가(瓦家, 기와 집) 5칸을 매입, 동부교회라 칭했다. 1917년 이후로는 언양읍교회로 불렸다.   언양제일교회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1964년이다.

언양제일교회

6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울산 월평교회

 

  월평교회는 1909년 3월 8일 왕길지 선교사가 전읍교회 이기연 성도와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경주교회 김희조(金熙祚) 성도의 헌금으로 교회당을 구입했다.   월평교회는 6.25 한국전쟁 전후 6명의 순교로 2011년 순교자 기념교회로 지정되었다.

 

  첫 순교자는 한학자 우영식씨의 3남 우두봉 집사이다.   경주교회에서 집사로 섬기던 우두봉 집사는 1948년 월평 고향집에 잠시 드렸다가 ‘예수 믿는다’는 단 한가지 이유로 빨치산에게 사살 되어 월평 땅에 순교의 피를 뿌렸다.

 

  두 번째 순교자는 우재만 집사이다. 1950년 2월 빨치산이 우재만을 끌고 다니다가 월평교회 앞 저수지에서 사살하고 불태웠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5일 지난 6월 30일 밤늦은 시간에 빨치산이 교회당에서 기도하고 있던 정두란 집사, 조재년 성도, 조말복 성도를 끌어내어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난사하여 죽였다.

 

  여섯 번째 순교자로 우재만 집사의 동생인 우성만 집사이다.   1951년 8월 14일 추석명절을 맞아 홀로된 형수를 위로하기 위해 큰댁을 찾았다.   형수는 우 집사에게 “공비들이 올 줄 모르니 피하라”고 말을 했지만 우 집사는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피하기를 거부했다.   이날 들이닥친 빨치산에게 우 집사는 사살됐다.

순교자 기념교회 기념패
월평교회 뒷뜰, 순교자의 비

*참고

1. 전정희 기자, 국민일보(2015년 01월31일), ‘한국의 성읍교회 – 언양제일교회’

2. 장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13-2), '겔슨 엥젤(Gelson Engel, 1868~1939)'

3. 김종익 장로(울산교회), 기독교보(2014년 5월 2일), '6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울산 월평교회'

김철수(金喆壽 1896~1977, 독립운동가, 정치가), 양산의 독립운동가

   김철수는 1896년 5월 4일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328번지에서 김상형(金商炯)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삼마을은 상북면 소재지 석계와 양산천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상삼마을에서 1km 떨어진 좌삼마을은 대한제국 1907년 의병장 서병희(徐炳熙 1867~1907)의 고향이고 김철수의 집 가까이 의병장 김병희(金柄熙 1851~1908)의 집이 있다.

 

   1907년 6월 11일 서병희 부대의 도주를 위해 김병희와 아들 교상(敎相 1872~1908)은 자기 집 사병(포수 의병) 50여명과 일본군 50여명(제14연대 의병토벌부대)과 40분이 넘게 교전해 14명을 사살(또는 중상)한다. 하지만 김병희, 교상 부자는 1908년 6월 체포된 후, 철사줄로 손바닥을 뚫어 묶인 채로 끌려 다녔다.    일본군은 갖은 고문을 한 뒤, 하북면 소재지인 성천마을 앞 현재 통도사 자비도량 근처 소나무에 3일간 매달아 주민들이 보도록 한다.  김교상은 20일 후 상북면 대석골에서, 김병희는 이틀 후인 22일 양산 통도사 앞산에서 57세와 36세에 각각 총살했다. 시신은 하북 상감마을의 우동신(㝢東臣)과 통도사 구하(九河 天輔, 1872∼1965) 스님이 수습했다고 한다.   김병희 후손 김중경(金重經 1934~ )은 양산 오경농장을 일구었다.

 

1907년 의병처형장면 [출처 : 프랑스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잡지 1907년 8월 10일자]

   김철수(金喆壽 1896~1977)는 어린 시절 기장에 살던 매형인 박인표(朴仁杓, ~1920, 독립운동가)가 경영한 기장의 진명학교(進明學校)를 2년 다니다가 부모가 부산부 동래군 좌이면(左耳面) 구포동(龜浦洞) 28통8호로 이사하자, 구포 구명학교(龜明學校; 당시 1년제, 현 구포초등학교)에 옮겨 1909년 2회로 졸업하였다.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로 진학하여 1913년 2회 졸업하고, 7월 일본 도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이재과(理財科)에 입학하였다.

 

   유학 시절 조선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조선학회는 1915년 12월 29일64)에 신익희( 申翼熙 1894~1956,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  윤현진( 尹顯振 1892~1921, 양산 상북면 소토리 출신, 상해 임시정부 재무위원장),  이광수 (李光秀 1873~1953, 1892~ 1950, 2.8독립선언서 작성, 소설가, 친일 변절자),  김양수( 金良洙 1896~1969, 언론인, 독립운동가),  장덕수( 張德洙 1894~1947, 정치인, 언론인, 친일 변절자),  정노식( 鄭魯湜, 1891년~1965,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판소리 연구가),  최두선( 崔斗善 1894~1794, 교육가, 정치인) 등 11인이 발기인이 되어 조직되었으며 1919년 1월 임원은 이사 김철수, 회계 김도연, 서기 전영택이었다.   이 중 김철수는 장덕수, 정노식 등과 2·8독립운동 후 조선에 귀국한 후 청년운동을 벌일 때에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세계 제1차대전 종전과 전후처리 과정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은 약소민족의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했다.   당시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일제 식민지통치를 반대하고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의사를 반영하기 위한 거족적인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의 ‘2.8독립선언’의 11명 대표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김철수는 참여했다.   만세운동은 동경 유학생의 거의 전부를 망라한 약 600명이 참가했다.   이 날 김철수는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 내에 난입하여 운동을 제지하는 일경과 충돌하여 부상을 당한 채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철수는 1919년 6월 26일 대심원(大審院)에서 불온문서( 2.8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한 출판법 위반으로 9개월 금고형에 처해져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매일신보』 1920년 2월 14일자에 의하면 이종근과 김상덕은 1920년 2월 9일 출옥했고 최팔용, 김도연, 김철수, 백관수, 윤창석, 송계백, 최근우, 서춘은 3월 26일에 출옥한다고 보도했다.

 

가운데 줄 왼쪽부터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 앞 줄 왼쪽부터 최원순. 신원미상. 최승만. 장영규, 뒷 줄 왼쪽부터 신원미상. 변희용. 강종섭. 이봉수. 신원미상. [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최승만(崔承萬) 사진첩』(5)]

   게이오기주쿠총람(慶應義塾總覽, 1918)에 의하면 김철수는 1918년에 이재과(理財科) 2학년 C조에 재학 중이었는데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처분을 받았다.   1920년 3월 9일 출옥하여 4월 2일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고려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박인표가 갑자기 사망하여, 이를 정리하고 고향의 전답을 팔아 부산상사라는 무역회사를 열고 민족 자본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1920년 7월 15일 양산청년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계몽 강연에 분주하였다.   1922년 조선청년전국연합회 대회에서 사회주의 계열 김약수 파와 민족주의 계열 장덕수 파간의 분쟁이 일어났고, 김철수는 이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고자 분투했다.   김철수가 의장에 선출되어 회의를 진행한 결과, 위원장에 정노식, 부위원장에 김철수가 선출되었다.   다음해부터 3년간 김철수는 위원장직을 맡았다.

 

   1923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에 참여하여 경리부원이 되었다.   이에 조선청년연합회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하는 순회강연에 강사로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무렵 안재홍(安在鴻)의 권유로 시대일보사의 경제부장을 맡았고, 1927년 동아일보 양산지국이 신설되고 기자로 활동한다.

 

   1928년 3월 19일 신간회 양산지회 창립총회가 양산청년동맹회관에서 양산청년동맹 회원들과 양산유지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고 준비위원 측, 김철수의 열열한 개회사가 있었고 전혁(全爀, 전병건全秉健 1899~ 1950)의 경과보고 후 임시집행부로 의장 금석호(琴錫浩), 부의장 김철수, 동 서기 김기오(金琪午 1900~1955, 대한교과서 사장), 강재호(姜在鎬, 1901~1986)가 선출되었다.

 

   김철수가 전국적으로 활동할 때 양산 3.1만세운동 주역인 전병건(전혁)과 함께 신학업(申學業, 1901~1975, 사회운동가), 신영업((申榮業 1899~?, 신학업의 형, 언론인), 김기오(훗날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사장, 현대문학 창간), 이동계(李東桂, 이동개李同介 1910~1955, 언양 소년단 격문사건 연루자) 언양 출신들이 양산의 청년ㆍ농민ㆍ사회운동에 참여한다.

 

   1936년 이후 일제의 감시와 협박으로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양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일제의 압박을 당하여 정미소 운영이 곤란해져 마침내 정미소 문을 닫게 되었고 양산을 떠나 상북면 석계리에 은거하여 야산을 개간하며 지냈지만 1941년 일본경찰은 그를 울산군 삼산동 울산비행장 옆 보급물자 창고인 남산동굴에 강제징용으로 보내 노역하게 하고 그 가족의 거주를 제한하는 파렴치한 짓을 일제는 했다.

울산비행징 옆 보급물잘 창고로 사용하기 위한 울산 남구 남산동굴, 현재 문화체험공간 '태화강 동굴피아'임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에 참여하였고, 인민위원회로 조직개편과정에서 ‘건준경남연합’ 이라는 별도 조직을 결성하여 인민위원회와 대립하였다. 독립촉성국민회의 경상남도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 자유민보사 사장을 지냈다.    미군정 하에서 1946년 입법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47년 제2대 경상남도지사로 임명되었는데 횡령사건으로 사퇴한다.

   정부 수립 후 1949년 적십자사 경남지사 초대 지사장을 지내고, 1960년 자유당 경상남도당 위원장으로 4월 혁명을 맞았다.   이후 1963년 양산에서 노농진흥회(老農振興會, 노인진흥회)를 결성하였으며, 부산 3·1동지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67년 양산 상북면 양주중학교를 설립했으면 1977년 5월 18일 별세하였다.   선생은 1963년 대통령 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 참고자료

1. 이병길, 양산시민신문(2019.02.12.) ‘1919년 독립선언 만세운동 봉홧불을 올린 양산의

   독립운동가 김철수’

2. 서울YMCA(2019년 2월), 2.8독립선언 인물열전

3. 박철규(1995), ‘해방 직후 부산지역의 사회운동’, 『항도부산 제12호』,  부산광역시사

   편찬위원회, pp.181~188.

신학업(申學業, 이명: 신주극申柱極, 신주식申柱植, 신학우申學雨 1901~1975),

언양(彦陽) 사회주의 운동가

 

   신학업은 1901년 12월 16일 경상남도 언양군 상북면 서부리 156번지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서부리 156) 에서 출생했다.    고령(高靈) 신씨 이족(吏族, 아전衙前) 가문으로 아버지 신병석(申秉奭)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석하(金錫夏)의 딸 김옥봉(金玉鳳) 사이의 첫째 신근업(申根業), 둘째 신영업(申榮業), 막내 신동업(申東業), 누이 신수복(申壽福)과 신래복(申來福) 중 셋째 아들이다.  신학업의 자녀로 거창에 거주하는 신숙자이다.

 

   신학업의 가족은 홀어머니 곁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언양면 호적에서 신학업은 첫째 행님 신근업(申根業)을 호주로(戶主, 세대주) 호에 속에 있고 토지대장에서 신근업은 답(沓, 논) 1,445평과 대지 286평을 소유하였고 신영업은 별호(別戶)로 분가해 있었는데, 소유한 토지는 없었다.   이들 3형제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신합업은 언양공립보통학교 3회(1917년)로 이웃한 정인섭(鄭寅燮 1905~1983, 영문학자, 민속학자, 아동문학가)과 4살 차이가 있지만 동기 동창이다.   

언양읍 남문길 주변 역사적 인물들의 생가 터 [출처 : 울산저널]

   왜정시대인물자료 1권에 의하면 ‘1918년 1월 도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상과(商科) 야학부에 입학’으로 되어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대학으로 진학이 불가능하고 그 시기에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대학부는 이재과(理財科)가 있었는데 현재 경제학부로 볼 수 있다.    야간학부에 다닌 이유는 고학생(苦學生) 즉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인데 당시 아르바이트로 신문배달,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인삼행상 등이 있었다.

일제 시대 인력거

   일본 동경에서 1919년 3.1 독립선언 운동에 참여해서 대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이를 계기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시대 배경을 살펴보면 1917년 3월 혁명으로 러시아 차르(Tsar) 황제의 전제 군주제가 붕괴되었고 11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 임시정부가 타도되었고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인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소비에트 혁명정부는 러시아 내 각 만족들 간의 평등, 각 민족 자결권, 모든 민족적 특권과 제한의 철폐 등을 선언하므로 식민지 종속국의 민족해방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 언양청년동맹 집행위원, 1928년 6월 3일.(이동개의 아들 이건욱 제공)

   1921년 8월 11일부터 18일까지 언양청년회에서 신문화 보급을 위해 지방순회 강연단를 조직할 때 우석(愚石) 김기오(金琪午 1900~1955, 대한교과서 사장), 김원룡(金元龍 1900~, 삼남면장 역임), 김진호(金鎭湖), 오락영(吳樂泳), 김남주(金南柱) 함께 연사로 활동하였다.

   1922년 일본 동경 세이소쿠영어학교 (正則英語學校)에 입학을 하여 유학하는 동안 사회주의 잡지를 발행하는 경험을 하고 1923년 7월 귀국한다.   우연하게도 같은 달, 동경 유학생 사상단체인 북성회(北星會)의 주류파들도( 김약수(金若水)·김종범(金鍾範)·정우영(鄭又影)·백무(白武) 등 ) 신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일본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일시 귀국하였다.

 

   그들은 순회 강연단을 편성하여 7월 30일 서울 종로의 청년회관에서, 8월 1일에는 서울 천도교 회관에서 각각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강연주제는 ‘현 사회의 중병’, ‘해방운동의 의의’, ‘인간생활의 개조와 조선민족의 사명’, ‘청년의 역사적 사명’ 등 이었다. 그 뒤 1주일 동안에 걸쳐서 서울,평양,대구,광주,마산,진주,김해 등지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23년 9월 30일 언양청년회에서 노동야학을 개설한다.   당시 50~60명이 참가하고 정인목(鄭寅穆)과 정인섭(鄭寅燮) 형제 그리고 김기호(金琪午)와 함께 교사로 활동하였고 학생들은 조선어(국어), 한문, 산술(산수), 일어(일본어), 습자(習字, 글씨 연습)를 배웠다.   신학업의 지도로 언양청년활동가와 소년운동가들은 신사상,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활동 방식이 서서히 바뀌게 되었다.

 

   1923년 11월 동아일보 울산지국 기자와 언양 주재 특파원으로 활동한다.   1924년 1월 4일부터 1월 15일까지 울산소작인회에서 소작인의 생활상태와 소작료를 함부로 더 받는 지주(地主, 땅주인) 조사를 할 때, 신학업은 범서, 두동 등 언양 서부 5개 면을 김택천(金澤天1895~1987, 울산 유력가, 동아일보 울산지국장),  오태영(吳太泳, 중남청년회),  오덕상(吳德相 1893~1971,  우정동 강정(江亭)마을 천선꾼, 울산청년회) 과 함께 직접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실제의 사정을 살폈다.   울산소작인회는 동아일보 울산지국에 창립 사무소가 있었다.

암태도 소작쟁의

   1924년 3월에는 언양청년회 김기오, 행님 신영업(申榮業 1899~? )과 함께 사회주의적 정치 운동 성격이 강한 무산자 동맹(無産者同盟)을 결성하였다.   당시 발기인이 39명이었는데, 그동안 계몽운동 중심의 청년운동이 사회혁명의 마르크스주의에 큰 영향을 받아 새로운 전환점에 있었고 그 추종 세력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신학업은 이후 언양에서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왜 일까?

  왜정시대인물자료 1권을 보면 1925년 까지 경성부(京城, 서울) 원남동 214 번지 김철수(金喆壽 1896~1977, 독립운동가, 정치가)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한 것으로 나온다.

   김철수 선생은 양산출신으로 신학업과 동일 시기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이재과(理財科)에 다녔고 동경 2.8 독립선언 11인 대표자의 한 사람이다.   1922년 조선청년연합회 상무위원으로,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위원회 선전위원 및 지방순회반 경남대표로 활동했다.

 

   1926년 4월 경성 종로경찰서에서 작성한 ‘사상 요시찰인 연명부 추가의 건’ 에 신합업은 조선총독부 감시대상으로 실려있다.    국립대전현충원 공훈록에 보면 ‘1926년 신의주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름’ 으로 나온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신합업은 경성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한 것으로 볼수 있다.

 

    1927년 경남 울산군 언양면(彦陽面)에서 농민조합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로 인해 신학업은 소위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28년 9월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받았다.

 

   1931년 7월경에는 양산군 상서면(上西面)에서 최해봉(崔海鳳) 등과 함께 권대형(權大衡)을 만나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 경남동부위원회(慶南東部委員會)를 결성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신학업은 이와 같이 활동하다 다시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33년 5월 징역 2년을 받았다.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ich Lenin)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가 , 정치가

   광복 직후 1945년 10월 결정된 거창군 인민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신학업의 지도 아래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에 걸쳐 산하에 거창농민조합, 거창읍청년동맹, 부녀동맹 등이 조직되었다.   1945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 신학우(申學雨)와 함일호(咸一鎬)가 참가했다.   고령 신씨 대동보에 ‘정은공파 24세 우(雨)항렬로 족보명은 신학우(申學雨)이고 학업(學業)이 그의 자(字)’라고 되어 있는데 신학우는 신학업과 동일인일 수 도있다.

   1946년 6월 4일 거창 인민위원장 신학업 등 39명이 미군정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거창 인민 위원회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947년 거창 인민 위원회 대표는 신학우였다.

*참고

1. 이병길, [경상일보] (2018년 09월 12일), ‘언양 울산 양산의 청년 농민운동의 중심에 선 신영업, 신학업 형제‘

2. 왜정시대인물자료 1권

3. 경성 종로경찰서 (1926년 04월 09일), 「사상요시찰인연명부 추가의 건」, 『경찰사무(檢察事務)에 관(關)한 기록(記錄) 3』

4. 이영훈(2015), 「20세기 전반 언양의 소농사회(小農社會)」, 『경제논집』 제54권 1호, 75-182,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1977,1978), 『독립운동사』 3·9·10

6. 고령 신씨 대동보

7.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거창 인민 위원회 (거창)’

 

각공 조두천(角空 趙斗天, 1913~2006) 언양보도연맹 희생자 은인(恩人)

보도연맹은 국민보호선도연맹(國民 保護 先導 聯盟)을 줄인 이름으로 19496월 결성되었고 가입자가 전국에 30여 만 명이나 되었다. 이 단체명은 국민을 보호하고 압장서서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뜻이다. 광복 후 건국위원회, 인민위원회, 공산주의, 농민조합, 노동조합, 청년동맹 등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전향(轉向) 즉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을 자유주의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보도연맹은 원래 목적과 달리 이승만 정권은 6.25 한국전쟁을 빌미로 가입자를 잡아서 가서 사람이 드문 산이나 바다에서 처형을 했다.

트럭에 실려오는 희생자들. 자료화면 레드 툼 (Red Tomb)
논산읍 ( 論山邑 )' 이라는 표지가 새겨진 트럭에서 끌려내려온 희생자들 [출처 디지털 말]
총살하기위해 조준하는 대한민국 경찰 [출처 디지털 말]

 

 이미 절명한 사람들의 머리를 권총으로 확인 사살하는 경찰 [출처 디지털 말]

언양은 일제강점기나 광복 후에도 울산에서 농민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으로 농민운동을 벌였던 청년들 대부분이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억울하게 죽었다. 피해자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로 언양면 건국준비위원장 이동개(李同介,李東介, 이동계李東桂, 1910~1955), 울산농민조합 위원장 및 언양공의(公醫; 공중보건의사) 안효식(安孝式 1898~1948)이 있다.

언양지역에서 보도연맹 가입자를 구한 이가 있는데 그가 조두천(趙斗天)씨다. 6·25 무렵 삼남면 교동리 진장(陣庄)마을에 살았던 그는 삼남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보도연맹 명부를 모두 불태웠을 뿐만아니라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희생당할 때 직접 그들을 구하기도 했다.

어느 날 경찰이 언양지역 보도연맹 가입자를 중남초등학교에 모은 후 스리쿼터를 개조한 트럭에 실어 양산쪽으로 싣고 가 산속에서 처형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미국 다지사(Dodge) 쓰리쿼터(3/4)라 불리는 M37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서둘러 이들을 차에 싣고 처형장으로 갈 운전사를 찾아내어 차를 양산으로 몰고 가다가 방기 초등학교 인근에 있는 하방저수지 쪽으로 차를 몰아넣어 사고가 난 것처럼 위장하도록 당부했다.

이 후 그는 보도연맹 가입자들에게 몰래 경찰의 계획을 알리고 이들에게 차가 하방저수지에서 미끄러질 때 도망가도록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이 때 운전사와 보도연맹 관련자들이 그가 시키는대로 해 억울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날 탈출한 사람들 중에는 특히 삼남면 버든마을(현 평리마을) 청년들이 많아 이들이 조두천씨에게 크게 고마워했다고 한다.

버든마을(평리) 망향비

현재 버든마을은 2009KTX 역세권 도시개발구역으로 편입되어 집은 철거되고 떠났고 망향비만 덩그러니 있다.

1913년 조두천씨는 경남 함안의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1932년 동래고등보통학교 (, 동래고등학교)를 수석으로 9회 졸업하였다부친의 만류로 유학을 포기하고 부산시청에 취직했지만 일제 말 한국인들에 대한 일제의 수탈이 심해지자 이에 분개해 사직서를 내고 울산으로 이사와서 삼남면 교동리에 정착하였다.

그후 삼남면 교동리 진장(陣庄)마을에서 2만 여평의 농지를 개간하는 한편 야학을 운영하는 등 농민 교육에 힘썼다. 그가 운영했던 농장과 한옥집은 지금도 있다. 처음에 2만여평의 농장에 복숭아를 재배했지만 지금은 12000여평으로 줄어들었고 1980년대 중반 복숭아 대신 배로 교체되었다.

진장농장에 있는 4칸 한옥 저택

2대 총선(1950530) 37세에 울산 선거구()에서는 출마하여 낙선했다. 금권선거에 환멸을 느낀 그는 자녀들에게 "정치는 절대 하지 말라"고 늘 강조했다.

그가 울산으로 올 때는 부친 성도(性道, 휘 성진成振 1866~1955)씨도 함께 왔다. 부친과 유이비 여사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일호(日浩), 둘째 두천(斗天), 셋째 석주(石柱) 이다. 그와 부인 김복산 여사 사이에 용기(1936~ ), 용우, 용목, 용찬, 용배 등 아들 다섯과 4명의 딸을 두었다.

이중 장남 조용기 순복음중앙교회 목사는 언양초등학교에 1943년에 입학해서 194934회로 졸업했다. 동기생으로는 전() 국민일보 주필 홍성환(洪性煥 1936~), 육군 대장 신말업(申末業 1936~2011; 육사 16기 하나회) 장군, 대흥사료 대표 강대준( 1935~2014) 등이 있다.    조용기 목사는 이후 부산 동래중학교( 2)를 나와 부산공고(29회 기계과)에 진학했다.    조용기 목사는 영산조용기자선재단을 통해 모교 언양초등학교에 수 억원 발전기금을, 동래중학교에 천만원 장학금을 기탁했고 사회에 사랑과 행복을 나누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지렁이의 잠꼬대 서울서적’, ‘성경에 비춰본 고사숙어 민예원’, ‘행목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

* 참고자료

1. 월간 디지털 말, ‘보도연맹원 희생사진

2. 경상일보 20130623일기사,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60) -26. 조두천과 보도연맹 울산에 이야기를 입히다

3. 경상일보 20151227일기사, ’인물로 본 울산정치사(22) 조두천

 

우루목(도천마을) 하씨(河氏), 남도부(南到釜) 하준수(河準洙)

 

영화 ’곡성(哭聲)’ 의 촬영지가 우루목 마을인데 마을 모양이 소의 목과 닮아서 붙여 쳤고

우동(牛洞)에서 일제 강점기 도천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루목 마을 표지석

곡성 촬영 집

  도천마을은 진양 하륜(河崙)의 후손 양암공(陽菴公) 하활(河活, 1508-1580)이 진주 단목에서 옮겨와 번성한 곳으로 지금까지 ‘우루목 하씨’라는 명성을 얻은 진양하씨 집성촌이다.    이곳에서 동해남부 빨치산 사령관 남도부(南到釜), 본명은 하준수(河準洙, 1921-1955)가 태어났고 생가도 있다.    남도부(南道富)가 아니라 남도부(南到釜)라고 친구인 윤인호(尹仁浩, 1922~2004) 곤충연구가 증언했는데 진주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등학교) 1년 후배이고 일본 유학시 친하게 지냈다.

하륜부조묘

  거창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한 양암공파(陽菴公派) 하동현(河東鉉) 회장은 종친인 하준수 집안에 대해.
하준수의 부친 하종택(河鍾澤 )은 병곡면장 출신으로 천석꾼 부자였다고 한다. 하준수의 생가는 지금은 본채와 부속 건물 하나가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원래는 기와집 열 두 채로 이뤄진, 450평 규모의 큰 집이었다고 한다.  이 우루목 마을에 하종택 땅을 안 밟고 댕기는 데가 없었다고 한다.

  남도부는 장인 사근부자 이민종의 딸 아내 이귀영과 결혼하였고 슬하 1남2녀를 두었다.  한국전쟁중 신불산중심으로 경남동부, 경북남부에서 빨치산을 벌였고 부하 차진철(본명 성일기)의 밀고로 대구에서 특무대 김창룡에  체포된 뒤 1955년  8월 서울 수색 육군사형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한국전쟁 후 남도부의 자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함양문화 제12호》에 실린 구본갑의 ‘지리산 빨치산 하준수 스토리’에 “하준수의 아내(함양여성동맹위원장)는 동란 후 북한으로 들어가 행방불명되었고, 아들 상영은 연좌제 때문에 한정치산자가 되었다”고 적었다.

  이 글에 나오는 하준수의 자녀들과 관련된 내용들을 좀 더 정리하여 보면, 남도부가 사형을 당하기 며칠 전 맏딸 인자를 면회실로 불러 마지막 유언을 했다. “인자야... 아버지가 없어도 절대로 기죽고 살아서는 안 된다. 동생(경자, 상영)들을 잘 데리고 살아다오” 그 후 맏딸 인자씨는 함양 삼일여관(현 삼일장) 며느리로 들어갔다. 시댁 배려로 경자, 상영 두 남매는 사돈집에서 더부살이를 할 수 있었다.

   연좌제(緣坐制)란 범죄인과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 특히 친족에게 연대 책임을 지게하고 처벌하는 제도이다.  6·25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에서 사상범(빨치산 포함), 부역자, 월북인사 등의 친족에게 군대를 갈 수 없었고 취업이나 공직에도 나갈 수 없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1980년 헌법은 연좌제 폐지를 헌법으로 규정했다.

  남도부 아들 하상영은1948년 9월 11일 출생으로 병곡, 함양국민학교,함양중학교(16회), 함양농업 고등학교(현 함안제일고등학교)  그리고 외지 서울로 가서 경기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체육과를 졸업했다.  교사로 퇴임한 김병호(1947년, 뇌산마을 출생)님은 남도부 고모가 작은 할머니이고 남도부 아들과는 함안중, 함안농고 동기인데  ‘빨갱이 자식’ 이라 놀려대기에,  견디다 못 해 서울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  

하상영씨는 회사 대표가 되어 경영을 했는데 다음은 매일경제신문에 실린 상품광고 내용이다.

  ‘핫·콜드·백’  상영화학 제품  최초입력 1972.06.24

   핫·콜드·백  정신·신경피로 덜어줘 인체엔 부작용 없어 상영화학제품  정신및 신경성 피로를 덜어주는데 도움이 되는「핫·콜드·백」어 여름철 수요에 대비, 시판에 주력하고 나섰다.  상영화학 (사장 하상영) 제품. 해저식물과 광물질을 혼합하여 특수 제작된 무미, 무취, 무변질의 것으로 인체에 부작용이 없다는 게 특징. 랭용과 온용으로 공용할 수 있다.  상영화학은 발명 및 의장 특허를 마쳤는데 제품 종류는 3가지. 판매가격은 1호가 2천원, 2호1천5백원, 3호1천2백원. (연락처?7671)

  하상영씨는 산청함양선거구에13대, 14대,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모두 낙선하였다. 그가 이렇게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알리고자 했던 것은 그의 말대로

“아버지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역사가 해줘야 될낀데. 아버지를 좌익분자라고 하지 말고 민족주의자라고 하소. 그기 맞소. 외세개입을 온몸으로 막은 분을 함부로 매도하면 쓰겠소?” 라는 절규였다. 

남도부 가묘와 구연철옹  2017. 10. 22 [인용 : 네이버 블로그 진달래산천]

사형 집행을 유족에게 알리지 않아 시신을 수습하지 못 하고 1979년 여름, 상여를 메고, 만장을 들고,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룬 후 참나무로 만든 관을 묻었다고 했다. 일대 마을 주민은 물론 함양군수가 참여했다.

  구연철 선생은 “아직도 저에게는 영원한 사령관이시다. 남도부 사령관은 감자를 즐겨 드셨다.

그래서 이번에 감자를삶아 왔다.” 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재경(서울) 경상남도 도민회 제 12회 친선 바둑대회  2014년 5월 24일(토)에서 하상영(함양)씨는 장려상을 받았다.  하상민 어르신은 함양중 11회를 졸업하고 15살에 외지 서울로 가서 2016년 봄, 60여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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