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Kantu 감숙甘肅에 신라新羅 존재


조셉(Joseph H. Longford)가 저술했고 1911년 런던에서 출간된 한국 이야기(THE STORY OG KOREA)의 서문(序文) 첫 페이지 내용입니다.

 중국에 대해 처음으로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9세기 시대 아랍 지리학자 이븐 후르다드비(Ibn Khurradadhbih)를 통해서이다.   ‘도로와 지방책에서 1) 코리아 왕국을 기술했는데 중국에 관한 바론 리히트호펜(Baron Richtofen)의 걸작을 인용하였기를,

 [원문]

“an unkown land beyond the frontiers of Kantu” - "the modern Shantung“ rich in gold, and exporting gingseng, camphor, aloes and deerhom and such manufactured products and nails, saddles, porcelain and satin.

 

감숙甘肅 의 경계 너머 알려지지 않은 땅", "현대 산동(山東)”, 황금(黃金)이 풍부하고 수출하기를 인삼(人蔘), 2)장뇌(樟腦), 사슴뿔(鹿茸), 못으로 맨든 수공품, 마안장(馬鞍裝), 자기(磁器), 견직물(絹織物).

 

1) 코리아 왕국은 통일 신라( 新羅, Unified Silla) 를 말한다.

2) 향장목(香樟木)이라는 녹나무에서 추출한 것으로 향료(香料)이다.

장뇌(樟腦)는 강한 방향(芳香)으로 벌레를 막아주며 약재로 써 이기도 한다.

  

*조셉 Joseph Henry Longford (18491925)

  아일랜드 출생, 일제 고문, 영국왕립학교 초대 일본학교수에요

*리히트호펜 (Baron Ferdinand von Richtofen) (18331905)

  1877년 실크로드(Seidenstrassen, Silk Road) 명칭을 처음 부여한 학자고요.

*이븐 후르다드비 ( Ibn Khurradadhbih 또는 Ibn Khordadbeh) (820912)

  9세기 시대 아랍 지리학자, 도로와 왕국들의 안내서 저술.

 

9세기 중국 당시대에 감숙甘肅 Gansu) 는 감주(甘州, Ganzhou)였습니다.

광주(廣州, Guangzhou) 는 해외에 칸톤(Canton) 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중국 남부 도시 이름'이라는 의입니다

참고 '대륙조선사연구회' 사이트 입니다.

 cafe.daum.net/greatchosunsa/75XT/9152 


   고대 신라의 성지인 경주 적석목곽분에서 황금 금관, 금장식물, 말 모양 토기를 비롯해 간두식이나 각배, 유리그릇 등이 출토되고 있다. 이 것은 고대 북방 초원길을 통해서 문화교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적석목관분에 피장자였던 왕이나 세력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물은 금관이다. 금관은 태양과 같이 빛사는 권력자의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며 금관의 장식물에도 어떠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라 금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금관에는 수목, 사슴뿔, 새, 곡옥 등이 장식되어 있는데 금관에 대한 안동대학교 민족학과 임재해 교수의 해석을 아래와 같습니다.

'신라 금관의 기원과 김알지 신화의 상징' 임재해 교수 강연 자료 발췌

 

   사슴뿔을 기본 장식으로 하는 관은 흑해 북부의 아조프아조프 해로 들어가는 돈강 하류의 노보체르카스카시 부근 호흐라치 고분에서 출토된 금제관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기원 1세기경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 금관에는 중앙의 여신상 좌우에 수목과 사슴, 새가 원형 그대로 모사돼 있다.

흑해 북부의 노보체르 호호라치고분 사르마트 금관

사르마트 금관 (흑해 북안의 로스토프 지역) 국립중앙박물관 『스키타이 황금』 김운회 교수 해석

 

   1978년 러시아의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 (Victor Ivanovich Sarianidi)가 수목과 새가 장식된 금관을 아프가니스탄의 서북지방 시바르간 틸리야 테페 6호 묘에서 에서도 출토하였다. 노보체르카스크의 것보다 수목의 형태나 수목에 부착된 영락의 형태에서 신라의 금관과 매우 유사함을 느낄 수 있다.

 

 

                               아프카니스탄 금관 (틸리야 테페 6호분, 1~2세기) 카불국립박물관

 

아프카니스탄 금관 (틸리야 테페 6호분, 1~2세기) 카불국립박물관, 김운회 교수 해석

 

   카자흐스탄 이식쿨 (Issyk-Kul) 고분에서 사카 문화의 상징적 출토품으로 하나로 여겨지는 황금 인간이 쓰고 있던 모자의 장식에도 금관의 입식에 표현된 것과 유사한 형태의 새가 묘사돼 있다. 출토된 이 피장자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금제품으로 장식돼 있었기 때문에 황금 인간으로 불리게 됐다.  모자에 묘사된 나무의 형태는 신라의 금관과 마찬가지로 한자의 출(出)자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카자흐스탄 국립박물관 , 황금인간 (기원전 5~4세기)

황금인간 머리 확대, '出' 형태 나뭇가지위 새 

2017년 1월 최근 KBS 드라마 화랑에서 꽃 다운 아이돌이 나와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신라 화랑(花郞), 풍월도, 국선도 많이 들어 봤다. 화랑은 어디서 나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보았다.

http://www.jsd.or.kr/?c=culture&uid=18515

단군세기 문화코드 (7) 국자랑國子郞

2016.07.28 | 조회 1714 | 공감 0

국자랑은 신교를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뽑은 젊은이들로서 조선 신교의 낭가정신에서 시작된 것이다. 최초의 낭도郎徒는 환웅천왕이 거느리고 온 3000의 문명개척단[濟世核郞]이었다. 삼성조 시대에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와 관료, 제사장, 장교가 모두 낭가에서 나왔으며 삼신상제와 환웅께 제사를 올리는 것을 주관하고 신교의 가르침을 받들며 문무文武에 정진하였다. 

단군조선 초부터 소도蘇塗 옆에 경당扃堂을 세우고 미혼의 남녀 젊은이들에게 글읽기, 활쏘기, 말타기, 예절, 음악, 격투기, 검술 등을 가르쳤다. 11세 도해 단군 때는 삼한 전역에 제도화되었는데 낭가정신의 유풍이 크게 성盛하게 되었다. 

11세 도해 단군 때 기록을 보면,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찾아 국선國仙의 소도를 설치케 하셨다’고 했다. 또 13세 흘달 단군 20년(BCE 1763)에 “미혼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여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이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라고 하였다. 

"구당서"〈동이전 고구려조〉에는 사학인 경당을 이렇게 적었다. 

고구려의 습속은 나무 심부름하는 미천한 집안에 이르기까지 서적을 좋아하여, 거리마다 경당이라 부르는 큰집을 지어놓고 미혼자제들로 하여금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밤낮으로 익히게 하고 있다.[俗愛書籍, 至於衡門廝養之家, 各於街衢造大屋, 謂之扃堂, 子弟未婚之前, 晝夜於此讀書習射.]

경당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다.


이와 같은 한민족 고유의 신교 낭가郎家제도의 기원은 환국시대로부터 비롯하여

→배달국의 ‘제세핵랑濟世核郞’→

단군고조선의 ‘국자랑國子郞’→

북부여의 ‘천왕랑天王郞’→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백제의 ‘무절武節’(정명악 주장), 신라의 ‘화랑花郞’→

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서긍의 '고려도경') 또는 ‘선랑仙郞’, ‘국선國仙’으로 계승되어 왔으며, 윤관의 9성 정벌 때는 ‘항마군降魔軍’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낭도들은 수려한 산천을 찾아 단체 생활을 하면서 단결력과 무사정신을 길렀으며, 정서와 도덕을 함양하였다. 또한 무술, 기마술, 궁술 등을 익혀 용맹한 전사로서 국가에 충성하였다. 조의선인이나 화랑은 신교라는 종교정신으로 무장한 군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도는 그들의 모임처였고, 그들은 소도무사였다. BCE 239년에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한 국자랑 출신 해모수解慕漱가 천왕랑天王郞이라는 새로운 낭가를 편성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화랑제도로 통합되었다. 그 뒤로 명맥이 쇠잔하였으나 그 정신만은 한민족의 역사의식 속에 깊이 잠재되어 ‘조선 시대 선비의 저항정신’, ‘구한말의 항일 구국운동’과 ‘3·1운동’ 등으로 민족의 위기 때마다 유감없이 표출되었다.


이러한 낭가사상이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의 무사도武士道를 만들었다. 일본의 무사도는 중세에 서 발생하였다. 이때부터 그들 이름에 랑郞자를 붙이는 경우가 나타났다. 낭은 화랑도에서 따온 글자이다. 즉 화랑은 죽지랑, 처용랑, 미이랑, 장춘랑 등과 같이 이름에 랑자를 붙여 쓴 것이다. 또한 일본인은 의인, 열사, 협객 등의 설화로써 무사도 정신을 고취하는 것을 낭화절浪花節(나니와부시)이라 한다. 낭화는 화랑을 거꾸로 쓴 것이다. 무사도는 바로 조선 신교의 낭가정신에서 시작된 것이다. 일본 근대화의 문을 연 메이지 유신도 무사도 정신이 그 원동력이 되었다.

경문왕과 미다스왕,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 (2/2)

퍼옴 "지평선의순례자 | 2008.05.19 02:09 "

고대 근동 이야기
경문왕과 미다스왕,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 (2/2)
2007/05/27 오 전 12:29 | 고대 근동 이야기

미다스(Midas) 왕(王)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미다스 왕은
어떤 왕이며 프리기아(Phrygia) 는 어떤 나라인지 이야기하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으므로 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1. 히타이트(Hittite) 제국(帝國)의 멸망(滅亡) (약 1200 BC)

1200 BC 년 경에 일어난 고대사(古代史) 최대(最大)의 수수께끼 중 하나인 고대국가
(古代國家)
들의 갑작스런 몰락(沒落)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청동기(靑銅器) 시대 말, 철기(鐵器) 시대로 접어들 무렵에 지중해 동쪽의 고대 국가들이

갑자기 잿더미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히타아트, 미케네, 필로스, 트로이, 우가리트, 알라시아(키프로스) 등 지중해(地中海)
연안(沿岸)의 고대 국가들이 갑자기 무너진다.

이후 그리스에 첫 도시국가가 생기고 문자(文字)로 기록(記錄)을 남기기 시작하는
800 BC 년 까지를 암흑시대(暗黑時代, Dark Age)라고 부른다.

암흑시대(暗黑時代, Dark Age)는 서양(西洋)의 관점에서 편의상(便宜上) 붙인 명칭이다.

앗시리아나 아집트는 멸망하지 않았으니 엄밀히 따지면 암흑시대(暗黑時代)는 아니다.

2. 무쉬키(Mushki) - 프리기아(Phrygia)의 등장 (1160 BC)

그리스인들이 프리기아(Phrygia)라고 부르는 나라가 앗시리아의 기록에는 무쉬키(Mushki)
로 적혀있다.

히타이트가 멸망한 후 1160 BC 년에 무쉬키(Mushki) 라는 나라가 대군(大軍)을 이끌고

앗시리아의 알지(Alzi) 와 푸루후지(Puruhuzzi) 를 공격한다.

50년 후 앗시리아의 티글라트-필레세르1세(Tiglath-Pileser I)가 반격(反擊)하여
무쉬키를 몰아낸다.

히타이트가 강성(强盛)했을 때 앗시리아는 이류국가(二流國家) 수준이었으나,

히타이트 말기(末期)부터 군사강국(軍事强國)으로 발돋움하다가 히타이트가 멸망한 후에는
지금의 터키인 아나톨리아 지역(地域)으로 진출을 꾀하게 된다.

 

히타이트 멸망 후 히타이트의 유민(遺民)들은 말라티아(Malatya), 타발(Tabal),
쿠에(Que),
카르케미시(Carchemish) 등에 독립된 소국(小國)을 세우지만 점증(漸增)하는
앗시리아의 위협(威脅)에 직면(直面)하게 된다.


이들은 앗시라아에 정복(征服)당해 공물(供物)을 바치기도 하고, 앗시라아의 지배(支配)가
느슨해지거나 폭정(暴政)이 심해지면 반란(反亂)을 꾀하기도 했다.

무쉬키(Mushki) 도 이들과 같이 앗시리아에 대적(對敵)하는 나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무쉬키는 히타이트의 유민(遺民)들이 세운 나라는 아니고 히타이트 멸망을 전후
하여 이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세운 나라

3. 미다스 왕의 등장 (718 BC)

718 BC 년에 프리기아(Phrygia)의 미다스(Midas) 왕으로 추정(推定)되는 무쉬키(Mushki)의

미타(Mita) 왕이 등장한다.

미타(Mita) 왕은 타발(Tabal), 카르케미시(Carchemish) 등과 연합하여 앗시리아에
대적(對敵)해 싸운 것으로 앗시리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709 BC 년에 무쉬키(Mushki)의 미타(Mita)왕은 갑자기 앗시리아에 호의적(好意的)

으로 나온다.


앗시리아에 의해 폐위(廢位)되었던 타발(Tabal)의 전왕(前王) 우리키(Urikki)

앗시리아의 또다른 적대국이었던 우라르투(Urartu)와 동맹(同盟)을 맺기 위해
사신(使臣)을 파견한다.


사신(使臣)들이 무쉬키(Mushki) 영토(領土)를 지날 때 이들은 미타(Mita) 왕의 군사들에게

체포(逮捕)되어 앗시리아로 넘겨진다. 

앗시리아의 오랜 적국(敵國)이었던 무쉬키가 앗시리아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態度)를

갖게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4. 킴메리아(Cimmeria) 인의 등장과 미다스 왕의 죽음 (714 BC, 696BC)

714 BC 년에 킴메리아인이라 불리는 한 무리의 호전적(好戰的)인 민족(民族)이 코카사스
산맥(山脈)를 넘어 우라르투(Urartu)까지 내려왔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흑해(黑海)
남쪽 해안을 타고 이동하여 시노페(Sinope) 부근에 근거지(根據地)를 마련한 다음
타발(Tabal)까지 진격하는 일이 일어난다.

킴메리아인들은 무쉬키(Mushki)를 압박(壓迫)했는데 미타(Mita)왕은 앗시리아와 킴메리아
동시에 대적(對敵)할 수 없었으므로 앗시리아와 동맹(同盟)을 원했던 것이다. 

705 BC 년에 앗시리아의 사르곤2세(Sargon II)는 군대(軍隊)를 이끌고 타발(Tabal) 지역의
군주(君主)들 중 하나였던 고르디아스(Gordias) 왕과 전쟁(戰爭)을 벌인다.

이때 무쉬키는 앗시리아의 동맹국(同盟國)이었기 때문에 무쉬키 군(軍)도 같이

원정(遠征)을 간 것으로 보인다. 

앗시리아-무쉬키 동맹군(同盟軍)은 대패(大敗)하고 사르곤2세는 전사(戰死)한다.

사르곤2세의 아들인 센나케립(Sennacherib, 704-681 BC)이 앗시리아의 왕이 되고,
무쉬키의 미타(Mita) 왕은 앗시리아의 모든 기록물(記錄物)에서 사라진다.


고고학자(考古學者)들 중 일부는 미타(Mita) 왕이 가까스로 전쟁터를 빠져나온 다음

살아남은 군사(軍士)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는 옛길을 따라 중앙 아나톨리아 지역을

가로지른 후 그리스 문명권(文明圈)에서 "프리기아의 미다스 왕"으로 다시 나타났다고

본다.

이때 그리스는 미케네 멸망(滅亡) 이후 시작된 400 년 동안의 암흑시대(暗黑時代)를 빠져 나오던 참이었다. 

프리기아(Phrygia)의 서울인 고르디온(Gordion)의 유물(遺物)을 조사(調査)하면
BC 8 세기까지는 서부(西部) 아나톨리아 양식(樣式)의 유물이 발견되다가, BC 8 세기

이후 지층(地層)에서는 동부(東部) 아나톨리아 양식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된다.


이것은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르디온(Gordion)으로 이동

했다는 증거다.


이후 미다스(Midas) 왕(王)은 어떻게 됐을까? 

696 BC 년에 킴메리아인들이 프리기아의 서울인 고르디온(Gordion)으로 쳐들어 온다.
킴메리아인과 맞서 싸우지만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미다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프리기아(Phrygia)는 역사(歷史)에서 사라진다.
이후 서부(西部) 아나톨리아의 주도권(主導權)을 잡은 나라는 리디아(Lydia) 이다.


5. 프리기아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2권"을 보면 프리기아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 "프삼메티코스"가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민족을 알아내기 위해

갓 태어난 두 아이를 뽑아 양치기에게 맡기고 인적(人迹)이 없는 곳에서 키우되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이 말을 할 시기가 됐을 때 처음으로 하는 말을 조사하여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민족을 찾으려는 의도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직접 인용한다. 

  명령 받은 대로 행한 지 2 년이 된 어느 날 양치기가 오두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두 쌍둥이 아이가 손을 뻗으며 그에게 달려들면서 "베코스"라고
 
말했다.

  양치기가 그 말을 듣고서도 처음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두막으로 가 아이들을 돌보아줄 때마다 계속 그 말을 듣게되자,
  양치기는 마침내 이것을 왕에게 보고하고 왕의 명령에 따라 아이들을 왕 앞으로
  데려왔다.

  왕도 직접 자기 귀로 그 말을 듣고 "베코스"라는 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
  조사해 보도록 했다.

  그 결과 프리기아어로 빵을 "베코스"라 함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헤로도토스 역사 제 2 권, 박광순 역, 범우사>

프리기아인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라고 그리스인들은 정말로 믿었을까?

이집트인, 앗시리아인, 미케네인이 프리기아인 보다 더 오래된 민족인데 말이다.


 

6. 남은 이야기
20세기 중반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의 고고인류학 팀이 터키의 야시휘육크(Yassihoyuk)
(프리기아의 서울 고르디온으로 추정) 에서 미다스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

발굴한다.


작은 언덕 모양인데 지름이 300 미터, 높이가 47 미터인 원뿔 모양의 무덤이다.
이 무덤이 미다스 왕의 무덤이 아니라 아버지인 고르디우스 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

 

무덤 안에는 각종 진귀(珍貴)한 물건들이 많이 발견됐는데, 이것이 미다스 왕의 황금손

이야기를 낳은 것이 아닌가 추정(推定)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나귀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일까?
프리기아는 그리스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부유(富裕)한 미다스 왕을 깍아 내리기 위해

그리스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위키피디아를 검색(檢索)해 보니 사라 모리스(
Sarah Morris)라는 학자(學者)

새로운 주장을 펼쳤는데 "당나귀 귀" 청동기 시대 () 신성(神性) 신체적

특징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이 없어서 이상 적지 못하겠다.


미다스
왕은 황금손이나 당나귀 이야기에 나오는 어리석은 임금이 아니다.

밀려드는
야만족(野蠻族) 킴메리아인 대항해 싸웠고 생존을 위해 앗시리아에 대한

적의(敵意) 버리고 동맹(同盟) 맺은 사람이다

전쟁에서
대패하자 살아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역사에 화려하게

재등장한다

킴메리아인의
재침입으로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만 싸움에서 지고 이상 희망이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그가
살아온 역정(歷程) 동화(童話) 보다 재미있지 않은가?

[참고한 책]
- The Hittites and their comtemporaries in Asia Minor (J.G. Macqueen)
- Cultural Atlas of Mesopotamia (Michael Roaf)
- Ancient Iraq (Georges Roux)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울산 달내 쇠부리 놀이 ,울산문화원]
 

2004/09/22 15:11 복사 http://blog.naver.com/poison5931/80005988092


 

울산 달내 쇠부리 놀이(불매가)를 찾아서

 

구비문학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문학이기 때문에 문자로 정착되어 화석화 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열려 있는 살아 움직이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구비문학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수용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특징이  있으며, 인간의 삶의 모습을 형상화 하여 나타내는 하층 민중의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기록되어지지 않은 구비문학을 접하는 길은 현장을 뛰어야 한다. 


마침 울산 달내 쇠부리 놀이 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달려간 곳은 울산 문화원 작은 마당이다.
이미 많은 공연진들이 모여 오늘의 공연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공연진들과 한마당 놀이의 주인공인 될
정겨운 소품들이 쌓여있었다. 이제는 잊혀져 더욱 눈길을 끌던 지게, 키, 멍건, 갓, 곰방대 등 그리고 한마당
소리를 아우를 우리의 악기들, 북, 징, 꽹과리, 장구, 소고 등등 그리고 마당에 펼쳐놓은 무대 장치인 불가마와
불매를 기원하는 오색 깃발들, 금줄이 쳐 진 불매 터가 놓여 있어 신기함과 기대감이 오늘의 쇠부리 놀이에
가슴이 부푼다. 그러나 아쉽게도 본 공연이 오후 늦은 시간에 있다는 관계로 그들의 차려입은 하얀 모시
옷매무새를 볼 수 없었던 점이 아쉽다.

그러나 오전 내내 리허설을 하는 그들의 신명나는 한마당 놀이를 보며 어렵고 힘든 노동의 생활 터전에서도
노래와 춤으로 삶의 여유를 누리고 살았던 선인들의 지혜를 배우는 한마당 장이 되었다.


울산의 철 생산은 삼한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이 쇠의 산지가 현재의 울산 광역시 북구에 있는 달내(달천)철장이다.

이곳의 철은 토성 상태였으므로 철 성분이 많은 것만 골라 용광로에 넣어 판장쇠를 만드는데 울산 달천에서는
이 토철이 무진장으로 널려 있었다. 이 토성 상태의 철 성분이 다량 함유된 광물을 녹여 쇠를 뽑아내는 제련 작업을
쇠부리라 한다.

이 덩이쇠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춤과 노래로 만들어 낸 것이 울산 달내 쇠부리 놀이이다.

쇠부리기가 자취를 감춘 지 어언 반세기, 이 중요한 무형문화유산을 불매대장과 편수들의 경험과 구술을 토대로
재현해 낸 것이 “울산 달내 쇠부리 놀이”이다


쇠불이 놀이의 등장인물로는

쇠붙이의 주인

불작업의 우두머리인(선소리) 도편수

골 작업의 숙련공 골편수

그 외 불편수, 숯쟁이, 쇠쟁이, 운반꾼, 불매꾼, 쇠부리농악대, 등 약 80여명이 공연에 임한다.


제 1장 등장의 장


쇠부리 놀이의 전체를 지휘하는 골편수의 지휘에 따라 징이 울리고 연이은 농악대의 길굿이 펼쳐지면 뒤를
이어 부리꾼들이 쇠부리기를 위하여 토철과 숯을 싣고 불매꾼들과 함께 등장한다. 이때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기 위해 금줄도 함께 등장한다.
한바탕 자린모리와 신명을 더하는 휘모리가 휘몰아 간다.


제 2장 고사의 장

 

골편수의 지휘아래 불매 터 앞에 우리의 전통 음식을 차린 제상을 놓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원제를 올린다.


제 3장 금줄 소각의 장


부정한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한 뒤 금줄을 용광로에 태운다.


제4장 쇠부리의 장


“불매야” 하는 골편수의 선창에 따라 쇠부리장이 열린다. 부리꾼들은 분업화 된 제 맡은 임무를 재현하고
숯쟁이들은 숯을 용광로에 붓고, 쇠쟁이들은 토철을 붓는다. 그리고 불매꾼들은 불매를 디딛다. 불매 밟는
속도를 조절해 줄 불매가를 부르는 불매대장은 고역에 지친 쇠부리터의 생동감 그 자체이다.


“어여루 불매야 어여루 불매야

불매부는 여러분들 어여루 불매야

불매부는 내력이나 알고 부니

어여루 불매야...“


로 시작되는 구성진 불매가가 울려 퍼지고

불매꾼들은 열심히 불매를 밟고 부리 꾼들은 제 나름의 소임을 하느라 분주하다.


제 5장 놀이의 장


작업이 끝나고 판장이 된 쇠붙이가 나온다. 판장 쇠를 보고 사람들은 저마다 좋아하며

한마당 풍악이 울리며 신명나는 춤판이 어우러진다.


잊혀져가는 우리 전통 문화를 재현해 나가는 장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맥을 보는 맑은 가을의 하루였다.


***불매가


옛날에 시원선생 조작으로 만든 불매

불매는 있건만은 시원선생 어디 갔나

태고 때 시절이 언제라고 시원선생 있을 쏘냐

어얼씨구 불매야 어얼씨구 불매야

저얼씨구 불매야 잘도 분다 불매야

이 불매 이름이 무엇인고 경상도 도불매라

쇠는 어디 쇠냐 달래꼴 토철이라

우리조상 현종 때에 구충당 의립선생

10년 세월 철을 찾아 백두에서 지리까지

헤매다가 찾았다네 찾고 보니 달내 토철

삼한때도 났다더라 이 쇠 녹여 솥 만들고

또한 녹여 쟁기 떠서 농사짓고 부모봉양

숯은 어디 숯인고 도독꼴 참숯이라

톱으로 베고 도끼로 쳐서 정성들여 구웠다네

어얼씨구 불매야 저얼씨구 불매야 쿵쩍쿵쩍 불어주소

무룡산에 산신령님 용당골에 용왕님요

이 쇠부리 잘만 되면 반달 같은 논배미 사서

장가도 가고 지고 어얼씨구 불매야 저얼씨구 불매야

도편수 거동보소 부지갱이 거머쥐고

갈팡질팡 하는구나 산지조종은 곤륜산이요

수지조종은 황해수로다 불매조종은 도불매

국태는 민안하고 시하연 풍하니 아니 놀고 무할소냐

어얼씨구 불매야 저얼씨구 불매야

천중세월 인중수요 천만건곤 복만가다

배가고파 밥을 먹고 목이 말라 술 마시고

일심동체 불러주소 쿵떡쿵떡 불러주소

어얼씨구 불매야 저얼씨구 불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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