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호남.일본지역의 전방후원분과 구태백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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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해무리 조회수 : 40 08.09.24 13:20 http://cafe.daum.net/mughua/4XXa/255
즉, 근초고왕부터 강력한 정복국가의 특성이 나타나고 백제왕의 성씨가 부여씨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참고로 『삼국유사(북부여)』의 기록에는 “古記(고기)에 이르되 전한서에 宣帝(선제) 신작 3년 임술 사월 팔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 : 대요(大遼) 의주(醫州) 경게지역임]에 내려와서 오룡거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을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해모수(解慕漱)라 이름하였으며 아들을 낳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 : sun)로 씨(氏)를 삼았다.”고 한다.
더구나 이후 백제의 정치조직 안에는 유목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직제(좌·우현왕제)라든가 ‘어라하’, ‘건길지’ 같은 북방 유목민 계열의 호칭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본다면 백제는 부여의 분국 또는 남부여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특집3], [특집4] 참고).
중국문헌은 구태백제에 대해 고두막한의 후손으로 부여왕이며, 대방(황해도)에 구태백제를 개국하고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했다. 즉, 「북사」와 「수서」를 인용하면, “동명(고두막한=졸본부여 개국=북부여 5대 단군)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탁이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그리고 무덤양식도 일본의 인덕왕릉과 서울 강동지역의 고분군들의 무덤양식(전방후원분)은 북방유목민족의 무덤양식으로 동일하다. 서울 석촌동 무덤양식은 고구려의 적석총양식으로 온조백조계 무덤양식임을 알 수 있다.따라서 서울강동지역의 무덤양식이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것은 온조백제를 통한 강력한 북방기마민족이 남하하여 일본열도까지 정복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서울 강동지역의 무덤양식(전방후원분)이 마한지역에 해당하는 전라도 지역과 일본열도에 분포되어 있는 이유다. 근초고왕계로 교체된 백제가 강력한 기마군대로 마한과 가야,일본열도를 복속시켰음을 말해주는 것이다[윤복현]. 세계 최대 규모의 서울 강동지역의 전방후원고분-일본 전방후원분의 원형이다. 무덤양식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구려무덤양식인 서울석촌동 적석총무덤양식의 세력에서 전방후원분 무덤양식의 세력으로 백제의 왕권이 교체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온조백제계에서 구태백제계로 교체되었다는 증거다. [전라도 지역에 많이 분포된 전방후원분] 구태백제계로 교체된 근초고왕의 마한정복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사학자들은 일본 인덕왕릉의 무덤형태가 전라도에서 발견되니 일본이 지배한 흔적이라고 왜곡하나, 이미 서울 강동지역에서 그 원형이 발견된 이상 인덕왕릉의 주인들 또한 고대 백제세력임이 입증된 것이다. [무덤양식자료보기 http://blog.daum.net/hanquk/6824056 ************************************************************************************* [범쥬신]일본은 부여족의 나라( 김운회 동양대 교수)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미스테리는 진구황후(神功皇后)와 오우진천황(應神天皇 : 진구황후의 아드님)에 관한 것이다. 진구황후와 오우진천황은 일본 역사의 여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구황후의 업적은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구황후는 실존인물로 볼 수 없는 가공의 인물이며 다른 사람의 업적으로 일본에서 창조된 인물이다. 결국 근초고왕이 진구황후의 탈을 썼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면 일본의 실질적인 초대천황(오우진천황)은 근초고왕의 아드님이거나 처남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일본 최초의 통일 국가는 4세기 경의 야마도(大和) 왕국으로 그 시조는 호무다(品陀) 즉 오우진(應神)천황이다. 도쿄대학의 이노우에미쓰싸다(井上光貞) 교수는 “오우진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한다[井上光貞 『日本國家の起源』(岩波書店 : 1967)]. 따라서 오늘날 일본은 오우진 천황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흔히 일본인들이 야마도 정신(일본 정신) 또는 야마도의 혼(魂)이라고 하는 그 정신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진구황후가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까지 정벌해서 조공을 받을 만큼 대단한 인물로 기록되어있다(그러나 진구황후가 활약한 시기를 비교해보면 다른 사서에서는 진구황후에 대한 기록이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구황후 49년에 진구황후가 이라다께 목라근자 등을 보내어 탁순국(卓淳國 : 대구)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고 남가라(南加羅 : 김해), 비자현(比自炫 : 창녕), 녹국(㖨國 : 경산), 안라(安羅 : 함안), 다라(多羅 : 합천), 탁순(卓淳 : 대구?), 가라(加羅) 등의 7개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고해진(古奚津 : 강진?)과 제주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근구수왕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비리(比利 : 완산), 벽중(辟中 : 김제) 등의 4읍도 항복하였다.
그런데 이 업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하는데다 이 시기가 백제(남부여)의 세력이 현재의 경상도 지방에 미친 시기이고 이들의 집결지가 낙동강 상류로 알려진 탁순(대구?)이라는 점도 진구황후의 업적이 근초고왕의 업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신당서(新唐書)]에서 백제의 위치를 기록하기를
[백제 22담로]-담로제도는 복속지역에 대한 통제력 강화와 지역의 생산물 수취를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비문해석"대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하고 새긴 비"-백제본국이 한반도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백제 수도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소정방이 새긴 백제 정벌비
만주를 당나라에 넘기고 대동강이남에 그친 신라의 반민족적 통일 당나라가 한반도까지 삼키려들자, 백제.고구려유민과 합세한 신라와 당나라 전쟁 [결국 당나라를 끌어들인 신라의 반민족적 통일전쟁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