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라국의 역사와 문화

조원영 / 합천박물관 학예사, 문화재감정위원

 

1.명칭 유래

안라국(安羅國)은 현재 함안군 일대에 있었던 가야제국의 한 국가였다. 옛 문헌에서 안라국에 대한 국명(國名)을 살펴보면 다양한 형태로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과 아나가야(阿那加耶)라는 국명으로, 물계자전에는 아라국(阿羅國)으로, 『삼국유사』오가야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로, 『일본서기』에서는 안라(安羅)와 아라(阿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아라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왔으나, 이 용어는 가야가 존재했던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신라말 고려초에 만들어진 조어(造語)이므로 적당하지 않다. ‘아시량(阿尸良)’의 ‘시(尸)’는 옛말의 사이시옷을 표기한 것이므로 아시량은 곧 ‘아ㅅ라’를 표기한 것이며, 이것은 아나, 또는 아라로도 쓰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시량, 아나, 아라, 안라 등은 모두 ‘아ㅅ라’라는 나라 이름을 뜻하며, 현대음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 사이시옷은 ‘ㄹ’받침의 음가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아ㅅ라’는 ‘알라’로 읽을 수 있다. 이와 가장 가까운 것이 ‘안라’이므로 함안지역 가야국의 국명은 ‘안라’ 또는 ‘안라국’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2.지리적인 위치와 대외무역
 
안라국은 삼한시대 변진(弁辰)의 한 국가인 안야국(安邪國)이 성장 발전하여 성립되었다. 함안군의 지형을 살펴 보면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이다. 남동쪽으로 해발 500~700m 정도의 산들로 창원, 마산, 진주와 경계를 이루며, 북서쪽으로는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 강으로 창녕, 의령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 조건은 외부로부터의 방어에 유리했을 것이다.

함안군 일대에는 많은 지역에서 지석묘(支石墓)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이미 이 지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함안지역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평지와 구릉지의 경사면을 개간하여 농경을 하면서 차츰 성장하여 기원 전후시기 안야국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안야국은 구야국과 함께 변한제국 중에서는 중국 군현과 교섭하면서 중국에 잘 알려진 유력한 정치집단이었다. 안야국의 인구는 『삼국지』의 기록에 의거해 보면 4~5천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의 구조는 대개 국읍(國邑)과 읍락(邑落)으로 구성되는데, 안야국의 국읍은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변한시대의 널무덤[木棺墓] 유적, 5세기대 이후 대형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가야읍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안야국의 정치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농업생산력, 교역에 유리한 조건 등이었다. 즉 남쪽의 산지에서 발원한 계곡의 물을 이용한 계곡 사이의 평야들과 남강, 낙동강의 배후 저습지를 이용한 농경이 안야국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리고 강을 이용한 교통로 확보와 교통의 요충지로서 차지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 등도 안라국의 성장 기반이었을 것이다.

삼한의 여러 나라들은 일찍부터 중국 군현 및 인근 국가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중국계 유물과 왜계 유물이 조사되고 있다. 함안지역에서도 가야읍 사내리에서 전한경(前漢鏡)을 모방한 소형방제경(小型倣製鏡)이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안야국도 인근 변한제국이나 진한 및 마한제국, 한의 군현, 중국, 왜 등과 교역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야국의 대외교역로는 대체로 진동만으로 통하는 교통로와 마산만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이용하여 해로로 진출하였을 것이다.

안야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조건 중에 자원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식량 이외에 철, 수산자원 등이 중요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현재 함안지역에는 황철광인 제1군북광산이 있고, 동광(銅鑛)의 산출지로는 함안광산과 군북광산이 있다. 동광의 산출지에는 황철광이 함께 산출되고 있어 동광의 개발과 함께 철광석도 채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야국 당시에도 이러한 자원을 이용하여 주변지역과 교역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안라국 성장기

안야국이 성장하여 안라국이 된 시기는 대체로 변한에서 가야로 변하는 3세기 말 4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즉 이 시기 낙동강 서남부지역은 고고학적 유물, 유적의 양상이 이전의 시기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3세기 말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의 출현과 딸린덧널[副槨]을 가진 대형덧널무덤(大型木槨墓)의 등장, 4세기대 이후 지배자의 무덤에 나타나는 철소재(鐵素材)의 다량 부장, 철제갑주(鐵製甲冑)의 출현, 철제농기구의 발전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발전 등의 현상은 가야사회로의 이행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것은 문헌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3세기 말 김해 가락국에서부터 나타난 큰 정치적인 변화가 인근 가야제국으로 파급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완만한 발전을 보이던 안야국도 낙동강하류역의 정치적 변동에 연동하여 안라국으로 재편된 것으로 파악된다. 4세기대 이후 함안지역에서 김해 가락국뿐만 아니라 신라계 및 왜계 등 외래계 토기문화의 양상이 다양하게 보이는 것은 안라국으로의 전환과정에서 보다 넓은 교역망을 갖추고 비약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4세기대 이후 안라국의 실재를 잘 보여주는 것은 광개토대왕비문이다. 광개토대왕비문 경자년(400) 기록에는 왜가 신라를 침입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고구려는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안라인수병(安羅人 戍兵)’이라는 단어가 세 차례 나타나고 있다. ‘안라인수병’을 이해하는 입장은 다양하므로 여기에서의 안라가 함안의 안라국을 지칭하는 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안라인수병에 대한 해석 여부를 떠나서 당시 안라가 고구려 남정군과의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은 사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당시 고구려의 남정을 고구려-신라 연합과 백제-왜-가야 연합의 대립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김해 가락국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고 본다. 전기가야연맹의 일원이었던 안라국은 가락국, 왜와 공동으로 고구려와 맞서 싸웠지만 실제 전투는 김해 일대에서 펼쳐졌으며 안라국은 국읍을 비롯한 중심부가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지 않았으므로 전쟁의 피해는 한결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구려 남정 이후에도 자신의 국력을 유지하면서 기존의 전기가야연맹에 참여하였던 가야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은 안라국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는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은 안라국의 영역 확대를 보여주는 독자적 토기양식인 불꽃무늬토기[火焰文土器]의 확산에서 증명되고 있다.


안라국의 권역

그렇다면 안라국의 권역은 어느 정도였을까? 사실 안라국의 지방통치체제나 영역 확대를 보여 주는 기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영역이나 국왕의 통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함안지역에 현존하는 성곽의 분포와 고고자료의 검토를 통하여 대략의 정치권역을 설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함안분지를 둘러싼 산 위에는 어느 시기에 축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산성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안라국은 인접한 국가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산성을 축조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러한 산성의 분포에 따라 안라국의 지배력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추정할 수 있다.

안라국의 북쪽에는 낙동강, 남강이 있어 자연적인 방어수단이 되었다. 서쪽에는 방어산성이 있는데, 이곳은 백제의 진출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에 있는 여항산성과 파산봉수는 안라국이 남쪽 해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이자 동시에 남해안을 통한 외적을 침입을 대비한 시설물로 보인다.

또 대현관문은 함안군 여항면과 마산시 진북면의 경계지역에 있는데 진동만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안라국의 중요한 경계지역이었을 것이다. 동쪽에 있는 포덕산성은 마산疎♧¯ 방면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이므로 그 북쪽에 있는 성지봉산성, 검단산성, 성산성, 안곡산성, 칠원산성과 연결되어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에 대비한 방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곽의 배치로 볼 때 안라국의 권역은 칠원의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금의 함안군 일대였다.

5세기대 함안의 대표적인 토기인 불꽃무늬토기의 분포를 통해서도 안라국의 지배권역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토기가 조사되는 지역은 함안분지내의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외곽지대에는 칠원면 오곡리유적, 마산시 현동유적, 창원시 도계동유적, 의령 예둔리유적, 유곡리고분군, 봉두리고분군, 진북 대평리고분군, 진양 압사리유적 등이다.

분포지역으로 보아 당시 안라국의 영역은 함안을 중심에 두고 서쪽의 진주 일부지역, 북동쪽의 창원 일부지역, 서북쪽의 의령 일부지역, 남동쪽으로는 마산의 진동지역 등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권역이 멸망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6세기대에 이르면 백제,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로 인하여 권역의 축소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6세기대 안라국은 남부 가야제국을 주도해 가면서 동쪽과 서쪽에서 잠식해 들어오는 백제와 신라에 대하여 군사적 또는 외교적으로 대항하였으며, 왜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가야제국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문헌자료에서 엿볼 수 있다.


6세기 안락국 대외관계 문헌
6세기의 사정을 기록하고 있는 『일본서기』계체(繼體)·흠명기(欽明紀)에는 가야지역을 둘러싼 주변국들, 즉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 여러 나라가 서로 각축을 벌이는 모습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는 많은 위험이 내포되어 있어 철저한 사료 비판을 해야 한다. 이 시기 역사 자료들이 대부분 백제삼서(百濟三書)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지만 8세기 일본의 고대 천황주의사관에 의해 왜곡 윤색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대체적인 동의를 얻고 있는 내용 가운데 안라를 중심으로 하는 대외관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백제가 기문[전북 남원], 대사[경남 하동]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로써, 기문을 상실한 가라국은 백제에 대립하여 신라와 결혼동맹(522~529년)을 체결하였다. 안라국은 백제의 기문지역 진출에 대해서 묵인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가라와 반목하였다. 이러한 가야제국의 갈등을 틈타서 신라는 가야지역의 도가(刀伽)·고파(古跛)·포나모라(布那牟羅) 3성을 함락시킨 후 또한 북쪽 경계의 5성을 함락시키면서 차츰 가야지역을 잠식해갔다. 이 시기에 안라는 백제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신라와는 적대적인 경향을 보였다.

제2기는 백제가 기문·대사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신라가 낙동강 서남부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안라의 외교적 역할이 두드러진 시기이다. 529년 안라가 주도한 고당회의(高堂會議)-이하 안라회의-는 백제와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에 대하여 가야지역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안라는 의도적으로 백제를 배제하였다. 즉 백제가 안라회의에 참여하였으나, 백제의 대표는 고당에 오르지도 못하였다. 이는 백제가 대사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라 남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라지역을 잠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대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도 낮은 관등의 관리를 파견하였으므로 안라회의 자체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안라의 성장을 대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안라회의가 성공하지 못함에 따라 백제와 신라는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계속하였다. 백제는 하동에서 함안 사이의 지역에 걸탁성(乞城)을 축조하였고, 신라는 남가라, 탁기탄 지역을 멸망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라는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 안라에 파견된 왜의 사신)를 이용하여 안라의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즉 백제의 안라에 대한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신라와 외교적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신라와의 외교활동을 주도한 것이 일본부였던 것은 안라가 백제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고자 했던 것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안라의 외교정책에 대하여 백제의 성왕(成王)은 이미 멸망한 남가라·탁기탄·탁순의 재건이라는 명분으로 두 차례에 걸친 사비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안라를 비롯한 가야제국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백제가 계속적으로 가야지역에 군령성주(郡令城主)를 두어 안라지역으로의 진출의도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라 또한 안라지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안라의 외교정책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안라는 고구려와 밀통하여(548년) 백제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안라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는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가 백제를 구원하여 고구려가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안라의 의도는 무산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안라와 백제의 사이가 매우 소원한 관계로 변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신라와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3기는 안라 주도의 외교적 활동이 성공을 거두지 못함에 따라 안라가 다시 친백제적인 성향으로 전환했던 시기이다. 안라가 다시 백제와 화친하면서 안라는 백제와 신라가 충돌하였던 관산성전투(554년)에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전쟁에 참여하였던 가야의 군대가 2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안라국은 이 전쟁에 국운을 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이 신라에 패배하였고 가야제국은 차례차례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라 멸망의 결정적 계기는 관산성전투의 패배였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관산성전투 이후 가야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하였다. 555년 비사벌(比斯伐, 창녕)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고, 557년에는 감문주(甘文州, 김천)를 설치하였으며, 561년에 창녕 순수비(巡狩碑)를 건립하였던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라국이 멸망했던 때는 언제쯤일까? 『일본서기』흠명기 22년(561)조에 보이는 “신라가 561년 아라(阿羅) 파사산에 성을 축조하여 일본에 대비했다”는 내용에서 안라국의 멸망을 추정할 수 있다. 아라는 곧 안라국이며, 파사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함안군 산천(山川)조 및 봉수(烽燧)조에 나오는 ‘파산(巴山)’으로 비정할 수 있다.

파산은 지금의 봉화산으로서 봉수대는 안라국이 해안으로 진출하는 루트인 진동지역과 함안의 경계지역에 있으며, 봉화산 북쪽 최고봉상에 위치하여 남으로 진해만(진동만)과 북쪽으로는 함안 일대를 비롯하여 낙동강과 남강 너머 의령까지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파산은 안라국의 중요전략기지였을 것이므로 이 지역에 신라가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미 안라가 신라에 의해 복속되었음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일본서기』흠명기 23年(562)조에 “어떤 책에는 21년(560)에 임나가 멸망했다”라는 기록을 참조해 본다면 안라의 멸망시기는 560년에서 561년 사이로 볼 수 있다. 특히 안라는 가야제국의 중심국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이러한 안라국의 멸망을 전하는 기록이 실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안라국의 멸망은 560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라국의 흔적은 현재 함안군 가야읍의 말산리와 도항리에 말이산고분군이라는 대형무덤들로 남아 있다. 이 유적은 1917년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말이산34호분(현재 4호분), 말이산5호분(현재 25호분) 등이 발굴조사 된 후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86년 국립창원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도항리14-1호, 14-2호가 조사되었다. 이 2기의 대형무덤은 도항리고분군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함안지역에서 광복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 연구자에 의한 발굴조사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러다가 1991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도항리35호분과 그 주변지역을 발굴조사하여 청동기시대 고인돌 8기와 집자리 1동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도항리 일대가 선사시대부터 인간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해에는 가야읍 아파트 공사 중에 발견된 초대형 덧널무덤인 ‘마갑총(馬甲塚)’을 통해 5세기 전·중반 안라국 지배층 고분문화의 성격과 양상 규명 및 안라국 철기문화의 우수성을 알 수 있었다. 이 고분은 길이 6.9m, 너비 2.8m, 깊이 1.1m의 긴 타원형의 묘광내에 판재상의 목재로 짠 덧널이 설치된 대형의 덧널무덤이다. 유구의 북쪽 벽은 굴착공사로 인하여 파괴된 상태였지만, 중앙에 매장된 무덤주인공의 흔적과 그 좌우에 가지런한 상태로 놓인 말갑옷은 그 동안 영남의 각 지역에서 확인된 것에 비하여 부장상태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 유구의 명칭을 마갑총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 무덤에서는 말갑옷 뿐만 아니라 말의 얼굴을 덮어 보호하는 말머리가리개[馬冑]의 조각으로 추정되는 여러 점의 판상철편도 확인되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는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의 정확한 성격 규명을 위해 1992~1996년까지 5차례의 연차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고총고분인 5호분, 8호분, 15호분 등과 널무덤 20여기, 덧널무덤 20여기, 구덩식돌덧널무덤 10여기, 돌방무덤 3기 등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안라국 지배층의 무덤 변천과정과 당시 안라국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97~1998년에는 도항리와 말산리 일대의 도로 확장공사 및 단독주택 신축공사로 인하여 발굴조사가 필요하게 되자 경남고고학연구소에 의해 모두 5차례의 시굴 및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널무덤 38기, 독무덤 3기, 덧널무덤 37기, 구덩식돌덧널무덤 4기가 조사되었다. 또한 2002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는 말산리의 건물 신축공사 도중 발견된 돌덧널 길이 8.65m, 너비 1.65m의 초대형 구덩식돌덧널무덤 1기를 조사하였다.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 이 유적에 고분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삼한시대부터였음을 알 수 있었으며 이 시기의 유물들은 구릉의 북쪽에서 출토, 채집되었다. 이 구릉에 원형 봉토분이 발생한 시기는 5세기 초경으로 추정된다. 대형 봉토분들은 입지상 좋은 지점에 위치하면서 구릉의 북쪽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조성된 경향을 보이며, 대형분의 사이와 구릉의 사면에는 중·소형분이 분포한다. 유적의 연대는 삼한시대에서 6세기까지이다.

이제 안라국 사람들이 남긴 유물을 살펴 보자. 먼저 안라국의 토기에 대해 살펴 보면 대체로 4세기 전반부터 고식도질토기가 생산되었는데 굽다리접시, 짧은목항아리, 화로모양그릇받침, 손잡이잔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특히 4세기대에 안라국 토기를 대표할 수 있는 工자형굽다리접시는, 전반에는 굽다리가 길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차츰 짧아지면서 5세기대의 불꽃무늬굽다리접시와 그 계통이 연결된다.

5세기대에는 앞 시기의 토기보다 그 형태와 종류가 더 다양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며, 무덤에 부장되는 양도 많아졌다. 이 시기 안라국을 대표할 수 있는 토기는 굽다리에 불꽃모양의 투창이 뚫려 있는 불꽃무늬굽다리접시를 비롯하여 삼각형투창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 등이 있다. 이외에도 수레바퀴모양토기, 등잔형토기, 종형토기도 제작되었다.

6세기에 접어들면서 굽다리접시와 뚜껑 등의 토기류는 그 형태가 조잡해지고 규모가 작아졌다.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짧아지고, 손잡이가 붙은 것도 나타났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고령계, 경주계, 창녕계의 토기가 유입되어 안라국 토기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안라국의 무기를 살펴 보면 공격용무기로는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화살촉 및 화살통, 투겁창[鐵鉾] 등이 있고, 방어용무기는 투구와 갑옷 등이 조사되었다. 의례용도구들도 출토되었는데, 덩이쇠, 미늘쇠, 점치는 뼈[卜骨] 등이다. 안라국의 말갖춤은 고구려와 백제의 말갖춤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제작·사용되었으며 신라의 말갖춤이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함에 비해 실용적인 것이 특징이다. 말안장가리개[鞍橋], 발걸이[鐙子], 말띠드리개[杏葉], 재갈[轡] 등이 출토되었다.

안라국의 장신구는 주로 유리, 옥, 수정, 마노, 비취 등을 이용하여 귀걸이, 반지, 목걸이 등으로 이용하였다. 또 생산도구로는 도끼, 낫, 쇠스랑, 괭이, 가래 등이 출토되었고, 그 외에도 실을 뽑을 때 사용하는 가락바퀴 등이 주로 발견되고 있다.

함안지역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 가운데는 주변의 가야 여러나라, 또는 백제와 신라, 일본 등지에서 제작되어 이 지역의 무덤에 매납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래계 유물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 자료들은 토기가 대부분으로서 굽다리접시, 뚜껑, 항아리 등이 주류를 이룬다. 주로 5세기 중·후반대에는 창녕의 비사벌, 김해의 남가라계의 유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는 백제와 신라, 고령의 가라국과 고성의 고자국 유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유물들은 각 시대별로 안라국의 대외교류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안라국의 국읍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지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의 기록인 『함주지(咸州誌)』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즉 가야국의 옛터는 부존정(扶尊亭)의 북쪽에 있다고 했는데, 그 기록으로 보아 부존정은 지금의 가야동 쾌안 뒷산(해발 79m)으로 추정된다. 가야동이 안라국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이유는 문헌기록도 있지만 초석, 우물, 토축흔적 등의 고고학적 유적과 더불어 내성과 외성의 2중 구조로 된 봉산산성이 배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도읍지가 대부분 2중성의 구조로 된 것과 일치한다.

또한 주변 여러 지역에서 신읍(臣邑, 신하들의 생활주거지), 선왕동(先旺洞, 은퇴한 노왕이나 안라국 멸망 이후 왕족이 모여 살던 곳), 궁뒤(왕궁지의 뒤편) 등과 같은 왕궁지와 관련된 지명이 전하고 있다. 비록 전해지는 지명이긴 하지만 옛 안라국의 영화를 알려주는 왕궁을 추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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