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왕국 가야의 불교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4〉김해 초선대와 파사석탑


가야(伽倻). 낙동강 유역을 근거지로 기원전후부터 562년까지 존재했던 고대국가. 1세기 무렵 12부족이 6가야로 편성되었고 제법 발달된 철기문화를 통해 한반도 동남부를 지배했던 연맹체. 초대 왕은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 안의 황금알에서 태어난 수로왕(首露王). 이때가 서기 42년. 그는 6년 뒤 멀리 불교국가인 인도 아유타국으로부터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하였고, 서기 199년 158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이 이국의 신부와 함께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넘나든 인물. 신비의 왕국 가야의 역사는 우리 고대사에 있어서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중 하나다.


‘신비의 왕국’ 가야의 불교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장유화상 발자취 지역사찰 곳곳에 남아

 불상과 석탑에는 인도양식 특징 나타나

<사진> 초선대 마애불. 상호에서 인도 귀족의 모습이 보여 가야불교의 증거라고 전한다.

600년을 유지한 나라의 역사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고작 몇 줄이 전부이고, 그밖에 일본의 역사서에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할 뿐이다. 그래서 가야의 역사는 온통 수수께끼 투성이다. 근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철기를 사용한 선진문화의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고는 있어도 역사의 대부분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주류 사학계의 연구가 실체가 불분명한 가야사의 정형화에는 기여했으나, 고대사에서 필요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는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도 분명해 보인다.

반면에 이른바 재야사학 쪽의 시각은 훨씬 스케일이 크다. 단순 연맹체 정도가 아니라 1세기에 멀리 인도와도 독자적 교통을 할 정도로 강대한 해상국가였으며, 가야 출신의 천황(10대 숭신천왕)이 나올 정도로 일본에 직접적 영향력을 주었던 초강대국이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한국 고대사를 주름잡았던 잊혀진 고대왕국에 대한 짙은 향수가 느껴진다.

가야의 역사와 불교를 신화가 아닌 사실로 인정하고 연구함으로써 이 분야에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종기(李鍾琦, 1995년 작고)다. 신문언론인이자 아동문학가인 그는 가야의 고토를 모두 답사한 것은 물론이고 왕비 허황옥의 출신지인 아유타국으로 비정되는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고대 인도의 아요디야국까지 찾아가 그곳에서 가야와의 연관성을 추적한 뒤 1975년에 <가락국탐사>라는 책을 펴냈다. 순전히 아마추어의 입장에서 연구한 것이지만 그 책은 국내 사학계가 관심을 갖지 않던 부분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위업’이라 할만 했다. 어느 분야에서든 열정에 넘치는 아마추어가 매너리즘에 빠진 프로를 능가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가야사에 관해서는 불교사학계도 논의의 당사자다. 수로왕이 허황옥을 신부로 맞이할 때 인도의 불교가 함께 들어왔다는 것이 가야불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뱃길을 통해 허황옥과 함께 온 오빠 장유(長遊)는 인도의 고승으로서 그로 인해 가야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가야’라는 말 자체에 불교의 색채가 가득 묻어있다. 주지하다시피 석가모니가 성도한 곳이 바로 부다가야 아닌가.

가야불교에 대한 의문은 내게서 늘 떠나지 않았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에 중국 전진(前秦)에서 순도를 통해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의심 없이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수로왕과 혼인하기 위해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옥 일행이 파사석탑을 들여오고, 또 그의 오빠인 장유는 가야 영토 곳곳에 사찰을 창건했으니 결국 정황상 불교가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는가. 이렇게 되면 교과서에 나오는 불교도입시기와는 무려 300년의 차이가 생긴다. 그렇지만 가야불교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진> 초선대 마애불 앞 불족적. 왼쪽 발자국으로, 인도 부다가야에 있는 오른쪽 발자국과 한쌍이라고 전한다.

“가야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수로왕이 허황후를 아내로 맞아 나라를 다스린 지 150여 년이나 되었지만 당시 아직 절을 세우고 불교를 믿는 일이 없었다…제8대 질지왕 2년(452)에야 비로소 왕후사(王后寺)를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452년 이후일 것이다. 허황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가야인들이 수만 리나 떨어진 인도를 알고 있었을 리 만무하니까. 그들은 불교가 전래된 후에야 비로소 불교의 성지인 인도의 존재를 인식하게 됐을 것이다. 따라서 허황후의 인도 출신설은 조작 내지 윤색된 것이다.”

여기에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조하고 있다. 하지만 김해를 중심으로 한 옛 가야의 영토에 자리 잡은 사찰들에서는 예외 없이 허황후 이야기가 전한다. 나는 그런 사실에 도통 마음이 편치 않았고, 여러 의문점들이 떠올랐다. 이 지역 일대의 거의 모든 사찰에서 가야 창건설이 주장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전설이라고만 할 것인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전설은 아무 이유 없이 만들어졌겠는가? 인도에서 가야까지 8000㎞도 넘는 먼 바닷길이라지만 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길이라고만 생각하는가?

내가 가야사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가락국탐사>를 읽고부터였다. 고등학교 시절, 동네 서점에서 이 책을 우연히 손에 잡은 나는 신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가야의 역사에 매료되었다. 전공을 사학으로 정한 것도 이 책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엔 마침 김해에서 올라온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와 나는 학교 근처의 허름한 라면집에서 막걸리와 소주를 가운데 두고 역사 토론을 벌이느라 야간통금에 걸리기 일쑤였다.

평소에도 알아듣기 힘들던 그의 김해 사투리는 빈 병이 늘어감에 따라 해독불능의 수준이 되곤 했지만…. 김수로왕과 허황후를 각각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끼리는 통혼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으나, 김해 김씨에게는 몽고반점 비슷한 남다른 신체적 특징이 있어서 자기들끼리는 서로 확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에게서 처음 들었다. 대학생활이후 처음 맞은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나는 이 친구의 김해 집으로 내려가 함께 김해 일대의 가야유적을 쏘다녔는데 이것은 가장 소중한 추억 중의 하나다.

가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진 사찰의 범위는 꽤 넓다. 내가 다녀본 바로는 김해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합천 해인사, 서쪽으로 하동 쌍계사, 그리고 북쪽으로 청도 대운암에 이르기까지 가야불교의 시조 장유화상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나는 가야의 영토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가야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들의 분포가 곧 가야의 영토일 테니까.

공간적 범위를 김해 지방에만 한정해 보더라도 몇 가지 유물도 전한다. 대표적인 게 파사석탑(婆娑石塔)이다. 수로왕비릉 옆에 있는 이 석탑은 허황옥이 가야로 시집 올 때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한다. 붉은 빛이 도는 희미한 무늬가 표면에 남아 있는 등 우리나라에서 나는 석질이 아니라서 수만 리를 건너온 이력을 짐작케 한다.

금선사 옆에 있는 초선대(招仙臺)의 마애불상 역시 가야불교의 대표적 상징 중 하나다. 5m 크기의 바위에 새겨진 이 불상을 대부분 고려시대 것으로 본다. 하지만 가야불교를 믿는 쪽에서는 1세기 작품이라고 확신한다.

<사진> 파사석탑. 허황후가 인도에서 배를 타고 올 때 가져왔다고 전한다.

그 근거로 상호가 전형적인 인도인의 모습을 닮았고, 가사 자락에 새겨진 국화꽃 형태가 인도불상에서 보이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 불상 바로 앞에는 불족적 하나가 새겨져 있는데 이 역시 가야불교의 증거로 거론된다.

한파가 몰아치던 1월 중순, 거의 30년 만에 초선대 마애불상 앞에 다시 섰다. 그 동안의 연륜 때문일까, 그때와 지금 보는 감흥이 사뭇 다르다. 함께 간 불교조각가 친구가 보자마자 외친다. “각(刻)이 달라! 이건 가야만의 조각일 수밖에 없어!” 그의 말마따나 귀에는 인도 귀족이 흔히 차던 가락지 같은 귀고리가 걸려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가야에 불교가 전파된 것을 1세기로 보아 우리나라 불교의 도입을 300년 이상 끌어올릴 수 있을 지, 혹은 과장된 설화에 불과한 것인지 당장 결론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란 문헌에만 의지한다고 해서 모두 다 풀려지지는 않는다. 기록이 모든 것을 다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현상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신화와 전설을 포함하여 실제로 전해지고 있는 현상, 그리고 우리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유물과 유적. 이런 것을 무시하고 문자만 따질 때 핵심을 놓치게 된다. 가야사도 바로 그런 경우일 수 있다.

신대현 / 논설위원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397호/ 1월30일자]

2008-01-26 오전 11:33:19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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