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 (1) / 백제의 가야 병합  2005/02/27 02:27

[출처]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 (1) / 백제의 가야 병합|작성자 가람휘

●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서기 364∼392년)  

백제는 서기 364년부터 가야영역을 침탈하고 가야본국뿐만 아니라 가야가 개척한 열도까지도 손에 넣으려 함으로써 가야와의 사이에 약 30년에 걸친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 일본서기에 소상하게 나온다.  


◎ 가야본토전역(서기 364년∼369년)        

서기 364년부터 369년까지 백제는 전후 네 차례에 걸쳐서 가야본토를 완전히 병합하는 것이 서기 신공기에 실려 있다.  

○ 서기 364년 백제가 가라지역을 1차로 침공하고 그 2년 후인 서기 366년에 재침한 것이 서기 신공기 46년 3월조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사마숙니를 탁순국에 보냈다[사마숙니는 어떤 성의 사람인지 모른다]. 이 탁순왕 말금한기가 사마숙니에 고해 이르기를 「갑자년(서기 364년) 7월 중순 백제인 구저, 미주류, 막고 등 3인이 우리 땅에 와서 말하기를 "백제왕은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국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신들을 보내 그 귀국에 가게 하였다. 그래서 길을 찾아 이 나라에 이르렀다. 만약 능히 신들에 가르쳐 길을 통하게 하면 우리 왕은 반드시 군왕에게 깊은 덕을 느낄 것이다"라고 했다. 이때 구저 등에게 말하기를 "전부터 동방에 귀국이 있음을 듣고 있었지만 아직 다녀보지 않아서 그 길을 모른다. 다만 바다가 멀고 풍랑이 험하다. 큰 배를 타면 그럭저럭 갈 수 있을 것 같다. 만약에 항구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갈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구저 등이 "지금 당장은 갈 수가 없으나 다시 돌아가 배를 준비하고 후에 가겠다"라고 말했다. 또 "혹 귀국의 사인이 온다면 꼭 우리나라에 알려주시오"라고 말하고서는 돌아갔다」라고 했다. 그래서 사마숙니는 종자인 이파이(爾波移)와 탁순인 과고(過古) 둘을 백제국에 보내 그 왕을 위로하게 하였다. 백제의 초고왕은 크게 기뻐하고 후대하였다. 오색의 채견(綵絹) 각 한 필, 각궁전(角弓箭)과 철정(鐵鋌) 40매를 이파이에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보물창고의 문을 열어 여러 가지 귀하고 색다른 물건을 보이며 "이런 진보가 우리나라에 많이 있다. 귀국에 바치려고 해도 길을 모른다. 마음은 있어도 뜻대로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사자편에 부쳐 바치겠다"라고 했다. 이에 이파이는 받들고 돌아와 지마숙니에게 고하였다. 그리고 탁순국에서 돌아왔다』

서기 364년 백제의 1차정벌    

여기서 탁순의 말금한기의 말을 들어보면 서기 364년 남해안 탁순에 백제가 1차 원정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364년과 366년 양 연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각각 누구인지를 비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구저는 귀수태자  

구저는 '오랠 久', '근본 저'인데 열도발음으로 구떼이[久저]라고 읽고 있으나 '구시'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귀수대왕을 가리키는 구스[貴須/樟/楠], 구시[櫛/串/久斯/久志/久西/奇], 구지[鷹/久士] 계열 이칭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구저라는 이름의 뜻은 "영원한[久] 시조님[저]"이라는 뜻이다. 평범하게 보이는 이칭이 시호 "고귀하신[貴] 시조님[首]"과 같은 뜻, 같은 격이다.                      
 
지금 이 기사에서는 일인이역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저'라는 글자를 파자를 해보면 "氏 밑에 一"이므로 "씨족의 첫 번째 인물"로 풀 수 있어 시조라는 뜻을 원래부터 담고 있는 글자다.            

막고

구저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에 막고가 있는데 이 인물은 당시 귀수태자의 장자일 가능성이 많다. '클 莫'>'큰 大', 고[古]>고[子]로 보면 '大子'>'長子'를 가리기 위해 지어낸 이름일 수 있는 것이다. 장자라면 무내숙니를 가리킨다.     

미주류

같이 등장하는 미주류 역시 침류일 가능성이 많다. 귀수대왕을 등재한 고사기 윤공기에 태자 기나시가루.노.오호기미[木梨輕王]가 침류왕으로 비정되는데 이 인물의 최후가, 유배를 당하여 후에 자살하는 것으로 나오고 「故其輕太子者 流於伊余湯也」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서기 숭준전기에서 포조부만(=침류)이 자결한 후에 하내국사(=진사)가 시신을 팔단을 내어 팔국에 흩어 효수했다고 나온다. 침류의 流는 서기에서 '흩어[散]'라는 말의 어감과 고사기의 '流했다'는 말에서 딴 것이다. 流는 표면상 '유배'라는 뜻이지만 한자만 따서 이름에 넣은 것이다.    

팔단을 낸 시신을, 나무토막을 뜻하는 도미[枕]로 나타낸 것이고 기나시[木梨]>귀나시[耳無시]>미미나시[耳梨]로 만든 것인데 효덕기 대화5년 3월조에서는 이리도덕(耳梨道德)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목리(木梨)와 반도음이 같은 모꾸라[木리]도 만들어 쓰고 다시 이것과 음도 같고 뜻도 같은 모꾸라[木羅]도 만들어 쓴 것이다. 모꾸라[木리]는 사기에는 글자 모양이 비슷한 목협(木협)으로 변조되어 실려 있고 木氏로도 나온다. 뜻은 "나무를 칼로 벤 것"이므로 당연히 '나무토막'이 된다. (리=刀가 세 글자, 협=力이 세 글자).                

미쯔루[彌州流]에서 쯔[州]는 즈[豆/頭]나 쯔[津]와 같이 노[之]의 뜻도 있으므로 미류[彌流]로 볼 수 있고 반도어 (훈독이두+음독)으로 조어하면 (도)미류[彌流]>도미류[枕流]가 된다. 침류왕을 모델로 한 사기 도미열전의 都彌의 彌와 같다.

사마숙니

사마숙니는 백제의 남해안칠국 평정시에 백제군을 대적한 가야군을 말하는 것이다. 본토를 지키기 위해 섬인 열도에서 발진했다는 것을 사마숙니를 보냈다고 표현한 것이다. 발음이 같은 시마[島]>시마[斯摩], 시마[志摩]로 만든 것이다. 사마숙니와 지마숙니는 동일인물이고 가야계를 대표하는 가라왕 아라사등의 이칭이다.   

말금한기
 
탁순국은 남해안 가라칠국 중 하나다. 탁순왕 말금한기는 간기[旱岐]가 가야의 왕호칭 干岐와 같으므로 말금이 이름으로 보인다. 사기에서 가야사가 결락됨으로써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음으로 분석해보면 '마기무[末錦]'로 발음되어 '마기무[眞金]'로 볼 수 있으므로 가야인의 성씨 두 자를 붙여 읽어 이두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김씨가 백제기록에는 진씨로 나온다.                
     
조공이란 정벌의사표시

구저가 조공을 하고 싶다는 듯이 말하는 것은 가야가 백제에 복종을 하지 않으면 가야를 정벌하러 원정을 가겠다고 엄포를 놓고 정벌의사를 천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귀국(貴國)이라는 말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전후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용례이기 때문이다. 탁순왕에게 말하면서 일본을 귀국이라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일본이란 이름도 없었다.                  
    
이런 이상한 귀국이 기·기에 종종 나는데 지금 이 일본은 가야의 탁순왕에게 얘기하는 것이므로 가라가 개척한 그 당시의 열도로 보아야할 것이다. 구저가 가야세가 있는 열도로 쳐들어가겠다고 벼르고 있는 것이다.  

이파이도 아라사등 

「사마숙니는 종자인 이파이와 탁순인 과고 둘을 백제국에 보내 그 왕을 위로하게 하였다」라고 하는데 종자라고 나오는 爾波移는 음이 '니하야'로 되어있으나 '이하이/'이와이'로 읽어야 하며 서기 계체기 21년에 등장하는 아라사등의 이칭인 이와이[磐井]과 발음이 같은 동일인물이다. 아라가야왕을 종자로 꾸민 것이다.    

초고대왕을 위로했다는 말은 백제에게 졌다는 말을 뒤집어 표현한 것이다. 서기 366년에는 아라사등과 탁순의 장군 과고가 패전한 것이다.              
  
가야본토전역은 열도쟁탈전의 전초전      

백제가 저자세로 일본에 조공하는 듯이 기술해놓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열도를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문제로 바야흐르 가야와 백제의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인 것이다. 그래서 백제는 그 사전정지작업으로 가야본토를 침공하여 병합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커녕 왜도 그 당시엔 없었다. 비미호 세력이 서기 266년에 晉에 사신을 마지막으로 보낸 이후 대륙기록에서 사라지면서 아라사등(=신대기 상8단 소잔명존)이 최초로 등장하기까지 약 80년 간 열도에는 한국, 중국, 일본 삼국의 사서에 아무 기록도 없고 대륙측에 독자적인 사신을 보낼 만한 힘과 조직력도 없는 자잘한 소국들의 시대인 것이다. 대륙측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서기 266년 이후 5세기초 응신세부터 재등장한다. 응신이 중국사서에 나오는 '찬왕'이기 때문이다. 아라가야 출신으로 본명이 김찬(金讚)이다.


○ 서기 367년 백제가 가라본토 정복완료

백제가 가야를 서기 364년에 1차로 366년에 2차로 침공한 1년 뒤인 서기 367년에 가야본토를 완전히 정복하는데 그것이 서기 신공기 47년 4월조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백제왕이 구저, 미주류, 막고를 시켜 조공하였다. 그때 신라국의 조공사가 구저와 같이 왔다. 황태후와 태자 예전별존은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선왕이 소망하시던 나라의 사람들이 이제서야 왔다. 천황을 뵙지 못함이 애통하다"라고 했다.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는 두 나라의 공물을 조사하였다. 이때 신라의 공물은 진기한 것이 무척 많았다. 백제의 공물은 적고 천하며 좋지 않았다. 즉시 구저 등에게 "백제의 공물이 신라의 공물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신들이 길을 잃어 사비신라에 이르니 이때 신라인들이 신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고는 3개월이 지나자 죽이려 했습니다. 이때 구저 등은 하늘을 우러러 저주하였습니다. 신라인은 그 저주가 두려워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공물을 빼앗아 자기나라의 공물로 했습니다. 신라의 천한 물건을 바꾸어 신의 나라 공물로 했습니다. 신들에게 이르기를 '만일 이 일을 잘못 말하면 돌아올 때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저 등은 겁이나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겨우 천조에 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황태후와 태자는 신라의 사자를 책하고 천신에게 기원하여 "백제에 누구를 보내 허실을 조사함이 마땅하겠습니까. 누구를 신라에 보내어 그 죄를 물음이 마땅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무내숙니와 의논하고 천웅장언을 사자로 하면 원대로 되리라"라고 했다. [천웅장언은 그 성을 확실히 모르는 사람이다. 무장국(武藏國)사람, 지금은 (*1)액전부규본수(額田部槻本首) 등의 시조라 한다. 백제기에 직마나나가비궤(職麻那那加比궤)라고 한 것이 아마도 이 사람인가]. 이에 천웅장언을 신라에 보내 백제의 헌물을 더럽혔다고 책하였다』

관련 당사국

백제가 가라를 세 번째로 침공한 것을 꾸민 기사인데 백제, 신라, 일본이 나오지만 일본은 없었고 난데없는 신라국의 사자가 등장하는데 경주신라에 이런 일은 없었다. 여기 신라도 물론 가야를 가리킨다. 아라가야의 고칭인 아시라[阿尸良]가 新羅인 것이다.

신공과 응신    

가야출신 여걸을 황후로 등재하여 신공으로 꾸몄는데  응신과 신공은 실사적으로 친남매간인데 자기의 남형제를 태자로 낳는 것으로 꾸민 것이다. 응신은 아라사등(=반정)의 중자이고 신대기 하9단 천손강림장 이설2에 보면 신공의 이칭으로 '반장희'가 나오는데 이름부터가 "반정의 장녀"란 뜻으로 지어 쓴 것이다.  

※ "신공과 응신에 대한 일인학자의 견해" 참조

예전별존은 응신

예전별존이 등장하는데 '호무다와께.노.미꼬또'라고 읽고 일본고대사에 있어서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열도의 실질적인 초대왜왕이다. 천일창 등 이칭이 수십 개나 되는 가야왕족으로서 나중에 응신천황으로 등재된다. 대륙사서에 나오는 왜왕의 이름 讚을 열도어로 훈독하면 호무[讚]가 되는데 이것이 응신의 화풍시호 호무다[譽田]의 호무[譽]와 뜻도 같고 음도 같아 동일인물임을 알려주는 키워드인 것이다.      

선왕은 침류

선왕이란 신공의 夫인 중애천황으로서 사실은 침류왕으로 비정된다. 이어서 천황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역시 중애를 가리키는 말이다. 왕이라 했다가 천황이라 했다가 혼란스럽게 되어있다. 서기 384년 가야군과의 근강전투에서 전사한 일본무존의 중자로 나오는데 일본무존이 귀수대왕이므로 중애는 침류왕인 것이다. 시호 仲哀는 「중자로서 천황이 되었으나 애통하게 죽었다」라는 뜻으로 침류왕이 서기 384년에 즉위했다가 그 이듬해에 죽었기 때문이다.          

무내숙니       

당시 귀수태자의 장남으로 비정되며 서기 369년에 칠지도를 들고 열도의 초대후왕으로 부임하는 인물인데 가자마자 가야에 회유되어 백제왕실을 배신한 인물이다. 사기에는 나오지 않으나 침류왕의 형이다.    

무내는 서기 효원기에 히꼬후쯔오시.노.마꼬또.노.미꼬또[彦太忍信命]의 손자로 나오는데 고사기 효원기에는 히꼬후쯔오시노마꼬또.노.미꼬또[比古布都押之信命]의 아들 건내숙니로 나온다. 고사기가 맞는 것이고 다께우찌[武內], 다께우찌[建內]로 동일인물이고 귀수대왕의 장남이다.              

무내의 부(夫) 언태인신명     

언태인신명은 서기 신대기 하9단 천손강림장에서 대기귀신으로부터 국양을 받아내는 후쯔누시.노.가미[經津主神]와 동일인물이고 「物部伊거弗大連은 성씨록에 伊己布都大連·伊己布都乃連公으로 나오고 '구사기' 천손본기에 요속일존십세손인 五十琴宿니의 자로서...<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2/449p/보주12-7>」라고도 나오는데 요속일은 백제 초고대왕이다. 성씨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依羅連; 神饒速日命十世孫 伊己布都大連之後也(右京天神)  
巫部連; 神饒速日命十世孫 伊己布都乃連公之後也(山城國天神)        
河內連; 出自百濟國都慕王男 陰太貴首王也(河內國諸蕃)

히꼬[彦], 히꼬[比古], 이고[伊己], 이고[伊거], 이고[陰]로 전부 같은 이름이다. 기·기에는 지금의 '아이우에오'가 고대엔 '하히후헤호'로 발음된 경우가 숱하게 있어 '히꼬'와 '이고'는 같은 말이다. 후쯔[經津], 후쯔[布都], 후쯔[弗], 후쯔[太]라는 연결고리로 동일인물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하내련'조에 분명히 백제 귀수왕으로 기재되어 있다. (거=艸 두변+呂)  
         
천웅장언  

침류왕으로
비정된다. 지구마.노.나가히꼬[千熊長彦]>지구마나나가히꼬[職麻那那加比궤]인데 침류에서 '나가스[流]'를 따고 존칭 '히꼬[彦]'를 붙여 서기 신무전기의 나가스.네.히꼬[長髓彦]를 만들고 여기서 이번에는 '스[髓]'를 빼면 나가히꼬[長彦]만 남는데 이것을 키워드로 하여 만든 이칭이다. 액전부규본수(額田部槻本首)의 조라고 하는데 액전부는 성씨록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額田部湯坐連; 天津彦根命子 明立天御影命之後也 允恭天皇御世 被遣薩摩國 平준人 復奏之曰 獻御馬一匹 額有町形廻毛 天皇嘉之 賜姓額田部也(左京天孫)  

천진언근명은 서기 신대기 상6단 서주맹약장에 등장하는 신인데 본문에서 범천내직, 산대직의 조로 나오고 상7단 보경개시장에서는 자성국조, 액전부련(額田部連)의 원조로 나온다. 그런데 성씨록 '액전부탕좌련'조에서 보다시피 그 아들이 명립천어영명이라고 나오고 이 인물은 백제의 아신왕이다.          

규본(槻本)씨는 성씨록에 응신의 후손으로 나오므로 가야계지만 여기서 규본수라 한 것은 신찬성씨록일문 아지왕조에 쯔끼모도[槻本]가 아지왕이 정착한 지명과 관련된 것이다. 이마기[今來]의 쯔끼모도[槻本]란 곳은 대화국 고시군의 이름이고 지금은 나라현 고시군이다. 웅략전기에 보면 '新漢(木+疑)本'이란 말이 나오는데 ?(木+疑)=규(槻)다. 즉 新漢의 쯔끼모도[(木+疑)本]는 쯔끼모도[槻本]와 같고 이마기[新]는 이마기[今來]와 같다.                       
   
아야[漢]는 아지사주가 왜한직(=동한직)의 조가 되었다고 했고 이것을 漢直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딴 漢인 것이다. 즉 규본수란 아신왕을 가리키는 이름인 것이다. 아들의 이름으로 부왕인 침류왕과 천웅장언이 동일인물임을 알려주는 기법이다. 아지왕과 아지사주는 아신왕의 이칭이다.        

(*1) 「坂田宿니; 息長眞人同祖 應神皇子 稚渟毛二派王之後也...(중략)...娶近江國人槻本公轉戶女 生男石村 附母氏姓冒槻本公...(중략)...取祖父生長之名 改槻本賜坂田宿니...(左京皇別)」  
신찬성씨록일문 아지왕조에 「...爾時阿智王奏 建今來郡 後改號高市郡 而人衆巨多 居地隘狹 更分置諸國 攝津·參河·近江·播磨·阿波等漢人村主是也」
 
명립천어영명

명립천어영이란 "하늘같은 분의 초상을 밝게 세운 분"이라는 뜻이고, 천어영은 성덕태자의 초상을 지칭하며 그것을 그렸다던 백제의 아좌태자를 가리키는 이름인 것이다. 아신왕의 열도시호는 阿智와 阿花인데 이 두 이름의 반도음을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 '아좌'인 것이다. (아지+아화)>아(지+화)>아좌(阿佐)>아사[阿佐]로 만든 것이다. '아지'는 고어로 '아침'이라는 뜻이고 '아화'는 "아침을 꽃피웠다"는 뜻이며 두 이름을 합성하여 이칭을 만들었는데 역시 아침이라는 뜻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열도어 아사[阿佐]>아사[朝]인 것이다. 이 아침은 아스까[飛鳥]를 가리킨다.      

※ "한일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최대의 키워드 '아침'" 참조    

凡河內忌寸; 額田部湯坐連同祖(攝津國天孫)
山直; 天御影命十一世孫 山代根子之後也(攝津國天孫)  

가와[川]와 가와[河]가 같으므로 범천내는 범하내와 같은 성씨다. 역시 천진언근명의 후손이고 명립천어영을 이번에는 '천어영명'이라고만 했다. 신대기의 천진언근명, 신공기의 천웅장언은 모두 아신의 부왕인 침류왕인 것이다.        

사비신라

沙比新羅는 발음이 '사히시라기'인데 분해해 보면 (사히+시라기)로 되어 있다. '시라기'는 물론 신라이니 제외하고 '사히'가 남는데 이것은 반도어로서 '(ㅅ+아래아)이'에서 나온 말이다. 아래아는 지금은 없어졌으나 '아'와 '오'로 분화되었고 '사히'는 '사이>새'로 분화된 발음이다. '소이'로 분화되면 '쇠'가 된다. 바로 '쇠 金'인 것이다. '사히'에서 히읏은 지금의 이응이다. '사히'도 발음만 '소이'와 다를 뿐 마찬가지로 '쇠'다. 말을 바꾸면 '쇠신라'인 것이다. 쇠신라>금신라는 바로 가야다. 바로 금신라>금가라>금(관)가야인 것이다.      

실사적인 의미

지금 이 기사를 보면 1년 만에 다시 백제가 침공을 한 것이고 백제 사신을 나쁘게 얘기한 것으로 봐서 역시 가라의 패전으로 보인다. 서기 364년부터 벌써 세 차례나 침공한 것이다. 신라는 가라의 이칭인데 마치 적으로 설정한 것은 뒤에 나오겠지만 수인기 2년 시세조 본문과 이설에도 아라사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응신기 14년 시세조에도 비슷한 유형의 궁월군 이야기가 있는데 꾸민 것이다.  
 
「우리공물을 빼앗아 자기나라의 공물로 했습니다」라고 하여 외교사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들은 가라와 백제가 충돌하게 된 이해상충관계를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또 신라가 가라이므로 백제가 그 전 두 차례에 걸친 가라침공에도 불구하고 가라를 완전히 병합을 못했다는 얘기를 비유적으로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일국의 사신이 공물을 가져가는데 그것을 가로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얘기인가.      

「무내숙니와 의논하고...」라고 하는데 무내숙니는 백제 귀수태자의 장자인데 그와 상의하여 백제의 허실을 조사한다는 것은 무내숙니가 서기 369년에 칠지도를 들고 도왜하자마자 가야와 손을 잡은 상황을 2년을 앞당겨 여기에다 연결해둔 것이다.  

「"신들이 길을 잃어 사비신라에 이르니 이때 신라인들이 신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고는 3개월이 지나자 죽이려 했습니다.....그리고는 우리공물을 빼앗아 자기나라의 공물로 했습니다」라는 것은 "가라의 저항 때문에 백제가 가라본토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는 표현이다. 백제군이 전투에서 가야군에게 일시적으로 졌다든지 가야군에 발목이 잡혀 전투가 3개월 간이나 교착상태에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천웅장언을 신라에 보내 백제의 헌물을 더럽혔다고 문책했다는 것은 침류가 그 당시 백제의 증원군을 이끌고 가서 전투를 완전히 끝낸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기사를 읽고 백제가 왜로 가는데 경주신라의 방해를 받았다고 오인하면 참으로 곤란한 것이다. 백제가 왜로 가는데 도대체 경주신라가 방해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당시 도왜경로에 해당하는 지금의 부산 근방은 가야땅이었지 경주신라땅이 아니었다.  

동시대 삼국사기 기록            

서기 364년부터 367년까지의 사기기록을 보면 근초고기 19년∼22년에 해당되는데 아래와 같이 나온다.      

사기 근초고기 21년(서기 366년)에 「春三月 遣使聘新羅 > 봄 3월 사신을 보내 신라를 방문하였다」라고 나오고 같은 시기의 사기 내물기 11년에 「春三月 百濟人來聘 > 봄 3월 백제인이 내빙하였다」라고 나온다. 나머지 연도는 기사가 없다.          

서기 364년의 백제의 제1차 가라침공도 없고 366년의 제2차 가라침공도 안나온다. 서기 신공기 46년 3월조에 백제사신이 가라를 방문한 듯이 되어 있고 그 전 44년 7월에도 백제사신이 가라를 방문한 듯이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고 가라도 신라라는 국호를 썼던 것을 알았던 사기저자들은 가라>신라로 바꾸고 이것을 마치 경주신라인 듯이 돌려서 마치 백제가 경주신라에 평범하게 사신을 보낸 듯이 기술한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인, 가야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한 일본서기가 정확한지 12세기 고려인들의 반도사관이 반영된 삼국사기가 정확한지는 불문가지다. 이런 가라의 이칭 신라를 삼국사기에서 경주신라로 돌려서 기록한 사례는 앞으로도 여러 차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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