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량 水路가 있는 변진 구야국(삼천포 늑도 지역)의 지석묘 群

 

<삼천포 角山城(구라량영)이 있는 지석묘 군 중 한 기>08.9.14일 일, 정광산인 촬영>


 변진구야국과 구야한국은 엄연히 다른 소국이다.



구야한국이 나오는 사서는 [후한서]이다.

왜로 가는 물길을 그려 놓았다. 후한서에 "낙랑군의 관청에서 그 나라는 1만 2천 리 떨어져 있고, 그 서북계인 구야한국까지는 7천리이다...."

이 구야한국을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는 그의 저서 [임나일본부와 왜]에서 광개토왕 비문의 왜는 [임나에 있었던 호족]으로 [왜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이 그 주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따라서 임나일본부라는 것도, 야마토 왕권의 출선기관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그 땅에 있는, 즉 일본 사학계의 통설대로 [임나=가야]라고 보고 가야 지역에 있는 왜인 연합이 야마토 왕권과의 관계를 가짐으써 세력을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러한 견해의 밑바탕에는 구야한국을 가야, 즉 김해 땅라고 믿고 있는 이유도 작용하고 있음을 물론이다. 요컨대 한국 남부지방에 형성된 왜인 연합이란 것이 있었다고 보고, 이것을 [일본서기]의 용어대로 [가라]의 왜, 다른 말로 [가야왜]라는 설명이다.

 <옆사진:각산성(구라양영)근처 지석묘이다. 옛날에는 필자의 할머니밭이었다. 어릴적 부터 보고 근처에서 놀았던 지석묘 군이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하나의 주장 내지 견해라고 치고, 진위 여부는 제껴 놓더라도 이노우에 역시 4~5세기에 야마토왕권에 의한 한반도 출병은 있을 수 없다고 한 점에서는 한국 학계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


임나가 결코 한국땅에 있었던 가야가 아니라는 점에서 기존의 고대사 인식 체계는 [사실과 해석] 사이에서 빚어진 오류가 엄청났던 것이다.

고대사의 인식 체계를 엉뚱한 방향으로 설정해 놓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의 하나가 왜국까지 이르는 항해 경로에서, 출발지인 대방군(帶方郡)의 위치와, 맨처음 들르는 구야한국의 위치에 대한 비정이다.



만일 대방군 및 구야한국의 위치 비정이 바뀌면 기존의 한일 고대사는 붕괴되고 만다.  대방군은 한반도 황해도 지역에 漢의 군사 기지였던 그 [대방]이 아니라, 중국의 하북성 창려지구, 즉 오늘날 북경 동남방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구야한국도 일본인 학자들이 [邪(사)]를 굳이 [야]라고 읽어, 구야=가야 , 즉 김해라고 비정한 이래 한일 양국 학계에서는 이를 확고한 통설로 믿고 있은 것이다.


구야한국이 김해나 부산 근처가 아니라 전혀 엉뚱한 곳에 있다면, 그 동안 한일 고대사 인식 체계를 세운 하나의 뼈대가 저절로 붕괴되어, 이에 관한 종래의 주장이나 학설 따위가 모조리 엉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옆 사진:삼천포 - 창선 연륙대교. 연결된 섬 가운데 하나가 구라도(늑도)이다, 고려시대까지 창선도와 삼천포(三千鎭/옛 지명) 사이의 수로를 '구라량'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 사량도로 수군만호를 옮겼다.옆 노량의 수로가 있고, 거제도 견내량이 있다.>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야 어찌됐건, 구야한국의 정확한 위치 비정은 김해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부에서 새롭게 주장한 거제도 부근(문정창,박시인 설)도 아니다. 구야한국은 일본의 규슈에 있으면, 정확히 말해서 아리아케우미(有明海)의 북안에서 멀지 않은 코쇼산(古所山) 일대로서 과거 지쿠젠국(筑前國)의 야스군(夜須郡)에 속한다. (임나신론 /1995년 고려원 김인배,문배 공저)


일본에서도 야요이시대의 토기나 청동기 ,석기, 그리고 벼농사가 조선으로부터 유입될 때, 문화의 유입만이 아니라 당연히 조선인의 유입도 이었다고 솔직히 시인한 도마리 가쓰미 씨는 규슈의 [奴國王은 조선이이었다]고 부인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한다.(泊勝美 [고대구주와 조선 p48~50] 그 [조선인], 더 정확히는 [고조선]이라고 말해야 옳다.  이들이 남겨 놓은 지석묘군, 또한 기자조선의 [箕準기준]의 한반도 망명시기(기원전 194년)기점으로 문화적 조선인의 유입도 있었다.



한단고기에는 자세히 구야한국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6을 인용해 보자,

"협보(주몽의 부하/주)는 장혁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해포로부터 몰래 향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에 이르니 규슈해의 북안이다. 여기서 수개월동안 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의 시조라 한다.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을 세워 이를 통치케 하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구야국의 사람들이 한때 모여 산 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야한국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 홀본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찌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므로 늘 열제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일본서기에 자주 나옴/광개토왕 비문에도 나옴/결코 아라가라/함안이 아니다 :글돋주)과 함께 이웃하며 성이 같다. 본래 웅습성을 갖고 있으니 지금의 규슈의 웅본성(구마모토) 그것이다."

<옆사진:角山城 의 다른 이름(구라량영)의 성곽, 봉화대도 있다. 수군만호가 주둔하고 있었고 바로 아래가 구라량이다. 왜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한 늑도(구라島)에서는 중국 화폐 반량전,오수전, 동경,특히 일본 야요이시대 토기가 나온다. 이럴보고 무역 운운하는 역사학자들의 상식이하의 생각은 버려야한다. 야요이시대에 무슨 무역인가, 기원전에 말이다. 오히려 물길을 따라 사람들의 이동의 흔적이라 표현하는 편이 더 합리적 사고이다. 이 물길을 따라 거제도 옆 연대도(?총 및 신석기유적지)를 거쳐지나가는 징검다리 역할의 섬이다. 갈매기의 섬 통영 홍도를 지나면 바로 쓰시마 해류를 만난다. 바로 쓰시마(대마도) 북안이다. 이 늑도(구라섬)과 구라량영(각산성)은 옛 사람들의 수로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변진 구야국, 삼천포 항 옆 평야가 있다. 궁지이다. 宮趾(즉 궁터이다)이다. 뒷편에 金岩금암 마을이 있다. 금암이라고 불려진 것은 지석묘군이 각산까지 수킬로에 이르는 지석묘군이 즐비하다. 궁지란 지명으로 볼 때 이곳은 예사롭지않은 지역이다. 삼국시대 가야 소국과는 또 다른 浦上八國의 소국이 있지 않았나 생각케하는 대목이다. 그 이전에는 변진 구야국이 있었던 곳이 구라량영과 구라량, 구라섬(勒島)를 포함한 이곳이라 주장하고 싶고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구야한국은 규슈의 아소산 근처에 있는데 변진 구야국 사람들이 이동해서 세운 소국이라는 것이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기존 일본인들이 세운 학설 구야한국은 결코 김해가 되지않고 변진구야국과 다른 소국이다. 후한서에 나오는 구야한국은 규슈에 있어야되며



변진구야국은 한반도에 있어야한다. 변진 구야국이 김해 또한 아니다. 일본 인들이 설정한 결론의 중요한 점이 언어비정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구야=가야]라는 발음이 비슷한 점을 들어 가야에서 쓰시마와 가장 가까운 김해라고 비정하였다. 정말 몰상식적인 지명비정인 셈이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한.일 학계에 통설 처럼 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한심하기 짝이없어 보인다.

한단고기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80년대 중반이다. 그 이전에 수립된 구야한국=김해 설은 마땅히 폐기 되어야 한다.


오늘 여기서 논하고자하는 것은 변진 구야국이다. 변진구야국 사람들이 규슈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가 구야한국이다.

우리는 남해안 삼천포 항에 소속된 (勒島늑도/굴레섬/구라섬)에 주목해야한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나타한 한반도 남부지방의 한에 대한 기술을 보자

 한에는 세 종족이 있다. 마한, 진한,변한이라고 한다.

 마한은 가장 큰나라로 54국, 진한은 12국, 변한은 12국 모두 78국으로 구성되어있다.

우리가 지금 문제를 제기 하고 있는 소국은 변진 구야국이다. 변한과 진한을 변진이라했다.



후한에서 왜로 가는 제일 마지막 소국에 구야한국이 나온다. 식민사관 학자들은 구야한국을 김해라고 주장하고있다. 김해에 가보아라, 박물관에는 버젓이 김해의 옛 이름은 구야한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금관가야와 구야한국의 김해라고 자랑스레 사용하고 있다.

구야한국이라 지명고에 정의한 일본학자, 구야=가야 라는 언어의 유사성에 의한 확정, 또 가야가 김해라고 단정해 버리는 무식함, 이에 아무런 의문을 던지지 않은 한국 고대사학자들의 직무유기에 의한 결과이다.


태백일사(고려시대) 고구려 본기6 기록에 의하면 구야한국과 변진 구야국은 분명 다른 소국이며 위치 또한 다르다. 구야한국은 규슈에 있고 변진구야국은 한반도 남부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구야한국=변진 구야국 이라는 일본인들의 지명고는 재고해야하며 김해지자체들도 구야한국이란 지명고를 철회해야한다.


다시 삼천포연륙교에 속한 섬, 늑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勒島(늑도)란 한자어는 이두식 표기이다. 勒은 굴레 늑이다. "구라"을 표기 하기 위한 한자차용이다.

"구라섬"이다.

구라량-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고려시대엔 굴항이 있던 대방에는 대방진이 있었다.

 

 

 수군만호가 지키고 있었다. 고려시대 말에는 사량도로 수군 만호가 옮겨갔지만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위해 뒷산(角山)에 있는 성이름이 '구라량영"성 있었다. 지금은 각산성이라 부르지만 고려사(고려원종재위1259~1274)에는 "구라량영성"이라 명칭되어있다.

 창선과 대방사이에 지금 연륙교가 놓여있지만 이 해협사이에 늑도,초양도,학섬과 같은 섬들이 징금다리처럼 놓여있다.

 이곳의 명칭이 '구라량"이다. 고고학적 유물이 많이 발견된 늑도도 그 구라량에 대표하는 섬이다.

 늑도의 勒島(늑도)도 이두식 표현이다. 원래 구라섬이었다. 勒(굴레 늑)島(섬 도)였다.굴레섬, 즉 구라섬이였다.

 지금이라도 삼천포에선 이 지명을 살려야한다. 구라량이라고, 남해 노량, 사량도와 고성사이를 사량,거제대교가 있는 곳을 견내량이듯 ..구라량이란 명칭이 부활되길 바란다  또한 대방에 있는 굴항(掘港)이란 지명 때문에 "대방구라량'이란 지명이  "대방 굴항"이란 명칭속에 사라졌다고 유추된다.


<늑도 유적에 대한 고찰>


늑도는 사천시 삼천포항과 남해군 창선도 사이에 위치한 조그마한 섬으로 섬 전체에 대규모의 유적이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1979년부터 부산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1985년과 1986년 두 차례에 걸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1988년부터 2001.12까지 3차례에 걸쳐 경남고고학연구소, 부산대학교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을 실시하여 많은 유적과 유물, 유구가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패총과 무덤유구, 주거지 등과 함께 각종 토기류(중국계 경질토기, 일본계 야요이토기, 점토대 토기 등), 반량전, 오수전, 한(漢)나라 거울 등 13,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여러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된 결과로 볼 때 이 유적은 섬 전체가 청동기 시대에서 삼한시대로 이어지는 단계의 삼각형 점토대 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유적이다.



사천 늑도 유적은 고대국가 초기단계에 형성된 복합유적으로서 한·중·일 간의 고대 동아시아지역 문화교류 증거를 보여주는 학술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전문설명

늑도는 사천시 삼천포항과 남해군 창선도 사이에 위치한 길이 970m, 너비 720m, 면적 46ha의 작은 섬으로 남쪽에 높은 산이 막고 있고 주변에 학섬, 초량도, 신도, 마도, 저도 등이 둘러싸고 있어 강한 태풍에도 안전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고대인들의 생활에 매우 유리한 곳으로 섬 전체에 대규모의 유적이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1979년부터 부산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1985, 1986년 두 차례에 걸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학술발굴이 진행되었고, 1988년부터 2001.12까지 3차례에 걸쳐 경남고고학연구소, 부산대학교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을 실시하여 많은 유적과 유물, 유구를 확인한 바 있다.

여러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된 결과로 볼 때 이 유적은 섬 전체가 청동기 시대에서 삼한시대로 이어지는 단계의 삼각형 점토대 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유적이다.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부터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까지 유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선사시대 많은 주거지 등 생활관련 유물과 낙랑관련 유물 및 일본관련 유물 등 외래계 유물들이 대량 출토되어 활발한 대외교역과 중개지로서의 기능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산넘고 물건너 사적기행 중 인용)



사천늑도유적


남방식 지석묘에 관한 지식
남방식 지석묘는 영남과 호남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북방식과 기본적으로 다른 것은 매장 주부인 석실이 지하에 만들어진 점이고, 지상에 석실을 만들기 위한 벽석의 필요가 없기 때문에 벽석이 조그만 괴석으로 퇴보하고 있는 점이다.
지하의 석실은 판석 또는 냇돌로 축조하였으며 사람을 신전장할 수 있을 정도의 큰 것들도 많지만 길이 1m이하의 것도 있다. 창녕군 유리(幽里)의 경우는 크기 67×27cm에 불과한 것이어서 세골장(洗骨葬)을 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는 이러한 아주 작은 석관에서 유아의 뼈가 나온 예가 있어 덮어놓고 세골장이라고 단정해 버리기는 어려운 점도 있다.
또 석곽의 주위에 판석 또는 냇돌을 깐 것도 있으나 보통은 석곽에 두께돌을 덮고 있으며, 전라북도 고창군 상갑리(上甲里)에서는 나무뚜껑을 사용하였던 흔적이 있다.
한편 발굴하여 보면 지하에 아무 시설도 없는 예도 발견되는데 이러한 것은 구덩이를 파고 시체만을 묻었던 단순한 토장식 지석묘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남방식 지석묘에서는 부장품으로 마제석검·마제석촉 그리고 홍도(紅陶)라고 불리는 붉은 색의 원저장경소호(圓底長頸壺)가 많이 나오고 있으며, 때로는 고흥군 운대리(雲垈里)· 김해군 무계리(茂溪里)의 경우처럼 동검 동촉 등 청동기가 발견되는 예도 있다. 이러한 남방식 지석묘는 북방식 지석묘의 한 지역적 형식이라고 믿어지며 연대적으로 북방식과 병행하다가 북에서 새로 일어나는 개석식 지석묘의 파급에 따라 차차로 쇠퇴하여 삼국시대 초기의 석관묘로 옮아간 것이라고 생각된다<다음 백과사전에서>


결어: 후한서에 나오는 대방에서 출발하여 왜로 가는 수로 기록에 나타난 구야한국의 위치에 대한 기존학설에 대한 반론이다.

일본 역사학자들의 지명고에 의한 김해는 수정되어야한다. 또한 김해 박물관을 비롯한 역사서에 나타난 구야한국의 위치가 결코 김해가 아님을 태백일사(조선측 자료)에 잘 나타나 있다. 구야한국은 한반도 변진구야국 사람들이 이주하여 규슈(구주/왜)에 세운 소국이다. 한반도 삼한 국가 중 변진구야국은 경남 삼천포 연륙교가 있는 늑도(구라섬/구야섬)를 비롯한 지역, 삼천포항은 고려시대 "三千鎭"으로 수군만호가 다스리던 곳이다. 지금 연륙교가 세워진 좁은 水路를 "구라량"이라 하였다. 바로 위에 있는 각산성에는 "구라량營"이 있었다. "구라"=구야 란 지명이 분명히 나와 있는 이곳이 바로 "구야국"이다.  즐비한 지석묘군이 수킬로에 걸쳐 남아있다.

金岩지역 앞에 궁터인 "궁지"란 분지가 남아있고, 각산으로 이어지는 지석묘 정체가 구야국의 유적들이다.


어린시절 할머니 밭에 놓인 지석묘의 덮게돌위에서 놀았던 기억들 ...덮게돌은 이암 이뤄져있었다, 냇돌들이 덮게돌을 받치고 있으며 냇돌안에 석실이 축조되어있을 것 같다. 할아버지 산소와 마주닿은 곳에 있는 지석묘는 항상 나의 곁에서 변진구야국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글돋선생)


출처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원문보기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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