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greatcorea.kr/368  작성자 : 성훈

 

[단군세기]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갑진 원년(BC1337년) 은나라 왕 소을小乙(BC1349~BC1339)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경인 47년(BC1291년) 은나라 왕 무정武丁(BC1339~BC1280)이 귀방鬼方을 쳐 이겼다.   또한, 무정이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令支등의 나라를 침략해 왔지만 아군에 크게 대패하자 들어와 공물을 바치고 화평을 청하였다.
    임진 49년(BC128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해졌다. 이에 여러차례 사람을 보내 우현왕으로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


어찌되었든, 귀방鬼方이 상商의 무정武丁 혹은  개사원 욕살 고등 둘중의 한 인물에게 멸망한 것은 일치합니다.
 (욕살 고등이 귀방鬼方을 멸했다면 지켜줘야 할 같은 단군조선의 후국을 쳤으니 결국 자신의 직할지를 넓히려고 내전을 일으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단군조선을 끝내고 새로운 칸국 진국의 개조가 되지요.)

 

하지만, 단군세기의 아래 내용으로 볼때 만약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쳐서 차지했다면 '차지한 '빈,기'땅을 후단군조선을 세운 '고등'의 손자 '색불루'때 다시 빈,기일대를 쳐서 정복할 필요가 없어야 하므로  이것은 지나측 기록대로  상商 무정武丁이 뺏은 것이 맞을 수 있습니다.

 

은나라와 단군조선의 갈등 

은나라는 단군조선 덕택에 나라를 세우고는 조선에게 계속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곤 했다. 그러다가 약 470년 후에 아래와 같이 단군조선에게 도전장을 던진다. 참고로 고등(高登)이란 사람은 쿠데타를 일으켜 단군조선의 22세 단군이 되는 색불루의 조부이다.

<단군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21세 소태단군 47년(B.C 1291년) 은나라 왕 무정(22대)이 귀방(鬼方)을 쳐 이기더니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令支)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B.C 128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러한 귀방이 어디인지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아보기로 하겠다. 참고로 귀방은 은허(殷墟)에서 발견된 갑골문자에도 나와 <단군세기>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 기록인지를 입증하고 있다.

 

鬼方(귀방) : 古远方国,《易既济》“高宗伐鬼方,三年春之,”其说有五,

1)谓即西戎,《后汉书章帝纪》克伐鬼方,开通西域,《西羌传》武丁征西戎鬼方,三年乃克,《文选赵充国颂李善注》“鬼方,于汉则先零戎也,”世本注同,案当在今青海境,
(서융으로 “<서강전>에 무정이 서융귀방을 정벌했다” 지금의 청해와의 경계이다)

 

2)谓即周荆楚之地,〈惠栋九经古义〉汲郡古文云,武丁三十二年,伐鬼方,次于荆,三十四年,王师克鬼方,氐羌来宾,商颂殷武云,挞彼殷武,奋伐荆楚,疑周之荆楚,商时谓之鬼方,古文所谓次于荆者,盖鬼方之地也, (주나라 형초의 땅)

 

3)谓即今贵州,《清一统志》贵州,商周为鬼方地,(지금의 귀주)

 

4)《丙子学易篇》“苍颉篇云,鬼,远也,又云鬼方言其幽昧也,”此不以地实之,惠栋斥为臆说, (유매의 땅)

 

5)近人王国维谓鬼方即狄人,殷周时据陕西西北一带,古之獯鬻,汉之匈奴,皆其同种,春秋时狄人隗姓,隗即鬼也。(즉 적인으로 은.주 때 섬서성 서북일대)

 

여기서의 귀방은 1)번과 5)번으로 거의 같은 지역이다.   즉 단군조선이 하나라가 망할 때 점령해서 관청까지 설치했던 빈(邠).기(岐)와 가까운 곳이다.   필자는 이 지역을 계속 단군조선의 점령지로 보는 이유는 은나라의 도읍은 하남성에 있었기 때문에 아마 섬서성 서쪽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맹자가 이야기했다.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 (夏后殷周之盛地未過千里者也)”

또 은나라 왕 무정이 공격했다가 단군조선에게 대패한 영지(令支)에 있던 나라는 바로 고죽국(孤竹國)이었다. 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보고 있으나,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임이 증명되는 기록이라 하겠다. 은나라가 자기네 제후를 침공하는데 단군조선이 공격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 고죽국이 있던 지역이 바로 후에 유주(幽州)의 요서군(遼西郡)이 되는 곳이다. 그 문헌적인 근거가 아래에 인용한 <한서지리지>이다. 이 요서군의 위치는 고죽국의 왕자인 백이.숙제의 묘가 산서성 남부 황하 굴곡 지점에서 발견됨으로서 분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영지에 고죽성이 있다)。莽曰令고 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이어서 단군조선이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때인 23세 색불루단군 때의 <단군세기> 기록이다.
“B.C 1285년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했다가 또 싸워 이를 쳐부수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岱)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B.C 1266년 람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니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당시 은나라의 도읍은 황하북부 하남성이며, 고죽군(孤竹君)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왕으로 뒤에 나올 백이.숙제의 아버지이다. 단군조선은 다시 빈.기를 점령하고는 여(黎)라는 나라까지 세운다. 여는 구리(九黎)와 연관된 말로 단군조선을 의미하며, 여파달이라는 장수의 성이기도 하다.

 

<단군세기>의 이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당시 빈 땅에) 고공단부(古公亶父)가 살고 있었는데, 훈육(熏育)과 융적(戎狄)이 공격해 와 그에게 재물과 땅을 요구한 뒤 땅과 백성들을 차지하려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융적에 맞서 싸우고자 하였으나 고공단부는 백성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 하고는 기산(岐山) 기슭으로 옮겨가자 백성들 역시 그를 따라 기산으로 모여들었다.”

 

고공단부가 옮겨간 기산이 섬서성 서안 서쪽 감숙성과 가까이 있는 바로 기(岐) 땅이다. 이러한 고공단부의 손자 중에 창(昌)이라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데, 은나라 말기에 서쪽 제후로 봉해졌다 하여 서백창(西伯昌)이라고 하며, 나중에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되고 강태공(姜太公)을 발탁한 인물이기도 하다. 

영지(永支)는 단군조선 번한(番韓)의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이기도 하며, 춘추시대에 이지(離支)라고도 기록되는 곳이다. 고죽국의 수도였던 고죽성은 춘추시대에 무체성(無棣城)이라고도 기록되고 있다.

백이.숙제는 고죽국의 왕자로 고향인 수양산에 와서 굶어 죽었다. 백이.숙제의 묘가 황하 굴곡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고죽, 기岐빈위치

 

백이와 숙제묘 위치 사기집해

 

백이와 숙제묘 위치 대청광여도

 

현대 백이숙제묘 섬서성 영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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