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량 水路가 있는 변진 구야국(삼천포 늑도 지역)의 지석묘 群

 

<삼천포 角山城(구라량영)이 있는 지석묘 군 중 한 기>08.9.14일 일, 정광산인 촬영>


 변진구야국과 구야한국은 엄연히 다른 소국이다.



구야한국이 나오는 사서는 [후한서]이다.

왜로 가는 물길을 그려 놓았다. 후한서에 "낙랑군의 관청에서 그 나라는 1만 2천 리 떨어져 있고, 그 서북계인 구야한국까지는 7천리이다...."

이 구야한국을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는 그의 저서 [임나일본부와 왜]에서 광개토왕 비문의 왜는 [임나에 있었던 호족]으로 [왜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이 그 주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따라서 임나일본부라는 것도, 야마토 왕권의 출선기관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그 땅에 있는, 즉 일본 사학계의 통설대로 [임나=가야]라고 보고 가야 지역에 있는 왜인 연합이 야마토 왕권과의 관계를 가짐으써 세력을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러한 견해의 밑바탕에는 구야한국을 가야, 즉 김해 땅라고 믿고 있는 이유도 작용하고 있음을 물론이다. 요컨대 한국 남부지방에 형성된 왜인 연합이란 것이 있었다고 보고, 이것을 [일본서기]의 용어대로 [가라]의 왜, 다른 말로 [가야왜]라는 설명이다.

 <옆사진:각산성(구라양영)근처 지석묘이다. 옛날에는 필자의 할머니밭이었다. 어릴적 부터 보고 근처에서 놀았던 지석묘 군이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하나의 주장 내지 견해라고 치고, 진위 여부는 제껴 놓더라도 이노우에 역시 4~5세기에 야마토왕권에 의한 한반도 출병은 있을 수 없다고 한 점에서는 한국 학계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


임나가 결코 한국땅에 있었던 가야가 아니라는 점에서 기존의 고대사 인식 체계는 [사실과 해석] 사이에서 빚어진 오류가 엄청났던 것이다.

고대사의 인식 체계를 엉뚱한 방향으로 설정해 놓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의 하나가 왜국까지 이르는 항해 경로에서, 출발지인 대방군(帶方郡)의 위치와, 맨처음 들르는 구야한국의 위치에 대한 비정이다.



만일 대방군 및 구야한국의 위치 비정이 바뀌면 기존의 한일 고대사는 붕괴되고 만다.  대방군은 한반도 황해도 지역에 漢의 군사 기지였던 그 [대방]이 아니라, 중국의 하북성 창려지구, 즉 오늘날 북경 동남방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구야한국도 일본인 학자들이 [邪(사)]를 굳이 [야]라고 읽어, 구야=가야 , 즉 김해라고 비정한 이래 한일 양국 학계에서는 이를 확고한 통설로 믿고 있은 것이다.


구야한국이 김해나 부산 근처가 아니라 전혀 엉뚱한 곳에 있다면, 그 동안 한일 고대사 인식 체계를 세운 하나의 뼈대가 저절로 붕괴되어, 이에 관한 종래의 주장이나 학설 따위가 모조리 엉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옆 사진:삼천포 - 창선 연륙대교. 연결된 섬 가운데 하나가 구라도(늑도)이다, 고려시대까지 창선도와 삼천포(三千鎭/옛 지명) 사이의 수로를 '구라량'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 사량도로 수군만호를 옮겼다.옆 노량의 수로가 있고, 거제도 견내량이 있다.>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야 어찌됐건, 구야한국의 정확한 위치 비정은 김해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부에서 새롭게 주장한 거제도 부근(문정창,박시인 설)도 아니다. 구야한국은 일본의 규슈에 있으면, 정확히 말해서 아리아케우미(有明海)의 북안에서 멀지 않은 코쇼산(古所山) 일대로서 과거 지쿠젠국(筑前國)의 야스군(夜須郡)에 속한다. (임나신론 /1995년 고려원 김인배,문배 공저)


일본에서도 야요이시대의 토기나 청동기 ,석기, 그리고 벼농사가 조선으로부터 유입될 때, 문화의 유입만이 아니라 당연히 조선인의 유입도 이었다고 솔직히 시인한 도마리 가쓰미 씨는 규슈의 [奴國王은 조선이이었다]고 부인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한다.(泊勝美 [고대구주와 조선 p48~50] 그 [조선인], 더 정확히는 [고조선]이라고 말해야 옳다.  이들이 남겨 놓은 지석묘군, 또한 기자조선의 [箕準기준]의 한반도 망명시기(기원전 194년)기점으로 문화적 조선인의 유입도 있었다.



한단고기에는 자세히 구야한국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6을 인용해 보자,

"협보(주몽의 부하/주)는 장혁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해포로부터 몰래 향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에 이르니 규슈해의 북안이다. 여기서 수개월동안 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의 시조라 한다.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을 세워 이를 통치케 하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구야국의 사람들이 한때 모여 산 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야한국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 홀본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찌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므로 늘 열제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일본서기에 자주 나옴/광개토왕 비문에도 나옴/결코 아라가라/함안이 아니다 :글돋주)과 함께 이웃하며 성이 같다. 본래 웅습성을 갖고 있으니 지금의 규슈의 웅본성(구마모토) 그것이다."

<옆사진:角山城 의 다른 이름(구라량영)의 성곽, 봉화대도 있다. 수군만호가 주둔하고 있었고 바로 아래가 구라량이다. 왜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한 늑도(구라島)에서는 중국 화폐 반량전,오수전, 동경,특히 일본 야요이시대 토기가 나온다. 이럴보고 무역 운운하는 역사학자들의 상식이하의 생각은 버려야한다. 야요이시대에 무슨 무역인가, 기원전에 말이다. 오히려 물길을 따라 사람들의 이동의 흔적이라 표현하는 편이 더 합리적 사고이다. 이 물길을 따라 거제도 옆 연대도(?총 및 신석기유적지)를 거쳐지나가는 징검다리 역할의 섬이다. 갈매기의 섬 통영 홍도를 지나면 바로 쓰시마 해류를 만난다. 바로 쓰시마(대마도) 북안이다. 이 늑도(구라섬)과 구라량영(각산성)은 옛 사람들의 수로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변진 구야국, 삼천포 항 옆 평야가 있다. 궁지이다. 宮趾(즉 궁터이다)이다. 뒷편에 金岩금암 마을이 있다. 금암이라고 불려진 것은 지석묘군이 각산까지 수킬로에 이르는 지석묘군이 즐비하다. 궁지란 지명으로 볼 때 이곳은 예사롭지않은 지역이다. 삼국시대 가야 소국과는 또 다른 浦上八國의 소국이 있지 않았나 생각케하는 대목이다. 그 이전에는 변진 구야국이 있었던 곳이 구라량영과 구라량, 구라섬(勒島)를 포함한 이곳이라 주장하고 싶고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구야한국은 규슈의 아소산 근처에 있는데 변진 구야국 사람들이 이동해서 세운 소국이라는 것이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기존 일본인들이 세운 학설 구야한국은 결코 김해가 되지않고 변진구야국과 다른 소국이다. 후한서에 나오는 구야한국은 규슈에 있어야되며



변진구야국은 한반도에 있어야한다. 변진 구야국이 김해 또한 아니다. 일본 인들이 설정한 결론의 중요한 점이 언어비정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구야=가야]라는 발음이 비슷한 점을 들어 가야에서 쓰시마와 가장 가까운 김해라고 비정하였다. 정말 몰상식적인 지명비정인 셈이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한.일 학계에 통설 처럼 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한심하기 짝이없어 보인다.

한단고기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80년대 중반이다. 그 이전에 수립된 구야한국=김해 설은 마땅히 폐기 되어야 한다.


오늘 여기서 논하고자하는 것은 변진 구야국이다. 변진구야국 사람들이 규슈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가 구야한국이다.

우리는 남해안 삼천포 항에 소속된 (勒島늑도/굴레섬/구라섬)에 주목해야한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나타한 한반도 남부지방의 한에 대한 기술을 보자

 한에는 세 종족이 있다. 마한, 진한,변한이라고 한다.

 마한은 가장 큰나라로 54국, 진한은 12국, 변한은 12국 모두 78국으로 구성되어있다.

우리가 지금 문제를 제기 하고 있는 소국은 변진 구야국이다. 변한과 진한을 변진이라했다.



후한에서 왜로 가는 제일 마지막 소국에 구야한국이 나온다. 식민사관 학자들은 구야한국을 김해라고 주장하고있다. 김해에 가보아라, 박물관에는 버젓이 김해의 옛 이름은 구야한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금관가야와 구야한국의 김해라고 자랑스레 사용하고 있다.

구야한국이라 지명고에 정의한 일본학자, 구야=가야 라는 언어의 유사성에 의한 확정, 또 가야가 김해라고 단정해 버리는 무식함, 이에 아무런 의문을 던지지 않은 한국 고대사학자들의 직무유기에 의한 결과이다.


태백일사(고려시대) 고구려 본기6 기록에 의하면 구야한국과 변진 구야국은 분명 다른 소국이며 위치 또한 다르다. 구야한국은 규슈에 있고 변진구야국은 한반도 남부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구야한국=변진 구야국 이라는 일본인들의 지명고는 재고해야하며 김해지자체들도 구야한국이란 지명고를 철회해야한다.


다시 삼천포연륙교에 속한 섬, 늑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勒島(늑도)란 한자어는 이두식 표기이다. 勒은 굴레 늑이다. "구라"을 표기 하기 위한 한자차용이다.

"구라섬"이다.

구라량-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고려시대엔 굴항이 있던 대방에는 대방진이 있었다.

 

 

 수군만호가 지키고 있었다. 고려시대 말에는 사량도로 수군 만호가 옮겨갔지만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위해 뒷산(角山)에 있는 성이름이 '구라량영"성 있었다. 지금은 각산성이라 부르지만 고려사(고려원종재위1259~1274)에는 "구라량영성"이라 명칭되어있다.

 창선과 대방사이에 지금 연륙교가 놓여있지만 이 해협사이에 늑도,초양도,학섬과 같은 섬들이 징금다리처럼 놓여있다.

 이곳의 명칭이 '구라량"이다. 고고학적 유물이 많이 발견된 늑도도 그 구라량에 대표하는 섬이다.

 늑도의 勒島(늑도)도 이두식 표현이다. 원래 구라섬이었다. 勒(굴레 늑)島(섬 도)였다.굴레섬, 즉 구라섬이였다.

 지금이라도 삼천포에선 이 지명을 살려야한다. 구라량이라고, 남해 노량, 사량도와 고성사이를 사량,거제대교가 있는 곳을 견내량이듯 ..구라량이란 명칭이 부활되길 바란다  또한 대방에 있는 굴항(掘港)이란 지명 때문에 "대방구라량'이란 지명이  "대방 굴항"이란 명칭속에 사라졌다고 유추된다.


<늑도 유적에 대한 고찰>


늑도는 사천시 삼천포항과 남해군 창선도 사이에 위치한 조그마한 섬으로 섬 전체에 대규모의 유적이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1979년부터 부산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1985년과 1986년 두 차례에 걸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1988년부터 2001.12까지 3차례에 걸쳐 경남고고학연구소, 부산대학교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을 실시하여 많은 유적과 유물, 유구가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패총과 무덤유구, 주거지 등과 함께 각종 토기류(중국계 경질토기, 일본계 야요이토기, 점토대 토기 등), 반량전, 오수전, 한(漢)나라 거울 등 13,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여러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된 결과로 볼 때 이 유적은 섬 전체가 청동기 시대에서 삼한시대로 이어지는 단계의 삼각형 점토대 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유적이다.



사천 늑도 유적은 고대국가 초기단계에 형성된 복합유적으로서 한·중·일 간의 고대 동아시아지역 문화교류 증거를 보여주는 학술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전문설명

늑도는 사천시 삼천포항과 남해군 창선도 사이에 위치한 길이 970m, 너비 720m, 면적 46ha의 작은 섬으로 남쪽에 높은 산이 막고 있고 주변에 학섬, 초량도, 신도, 마도, 저도 등이 둘러싸고 있어 강한 태풍에도 안전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고대인들의 생활에 매우 유리한 곳으로 섬 전체에 대규모의 유적이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1979년부터 부산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1985, 1986년 두 차례에 걸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학술발굴이 진행되었고, 1988년부터 2001.12까지 3차례에 걸쳐 경남고고학연구소, 부산대학교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을 실시하여 많은 유적과 유물, 유구를 확인한 바 있다.

여러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된 결과로 볼 때 이 유적은 섬 전체가 청동기 시대에서 삼한시대로 이어지는 단계의 삼각형 점토대 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유적이다.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부터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까지 유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선사시대 많은 주거지 등 생활관련 유물과 낙랑관련 유물 및 일본관련 유물 등 외래계 유물들이 대량 출토되어 활발한 대외교역과 중개지로서의 기능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산넘고 물건너 사적기행 중 인용)



사천늑도유적


남방식 지석묘에 관한 지식
남방식 지석묘는 영남과 호남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북방식과 기본적으로 다른 것은 매장 주부인 석실이 지하에 만들어진 점이고, 지상에 석실을 만들기 위한 벽석의 필요가 없기 때문에 벽석이 조그만 괴석으로 퇴보하고 있는 점이다.
지하의 석실은 판석 또는 냇돌로 축조하였으며 사람을 신전장할 수 있을 정도의 큰 것들도 많지만 길이 1m이하의 것도 있다. 창녕군 유리(幽里)의 경우는 크기 67×27cm에 불과한 것이어서 세골장(洗骨葬)을 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는 이러한 아주 작은 석관에서 유아의 뼈가 나온 예가 있어 덮어놓고 세골장이라고 단정해 버리기는 어려운 점도 있다.
또 석곽의 주위에 판석 또는 냇돌을 깐 것도 있으나 보통은 석곽에 두께돌을 덮고 있으며, 전라북도 고창군 상갑리(上甲里)에서는 나무뚜껑을 사용하였던 흔적이 있다.
한편 발굴하여 보면 지하에 아무 시설도 없는 예도 발견되는데 이러한 것은 구덩이를 파고 시체만을 묻었던 단순한 토장식 지석묘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남방식 지석묘에서는 부장품으로 마제석검·마제석촉 그리고 홍도(紅陶)라고 불리는 붉은 색의 원저장경소호(圓底長頸壺)가 많이 나오고 있으며, 때로는 고흥군 운대리(雲垈里)· 김해군 무계리(茂溪里)의 경우처럼 동검 동촉 등 청동기가 발견되는 예도 있다. 이러한 남방식 지석묘는 북방식 지석묘의 한 지역적 형식이라고 믿어지며 연대적으로 북방식과 병행하다가 북에서 새로 일어나는 개석식 지석묘의 파급에 따라 차차로 쇠퇴하여 삼국시대 초기의 석관묘로 옮아간 것이라고 생각된다<다음 백과사전에서>


결어: 후한서에 나오는 대방에서 출발하여 왜로 가는 수로 기록에 나타난 구야한국의 위치에 대한 기존학설에 대한 반론이다.

일본 역사학자들의 지명고에 의한 김해는 수정되어야한다. 또한 김해 박물관을 비롯한 역사서에 나타난 구야한국의 위치가 결코 김해가 아님을 태백일사(조선측 자료)에 잘 나타나 있다. 구야한국은 한반도 변진구야국 사람들이 이주하여 규슈(구주/왜)에 세운 소국이다. 한반도 삼한 국가 중 변진구야국은 경남 삼천포 연륙교가 있는 늑도(구라섬/구야섬)를 비롯한 지역, 삼천포항은 고려시대 "三千鎭"으로 수군만호가 다스리던 곳이다. 지금 연륙교가 세워진 좁은 水路를 "구라량"이라 하였다. 바로 위에 있는 각산성에는 "구라량營"이 있었다. "구라"=구야 란 지명이 분명히 나와 있는 이곳이 바로 "구야국"이다.  즐비한 지석묘군이 수킬로에 걸쳐 남아있다.

金岩지역 앞에 궁터인 "궁지"란 분지가 남아있고, 각산으로 이어지는 지석묘 정체가 구야국의 유적들이다.


어린시절 할머니 밭에 놓인 지석묘의 덮게돌위에서 놀았던 기억들 ...덮게돌은 이암 이뤄져있었다, 냇돌들이 덮게돌을 받치고 있으며 냇돌안에 석실이 축조되어있을 것 같다. 할아버지 산소와 마주닿은 곳에 있는 지석묘는 항상 나의 곁에서 변진구야국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글돋선생)


출처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원문보기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미니 /2천년전의 국제무역항 늑도

경남 사천의 늑도는 삼천포와 남해군 창선도 사이 작은 섬으로, 삼한시대 중기(초기 철기시대)의 집자리, 패총, 분묘 유적이 밀집해 있는 고고학적 보고다.

섬의 규모는 46㏊ 정도로 작아 웬만한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도 않지만, 1985~1986년, 1998~2001년 발굴조사 결과, 2천년전의 국제무역항이란 놀라운 사실이 확인됐다.

늑도에서는 150여기의 집자리와 많은 인골이 나왔다. 이곳의 인골은 복장(復葬)과 개를 함께 묻는 등의 특이한 장법을 보여 주목됐다.

이곳 패총에서는 또 엄청난 양의 토기조각과 함께 중국의 반량전까지 나왔다. 네모난 구멍 양쪽에 ‘반(半)’ ‘량(兩)’이란 글씨가 새겨진 반량전은 중국 한무제 5년(BC 175년)에 제작된 화폐로, 국내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늑도에서는 낙랑토기(BC 1세기∼AD 1세기) 파편과 일본 야요이계 토기(BC 2세기∼AD 1세기)까지 출토됐다. 이같은 유물은 중국 전한(前漢) 시기에 이미 중국~남해안(늑도)~일본 규슈를 잇는 해상교역루트가 형성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곳을 발굴한 부산대 박물관 이재현 조교는 “늑도는 섬 전체가 고고학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면서 “늑도인들의 문화 및 사회구조, 국제교역, 인근 소가야와의 관계 등은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늑도 유적 B지구를 조사한 부산대 박물관측은 현재 약 30톤(빵박스로 3천개)의 유물을 수습해 정리중이다.

늑도 유적의 성격에 대해 공동 발굴자인 동아대 박물관측은 ‘삼국사기’ 등에 등장하는 포상팔국 중 하나인 ‘사물국(史勿國)’의 중심지일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사천시는 지난 85년 1월 경남도 기념물 75호로 지정된 늑도 패총을 국가지정 사적지로 승격해줄 것과 현지에 유물전시관(예산 1백억원)을 건립해줄 것을 정부에 건의해 놓고 있다.

학자들은 “삼천포~늑도~창선간 교량(3차선)이 내년 4월 개통되면 늑도 유적이 훼손될 수 있어 그 전에 체계적인 보존방안이 수립돼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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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7) 2000년전의 무역항 해남 군곡리
- ㆍ해남은 고대 동북아의 ‘물류허브’ 였다
히스토리, 2008-09-21 오후 2:23:03  
 
1983년 3월 어느 날.

황도훈이라는 해남의 향토사학자가 있었다. 해남문화원장을 지내면서 고향 땅을 답사하는 것을 여생의 일로 삼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군곡리 마을을 지나던 황씨의 눈길이 멈췄다. 무슨 옹관 같은 유물이 눈에 띈 것이었다. 게다가 불에 탄 흔적도 있었다.

■ 2300년 전 음식물 쓰레기장

‘이건 야철지 아닌가.’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우던 그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는 행장을 꾸려 서울로 올라가 서울신문사를 찾았다.

“회사 논설위원 중에 해남 사람이 있었는데, 황도훈씨와 친구였지. 그 인연으로 우리 신문을 찾아온 거지요.”(황규호 전 서울신문 기자)

황 기자는 즉시 황도훈과 함께 해남으로 내려갔다. 최성락 목포대 교수와도 연락이 닿아 함께 군곡리 현장으로 달려갔다.

“야트막한 구릉이 온통 마늘밭이었어요. 그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일제시대 때 간척사업으로 땅이 됐다더군요.”(황 기자)

“야철지라든가 가마터라는 것은 제가 고증할 수는 없었고, 다만 패총이라는 것은 확실했어요.”(최성락 교수)

서울신문은 목포대 연구팀과 최성락 교수의 이름을 달아 군곡리 유적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날 아침, 학교에 간 최 교수는 급히 오라는 오창환 당시 학장의 ‘부름’을 받는다.

“최 교수, 최 교수. 우리 학교 경사났어! 중앙지 1면에 이렇게 우리 대학(목포대) 기사가 나오다니….”

그럴 만했다. 목포대가 사범학교~초급대를 거쳐 1979년 4년제 국립대로 승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장님이 그러더군요. ‘뭐 해줄까.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말해봐’하고.”

최 교수는 100만원이라는 거금을 지원금으로 받아 이름뿐이었던 (목포대)박물관을 키우는 데 썼다.

■ 준왕의 망명과 해상교역로의 탄생

흔히 조개무지라 하는 패총(貝塚)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굴 등의 껍데기가 쌓여 마치 무덤 같다 하여 명명됐다.

 
“한마디로 선사시대 음식물 쓰레기장이죠. 쓰레기장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요? 조개껍데기가 지닌 석회질(石灰質) 때문에 그 안에 버려진 토기(土器)와 석기, 그리고 사람과 짐승의 뼈가 잘 보존돼요.”(조 관장)

한반도 남부의 패총 유적은 1907년 일본 학자들이 김해패총을 조사한 게 처음이었다. 그런데 일본학자들은 김해패총에서 석기와 철기가 함께 출토되는 것을 중시하여 이른바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한마디로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가 없었고, 석기와 철기가 공존한 금석병용기가 있었을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참으로 헛된 식민학자들의 주장이었지.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청동기가 잇달아 발굴되면서 이 금석병용기라는 정체불명의 개념은 사라지고 말지.’(조 관장)

어쨌든 최 교수가 이끄는 목포대 박물관의 3차례 조사 결과 군곡리 패총은 BC 2세기~AD 3세기 사이, 즉 약 400~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사용된 음식물 쓰레기장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현장에서는 철편과 철도자(칼), 철부(철도끼) 등 철기류와, 석촉·숫돌 등 석기류와 각종 동물뼈 등이 쏟아졌다. 특히 점을 친 흔적인 복골(卜骨)과 중국화폐인 화천(貨泉)은 문화교류와 공유의 측면에서 의미심장한 유물들이다. 군곡리 패총은 철기문화의 유입과, BC 2세기부터 중국대륙-한반도~일본열도를 넘나드는 해상을 통한 동방교역의 루트를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이다.

“당초 한반도 남부의 철기문화는 낙랑(BC 108년 설치) 이후 평양-한강-낙동강 등 강의 수로를 통해 유입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한반도 남부의 철기문화가 연안항로를 통해 유입된 시기를 위만조선 시기(BC 194~BC 108년)인 BC 2세기 무렵으로 보고 있어요.”(최성락 교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온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준왕 기사를 유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네.”(조 관장)

“예. 삼국지를 보면 (BC 194년) 위만에게 패한 조선왕 준(準)이 신하들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가 한(韓)의 땅에서 살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해로를 통한 철기문화 유입이 최소한 위만조선 때부터라는 것을 시사해줍니다.”(최 교수)

■ 동방교역로의 중심지

준왕이 망명한 종착지와 관련해서는 온갖 설이 난무한다. 하지만 망명지로 추정되는 충청도와 전북 지역에서 확인되는 BC 2세기 무렵(위만조선 시기)의 철기유물들이 의미심장한 실마리를 던진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유적들이 대부분 서해안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해로를 통한 철기문화의 유입설을 뒷받침한다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군곡리에서 확인된 중국화폐인 화천은 기원 전 후 동방교역로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다.
 
“연대가 확실하고 단기간에 주조·통용된 화천은 고고학 자료에서 굉장히 중요한 유물이에요. 왕망(王莽)의 신나라(新·AD 8~AD 23년) 때 주조된 경화인데, AD 12~40년까지 통용된 화폐였어요. 28년간 주조된 화폐였기에 고고학 연대를 추정하기에 안성맞춤이지.”(조 관장)

화천과 함께 진(秦)·한(漢)대에 통용된 반량전(半兩錢), BC 118년부터 주조된 오수전(五銖錢) 등도 교류의 증거다.

우선 사천 늑도에서 확인된 유물들은 군곡리 것과 거의 같다. 또한 고흥 거문도에서는 오수전, 제주도 산지항 유적에서는 오수전·화천, 창원 성산패총에서는 오수전, 김해패총에서는 화천이 각각 확인되었다.

물론 발해연안에서 출발, 은(상)~부여~한반도~왜 등 발해문명권에서 널리 확인되는 복골(卜骨)의 존재 역시 문화교류와 공유의 흔적이기도 하다. 근거를 대라고?

“(왜로 가는 길은) 한반도 서해안에 연한 물길로 한국을 경유하여 혹은 남으로, 혹은 동으로 나아가면 왜의 북쪽에 있는 김해(구야한국·狗邪韓國)에 닿는다. 여기까지가 7000리이다.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마도(對馬島)가 있다. ~ 또 남으로 한해(澣海)를 건너면 큰 나라가 있는데(이키시마·壹岐島)~또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말로국(末盧國·규슈)이 있다.”(삼국지 위지 왜인조)

삼국지에 이토록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신기롭기만 하다. 고고학적인 자료와 삼국지 기록을 토대로 한반도 중부~서해안~남해안~왜로 이어지는 항로를 그릴 수 있다.

“한반도 서해안~군곡리~늑도~김해~대마도~이키시마(壹岐島)~규슈를 잇는 동방교역로가 기원 전부터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최 교수)

조현종 국립광주박물관장은 “이키시마의 하라노스지 유적에서 선착장 유구와 함께 하역장 시설이 확인된 바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동방교역로에서 군곡리의 위치는?

“영산강을 통해 내륙으로 연결되는 관문유적의 기능도 있었을 겁니다. 영산강 유역에 존재하는 나주 수문패총과 낭동 패총, 광주 신창동 등이 이를 증명하지요.”(조현종 관장)

“서해안에서 남해안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었던 중간 기착지이기도 했겠죠. 서해안의 긴 항로가 남해안으로 꺾어지는 길목이니까…. 군곡리에서 사람들은 다시 늑도~김해~대마도~이키시마~규슈 등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준비했겠죠.”(최 교수)

“그러니까 동방교역로의 중간기착지이면서 영산강을 따라 한반도 내륙으로 물품을 수출입하는 국제무역항 기능을 담당했다는 얘기지.”(조유전 관장)

기자는 2000년 전 선진문물의 도입창구로 번성했던 국제무역항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 동북아를 강타한 한랭기후

그런데 최성락 교수는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한반도 ‘내륙’에서는 청동기 시대(BC 3세기까지)와 AD 4세기 무렵부터의 유적이 선후관계를 이루는 예가 많은데, 이상하게도 BC 2~AD 2세기까지의 유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최성락)

“그렇다면 내륙에서는 BC 2~AD 2세기가 공백기라는 얘기인데….”(조유전 관장)

“예. 그 공백기 사람들이 내륙에서 농사를 지은 게 아니라 해안가에서 어업이나 무역업에 종사했다고 보는 겁니다.”(최성락)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청동기시대부터 벼농사가 시작된다. BC 5세기 무렵 중국대륙에 약육강식의 시대인 전국시대가 개막되면서 성행하는 철기문화가 한반도로 파급된다. 준왕의 해로를 통한 망명(BC 194년)에서 보듯 철기문화는 서해안을 따라 급속도로 파급된다. 군곡리와 늑도 등 주요 해상거점에 사람이 모여들고 무역거점이 건설된다. 서해안 해상루트를 통한 동방교역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다 AD 100~AD 250년 사이에 동북아시아는 한랭기에 접어듭니다. 냉해가 극심해지고, 곡물생산량이 급감하게 됩니다. 내륙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해안으로 터전을 옮기며 식량문제로 약탈과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최 교수)

최 교수는 그 근거로 삼국사기와 삼국지 등 역사서를 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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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후를 연구한 자료를 보면 AD 100~250년 사이가 한랭기였음을 보여준다. 184년 일어난 ‘황건적의 난’과, 191~194년 사이 ‘원소와 원술의 기병’에는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등의 극심한 기아가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170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큰 피해를 입었다. ~192년 4월 서울에 눈이 3척이나 내렸다. 193년 왜인 천여명이 큰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어 우리에게 구하니~. 194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어 백성들이 굶주리니~.”(삼국사기)

음력 4월과 7월인데도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리는 등 이상 한랭기후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해안 지역 집자리 유적을 살펴보면 불에 탄 곳들이 많아요. 또 패총도 해발 100m 이상 되는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극심한 기근 상태에서 식량자원 확보를 위한 부족간 전쟁이 일어났고, 패총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고지로 올라간 거죠.”

■ 호박밭으로 방치된…

무더위가 막 시작되었던 6월 말. 조유전 관장과 최성락 교수, 그리고 기자가 해남 군곡리를 찾았다.

명색이 사적(2003년·449호)으로 지정된 곳이다. 하지만 기자의 눈에는 그저 호박밭일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무수히 박힌 하얀 조개무지가 널려 있었다. 굴, 꼬막, 바지락, 홍합, 피조개, 새조개, 가리비 등 2000년 전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아닌가.

“이곳이 명색이 사적이라는 곳인가요?”

발길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조개무지의 흔적. 후손들은 2000년 전 동방교역로의 기착지이자 번성했던 국제무역항을 풍미한 선조들의 발자취를 그저 ‘사적’이라는 간판 하나로 기릴 뿐이다. 정말 대단한 후손들이다.

“보존대책을 빨리 마련해야 할 텐데….”

노 고고학자는 끝내 말끝을 잇지 못했다.

<해남 군곡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덧붙이는 글]
출처: 경향닷컴 20080801 <해남 군곡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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