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치 요시히로(河内良弘) 선생의 만주어사전이 출간되었다. 퇴직 후 20여년간 사비를 들여가며 이 작업에만 몰두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관련사항은 아래 기사 참조.

カルチャーインサイド:絶滅寸前、満州語辞典作りたい! 京大名誉教授・河内良弘さん、コツコツ5万語収録も出版未定 - 毎日新聞

 中国最後の帝国「清」を建国した満州族(女真(じょしん)族)の公用語だった満州語は今、絶滅の危機に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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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오딧세이]1세대 간도연구가 아쉬운 은퇴

2009 06/30위클리경향 831호

 

 

 

 

김득황 박사

만주어를 한국어로 풀이한 만한(滿韓)사전이 있다. 만주어는 중국에서도 거의 사라졌다. 그 만주어를 알기 쉽게 사전을 만든 이가 있다. 그는 또 만주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만주족의 언어>라는 책을 펴냈다. 1995년에 두 번, 각각 200부 한정판으로 발행했다. 그는 간도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에게 이 책을 한 권씩 증정했다. 기자에게 준 만한사전에는 1995년에 초반 200부, 1997년에 중간 300부를 발행했다고 적혀 있다. 그는 한국에서는 만주어를 알고 있는 몇 사람 안에 손꼽힌다. 중국에서조차 잊혀져 가는 만주어를 공부한 것도 고향이나 다름없던 간도에 대한 열의였다. 간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만주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주지역 지명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독학으로 만주어를 공부했다. 만주족이 남아 있는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독학으로 만주어 사전도 펴내
얼마 전 동방사회복지회 이사장인 김득황 박사의 은퇴식이 화제가 됐다. 올해로 94세인 김득황 박사는 1972년부터 올해까지 37년간 부모없는 아동에게 양부모를 찾아줬다. 그동안 그가 입양해준 아이는 모두 6만 명이다. 37년이란 세월만큼이나, 6만 명이라는 숫자만큼이나, 94세라는 나이만큼이나 그의 소식은 화제가 됐다.

이렇게 ‘입양아의 대부’로 널리 알려진 김 박사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만한사전 저자다. 그는 ‘입양아의 대부’이기도 하지만 간도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1세대 간도연구가다. 간도 문제에 대해 사회에서 그다지 관심을 가지 않을 시기에 그는 꾸준히 간도 관련 저서를 집필했다.

1915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김 박사는 어린 시절 만주에서 자랐다. 그래서 어린 시절 놀던 곳이 바로 우리나라 땅이라는 신념을 갖고 살아왔다. 일제 시대 때 백두산 정계비 터를 가본 ‘살아 있는 증인’이다. 그는 당시 백두산을 답사하면서 정계비 터 주변에 놓인 돌울타리(석퇴)를 직접 보았다.

동방사회복지회의 사무실에는 만주지역을 우리 땅으로 표시한 당빌지도가 있었다. 청나라가 18세기 초에 제작한 당빌지도에는 평안도를 뜻하는 영문 표기가 압록강에 걸쳐 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간도지역이 조선 땅으로 표기된 것이다. 이 지도를 외국에서 사들인 김 박사는 이 지도에 나타난 국경선을 ‘레지선’이라고 불렀다. 레지 신부가 제작한 지도에 나타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을 말한다. 18~19세기 외국 지도에는 조선과 청의 국경선이 대부분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있다. 그중 일부가 레지선을 따르고 있다.

그는 생존해 있는 몇 안 되는 1세대 간도연구가다. 지금 간도연구는 3세대로 넘어왔다. 1세대보다 연구 환경이 많이 좋아졌지만 간도연구는 1990년대에서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2003년 중국의 동북공정이 간도영유권 문제를 일시적으로 사회적 이슈로 만들었지만 그때뿐이었다. 간도되찾기운동본부라는 시민단체가 꾸려졌을 뿐 간도영유권 문제는 일반 시민들의 의식 속에서 점차 잊혀지고 있다. 연구도 마찬가지로 근근히 맥을 잇고 있는 정도다. 간도협약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 간도 관련 인사들의 부끄러움은 더욱 커져간다. 그가 혼자 만든 만주어 문법책과 만한사전을 보노라면 새삼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94세에 은퇴식을 가진 김 박사의 열정을 가진다면 간도연구도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는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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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이처-아냐] 상서로우소서[사비-오르-고]’이다.

다만 중국과 우리 한반도에서 여진 글자로 쓰여진 비석 등 금석문이 10여 개가 발견된 바 있고, 중국 명나라 때 사이관(四夷館)과 회동관(會同館)에서 발간한《화이 역어(華夷譯語)라는 어휘집 속에 여진관 역어(女眞館譯語)라는 중국말-여진말 대역 어휘집이 들어 있어, 여진말과 여진 글자의 연구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세계 최고의 여진말․만주말 학자이신 중국의 진 치종[金啓孮] 선생님이시다. 이분에 관해서는 글쓴이가 이미 여러 책에서 소개한 바 있기 때문에 더 긴 이야기는 피하기로 한다.

 1918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나신 이 진 치종 선생님은 청나라 건륭 황제의 후손으로 만주식 성은 아이신 교로[愛新覺羅]이고 여진말과 만주말에 관한 많은 논저를 남기셨으며, 여든이 훨씬 지난 지금도 왕성한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시다.

나에게 만주말․만주 글자로 새해 인사 편지를 보내 주고 있는 몇몇 분 중에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시의 랴오닝 민족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는 시버족 리 윤샤[李云霞] 선생이 있다. 

[세계의 창] 시버족錫伯族과 만주어가 살아있는 신강성 찹찰(察布査爾) 시버(錫伯) 자치현

역사기사 2009/02/08 21:36

1. 만주어가 살아숨쉬는 곳

글: 이승섭(자유기고가)


찹찰 시버 자치현[찰포사이察布査爾 석백錫伯 자치현自治縣, Capcal Xibe-]은 과거 구 소련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신장위구르자치주의 한 현(縣)이었지만, 구 소련이 해체된 후 지금은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찹찰 시버족 자치현을 포함해서 신장위구르자치주에는 17만 여 명(1990년 조사)의 시버족이 살고 있다. 시버족은 한자로는 ‘錫伯’로 표기하며 로만알파벳으로는 Sibo, Sibe, Xibo, Xibe 등으로 표기한다.

이들의 언어인 시버어가 우리에게 특별히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최후의 ‘만주어’와 다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시버족은 본래 만주동북방에 웅거했던 선비(鮮卑) 또는 실위(室衛)족의 후손으로 17세기 중반까지 그들은 말갈(Merkit) / 여진(Jurchen) / 만주(Manchu) 민족들과 섞여 살면서 퉁구스화(Tungusicalization)하였고, 특히 청나라가 건립되면서, 그들은 거의 남만주 지방으로 내려와 만주 문자(소그디안문자>위구르문자>몽골비칙>만주문자)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1711~1799) 29년(1746), 시버족 역사의 최대 비극이자, 시버 민족사의 일대 전환이 되었던 사건이 일어났다.

청나라 조정은 서북 변경인 일리지역의 국경 방비를 위해, (만주족과 가까우면서도 만주족에게 비협조적이었던) 용맹한 민족인 시버족들로 하여금 이 지역에 가도록 결정한 것이다. 청나라 조정은 당시 성경(盛京:지금의 심양[瀋陽]) 일대에 있던 시버족 군인과 그 가족 3천2백75명을 뽑아, 고향에서 4천㎞ 이상 떨어진 신강성(新疆省)의 일리강 서쪽 찹찰 지역으로 강제 이동시켰던 것이다.

마치 스탈린에 의한 연해주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와 같은 이 비극적인 민족의 이동과 그후의 현지 정착 과정은, 현재 시버족들 사이에 슬픈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고, 많은 전설과 민요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시버족으로서는 눈물 없이는 말할 수 없는 이 사건이 언어학적, 민족학적으로는 커다란 의미를 주는 사건이 되었다.
사실 중국 각 처에 흩어져 있는 만주족들은 일부 후미진 지역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한족(漢族)화 하여 모국어인 만주말을 거의 잊어버렸고, 시버족 중에서 중국의 동북지방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만주족과 마찬가지로 그들 언어인 만주말을 잊어버렸지만, 서북쪽으로 이동된 시버족의 후손들은 현재까지 그들의 말과 글자(만주어, 만주문자)와 풍속을 보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내에서는 김동소(金東昭)교수가 이 지역을 수 차례 방문하여 연구발표한 바 있다.

시버어가 만주어의 문화적 유산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고맙기 그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한국어 연구에 있어서 현대한국어와 알타이 제언어들간의 핵심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은 만주어를 포함한 만주지방에서 사용되었던 남퉁구스(南Tungus)계통의 언어들이다.

러시아 연해주지방에 명맥이 남아 있는 나나이어(Nanai), 우디헤어(Udihe)보다는 압록강을 맞댄 만주지방에서 존재했던 만주어가 한국의 고대사를 바로 세우는데에 중요한 열쇠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실상 귀중한 연구자료인 살아 있는 만주어가 흑룡강, 요령, 길림의 동북 3성에서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사어(死語)가 된 것이다.
이런 안타까움 속에서 그나마 신장(新疆)의 변방지대에 보존되어 있는 시버어는 고대 한국어 연구의 중요한 보고(寶庫)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국사관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무관심은 바로 고구려는 민족의 뿌리로 인식하면서도 고구려 패망 이후의 고구려 강역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무관심했었다는 것이다. 당나라군이 많은 수의 고구려인들을 지금의 카자흐스탄 부근의 서역지방이나 또는 운남성 너머와 같은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는 해도 대다수의 고구려 백성들은, 반도의 동족들이 그들의 존재를 잊고 지내오는 동안, 나라 잃은 채로 만주벌판에서 계속 살아온 것이다.
그들은 여진, 숙신, 선비, 거란, 말갈 등의 이름으로 장성(長城)을 넘어 중국의 한족들을 지배하기도 했고, 몽골과 싸우기도 하고, 때론 압록강을 넘어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 식민사관에 호도당한 우리 국사교육은 만주언어에 대한 고찰은 물론이고 만주일대의 제 민족들인 여진, 숙신, 말갈족들에 대해서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야만인들로 묘사하여 교육하는 씻을 수 없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자연히 고조선, 부여,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그 정확한 실체를 후손들에게 전해주기에는 불완전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늦게나마 한민족의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접근노력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최근의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한국사회에 고구려에 대한 재인식과 일반인들의 역사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옛 고구려 강역은 현재 대한민국보다는 북한지역과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이것은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정치적 계산이 깔린 중국의 역사조작기도 앞에서는 우리의 고구려사를 포함한 이전과 이후의 대륙역사 연구에 있어서 많은 물리적 장애가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유적발굴과 같은 방법과 병행하여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언어연구를 통한 접근방법이다.
만주지역의 소수민족 언어들과 몽골,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언어들에 대한 연구는 이웃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다.

지금은 사멸된 여진어(Jurchen)의 자료는 오히려 19세기 만주일대를 연구한 독일학자들에 의한 독일어 서적이 귀중한 자료가 되는 실정이다.

현재 동북지방의 만주어는 고작 20내지 70명의 사용자가 있을 뿐이라고 조사되었다(1995 M. Krauss).
그나마 대부분 노인들이어서, 적어도 흑룡강성, 요녕성, 길림성의 동북 3성에서는 이미 만주어는 이미 멸종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학계에서 판정할 정도이다.

그런 상황에서 1746년에 머나먼 서역지방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던 만주족의 일족인 시버인들이 생생히 살아 있는 언어로서 구어만주어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고대사 찾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보다 많은 이들이 만주어연구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땅이야기(한국토지공사 웹진) 2004년 9월 10일]

 

2. 시버족 소개


(가) 거주지: 중국 동북지방인 요녕성, 길림성 및 서북지방인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나) 인구: 2000년 인구통계로 18만 8천 824명이다.

(다) 말과 글: 중국 동북지방에서 사는 시버족은 한어(=중국어)와 몽골어를 쓴다. 서북지방인 신강성에 사는 시버족은 시버어를 사용하고 시버문자가 있다. 시버어는 알타이 어계의 만주-퉁구스 어족 가운데 만주어에 해당한다.

(라) 민족의 유래: 오늘날의 시버족은 고대의 선비(鮮卑)족에서 유래한다. 선비족은 그 원래 거주지가 선비산(鮮卑山=室韋山) 일대였다는 데에서 유래한 명칭인데 모용부(慕容部) 등 대부분의 선비족들은 황하 유역으로 남하하였다가 뒤에 한족에 흡수되어 버렸으나, 소수의 선비족은 대흥안령(大興安嶺), 눈강(嫩江) 등지에 남아서 수렵, 어로 생활에 종사하였다. 16~17세기 경 만주족이 일어나자 그들의 지배를 받았고 청나라의 국방정책에 따라서 일부 시버족은 서북지방의 신강성 등지로 이주되었고 만주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선비(鮮卑)는 犀毗, 師比, 矢比, 席百, 席比, 錫伯, 室韋 등으로도 쓰는데 동일한 소리(아마도 '스비'나 '스베이')을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이다.

(마) 종교 :샤머니즘 ,조상숭배, 라마교
(바) 문화 :
시버족은 조선족과 만족과 마찬가지로 동북지역 평원에 많이 거주해 왔습니다.
그 뒤로 1764년 청나라 시기 신강의 변강을 지키기 위해 청나라 왕은 시버족 장병 1,000여 명과 그 가족을 함께 약 3천여명 정도를 신강으로 이주시켰습니다. 동북지역의 여러민족들과 같이 생활하다가 신강으로 강제이주되었는데특별한 민족습관이 있습니다.
민족습관으로 보면 일부는 동북에서 그대로 남아내려 온 것입니다. 개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이점은 아마 조선족과 상반되는것같습니다.
신강으로 이주한 뒤로는 신강의 위글족과 하싸크스족과 함께 어우러져 생활하면서 생활습관에 일부 변화가 생겼습니다. 평소에 소고기, 양고기를 즐겨 먹고 또 결혼식날에는 양고기를 많이 올리는 등 특징이 있습니다.
시버족은민족의 언어나 민족 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원래 청나라시기부터 줄곧 만족어, 만족문자를 써왔습니다. 지난1940년대에 만족어와 만족문자를 일부 개편해서 시버족 자체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만족어, 만족문자와 별로 차이가 없는 문자,언어입니다.
시버족 또한 다른 여러 소수민족들과 같이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또 교육열이 매우 높습니다.교육면으로 놓고 볼때 시버족은 교육을 매우 중시하는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부터집안의 여건이 허락된다면 꼭 공부를 하게끔 챙겼습니다. 이런 습관은 지금까지도 계승 발양되고 있습니다. 교육수준을 보면 지금도 전국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시버족은 교육을 매우 중시하는 민족으로적은 인구에 대학생도 아주 많습니다.
시버족의 전통명절은기타 민족과 마찬가지로 음력설, 청명절, 추석을 쇠는 외에도 또 우리 자체의 명절, "서부로의 이전"을 그리기 위해 해마다 음력으로 4월 18일을 명절로 간주하고 보내고 있습니다.
1764년의 4월 18일에 바로 심양의 한 사찰에서 장병들을 신강으로 보내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 음력 4월 18일을 명절로 인식하고 해마다 경축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동북에 남아있는 시버족과 신강에 있는 시버족이 서로간의 정을 나누고 그리움을 전하는 명절입니다.
또한 전통적으로 시버족은 양궁을 매우 즐기고 있습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아주 잘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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