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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조선, 조선의 역사 1.
최근 북관대첩비가 10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북관지역의 승첩비를 일제시대에 관동군이 본국으로 가져서 보관한 비문이며 최근 반환운동이 결실을 맺어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북관대첩비에 숨겨진 역사적 진실은 놀라운 것이다. 함경도의 북관지역이 길림과 장춘일대를 말하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 8도 중에 하나인 함경도라는 사실이다.최근 재 부활한 KBS역사 스페셜에서 100년 만에 귀환한 북관대첩비에 방영된 함경도 지도가 요동반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일본 역사 연구가가 함경도라고 제시한 지도가 화면에 잠시 방영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북관대첩비를 가지고 저주의식을 거행하다!

일제 때 약탈되어 일본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보관된지 100년 만에 귀환되었다. 일본 군구주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한 구석에 보관된 것이다.이 유물이 여기에 보관된 것은 한국의 유물을 보관하는 차원이 아니라 저주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소품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지난 일제가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한반도 8도에 수백개 철심을 박아 정기와 지기를 끊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연장선에서 야스쿠니 신사 일반인 손길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가두고 비석머리에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엄청난 머리돌을 눌러 100년 동안 저주의식을 거행한 것이다.바로 임진왜란 당시 가장 강력한 항거를 한 함경도의 기운을 꺽는 상징을 북관도 대첩비로 삼은 것이다.그 곳은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철저히 격리된 장소에 보관하였다.

북관지역은 어디인가!
북관대첩비를 가지고 간 동기는 다음과 같다. 만주국을 세운 일제 관동군이 러일 전쟁을 하다 함경도 길주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한 것이다.이 비석을 발견하고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 발견 장소가 현 한반도 내에 있는 함경도 길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러일전쟁 당시에 만주국 전쟁터는 송화강 일대였으며 관동군이 활동한 지역의 중심이다.

일본이 만주에서 활동하는 군인을 관동군이라는 부르는 것은 만주 일대를 관동지방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 우리는 강원도 태백산맥 대관령을 중심으로 대관령의 동쪽을 관동지역이라 하고 대관령 서쪽을 관서지역이라 하는데 그것은 조작된 것이다. 관동군이라고 한다면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 활동하는 일본군이여야 한다. 그러나 만주에서 활동하는 군인을 관동군이라고 한 것은 이 일대가 관동지방이기 때문이다.
외국 고지도를 보더라도 북경의 동쪽을 관동이라고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만리장성이 끝나는 산해관을 중심으로 동쪽을 관동이라고 한 것이다.위 그림에서 관동이라는 영문 표기를 볼 수 있으며 그 옆에 요동이라는 영문 표기를 볼 수 있다.또한 고구려 시대 천리 장성이 축조된 그림이 점선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이 지역이 1900년 전후 조선과 청 국경을 정한 지역이다.또 다른 지도를 보면 목책이 있었던 지역이다.

관(關)이라는 것은 중요 국경이나 요충지역을 말한다.국경이나 관경을 의미하는 말이나 관공서 관찰사 등에서 알 수 있듯 중요 국가 요충지역을 말한다.그리고 관이라고 하는 것은 중심을 말한다. 흔히 경기장 내에 구경군을 관중석이라고 한다. 즉 경기장 중심을 바라보는 자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관은 중심을 말한다. 그래서 관중지역은 수도가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서안이나 북경이 고대 역사에서 수도로 사용되어 왔다.그래서 일대를 관중(關中)지역으로 불리웠다. 다른 말로 수도를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의 지역을 경기도라고 불리웠다.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관서와 관동 관북과 관남으로 부른 것이다.

관동군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군 주둔권을 승인받고, 러시아의 조차지(租借地)인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인수하여 관동주[關東州]를 만들고 관동도독부를 두었다. 관동주와 남만주 철도의 경비를 위해 병력을 주둔시킨 것이 관동군의 시초이다.요녕성이 관동지방이며 북경을 관으로 보고 지역을 구분한 것이다.

간도의 유래를 알면 역사가 보인다!
북관이라고 하는 것은 관의 북쪽이므로 북경을 관중으로 불리웠으며 이 곳이 요동성이 있던 지역이다.이 곳의 북쪽을 북관지역이며 북동쪽 방면을 간방이라고 칭하였다. 8괘로 동북방을 간(艮)으로 표현하였다. 이 일대를 간도라고 한 것도 간도(艮道)에서 간도(艮島)로 지명이 변경된 것이다. 그래서 만주 일대를 간도로 불리운 것은 중심에서 동북방이기 때문이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 고려와 조선의 중심이 중국 중심지역에 위치했다는 반증인 것이다.간도를 동북방으로 보았으며 이 곳이 함경도 지방이며 김종서가 동북방 6진을 구축한 지역이다.
우리가 우리 땅인 곳을 간도라 부른 것은 우리의 영토의 중심에서 불렀다는 것이다.간도는 동북방의 섬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룩에 존재한 중앙조선에서 만주와 한반도를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대륙 조선론이 증명된 것이다.

북관대첩비 특집으로 방영된 함경도 지도가 요동반도 지역을 가르킨다!

지난 2005년 10월 21일 KBS에서 방영된 < [긴급기획 역사스페셜] 100년만의 귀환, 북관대첩비 >를 보면 놀라운 장면이 방영되었다.그러나 아무도 그 진실에 대해 모르게 넘아간 엄청난 장면이 나온다.그것을 취재한 PD도 그것을 시청한 시청자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장면이 무엇인가!
임진왜란 당시에 함경도를 침공한 대표적인 다이묘(大名)가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인데 그는 함경도를 장악하려고 많은 사전 준비를 한다.화면에 캡처된 <가타지마 만지> 교수가 연구한 지도를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다.그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농업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다.쌀을 물론 콩 . 기장. 조를 수탈하는 대상으로 삼고 생산량과 조세표까지 철저히 파악한 것이다.그러면서 함경도 지방을 공격한 지도를 보여주고 있다.문제의 지도를 펼치고 가토 기요마사가 점령한 지명이 함경도이고 구체적으로 덕원.문천.고원.영흥을 가르킨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두가지 발견된다.
첫째는 한반도 함경도는 산악지대라 농사지울 땅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한반도 함경도는 가장 농지가 적고 가장 산악이 많다.그런데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농사 지역과 생산량에 대단히 욕심을 가지고 침공 전부터 심혈을 기울인다.과연 한반도 함경도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지역을 공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함경도를 공략한 지명을 보여주는 지도가 함경도 동해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함경도 동해안은 강이 거의 없으며 섬도 거의 없다.그 곳과 가장 흡사한 곳이 중국 요녕성 지역이다. 요하의 하구에 장산열도가 있으며 1000개에 가까운 많은 섬들이 존재한다.양자강 하구 주산군도 다음으로 섬이 많은 지역이다.그 곳에 한반도 지명과 같은 흑산도도 존재한다.화면에 나온 지도는 대능하와 요하가 밀집한 곳이다. 이 곳은 화북평원으로 논농사는 물론 많은 농산물이 산출되는 중요한 곡창지대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드넓은 곡창지대와 목초지대인 것이다. 요하를 따라 올라가면 길림과 장춘이 나온다.

종합하면 함경도로 진출한 곳이 바로 요동만이라는 사실이며 요하(압록수)를 따라 내륙 깊은 길주(길림)에서 함경도 의병과 관병의 대접전을 벌인 것이다.조선군 3000명대 왜군 22000명이 싸워 조선군이 승리하였다. 전술 중에 하나는 청야전술인데 왜병이 진군한 곳마다 곡식과 장비를 불태워 현지 보급품을 끊는다는 것이다.한반도에 좁은 지역에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전술이 청야 전술인 것이다.이 곳에서 유목족의 깅인한 조선족과 싸워 퇴각하여 이 이후에도 침공하지 못한 지역이다.일제 시대에도 독립군이 활동한 지역과 동일하다. 역사는 반복될 뿐이다.

함경도라고 방영된 지도가 단순한 요하강 일대라는 가정이 아니라 진실인 이유는 또 다른 고지도와 아주 흡사하기 때문이다.위 지도에 위 부분은 조선후기에 북경을 다녀온 여행기에 나오는 지도이다.북경에서 신의주 까지 자세한 여행지도인데 그 중앙 부분과 가의 흡사하며 여러 강을 지나가는 구간이 있다.산해관-(난하-대능하-요하-태자하)-요양-압록-신의주 일대 중에 4개강이 이 곳 지도와 거의 같다는 것이다.왼쪽을 보면 산해관 북쪽을 지나는 장백산맥도 거의 같게 나온다.과연 한반도 함경도에 4개의 연속된 강이 있으며 않은 섬이 존재한 지역이 있는 것인가! 아무리 찾아 보아도 일부라도 비숫한 지명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산악지대에 눈독을 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함경도가 최고 알짜 지역이기 때문에 욕심을 낸 것이다.그 지역이 바로 요동만인 것이다.일본 교수인 가타지마 만지는 알 것이다. 그 곳이 절대 함경도 일대가 아니며 요녕성이라는 것을 .. 그러나 시청자나 일반인은 물론 그것을 취재한 PD 도 그 곳이 한반도 함경도지도가 아니라는 것을 의심하지 못한다.모든 정황과 증거가 한반도 함경도가 아니라 요녕성이어야 맞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가토 기요마사는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바보장군이 되는 것이다.왜냐하면 한반도 8도 중에 가장 농산물이 적은 곳에 가장 많은 농산물 확보를 위한 목적으로 침공하였고 최종적으로 욕심을 냈기 때문이다.

함경도는 동북삼성이라야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
그것은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내에 존재한 모든 반도사관이 거짓이라는 것이 판명되는 것이며 고려와 조선의 한반도 정위론과 그것을 주장하는 강단사학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사건이며 재야사학과 민족사관이 승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륙고려 대륙조선의 결정적 증거가 많다고 하더라도 비록 사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절대 승복하지 못하는 세력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한다. 중국은 동북 공정과 중국 대통일을 위해서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리고 일본은 대륙 조선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만일 한일관계사에 있어서 일본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대륙을 여러번 공격하였지만 만일 그 공격지가 대륙이라고 밝혀지면 일본의 우월성 보다는 한국의 대륙지배가 밝혀지기 때문에 모든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명분 때문에 철저히 숨기고 있는 것이다.현 재야사학은 일제가 식민지 교육용으로 한반도 안에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반도사관을 세뇌시키고 있으며 그 후학이 강단을 장악한 것이다.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후손 이병도가 근대 역사학의 뿌리인 것이다. 그 후학의 학맥이 대세를 장악하는 이상.. 그 어떤 근거나 증거가 나와도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강단사학 전체가 괴멸되기 때문이다.우리는 중국과 일본 뿐 아니라 내부의 역사전문가라고 알려진 강단사학의 또 다른 적과 싸워 우리 민족의 웅대한 대륙사를 회복해야 한다.

함경도의 지명 유래와 길림의 지명 유래는 같다!
네이버 백과사전을 기준으로 함경도와 길림을 비교한 것이다.함경도는 태조 때 영흥(永興)과 길주(吉州)의

이름을 따서 영길도(永吉道)라 하였으나,
1416년(태종 16) 함주(咸州)를 함흥부(咸興府)로 승격시켜 관찰사(觀察使)의 본영을 둠으로써 함흥과 길주의 이름을 따 함길도(咸吉道)라 고쳐, 이때 8도가 갖추어졌다.그리고 길림은 청(淸)나라 때부터 불러온 이름인데 1929년에는 융지현[永吉縣]으로 개칭하였다가 1936년에 지린시[吉林市]로 고쳤고, 청(淸) 말기에 성(省)이 설치되었으며 1954년까지는 지린성의 성도이었다. 여기서 조선은 함경도를 영길도(永吉道)라고 부르며 청은 길림을 영길현(永吉縣-중국 발음 융지현)이라 부른다. 즉 길림성의 지명을 공통적으로 영길이라 한 것이다.그러므로 길주는 길림이며 길림은 영길로 불렀다는 것이기 때문에 길림이 함경도 중심도시사 되는 것이다.조선은 도(道)로 지역을 구분하였고 청은 현(縣)으로 구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영길도를 영길현으로 바꾼 것 이외는 없는 것이다.현 길림성 지도에도 길림 밑에 영길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임진왜란의 당시 해저 유물이 남해안에서 거의 안 나오는 이유!
가토 기요마사와 이순신이 전투를 벌인 지역이 요하 근처인 장산군도 일대일 가능성이 많으며 특히 장문포전투와 고금도 해군기지 이전에 대한 추정지역이 장산군도 일 가능성이 많다.또한 북경 일대가 순천부로 불리운 지역으로 보아 백의종군하고 난 이후 삼도수군 절도사 자리를 차지한 이후 해군을 재건한 지역 중에 유력한 추정지역이다.순천 광양 곡성 구례 지역은 어디인가! 북경에서 단동까지... 황하에서 압록까지....발해만와 요동만의 연안에서 해군 재건설을 하는 가장 유력한 지역이다.

부산이라는 지명은 산동성 동래현 지방과 양자강 항주 근처도 부산으로 불리운 적이 있다.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주 수도는 서안과 북경 그리고 무한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개성과 평양 그리고 한성의 영역인 것이다.실제 임진왜란에서 싸운 이순신의 바다는 양자강 일대와 산동성 일대 그리고 요녕성 일대 그리고 한반도 남해안 잔적 소탕작전등으로 방대한 지역이다.그렇기 때문에 난중일기에서 절강에서 강소까지 바다를 지켰다고 나온 것이다.자세한 정위론과 전체 전쟁상황은 차후에 자세히 언급을 드린다.조선 수군이 전멸했다는 거제도 칠천량 바다를 뒤져 보아도 임진왜란 당시에 침몰한 어떤 배의 흔적도 안 나온다.그 이전에 침몰한 배는 많이 나와도 확율적으로 많은 것 같은 임진왜란 유적은 거의 안 나온다.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주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변방에 지나기 않았기 때문이다.막강한 자금을 동원해 남해안을 뒤져도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양자강이나 황하강 그리고 요하의 바다를 뒤져보면 많은 임진왜란 유물이 나올 것이며 거북선도 나올 것이다.

백두산 경계비의 진실-압록강과 두만강은 요하와 아무르강을 말한다.
 



아래 그림은 간도지방을 세밀하게 그린 지도이다.요하와 송화강을 결합한 지역을 표시한 것이다. 노란색 지도는 1895년 전후로 하는 조선과 청의 국경지도다. 요하 근처를 절충지로 하여 송화강 지역을 양분한 지도다.그리고 푸른색 지도는 일본이 정밀 측량하면서 백두산 유역의 세부 지도이다.백두산 위쪽으로 표시된 강이 토문강으로 나온다.


우리는 중국으로 부터 간도반환 운동과 함께
러시아로 부터 연해주와 사할린 반환운동을 해야 한다.
아직 국제법 상 법적 청구가 가능한 시점이다.
이순신이 지켜낸 녹둔도가 사할린이며
우리는 녹둔도 회복운동을 해야 한다!
김종서의 6진중에 한 지역이 바이칼호 남쪽에 회령진을 설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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