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의 재조명 3. 백제의 진한지역 통합
삼국사기 전기기록에서 신라가 만나는 대표적인 나라 셋이 백제와 가야와 왜이다. 그런데 일성이사금대(134-154)는 이 세 나라를 하나도 안 만나는 아주 특이한 시기이다. 신라는 말갈의 공격을 두 차례 받을 뿐이나 이 말갈도 곧 사라지고 60년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 보통은 신라에는 장기적인 평화가 찾아와야 한다. 하지만 일성 후반기인 2세기 중반에 이르면, 과거 신라에 통합되었던 소국이 반란을 일으키고, 신라는 전국적으로 지혜와 용맹을 갖춘 장수를 구하는 등 분위기가 심각해져 간다.

아달라이사금 전반기(166년 한성백제 초고왕 출현 이전)도 신라가 어느 누구로부터도 공격을 받지 않는 시기이다. 유일한 군사력 동원은 165년에 있었던 길선의 백제 망명사건인데 이때 신라는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킨다. 그 군사 규모가 거의 3만 명에 이르는데 이는 신라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 군사력을 초과한 규모이다. 결국 신라가 큰 위기를 느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군사동원에는 무리가 따라 박씨왕조가 무너지고 석씨 왕조가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2세기 중반 신라의 인구 규모는 거의 백만에 육박하였다. 신라의 인구는 3세기에 전성기를 맞다가, 3세기 말에 망하여 점차 인구가 주는데, 4세기 전반에 국가 분할로 인하여 절반 이하로 줄어, 내물이사금이 들어오던 343년에는 40-50만 규모로 추정된다. 신라가 백만의 인구를 회복하는 것은 신라본기의 중기왜가 후기왜로 전한되는, 즉 신라와 왜의 국력이 비등해지는 5세기 중반 정도로 생각된다. 7세기 후반 김유신 시기에는 신라의 인구는 고구려나 백제와 비슷한 규모로서 약 4-5백만에 이르렀다. 당시 요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 전체 인구는 약 1500만 정도였을 것이다.

166년에 백제에 3루왕 시대가 끝나고 초고왕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백제는 쳐들어오지 않는다. 가야도 쳐들어오지 않고, 왜도 쳐들어오지 않는 등, 아무런 전투가 없는 166년 이전에도 아달아이사금은 국경을 순찰하고 병사들을 위로하는 등 비상시국이다. 신라 내부에서도 반역의 기운이 계속된다. 한반도에 심상치 않은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2세기 초에 백제에 대한 말갈의 위협이 사라지자 백제의 한반도 통일이 시작된 것이다. 2세기 중반이 되자 그 힘이 마한지역을 넘어 진한지역에도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고 신라는 이를 느끼는 것이다.

백제는 담로제도를 가지고 전국을 자신의 세력권에 집어넣는데, 한강유역의 한성백제도 지배층을 교체하여 자신들의 직속 담로화한다. 이것이 166년 한성백제 3루왕 시대의 종말과 초고왕의 등장이다. 신라인 길선의 망명사건이 3루왕 시대 마지막 기록인데, 여기서 백제는 한성백제의 왕권을 바꿀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성백제 개루왕은 재위 5년째에 죽고 그 이후 33년은 다른 인물이 한성백제를 통치하고 있었다(후개루왕이라 부름). 3루왕 시대에는 대 신라정책이 강온을 반복하나, 이후 등장한 초고왕-구수왕은 신라에 대하여 강경일변도의 정책을 편다. 한성백제에 새로운 집권세력이 등장하며 외교정책이 바뀐 것이다.

백제는 한반도를 통일하는데 무력만 쓴 것은 아니고 자체적으로 항복하고 삼한에 들어오도록 하는 정책을 병행하였다. 압독국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주변에 더 강한 세력이 밀려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길선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주변 여러 나라들이 항복하고 백제의 담로가 되어도 자율성을 보장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신라 내부에서도 백제와 전쟁하는 대신에 이를 택하려 했던 화평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길선의 모반으로 화평세력이 모두 축출되고 대신 강경파가 정권을 잡으니 이것이 벌휴이사금에 의한 석씨왕조의 출현이다. 아달라이사금 31년 중 재위 21년째가 마지막 기록인데, 이후 10년 동안은 아달라 14년(167년)에 2만 대군을 지휘하고 한성백제를 공격했던 이찬 흥선이 통치했고, 자연스럽게 그에 의하여 새 왕조가 열렸다. 한성백제의 왕권이 초고왕으로 바뀐 아달라 후반기부터 백제의 공격이 시작되는데 이를 모두 이찬 흥선이 막았을 것이다.

165, 아달라12, 개루38, 마품22, 성무3; 아찬 길선의 망명으로 80년 만에 백제와 불화
166, 아달라13, 초고1, 마품23, 성무4; <백제와 80년 만에 충돌>
167, 아달라14, 초고2, 마품24, 성무5; 백제의 공격
168, 아달라15, 초고3, 마품25, 성무48;
169, 아달라16, 초고4, 마품26, 성무60;
170, 아달라17, 초고5, 마품27; 중애1; 백제의 공격

한성백제에 초고왕이라는 새로운 통치자가 들어서며 백제의 공격이 시작된다. 특히 벌휴이사금 시기에 신라는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는데, 다음 벌휴 7년 이 진한지역의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벌휴 7년(190); 가을 8월, 백제가 서쪽 국경 원산향을 습격하고, 다시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자, 백제 군사가 거짓으로 달아나는 체하였다. 구도가 와산까지 추격하다가 백제에게 패배하였다. 왕은 구도가 잘못했다고 하여 부곡성주로 강등시키고, 설지를 좌군주에 임명하였다.

와산까지 가려면 진한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이 기록은 초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진한지역의 마지막 진출기사다. 이 기록 이후 백제는 진한지역을 자유롭게 통과하여 신라를 공격하나 신라는 그러지 못한다. 모든 전투는 신라영토 주변에서만 일어난다. 즉, 서기 190년에 진한지역의 대부분이 백제에게 넘어간 것이다. 190년에 구도가 지금의 충북지역인 와산까지 추격한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이 지역은 이미 백제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불리한 전투가 될 수밖에 없다.

신라본기를 보면 벌휴이사금 2년(185년)에 소문국을 병합한 것과 조분이사금 2년(231년)에 감문국을 병합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진한소국에 대한 병합이 없는데, 이것은 진한소국들이 다 백제에 들어가 더 정벌한 소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백제의 진한지역에 대한 통합은 3세기 초에 거의 완료되었다. 3세기 중반의 한반도를 기록한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진한지역은 韓(백제)에 다 통합되고 사로국과 우중국 2국만 남았는데 이는 삼국사기로 판단할 때 정확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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