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한 백제시조 신사의  새문 (도로이Torri: 鳥居), 우리나라 솟대나 홍살문과 관련]

  • 글쓴이: 라디오
  • 08.01.29 01:36 http://cafe.daum.net/radioproject/88dS/444http://cafe.daum.net/radioproject/88dS/444')">주소 복사


    일본서기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님의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님이 우려하는 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아래와 같이 보고 있습니다. 혹 참고가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비미호 관련기록】

    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왕 20년(서기 173년) 「倭女王 卑彌呼 遣使來聘」
    위지 왜인전 「倭國亂相攻伐歷年 乃共立女子爲王名 曰卑彌呼」
    위지 왜인전 「景初2년(서기 238년) 倭女王遣使 大夫難升米等諧郡...후략」라고 나오는데 일본서기와 양서에는 3년으로 나온다.
    위지 왜인전 「正始元年(서기 240년) 太守弓遵遣建中校尉梯雋...후략」
    위지 왜인전 「正始4년(서기 243년) 倭王復遣使 大夫伊聲者掖邪拘等 八人上獻」
    위지 왜인전 「正始6년(서기 245년) 詔賜 倭難升米黃幢」
    위지 왜인전 「正始8년(서기 247년) 遣塞曺緣史」
    북사 왜인전 「正始中(서기 240∼247년) 卑彌呼死」
    위지 왜인전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當時殺千餘人...중략...復立卑彌呼宗女 壹與年十三爲王 國中遂定」

    이라고 나오는데 「남왕을 다시 세웠더니 나라 안이 복종하지 않아 서로 다시 주살하여 당시 천여 인을 죽였다...중략...나이 13세인 비미호의 종녀인 일여를 다시 세워 왕으로 삼았더니 나라 안이 드디어 안정되었다」라는 정도로 옮겨진다.
    晉의 起居注에 「晋武帝泰初2년(서기 266년) 倭女王遣重譯貢獻」

    위지의 마지막 기사는 명백히 비미호 사후다. 아마 비미호 사후에 그때까지 공립하던 여왕제를 폐지하고 남왕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고 그러자 비미호측과 남왕측과의 연정(聯政)이 깨지고 내란 상태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소국에서 천여 명이 죽을 정도면 큰 난리다. 그러다 비미호 가계의 신녀 지위를 물려받은 인물로 보이는 일여(壹與)를 다시 여왕으로 세우자 내란이 그친 것이다. 나이도 13세라고 했으니 비미호도 처음 지도자가 된 것은 이 정도 나이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비미호의 나이를 추정해보면 아달라왕 20년에 사신을 보내올 정도이니 최소 비미호 사후의 일여 만한 나이는 되었을 것이고 서기 200년이면 30대후반 40대초반 정도 된다. 그러면 북사기록대로라면 80대 정도이므로 크게 무리하지 않다는 결론이다. 문제는 90이 가까이 되도록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서 비미호의 종녀인 일여를 비미호의 3세, 4세 후계자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위지에 나오는 비미호의 대위(對魏) 사신파견 기록상 서기 247년까지라면 비미호 생전이라고 보기에 약간 무리가 있고 여성지도자가 계속 비미호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고대엔 이름에 수직으로 돌림자를 쓴 경우가 보이기 때문이다. 북사기록을 보면 서기 240년에서 247년 사이에 몰했다고 나오기도 한다. 또 비미호란 이름이 직접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사기 아달라왕 20년조와 위지 왜인전의 최초기록, 북사 뿐이다. 비미호란 이름은 그들 집단에서 제정일치의 유습에 따른 신녀적인 성격을 띤 여성지도자의 수직돌림자로 보인다.

    서기 266년 진에 최후로 사신을 파견한 야마다[邪馬臺]는 그 후 대륙측과 외교가 불가능한 소국으로 분열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열도에는 이후 서기 390년 응신이 열도 최초의 통일왕조인 대화왕조를 열 때까지는 전부 공위시대였다. 서기 266년 진에 사신을 파견한 이후 대륙기록에 최초로 다시 등장하는 인물이 왜왕 讚이고 이 인물이 바로 응신이며 화풍시호 譽田과 호무[讚]=호무[譽]로 연결되고 다시 사노[讚]=사노[狹野]로 연결되는 神武이기도 하다.

    또 <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2/416p/보주33>에 보면 神功이나 神武를 日人들도 전설로 보고 있다. 게다가 '集解'란 기록에는 일본서기의 신공기 39년, 40년, 43년, 66년 대륙사서 인용기록이 후세인이 가필한 것으로 간주되어 전부 삭제되어있다고 한다.

    【수직돌림자를 쓴 사례】

    〈 '여지승람'의 말통(末通)은 가야왕족들의 수직돌림자〉

    〔말통(末通)이 모도(牟都)〕

    사기와 대륙측 기록에는 동성왕의 이름이 모대(牟大), 모도(牟都)라고 나오고 대륙측 기록에는 조부(祖父)인, 일본서기의 예진별명(譽津別命)이 역시 모도(牟都)라고 나온다. 예진(譽津)은 응신인 예전(譽田)의 형이고 아라 가야왕 아라사등의 장남이다. 가계가 아라사등(阿羅斯等)-> 예진별명(譽津別命)-> 곤기왕(琨伎王)-> 동성왕(東城王)인 것이다. 예진(譽津)의 이칭에 품모도(品牟都)가 있는데 발음이 호무쯔[譽津]=호무쯔[品牟都]다. '호[品]'는 존칭이고 무쯔[牟都]가 원래이름이다. 유교적인 발상으로는 이해가 안되겠지만 가라왕족은 수직돌림자를 썼다. '기'와 '지'는 고대에 교체되어 쓰였다. 성씨록의 곤기(琨伎)가 사기에도 곤지(昆支)로 나오고 서기에도 웅략기에 곤지로 나온다. 열도 최초의 통일왕국인 대화왕조 초대왕인 응신은 동성왕의 종조부(從祖父)인 것이다. 기·기에 나오는 증조부 아라사등의 이칭을 열거해보면

    가) 고사기 개화기(開化記)에 대오왕(大 王)이라고 나온다. 발음이 오호마다[大 ]다.

    나) 서기 숭신기 65년 7월조에 「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보내...」라는 기사가 있다.

    다) 서기 수인기 2년 시세조(是歲條)에 아라사등(阿羅斯等)의 황우설화(黃牛說話)가 나온다. 「...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의 왕자인데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 또는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라 한다...」라고 되어있다.

    라) 서기 신공기 62년조에 「가라국왕(加羅國王) 기본한기(己本旱岐)」라고 나온다.

    마) 서기 계체기 23년 3월조에 가라왕(加羅王) 아리사등(阿利斯等)이 나온다. 이어서 4월조에 「임나왕(任那王)인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가 내조하였다(己能末多란 함은 阿利斯等일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고노마다[己能末多]=아리사등(阿利斯等)이라고 하고 있다.

    바) 서기 민달기 12년 7월조에 「...지금 백제에 있는 화·위북국조(火·葦北國造)인 아리사등(阿利斯登)의 아들 달솔(達率) 일라(日羅)가 현명하고 용감하다...」라고 나온다. 동년 10월조에 「...화·위북국조(火·葦北國造) 형부·차부아리사등(刑部· 部阿利斯登)의 아들 신(臣) 달솔 일라(日羅)는...」라고 나온다.

    신대기를 제외하더라도 인대기의 개화기(開化紀)부터 계체기(繼體紀)까지 수백 년에 걸쳐서 동일인이 이름을 약간씩 달리하면서 계속 등장한다. 기·기는 원래부터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오호마다[大 ]왕=큰마다왕, 임나국인(任那國人) 소나가시지[蘇那曷叱知], 오호가라[意富加羅/大加羅]의 왕자 쯔누가아리시또[都怒我阿利斯等] 또는 우시기 아리시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 가라왕(加羅王) 고노모도간기[己本旱岐], 임나왕(任那王) 고노마다간기[己能末多干岐/阿利斯等], 화·위북국조(火·葦北國造) 아리시또[阿利斯登] 또는 형부·차부(刑部· 部) 아리시또[阿利斯登] 등, 이 이름들은 전부 동일인의 이칭(異稱)이다.

    형부(刑部)란 법(法)을 관장(管掌)하고 차부( 部)란 병권(兵權)을 말한다. 형부·차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고대엔 곧 왕이다. 다시 보면 임나인=대가라왕자=대가라왕=대오왕=임나왕=화·위북국왕인 것이다.

    '오호[意富]'는 '오호[大]'와 같고 '고노[己能]'는 우리말 '큰[大]'의 이두표기 '근(近)'이 '오' 원순모음화현상을 일으켜 '곤'이 되고 다시 받침 없는 열도발음으로 '고노[己能/近]'가 된 것이다.

    〔모도(牟都), 마다[末多]계 이칭들〕

    그런데 여기서 '마다'계 이칭들을 보면 전부 같은 이름인데 발음과 한자가 약간씩 달리 표기되어있다. '마다[오]'와 '마다[末多]'는 같고 '모도[本]'와도 같은 말이다. 모대(牟大), 모도(牟都). 마다[派], 마다[岐], 무쯔[六], 무지[貴], 모지[持], 마다[股], 말통(末通), 모태(牟泰), 마동[薯童], 모태(慕泰/募泰)도 전부 같은 이름이다.

    최초에는 (ㅁ+아래아)(ㄷ+아래아)에서 파생된 기본적인 조합(組合)이 4개인데 '마다', '모도', '모다', '마도'로 발음이 분화되고 이 아래아의 발음의 특성을 이용하여 반도어와 열도어를 번갈아 사용하고, 교차하여 사용하고 수많은 조합을 만들어 쓴 것이다. 기·기와 사기·유사에 나오는 용례를 전부 열거해서 보자면

    가 ; '마다'는 마다[오]=마다[派]=마다[岐]=마다[股]=마다[末多]로 만들어 쓰고

    나 ; '모도'는 반도어 모도(牟都)를 같은 발음의 열도어 모도[本]로도 쓰고 다시 열도발음으로 읽어 무쯔[牟都]로 놓고 한자를 바꾸어 무쯔[六]로도 쓰고 여기서 다시 '으'와 '이'가 교체되어 쓰이는 현상을 이용하여 무지[貴]로 바꾸어 쓰기도 하고 이것을 또다시 모지[持]로도 쓴 것이다.

    다 ; '모다'는 복모음이 없는 열도어로 모다[牟大]로 놓고 모다[牟泰]를 만들어 쓰고 반도어로 발음이 같은 모태(慕泰/募泰)도 쓴 것이다.

    라 ; '마도'는 반도어를 열도식으로 받침 떼고 읽어서 마도[末通], 마도[薯童]로 쓴 것이다. 마도[薯童]는 '훈+음'으로 조합한 것에서 받침 없이 읽은 것이다. 받침을 붙이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마동'이다. * 마다[오]> '人 변에 입 口 밑에 하늘 天'이다.

    따라서 사기의 모대(牟大)나 모도(牟都), 말통(末通), 마동[薯童]은 전부 같은 이름이다. 조부와 이름이 같았다는 것은 대륙기록에도 나왔으니 증조부인 아라사등과 같은 이름을 쓴 사례를 보면 위에 나온 고사가 개화기에서 '오호마다'[大오]> '큰마다'> '近마다'가 되고 이것을 다시 열도어로 받침 없이 풀어 읽어 '고노마다'가 된다. 이것은 위의 계체기에 나오는 고노마다[己能末多]와 같고 신공기의 고노모도[己本]와도 같은 것이다. 대(大)나 태(太/泰)는 열도어에 복모음이 없어 '다'로 발음된다. '다(타)이'에서 '이'가 탈락했다고 봐도 된다. 성씨록을 보면

    飛鳥戶造; 出自百濟國主比有王男 琨伎王也 (河內國諸蕃)으로 나오고 곤기왕(琨伎王)은 사기에 나오는 곤지(昆支)와 동일인물로서 동성왕의 부왕이다. 같은 성씨를 더 찾아보면
    飛鳥戶造; 百濟國末多王之後也(河內國諸蕃)로 나오고 이 인물이 바로 동성왕이다. 역시 증조부인 아라사등의 이칭 마다[末多]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륙측 기록 중에는 모도(牟都)가 동성왕의 부왕의 이름이라고 한 것도 있다'한다.

    말하자면 이 모도(牟都)라는 이름은 가라왕족들의 수직돌림자인 것이다. 따라서 '여지승람'의 말통대왕능(末通大王陵)은 동성왕의 능인 것이다.

    비조호조(飛鳥戶造)란 동성왕의 후손들 성씨도 뜻을 풀어보면 "아스까의 문을 만든", "아스까의 문에 닿은", "아스까의 문턱시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사실상 가야계 동성왕이 열도출신으로서 대화왕조 네 왕 이후에 다섯 번째로 혜성 같이 등장하여 백제까지도 장악함으로써 대륙 두 백제군과 백제본국, 열도까지도 아우른 대제국을 이루었으나 부여씨 무령왕에게 암살 당하여 그 후로는 가야계 왕통이 끊겨버렸다.

    그 후 후국시대를 지나 백제가 망하고 열도에서 일본이란 나라로 새롭게 출발할 때 백제계왕실 입장에서 기술함으로써 무령왕시대는 아스까로 치고 "동성왕이 아스까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뜻에서 그 후손들 성씨에 그런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서 지어 붙여 창씨한 것이다. 동성왕은 기원 이후 우리 고대사에 있어 최고의 대왕이었다. 이 정도 되니 위나라의 수십 만 대군을 두 번이나 보기 좋게 추풍낙엽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자치통감'이나 '남제서'의 기록이 "아닌 땐 굴뚝에 난 연기"가 아닌 것이다.

    마다[末多]를 서기 본문에서 확인해 보면 서기 무열기 4년 시세조에 「百濟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遂除 以立島王 是爲武寧王」[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王立...후략]라고 나와 무령왕 직전의 왕이 동성대왕이고 마다[末多]왕으로 불렸던 것이다. 위에 열거한 '모도', '마다'의 변형이칭들은 서기·고사기·성씨록 등에 숱하게 등장한다

  • 3. [화제]일본 최초의 여왕은 가야인

    [뉴스메이커 2006-09-15 09:48]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 설화와 스리랑카 비자야왕 설화 ‘이렇게 닮았다’
    경북 고령읍 지산리에 있는 가야 고분군. <김영민 기자>
    사마태(邪馬台, 일본어발음은 ‘야마타이’) 비미호, 또는 비미크 (卑彌呼, 일본어 발음은 ‘히미코’) 일여(壹與, 일본어 발음은 ‘이요’) 임나(任那)(일본어 말음은 ‘미마나(彌摩那)’ ) 등.

    한국의 가야(伽倻)나 일본의 사마태국(邪馬台國)등 한일(韓日) 고대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명과 지명이 똑같이  나타나는 나라가 있다. 바로 기원전 6세기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비자야(Vijaya, 재임 기원전 543~504 )에 의해 싱할리 왕국을 수립한 스리랑카다.

    비자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승리(victory) 또는 정복(conquest)의 뜻에서 정복자(Conquerer)로 발전한 비자야 왕의 이야기는 아시아권 정복개국설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힌다. 한반도에서 수만리 멀리 떨어진 스리랑카의 역사와 지리에서도 거의 똑같은 내용이 있다. 기원전 6세기 스리랑카 최초 왕 비자야 설화와 수백년 뒤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金首露, 42~199)왕 설화를 비교하면 그 수수께끼가 풀린다. 비자야 왕의 설화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바꿔 넣으면 정확히 일치

    “인도 대륙 북동부가 고향인 한 공주가 사자와 사랑에 빠져 아들 비자야를 낳았다. 이 왕자는 행실이 불량하다고 추방당한다. 비자야는 인도땅을 떠나 추종자 700명과 함께 거북 모양의 선박에 올라타고 바다 건너 스리랑카 서부해안에 도착한다. 기원전 543년 비자야는 추종자에 의해 스리랑카 최초의 왕으로 추대되고 인도 최남부에 있는 타밀인의 판디야 왕국(Pandya Kingdom)에 왕비감을 청원, 타밀 공주 야쇼다라(Yasho dhara)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추종자도 타밀인 하녀와 결혼한다.”

    김수로왕의 설화는 주지하다시피 “기원 42년 가야지역 9부족의 추장인 9간(干)이하 수백명이 김해 구지봉(龜旨峰)에 모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하자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金盒)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나왔다. 반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은 모두 사람으로 변했는데 김수로는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이 돼 ‘수로(首露)’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 달 보름에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48년 인도에서 바다 건너 온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삼았다.”(필자는 허왕후를 타밀 출신으로 본다)

    두 설화를 비교하면 비자야 왕과 김수로왕 모두 거북과 관련있고 새 땅에 도래, 첫 왕국을 열었으며 추종자 수백명의 추대에 의해 초대 왕위에 올랐고 바다 건너 인도 땅에서 (타밀인) 왕비를 맞이한다는 점에 있어서 두 설화는 아주 비슷하다. 정복개국설화의 원형인 비자야 왕 이야기는 구전으로 동남아시아에 널리 펴졌으며 종국에는 한반도까지 영향을 끼쳐 수로왕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가야인이 이를 모방해 ‘대위법’에 의해 수로왕 설화 형성에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수로왕과 히미코 여왕 ‘부녀지간’

    수로왕(42~199) 장남인 금관가야 제2대 거등왕(199∼253) 사이, 즉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중반에 걸쳐 재임했던 일본 최초의 여왕 ‘비미호(卑彌呼)’는 비자야 왕 시절 국무총리를 의미하는 ‘비미호(Pimiho)’ 또는 ‘비미크’(Pimiku, 대부분의 언어에선 ‘ㅎ(h)’ 와 ‘ㅋ(k)’는 음성학적으로 호환 가능)와 일치한다. 또 그녀가 통치했던 ‘사마태 (邪馬台)’는 비자야 왕의 수도 탐바판니(Tambapanni)에 국무총리가 주도해 건설한 왕궁의 이름 ‘사마테(Samate), 또는 ‘사마타이(Samatai)’와 각각 일치한다.

    아울러 비미호 여왕이 죽고 잠시 남자 왕이 재위한 뒤 등극하는 여왕 ‘일여’(壹與, 일본어 발음은 ‘이요’)도 비자야왕의 조카로 스리랑카 제2대왕이 된 판두바사(Panduwasa, 재위 504~474 B.C.)의 부인 이름 ‘일여(Ilyo)’왕비와 일치한다.

    비자야 왕 이야기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나타나는 ‘비미호(비미크)’ ‘사마태’ ‘일여’ 등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중국의 ‘삼국지’ 기록에 나오는 명칭이 일본어발음이 아니라 우리말 발음과 똑같다는 것은 일본이 가야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있음을 시사한다.

    ‘사마태(邪馬台)’ 국의 한자 ‘邪’는 일본어 음독으로 ‘자’로, 훈독으론 ‘요코시마’로 읽으며 예외적으로 감기를 뜻하는 ‘風邪’만 ‘가제’로 읽는데 ‘야마’로 읽는 경우는 邪馬台뿐이다.

    당시 당시 최고 하이테크였던 철 제련 능력과 토기 생산기술를 갖춘 가야는 중국과 일본 등에 철을 수출하면서 동시에 기동력있는 항해술로 한반도 남부 및 일본 열도를 아우르는 막강한 해상세력으로 부상했다. 세계 최초로 고대 철제 말(馬)갑옷의 실물이 발견된 곳은 다름아닌 한반도 남단 가야다.


    이는 일본땅에 가야의 분국이 있었다는 북한학계 김석형(金錫亨, 1915∼1996) 교수가 1960년대에 내놓은 ‘삼한(三韓) 분국설(分國說)’과 일맥상통한다. 김교수의 제자인 조성희 박사도 ‘일본에서 조선 소국의 형성과 발전’(1990년)이라는 저서에서 혼슈(本州)섬 오카야마(岡山)현 기비(古備)지방에 가야의 소국이 있다고 주장했다.

    가야와 일본의 관계 연구에 평생을 전념한 재야사학자 이종기 선생(1929~1995)은 김수로왕의 딸 묘견(妙見)공주가 서기 103년 거북선을 타고 규슈(九州)로 건너가 남동생 선견(仙見)왕자와 또 다른 가락국을 세우니 그것이 야마타이국이며 히미코 여왕이라고 주장한다. 가야의 한반도 남부지역과 규슈지역에서 발견된 파형동기(巴形銅器)나 신어문(神魚文)등이 거의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이도흠 교수(한양대 국문학과, 한국학연구소장)도 “고대 일본 첫 여왕인 ‘히미코(卑彌呼)’가 가야국 공주로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의 두 딸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 근거로 “3세기 일본 규슈 사마태국은 가야와 같은 2모작을 했고, 철기공방이 있는 점 등으로 미뤄 이는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민들의 흔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특히 “일본은 한국 역사를 기술하면서 청동기시대 없이 석기시대에서 바로 철기시대로 이어진 것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기 712년과 720년에 잇따라 편찬된 ‘고사기(古事記)’ 및 ‘일본서기(日本書紀)’ 등 일본인이 펴낸 고대 일본역사서에 두 여왕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들이 왜국 토착민을 무너뜨리고 왕국을 건설한 해외 도래인일 가능성이 커 아예 삭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선 비미호와 일여 얘기를 없애고 비미호를 신공황후(神功皇后)로 동일화하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120년을 삽입하는 억지를 피우고 있다. 연대(年代)도 백제의 기년(紀年)과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어 양식있는 학자는 ‘일본서기’를 ‘사서(史書)’가 아니라 ‘사서(詐書)’라고 혹평한다.

    일본의 일부 학자는 신공황후를 히미코와 동일한 인물로 간주하지만, 이는 여러 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이유는 첫째 ‘삼국사기’는 히미코가 173년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했는데 ‘일본서기’ 기년으로 신공황후가 정권을 장악한 때는 201년이고, 2갑자 더한 연도로는 321년이라는 점이다.

    가야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된 대가야 박물관. <김영민 기자>
    일본 역사서에 여왕이 없는 이유

    둘째, ‘삼국지’는 히미코가 결혼하지 않고 남동생의 보좌로 왕위를 유지했다고 했는데, 신공황후는 제14대 주아이(仲哀) 천황의 황후이며, 그의 아들 오진(應神) 천황을 낳았다.

    셋째, 히미코는 공식적인 왜의 왕이고, 239년 중국의 위(魏)에서 내린 조서에도 ‘친위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공황후는 히미코와 동일 인물일 수 없다.

    경악할 일은 가야의 여러 작은 나라를 지칭하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다라국(多羅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졸마국(卒麻國) 걸찬국(乞飡國) 사이기국(斯二岐國) 염례국(稔禮國) 탁순(卓淳) 탁기탄(啄己呑) 등 12개 소국(小國)이름이 비자야왕과 타밀 출신 둘째 부인 야쇼다라(Yashodhara) 왕비 사이에 낳은 12 자녀 이름과 일치한다. 영어로 표기하면 Kara, Anla, Tara, Kocha, Chata, Sanbanha, Cholma, Kolchan, Saigi, Yomrye, Taksun, Takkitan이 된다. 가야지역 12개 소국의 이름이 비자야 왕의 자녀 이름과 일치한 것은 당시 가야인이 비자야 왕 이야기를 금과옥조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당시 일본이 369년부터 562년까지 가야지역을 정복, 통치했다며 ‘일본서기’에서만 언급돼 조작으로 간주되고 있는 임나(任那)일본부의 ‘임나’, 즉 일본어로 미마나(彌摩那)도 비자야 왕이 수도 탐바판니에서 동부 내륙으로 들어가 개척한 마을 임나(Eemna)와 미마나(Mimana)등 인접한 두 마을의 이름과 완전히 일치한다.

    따라서 임나(미마나)가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지역이 아니라 비미호 여왕의 통치 지역 ‘사마태국’ 부근에 있던 것이란 해석이 훨씬 합리적이다. 더구나 한 지역의 명칭을 두고 임나와 미마나 등 두 가지 한자표기가 존재한다는 것도 비자야 왕이 건설한 인접한 두 마을 이름을 하나로 묶으면서 나타난 결과로 분석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면 비자야 왕 설화가 어떻게 한반도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 산스크리트어로 ‘승리자’를 뜻하는 비자야 왕의 설화는 기원전 6세기 새로운 땅에 세운 정복왕조설화의 원형이라 동남아시아 등에 널리 퍼졌다. 당시 해양로는 동남아시아및 중국을 거쳐 타이완(臺灣) 위쪽에 흐르는 흑조(黑潮·쿠로시오)난류를 타면 쉽게 한반도 남부와 일본 서부 해안까지 연결될 수 있어 비자야 왕 이야기가 극동아시아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토론토/김정남 통신원 namkim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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