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일종씨 싯다르타 가 월종씨 인 사위국 빈비사라 태자 와 마주 쳤다.

싯다르타가  수행자 가 되어  거지 행색으로  혼자서 사위국을 지나 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빈비사라 태자 가 급히 말을 타고 싯다르타를 쫒아 갔다
 
" 싯다르타여!  그대의 나라가 소국이어서 욕심이 나지 않아 그대가 수행자 가 되고자 하는 것 이라면  그대의 나라와 나의 나라를 합치고 같이 다스립시다 "

이 말에 싯다르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 아니오 나는 그런 이유로 출가 하러는 게 아니라 영생을 얻기 위해 출가 하는 것이오 "

  "  그리고 그대는 월종씨 이고 나는 일종씨 요  그대의 나라와 나의 나라는 공동으로 다스려 질 수 없는 나라 라오 나의 길을 막지 마시오 나는 영생의 길을 찾을 것이오 " 
 싯다르타의 의중을 확인한 빈비사라는  내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 쉬고  싯다르타에게 말 하였다

" 그대가 만약 그 길을 얻으면 나부터 찾아 주시오  나는 그대를 적극 후원하고 그대의 가르침을 따르겠오 "
 
싯다르타의  대인상 에 항상 주눅 들었던 빈비사라는  카피라 도 자기 것이 될거라는 생각 으로 기쁜 마음이 되어

귀가 하였다
 
윗글에 나타난 것이 태양신 숭배의 일종씨 사카족  싯다르타 와  달 숭배의  월종씨 월지족 사위국 빈비사라 이다

월종씨는 후에 월지국이 된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월종씨는  사카족이 될 수 없다

실지로도  월지족이  비씨  158년 에 오스만 의 공격을 받아 사마르칸트로 쫒겨 가서 그 곳의 색종(사카)을 정벌하고
 
 규수 연안의 대하국(박트리아) 도 정복 하여 대왕국을 건설 한다  대왕국 의 3대  가니색가왕은 서쪽으로 페르시아  동쪽으로 중앙아시아 에 걸친 간다라 왕국 을 만들었다 <두산 세계대백과사전 참조 >

 이를 보면 월지국은 사카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색종은 사마르칸트에 있었고  대하는 규수 연안에 있었으므로

대하 가 색종이 아니라는 것 도 알 수 있다 

알타이문화권에 있던 월씨국이 오손에게 당햇다고 하는  말은  정확하게는 연나라 의  위만에게 속임수를 당하여 나라를 빼앗긴   기자조선의 [기준] 왕을 말하는 것이다
 
사마르 칸트는  마한의 여래비리국인데 기준은  여래비리국의  서가여래 족속인  색족을 정벌 한 것 이다

이 글을 따르면  오손이 연나라가  되는 것이고  위만은 열하 남쪽에 있던  월지국을  속임수로 뺏은 것이므로  위만조선은 열하의 남쪽 에  있었다고 봐야 된다 
 
따라서 가준의 기자조선이 월씨국이 되는 것이고  이 들이  간다라 왕국을  세우는 것이다

주> 사마르 칸트=  우즈백 공화국 동부에 있는 도시 제라프산 강에 가깝고 옛 사원이 있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스크랩출처 :대륙 조선사 연구회


8 세기 기원전 스키타이인(Scythai, 그리스 Σκύθαι). )들은 인도·이란 계통의 유목민족이다. 종족의 명칭도 ‘스쿠타(skuta-)’라는 고대 이란어에서 나왔으며, 이는 오늘날 영어에서 ‘shooter’와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스키타이는 ‘궁사’를 뜻하는 셈이었다. 스키타이, 사하, 선 모두 암 순록 투르크어 사가이온(Сагаион) 과 다루르어 수간(Sugan) 어원으로 부터 왔다.

Scythia, Saxa, and the Sǒn-Xian[Seon] (鮮: Soyon) all originate from the word for female reindeer—'Сагаион' in Turkish and 'Sugan' in Dagur.

스키타이 나 사이 XIYA 사람, 고대 페르시아 바다 호 해시의 키프로스의 키프로스면을 마시고, 키프로스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사카 (Saka, SECK 사람들)라고 ; 아슈쿠자이(Ashkuzai), 페르시아와 고대 인도라는 고대 아시리아는 "플러그"또는 "사카"라고, "한", 사카, Skuthoi 또는 Sacae 라는 고대 그리스, 중국 "역사 기록"이라고 기원전 3 세기, 중앙 아시아, 인도 - 유럽 언어 가족의 동부이란 유목민의 남부 러시아 초원에 위치 - 뾰족한 모자 키프로스 또는 Sakya이라고 사람들

유태인 아쉬케나지(Ashkenaz)는 스키타이와 어원이 같습니다. 유태인은 오히려 유태인이 스키타이인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지는 아르메니아입니다. 독일에 대한 중세 히브리어 이름이 아쉬케나즈이고, 라인강 유태인 공동체 이름입니다.  거란 키타이(Khitai)도 동일 어원이라는 견해가 있다.

1969~1970년에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라는 도시에서 멀지않은 이식 쿨 호수 부근에서 기원전 5~4세기에 속하는 다수의 고분이 발견되었고 여기서 소위 ‘황금인간’으로 알려진 유해가 발굴되었다. 이런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신장 165㎝로 추정되는 청년이 입고 있던 황금으로 된 의상 때문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4개의 화살이 꽂혀 있는 장식을 한 모자이다. 고대 페르시아 자료에는 ‘사카 티그라하우다(Saka Tigrahauda)'라는 종족이 언급되어 있는데, ‘티그라’는 화살을, ‘하우다’는 모자를 뜻하며, ‘사카’는 ‘스키타이’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종족명칭이다. 따라서 그것은 ‘화살 같은 모자를 쓴 사카족’을 뜻한다고 할 수 있으니, ‘황금인간’은 바로 이 종족에 속한 귀족청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민족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였다. 그는 ‘역사’라는 책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설화를 전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원래 아락세스강(오늘날의 볼가강) 동쪽에 살던 민족이었는데, 마사게태라는 민족의 공격을 받게 되자 서쪽으로 도망쳐 강을 건너서 흑해 북안(北岸·북쪽 해안)의 원주민 킴메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킴메르인들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치자 스키타이는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서 근동(近東)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스키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도 당시 근동의 강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즉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집단이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핫돈(기원전 680~669년)과 전투를 하여 패배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지칭한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당시 근동 지역에는 아시리아, 메디아, 우라르투 등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여 정치적으로 극도의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무대에 출현한 스키타이는 이들 국가와 때로는 연맹하고 때로는 적대하면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슈파카이의 아들인 파르타투아는 과거의 적이었던 에사르핫돈과 혼인동맹을 맺게 되었는데, 후일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메디아에 의해 포위 공격당할 때 그의 아들이 스키타이의 왕이 되어 원군을 이끌고 와서 메디아를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뒤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진했는데, 겁을 먹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선물을 갖고 올라와 스키타이의 국왕 마디에스에게 바치고 화평을 맺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각지를 호령하면서 여러 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의 국왕 퀴악사레스가 그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술에 잔뜩 취하게 한 뒤 몰살시켜 버림으로써 그들의 패권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고 한다.

사르마티아족에 흡수되었고 또 동쪽의 한 갈개는 파르티아와 대월지(大月地) 를 건설했습니다. 알란족 또는 라제스족으로 불렸고 로마 용병으로 활약했했고 코가서스 지역에 정착한 알란족의 후예로 오세트인으로 전해지고 있으면 파키스탄 및 아프카니스탄에 사는 파슈툰족의 동쪽에 이란계 백인의 후손이라 합니다. 백인 투르크인의 원조다.

근동을 떠난 스키타이인들은 다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 헤로도투스는 이들이 북방으로 귀환한 뒤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이 근동을 원정하는 동안 부인들이 현지의 노예들과 관계를 맺어 낳은 자식들이 귀환한 옛 주인에게 예속되기를 거부했고, 양측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노예들을 상대할 때는 칼이나 활이 아니라 채찍을 써야 한다는 누군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채찍을 휘둘렀더니 겁을 먹고 다시 복종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안 즉 돈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초원지역을 점령하고 국가를 건설할 때 군사적 정복과 함께 현지 주민과의 민족적 혼합도 동시에 일어났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흑해 북쪽 해안을 근거로 건설된 스키타이 국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선 ‘왕족 스키타이’라는 집단인데 최고의 지배층을 이루었고, 그 다음에는 일반 유목민으로 구성된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피정복민 ‘농경 스키타이’가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 구조는 스키타이 국가가 결코 단일한 종족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질적인 다양한 부족들의 결합체였음을 말해준다.

흑해 북안으로 돌아온 스키타이는 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 제국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다리우스 대제는 8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키타이를 잡기 위해서 초원을 헤맸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스키타이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비겁하게 도망만 다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는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원래 그렇다”는 조롱 섞인 답신뿐이었다. 식량이 고갈된 페르시아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타이는 초원에 물이 귀하므로 그들이 물이 있는 곳을 따라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맹추격을 시작했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초원의 지리에 어두워 물도 없는 엉뚱한 길로 가는 바람에 전멸 위기에서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외부의 위협을 극복하고 성취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추진된 그리스와의 교역은 스키타이 국가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스키타이의 발전과 번영은 그들이 남긴 고분에서 발견된 출토물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흔히 ‘쿠르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고분들은 흙과 돌로 쌓여진 작은 언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큰 것은 높이 20m에 이르며 그 아래에는 목곽분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들 스키타이 고분들은 특히 쿠반 반도(켈레르메스, 코스트롬스카야)와 크리미야 반도(쿨 오바, 체르톰리크, 솔로하)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그곳이 스키타이 국가의 핵심적인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유물 중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히 많아서 스키타이 귀족들의 재화와 부의 규모를 추측케 할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특유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은 흔히 스키타이 문화의 3대 요소로 마구, 무기, 동물양식을 드는데, 이 가운데 특히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동물양식이다. 이같은 스키타이 동물양식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학설이 대립되어 왔다. 하나는 남러시아 자생설이고, 또 하나는 서아시아 기원설이며,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이 있다. 스키타이의 유물들을 보면 남러시아나 서아시아의 영향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 전반 남시베리아의 투바공화국에 위치한 아르잔이라는 곳에서 직경 120m에 달하는 거대한 고분이 발견되었고, 거기서 출토된 유물들은 결정적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탄소 연대측정 결과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동물양식의 유물들보다 시기가 빠른 기원전 9세기 중후반으로 판명된 이 고분에서 후일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중요한 요소를 분명히 갖고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스키타이 국가의 중심지는 흑해 북안이었다. 그러나 동물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고대 유목문화는 유라시아 초원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고, 이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확인된다. 1940년대 후반 알타이 고산지대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지녔다. 적석총의 특징을 지닌 신라시대 고분들과의 유사성 때문에 우리나라 학자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파지리크 고분은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었지만, 묘실 안팎으로 스며든 이슬과 빗물이 결빙되어 고분 전체가 일종의 냉장고가 되어버려, 그 속에 있던 시신과 많은 부장품들이 전혀 부식되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다.

미라 처리되어 실로 꿰맨 흔적이 보이는 시신의 피부에는 동물양식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손가락 끝으로 눌러보면 피부가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순장된 말들과 거기에 씌웠던 말가면이 나왔고, 목제품·펠트·직물 등에도 스키타이 특유의 양식들이 보였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헤로도투스가 묘사한 바와 같이 제사의식을 행할 때 대마초를 흡입하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들이 그대로 발견되어, 그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하고 신빙성이 있는가 하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직조된 카펫,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거울 등도 발견되어 광범위한 교역의 존재도 짐작케 한다.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특징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더 서쪽의 몽골리아 초원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924년 울란바토르 북방 80㎞에 위치한 노인 울라 고분은 동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인들의 것으로, 여기서 나온 다량의 부장품 가운데 그리핀이 순록을 공격하는 모양이 수놓인 카펫이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직물이나 칠기 등이 다수 있고 그 중에는 전한 건평5년(기원전 2년)의 명문(銘文)을 갖고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흉노가 한나라와 조공 관계를 통해서 상당량의 물품들을 입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은 고비사막 남쪽의 내몽골 지역에서도 강하게 발견되고 있다. 흔히 ‘오르도스 청동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초원 청동기 제품들 중에는 맹수가 초식동물을 덮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원 전 7~1세기 스키타이 세계의 문화

족/문화명

지역

정치, 문화

사르마타이

스키타이 동쪽에 위치

남우랄지방과 우랄강 동쪽 스탶지역

*알타이 산맥에서 카자흐스탄의 스탶국가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이들과 밀접하게 관련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생활과 경제상황이 스키타이와 비슷하며 집을 갖지 않고 마차생활을 한다.

-스키타이를 공격하고 동쪽으로부터 내습한 阿蘭인에 의해 민족적 쇠망을 가져온다.

-무기, 마구, 의장이 스키타이와 유사

-전기 : 스키타이 색채가 엷어지면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영향이 많이 나타난다.   페르시아식의 동물문, 괴수문과 함께 기하문이 유행, 말기에 가서는 그리스로마, 게르만과의 접촉을 통해 보석상감세공을 발달시킨다.   스키타이 동물의장과 오리엔트의 괴수의장이 결합되어 사르마타이 미술 특유의 동물투쟁문, 괴수문 등의 황금식판을 만들어낸다.

-중기 : 정치, 군사적으로 크게 연맹하여 중장비 기마전술을 채용하면서 번성.   후기에는 부족중의 하나인 아란이 사르마티아를 대표

塞, 烏孫

중앙아시아 동부

-二枝式말재갈, 새모양의 교구, 스키타이풍의 山羊形이나 態形의 飾具, 단추 등의 청동기, 청동제, 철제, 골제로 된 兩翼 내지 삼각鏃, 목제의 장족, 각종 珠類

-페르가나 지방 : 제사용으로 보이는 동물형 장식이 붙은 소반, 솥 등의 청동기 출토

-세가지 지방적 특색

*천산 : 남시베리아의 문화의 양향이 오래 지속

*페르가나 : 남방 아나우 문화와의 혼합

*시르 다리아 : 맛사게타이, 사르마타이 문화의 영향

⇒오손, 큐샨, 康居로 나뉨

오손은 유목적 전통을 잘 유지, 스키타이적 남시베리아와 관련 깊다.

쿠샨은 농경적 환경 속에서 발전

강거는 정주와 유목으로 나뉘어져 정주자는 아랄해 동안의 맛사게타이, 사르마타이 등과 혼합되며 한편, 색의 전통을 갖는 사람들은 중부 카자흐스탄에서 유목을 계속했다.

타가르문화

남시베리아 미누신스크분지

-카라수크 문화 계승 : 카라수크 문화에서 갖가지 동물표현이 이루어져, 타가르문화에 이르러 현저히 발달.

-흑해연안의 스키타이 문화와 가장 유사

분묘양식과 부장품을 가지고 3기로 나뉜다.

*제 2기 : 동물의장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산양, 사슴 등의 동물이 透彫나 입체상으로 표현되어 무기들을 장식한 예가 많다.   스키타이식 靑銅鍑 제작

*제 3기 : 철기제작 일반화.   스키타이 전기 이지식 말재갈 등 마구나 동물의장의 청동식판 등 스키타이풍 기마문화 번성

마이밀문화

 

알타이 산지의 타갈 문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성립

타갈 문화와 동류의 문화, 약간의 지방색을 띤다.

스키타이풍 유목기마민의 문화-청동제 단검, 장검, 圓鏡, 이지식말재갈, 동물의장

파지릭문화(전5~4세기)

알타이 산지

死者의 문신 : 공상적인 괴수문-스키타이 장례의식을 방영

묘실내에 대마의 열매를 넣은 청동향로 발견

애마의 부장-몽고마, 서방산의 밤색털인 아리아말

정령(전3~5세기)

바이칼호 남쪽에서 예니세이강 상류(북외몽고)

고분에서 스키타이식 삼익족, 삼각족, 鍑, 이지식말재갈, 칼, 스키타이풍의 동물의장 출토

중국문화의 영향-왕의 장신구, 전한의 화폐, 銅印

수원청동기문화(전5~전2세기)

남몽고의 오르도스

유목기마민족의 색채가 극히 강하게 나타남

-전5~전2세기:스키타이식 복, 아키타케스형 단검, 이지시 말재갈, 동복, 스키타이식 동물의장 식판, 칼, 투구, 갑옷, 馬面

-동물문은 스키타이 영향을 받은 흉노문화

타쉬투크문화(전1~5세기)

미누신스크 지방

타가르문화 후에 일어난 문화

타가르문화를 기반으로 중국의 하문화, 몽고의 흉노문화의 영향으로 성립

사자의 얼굴에서 떠내는 가면:백색인종과 황색인종의 혼혈형을 보여주고 있다. 분묘 부장품에서 보면, 지배층은 유목기마민이고 피지배층은 농경민족.

전 1세기경의 한 대 유적이 발견-문화교류

일찍 청동가공 기술발달-동물상를 예술적 사실적으로 표현한 무기나 장식품은 스키타이, 사르마타이 양식과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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