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설날이라 부르는 타밀족 타향서 ‘4월의 설맞이’

일요일인 13일 서울대 학생회관 지하 강당. 까무잡잡한 피부에 유난히 커다란 눈망울과 짙은 쌍꺼풀을 가진 아이가 또렷한 발음으로 “엄마”,“아빠” 부른다. 아이의 부름을 들은 엄마는 아이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답한다. 이들은 인도의 한 종족인 타밀인들이다.‘타밀력’으로 새해 첫날인 이날,180여명의 타밀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타밀의 설날’ 행사를 가졌다.

▲ 한국에 거주하는 타밀인들이 ‘타밀력’으로 새해 첫날인 13일 서울대 학생회관에 모여 ‘설날’ 잔치를 벌였다. 타밀족의 한 어린이가 전통무용을 뽐내고 있다.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타밀인들은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 북부에 흩어져 산다.
타밀어는 국어와 어순도 같고 발음이 유사한 단어가 수백개에 이른다.‘엄마’,‘아빠’는 발음이 아예 똑같고 ‘이빨’은 ‘빨’,‘이리와’는 ‘잉게와’,‘사람’은 ‘사라르’,‘보름달’은 ‘보오르느미’로 발음한다. 이들은 옛날에는 설날을 우리와 같이 ‘설날’로 불렀고 요즘에는 ‘무달날’로 부른다.

타밀어 전문가들은 이런 유사성이 가야의 김수로왕비인 허황옥이 타밀 지방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문화도 비슷한 점이 많다. 손윗사람에게 ‘형’이나 ‘선배’ 등의 호칭 없이 직접 이름을 부르면 예의에 어긋난다. 대부분 중매 결혼을 해 과거 우리나라와 같이 결혼 전에 신랑과 신부의 얼굴을 모르는 일이 허다하다. 궁합과 사주도 본다. 우리의 한가위와 비슷한 ‘디파왈리’라는 명절을 10∼11월에 지내기도 한다.

현재 국내에 머물고 있는 타밀인들은 2000여명. 대부분 전문직과 박사급 연구원들로 IT기업이나 카이스트 등에서 연구활동을 한다.2003년 ‘코리아 타밀 친구’라는 모임을 만든 락시미파티 라오(29)는 “한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타밀인들이 ‘설날’을 맞아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얘기도 나누고 음식도 해먹으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삭이기 위해 모인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 전통 민속춤인 ‘바라사나티야’를 추기도 하고 한 사람씩 마이크를 들고 타국 생활의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IT업체에서 일한다는 밧갈(25)은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으면 주변과 앞의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해가는 모습으로 인종차별을 드러낸다.”면서 “피부가 까맣다고 ‘태도가 나쁠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같은 아시아인으로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target=_blank>nomad@seoul.co.kr

■용어클릭

타밀인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 동북부에 거주하는 민족이다. 인도의 28주 가운데 하나로 타밀주의 인구는 6000만명에 이르지만 타밀족은 일부에 불과하다. 타밀어를 중심으로 강력한 문화권을 형성했지만 단일 민족 정부를 이루지는 못했고 늘 다른 국가의 통치권 아래 있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74만명 정도 흩어져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서울신문 2008-04-14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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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온 단체는 스리랑카의 타밀 엘람 해방호랑이(LTTE)이다. 이 단체는 무력으로 타밀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반군조직이다. ‘엘람’은 타밀어로 스리랑카를 의미하며, 호랑이는 스리랑카 국기에도 등장하는 싱할리족의 상징인 사자에 대응되는 개념이자 타밀족 옛 왕조의 전통문양이다.

이 단체는 현재 병력이 1만명을 넘고, 10여척의 함정에 5대의 항공기까지 보유하고 있다. 이 단체는 올 들어 지난 6년간 지켜왔던 스리랑카 정부와의 휴전 협정을 깨고 다시 무력 투쟁에 들어갔다. 스리랑카의 인구는 약 2000만명으로 이 중 75%가 불교를 믿는 싱할리족이고, 힌두교를 믿는 토착 타밀족과 영국 식민통치 시절 인도 남부에서 차 농장 노동자로 대거 유입된 인도의 타밀족을 합쳐 15%를 차지하고 있다. 1948년 독립 이후 다수의 힘으로 정권을 장악한 싱할리족은 현재까지 소수파인 타밀족에 대한 차별 정책을 펴왔다. 이 때문에 1983년부터 2002년 휴전이 이뤄지기 전까지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 반군의 전투로 7만여명이 숨지기도 했다.

노르웨이의 중재로 양측이 당시 타협한 휴전 협정의 골자는 타밀 반군이 독립국가 건설 노선을 버리는 대신 스리랑카 동부와 북부 지역을 자치 지역으로 한다는 일종의 연방제였다. 하지만 타밀 반군은 자신들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스리랑카 정부를 의심하면서 다시 독립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이고 있다. 양측의 휴전 협정이 폐기된 이후 지금까지 타밀 반군의 테러 공격과 스리랑카 정부군의 보복 등으로 300여명이 사망하는 등 갈수록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 ▒

3. [화제]일본 최초의 여왕은 가야인

[뉴스메이커 2006-09-15 09:48]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 설화와 스리랑카 비자야왕 설화 ‘이렇게 닮았다’
경북 고령읍 지산리에 있는 가야 고분군. <김영민 기자>
사마태(邪馬台, 일본어발음은 ‘야마타이’) 비미호, 또는 비미크 (卑彌呼, 일본어 발음은 ‘히미코’) 일여(壹與, 일본어 발음은 ‘이요’) 임나(任那)(일본어 말음은 ‘미마나(彌摩那)’ ) 등.

한국의 가야(伽倻)나 일본의 사마태국(邪馬台國)등 한일(韓日) 고대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명과 지명이 똑같이  나타나는 나라가 있다. 바로 기원전 6세기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비자야(Vijaya, 재임 기원전 543~504 )에 의해 싱할리 왕국을 수립한 스리랑카다.

비자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승리(victory) 또는 정복(conquest)의 뜻에서 정복자(Conquerer)로 발전한 비자야 왕의 이야기는 아시아권 정복개국설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힌다. 한반도에서 수만리 멀리 떨어진 스리랑카의 역사와 지리에서도 거의 똑같은 내용이 있다. 기원전 6세기 스리랑카 최초 왕 비자야 설화와 수백년 뒤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金首露, 42~199)왕 설화를 비교하면 그 수수께끼가 풀린다. 비자야 왕의 설화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바꿔 넣으면 정확히 일치

“인도 대륙 북동부가 고향인 한 공주가 사자와 사랑에 빠져 아들 비자야를 낳았다. 이 왕자는 행실이 불량하다고 추방당한다. 비자야는 인도땅을 떠나 추종자 700명과 함께 거북 모양의 선박에 올라타고 바다 건너 스리랑카 서부해안에 도착한다. 기원전 543년 비자야는 추종자에 의해 스리랑카 최초의 왕으로 추대되고 인도 최남부에 있는 타밀인의 판디야 왕국(Pandya Kingdom)에 왕비감을 청원, 타밀 공주 야쇼다라(Yasho dhara)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추종자도 타밀인 하녀와 결혼한다.”

김수로왕의 설화는 주지하다시피 “기원 42년 가야지역 9부족의 추장인 9간(干)이하 수백명이 김해 구지봉(龜旨峰)에 모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하자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金盒)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나왔다. 반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은 모두 사람으로 변했는데 김수로는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이 돼 ‘수로(首露)’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 달 보름에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48년 인도에서 바다 건너 온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삼았다.”(필자는 허왕후를 타밀 출신으로 본다)

두 설화를 비교하면 비자야 왕과 김수로왕 모두 거북과 관련있고 새 땅에 도래, 첫 왕국을 열었으며 추종자 수백명의 추대에 의해 초대 왕위에 올랐고 바다 건너 인도 땅에서 (타밀인) 왕비를 맞이한다는 점에 있어서 두 설화는 아주 비슷하다. 정복개국설화의 원형인 비자야 왕 이야기는 구전으로 동남아시아에 널리 펴졌으며 종국에는 한반도까지 영향을 끼쳐 수로왕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가야인이 이를 모방해 ‘대위법’에 의해 수로왕 설화 형성에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수로왕과 히미코 여왕 ‘부녀지간’

수로왕(42~199) 장남인 금관가야 제2대 거등왕(199∼253) 사이, 즉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중반에 걸쳐 재임했던 일본 최초의 여왕 ‘비미호(卑彌呼)’는 비자야 왕 시절 국무총리를 의미하는 ‘비미호(Pimiho)’ 또는 ‘비미크’(Pimiku, 대부분의 언어에선 ‘ㅎ(h)’ 와 ‘ㅋ(k)’는 음성학적으로 호환 가능)와 일치한다. 또 그녀가 통치했던 ‘사마태 (邪馬台)’는 비자야 왕의 수도 탐바판니(Tambapanni)에 국무총리가 주도해 건설한 왕궁의 이름 ‘사마테(Samate), 또는 ‘사마타이(Samatai)’와 각각 일치한다.

아울러 비미호 여왕이 죽고 잠시 남자 왕이 재위한 뒤 등극하는 여왕 ‘일여’(壹與, 일본어 발음은 ‘이요’)도 비자야왕의 조카로 스리랑카 제2대왕이 된 판두바사(Panduwasa, 재위 504~474 B.C.)의 부인 이름 ‘일여(Ilyo)’왕비와 일치한다.

비자야 왕 이야기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나타나는 ‘비미호(비미크)’ ‘사마태’ ‘일여’ 등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중국의 ‘삼국지’ 기록에 나오는 명칭이 일본어발음이 아니라 우리말 발음과 똑같다는 것은 일본이 가야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있음을 시사한다.

‘사마태(邪馬台)’ 국의 한자 ‘邪’는 일본어 음독으로 ‘자’로, 훈독으론 ‘요코시마’로 읽으며 예외적으로 감기를 뜻하는 ‘風邪’만 ‘가제’로 읽는데 ‘야마’로 읽는 경우는 邪馬台뿐이다.

당시 당시 최고 하이테크였던 철 제련 능력과 토기 생산기술를 갖춘 가야는 중국과 일본 등에 철을 수출하면서 동시에 기동력있는 항해술로 한반도 남부 및 일본 열도를 아우르는 막강한 해상세력으로 부상했다. 세계 최초로 고대 철제 말(馬)갑옷의 실물이 발견된 곳은 다름아닌 한반도 남단 가야다.


이는 일본땅에 가야의 분국이 있었다는 북한학계 김석형(金錫亨, 1915∼1996) 교수가 1960년대에 내놓은 ‘삼한(三韓) 분국설(分國說)’과 일맥상통한다. 김교수의 제자인 조성희 박사도 ‘일본에서 조선 소국의 형성과 발전’(1990년)이라는 저서에서 혼슈(本州)섬 오카야마(岡山)현 기비(古備)지방에 가야의 소국이 있다고 주장했다.

가야와 일본의 관계 연구에 평생을 전념한 재야사학자 이종기 선생(1929~1995)은 김수로왕의 딸 묘견(妙見)공주가 서기 103년 거북선을 타고 규슈(九州)로 건너가 남동생 선견(仙見)왕자와 또 다른 가락국을 세우니 그것이 야마타이국이며 히미코 여왕이라고 주장한다. 가야의 한반도 남부지역과 규슈지역에서 발견된 파형동기(巴形銅器)나 신어문(神魚文)등이 거의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이도흠 교수(한양대 국문학과, 한국학연구소장)도 “고대 일본 첫 여왕인 ‘히미코(卑彌呼)’가 가야국 공주로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의 두 딸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 근거로 “3세기 일본 규슈 사마태국은 가야와 같은 2모작을 했고, 철기공방이 있는 점 등으로 미뤄 이는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민들의 흔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특히 “일본은 한국 역사를 기술하면서 청동기시대 없이 석기시대에서 바로 철기시대로 이어진 것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기 712년과 720년에 잇따라 편찬된 ‘고사기(古事記)’ 및 ‘일본서기(日本書紀)’ 등 일본인이 펴낸 고대 일본역사서에 두 여왕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들이 왜국 토착민을 무너뜨리고 왕국을 건설한 해외 도래인일 가능성이 커 아예 삭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선 비미호와 일여 얘기를 없애고 비미호를 신공황후(神功皇后)로 동일화하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120년을 삽입하는 억지를 피우고 있다. 연대(年代)도 백제의 기년(紀年)과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어 양식있는 학자는 ‘일본서기’를 ‘사서(史書)’가 아니라 ‘사서(詐書)’라고 혹평한다.

일본의 일부 학자는 신공황후를 히미코와 동일한 인물로 간주하지만, 이는 여러 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이유는 첫째 ‘삼국사기’는 히미코가 173년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했는데 ‘일본서기’ 기년으로 신공황후가 정권을 장악한 때는 201년이고, 2갑자 더한 연도로는 321년이라는 점이다.

가야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된 대가야 박물관. <김영민 기자>
일본 역사서에 여왕이 없는 이유

둘째, ‘삼국지’는 히미코가 결혼하지 않고 남동생의 보좌로 왕위를 유지했다고 했는데, 신공황후는 제14대 주아이(仲哀) 천황의 황후이며, 그의 아들 오진(應神) 천황을 낳았다.

셋째, 히미코는 공식적인 왜의 왕이고, 239년 중국의 위(魏)에서 내린 조서에도 ‘친위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공황후는 히미코와 동일 인물일 수 없다.

경악할 일은 가야의 여러 작은 나라를 지칭하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다라국(多羅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졸마국(卒麻國) 걸찬국(乞飡國) 사이기국(斯二岐國) 염례국(稔禮國) 탁순(卓淳) 탁기탄(啄己呑) 등 12개 소국(小國)이름이 비자야왕과 타밀 출신 둘째 부인 야쇼다라(Yashodhara) 왕비 사이에 낳은 12 자녀 이름과 일치한다. 영어로 표기하면 Kara, Anla, Tara, Kocha, Chata, Sanbanha, Cholma, Kolchan, Saigi, Yomrye, Taksun, Takkitan이 된다. 가야지역 12개 소국의 이름이 비자야 왕의 자녀 이름과 일치한 것은 당시 가야인이 비자야 왕 이야기를 금과옥조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당시 일본이 369년부터 562년까지 가야지역을 정복, 통치했다며 ‘일본서기’에서만 언급돼 조작으로 간주되고 있는 임나(任那)일본부의 ‘임나’, 즉 일본어로 미마나(彌摩那)도 비자야 왕이 수도 탐바판니에서 동부 내륙으로 들어가 개척한 마을 임나(Eemna)와 미마나(Mimana)등 인접한 두 마을의 이름과 완전히 일치한다.

따라서 임나(미마나)가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지역이 아니라 비미호 여왕의 통치 지역 ‘사마태국’ 부근에 있던 것이란 해석이 훨씬 합리적이다. 더구나 한 지역의 명칭을 두고 임나와 미마나 등 두 가지 한자표기가 존재한다는 것도 비자야 왕이 건설한 인접한 두 마을 이름을 하나로 묶으면서 나타난 결과로 분석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면 비자야 왕 설화가 어떻게 한반도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 산스크리트어로 ‘승리자’를 뜻하는 비자야 왕의 설화는 기원전 6세기 새로운 땅에 세운 정복왕조설화의 원형이라 동남아시아 등에 널리 퍼졌다. 당시 해양로는 동남아시아및 중국을 거쳐 타이완(臺灣) 위쪽에 흐르는 흑조(黑潮·쿠로시오)난류를 타면 쉽게 한반도 남부와 일본 서부 해안까지 연결될 수 있어 비자야 왕 이야기가 극동아시아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토론토/김정남 통신원 namkim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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