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목(도천마을) 하씨(河氏), 남도부(南到釜) 하준수(河準洙)

 

영화 ’곡성(哭聲)’ 의 촬영지가 우루목 마을인데 마을 모양이 소의 목과 닮아서 붙여 쳤고

우동(牛洞)에서 일제 강점기 도천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루목 마을 표지석

곡성 촬영 집

  도천마을은 진양 하륜(河崙)의 후손 양암공(陽菴公) 하활(河活, 1508-1580)이 진주 단목에서 옮겨와 번성한 곳으로 지금까지 ‘우루목 하씨’라는 명성을 얻은 진양하씨 집성촌이다.    이곳에서 동해남부 빨치산 사령관 남도부(南到釜), 본명은 하준수(河準洙, 1921-1955)가 태어났고 생가도 있다.    남도부(南道富)가 아니라 남도부(南到釜)라고 친구인 윤인호(尹仁浩, 1922~2004) 곤충연구가 증언했는데 진주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등학교) 1년 후배이고 일본 유학시 친하게 지냈다.

하륜부조묘

  거창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한 양암공파(陽菴公派) 하동현(河東鉉) 회장은 종친인 하준수 집안에 대해.
하준수의 부친 하종택(河鍾澤 )은 병곡면장 출신으로 천석꾼 부자였다고 한다. 하준수의 생가는 지금은 본채와 부속 건물 하나가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원래는 기와집 열 두 채로 이뤄진, 450평 규모의 큰 집이었다고 한다.  이 우루목 마을에 하종택 땅을 안 밟고 댕기는 데가 없었다고 한다.

  남도부는 장인 사근부자 이민종의 딸 아내 이귀영과 결혼하였고 슬하 1남2녀를 두었다.  한국전쟁중 신불산중심으로 경남동부, 경북남부에서 빨치산을 벌였고 부하 차진철(본명 성일기)의 밀고로 대구에서 특무대 김창룡에  체포된 뒤 1955년  8월 서울 수색 육군사형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한국전쟁 후 남도부의 자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함양문화 제12호》에 실린 구본갑의 ‘지리산 빨치산 하준수 스토리’에 “하준수의 아내(함양여성동맹위원장)는 동란 후 북한으로 들어가 행방불명되었고, 아들 상영은 연좌제 때문에 한정치산자가 되었다”고 적었다.

  이 글에 나오는 하준수의 자녀들과 관련된 내용들을 좀 더 정리하여 보면, 남도부가 사형을 당하기 며칠 전 맏딸 인자를 면회실로 불러 마지막 유언을 했다. “인자야... 아버지가 없어도 절대로 기죽고 살아서는 안 된다. 동생(경자, 상영)들을 잘 데리고 살아다오” 그 후 맏딸 인자씨는 함양 삼일여관(현 삼일장) 며느리로 들어갔다. 시댁 배려로 경자, 상영 두 남매는 사돈집에서 더부살이를 할 수 있었다.

   연좌제(緣坐制)란 범죄인과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 특히 친족에게 연대 책임을 지게하고 처벌하는 제도이다.  6·25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에서 사상범(빨치산 포함), 부역자, 월북인사 등의 친족에게 군대를 갈 수 없었고 취업이나 공직에도 나갈 수 없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1980년 헌법은 연좌제 폐지를 헌법으로 규정했다.

  남도부 아들 하상영은1948년 9월 11일 출생으로 병곡, 함양국민학교,함양중학교(16회), 함양농업 고등학교(현 함안제일고등학교)  그리고 외지 서울로 가서 경기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체육과를 졸업했다.  교사로 퇴임한 김병호(1947년, 뇌산마을 출생)님은 남도부 고모가 작은 할머니이고 남도부 아들과는 함안중, 함안농고 동기인데  ‘빨갱이 자식’ 이라 놀려대기에,  견디다 못 해 서울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  

하상영씨는 회사 대표가 되어 경영을 했는데 다음은 매일경제신문에 실린 상품광고 내용이다.

  ‘핫·콜드·백’  상영화학 제품  최초입력 1972.06.24

   핫·콜드·백  정신·신경피로 덜어줘 인체엔 부작용 없어 상영화학제품  정신및 신경성 피로를 덜어주는데 도움이 되는「핫·콜드·백」어 여름철 수요에 대비, 시판에 주력하고 나섰다.  상영화학 (사장 하상영) 제품. 해저식물과 광물질을 혼합하여 특수 제작된 무미, 무취, 무변질의 것으로 인체에 부작용이 없다는 게 특징. 랭용과 온용으로 공용할 수 있다.  상영화학은 발명 및 의장 특허를 마쳤는데 제품 종류는 3가지. 판매가격은 1호가 2천원, 2호1천5백원, 3호1천2백원. (연락처?7671)

  하상영씨는 산청함양선거구에13대, 14대,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모두 낙선하였다. 그가 이렇게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알리고자 했던 것은 그의 말대로

“아버지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역사가 해줘야 될낀데. 아버지를 좌익분자라고 하지 말고 민족주의자라고 하소. 그기 맞소. 외세개입을 온몸으로 막은 분을 함부로 매도하면 쓰겠소?” 라는 절규였다. 

남도부 가묘와 구연철옹  2017. 10. 22 [인용 : 네이버 블로그 진달래산천]

사형 집행을 유족에게 알리지 않아 시신을 수습하지 못 하고 1979년 여름, 상여를 메고, 만장을 들고,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룬 후 참나무로 만든 관을 묻었다고 했다. 일대 마을 주민은 물론 함양군수가 참여했다.

  구연철 선생은 “아직도 저에게는 영원한 사령관이시다. 남도부 사령관은 감자를 즐겨 드셨다.

그래서 이번에 감자를삶아 왔다.” 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재경(서울) 경상남도 도민회 제 12회 친선 바둑대회  2014년 5월 24일(토)에서 하상영(함양)씨는 장려상을 받았다.  하상민 어르신은 함양중 11회를 졸업하고 15살에 외지 서울로 가서 2016년 봄, 60여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신불산 빨치산 게릴라 특수부대

  한국 전쟁 기간 중에 부산(釜山)과 근접한 영남알프스 신불산(神佛山)을 중심으로 빨치산이 활동했다는 것은 왠지 낯설게만 느껴진다.  신불산 빨치산은 부산을 점령하는 것은 목표로 울산, 양산, 동래, 밀양, 청도에서 활동을 하였다.

  빨치산은 파르티잔(Partisan)으로 비정규군 유격요원, 게릴라(Guerrilla)를 말한다. 또는 공비(共匪)라고도 하는데 공산당 비적(匪賊)을 줄인 말이고 비적은 무기를 지니고 떼를 지어 다니며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도둑을 말한다.  참고로 조선말기 동학운동당를 동비(東匪)하고 하였다.

   빨치산은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활동한 특수부대과 비교가 안되지만 현재 특수부대로 볼 수 있겠다.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구빨치와 신빨치로 나뉘는데 구빨치는 미군정의 탄압과 우익세력에 밀려나 무장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는데, 야산대(野山隊)로 라고 불렸다.

 1. 한국 전쟁(1950년 6월 25일) 전 빨치산과 토벌대(討伐隊; 진압대)

 빨치산 야산대가 1949년 9월 총공세를 벌인 후, 군대가 투입되어 군인·경찰·시민 합동작전으로 확대해 상당한 전과를 내었다.

 1.1 울산경찰서 옥동 문수산 토벌

그림1] 1949년 3월 5일 <민주중보> ‘울산방면 무장폭도 추격 중’ 신문기사

 23연대 김종원(金宗元, 1922 ~ 1964) 연대장은 경남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참여했다. 1949년 1월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에서 박덕수(朴德守, 경남 동부지역 야산대 총사령관)를 검거 사살한다.

1.2 신불산 지구 전투결과

날짜 :  1949년 10월 24일 ~ 26일 (3일간)

장소 :  신불산 방면 울산군 상북면 이천리 죽전부락, 두서면 대종부락

군대 :  3사단 23연대 1대대 소령 서정철, 경남경찰국 보안과장 총경 한학수

         2개 소대, 전투경찰 9개 소대

결과 : 사살 5명, 생포 5명  [출처: 부산일보  1949-11-01]

 1.3 울산 서부지구 전투사령부 군경민(軍警民) 작전 작전결과

날짜 :  1949년 11월 24일 ~ 27일(3일간)

장소 : 신불산 및 간월산

주관 : 울산 서부지구 전투사령부  군경합동작전

결과 : 9개소 아집트 파괴 (남로당 경남도당 동부지구 야산대 본부 포함)

15명 사살(그중 여자 3명), 생포 1명

 1.4 신불산 지구 전투결과

 날짜 :  1950년 2월 24일 ~ 27일(3일간)

장소 : 양산시 원동면 선리 시살등(신불산 남쪽, 신동대굴(신동대 동굴))

김종원(金宗元)은 356부대(三五六部隊), 일명 맹호부대장으로 양산초등학교에 주둔하던 1950년 2월이른 봄, 신불산 일원을 토벌하면서 양산 원동면 대리 앞산에서 사살한 29명의 빨치산 목을 잘라 가마니에 담아 와서 양산군청 동편 목화 창고 앞 광장에 늘어놓고 전시를 하기도 하였다. 

 2. 한국 전쟁(1950년 6월 25일) 후 빨치산과 토벌대(討伐隊; 진압대)

 2.1 동해남부부대

   1) 기본현황

그림2] 동해남부 빨치산 이동 경로

  북한 강동정치학원 군사교관 출신으로 하준수(가명 ‘남도부(南到釜))’ 부대장이 김일성 수상의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7군단 소속 동해남부부대(300여명)을 지휘하여 1950년 6월 24일 강원도 속초항에서 배를 타고 6월 25일 새벽, 임원진臨院津(현재 삼척시 원덕읍 임원항)에 상륙하여 태백산맥을 따라 남하는 중 7월1일 영덕 칠보산 700고지에서 3사단 23연대(중령 김종원) 전투와 포항 구룡산 전투를 거쳐 7월 15일 신불산 배냇골에 도착한다.

그림 3]   동해남부부대 조직도

그림3]남도부부대조직도_20200425.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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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동해남부부대 조직도 및 활동지역

동해남부 사령관 남도부 발행 원호증 (소설가 박도 선생 제공)

원호증은 약탈한 물품에 대한 확인증으로 해방통일 후에 값아 주겠다는 내용이다.

* 차진철, 본명 성일기(成日耆)로 북한 김정일의 아내 성혜림의 처남, ‘북위38도선’ 책 펴냄

* 추일(秋一), 본명 김형식(金瀅植, 1926~2016)은 조부 독립운동가 김용응(金鏞應,1870∼1945)이고 출옥 후 고향 충북 괴산에서 화가(畵家) 활동함.

* 구연철 1931년 양산군 하북면 출생. 대신중학교(서울) 1948년 졸업, 1950년 7월 신불산 입산 ‘신불산’ 책 펴냄    * 남명근 :  38 연선부대 11지대장 출신

* 홍길동 본명이 서장윤(1923년 출생) 울주군 범서면 다운리 출신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사망시 같은 이름으로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 [참고 ‘영남알프스’, ‘빨치산 남도부, 신불산에 오다’, 128쪽, 저자 이병길]   

2) 전투 실적

  (1) 포항 영일 비행장 공격

그림4] 1950년 8월 10일 포항안강지구 지도

  1950년 8월 11일 01시 20분경, 포항 영일 비행장(위치 : 포항 남구 동해면 도구리)을 공격하기 위해 조선인민군 제766부 및 동해남부유격대가 형산강 남쪽 터널고지(형산兄山 256m고지)에 매복하여 미군 2사단 9연대 3대대 K중대와 미 15포병대대 C포대 일부병력을 공격하여 70여명 인명 손실을 입혔다. 

  그리하여 미군 후발부대는 경주로 철수하고 보고를 받은 브래들리 준장은 3대대 1중대를 출동시켰으나 인민군 766부대 매복으로 기습을 받아 그곳에 고착되었다. 항공지원 요청으로 40전투비행대대 F-51 무스탕 전투기 1개 편대가 출격하여 터널고지대에 집결해 있던 적을 강타하고 이와 함께 미 73 중전차대대(M26퍼싱) 전차소대 다리고(Joseph R. Darrigo) 대위가 터널고지 부근까지 진출하여 기관총사격을 가해적 병력 70여 명을 사살하고 국군 17연대에 인계하고 오후 8시 30분경 영일 비행장으로 진출한다.

 [참고] <한국전쟁>제2권(142) 제4장 8월의 공방전(28) 제7절 동부전선 ① 영덕(盈德) 실함(失陷)

1950년 3월 10일 호계역 기습, 1950년 말 형산강 철교 폭파, 1951년 12월 23일 양산 원동역 제 3225열차 습격 등 동해남부선 수송로 차단 등을 주로 하였다.

 2.2 군인경찰토벌대 전투

  1) 1950년 신불산 국군 1차 토벌

날짜 :  1950년 12월 25일

장소 : 신불산 1209고지 ( 681고지(갈산고지)), 시살등 신동대굴(심종지굴)

군대 : ㄱ) 미군 제10군단 직속 특별공격대대 대장 소령 배동걸裵東傑

          1중대장 대위 윤성모, 2중대장 중위 손장래(孫章來,예비역 소장), 3중대장 대위 정창화

          병력 500명

       ㄴ) 동해남부부대 사령관 남도위, 병력 250명 추정

  군인경찰합동작전을 위해 언양·삼남·상북주민이 동원되어 하룻밤 사이에 언양 남천에 비행장 활주로를 만들었다.  이때문인지 현재도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부산 방향으로 콘크리트 도로인 비상 활주로 및 헬기 비행장이 있다. 

  신동대굴에 비행기로 폭격을 하고 681고지(갈산고지)에는 레이팜탄 및 휘발유 드럼통을 투하하여 산을 불마다로 만들고 반대편 재약산 사자평원에서는 대포를 쏘았다.  동해남부부대는 갈산고지를 빼앗기고 사령부를 영취산, 천황산, 밀양 향로봉 등지로 옮긴다.

    2) 1952년 신불산 국군 2차 토벌

  본격적으로 조선인민유격대 빨치산을 토벌하게 된 것은 백야전사령부가 생기면서이다.  백야전사령부는 백선엽 소장(白善燁, 1920년~ 생존)의 성씨를 딴것으로 1951년 12월부터 1952년 3월까지 활동했던 육군과 경찰 합동사령부이다.

그림5] 백 야전사령부 제2기 토벌작전

그림6] 신불산 빨치산 사령부 위치

     신불산 지역에 대한 대규모 공비(빨치산) 토벌작전은 1952년 2월 4일부터 3월 6일까지 거의 한달간 진행되었는데 미 공군의 지원, 수도사단 제1기갑연대 연대장 이용(李龍) (1개 중대, 소장 예편), 경찰, 의용대가 합동하여 남도부 부대의 거점 신불산 681고지(갈산고지)를 빼앗고 89명을 사살하였다. 

그림7] 신불산지구 전투 참전기념 사진 (임진년 단오(1952.05),작천정)

군인, 경찰, 의용대는 1952년 2월의 온양 대운산 작전에서는 김용구를 사살하고, 6월의 아미산 작전을 이어간다.  

일시 :  1952년 6월 12일

지명 : 울산군 두서면 아미산

군대 ㄱ) 국  군 : 10경비대대 1중대 대위 김동록金東鹿 병력 136명

     ㄴ) 인민군 : 동해남부부대 홍길동부대 홍길동 약 40명

결과 :  사살 16명  M1소총 6정, 칼빙 소총 3정, 기관총(다발총) LMG 1정

피해 :  전사 5명  부상 1명

* 석용화(石容華, 1925~) 양산시 화북면 초산리 출생으로 52년 6월 체포되어 비전향 장기수로 72년 4월 출옥하여 2000년으로 북한으로 송환됨

◈ 1953년 군경합동토벌

  경남 동부지구 신불산을 중심으로 각처에서 발악을 하고 있는 잔비를 완전 소탕코저 지난 1953년 1월14일 양성봉(梁聖奉, 1900~1963년) 경남지사 경남 경찰국장 및 각 기관장 읍면장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동기 작전계획을 세운 후 본군 출신 대한청년단 1,900명으로 조직한 전투대가 현지로 향발하였다. [출처: 부산일보 1953년 1월 24일 기사]

문봉제(文鳳濟) 치안국장 (현 경찰청장)과 박영근 경남경찰국장 (현 경남경찰청장)은  1953년 1월 20일 울산국민학교  교정에서 경남경북 동부지구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경찰부대와 지방청년으로  구성된 벽력부대(霹靂部隊)를 사열한다.

[출처: 부산일보 1953년 1월 23일 기사]

 * 53년 11경비대대 경찰출동 현황

밀양경찰서 70명, 울산 190명, 양산 50명, 동래 130명, 청도 60명, 경주 80명, 경북특공경찰대 100명, 총합계 680명

울산MBC 탐사기획 돌직구 ‘신불산 빨치산을 말하다!’

https://usmbc.co.kr/programme/hwocoAnMTyLkbyUCqqP-9/p/m-ZxVYPhS/single/49350/page/7

그림8] 신불산전투참전기념비

그림9] 신불산 빨치산의 묘 [인용: 네이버 블로그 정파선인]

그림10] 한국전쟁 북한군 개인 화기

그림 10]  한국전쟁 국군 개인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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