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기본적으로 발해인들이 스스로 기록한 자료가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발해사의 많은 부분은 외국 사료에 기재된 것들을 통해 파악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왕들의 이름과 시호, 연호 등은《신당서》발해전에 가장 많이 정리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10대 선왕 이후로는 시호가, 11대 대이진 이후로는 연호가 기록되지 않았고, 13대 대현석 이후에는 왕명 자체도 나오지 않는다. 

한편 발해의 마지막 왕의 이름이 "대인선" 이라는 것은《요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전근대시대에 아직 발해사 연구가 정밀하지 못했을 때는, 《신당서》에 나오는 13명의 왕 다음에 바로 "대인선" 을 갖다붙여 발해의 왕을 14명으로 파악하곤 했다. 더 많았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쨌건 자료를 찾지 못해서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3대왕인 "대현석" 과 "대인선" 의 중간에 "대위해" 라는 이름의 왕이 또 있었다는 사실은 20세기 들어서야 김육불에 의해 비로소 알려졌다. 이 사람의 이름은《당회요》에 나온다. 따라서 현재까지 밝혀진 발해의 왕은 15명이며, 14명짜리 계보는 과거의 정보를 답습한 것이다. 

근래 일본학자들은 발해의 역사 사실을 말하길 좋아한다. 일찍이 현석을 경왕(景王)이라고 부르고 인선을 애왕(哀王)이라고 불렀다. 그 근원은 일본 외무성이 편찬한 외교사고(外交史稿)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그것이 상당히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 후에 『조선사략』제2권을 읽었는데, 그곳에서 "발해는 경애왕(景哀王)시기에 이르러 거란이 공격하여 멸망하였다" 고 하였으니 비로소 그 잘못된 근원을 알게 되었다. 살펴보건대, 이곳에서 말하는 경애왕은 신라의 경애왕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후당 명종(明宗) 천성(天成) 원년(926)은 바로 요 태조 천현(天顯) 원년으로 또한 신라 경애왕 3년이다. 이 해에 요가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러므로 『동국사략』에서 "경애왕 때에 거란이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경애왕이란 말 앞에 신라라는 두 글자를 올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찬자들이 자세히 고증하지 않고 마침내 경애 두 글자를 시호로 여기고 현석과 인선의 두 왕에 분속시키면서, 그것이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지는 못하였다. 하물며 두 왕의 사이에 위해(瑋瑎) 한 대가 더 있음에랴.

-김육불, 『동북통사』下, 동북아역사재단, p577-57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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