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압록수(강), 중국 대륙에 흐르는 확고부동한 증거들

성헌식의 ‘대고구리’…청년 시절에 도망 다니는 미천태왕 기록서 방증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4-12-07 23:39:08

 ▲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스카이데일리

[학력]
△경남 밀양 출생
△성균관대학교 졸업

[약력]
△사단법인 우리문화선양회 우리역사교육원 대표 역임
△인터넷신문 플러스코리아(www.pluskorea.net) 역사칼럼리스트
△(현) 인터넷신문 역사복원신문(www.historynews.kr) 편집인
△(현) 인터넷신문 고구리역사저널(www.greatcorea.kr) 편집인
△(현)사단법인 고구려역사문화 보전회 사무국장
△(현)강원도 인재개발원 강사
△(현)경기도 개발연구원 의정포럼 강사
△(현)구리시청 민방위교육 강사
△(현)구기고등학교 역사체험호라동 강사

[저서]
△천년 만에 밝혀진 안시성 살수







폭군 봉상왕이 창조리에 의해 폐위되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고구리의 태왕은 서천태왕의 아들인 고추가 돌고와 을씨의 소생인 을불(乙弗)로 이가 바로 그 유명한 미천(美川)태왕이다. 성품이 아랫사람들에게 너그럽고 후했으며, 지략이 있고 능히 무리들을 절제하였다. 미천태왕의 출생과 어릴 적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278년 정월, 서천태왕이 밤에 연회를 베풀고 있던 중 갑자기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가 나면서 작은 개 모양의 불빛이 돌고(咄固) 태자의 침전으로 날아들었다. 천문을 관장하던 태사는 “천랑성(天狼星)이 궁중으로 떨어졌으니, 반드시 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해 10월 을씨가 을불을 낳으니 오색구름이 궁궐을 감싸고 향기가 그윽했다. 을불은 기골이 장대한 우량아로 태어났으며, 기이한 영웅호걸처럼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칭송했다고 한다.
 
숙신을 정벌한 달가가 양맥으로 떠날 때 아우 돌고를 함께 데리고 갔다. 서천태왕은 돌고의 아들 을불을 품에 안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이들을 전송했다. 당시 을불은 불과 3살이었는데도 달가 백부가 필히 크게 이길 것이라고 말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런 이유로 첫 싸움에서 얻은 땅 알하(戞河)를 을불읍으로 삼고 돌고가 직접 다스리게 했다.
 
281년에는 4살짜리 을불을 태자로 삼고 이듬해에는 을불의 탄생을 예견했던 태사를 스승으로 삼아 효경을 가르쳤고, 을불은 나이 아홉 살에 능히 말 타고 활쏘기까지 했다. 하루는 태왕에게 “무(武)만을 좋아하고 예(禮)를 모르면 꼭 일우 백부 같아집니다. 그래서 저는 예를 익히고 효를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아뢰니, 서천태왕은 크게 놀라면서도 기뻐하며 그렇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서천태왕이 붕어하고 등극한 봉상왕은 293년 9월에 아우 돌고가 딴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로 사약을 내려 죽일 때, 을불은 좌보 상루의 집에 있었고 상루는 집안사람인 재생과 담하를 시켜 을불을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불안감을 느낀 을불은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모의 집으로 달아나 숨어서 머슴살이를 했다.
 
 ▲ 밤새 방죽에 돌을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한 을불 <이미지=필자제공>

음모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해 을불을 심하게 부려먹어 무척 고생스러웠다. 그 집 옆에 방죽이 있었는데 개구리가 울면 을불로 하여금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지시했다. 을불은 밤새도록 기와조각이나 돌을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했고, 낮에는 땔감나무를 하라고 하니 잠시도 쉬지를 못했다.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을불은 1년 만에 음모의 집에서 도망쳐 동촌(東村)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장사를 하게 되었다. 하루는 배를 타고 압록(鴨淥)에 이르러 소금을 가지고 강의 동쪽에 있는 사수촌(思收村)에 사는 사람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 집 노파가 소금을 달라고 해서 한 말가량을 주었는데도, 또 달라고 청하니 이번에는 주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노파가 원망하며 자신의 신발을 소금주머니에 숨겨놓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을불은 소금을 팔러 길을 나섰는데 노파가 쫓아와 소금주머니를 뒤져 신발을 찾아내고는 관가에 을불이 자기 신발을 훔쳤노라고 무고해버렸다. 이에 압록의 지역관리는 신발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에게 곤장을 치고는 풀어주었다. 이 시절 을불은 얼굴이 삐쩍 마르고 파리해지고 의복은 남루해 사람들은 을불을 마주하고도 그가 왕손임을 몰라보게 되었다.
   
 ▲ 죄 없는 을불을 신발도둑이라고 무고한 사수촌의 노파 <이미지=필자제공>

이 무렵 국상 창조리는 곧 폭군 봉상왕을 폐하고 새 태왕을 세우려고 하던 참이었다. 창조리는 을불이 왕손이면서도 검소하고 인자해 조부 서천태왕의 뒤를 이을만하다고 여기고는, 조불과 소우 등을 시켜 산으로 들로 을불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마침내 비류수(沸流水)에 이르러 배 위에 한 청년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비록 얼굴은 야위었으나 풍채나 행동거지가 보통이 아님을 보았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 아닌가 생각하고는 그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지금 주상이 무도해 국상이 군신들과 함께 왕을 폐하려고 합니다. 왕손께서는 행동이 검소하고 인자하며 사람을 사랑하므로, 조상의 유업을 이을 수 있다 하여 저희들을 보내 맞아오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을불은 이들을 의심하여 “"나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시오”라고 말하자, 소우 등은 “지금 왕이 인심을 잃은 지 오래여서, 실로 나라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이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컨대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소우 등은 을불을 모시고가 군신의 예를 거행하고는 오맥남(烏陌南)의 집으로 맞아들였다.
 
봉상왕과 후산(候山) 북쪽에서 사냥하다가 이 소식을 듣은 창조리가 무리들에게 “나와 뜻이 같은 분은 따라 하시오”라고 말하고는 갈대 잎을 모자에 꽂으니 모두들 따라했다. 이윽고 창조리가 “지금 주상은 무도합니다. 을불대왕이 덕이 있으니 그를 추대하고 싶소이다”라고 말하자, 모두들 크게 기뻐하며 손뼉치고 발을 굴렀다. 이에 그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하고는 별궁에 가두고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그리고는 곧 을불을 맞아 옥새를 올리고 태왕위에 오르게 했다.
 
을불이 곤장을 맞은 압록수는 어디인가?
 
을불이 소금장사를 하다 노파에게 고발을 당해 곤장을 맞은 곳인 압록수(鴨淥水)는 과연 어디일까? 식민사학계에서는 이 압록수를 지금의 압록강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을불이 압록의 동쪽에 있는 사수촌에서 노파에게 봉변을 당하게 되는데, 이 말은 압록수가 남북으로 흘렀다는 말인 것이다. 지금의 압록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지 않은가!
 
당시의 압록수이 어느 강인지는 아래 <신당서 열전 145-동이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번역)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海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원문) 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鸭头, 号鸭渌水, 历国内城西, 与盐难水合, 又西南至安市, 入于海。而平壤在鸭渌东南, 以巨舻济人, 因恃以为堑。
 
<한서지리지>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海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漢書地理志: 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 신당서의 기록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압록수와 고구리의 도성들 <이미지=필자제공>

위 기록에 근거하면 압록수 변에 국내성, 평양성, 안시성, 서안평이 모두 위치해야 지리비정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식민사학은 압록수를 현 압록강, 국내성을 집안, 평양성을 평양, 서안평을 압록강의 하구 단동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국내성(집안)은 압록의 북에 있으며, 평양성(평양)은 압록강이 아닌 대동강변에 있고, 안시성은 요하 강변으로 비정하였으므로 이 지리비정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비류수는 산서 남부에 있는 강 <이미지=필자제공>

압록수를 현 산서성을 가로지르는 분하에 가져다 놓고 위 신당서의 지리비정을 하면 희한하게도 신당서의 기록과 딱 맞아 떨어진다. 또한 <한서지리지>에 압록수는 2,100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현 분하의 길이인 716km와 크게 차이가 없다. 즉 중국과 일제는 이러한 지명 조작을 통해 우리의 역사 강역을 축소시키고 왜곡하는 작태를 부렸던 것이다.
 
을불이 소우에게 발견된 비류수는 어디인가?
 
을불이 소우 등에게 발견된 비류수는 244년 위나라의 1차 침공 때 동천태왕이 관구검의 1만 군사 중 3천 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비류수를 검색하면 강수(絳水)가 나오는데 그 설명은 다음과 같다.
 
강수(绛水) : 1) 근원은 산동성 황현 동남쪽 20리 장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황현 동쪽에서 황수하와 합해져 바다로 들어간다. (源出山东黄县东南二十里张山,北流经县东合黄水河入海)
 
2) 산서성 곡옥현 남쪽에 있는 일명 백수 또는 비수(沸水)로 근원은 강현 서북쪽 강산 아래에서 나와, 곡옥현 남쪽까지 서북류해 회수로 들어간다. <수경주> 강수는 강산에서 나와 서북류해 회수로 흘러간다. (在山西曲沃县南, 一名白水 又名沸水, 源出绛县西北绛山下, 西北流至曲沃县南入浍水, 《水经注》绛水出绛山, 西北流注于浍。)
 
3) 근원은 산서성 둔류현 서남 팔십리 반수산의 남쪽에서 나와 8개 샘이 솓는 여의에서 나와 합쳐져 동류해 로성현 경계 교장촌까지 흘러 장하로 들어간다. <수경주>의 소위 진수이다. <청일통지> 수경주에 강수는 있고 람수는 없는데, 그 강수의 흐름은 모두 지금의 람수이고 별도로 진수가 있는데 곧 강수의 흐름이라 현재 부·현의 모든 지리지와 맞지 않는다. <위서지형지>에 강수가 있고 역시 람수도 있으나 지금의 물길은 같다.
 
 ▲ 대청광여도 산서성 남부에 그려진 염지 <이미지=필자제공>

(源出山西屯留县西南八十里盘秀山之阴, 八泉涌出如珠, 合而东流 至潞城县界交漳村入漳. 水经注谓之陈水, <清一统志>水经注有绛水而无蓝水, 其绛水所行之道, 皆今蓝水也, 而别有陈水, 则今绛水所行之道也, 与今府县诸志不合, 惟魏书地形志有绛水, 又有蓝水, 与今水道相同。)
 
4) 사천성 간양현 성 북쪽에 있는 지금의 강계하를 말한다. (在四川简阳县城北,今曰绛溪河,《寰宇记》绛水在州南,色赤如绛,故名,王洙九州要记云,州在赤水之北是也。)
 
 ▲ 운성염지에서 생산되고 있는 소금 <사진=필자제공>

비류수는 위 4가지 강수 중에 2)번으로, 산서성 남부 운성시의 동쪽에 있는 강현에서 나와 임분시의 남쪽 곡옥현 남쪽을 흐르는 회수로 들어가는 작은 물길이었던 것이다. 도망 다니는 을불의 행적으로 보아 압록수와 비류수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일대에서 활동하던 을불이 소금장사를 했다고 했는데, 그 소금은 바로 산서성 남부 운성염지(運城鹽池)에서 생산된 소금을 말하는 것이다.


백두산 경계비의 진실-압록강과 두만강은 요하와 아무르강을 말한다.

아래 지도에 나온 것은 지리와 강이름을 표시한 것이다. 여기서 두가지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다.첫째는 조선 초 세종때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동북방에 6진을 설치하는데 그 설치지역이 한반도 두만강 안이 아니라 서북으로는 바이칼호에서 동북으로는 사할린까지 차지한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놀랍게도 청나라와 영토분쟁이 일어나서 경계를 확정지은 것으로 유명한 백두산 경계비의 영역이 만주 일대라는 것이다.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백두산은 조작된 지명이며 원 지명은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요하의 서쪽 상류 시라무렌강에서 거란제국을 세우다.

요하라는 강이름이 형성되는 계기는 거란족의 부흥지이기 때문이다. 요하(遼河) 상류이며 서요하의 끝인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거주하였는데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다음 황제를 칭하고 거란을 건국하였으며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947년 국호를 요(遼)로 개칭한 것에서 유래한다.시라무렌강 상류는 바이칼호와 몽고고원 아래에 있으며 내몽고 자치주에 해당된다.

압록강은 요하이며 난하가 요하라고 한다.

<삼국유사>와 <중국 요사지리지>에서 "요하를 일명 압록이라 하였다" 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서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요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동과 요서의 기준은 어디인가!

거란족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요(堯)라고 하였으며 여진족이 나라를 세우고 금(金)이라 하였다.이는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가! 단군조선이후 대부여와 고구려까지 5부족 유목 연맹체를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역사의 뿌리는 같다.그렇기 때문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요나라의 이름을 따서 국호를 요라고 한 것이다.요(堯)는 성이 이기(伊耆), 이름은 방훈(放勛), 호는 도당씨(陶唐氏)이며, 제요(帝堯)라고도 하고 당요(唐堯)라고도 한다.그래서 서이족의 당(唐)이라는 나라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유목족은 대대로 부족 연맹에 의하여 나라를 세우고 동서양 스탭지역을 활동기반으로 하면서 실크로드를 상업기반으로 하면서 제국을 다스렸던 것이다.

라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7회력인 월-화-수-목-금-토-일요일에 들어가는 요도 같은 유래인 것이다.
또한 중요하다는 말도 중앙의 요라는 뜻이며 모든 사물의 중심이자 상징을 요라고 한 것이며 이것이며 국호와 왕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거란족도 같은 유목족 뿌리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도 5부족 연맹체에서 비롯되었으며 고주몽 계열의 계루부를 중심으로 연합하였다.   역사를 따라 추적해 보면 계루부가 거란족이 되었으며 그 연원은 그리이스 유목족까지 연결이 된다. (글안->거란->코란->카라->가야)

요라는 것은 거란족의 요나라를 세우는 중심지역이기도 하며 황제국의 중심을 요라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준에 따라 시대에 따라 각각 달라지는 것이다.요나라는 황제국이기 때문에 황제국이 중심이 되어 그 중심에서 동쪽을 요동이라하며 서쪽을 요서라 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시대에는 유프라테스와 티크리스강을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것이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것이며 황하의 중심 장안에서 요서와 요동을 나누는 것이다.시대 변천과 함께 각기 달라지는 것이며 제후국 나라에서는 방향이 바뀌어 나타나기도 한다.

요동과 요서라는 개념도 황제국이 사용하는 일명명사가 된다. 특히 수도를 칭하는 평양(平陽)이나 안(安)도 요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며 한수(漢水)나 압록수(鴨綠水)도 같은 개념이 된다.

압록강은 어디를 말하는가!

압록강의 어원은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 빛과 같다(…水色如鴨頭…)고 하여 압록강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그리고 오리 머리 모양을 닮은 강이라고도 하며 오리의 음을 따서 오리->아리->아리수->우리수 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리는 알과 같은 말이며 알은 <안-한-우리-울-훈>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한수=압록강=한강=아리수 와 같다. 민족의 중심강을 아리수의 파생영역으로 발전되어 여러 이름으로 변형 발전된다. 중심강이기 때문에 황하강으로 부르기도 하며 문명의 중심이기 때문에 불->.파이어->페르->비류로 발전되어 비류슈=패수로 발전된 것이다.크게 보면 여러 강의 어원은 비슷한 메커니즘의 영역인 것이다.

크게 본다면 아리수나 압록수는 아랄해의 지류인 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이 압록수이자 아리수이자 한강이며 요하의 여러 지류도 압록수이자 아리수이자 한강이 된다.그리고 황하도 같은 개념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 민족의 흥망성쇠와 이동 그리고 영토의 확장과 축소에 따라 달리 불리워지며 자국과 경쟁국의 역사적 명분에 따라 왜곡되기고 하고 변형되기도 한다. 때문에 획일적인 적용과 해석이 곤란하며 그 당시 상황에 맞는 적용이 필요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9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세 개의 큰 물이 있는데 하나는 백두산(白頭山) 아래의 마죽동(馬竹洞)에서 나와 혜산진(惠山鎭)과 인차외(仁遮外)를 거쳐 최천이동(崔天已洞)의 물과 합류하여 군계(郡界)로 들어오고, 하나는 길성현(吉城縣) 북쪽 장백산(長白山) 서북보(西北堡)에서 나와 운총보(雲寵堡)를 거쳐 허천강(虛川江)과 합하여 강기(江岐)에 이르러 군계로 들어오고, 또 하나는 함흥부(咸興府)의 황초령(黃草嶺)ㆍ부전령(赴戰嶺)과 평안도 강계부(江界府)의 오만령(五萬嶺) 등의 물이 어면강(魚面江)과 합하여 군계로 들어온다.
세 개의 물이 합류하여 압록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삼수(三水)라고 이른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군(郡)이 어면강ㆍ압록강ㆍ삼수동수(三水洞水)의 세 가닥 사이에 있기 때문에 삼수라 했다.” 한다.
삼수또는 삼수동수라는 지명이 있는 곳이 아무르강 삼강평야와 요녕성의 요하하류 지방 두개가 있다. 그 중에 요하가 압록강인 이유는 요하의 지형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는 내용과 같다. 그리고 현 압록강은 전혀 내용이 틀리다.요하 하류에 싼장커우[三江口] 부근에서 창바이[長白]산맥에서 발원한 동랴오허강을 합쳐 랴오허강이 된 뒤, 그대로 남하하다가 훈허강[渾河]을 합치고 나서 잉커우[營口]에서 보하이해[渤海]로 흘러든다.그리고 혼하는 원래는 랴오허강[遼河]의 지류였으나, 1958년 와이랴오허강[外遼河]을 가로막은 뒤부터 독립 수계가 되었다. 칭위안만주자치현[淸原滿族自治縣] 동쪽 군마링[滾馬嶺]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푸순[撫順]•선양[沈陽]•랴오중[遼中] 등을 지나 하이청시[海城市] 싼차강[三酒河] 부근에서 타이쯔강[太子河]과 합류한다.
한서(漢書)》의 <조선전(朝鮮傳)>과 <지리지(地理志)>에 패수(浿水) •염난수(鹽難水) •마자수(馬水) 등의 이름으로 나온다.압록강의 한 지류에 소금강을 뜻하는 염난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금기가 있는 강이 포함되어야 하는데 소금기가 있는 강은 요하의 서쪽 지류 상류인 시라무렌강에 소금강이 존재한다.지금도 그곳은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소금기가 머금은 지역이며 내륙에 많은 소금이 산출되는 장소가 실존한다.
또한 염난수라고 일컬어지는 강은 아랄해 일대의 아무다리아강이며 아랄해가 염수가 있으며 서쪽으로 흐른다.
<한서지리지>에는 “마자수는 서쪽으로 흘려 염택에 들어간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염택은 소금 연못이므로 아랄해를 지칭한다. 압록은 두 곳을 말한다. 또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에 들어가서, 서남쪽으로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라고 자세히 기술하였는데 서안평이 바로 서 투르크 평원인 파미르 고원을 넘어 존재하는 아랄해 일대 평원을 말한다.참고로 현 요하 지명에 역사 기록에 중첩이 일어나는 것은 압록강을 지칭하는 것을 한 곳에 모아 적용시키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것이 나타나는 것은 민족의 이동과 함께 비슷한 자연환경에 같은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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