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공 조두천(角空 趙斗天, 1913~2006) 언양보도연맹 희생자 은인(恩人)

보도연맹은 국민보호선도연맹(國民 保護 先導 聯盟)을 줄인 이름으로 19496월 결성되었고 가입자가 전국에 30여 만 명이나 되었다. 이 단체명은 국민을 보호하고 압장서서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뜻이다. 광복 후 건국위원회, 인민위원회, 공산주의, 농민조합, 노동조합, 청년동맹 등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전향(轉向) 즉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을 자유주의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보도연맹은 원래 목적과 달리 이승만 정권은 6.25 한국전쟁을 빌미로 가입자를 잡아서 가서 사람이 드문 산이나 바다에서 처형을 했다.

트럭에 실려오는 희생자들. 자료화면 레드 툼 (Red Tomb)
논산읍 ( 論山邑 )' 이라는 표지가 새겨진 트럭에서 끌려내려온 희생자들 [출처 디지털 말]
총살하기위해 조준하는 대한민국 경찰 [출처 디지털 말]

 

 이미 절명한 사람들의 머리를 권총으로 확인 사살하는 경찰 [출처 디지털 말]

언양은 일제강점기나 광복 후에도 울산에서 농민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으로 농민운동을 벌였던 청년들 대부분이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억울하게 죽었다. 피해자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로 언양면 건국준비위원장 이동개(李同介,李東介, 이동계李東桂, 1910~1955), 울산농민조합 위원장 및 언양공의(公醫; 공중보건의사) 안효식(安孝式 1898~1948)이 있다.

언양지역에서 보도연맹 가입자를 구한 이가 있는데 그가 조두천(趙斗天)씨다. 6·25 무렵 삼남면 교동리 진장(陣庄)마을에 살았던 그는 삼남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보도연맹 명부를 모두 불태웠을 뿐만아니라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희생당할 때 직접 그들을 구하기도 했다.

어느 날 경찰이 언양지역 보도연맹 가입자를 중남초등학교에 모은 후 스리쿼터를 개조한 트럭에 실어 양산쪽으로 싣고 가 산속에서 처형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미국 다지사(Dodge) 쓰리쿼터(3/4)라 불리는 M37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서둘러 이들을 차에 싣고 처형장으로 갈 운전사를 찾아내어 차를 양산으로 몰고 가다가 방기 초등학교 인근에 있는 하방저수지 쪽으로 차를 몰아넣어 사고가 난 것처럼 위장하도록 당부했다.

이 후 그는 보도연맹 가입자들에게 몰래 경찰의 계획을 알리고 이들에게 차가 하방저수지에서 미끄러질 때 도망가도록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이 때 운전사와 보도연맹 관련자들이 그가 시키는대로 해 억울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날 탈출한 사람들 중에는 특히 삼남면 버든마을(현 평리마을) 청년들이 많아 이들이 조두천씨에게 크게 고마워했다고 한다.

버든마을(평리) 망향비

현재 버든마을은 2009KTX 역세권 도시개발구역으로 편입되어 집은 철거되고 떠났고 망향비만 덩그러니 있다.

1913년 조두천씨는 경남 함안의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1932년 동래고등보통학교 (, 동래고등학교)를 수석으로 9회 졸업하였다부친의 만류로 유학을 포기하고 부산시청에 취직했지만 일제 말 한국인들에 대한 일제의 수탈이 심해지자 이에 분개해 사직서를 내고 울산으로 이사와서 삼남면 교동리에 정착하였다.

그후 삼남면 교동리 진장(陣庄)마을에서 2만 여평의 농지를 개간하는 한편 야학을 운영하는 등 농민 교육에 힘썼다. 그가 운영했던 농장과 한옥집은 지금도 있다. 처음에 2만여평의 농장에 복숭아를 재배했지만 지금은 12000여평으로 줄어들었고 1980년대 중반 복숭아 대신 배로 교체되었다.

진장농장에 있는 4칸 한옥 저택

2대 총선(1950530) 37세에 울산 선거구()에서는 출마하여 낙선했다. 금권선거에 환멸을 느낀 그는 자녀들에게 "정치는 절대 하지 말라"고 늘 강조했다.

그가 울산으로 올 때는 부친 성도(性道, 휘 성진成振 1866~1955)씨도 함께 왔다. 부친과 유이비 여사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일호(日浩), 둘째 두천(斗天), 셋째 석주(石柱) 이다. 그와 부인 김복산 여사 사이에 용기(1936~ ), 용우, 용목, 용찬, 용배 등 아들 다섯과 4명의 딸을 두었다.

이중 장남 조용기 순복음중앙교회 목사는 언양초등학교에 1943년에 입학해서 194934회로 졸업했다. 동기생으로는 전() 국민일보 주필 홍성환(洪性煥 1936~), 육군 대장 신말업(申末業 1936~2011; 육사 16기 하나회) 장군, 대흥사료 대표 강대준( 1935~2014) 등이 있다.    조용기 목사는 이후 부산 동래중학교( 2)를 나와 부산공고(29회 기계과)에 진학했다.    조용기 목사는 영산조용기자선재단을 통해 모교 언양초등학교에 수 억원 발전기금을, 동래중학교에 천만원 장학금을 기탁했고 사회에 사랑과 행복을 나누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지렁이의 잠꼬대 서울서적’, ‘성경에 비춰본 고사숙어 민예원’, ‘행목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

* 참고자료

1. 월간 디지털 말, ‘보도연맹원 희생사진

2. 경상일보 20130623일기사,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60) -26. 조두천과 보도연맹 울산에 이야기를 입히다

3. 경상일보 20151227일기사, ’인물로 본 울산정치사(22) 조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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