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皐陶)의 후예(後裔).

고요(皐陶)에게는 맏아들 백익(伯益)과 둘째 아들 중견(仲甄)이 있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의하면, 고요(皐陶)의 맏아들 백익(伯益)은 영성(嬴姓)의 시조이자 진(秦)나라 진족(秦族)의 선조이다. 그는 백예(伯翳, 柏翳, 伯鷖), 백익(柏益), 화익(化益)이라고도 하며, 비(費,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임기시臨沂市 비현費縣)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대비(大費) 또는 비후(費侯)라고도 한다. 또한 은본기(殷本紀)에 의하면, 그는 상(商)나라 상족(商族)의 선조이다. 하본기(夏本紀)와 오제본기(五帝本紀)에도 우(禹)의 치수사업을 도운 익(益)이라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고요(皐陶)의 맏아들 백익(伯益)은 순(舜)임금 때에, 순(舜)임금의 축마관(畜馬官)이 되어 순(舜)임금을 위해 말을 길렀고, 우(禹)의 치수사업(治水事業)을 도와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래서 순(舜)임금은 그를 영(嬴=언偃, 산동성山東省 곡부시曲阜市를 중심으로 하여, 제령시濟寧市태안시(太安市), 래무시萊蕪市 등의 지역 일대) 땅에 봉하고 영성(嬴姓)을 사성(賜姓)하였다. 영성(嬴城)의 고지(故地)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래무시(萊蕪市) 양리진(羊里鎭) 성자현촌(城子縣村)에 있다. 그는 산동성(山東省) 일조지역(日照地域)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산동성(山東省) 일조시(日照市) 동항구(東港區) 도락진(濤雒鎭) 천태산(天台山)에는 백익(伯益)의 대왕릉(大王陵)이 있다.


 

산동성(山東省) 일조시(日照市) 천태산(天台山)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조(趙), 황(黃), 서(徐),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우(禹)임금은 고요(皐陶)를 고성(皐城,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육안시六安市 지역)에 봉하였다. 고성(皐城)은 언성(偃姓)부족의 활동무대이자 거주지였다. 오늘날 중국의 고씨(皐氏)들은 모두 자신의 조상을 고요(皐陶)로 여기고 있다. 고요(皐陶)는 말년에도 우(禹)임금을 도와서 그의 영도사무(領導事務)를 처리하였다. 우(禹)임금은 다음 제위(帝位)를 고요(皐陶)에게 선양하려 하였는데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의 아들 백익(伯益)을 후계자로 삼았다. 그리고 우(禹)임금은 고요(皐陶)의 후손들을 영(英, 호북성湖北省 영산현英山縣)과 육(六, 안휘성安徽省 육안시六安市) 땅에 봉하였다. 우(禹)임금은 동방을 순시하다 회계(會稽)에서 백익(伯益)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고 죽었다. 그러나 비록 권력은 백익(伯益)에게 있었지만 우(禹)임금의 상(喪)이 끝나자 그는 우(禹)임금의 아들 계(啓)에게 제위(帝位)를 양보하고 기산(箕山) 남쪽에서 살았다. 이로써 계(啓)가 제위(帝位)에 올라 최초의 부자세습제인 하(夏)왕조가 시작되었다.

고요(皐陶)가 순(舜)임금을 도와 활약한 지역은, 하(夏), 상(商), 주(周)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로부터 고요(皋陶)의 후예(後裔)들이 세운 진국(秦國), 조국(趙國), 강국(江國), 황국(黄國), 서국(徐國), 비국(費國), 언국(偃國), 영국(英國), 육안국(六安國), 소국(萧國), 완국(阮國), 양국(梁國), 거국(莒國) 등(等) 영성제후국(嬴姓諸侯國)들이 자리했던 곳이다.

​고요(皐陶)의 후예(後裔)로 상(商, 기원전 1600년경~1046년경)나라 상족(商族)들은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天孫)으로 생각했다. 특히 상(商)나라 제왕(帝王)들은 하늘의 아들(천자天子)로 여겨졌다. 그들 상(商)나라 제왕(帝王)들은 모계혈통(母系血統)으론 영성(嬴姓)이었으나 처음부터 부계혈통(父系血統)의 자씨(子氏)를 썼고 훗날에는 자씨(子氏)가 성(姓)이 되었다. 상족(商族)의 뛰어난 인물들은 노자(老子), 장자(莊子), 공자(孔子), 맹자(孟子) 등과 같이 전통적으로 아들 자(子)를 써서 일컬었다.

당시에 상족(商族)이 숭배하였던 신(神)은 제(帝)였다. 상(商)나라 사람들은 상제(上帝)가 우주의 지배자이며 그의 의지에 따라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왕이 죽으면 제(帝)가 된다고 믿었다. 왕은 제(帝)와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으로서 제(帝)에 대한 숭배 의식을 주도하였다. 제(帝)는 혈통적인 의미가 담겨 있어서, 같은 제(帝)를 숭배하는 씨족끼리 연합하여 한 국가를 이루었다.

제왕(帝王)은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통치하는 신(神, 上帝-하느님 )의 아들(天子)이었다. 상(商)나라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신권정치(神權政治) 국가였다. 상(商)나라는 제왕(帝王)의 통치와 관련된 다양한 사안들, 즉 조상신 숭배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여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재해의 유무 등을 신(神-上帝)의 뜻을 묻는 점(占)을 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신정정치(神政政治)가 이루어졌다. 청동기는 바로 이러한 신정적(神政的)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왕권의 신정적(神政的) 권위는 점차 쇠퇴하였고, 결국 세속적(世俗的) 권위가 강화되면서 상(商)나라는 몰락하였다.

그러나 상왕조(商王朝)는 망했지만 상족(商族)이 모두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주(周) 무왕(武王)은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상(商)나라의 옛 땅에 봉했다. 그러나 무경(武庚)은 무왕(武王)이 죽자 무왕(武王)의 형제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여 주살당했다. 그 후, 무경(武庚)의 백부 미자계(微子啟, 주왕紂王의 이복형)가 송(宋=상구商丘, 지금의 허난성 상추시)에 봉해져 상왕조(商王朝)의 제사를 이었다.

하지만 미자계(微子啟)는 갑자기 죽었다. 그의 동생 미중연(微仲衍)이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다. 이후 송(宋)나라 왕계는 미중연(微仲衍)의 자손들이 이어 갔다. 공자(孔子)는 미중연(微仲衍)의 후손이다. 미중연(微仲衍)은 나라의 부흥에 힘써 송(宋)나라가 주(周)나라 제후국들 틈바구니에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송(宋)나라는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286년, 제(齊)나라 · 위(魏)나라 · 초(楚)나라가 연합하여 쳐들어와 영토가 분할되고 멸망하였다.

​한편, 고요(皐陶)의 후예(後裔)가 세운 상(商)나라가 주(周)나라에 의해 망하자 그 후손들은 강회(江淮) 사이에 흩어져 살면서 언성(偃姓)집단을 형성하여 영(英) · 육(六) · 군서(群舒) 등과 같은 소국(小國)을 이루어 춘추시대에까지 이르렀다.

<사기(史記) 진기세가(陳杞世家)>에 영국(英國) · 육국(六國)으로 기록되어 있고, <초세가(楚世家)>에 영국(英國) · 요국(蓼國) · 군서(群舒)로 기록되어 있으며, <좌전(左傳) 문십이년(文十二年)>에 「群舒叛楚 군서(群舒)가 초(楚)를 배반했다. 正義曰:[世本]언성(偃姓). 서용(舒庸), 서요(舒蓼), 서구(舒鳩), 서용(舒龍), 서포(舒鮑), 서공(舒龔). 以其非一, 故言屬以包之 그것으로 말하자면 무리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가 아니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소국(小國)들은 춘추시대에 강대국 초(楚)나라 목왕(穆王)에 의해 모두 멸망하였다. 그러나 고요(皐陶)의 후예(後裔)가 세운 진(秦)나라가 더 큰 강대국이 되어 초(楚)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여 최초의 중앙집권(中央集權)적인 단일국가(單一國家)를 세웠다. 고요(皐陶)의 후예(後裔)가 세운 대표적인 나라는 고대(古代)에는 상(商)나라와 진(秦)나라, 그 이후로는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그리고 금(金)나라와 그 후예가 세운 청(淸)나라, 그리고 조선(朝鮮) 등이 있다.

기원전 900년 즈음, 주(周)나라 제8대 효왕(孝王)은 고대의 정치가 고요(皋陶)의 후예(後裔)인 비자(非子)가 말(馬)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적을 올리자 그에게 선조의 영성(嬴姓)을 사성(賜姓)하고 진읍(秦邑) 땅을 봉지(封地)로 줌으로써 그 지배권을 인정받아 진(秦)나라가 시작되었다. 국호(國號) 진(秦)나라는 선조(先祖) 때부터 살아온 서수(西垂 :진읍秦邑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천수시天水市 청수현淸水縣)의 땅을 봉지(封地)로 받아서 비자(非子)와 그의 후손 진족(秦族)들이 형성한 진읍(秦邑)이라는 명칭(名稱)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원전 770년 유왕(幽王)의 난리 때, 견융(犬戎)이 주(周)나라의 도읍인 호경(鎬京)에 쳐들어오자 진(秦)나라의 양공(襄公)은 주(周)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가서 힘껏 싸워 주(周)왕실에 공을 세웠다. 이때 견융족(犬戎族)이 유왕(幽王)을 시해(弑害)하자 그의 아들 평왕(平王)은 견융(犬戎)의 위협에 도성을 동쪽의 낙읍(駱邑)으로 천도하는데 진(秦)나라 양공(襄公)이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호위하였다. 이에 평왕(平王)이 그 공에 보답하기 위해 진(秦)나라 양공(襄公)을 제후(諸侯)에 봉하고 주(周)나라의 옛 땅인 기산(岐山) 서쪽 지역의 땅을 모두 진(秦)나라에 주었다. 이로써 진(秦)나라는 주(周)나라의 제후국(諸侯國) 반열에 올랐다.

진(秦)나라의 국력은 기원전 4세기 쯤 전국시대 때 상앙(商鞅, 기원전 395년?~338년)이 행한 강력한 법치에 따른 개혁에 의해 급속도로 강성해졌다.

기원전 3세기 후반, 진(秦)나라는 진시황제(秦始皇帝)에 의해 전국(戰國)를 통일하여 중국 역사상 최초의 단일국가(單一國家)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247년에 즉위한 진(秦)나라 왕 영정(嬴政)은, 이사(李斯)를 승상에 임명하고 국력 증강에 노력하였다. 진(秦)나라는 무역을 증대시켰고, 농업을 발전시켰으며 치안을 강화했다. 이는 토지 지주제를 폐지했기 때문인데, 이로써 중앙정부가 국민들을 직접 통치할 수 있었다. 이는 만리장성(萬里長城)과 같은 대형 공사들을 할 수 있게 된 토대가 되었다.

진(秦)나라는 국력이 약했던 주(周)나라를 시작으로 하여, 마지막으로는 최대의 적인 초(楚)나라를 멸망시켰다. 진(秦)나라 왕 영정(嬴政)은 기원전 221년에 중원을 통일한 후,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첫 황제)라 칭했다. 이 황제(皇帝)라는 칭호는, 전설상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온 것이다.

진(秦)나라는 화폐와 도량형의 통일, 군현제의 실시 등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군사력 역시 발전하여, 전술이나 무기, 운송체계 등이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문자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은 일도 벌였다. 통일 전 북방의 각 나라가 흉노 등 북방 민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독자적으로 만들고 있었던 장성(長城)을 정비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건설했다. 시황제(始皇帝)는 흉노의 침략이 일어나자 다시 북쪽을 공격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입혀지는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게다가 남쪽으로도 원정대를 보내서, 현재의 베트남 북부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 때, 남방에는 남해, 상, 계림의 세 개의 군이 놓였다. 이것은, 중국 왕조에 의한 남방 지배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건설 등 가혹한 노동과 극도의 법치주의 통치로 인하여 국민의 고통이 커져갔다. 그래서 진(秦)나라는 군사력은 강성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秦始皇)이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이 두 번째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신하들은 그를 이용해 권력을 휘두르며 서로 싸웠다. 그래서 몇 년 후 백성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결국 나라가 망하였다.

진(秦)나라는 중국대륙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진(秦)이라는 이름이 유럽에까지 알려져 오늘날의 중국을 China라고 부르게 되었다. 만약 진(秦)나라가 전국(戰國)을 통일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존재하지 않고 유럽과 같이 여러 나라로 나뉘어 발전했을 것이다.

한편, 고요(皐陶)의 둘째 아들 중견(仲甄)은 중언(仲偃)으로도 불렸는데, 거듭 언(偃)이 성(姓)이 되었다. 언(偃) 성(姓)은 고요(皐陶)를 조상으로 받들고 성(姓)으로 씨(氏)를 삼았다. 그의 후예(後裔)는 역우(歷虞), 하(夏), 상(商) 26세 기간에 이관(理官)이 되었다. 후손에게 대대로 대리(大理)라는 관직을 세습하였는데, 상대(商代)에 이르러 당시의 관습에 따라 관직명(官職名)으로 성씨(姓氏)를 삼아 이씨(理氏)라 하였다.

청(淸)의 유학자 진가모(秦嘉謨)가 편집한 「세본(世本)」에 의거해 상고해 보면, 고리(古理), 리(里), 이(李) 3자(三字)는 함께 통한다.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고요(皐陶)가 "대리(大理)"가 되었다 기재하였고, 「관자법법(管子法法)」에 기재하기를, 고요(皐陶)가 "이(理)"가 되었다 하고, 「사기(史記) 위세가(魏世家)」에는 "이극(李克)"이라 기재되어 있고,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이극(里克)"으로 기재되어 있다.

당(唐, 618년~907년)나라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 685~762년)는 이씨(李氏)의 혈연시조가 고요(皐陶)라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천보(天寶)2년(743년)에 그를 ‘덕명황제(德明皇帝)’로 추봉하였다. 당고조 이연(唐高祖 李淵, 566년~635년)이 세운 당(唐)나라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자랑할 정도로 매우 번영했고, 정치, 경제와 문화 등 다방면적으로 완벽히 발달된 제국이었다. 현재까지도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대제국으로 평가받는다.

서기 960년, 고요(皐陶)의 후예(後裔)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 927년~976년)이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 907년~960년)에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後周, 951년~960년)로부터 선양을 받아 개봉(開封,카이펑)에 도읍하여 세운 송(宋, 960년~1279년)나라는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다. 제지, 인쇄기술의 향상과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에게 독점되던 문학, 미술, 음악, 사상 등이 시민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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