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서성 서안 서쪽까지 점령한 단군조선 (1부)

성훈 http://blog.joins.com/slsung

B.C 1,100년 경 은나라 말기에는 고대사의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주지육림(酒池肉林)과 포락지형(炮烙之刑)으로 유명한 은나라 마지막 주(紂)왕과 은나라의 제후였던 주나라 문왕(西伯昌)과 무왕(武王)이 등장하며, 그 유명한 기자(箕子)와 백이.숙제(伯夷.叔齊) 그리고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姜太公)이 등장한다.


필자가 이들의 역사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당시 하남성에 있었던 은나라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단군조선의 강역이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3,100년 전 당시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은나라 건국에 관련된 단군조선 
먼저 은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간단히 알아보도록 한다. 중국은 삼황오제의 시대를 지나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가 들어서고, 4백 수십 년이 훨씬 지나 하나라 다음에 은(殷)나라가 들어선다. 이 은나라 역시 삼황오제와 하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동족(同族)인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나라였다. 

중국 사학자들의 공동 저서인 ‘고사변’에 따르면 “현조(玄鳥)는 은나라 사람과 동이족의 조상신이다. 동이와 은나라 사람은 같은 종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 제준, 소호, 제곡, 제순(순임금) 그리고 설(은나라 조상) 등이 동이족과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 사람들이 명확히 증명하는 바이다.”라고 말하고 있어 은나라는 우리와 동족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현조는 검은 새로 은나라 조상인 설(契)의 탄생난생신화(誕生卵生神話)에 나오는 새이다.

이런 은나라의 건국에는 단군조선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13세 흘달단군 갑오 16년(B.C 1767년) 겨울 은나라가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의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명하여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걸왕이 조약을 위배하고 길을 막자 은나라와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關中-섬서성)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라가 망하고 은나라가 들어설 때의 일인데, 은나라가 하나라를 쳤으나 조선이 하나라를 도우니 은나라가 사죄하고 돌아갔고, 하나라 왕이 약속을 어기자 이번에는 조선이 은나라와 함께 하나라를 정벌하였다는 기록이다. 즉 하나라와 은나라의 운명은 단군조선의 손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섬서성 빈.기의 땅에 관청을 설치했다 하는데 빈.기는 섬서성 서안 서쪽을 말함이다.
 
빈기고지도.gif
▲   고대 중국지도에서의 빈과 기. 섬서성 서안 서쪽의 고대 지명이다.

이 기록은 <단군세기> 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서에도 그 관련 기록이 있다. 한나라 때 유향이 쓴 <설원(設苑)> 권모(權謀)편에 같은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번역) 성탕이 걸왕을 치려 하자 이윤이 말하길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 그러자 걸왕이 노하여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윤이 말하길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원문: 湯欲伐傑 伊尹曰 請阻乏貢職 以觀其動 傑怒起九黎之師以伐之 伊尹曰 未可彼尙猶能起九黎之師 是罪在我也 湯乃謝罪請服 復入貢職)  

이듬해에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어버리자 걸왕이 노하여 다시 구이의 군사를 움직이려 하였다. 그러나 구이의 군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말하기를 “됐습니다.”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잔당을 징벌하니 걸왕은 남소씨의 땅으로 도망하였다.
(明年又不供貢職 傑怒起九黎之師 九黎之師不起 伊尹曰可矣 湯乃興師伐而殘之 遷傑南巢氏焉)


이 외에도 <후한서> 동이(東夷)전과 서강(西羌)전에도 같은 내용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동이전) “걸왕이 포악하고 잔인하자 여러 동이들이 쳐들어왔다.(傑爲暴虐 諸夷來侵)”
(서강전) “걸왕이 어지럽자 견이가 빈(邠).기(岐) 사이에 들어와 점거하였다. (傑之亂 畎夷入居邠岐之間)”

위 <단군세기>의 기록과 중국 사서의 기록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위 중국 기록에서의 구이(九黎)와 견이(畎夷)는 단군조선임을 알 수 있다. 하나라가 멸망한 것도, 은나라가 일어난 것도 모두 단군조선의 강력한 힘이 작용했다는 기록이다.

이렇게 탕왕(湯王)에 의해 세워진 은나라는 17세 30명의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 은나라의 통치기간에 대해 중국 기록인 <죽서기년>에는 은나라가 496년간 다스렸다고 하고, <삼통력>에는 629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단군세기>의 기록으로 볼 때는 <삼통력>의 기록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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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대 역사교재에 나와 있는 하대형세도에 하나라는 하남성 일대에만 있고 서안 바로 서쪽에 견이가 그려져 있다.

 
은나라와 단군조선의 갈등 

은나라는 단군조선 덕택에 나라를 세우고는 조선에게 계속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곤 했다. 그러다가 약 470년 후에 아래와 같이 단군조선에게 도전장을 던진다. 참고로 고등(高登)이란 사람은 쿠데타를 일으켜 단군조선의 22세 단군이 되는 색불루의 조부이다.

<단군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21세 소태단군 47년(B.C 1291년) 은나라 왕 무정(22대)이 귀방(鬼方)을 쳐 이기더니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令支)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B.C 128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러한 귀방이 어디인지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아보기로 하겠다. 참고로 귀방은 은허(殷墟)에서 발견된 갑골문자에도 나와 <단군세기>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 기록인지를 입증하고 있다. 

鬼方(귀방) : 古远方国,《易既济》“高宗伐鬼方,三年春之,”其说有五,
1)谓即西戎,《后汉书章帝纪》克伐鬼方,开通西域,《西羌传》武丁征西戎鬼方,三年乃克,《文选赵充国"042;李善注》“鬼方,于汉则先零戎也,”世本注同,案当在今青海境,
(서융으로 “<서강전>에 무정이 서융귀방을 정벌했다” 지금의 청해와의 경계이다)

2)谓即周荆楚之地,〈惠栋九经古义〉汲郡古文云,武丁三十二年,伐鬼方,次于荆,三十四年,王师克鬼方,氐羌来宾,商"042;殷武云,挞彼殷武,奋伐荆楚,疑周之荆楚,商时谓之鬼方,古文所谓次于荆者,盖鬼方之地也, (주나라 형초의 땅)

3)谓即今贵州,《清一统志》贵州,商周为鬼方地,(지금의 귀주)

4)《丙子学易篇》“苍"049;篇云,鬼,远也,又云鬼方言其幽昧也,”此不以地实之,惠栋斥为臆说, (유매의 땅)

5)近人王国维谓鬼方即狄人,殷周时据陕西西北一带,古之獯"739;,汉之匈奴,皆其同种,春秋时狄人隗姓,隗即鬼也(즉 적인으로 은.주 때 섬서성 서북일대)

여기서의 귀방은 1)번과 5)번으로 거의 같은 지역이다. 즉 단군조선이 하나라가 망할 때 점령해서 관청까지 설치했던 빈(邠).기(岐)와 가까운 곳이다. 필자는 이 지역을 계속 단군조선의 점령지로 보는 이유는 은나라의 도읍은 하남성에 있었기 때문에 아마 섬서성 서쪽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맹자가 이야기했다.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 (夏后殷周之盛地未過千里者也)”

또 은나라 왕 무정이 공격했다가 단군조선에게 대패한 영지(令支)에 있던 나라는 바로 고죽국(孤竹國)이었다. 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보고 있으나,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임이 증명되는 기록이라 하겠다. 은나라가 자기네 제후를 침공하는데 단군조선이 공격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 고죽국이 있던 지역이 바로 후에 유주(幽州)의 요서군(遼西郡)이 되는 곳이다. 그 문헌적인 근거가 아래에 인용한 <한서지리지>이다. 이 요서군의 위치는 고죽국의 왕자인 백이.숙제의 묘가 산서성 남부 황하 굴곡 지점에서 발견됨으로서 분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532;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영지에 고죽성이 있다)。莽曰令고 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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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이.숙제는 고죽국의 왕자로 고향인 수양산에 와서 굶어 죽었다. 백이.숙제의 묘가 황하 굴곡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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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이 바로 요서군의 땅이라고 밝혀주는 백이.숙제의 묘가 일년 반 전에 발견되었다.


이어서 단군조선이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때인 23세 색불루단군 때의 <단군세기> 기록이다.
“B.C 1285년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했다가 또 싸워 이를 쳐부수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岱)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B.C 1266년 람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니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당시 은나라의 도읍은 황하북부 하남성이며, 고죽군(孤竹君)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왕으로 뒤에 나올 백이.숙제의 아버지이다. 단군조선은 다시 빈.기를 점령하고는 여(黎)라는 나라까지 세운다. 여는 구리(九黎)와 연관된 말로 단군조선을 의미하며, 여파달이라는 장수의 성이기도 하다. 

<단군세기>의 이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당시 빈 땅에) 고공단부(古公亶父)가 살고 있었는데, 훈육(熏育)과 융적(戎狄)이 공격해 와 그에게 재물과 땅을 요구한 뒤 땅과 백성들을 차지하려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융적에 맞서 싸우고자 하였으나 고공단부는 백성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 하고는 기산(岐山) 기슭으로 옮겨가자 백성들 역시 그를 따라 기산으로 모여들었다.”

고공단부가 옮겨간 기산이 섬서성 서안 서쪽 감숙성과 가까이 있는 바로 기(岐) 땅이다. 이러한 고공단부의 손자 중에 창(昌)이라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데, 은나라 말기에 서쪽 제후로 봉해졌다 하여 서백창(西伯昌)이라고 하며, 나중에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되고 강태공(姜太公)을 발탁한 인물이기도 하다.
  

빈기점령.jpg
▲   조선이 섬서성 서안 서쪽인 빈.기를 점령한 것은 조선의 핵심 강역이 산서성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서안 서쪽의 피라미드는 누가 만든 것인가?

섬서성 서안 서쪽에서 엄청나게 큰 피라미드가 많이 발견되었다. 발굴 작업을 하던 중국 당국은 이 유적에서 동이족의 유물들이 튀어나오자 급히 발굴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발굴 작업을 했던 인부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게다가 피라미드를 흙으로 덮고 나무를 심어 위장을 해 인공위성에서 볼 수 없도록 했다. 중국 정부는 왜 그랬을까?

중국 고대역사의 심장이라는 서안의 서쪽에서 동이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중국의 자존심이 구겨지고 또한 고대 중국의 영토는 옛날부터 만리장성 안쪽이라는 엉터리 거짓말이 드러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섬서성 서안 서쪽 피라미드의 주인은 바로 단군조선이었던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고조선의 영토로 보는 식민사학자들에게는 이러한 사실들이 마치 기록이 잘못된 허구의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핵심 강역을 산서성에 놓고 보면 단군조선의 서안 서쪽 점령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님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아~! 단군조선은 실로 엄청나게 크고 위대했던 나라였던 것이다. 이런 나라를 이천년 넘게 다스린 47분의 단군을 곰의 신화로 만든 식민사학자들에게는 천벌이 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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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서성 서안 근처에서 발견된 피라미드는 아래 사진과 같이 중국정부에서 나무를 심어 철저히 위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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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림성 집안에 있는 피라미드들.  피라미드는 원형이 고인돌로 단군조선/고구려의 전통 무덤 형태이다.


곧 이어서 (2부)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의 조상은?’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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