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정치외교학과 황태연 교수는 1901년 기준으로 대한제국군 병력이 한성 서울 중앙군 병력과 지방 군대인 진위대를 합치면 2 8천 여명에 달하고 전국 포군과 육군무관학교 생도를 합치면 충분히 3만명이 넘는다고 추정치를 근거로 제시한다.

 정말 대한제국 군사력이 그렇게 강했다는 말인가? 대한제국 군대와 무기 관련해서 살펴볼까요. 먼저 총기제조에 대해 볼까합니다.

 대한제국 시위대 기병대


한국근대 전력산업의 발전과 경성전기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오진석, 2006‘Ⅱ. 1. 1) 대한제국의 근대산업육성정책내용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1887년에 설립한 기기국 산하의 기기창은 1890년대 자금난으로 크게 위축되어 었는데, 대한제국에 들어서 군부 軍部 포공국砲工局 산하의 기계창機械廠 (기기창機器廠, 한성기계국漢城器械局 등으로도 불림)으로 변신해 중흥을 꾀하고 있었다.

 기기창을 관할한 기기국은 군무아문 산하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1895 3 군무아문이 폐지되고 군부가 신설되면서 기기국이

폐지되고 포공국이 신설되었다. 아마도 기계창은 이때부터 포공국에서 관할하게 것으로 보인다.  

* 기계창機械廠은 기계()나 도구()를 두어 두는 창고(), 또는 만드는 공장()

그런데 1901 이용익李容翊 기계창의 대대적인 확장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프랑스 육군포병대위 출신 패이외(Payeur) 중위 루이(Louis) 각각 기계창의 수지사首技師와 군물조사원軍物調査員으로 고빙하여 기계창 확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토록 하였다.  당시 프랑스인 기술자 고빙계약을 체결한 군부 포공국장 대변 軍部砲工局長 代辦 이건영李健榮(이인영의 ) 이용익 계열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는 군부 포공국장 軍部砲工局長(1901.2.4~3.15) 재직하다가 이용익이 맡고 있었던 탁지부의 탁지부 사세국장度支部 司稅局長(3.16~7.24)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당시 군부 포공국장변軍部砲工局長代辦(3.20~7.31) 겸하였다. 

이용익의 군수산업 육성 계획은 1903 말에 다시 추진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면서 외국에서 각종 군사장비를 대량 수입하고 징병제 실시를 통한 의무병역제도로의 개선을 시도하는 육군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4,000톤급 포선 砲艦 양무호揚武號(55만원) 구입하여 해군 창설을 도모하는 대규모 군비확장을 기도하였다. (김재승金在勝, 한국근대해군창설사 韓國近代海軍創設史 혜안, 2000)

 이런 분위기 아래 1903 12월경 이용익은 드디어 삼정물산三井物産 경성지점장京城支店長 소전감사차랑小田柿捨次郞, 정상선문井上宜文 협의 하에 용산 전환국 뒤쪽에 총기제조소銃器製造所 설치하는데 성공하였다.

 

경성부사京城府史2, 경성부京城府, 1936, 1025~1026. 군부 포공국에서 이미 1903 7월경부터 삼청동 기계창 내에 총기제조소 설립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삼정三井과의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아 성공하지못했는데 (황성신문皇城新聞 1903.7.2, 7.30, 9.1, 9.8, 11.21) 전기철도사무 조변위원電氣鐵道事務 査辦委員 임명된 적이 있었던 이용익 계열의 이무영李懋榮 군부 포공국 포병과장에 임명(1903.11.19) 이후, 급진전하여 12월경에 설립에 성공한 듯하다. (황성신문皇城新聞 1903.11.17,12.12.) 

 이에따라  위치도 애초 삼청동 기계창 내에서 용산으로 변경되었다.


이용익은 1903 10월에 육군참장陸軍參將 헌병사령부관憲兵司令官 임명되었고, 1904 1월에는 군부대신軍部大臣을 거쳐 원수부 검사국 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 되었다. ( 안용식安龍植, 대한제국관료사 연구 大韓帝國官僚史硏究, 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延世大學校 社會科學硏究所, 1995, 680.) 주지하듯 이용익은 1904 2월에 일본으로 납치되었으므로 이후로는 이상 사업에 관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총기제조소는 1904 7월과 9월에 정식으로 군기창관제軍器廠官制 공포되어 군기창 산하기관인 총포제조소銃砲製造所 편입되었다. 관제로 군기창은 군부대신 직속으로 산하에 총포제조소銃砲製造所, 탄환제조소彈丸製造所, 화약제조소火藥製造所, 제혁소製革所, 직조소織造所 거느린 거대조직이었다. 

관제 포고와 함께 책임자인 제리提理(관리管理)에는 조직에 걸맞게 군부협판 참장參將 현영운玄暎運 임명되었다.  고종실록 高宗實錄 고종高宗4178, 411019. 관제상으로 보면 소장所長에는 참령參領 혹은 정위正尉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군기창은 향후 육군에 필요한 병기兵器, 탄약彈藥, 기구器具, 재료材料 제조 수리를 맡고 해군에 필요한 화약火藥 제조하는 한편 제화製靴, 제직製絨 군용軍用 혁구革具, 피복被服 제조製造 등을 담당할 거대 기관으로 구상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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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jcjc518 블로그 '대한제국의 군사력'

2015. 2. 28. 8:43


대한제국의 군사력입니다
정규군 25,000명에 예비군10,000명
1인당 국민소득 850$,당시 이정도면 일본다음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개인화기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
탄:10.67×58mm
숫자:5천문 수입 대한제국군 주력소총

독일제 m1871마우저 소총
탄:11×60mm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주력소총 입니다
미국제 레밍턴 소총
구경 : 7.62mm, 길이 : 109.7cm, 총신길이 : 61cm, 무게 : 3.94kg
영국제 엔필드 소총
탄약 7.7×56mm (.303 브리티시탄) / 작동방식 볼트액션 / 전장 1,100mm (MLE) / 중량 4kg / 발사속도 분당 20~30발 / 유효사거리 503m

일본제 무라타 소총
구경: 8mm
전장: 122cm
무게: 4.17kg
장탄수: 5발
독일제 m1896마우저 권총 
탄:7.63mm
대한제국군 주력권총 입니다

분대지원화기


개틀링건
남북전쟁의 승패를 갈라노은 기관총
20문 수입
맥심기관총
탄종.303 브리티쉬
급탄250발짜리 천제 탄띠급탄
작동 방식반동식
냉각 방식수랭식
총열 길이673mm
전장1079mm
운용 인원4명
중량26.7kg
발사속도분당 500발


포병전력

독일제 75mm크루프 야포
이건 당시에는 일본도 가지지못한 고급포 였다고 합니다 현제로 따지면 pzh-2000정도

청나라제 암스트롱포
청나라에서 10문 수입합니다

대한제국 군사력이 이정도입니다

1902년 개혁당(改革黨)은 동년 민영환閔泳煥, 이준李儁이용익李容翊이 중심이 되어 비밀결사체가 조직되었습니다. 

독립협회가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명령으로 1989년 11월 해산되고 감옥에 투옥되었고 전 독립협회 활동가들이 개혁활동을 계속하면서 개혁당이라 이름이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전에 1894년 김옥균이 우두머리로 활동한 무리를 개화당 또는 개혁당이라 불렸었는데 수구파 즉 보수파 반대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 당에 이상재李商在, 이상설 相卨, 박은식朴殷植, 남궁억南宮檍, 양기탁梁起鐸, 장지연張志淵, 이도행李道宰, 이동휘李東輝, 이갑李甲, 노백린盧伯麟,오세창吳世昌, 이범진, 김석환, 민병두, 김병태전덕기 등이 함께 했습니다. 개혁당은 일본이 *동청사변(東淸事變)영향으로 영일동맹을 맺어 대한제국 침략의 기반을 다지자 대외에 중립국을 표방 및 구국독립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준열사가 1902년 서대문 밖 독립문 옆에 있는 독립회관에서 ‘동청사변(東淸事變)이 가져온 영일동맹(英日同盟)’이라는 제목 하에 행한 국민대연설은 청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 동청사변이란  러시아가 건설중이던 동청철도(東淸鐵道)가 중국 의화단 운동으로 파괴되면서  러시아는 자국이익 보호를 명분으로 18만 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주요지역을 점령한 사건을 말한다.  중국 의화단 운동을 북청사변(北淸事變) 이라고도 하는데 동청사변은 이것의 연관된 사건이다.

1902년 6월 연락책 이상재가  밀고를 당해서 체포되었는데 이유는 "민영환을 회장, 박정양을 부회장으로 추대한 조선협회(朝鮮協會)를 조직하여 독립협회 잔존세력과 일본망명객들이 연대하여 정부 개조를 획책했다"는 것이었다.  경위원(警衛院) 총관 이근택에게 심문을 받고 그를 비롯한 아들 이승린, 이원긍(李源兢), 홍재기(洪在箕), *유성준(兪星濬), 김정식(金貞植) 등 독립협회 시절 동지들이 함께 체포 및 구속되었고 두 달간의 심문 끝에 국사범으로 판결받은 그는 1902 8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 유성준兪星濬은 유길준兪吉濬의 동생으로 아관망명 즉 아관파전으로 갑오개혁이 중단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02년 귀국하여 1902년 2월 일본 육사 출신 청년장교들의 '혁명일심회革命一心會 쿠테타 기 사건' (유길준 음모 사건)에 연류되었다.   1904년 3월 11일 법부대신 이지용의 재판장 신태휴가 김홍진(金鴻鎭), 장호익(張浩翼), 조택현(趙宅顯) 3명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11기)을 사형을 선고했고 곧 처형되었다.


1903년 한성감옥에서 애국동지들과 함께 

왼쪽 중죄수 복장이 이승만, 앞줄 오른쪽 부터 김정식, 이상재, 유성준, 홍재기, 강원달

뒷줄 오른쪽 부터 부친대신 복역했던 소년, 안국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 (이상재의 아들)

'

이 조직은 후에 1907 4월에 결성된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新民會 계보가 이어진다

* 참고자료

1. 유자후(柳子厚), 이준李儁선생전

2. 관보(官報) 1902 6 28일자 사법(司法)’

3. 관보(官報) 1904 3 28일자 사법(司法)’; 질품서(質稟書) 2 (190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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