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의 재조명 3. 백제의 진한지역 통합
삼국사기 전기기록에서 신라가 만나는 대표적인 나라 셋이 백제와 가야와 왜이다. 그런데 일성이사금대(134-154)는 이 세 나라를 하나도 안 만나는 아주 특이한 시기이다. 신라는 말갈의 공격을 두 차례 받을 뿐이나 이 말갈도 곧 사라지고 60년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 보통은 신라에는 장기적인 평화가 찾아와야 한다. 하지만 일성 후반기인 2세기 중반에 이르면, 과거 신라에 통합되었던 소국이 반란을 일으키고, 신라는 전국적으로 지혜와 용맹을 갖춘 장수를 구하는 등 분위기가 심각해져 간다.

아달라이사금 전반기(166년 한성백제 초고왕 출현 이전)도 신라가 어느 누구로부터도 공격을 받지 않는 시기이다. 유일한 군사력 동원은 165년에 있었던 길선의 백제 망명사건인데 이때 신라는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킨다. 그 군사 규모가 거의 3만 명에 이르는데 이는 신라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 군사력을 초과한 규모이다. 결국 신라가 큰 위기를 느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군사동원에는 무리가 따라 박씨왕조가 무너지고 석씨 왕조가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2세기 중반 신라의 인구 규모는 거의 백만에 육박하였다. 신라의 인구는 3세기에 전성기를 맞다가, 3세기 말에 망하여 점차 인구가 주는데, 4세기 전반에 국가 분할로 인하여 절반 이하로 줄어, 내물이사금이 들어오던 343년에는 40-50만 규모로 추정된다. 신라가 백만의 인구를 회복하는 것은 신라본기의 중기왜가 후기왜로 전한되는, 즉 신라와 왜의 국력이 비등해지는 5세기 중반 정도로 생각된다. 7세기 후반 김유신 시기에는 신라의 인구는 고구려나 백제와 비슷한 규모로서 약 4-5백만에 이르렀다. 당시 요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 전체 인구는 약 1500만 정도였을 것이다.

166년에 백제에 3루왕 시대가 끝나고 초고왕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백제는 쳐들어오지 않는다. 가야도 쳐들어오지 않고, 왜도 쳐들어오지 않는 등, 아무런 전투가 없는 166년 이전에도 아달아이사금은 국경을 순찰하고 병사들을 위로하는 등 비상시국이다. 신라 내부에서도 반역의 기운이 계속된다. 한반도에 심상치 않은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2세기 초에 백제에 대한 말갈의 위협이 사라지자 백제의 한반도 통일이 시작된 것이다. 2세기 중반이 되자 그 힘이 마한지역을 넘어 진한지역에도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고 신라는 이를 느끼는 것이다.

백제는 담로제도를 가지고 전국을 자신의 세력권에 집어넣는데, 한강유역의 한성백제도 지배층을 교체하여 자신들의 직속 담로화한다. 이것이 166년 한성백제 3루왕 시대의 종말과 초고왕의 등장이다. 신라인 길선의 망명사건이 3루왕 시대 마지막 기록인데, 여기서 백제는 한성백제의 왕권을 바꿀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성백제 개루왕은 재위 5년째에 죽고 그 이후 33년은 다른 인물이 한성백제를 통치하고 있었다(후개루왕이라 부름). 3루왕 시대에는 대 신라정책이 강온을 반복하나, 이후 등장한 초고왕-구수왕은 신라에 대하여 강경일변도의 정책을 편다. 한성백제에 새로운 집권세력이 등장하며 외교정책이 바뀐 것이다.

백제는 한반도를 통일하는데 무력만 쓴 것은 아니고 자체적으로 항복하고 삼한에 들어오도록 하는 정책을 병행하였다. 압독국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주변에 더 강한 세력이 밀려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길선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주변 여러 나라들이 항복하고 백제의 담로가 되어도 자율성을 보장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신라 내부에서도 백제와 전쟁하는 대신에 이를 택하려 했던 화평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길선의 모반으로 화평세력이 모두 축출되고 대신 강경파가 정권을 잡으니 이것이 벌휴이사금에 의한 석씨왕조의 출현이다. 아달라이사금 31년 중 재위 21년째가 마지막 기록인데, 이후 10년 동안은 아달라 14년(167년)에 2만 대군을 지휘하고 한성백제를 공격했던 이찬 흥선이 통치했고, 자연스럽게 그에 의하여 새 왕조가 열렸다. 한성백제의 왕권이 초고왕으로 바뀐 아달라 후반기부터 백제의 공격이 시작되는데 이를 모두 이찬 흥선이 막았을 것이다.

165, 아달라12, 개루38, 마품22, 성무3; 아찬 길선의 망명으로 80년 만에 백제와 불화
166, 아달라13, 초고1, 마품23, 성무4; <백제와 80년 만에 충돌>
167, 아달라14, 초고2, 마품24, 성무5; 백제의 공격
168, 아달라15, 초고3, 마품25, 성무48;
169, 아달라16, 초고4, 마품26, 성무60;
170, 아달라17, 초고5, 마품27; 중애1; 백제의 공격

한성백제에 초고왕이라는 새로운 통치자가 들어서며 백제의 공격이 시작된다. 특히 벌휴이사금 시기에 신라는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는데, 다음 벌휴 7년 이 진한지역의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벌휴 7년(190); 가을 8월, 백제가 서쪽 국경 원산향을 습격하고, 다시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자, 백제 군사가 거짓으로 달아나는 체하였다. 구도가 와산까지 추격하다가 백제에게 패배하였다. 왕은 구도가 잘못했다고 하여 부곡성주로 강등시키고, 설지를 좌군주에 임명하였다.

와산까지 가려면 진한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이 기록은 초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진한지역의 마지막 진출기사다. 이 기록 이후 백제는 진한지역을 자유롭게 통과하여 신라를 공격하나 신라는 그러지 못한다. 모든 전투는 신라영토 주변에서만 일어난다. 즉, 서기 190년에 진한지역의 대부분이 백제에게 넘어간 것이다. 190년에 구도가 지금의 충북지역인 와산까지 추격한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이 지역은 이미 백제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불리한 전투가 될 수밖에 없다.

신라본기를 보면 벌휴이사금 2년(185년)에 소문국을 병합한 것과 조분이사금 2년(231년)에 감문국을 병합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진한소국에 대한 병합이 없는데, 이것은 진한소국들이 다 백제에 들어가 더 정벌한 소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백제의 진한지역에 대한 통합은 3세기 초에 거의 완료되었다. 3세기 중반의 한반도를 기록한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진한지역은 韓(백제)에 다 통합되고 사로국과 우중국 2국만 남았는데 이는 삼국사기로 판단할 때 정확한 기록이다.
일본서기의 재조명 4. 백제의 가야지역통합
아달라 14년(167년), 秋七月, 百濟襲破國西二城 虜獲民口一千而去. 八月, 命一吉湌<興宣> 領兵二萬伐之, 王又率騎八千 自漢水臨之 百濟大懼 還其所掠男女 乞和.(가을 7월, 백제가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고, 주민 1천 명을 잡아 갔다. 8월,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고, 또한 왕은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로부터 그 곳에 도착하였다. 백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를 돌려주고 화친을 요구하였다.)

삼국사기 초기에 백제와 신라가 각기 동원한 군사의 규모를 보면 (한성)백제는 수천명 규모이나 신라는 몇만명까지 이른다. 한성백제만 따지면 신라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소국이나, 한성백제만 신라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군사력을 가진 백제의 여러 소국들이 함께 공격하므로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우세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한성백제가 아닌 백제의 다른 소국들의 기록들은 모두 버려져있다. 하지만 신라본기가 보여주는 분위기를 읽어 백제의 다른 소국들과의 전투를 유추할 수 있다.

80년 만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는데 신라본기만 보아서는 왜 백제가 공격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백제본기가 있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전해에 한성백제에 초고왕이라는 이전의 3루왕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백제의 가야지역에 대한 통합은 나해(내해)이사금 시기부터 시작된다. 201년에 갑자기 가야가 나타나는데 이전의 신라를 공격하던 모습은 어디가고 신라에 화친을 구걸한다. 누구에게인가 압력을 받고 있다. 209년 가야를 압박하던 실체가 들어났다. 남해안의 변진한 제국(포상팔국)이 가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나가야 역시 변진한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금강유역인 목지국에 있던 백제왕(진왕)은 담로가 된 변진한 제국을 동원하여 남해안의 가야제국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208년에 왜인이 지마이사금과 123년에 맺은 평화조약을 깨고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만일 왜국(임나)본기가 남아있다면 백제본기 초고왕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그 전 해인 207년경에는 친 백제정권이 들어섰을 것이다. 변진한 지역들의 소국 군대가 임나에 몰려와 힘으로 담로국을 만든 것이다. 담로국이란 힘으로 우호국을 만드는 것으로서, 혼인관계를 맺거나 직접 왕족을 파견하거나 하는 통치방식이다. 그리고 그 친 백제정권이 백제왕의 명령을 받고 신라를 공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가 왜국을 담로국화하여 신라공격에 동원하는 208년을 삼국사기가 기록한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임나일본부의 시작은 그 전해인 207년이다. 즉, 늦어도 한성백제 초고왕 42년(207년)에 임나가 백제의 관가가 되었다.

백제가 남쪽으로 전력을 집중하던 중에 북쪽인 요동지역에 대변화가 생긴다. 요동에 공손씨가 3세기 초에 낙랑군 남쪽의 요동반도 대방지역에 군을 설치하는 것이다. 대방지역은 이미 고구려 대조왕조에 나온다.

대조왕 94년(146년); 가을 8월, 왕(실제로는 차대왕)이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아 돌아왔다.

3세기에 고구려가 공격하여 관구검 침입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서안평을 압록강 하구로 보는 두계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두계가 서안평을 압록강 하구에 둔 것은, 그래야 요동반도와 대동강유역의 낙랑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이 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서안평을 계속 공격한 이유는 대동강의 낙랑이 고구려 배후의 위협이 되자 이를 본국과 격리시키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 북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구려의 세력권 안에 있었기 때문에 대동강의 낙랑은 위협이 안 되었다. 그래서 위나라와의 전쟁 직후에 바로 천도가 가능했다. 두계는 동천왕이 적진으로 천도할 수는 없다고 보고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을 엉뚱한 곳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서안평이 요동반도의 어느 강 하구 정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대방령과 낙랑태수의 기록도 설명이 가능하다. 위나라에서 한반도의 낙랑.대방으로 갈 때 육로로 가지 않고 해로로 갔다. 景初(237-239)中, <明帝>密遣 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 鮮于嗣>越海 定二郡. 당시 압록강하구는 이미 고구려영토였다.

두계에게 낙랑은 신이었다. 두계는 대동강의 평양에서 낙랑유물이 나오는 이상, 4세기 이전(BC 108- AD 313)의 모든 낙랑기록은 이곳 한 곳이라고 보고 사서를 해석하였다. 그러면 절대로 틀릴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맞지 않는 기록은 모두 틀린 것이거나 오기로 판단하였다.

공손씨가 대방지역에 군을 설치하자 그 지역에 살던 고구려 변방민이 대거 한반도로 남하한다. 이것이 백제와 신라에 거의 1세기 만에 나타나는 말갈의 대 공습이다. 따라서 다음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가 기록한 대방군 설치기록이다.

나해이사금 8년(203년); 冬十月, 靺鞨犯境 => 대방군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백제의 대응은 역시 담로제도로써 공손씨와 혼인을 맺는 것이다. 대방군 설치로 인한 요동지역의 대 혼란이 한반도에 대방국과 말갈백제의 성립을 불러오나 여기는 아주 길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삼한사의 재조명' 제3부를 참조하기 바란다. 대방군 설치가 이 정도라면 3백년 전의 낙랑군 설치는 이보다 훨씬 더 큰 민족이동을 불러왔을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음 연표에서 한국고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3개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1) 첫번째가 왜가 80년 조약을 깨고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내해이사금 13년(208년)이고,
2) 두번째가 전기가야의 마지막 기록인 내해이사금 17년(212년)이고,
3) 세번째가 2-3월에 신라군이 서남쪽으로 출병하는 내해이사금 32년(227년)이다.

196, 내해1, 초고34, 거질미22, 신공18
197, 내해2, 초고34, 거질미23, 신공19
198, 내해3, 초고34, 이시품1, 신공20
199, 내해4, 초고34, 이시품2, 신공21; 백제의 공격
200, 내해5, 초고35, 이시품3, 신공22; 군사 대열병
201, 내해6, 초고36, 이시품4, 신공23; 가야가 80년 만에 출현하여 화친을 요청. 대사면.
202, 내해7, 초고37, 이시품5, 신공24
203, 내해8, 초고38, 이시품6, 신공25; 말갈의 범경(대방군 설치기사)
204, 내해9, 초고39, 이시품7, 신공26
205, 내해10, 초고40, 이시품8, 신공27; 국정인사
206, 내해11, 초고41, 이시품9, 신공28
207, 내해12, 초고42, 이시품10, 신공29; 국정인사
208, 내해13, 초고43, 이시품11, 신공30; <2월 삼한백제의 공격>. 4월 왜인의 공격 *왜가 80년 평화를 깨고 백제의 신라 공격에 합세함
209, 내해14, 초고44, 이시품12, 신공31; 삼한백제(포상팔국)에게 공격받은 가야를 구원함
210, 내해15, 초고45, 이시품13, 신공32; 대사면
211, 내해16, 초고46, 이시품14, 신공33; 국정인사
212, 내해17, 초고47, 이시품15, 신공34; 가야왕자가 인질로 옴. <가야의 마지막 기록>
213, 내해18, 초고48, 이시품16, 신공35
214, 내해19, 구수1, 이시품17, 신공36; 백제의 공격
215, 내해20, 구수2, 이시품18, 신공37
216, 내해21, 구수3, 이시품19, 신공38
217, 내해22, 구수4, 이시품20, 신공39
218, 내해23, 구수5, 이시품21, 신공40; 백제의 공격
219, 내해24, 구수6, 이시품22, 신공41
220, 내해25, 구수7, 이시품23, 신공42; 국정인사, 군사 대열병
221, 내해26, 구수8, 이시품24, 신공43
222, 내해27, 구수9, 이시품25, 신공44; 백제의 공격, 국정인사
223, 내해28, 구수10, 이시품26, 신공45
224, 내해29, 구수11, 이시품27, 신공46; 7월 백제와 전투,<3월 삼한백제 왜국에 군대동원 제의(일본서기)>
225, 내해30, 구수12, 이시품28, 신공47; <4월 신라에서 왜군동원을 막기 위한 외교적 접촉(일본서기)>
226, 내해31, 구수13, 이시품29, 신공48; 대사면
227, 내해32, 구수14, 이시품30, 신공49; <2-3월 삼한백제의 공격>, 국정인사, <3월 왜군 동원되고 가야 7국 멸망(일본서기)>
228, 내해33, 구수15, ------- 신공50
229, 내해34, 구수16, ------- 신공51
230, 조분1, 구수17, ------- 신공52; <9월 왜국이 삼한백제로부터 칠지도 받음(일본서기)>
231, 조분2, 구수18, ------- 신공53
232, 조분3, 구수19, ------- 신공54; 왜인이 공격
233, 조분4, 구수20, ------- 신공55; 왜병이 공격

왜가 평화조약을 깨고 신라를 공격한 다음해인 209년에 가야제국이 포상팔국의 공격을 받고 위기에 빠져 신라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남가야 이시품왕은 신라가 구원하여 겨우 살아났는데 찾아온 포로만 6천명이라 하여 전쟁의 규모가 각기 수만 대군을 동원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포상팔국의 가야 공격은 삼한사를 삭제한 삼국사기에 원칙적으로는 나올 수 없는 기록이다. 하지만 가야와 연관된 관계로 원칙을 깨고 예외적으로 출현하였다. 2세기 중반부터 이런 사건이 한반도 전체에 걸쳐 발생하였을 것이다.

백제는 남해안 요충지인 임나를 먼저 담로국화한 다음에 나머지 가야제국들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였는데 한반도 동남쪽의 최대국인 신라가 간섭하여 실패한 것이다. 212년에 남가야 제5대 이시품왕은 태자를 신라에 인질로 보낸다. 백제의 공격을 막으려면 신라의 원병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또 태자의 안전을 염려한 조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212년의 가야왕자 기록이 마지막 가야기록이다. 이후 거의 3백년동안 가야는 더 이상 삼국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가야제국과 함께 멸망한 것이다. 신라로 피신한 이시품왕의 태자는 왕이 되지 못했다.

내해이사금대는 중앙과 지방의 군사 일을 보는 관리가 세 명이나 나오고, 두 차례나 대 군사열병을 하고, 또 두 차례의 대사면을 단행한다. 이때마다 신라는 백제와 전쟁을 했을 것이다. 이 전쟁 중에 두 번의 대 전쟁이 상대가 생략된 208년과 227년의 기록이다.

나해이사금 13년(208년), 春二月 西巡郡邑 浹旬而返. 夏四月 <倭人>犯境 遣伊伐湌<利音> 將兵拒之.(봄 2월, 왕이 서쪽의 군과 읍을 순찰하고 10일 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나해이사금 32년(227년), 春二月 巡狩<西南>郡邑, 三月 還. 拜波珍湌康萱爲伊湌.(봄 2월, 왕이 서남쪽 군읍을 순행하다가 3월에 돌아왔다. 파진찬 강훤을 이찬에 임명하였다.)

208년은 왜가 80년 평화를 깨고 신라를 공격하는 해인 동시에 가야가 포상팔국의 공격을 받기 바로 전 해이다. 이때 신라군은 10일간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만일 한성백제가 참여한 전투이면 백제와 싸웠다고 나와야 하나 한성백제가 아니므로 상대를 생략하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전쟁 사이에 중요한 일이 발생한다. 임나와 포상팔국을 동원했으나 가야제국 통합에 실패한 백제는 여왕이 다스리는 바다 건너 야마도국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운다. 224년에 백제왕(진왕)은 왜국 사신에게 협력하면 철을 주고 비미호의 통치권을 인정해 주겠다는 제의를 한다. 군대를 외국에 파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는 백제의 제의가 아니라 위협이었을 것이다.

227년에 강훤장군이 지휘하는 신라군은 가야를 도와 2월부터 탁순국 등지에서 백제와 치열하게 싸웠으나, 3월에 가야 7국이 멸망하는 것을 구할 수는 없었다. 한성백제로 세면 구수왕 14년(227년)에 가야 7국이 멸망하는데, 이때 구수왕의 한성백제는 동원되지 않았다. 한성백제는 백제 군사력의 핵심이었으나 북쪽전선의 말갈을 방비하느라 남쪽 전선에 군대를 투입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구수왕 11년(224년)이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대패하여 이후 남쪽 전선에 투입되지 못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구수왕조만 읽고 있으면 말갈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나라가 왜 멀리 신라에 가서 공격하는 것인지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것도 이기지도 못하면서 말갈을 방어해야 할 중요한 군사력을 신라 공격에 투입하고 있다. 이는 백제왕(진왕)의 명령이 전국에 하달되어 여러 소국들이 신라 공격에 동원된 것이다. 그 백제왕의 명령을 받고 출동한 한의 소국들 중에 마지막까지 실아남은 1국이 기록을 남겼으니 그것이 백제본기다.

나해이사금 29년(224년), 秋七月, 伊伐湌<連珍>與百濟戰, 烽山下破之 殺獲一千餘級.(가을 7월,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전투를 하였다. 봉산 아래에서 백제병을 격파하고 1천여 명을 죽였다.)

그 결과 227년 2-3월에 한성백제군 대신 비미호의 왜군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비미호는 3년 후에 백제왕으로부터 칠지도를 받으면서 왕권을 인정받는다. 따라서 칠지도는 227년 가야제국 멸망의 고고학적 증거다.

가야 7국의 멸망이 있기 전 해인 나해이사금 31년(226년)을 보면 대사면이 있다. 국가멸망의 위기를 맞아 나해이사금은 대사면을 통해 이에 맞서는 것이다. 227년 2-3월에 강훤 장군이 이끌고 서남쪽(가야방면)으로 출동한 신라군 속에는 전 해에 사면을 받은 죄수출신 부대도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상을 요약하면 임나가야는 초고왕대인 207년에, 다른 가야 7국은 구수왕대인 227년에 백제의 우호국(담로국)이 된 것이다. 일본서기 흠명 2년조에 실린 백제 성왕의 말을 다시 보자.

흠명천황(소아도목대신) 2년; 聖明王曰, 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之世, 安羅 加羅 卓淳 旱岐 (한기: 가야의 최고위직 명칭) 等 初遣使相通 厚結親好 以爲子弟 冀可恒隆...

*삼국사기 백제본기 <仇首王>, 或云 <貴須>(귀수), <肖古王>之長子
*삼국사기 백제본기 <近仇首王>, 一云 <諱須>(휘수), <近肖古王>之子

우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덕분에, 백제 성왕이 말했다는 초고왕대, 구수왕대를, 초고왕 42년(207년)과 구수왕14년(227년)으로 연도까지 알 수 있다. 이제 일본서기에 나오는 최초의 백제왕이 근초고왕이란 주장은 접어야 할 것이다.

이로서 백제는 3세기 초에 백제 진왕 아래에 마한 54국과 변진한 24국으로 이루어진 담로국 체제를 갖춘다. 삼국사기를 보면 망해서 백제의 담로국이 된 나라는 국명을 바꾼다. 따라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변진한 소국들 이름이나 일본서기에 나오는 가야 7국의 이름이 이후 삼국지 동이전의 변진한조에 나와서는 안된다.

이렇게 보면 진왕체제를 기록한 다음 후한서 기록이 후한서가 기록한 임나일본부 성립기록이다.:

후한서 동이열전 한전 :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吊,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한은 세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마한이요, 둘은 진한이요, 셋은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어 54개국이 있으며, 북으로 낙랑에 접하고 남으로 왜에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어 12개국이며, 북으로 예맥에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개국으로 남쪽은 역시 왜에 접한다. ... 마한은 가장 커서 함께 그 무리에서 진왕을 세워, 목지국에 도읍하니,... 다하도록 삼한땅에서 왕 노릇하였다. 그 여러 나라의 왕은 모두 마한의 종류에서 먼저 시작하였다.)

삼국지 동이전의 임나일본부 성립기록도 마찬가지이므로 생략한다.

2세기 후반에 진한지역의 대부분이 백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다시 3세기 초에 변한지역의 대부분이 백제로 넘어갔다. 따라서 3세기 초의 한반도를 기록한 후한서 동이전은 진왕이 마한, 진한, 변한 전체를 통괄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만일 2세기 초의 외국 사서가 있다면 진왕은 마한만 통치한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이후 3세기 중반에 한반도에 대사건이 일어나 변한지역이 진왕의 직접통치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되고 있다.

가야지역은 고고학적으로 3세기 후반에 대변화를 일으켜 북방 흉노/선비식 국가체계가 들어선다. 그리고 4세기에 유물이 전성기를 맞다가, 5세기에 약화된다. 그 유명한 가야갑옷도 광개토왕이 내려오기 전인 4세기 중후반의 제품인데, 당시 낙동강유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4세기 중후반에 신라와 왜가 낙동강유역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가 자랑하는 4세기 가야갑옷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신라를 공격하던 왜병들의 무구다.

또 이 시기는 중국사서에서 왜국이 사라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특히 4세기는 일본에서 수수께끼의 시기라고도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국가가 없는 시기이다. 반면에 4세기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왜는 倭國의 國, 倭兵의 兵, 倭王의 王, 倭使의 使 등 강력한 국가를 전재하지 않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진화한다. 가야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의 변화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가야기록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고, 신라본기의 왜 기록과는 완전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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