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호남.일본지역의 전방후원분과 구태백제


근초고왕 세력은 남하한 부여족(구태백제)이다

 
구태백제는 광개토태왕비에 '이잔'와 '왜'로 기록되어 있고, 온조백제(비류백제와 통합)는 [백잔]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광개토태왕비에 따르면 광개토태왕은 백제한성과 웅진(공주)을 중심으로 충청도지역을 수군으로 공격하고 속리산에서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백제한성은 온조백제세력의 중심지고, 웅진은 구태백제세력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구태백제는 웅진을 중심으로 전라도지역과 일본열도를 복속시켰고, 한성백제까지 반강제적으로 통합하여 백제가 본격적으로 정복전쟁에 나서는 근초고왕때부터 온조백제계에서 구태백제계로 왕조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근초고왕부터 강력한 정복국가의 특성이 나타나고 백제왕의 성씨가 부여씨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참고로 『삼국유사(북부여)』의 기록에는 “古記(고기)에 이르되 전한서에 宣帝(선제) 신작 3년 임술 사월 팔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 : 대요(大遼) 의주(醫州) 경게지역임]에 내려와서 오룡거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을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해모수(解慕漱)라 이름하였으며 아들을 낳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 : sun)로 씨(氏)를 삼았다.”고 한다.

  더구나 이후 백제의 정치조직 안에는 유목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직제(좌·우현왕제)라든가 ‘어라하’, ‘건길지’ 같은 북방 유목민 계열의 호칭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본다면 백제는 부여의 분국 또는 남부여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특집3], [특집4] 참고).  
 
중국문헌은 구태백제에 대해 고두막한의 후손으로 부여왕이며, 대방(황해도)에 구태백제를 개국하고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했다. 즉, 「북사」와 「수서」를 인용하면, “동명(고두막한=졸본부여 개국=북부여 5대 단군)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탁이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그리고 무덤양식도 일본의 인덕왕릉과 서울 강동지역의 고분군들의 무덤양식(전방후원분)은 북방유목민족의 무덤양식으로 동일하다. 서울 석촌동 무덤양식은 고구려의 적석총양식으로 온조백조계 무덤양식임을 알 수 있다.따라서 서울강동지역의 무덤양식이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것은 온조백제를 통한 강력한 북방기마민족이 남하하여 일본열도까지 정복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서울 강동지역의 무덤양식(전방후원분)이 마한지역에 해당하는 전라도 지역과 일본열도에 분포되어 있는 이유다. 근초고왕계로 교체된 백제가 강력한 기마군대로 마한과 가야,일본열도를 복속시켰음을 말해주는 것이다[윤복현]. 


세계 최대 규모의 서울 강동지역의 전방후원고분-일본 전방후원분의 원형이다.
무덤양식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구려무덤양식인 서울석촌동 적석총무덤양식의 세력에서 전방후원분 무덤양식의 세력으로 백제의 왕권이 교체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온조백제계에서 구태백제계로 교체되었다는 증거다.
 

[전라도 지역에 많이 분포된 전방후원분]

구태백제계로 교체된 근초고왕의 마한정복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사학자들은 일본 인덕왕릉의 무덤형태가 전라도에서 발견되니 일본이 지배한 흔적이라고 왜곡하나, 이미 서울 강동지역에서 그 원형이 발견된 이상 인덕왕릉의 주인들 또한 고대 백제세력임이 입증된 것이다.


 
[무덤양식자료보기
http://blog.daum.net/hanquk/6824056

 *************************************************************************************
[범쥬신]일본은 부여족의 나라( 김운회 동양대 교수)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미스테리는 진구황후(神功皇后)와 오우진천황(應神天皇 : 진구황후의 아드님)에 관한 것이다. 진구황후와 오우진천황은 일본 역사의 여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구황후의 업적은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구황후는 실존인물로 볼 수 없는 가공의 인물이며 다른 사람의 업적으로 일본에서 창조된 인물이다. 결국 근초고왕이 진구황후의 탈을 썼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면 일본의 실질적인 초대천황(오우진천황)은 근초고왕의 아드님이거나 처남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일본 최초의 통일 국가는 4세기 경의 야마도(大和) 왕국으로 그 시조는 호무다(品陀) 즉 오우진(應神)천황이다. 도쿄대학의 이노우에미쓰싸다(井上光貞) 교수는 “오우진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한다[井上光貞 『日本國家の起源』(岩波書店 : 1967)]. 따라서 오늘날 일본은 오우진 천황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흔히 일본인들이 야마도 정신(일본 정신) 또는 야마도의 혼(魂)이라고 하는 그 정신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진구황후가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까지 정벌해서 조공을 받을 만큼 대단한 인물로 기록되어있다(그러나 진구황후가 활약한 시기를 비교해보면 다른 사서에서는 진구황후에 대한 기록이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구황후 49년에 진구황후가 이라다께 목라근자 등을 보내어 탁순국(卓淳國 : 대구)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고 남가라(南加羅 : 김해), 비자현(比自炫 : 창녕), 녹국(㖨國 : 경산), 안라(安羅 : 함안), 다라(多羅 : 합천), 탁순(卓淳 : 대구?), 가라(加羅) 등의 7개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고해진(古奚津 : 강진?)과 제주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근구수왕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비리(比利 : 완산), 벽중(辟中 : 김제) 등의 4읍도 항복하였다.

  그런데 이 업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하는데다 이 시기가 백제(남부여)의 세력이 현재의 경상도 지방에 미친 시기이고 이들의 집결지가 낙동강 상류로 알려진 탁순(대구?)이라는 점도 진구황후의 업적이 근초고왕의 업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백제의 위치와 백제의 멸망


[신당서(新唐書)]에서 백제의 위치를 기록하기를

直京師東六千里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직경사동육천리이영빈해지양 서계월주 남왜 북고려 개유해내지 기동신라야)

해석하면"백제는 경사(당나라 수도)에서 동쪽으로 6천리 남짓한 바닷가 양지쪽에 위치하는데, 서쪽은 월주, 남쪽은 왜, 북쪽은 고려(고구려)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이들 나라모두 바다를 건너야 간다. 그리고 동쪽은 신라이다."
 
즉, 국경은 중국의 월주지역,일본열도, 북쪽의 고구려와 경계하고 있는 백제는 당나라 수도에서 동쪽으로 6천리 정도가면 바닷가(서남해)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고, 백제 동쪽(경상도)으로 신라가 위치한다는 소리다.
 
또한,『구당서』에서 백제영역을 이르기를 “백제국은 동북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까지 이르고 있다(『舊唐書』卷 199 上 「列傳」第149 東夷)”라고하여  부여 세력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과 중국까지 진출했음을 뜻한다.
 
[구당서]의 기록은 동명(고두막한)의 후손으로 만주에서 남하하여 온조백제를 통합한 후 마한과 일본열도를 복속하고 해상제국으로 성장하여 결국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는 구태백제의 영토를 두고 하는 말이다.
 
또한 기록에 "서쪽은 바다를 건너"했으니, 중국대륙에서 백제가 개국했다는 소리는 헛소리며, 한반도3한이 존재한 당시에 기록한 [삼국지-동이전]이나 [한단고기]의 기록에 의거, 이미 마한54개국의 하나였던 백제(온조백제)에서 출발했고, 구태백제가 남하하여 온조백제를 통합했기 때문에 마땅히 백제본국은 한반도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하겠다.

한반도(백제본국)을 중심으로 중국.일본.동남아에 이르는 22백제담로 
중국영토는 동성왕이 시해당한 이후 친 동성왕계 제후들이 고구려에 복속하여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백제 22담로]-담로제도는 복속지역에 대한 통제력 강화와 지역의 생산물 수취를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근초고왕때부터 담로제가 본격화되어 영역을 분정하고 지방관을 파견해 각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였다.
담로제는 한성시대에서 웅진도읍기까지 시행되었고, 영역의 신축에 따라 가감이 있어 웅진도읍기에는 22담로가
있었다. 담로에는 단군조선시대처럼 왕족을 파견해 다스리게 하였다.


담로제는 사비시대에 방·군·성(현)제[城()制〕로 재정비되었다. 이것은 중앙집권력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방이라는 광역의 행정구역이 만들어졌다는 것과 성(현)의 수가 크게 증대된 것을 들 수 있다. 웅진도읍기의 22담로제와 비교할 때 행정구역의 수가 대폭 증대된 것이다.
 


비문해석"대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하고 새긴 비"-백제본국이 한반도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백제 수도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소정방이 새긴 백제 정벌비 

백제본국 후기수도-부여
 
당나라 수군의 백제정벌
 
<신라 본기 제 5 태종무열왕의 본문 해설,삼국사기>

3월 唐高宗(당고종)은 좌무위대장군 蘇定方(소정방)을 神丘道行軍大摠管(신구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고 金仁問(김인문)을 副大摠管帥(부대총관수)에 左驍衛將軍(좌효위장군) 劉伯英(유백영)등은 水陸軍(수육군) 13만명으로 백제를 토벌하는 勅書(칙서)를 내리시니 王(무열왕)은 우夷道行軍摠管(우이도총관)이 되어 장병으로 하여금 聲援(성원) 하였다 여름 5월 26일 왕은 金庾信(김유신), 眞珠(진주), 天存(천존)등을 서울에서 장병을 출동시켜 6월 18일 南川停(남천정:경기도 이천)에 도착하였다. 蘇定方(소정방)은 萊州(래주:산동성 액현)에서 출발하여 船舶(선박:배)을 띄워 천리의 물길을 따라 동쪽(한반도 서해)으로 내려왔다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백강에서 벌어진 당나라와 싸운 백제부흥전쟁 


만주를 당나라에 넘기고 대동강이남에 그친 신라의 반민족적 통일 


당나라가 한반도까지 삼키려들자, 백제.고구려유민과 합세한 신라와 당나라 전쟁

[결국 당나라를 끌어들인 신라의 반민족적 통일전쟁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다]

[출처] 자료로 정리해본 한국 고대사 http://blog.naver.com/casahoo/20001665463


나주의 옹관묘집단

한반도의 영산강유역에 옹관묘집단의 유적이 나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 집단이 가야이며 백제와 관계를 알아봅니다


*나주지역의 고분은 백제의 고분양식과는 다른 고분

                                             

사진- 영산강유역의 옹관묘

 

그런데 대륙의 대릉하 대성자(大城子)유지에서 옹관묘가 발견되는데 한반도 영산강유역의 옹관묘제와 관련이 있으며 나주의 신촌리고분에서 옹관과 토기, 유리구슬, 청동환이 출토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덤형식은 일본열도의 후나야마, 이나리야마와 암호산과 비슷하고 원통형 외관의 토기부장품도 일본열도의 하나와무덤의 토기와 차이가 없으며 야마토정권의 고분하고도 비슷합니다.

 

야마토는 가야 수로왕의 왕자와 공주가 세운 정권이고 응신과 아라사가 세운 대화왕조에 연결되며 일본열도에서도 인정하는 대화왕조(열도가야-5)는 가야왕조이며 왕의 성씨가 김씨라고 일본열도의 <성씨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출토된 유물에서 왕을 상징하는 환두대도, 금동관, 금동신이 출토되어 단순한 세력이 아니었고 대륙의 절강지역에서 이주해온 세력으로 백제가 한반도로 이주하여 남진하기 전까지 한반도의 남부(영산강과 김해)를 장악하고 있던 가야연맹 입니다.

참고- 대륙의 가야

http://blog.naver.com/casahoo/20001665463 

 

나주 신촌리 9호분은 가야식 옹관묘이며 형식은 전방후원분보다 빠르고 이곳이 발라국(發羅國) 또는 보라국(保羅國)으로 불렸던 가야연맹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한반도의 입점리고분도 가야왕족으로 백제왕이 된 인물의 묘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주 보라는 옛 글에서는 +아래아+,> 발라(發羅)이다.)

 

입점리고분이 발견된 웅포 역시 공주와 마찬가지로 곰나루인데 <일본서기>'웅신기'에도 말다왕(末多王)이 구마나리(久麻那利)에 도읍을 한 것으로 되어 있고 웅포의 고분축조 연대가 사마왕능보다 앞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입점리고분의 구조는 공주 송산리고분과 비슷하고 출토유물에서 금동관과 금동모, 금동신발은 나주의 신촌리고분 출토품과 비슷한데 일본열도의 구주 후나야마고분에서도 나오고 있어 문화의 일본열도 전파를 뒷받침할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가야왕족의 고분군에서 나주 신촌리고분이 가장 빠르고 구주 암호산고분이 370년대이며 후나야마고분은 380년대 것을 8세기에 이장 증축한 것이다.

 

그 다음이 입점리고분인데 이것이 <여지승람>에는 말통대왕(末通大王)의 능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는 무강왕(武康王)의 능이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이나리야마고분이 가장 나중의 것으로 봅니다.

 

일본열도의 암호산고분은 동성왕의 고조부 가야왕 아라사의 능이며 후나야마고분은 동성왕의 증조부이며 아라사의 장자 대언명의 능이고 이나리야마고분은 대언명의 9세손 이나리의 능입니다.

 

<일본서기>'신공기'

[비자발, 남가라, 훼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이에 군대를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의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 내려주었다. 이에 그 왕 초고 및 왕자 귀수 역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그때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읍이 자연 항복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 및 아라다와케, 목라근자등이 함께 의류촌에서 만나 서로 기쁨을 나누었다. 예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오직 치쿠마나카히코가 백제왕과 함께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라 맹세하였다]

 

기록의 주체가 일본열도(왜)로 되어 있으나 침미다례를 남만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로 보아야 합니다.

 

 

백제가 한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 영산강의 옹관묘집단이 어떤식으로 백제에 편입되는지 고분양식의 변화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를 고하고 강역을 확장하였는데 북은 패하에 이르고 남은 웅천에 한하며 서는 대해에 이르고 동은 주양에 이르렀다]

 

이 기록은 근초고왕의 기록으로 근초고왕은 고해진을 점령한 후에 영산강세력(가야)과 강역을 정하고 노령산맥을 기준으로 이북은 백제가 이남은 영산강세력이 자치권을 행사한 것으로 백제의 삼족토기가 노령산맥을 넘지 못했다.

 

이유는 백제가 해상교통의 요지인 고해진을 점령하므로 영산강세력을 간접적으로 지배하면서 나주의 농업과 수산물의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백제가 고구려에 패배하면서 영산강세력과 통합하게 되는데 백제사에 갑자기 나오는 '8성대족'이 바로 영산강세력이고 가야계왕족인 동성왕시대에 영산강세력이 백제의 중앙 정치제도에 '8성대족'으로 완전히 편입됩니다.

 

지도- 가야의 영토

 

<삼국사기>의 '왜'라는 기록도 가야이며 <일본서기>에는 임나가야, 대가야, 금가야. 아라가야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일본열도에는 '왜'도 없고 일본도 없었습니다.

 

'왜'라고 불린 세력은 한반도에서 백제에 밀려 일본열도로 진출한 가야였고 한반도의 가야는 4세기까지 호남과 영남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일본열도로 진출한 후에는 구주, 본주의 서쪽이 가야의 영토로 백제와 가야가 연합체로 성장합니다.

 

<삼국사기>의 백제기록에서 '8성대족'이라는 집단이 영산강유역의 가야세력으로 <성씨록>에서도 백제의 진씨(眞氏)와 가야의 김씨(金氏)가 나오고 백제의 담로제라는 것이 가야의 왕자, 공주의 분봉제와도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전북 익산의 입점리고분과 영산강유역의 나주 신촌리고분 유물이 흡사하고 일본의 구주 후나야마, 이나리야마고분 유물과도 비슷합니다.

 

후나야마고분은 동성왕의 증조부의 능이라고 <일본서기>와 <성씨록>에도 나오고 이나리야마고분의 주인공도 동성왕의 선조로 모두 가야왕 아라사의 장자 예진의 후손입니다.

*<성씨록>- '이나리'는 동성왕 증조부의 후손으로 기록됨

 

그리고 가야가 대륙에서 한반도로 들어온 백제에게 밀리기 전에는 경기, 충청도 가야의 영토로 보입니다.

 

그것은 가야의 성씨가 '김(金)'이고 철의 생산지이므로 '쇠(金)'자가 증명하듯 '빛땅'계열 지명들이 있는데 미추홀, 완산, 완주, 광산, 비사벌, 비자발, 삼량화, 추량화, 삼랑진, 밀양, 추화 등 충남부터 호남, 영남에 그런 지명이 있으며 이런 지명들은 특정한 부족만이 쓰는 겁니다.

참고- 가야계열 지명

http://blog.naver.com/casahoo/20001659010

 

백제의 비류계는 고구려(광개토왕)에게 패하여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가야와 일본열도에서 세력다툼을 하게 되고 백제의 온조계는 호남과 영남을 빼앗는데 <일본서기>'응신기'에 백제의 비류계 아신왕과 가야계 응신의 연합군에게 백제의 온조계 진사왕이 구원에서 전사하고 그 아들 권속들이 대거 일본열도로 망명합니다.

참고- 고대백제

http://blog.naver.com/casahoo/20001157436

 

그 후에 비류계 아신왕과 가야계 응신이 백제와 일본열도를 분리하여 한반도는 백제의 땅이 되고 일본열도는 가야가 대화왕조를 세우고 구주, 본주 서쪽지역을 차지하여 100년 이상 유지하다가 동성왕이후 가야의 김씨가 쇠퇴하고 백제의 부여씨(무령왕)가 일본열도도 장악합니다.

 

<삼국사기>에는 30년후에 서라벌신라에 가야의 영토가 넘어갔다고 되어 있는데 거짓기록으로 무령왕때부터 일본열도가 백제의 완벽한 속국이 되었는데 그 중간거점인 김해의 가야를 서라벌신라가 차지했다면 일본열도에 다니기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산강고분의 변화를 보면 3세기부터 고분이 거대화되었고 이후 6세기부터는 옹관묘가 점차 소멸되고 나주 흥덕리에서 은제관식이 매장되어 있는 횡혈식 석실분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한반도의 가야가 백제에게 흡수된 것입니다.

 

결국 백제에 흡수된 가야연맹(영산강과 김해)은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백제와 공동으로 지배하면서 성장한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