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상팔국 전쟁                                                  
                                                                    
조원영 | 합천박물관 학예사, 문화재 감정위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 변진사회에 국가적 사활이 걸린 큰 전쟁이 일어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일단 문헌자료를 훑어보기로 하자. 먼저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14년 가을 7월에 포상팔국이 가라를 침범해 왔으므로(물계자전에서는 아라로 쓰여있다) 가라왕자가 구원을 청해왔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하여 6부병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8국장군을 쳐서 죽이고 포로 6천명을 잡아 돌아왔다(『삼국사기』권2, 신라본기2, 내해이사금 14년조)
→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加羅 勿稽子傳皆作阿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 與伊伐飡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三國史記』卷2, 新羅本記2 奈解尼師今 14年條)


물계자는 내해이사금때 사람이다.(중략) 이때에 포상팔국이 함께 모의하여 아라국을 치니 아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의 손자 내음을 시켜 근군과 6부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니 마침내 팔국병이 패하였다.(중략) 그 후 3년에 골포, 칠포, 고사포 3국인이 갈화성에 와서 공격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구하니 3국의 군사가 대패하였다.(하략)(『삼국사기』권48, 열전8, 물계자전)
→ 勿稽子 奈解尼師今時人也(中略)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請救 尼師今使王孫 音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中略) 後三年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下略)(『三國史記』卷48, 列傳8 勿稽子傳)


『삼국유사』에는 물계자전에 포상팔국의 전쟁 기록이 전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0대 내해왕 즉위 17년 임진에 보라국, 고자국, 사물국 등 8국이 힘을 합하여 변경을 내침하였다. 왕이 태자 내음, 장군 일벌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으니 8국이 모두 항복하였다.(중략) 10년 을미(내해이사금 20년)에 골포국 등 삼국 왕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갈화를 공격하니(굴불인 듯하니 지금의 울주)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으니 삼국이 모두 패하였다.(하략)(『삼국유사』권5 피은8 물계자)
→ 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保羅國古自國(今固城)史勿國(今泗州)等八國 倂力來侵邊境 王命太子音 將軍一代等 率兵拒之 八國皆降(中略) 十年乙未 骨浦國(今合浦也)等三國王 各率兵來攻竭火(疑屈弗也今蔚州) 王親率禦之 三國皆敗(下略)(『三國遺事』卷5 避隱8 勿稽子)


포상팔국의 현재 위치를 알아보면 낙동강 서쪽 남해안 지역이다.

골포국( 마산,창원),칠포국(칠원),고사포국(진해 또는 고성),
고자국(고성,고사포국 동일 지역 간주하는 견해있음),사물국(사천),보라국(위치미상)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3세기 초에 가야제국 가운데 포구에 면한 여덟 나라가 공모하여 같은 가야지역인 가라 또는 신라를 두 번이나 대규모로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우선 이 전쟁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정리해보는 것이 순리일 것 같다.

1.포상팔국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먼저 사로국(斯盧國)이 3세기대 진한지역을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해 가던 과정상에 일어
  난  일련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이 시기 사로국의 활동무대가 낙동강으로 확대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2.그에 대해 4세기 전반대 해상교역권을 놓고 안라국과 포상팔국 이 김해를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구원으로 패배하였으며 이후 가야는 함안의 안라국과 김해의 가야국으로 분열되었다는 견해 고성 고자국을 중심으로 남해해상교역권 장악을 위해 김해가
야세력을 공격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3.또 한군현의 쇠퇴와 인접한 사로세력권의 팽창으로 김해의 가야세력이 대외교역권을 상실하였으며 포상팔국전쟁은 김해의

 구심체로서의 역할 상실로 일어난 전쟁이었다는 연구가 있다.

4.한편 내해왕대의 기록을 실제로는 진흥왕대의 사실로 보고 6세기 전반 백제의 남부가야지역에 대한 진출에 위협을 느낀 아
  라가신라에 도움을 구했으며, 이에 백제는 포상팔국을 움직여 아라가야를 공격하였다는 해석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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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해 이사금의 태자 석우로 장군]

AD 184년 아달라 이사금이 재위 31년만에 승하했다. 이어 9대 임금 벌휴 이사금 (석탈해왕의 아들 구주각간과 김수로왕의 딸 지진래례의 아들임), 10대 임금 내해 이사금, 11대 임금 조분 이사금, 12대 임금 첨해 이사금이 차례로 즉위했다. 석우로(일본서기 우류조부리지간)는 10대 임금 내해 이사금의 태자이며 용맹한 장수였다.

나해 14년(209) 가락국 주변의 포상팔국(골포 등 남해안 일대의 8개의 작은 나라)이 가야국을 침략하자 가락국의 왕자가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나해 이사금은 태자 우로에게 6부의 군사를 동원하여 가락국을 돕도록 했다. 우로는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8국의 장수들을 죽이고 사로잡혔던 가락국 병사 8천여명을 구출해 돌아왔다.

228년 내해 이사금은 승하할 때 태자 우로보다 사위 조분이 사리판단이 명확하기 때문에 다스리는 일은 사위에게 맡기고 나라를 지키는 일을 우로에게 맡겼다. 이리하여 사위 조분이 임금이 되고 황태자가 대장군이 되었다. 석우로는 대장군이 되자마자 옆나라인 감문국을 쳐서 그 땅을 서라벌의 군으로 삼았다. 그러자 감문국 왕은 졸지에 왕에서 일개 군의 책임자가 되었다.

조분 4년(233) 왜인이 동해안으로 침범하자 우로는 바람을 이용하여 왜의 병선에 불을 질러 이들을 물리쳤다. 조분 16년(245) 고구려가 변방을 침공했다. 석우로는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이기지 못하고, 마두책까지 물러나 방비만 했다. 때는 겨울. 추위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하는 군사들을 보고 우로는 직접 나무를 해다 불을 피워 군사들의 몸을 녹이게 했다. 그는 가슴이 따뜻한 남자였다.

247년 속국 사량벌국(경북 상주)이 백제와 가까워지자 사량벌국을 정벌했다. 이리하여 명장 석우로는 나라 안팎으로 그 명성을 널리 떨쳤다. 그러자 교만해졌는지 석우로는 말실수를 하게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12대 첨해이사금 3년 (서기 249년) 4월에 왜인이 서불감(서울시장) 우로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얘기]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석우로가 접대를 맡았는데 사신을 통해 석우로의 명성이 왜국에서도 자자하며 그의 이름만 듣고도 울던 아이가 그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랬더니 석우로는 이렇게 거만한 말을 했다. <으하하! 나의 명성이 그토록 자자하다니, 언제 한번 왜국에도 쳐들어가, 너희 왕을 소금집 종으로 만들고, 왕비는 부엌데기로 만들리라. 하하!>
농담이라도 너무 심한 말을 했다고 생각한 사신은 돌아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왜왕은 <무엇이! 날 소금집 종으로 만들어? 절대 용서 못해?>하며 즉시 군사를 이끌고 서라벌을 치게 했다. 이리하여 왜군이 침공하자 첨해 이사금은 석우로의 책임으로 돌려 그를 왜군에게 내어주었다. 왜인들은 석우로는 나뭇단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였다.

이에 석우로의 아내는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벼르다 13대 임금 미추 이사금 때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자신의 집에서 그 사신을 접대하겠다고 자청했다. 왜국의 사신에게 주연을 베풀자 사신이 취하여 석우로의 아내 손을 잡았다. 그러자 석우로의 아내는 왕족 희롱죄로 즉시 그 사신을 마당으로 끌어내 불태워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왜군은 금성까지 침공했으나 패하여 돌아갔다. 그러나 신라의 피해도 컸다. 석우로의 말 한 마디와 그 아내의 복수가 나라를 위태롭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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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본토를 대화왕조가 일시관장(서기 405년∼426년)

○ 석우로전과 신공기  
  
삼국사기 석우로전과 박제상전을, 서기 신공전기 10·12월조 및 신공기 5년조와 비교·검토해본 결과 신공기의 미사흔 인질건은 실사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사기 박제상전의 인질구출건도 실사로 믿기 어렵다.


△ 석우로전과 신공기 비교

먼저 서기 신공섭정전기 12월조에 이설이 아래와 같이 둘 있다.    

이설1

『...즉시로 황후는 남장하고 신라를 쳤다. 이때 신이 머물며 길을 인도하였다. 이 때문에 배에 따른 파도가 멀리 신라 나라 안에까지 미쳤다. 이에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이 마중 나와 무릎을 꿇고 왕의 배[王船]를 잡은 채로 머리를 땅에 대고 "신은 이후로 일본국에 계시는 신의 아들에게 내관가(內官家)가 되어 끊임없이 조공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이설2

『신라왕을 사로잡아 해변에 이르러 무릎근을 뽑고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참하여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재(新羅宰)로 하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왕의 처는 남편의 시신이 묻혀있는 곳을 몰라서 혼자서 재를 꾀려는 마음을 먹었다. 곧 재를 꾀며 말하기를 "그대가 왕의 시신이 묻힌 곳을 알려주면 반드시 두텁게 보답하고 또 그대의 처가 되겠다"라고 했다. 이에 재는 꼬드기는 말을 믿고 몰래 시신이 묻힌 곳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왕의 처와 국인이 공모하여 재를 죽였다. 다시 왕의 시신을 꺼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그때 재의 시신을 왕의 묘토 밑에 묻고 왕의 관을 들어 그 위에 내려놓고 "존비의 순서는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천황이 듣고 다시 분노하여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멸하려 하였다. 이때 군선이 바다에 가득히 떠갔다. 신라의 국민이 모두 두려워 어쩔 줄을 몰랐다. 서로 모여 공모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

석우로전 후반

『첨해왕 7년 왜국사신 갈나고(葛那古)가 빈관에 있을 때 우로가 주관하여 접대하면서 농담을 하기를 "조만간 당신네 왕을 소금구이 종[鹽奴]으로 하고 왕비는 밥짓는 종[찬婦]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했다. 왜왕이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은 궁에서 나가 유촌에 머물렀다. 우로가 아뢰기를 "지금 이 환란은 제가 말을 삼가지 않은 탓이니 그 감당은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왜군에 다다르자 이르기를 "전일의 말은 농담이었는데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왜인들은 대답도 않고 그를 붙잡아 섶더미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이때 우로의 아들은 어리고 약해 걷지 못했으므로 다른 사람이 안아서 말에 태워 돌아왔는데 뒷날 흘해왕이 되었다. 미추왕때 왜국의 대신이 와서 방문했는데 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부탁하여 사적으로 왜국 사신을 접대하게 되었다. 그가 흠뻑 취하기에 이르자 장사를 시켜 뜰에 끌어내려 불태워 이전의 원수를 갚았다. 왜인들은 분히 여겨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공통점 두 가지

존비의 순서

석우로전에서 석우로가 한 농담 「조만간 당신네 왕을 소금구이 종으로 하고 왕비는 밥짓는 종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한 말과 신공기 이설2에서「재(宰)의 시신을 왕의 묘토 밑에 묻고 왕의 관을 들어 그 위에 놓고 "존비의 순서는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약간 각색은 됐지만 분위기가 흡사하다.

원수 갚는 일

역시 각색은 됐으나 석우로전에서 석우로를 신공기의 신라왕으로, 석우로 부인은 신공기의 왕비로 놓으면 부인이 우로의 원수를 갚는 일은 양쪽이 거의 같은 것이다.


△ 인물비정

우류조부리지간은 조분왕

우류조부리지간은 이름의 발음을 볼 때 석우로와 동시대의 신라 조분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열전에서는 원수 갚는 일이 후대의 미추왕 때 사건으로 나와 연대가 어긋난다.

갈나고는 가라인

왜국 사신 갈나고는 가라인이다. '葛/曷'은 '加羅'의 준말로 기·기상에서 흔히 쓰이고 있다. '가라'를 받침을 붙여 반도식으로 발음하면 '갈'이 되기 때문이다. 기·기상에 '갈성(葛城)'이란 말도 자주 나오는데 원래 가야계 지명으로 쓰이고 있다. '那'는 '나라'라는 뜻으로 城, 羅 등으로 대치해 쓸 수 있는 말이고 결국 葛城>葛那는 '加羅羅>加羅國'이라는 뜻으로 가야일 수밖에 없다. 이름만은 '古'다. 이 古도 열도어 고[子]와 음이 같아 갈나고는 단순히 가라인을 달리 표현한 말로 보인다. 갈나>'가라라'란, 아라가야=아라국>'아라라'와 같은 방식의 표기다.

우도주군도 가라인

왜의 장군 우도주군도 마찬가지로 가야인이다. '于道'는 기·기상에 나오는 토도(토道)와 같이 '우지'로 읽어야 할 것 같다. 이 '于'는 기·기상에서 가야계를 지칭하는 '우사기[兎]'의 '우'이고 가야계 왜왕인 응신의 이복동생 진언이 서기 응신기에는 응신의 태자 우지.노.와끼이라쯔꼬[토道稚郞子]황자로 등장한다. 와께/와끼[稚]는 응신의 아우라는 의미다. 또한 '우지[토道/宇治]'는 가야계 지명으로 자주 쓰이고 있기도 하다.  
              
가야계 지명 중에는 구주의 우사[宇佐]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우사[宇佐]도 우사기[兎]에서 나온 '우사'이고 원래는 고사기 신대기 대국주신조에 나오는 이나바[稻羽/因幡]의 시라우사기[白兎]설화에서 나온 말이다. 시라우사기[白兎]>[시라+(우사)+기]=시라기[新羅]+우사[宇佐]로 분해된다. 시라우사기[白兎]설화 자체가 가야와 백제의 열도쟁탈전을 은유하여 꾸민 설화다. 백제측은 귀수대왕을 모델로 창작한 인물 와니[王仁]로 대표시키되 같은 음의 와니[鰐]>악어로 치환하고 가야측은 국호 신라를 넣어 시라기[新羅]+우사기[兎]=시라우사기[白兎]>흰토끼로 치환하여 설화를 꾸민 것이다.

기·기상에서 가야를 시라기[新羅]라고 하고 있는데 그 이전에 가야도 '신라'라는 국호를 썼던 것이다. 그것이 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의 아시라[阿尸良]>新羅인 것이다. 아시[阿尸]는 우리말 '아침'의 사국시대 고어형태인 '앛', '앚', '앗' 중에서 '앗'에 명사형어미 '이'를 붙여 받침 없이 읽은 것이고 한역하면 朝, 初, 新 셋 중에서 '새[新]'에 해당하는 것이다. 라[良]는 고어로 나(那), 라(羅)와 같은 말로 쓰였으므로 아시라[阿尸良]는 신라인 것이고 천일창의 구주신라이기도 하고 아라가야의 이칭이었다.

우도주군을 의미로 풀어보면 '붉을 朱'는 왕을 상징하는 색깔이고 君도 王이므로 '우지[于道]왕'이라는 뜻이 되어 대화왕조의 2대왕 진언으로 판단된다. 진언은 대륙기록에도 왜왕 '珍'으로 기록되어 있고 하리마[播磨]풍토기에는 우지[宇治]천황이라고도 하고 있다. 우지[宇治/토道]라는 이름도 '이'와 '으'가 교체되어 쓰이는 음운현상을 이용하여 진언의 본명인 우즈[珍]>'우지'로 놓고 한자를 바꾼 이름이다. 따라서 '우지.노.기미[于道君]'는 곧 '우즈.노.오호기미[珍王]'인 것이다. 아라가야왕 아라사등의 삼자로서 원래 성씨가 김씨이므로 본명이 金珍인데 성씨록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大和宿니; 出自神知津彦命也 神日本磐余彦天皇 從日向地向大倭洲 到速吸門時 有漁人乘艇而至 天皇問曰 汝誰也 對曰 臣是國神 名宇豆彦...중략...天皇嘉之 任大倭國造 是大倭直始祖也(대화국지기)

이 내용은 서기 신무전기에 진언이 등장하는 기사 그대로다. 知津彦이라는 이름도 있고 아라사등의 계자지만 신분이 낮은 국신으로서 기·기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중 유일하게 신별분류에서 地祇로 나온다. 이름이 우즈히꼬[宇豆彦]라고 하고 있는데 우즈히꼬[珍彦]를 한자만 바꾼 것이다. 히꼬[彦]는 존칭이다. 대화왕조의 2대왕이 되어 자신 포함 왕이 셋 나온 가문이므로 대왜국조로 임명하고 대왜직의 조가 되었다고 한 것이고 후손 성씨도 大和를 넣어 창씨를 한 것이다. 대왜직을 왜직이라고도 한다.                  
 
가라칠국 백제가 반납

응신천황 재위(서기 390년-426년) 중에 아신왕이 고구려에 시달릴 때 원군을 보내 도와주고 서기 369년 초고대왕대에 백제에 빼앗겼던 가라본국을 일시적으로 도로 회복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사도 두 번이나 서기에 나오고 이때 진언이 건너와 관할했었던 것을 암시하는 기사도 있다.  

서기 응신기 39년 2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百濟直支王 遣其妹新齊都媛以令仕 爰新齊都媛 率七婦女而來歸焉 > 백제 직지왕이 그 누이 신제도원을 보내 섬기게 했다. 신제도원은 7인의 부녀를 거느리고 귀화했다』  

웅략전기(안강 3년 8월)에도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圓大臣)伏願 大王奉獻臣女韓媛與葛城宅七區 請以贖罪 > (원대신이) "엎드려 원하옵건대 신의 여식 한원과 갈성의 집[宅] 일곱 구를 대왕께 바칠 터이니 죄를 속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위의 두 구절이 바로 가라의 대화왕조가 신공기 49년조에 나오다시피 초고대왕대에 백제에게 빼앗겼던 가라칠국을 이때 도로 반환 받았다가 다시 백제관할로 넘어간 것을 은유한 기사로 본다.    

신제도원과 한원        

'신제도원'과 '가라히메[韓媛]'가 대응되고 "'7인의 부녀"와 "갈성의 집 일곱 구"가 정확히 대응된다. 서기에는 본문에서도 영토 또는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광범위하게 쓰고 있는데 위의 "7인의 부녀"도 신공기 49년 3월조의 '가라칠국'을 은유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신제도원에서 '新'은 아라가라의 고명 新羅에서 딴 것이고 '齊'는 왕의 서열을 (大王>王>侯王)=(大藏>齊藏>內藏)으로 은유한 경우도 많은데 그 중 제장을 가리키며 왕에 해당하는 것이다. 쯔[都]는 노[之]와 같고 원(媛)은 영토를 여성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말을 바꾸면 "가라왕의 땅"이 되는 것이다. 가라히메[韓媛]는 역시 의인화기법으로 영토를 은유한 것이고 가라구니[韓國]>가라국이라는 뜻이며 갈성>가라성>가라국이고 "갈성의 집 일곱 구"가 역시 '가라칠국'을 축소비유한 것이다. 유사 기이1 진한조에 보면 씨족들의 마을을 '댁(宅)'으로 표현하고 있다. 진한의 일파였던 가라의 소국들을 마을 또는 집으로 축소비유한 것이다. 집이든 마을이든 결과적으로 의미가 달라질 것은 없다.  

전지왕대에 반환

이 가라칠국을 가라의 대화왕조가 반환 받은 시점은 위에서 보다시피 직지왕(=전지)이 응신에게 주는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전지왕즉위 즈음해서인 것 같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기사가 있는데 응신기 37년조를 보면 아지사주(=아신)와 도가사주(=전지)에게 오(吳)에 가서 공녀를 구하게 했다고 나오는데 역시 뭔가 영토협상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吳王이 4부녀를 주었다고 했는데 서기상의 오국은 백제이므로 아신왕이 살았을 때는 4개국 정도였던 것이 전지왕이 즉위한 후에 남해안 7국을 다 반환한 것 같다.  

백제를 오국으로 표기한 것은 백제라는 국명을 가리기 위해서였고 [반도어 (오)다>반도어이두 (吳)다=열도어 (구)루]에서 (吳=구)로 놓고 구다라[百濟]>구다라[吳國]로 바꾸어 쓴 것이다. 국(國)은 '땅'의 이두 달[達]>다라(多羅)와 같으므로 구[吳]+다라[國]=구다라[百濟]로 된 것이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가라본토는 아신·응신의 백제·왜분립을 통해 백제가 관할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태왕비문에서 보다시피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여러 차례 충돌할 때 등장하는 왜는 전부 당시의 대화왕조의 응신이 보내준 가라군이므로 고구려·신라연합군과 백제·가라연합군이 충돌한 것이다. 이때 열도에서 건너온 가라군의 장수가 응신보다 훨씬 젊은 진언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가라본국 진언이 일시 관장

이 가라칠국을 진언이 건너와 관할했다는 것은 인덕전기에 나오는데 "왜직의 조 마려"의 아우 오자롱이 韓國에 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가라구니[韓國]=가라구니[加羅國]다. 위의 성씨록 대화숙니조에서 본 대왜직은 왜직과 같고 그 조는 진언이다. 말하자면 마려도 진언이고 오자롱도 진언인 것이다. 진언은 아우가 없었으므로 이때도 일인이역이다. 민달기 3년 10월조에 「선사 왕진이의 아우 牛에게 조하여 津史라는 성을 주었다」라고 하는 것과 꼭 같은 기법이다. 왕진이는 진사왕인데 없는 아우를 들먹여 辰斯와 같은 음의 津史라는 성을 주었다면서 왕진이가 진사왕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인덕전기는, 전지왕즉위 무렵 반환 받은 가라칠국을 관할하다가 응신이 몰할 즈음 열도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오자롱이 반도에서 열도로 도로 건너오는 상황인데 이때 반도로 진입한 세력이 바로 이 기사에 나오는 무내숙니의 후손 어우숙니이고 출운신의 조로 나오며 이 인물이 다름 아닌 백제 비유왕인 것이다.

백제 비유왕은 열도출신의 무내 후손

오우[어宇]는 출운국 지명 오우[意宇]와 같고 신대기 상7단에 출운신의 원조가 천수일명이라 했는데 이가 곧 귀수대왕의 장남 무내숙니다. 천수일명은 신대기 하9단 천손강림장에서 위원중국(=열도)에 보냈더니 3년이 지나도 보고가 없다 했고 신대기 상5단 사신출생장에서는 3년이 지나도 다리로 일어서지 못하는 질아로도 나온다. 출운신의 원조가 곧 출운국조의 조라는 뜻이다. (어=삼수변+於)  

1) 出雲宿니; 天穗日命子 天夷鳥命之後也(좌경천손)
2) 出雲臣; 天穗日命十二世孫 제濡渟命之後也(좌경천손)
3) 出雲臣; 天穗日命子 天日名鳥命之後也(산성국천손)
4) 出雲臣; 天穗日命十二世孫 宇賀都久野命之後也(하내국천손)
5) 平群朝臣; 石川朝臣同氏 武內宿니男 平群都久宿니之後也(좌경황별)
6) 平群文室朝臣; 石川朝臣同祖 都久宿니之後也(좌경황별)
7) 都保朝臣; 平群朝臣同祖 都久足尼之後也(좌경황별) / 스꾸네[足尼]=스꾸네[宿니]  
8) 雀部朝臣; 建內宿니之後也(좌경황별)

1)과 3)에서 천수일명의 아들이라고 나오는 아메.노.이나도리[天夷鳥]와 아메.노.히나도리[天日名鳥]는 동일인이고 (출운국조의 조)라고 했고 천수일명 그 자신이다. 귀수대왕을 신공기에서 흰깃큰수리[羽白熊鷲], 경행기에서 백조, 성씨록에서 봉황새[鸞]로 은유하면서 장남은 새와 관련된 이칭들을 지어 썼기 때문이다. 또 2)와 4)에서 그 십이세손이라는 인물들도 새와 관련된 이름인데 사다새(弟+鳥), 우가[宇賀]>우가[羽化]>'새깃'인 것이다. 또 4), 6), 7)의 쯔구[都久]는 무내숙니의 후손 쯔구.노.스꾸네[木토宿니]와 같은 이름이고 5)에서 보다시피 무내 아들 헤구리쯔구[平群都久]에서 갈라진 성씨다. 쯔구[都久/木토]도 부엉이를 말하고 역시 새[鳥]인 것이다. 8)에서 보다시피 '참새 작(雀)' 자가 들어간 후손 성씨까지 있을 정도다.  

이 천수일명이 서기 숭신기 60년조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武日照命(一云 武夷鳥 又云 天夷鳥) 從天將來神寶 藏于出雲大神宮 是欲見焉 則遣矢田部造遠祖武諸隅(一書云 一名大母隅也) 而使獻 當是時 出雲臣之遠祖 出雲振根主于神寶...』  

『무일조명(무이조 또는 천이조라고 한다)이 하늘에서 가져온 신보를 출운대신궁에 간수하였는데 (천황이) 그것을 보고싶어했다. 시전부조의 원조 무제우(어떤 책에는 대모우라고도 한다)가 가져다 바쳤다. 당시에 출운신의 원조 출운진근이 신보를 주관하고 있었는데...』                                        
       
무일조명(=무이조/천이조)도 무내숙니이고 하나 같이 새로 은유하고 있다. 위의 성씨록 1), 3)의 천이조명, 천일명조명과 같은 이름이다. 신대기 상 7단에서 출운신의 원조가 천수일명이라 했는데 이가 곧 출운신의 원조 출운진근이자 무내숙니이고 무일조명/천이조명/천일명조명/무이조 등도 전부 무내숙니의 이칭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보가 곧 동진 태화 4년생 칠지도인 것이다. 하늘[天]은 역시 백제다.  

신대기 상8단 이설4에서 소잔명존이 아들 오십맹신을 데리고 신라국(=구주 천일창의 신라)에 내려 소시모리[曾尸茂梨]에 있다가 진흙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 출운의 파천 상류의 조상봉으로 갔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이 '鳥上'이 곧 음도 같은 도리가미[鳥上]>도리가미[鳥神]로서 역시 천수일명 즉 무내숙니를 가리키고 소잔의 아들이라는 오십맹신도 무내숙니인 것이다. 출운의 지명을 따서 붙인 어우숙니(=비유왕)는 무내계인 것이다. '소시모리'는 구주신라의 동쪽에 있던 웅습국을 지칭한다.  

무내가 칠지도를 가지고 출운에 있는 소잔명존에게 처음으로 나타나는 장면이 신대기 상8단 말미의 소언명명설화인데 사사끼[초료]의 깃털로 옷을 해입은 이 스꾸나히꼬나.노.미꼬또[少彦名命] 역시 무내이며 이것은 결국 무내로 비정되는 인덕의 화풍시호 오호사사끼[大초료]>큰새새끼로 연결되고 있다. * 초료=(焦+鳥)(僚-人+鳥)    

어우숙니에 대해 「'國造系圖'는 "三島足努命>어宇足努命>宮向宿니"로 유래한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2/227p/주13>」라고 하고, 스꾸네[足努]로 읽으며 三島足努가 三島宿니이므로  성씨록을 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三島宿니; 神魂命十六世孫 建日穗命之後也(우경천신)

신혼명은 신황산영존의 준말이고 출운계 신으로서 출운을 개척한 소잔명존으로 비정되며 다께[建]는 건내숙니에서 연결고리로 따고 히호[日穗]는 '天穗日命'의 '호히[穗日]'에서 한자순서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마치 신대기 상5단 월신의 이칭 '월궁(존)'을 '궁월(군)'으로 바꾼 것과 같은 경우다. 신대기 상8단 이설4에서 소잔의 아들 오십맹신도 무내숙니로 비정되는데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소잔(=아라사등)의 후손으로 등재해둔 것은 무내가 백제를 배신하고 가야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대기 하11단 신무의 가계를 소개하는 기사에서도 무내가 언파불합존(=소잔명존/아라사등)의 장남 오뢰명으로 소개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경우다. 이쯔세[五瀨]라는 이름도 세[瀨]의 발음이 반도어 새[鳥]와 구분이 안되므로 같은 것이다. 이쯔[五]>이쯔[嚴]로 치환하여 음독하면 겐[嚴]이 되어 겐[建/健]과 같이 '크다'는 뜻이 되니 '큰 새'가 되는 것이다.  

가라본국 재차 백제가 차지                

인덕전기에서는 마치 어우가 오자롱을 불러 같이 열도로 온 것처럼 되어 있으나 어우가 군사를 출동시켜 백제로 가자 그걸 보고 사정이 다급해진 진언이 건너와 응신의 후손을 제압하고 대화왕조의 2대왕이 된 것인데 이 스토리는 인덕전기에 태자 토도치랑자(=진언)가 대산수황자(=응신 아들)를 익사시키는 설화로 실려있다. 진언이 본토를 관장한 것은 전지왕 즉위 무렵부터 응신이 몰한 서기 426년까지 약 20년 정도다.  

그런데 이러한 사정을 뒷받침하는 기사가 있는데 위에서 본 웅략전기(안강 3년 8월)를 다시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圓大臣)伏願 大王奉獻臣女韓媛與葛城宅七區 請以贖罪 天皇不許 縱火燔宅 於是 大臣與黑彦皇子眉輪王 俱被燔死 > (원대신이) "엎드려 원하옵건대 신의 여식 한원과 갈성의 집 일곱 구를 대왕께 바칠 터이니 죄를 속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천황은 듣지 않고 불을 질러 집을 태웠다. 이때 대신은 흑언황자·미륜왕과 더불어 불에 타죽었다』  

응신기에서는 단순히 받은 것으로 되어있으나 여기서는 집을 불태웠다 하여 마치 전쟁을 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고 포기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쯔부라.노.오호미[圓大臣]를 보면 고사기 안강기에 쯔부라.노.오호미[都夫良意富美]로 나오고 성씨가 갈성씨인데 갈성습진언의 후손이다. 고사기 효원기에도 건내숙니의 아들로 가즈라기.노.나가에.노.소쯔히꼬[葛城長江曾都毘古]가 나오는데 소쯔히꼬[曾都毘古]=소쯔히꼬[襲津彦]이고 사실은 무내, 건내, 습진언 전부 동일인물이다. 성씨록에도 갈성씨를 찾아보면 갈성습진언의 후손으로 나온다.

葛城朝臣; 葛城襲津彦命之後也(좌경황별)

결국은 위의 원대신도 갈성원대신이고 무내숙니의 후손이므로 인덕전기에 나오는 어우숙니와 동일인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가라의 대화왕조 응신이 전지왕대에 반환 받아 진언이 관할하고 있던 가라본토를 무내의 후손인 어우숙니(=원대신/비유왕)가 쿠데타로 백제왕권을 잡을 때 진언은 열도로 도로 건너와 응신의 후손을 제압하고 왕이 되면서 가라본토를 포기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비유왕이 백제왕이 되고 열도에서는 진언이 대화왕조의 2대왕이 되면서 도로 백제땅이 된 것이다.  
                  
쯔부라[圓]라는 말은 원래 '둥근 것'을 뜻하는데 무내의 이칭 시고오[醜男/色男], 추대사(醜大使) 등을 보면 '쯔부[潰]레루'>(찌부러지다, 찌그러지다)라는 뜻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얼굴이 찌부러진 추남"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내가 본국을 배신하고 그 후손이 다시 정통왕위계승라인을 단절시키고 쿠데타로 위에 올랐으니 그럴 만도 한 것이다.                                    
     
이 열도어 '쯔부레루'라는 동사도 분명히 반도어 '찌부러지다'가 원형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어간 '쯔부'와 '찌부'는 '으'와 '이'가 교체되어 쓰이므로 같은 것이다. '러'까지 포함해도 (찌부러>쯔부레)로 사실상 같은 것이다.  

위의 본문에서는 원대신이 죽었다고 했으나 열도출신으로서 백제왕위에 오르면서 열도에서 사라졌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같이 죽었다는 미륜왕은 아신왕으로 비정되는데 사실은 비유왕의 쿠데타로 서기 427년 아신의 직계손인 구이신왕이 쫓겨났으므로 아신의 왕통이 끊겼다는 것을 은유한 것이다. 굳이 비정하자면 구이신왕을 지칭한다고 보는데 선의 이름으로 후손을 흔히 나타내기도 하므로 이상할 것은 없으나 죽었다는 것은 왕권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신화·설화 구성기법에서 아이의 출생은 새로운 지배권력의 탄생이나 왕조의 성립을 뜻하므로 사람이 죽는 것은 역으로 왕권상실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서기의 연대를 보면 응신을 재등재한 웅략이 즉위하기 전의 일로 나오므로 웅략이 진언을 등재한 인물로 보이기도 하지만 진언은 국신이므로 소외시키고 그 자리에 천신인 응신으로 메운 것이다.  
              
바로 이 전지왕·구이신왕 재위기간 동안에 경주신라와 가라의 진언 사이에 모종의 직접적인 마찰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되는데 그런 분쟁을 가라측은 8세기에 진한식 이름과 지명들을 넣어 신라라는 국호에 경주신라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실어 신공의 신라정벌기로 꾸며 넣은 것으로 보이고 사기저자들은 서기 신공기를 보고 충신상을 하나 만든 것으로 보인다.    

비유왕은 열도에 기반이 탄탄

비유왕을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不破連; 出自百濟國都慕王之後 毗有王也(우경제번)
春野連; 出自百濟國速古王孫 比流王也(우경제번)
面氏; 春野連同祖 比流王之後也(우경제번)
汶斯氏; 春野連同祖 速古王孫 比流王之後也(우경제번)
岡屋公; 百濟國比流王之後也(산성국제번)  
廣井連; 出自百濟國避流王也(섭진국제번)  
己汶氏; 春野連同祖 速古王孫 汶休奚之後也(우경제번)

백제 比流王이 초고대왕의 손자로 나온다. 그런데 일본왕실의 시조가 초고대왕이므로 그 선대는 일본고대사서에 등장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비류왕도 발음이 비슷한 비유왕을 달리 표기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광정련조의 피류왕의 경우도 마찬가지 경우다. 히류[比流]와 히류[避流]는 같다. 초고대왕의 손자에 문휴해라는 이름도 보이는데 사서상에 등장하는 손자로는 무내, 침류, 진사 셋뿐이었으므로 초고대왕의 손자로는 볼 수 없다. 위와 같이 비유왕은 열도출신으로서 쿠데타로 백제왕권을 차지할 수 있을 만큼 열도에 기반이 탄탄했었던 것이다.    
  
호태왕비문의 왜는 대화왕조의 가야군

호태왕비문에 보이는 왜는 가라가 열도에 세운 대화왕조의 가야군이었다. 그 전부가 가라왕 아라사등의 중자 응신의 재위기간인 서기 390년∼426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호태왕비문에 보이는 신묘년조의 왜는 서기 390년에 즉위한 대화왕조 초대왕인 응신이 아신과의 백제왜분립 밀약을 지키기 위해 진사왕에 대한 역쿠데타를 도와준 사건이었다. 그것이 서기 390년 진사왕의 구원에서의 사냥(1차전역), 391년 국서대도(2차전역)와 횡악지서(3차전역)에서의 두 번에 걸친 사냥이고 마지막으로 서기 392년 구원에서의 4차전역에 성공하여 아신왕이 즉위하는 것이다. 고구려인들도 가야인을 왜라고 불렀던 것이다.

※ "호태왕비문의 왜" 추후 참조

같은 시기의 사기기록    

사기 구이신기 8년 12월조 「왕이 훙했다」  
사기 비유기 원년조 「구이신왕의 장자다[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용모가 잘 생기고 말솜씨가 있어 사람들이 받들고 존중하더니 구이신왕이 훙하자 왕이 되었다」        

구이신왕은 비유왕의 쿠데타에 의해 열도로 망명한 것이 일본서기 11년 7월조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백제국에서 도망하여 귀화하러 온 사람이 있었다. 자칭 귀신(貴信)이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귀신은 오국인이라고도 했다. 반여의 오금탄 강수옥형마려 등은 그 후손이다』  

음훈이 '구이신[貴信]'이라고 되어 있는데 久爾辛은 이것을 이두식으로 한자를 바꾼 것이다. 오국인이 곧 백제국인이다. 구다라[吳國]=구다라[百濟]다. 서기 응신기 25년조에 나오는 久爾信이라는 이두식 시호도 8세기초에 서기저자들이 지은 것이고 사기저자들은 서기를 보고 옮긴 것이다.  

사기저자들은 구이신왕과 비유왕의 관계를 다 알고서도 「구이신왕의 장자다」라고 써놓고 「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라는 애매한 주를 달아 비유왕이 혈통에 문제가 있다는 것만 희미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용모가 잘 생기고 말솜씨가 있어 사람들이 받들고 존중하더니」라는 것도 상투적인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비유왕의 직계 조인 무내숙니가 백제왕실을 배신했다고 서기에 추남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사기에서는 거꾸로 쿠데타를 일으킨 비유왕을 미남이라 하고 있다.

사기의 이 기사들도 전부 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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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역사의 비밀 www.coo2.net   네티즌게시판: Re 가야와 임나(왜)  글쓴이: 고대사산책

1) <산책님의 글에서 "360년경부터 반도와 열도에 걸쳐서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을 읽은적이 있는데, 이시기의 반도에서의 가야는 김수로왕의 가야가 아니고 임나(왜)인가요?>      

이 전쟁이 난 것이 가야가 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수로왕의 가야로 봅니다. 임나가라=아라가야=금(관)가야=대가라(고령이 아님)이니까요. 신찬성씨록에 가라왕족들 성씨가 김씨라고 나와 있어요.


2) <산책님의 글 여기저기서 가야와 왜가 동일시 되는 곳이 여러번 있는 것 같은데  북방민족의 후손인 가야인을 체구가 조그마한 "왜인"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 까요?>

가야인은 전신이 弁辰이지요? 변진은 변두진한의 준말이고 변두란 편두를 가리키고 아이가 나면 머리 연골이 굳기 전에 이마나 정수리를 나무나 돌로 눌러 편두를 만들었다고 하지요(김해 예안리 고분에서 많이 나왔음). 이마를 누르면 머리가 뾰죽하게 보이지요. 그래서 '고깔 弁'자를 쓴 겁니다. 머리가 뾰죽하니 고깔을 쓴 것처럼 보인다는 거지요. 그래서 진한은 진한인데 변두습속이 있는 진한이다 라고 해서 변진이라 했다는 거지요.    

근데 김수로왕상이 구주 백목묘견궁에 지금도 있는데 한복입은 정수리편두의 신선상이예요. 시라기[白木]=시라기[新羅]>阿尸良이지요. 정수리편두를 하면 키가 당연히 작아지지요.

게다가 호태왕비문상의 왜는 대화왕조의 응신이 아니면 아무데도 갖다붙일 데가 없어요. 비문에 가야인을 왜라고 부른 것은, 그 군대가 열도에서 진입하기도 했고 또 열도는 그 전부터 가야가 개척했고 게다가 고구려인이 가야인을 볼 때 "두상이 그로테스크한 이상한 족속"이라는 정도의 뉘앙스로 비칭하고도 남지요. 국호가 "변두습속이 있는 진한"이라고 대륙인들에게도 불릴 정도 아닙니까.  이런 습속은 동북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을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가야는 제철, 무역이 주산업이었으니까요. 이리저리 다니잖아요. 교류도 많고...                  


3) <윗글을 읽어 보다보니 반도의  가야, 임나, 왜,백제 그리고 열도의 가야, 백제, 왜가 뒤죽박죽이 되어 전후 좌우가 뒤바뀌는 것 같습니다. 내가 뭔가가  정리가 되지 않아 혼란을 겪는 것 같은데 도무지 종잡지 못하겟습니다. 윗글을 단숨에 분석하시기에는 어려우리라 생각되지만 위글에 대해 산책님 나름대로의 생각(추정이라도)을 정리해서 말씀해 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유물, 유적을 보더라도 영산강유역은 가야계 유적이고 이것은 석우로전과 물계자전에도 나오는데 포상팔국은 가야의 소국연합체였고 그 중심이 된 아라가야를 포상제국이 침공하여 아라가야가 경주신라에 구원을 청한 사건입니다. 경주신라가 구원해준 거지요. 수로부인설화, 석우로전, 물계자전은 전부 같은 사건을 다룬 스토리입니다. 물계자=석우로입니다. 물계자열전도 사실은 석우로의 행적 중의 일부를 따서 설화로 꾸며 열전에 실어 놓은 겁니다. 이것도 장난 친 겁니다. 포상팔국의 난과 그 3년 뒤의 포상삼국의 재침건은 가야연합체의 내란성격이예요. 종주국에 대해 반기를 든 거지요.      

이와 관련된 산책의 글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수로부인은 사람이 아니고 '남해안해상통행권'='아라가야의 무역로'를 의인화한 가공인물임.  

거기에 나오는 소국이름 중에 유사 물계자전에 보라(保羅)라고 있는데 이 나라가 영산강유역에 있었다고 알려진 '발라'라는 나라와 같은 이름으로 봅니다. (ㅂ+아래아+ㄹ)라> 발라, 보라(리을 탈락), 아래아의 경우 지금 이처럼 분화되면 '오' 뒤의 리을이 쉽게 탈락하는 현상이 있습니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석탈해의 이름에서 (ㅌ+아래아+ㄹ)해> 탈해, 토해(리을 탈락).

또 갈화성(竭火城)이라고 나와 있는 지명이 있는데 이것은 가라국(加羅國)을 고려인들이 변조한 이름입니다. 가라국>가라성에서 음을 교묘히 이용하여 한자를 갈화성으로 바꾼 것이지요. 발음을 부드럽게 해보세요. 갈화성>가롸성>가라성으로 납니다. 이것도 일본서기에 가라국>가라성>갈성으로 만들어 쓴 것을 보고 비슷하게 모방한 듯해요.  

그 논문을 찬찬히 보시고 뭐든지 물어보세요. 산책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런 소설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 보지 않습니다. 훑어보면 거의 전부가 오류니까요.

구주 후나야마고분과 이나리야마고분, 나주 반남면 신촌리9호분, 익산 웅포 입점리고분 등은 전부 가야계 고분입니다. 이것도 이설이 구구하게 많아요. 왜가 열도에서 반도로 건너와 살았다는 등 말도 안되는 설들 많습니다.
그러나 한인학자들은 유물, 유적이 나오면 연대를 내려 잡는 것 같아요. 일인학자들은 자기네 것 연대를 올려 잡으려는 경향이 있고 그러다 보면 연대가 반도>열도이던 것이 열도>반도로 역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왜가 건너왔다 하지요.
구주에 전방후원분으로 아라사등의 암호산고분도 있는데..
연대가 암호산고분(동성대왕 고조부)과 신촌리9호분이
비슷할 것으로 봅니다. 신촌리9호분은 왕능급 고분으로 금동관이 나왔거든요. 아라사등고분보다 한 세대 정도 빠를 듯하고... 이 정도면 초고대왕이 신공기에 나오는 전남지역을 정복하기 직전 정도 될 거예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6세기라고 하고 있어요.
그 다음이 후나야마고분(아라사등의 장자/예진별명/동성대왕 증조부)>익산 웅포고분(동성대왕)>이나리야마고분(예진별명의 9세손 이나리.노.스꾸네[色鳴宿니])    

신촌리9호분이나 입점리고분이나 한인학자 아무도 설명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6세기까지 마한이 살아 있어서 마한왕의 고분이라는 한심한 설명만 하고 있지요. 한 술 더 떠 왜인이 건너와 남긴 유물이라고까지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왕인도 마한박사라고 하고 있는 실정이고...왕인도 신찬성씨록으로 추적하면 백제 근구수왕으로 나타납니다. 신찬성씨록 한 번도 안 본다는 거지요. 아무리 봐도 알아보지도 못하겠지만.

안라국의 역사와 문화

조원영 / 합천박물관 학예사, 문화재감정위원

 

1.명칭 유래

안라국(安羅國)은 현재 함안군 일대에 있었던 가야제국의 한 국가였다. 옛 문헌에서 안라국에 대한 국명(國名)을 살펴보면 다양한 형태로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과 아나가야(阿那加耶)라는 국명으로, 물계자전에는 아라국(阿羅國)으로, 『삼국유사』오가야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로, 『일본서기』에서는 안라(安羅)와 아라(阿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아라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왔으나, 이 용어는 가야가 존재했던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신라말 고려초에 만들어진 조어(造語)이므로 적당하지 않다. ‘아시량(阿尸良)’의 ‘시(尸)’는 옛말의 사이시옷을 표기한 것이므로 아시량은 곧 ‘아ㅅ라’를 표기한 것이며, 이것은 아나, 또는 아라로도 쓰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시량, 아나, 아라, 안라 등은 모두 ‘아ㅅ라’라는 나라 이름을 뜻하며, 현대음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 사이시옷은 ‘ㄹ’받침의 음가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아ㅅ라’는 ‘알라’로 읽을 수 있다. 이와 가장 가까운 것이 ‘안라’이므로 함안지역 가야국의 국명은 ‘안라’ 또는 ‘안라국’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2.지리적인 위치와 대외무역
 
안라국은 삼한시대 변진(弁辰)의 한 국가인 안야국(安邪國)이 성장 발전하여 성립되었다. 함안군의 지형을 살펴 보면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이다. 남동쪽으로 해발 500~700m 정도의 산들로 창원, 마산, 진주와 경계를 이루며, 북서쪽으로는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 강으로 창녕, 의령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 조건은 외부로부터의 방어에 유리했을 것이다.

함안군 일대에는 많은 지역에서 지석묘(支石墓)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이미 이 지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함안지역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평지와 구릉지의 경사면을 개간하여 농경을 하면서 차츰 성장하여 기원 전후시기 안야국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안야국은 구야국과 함께 변한제국 중에서는 중국 군현과 교섭하면서 중국에 잘 알려진 유력한 정치집단이었다. 안야국의 인구는 『삼국지』의 기록에 의거해 보면 4~5천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의 구조는 대개 국읍(國邑)과 읍락(邑落)으로 구성되는데, 안야국의 국읍은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변한시대의 널무덤[木棺墓] 유적, 5세기대 이후 대형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가야읍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안야국의 정치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농업생산력, 교역에 유리한 조건 등이었다. 즉 남쪽의 산지에서 발원한 계곡의 물을 이용한 계곡 사이의 평야들과 남강, 낙동강의 배후 저습지를 이용한 농경이 안야국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리고 강을 이용한 교통로 확보와 교통의 요충지로서 차지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 등도 안라국의 성장 기반이었을 것이다.

삼한의 여러 나라들은 일찍부터 중국 군현 및 인근 국가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중국계 유물과 왜계 유물이 조사되고 있다. 함안지역에서도 가야읍 사내리에서 전한경(前漢鏡)을 모방한 소형방제경(小型倣製鏡)이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안야국도 인근 변한제국이나 진한 및 마한제국, 한의 군현, 중국, 왜 등과 교역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야국의 대외교역로는 대체로 진동만으로 통하는 교통로와 마산만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이용하여 해로로 진출하였을 것이다.

안야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조건 중에 자원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식량 이외에 철, 수산자원 등이 중요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현재 함안지역에는 황철광인 제1군북광산이 있고, 동광(銅鑛)의 산출지로는 함안광산과 군북광산이 있다. 동광의 산출지에는 황철광이 함께 산출되고 있어 동광의 개발과 함께 철광석도 채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야국 당시에도 이러한 자원을 이용하여 주변지역과 교역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안라국 성장기

안야국이 성장하여 안라국이 된 시기는 대체로 변한에서 가야로 변하는 3세기 말 4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즉 이 시기 낙동강 서남부지역은 고고학적 유물, 유적의 양상이 이전의 시기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3세기 말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의 출현과 딸린덧널[副槨]을 가진 대형덧널무덤(大型木槨墓)의 등장, 4세기대 이후 지배자의 무덤에 나타나는 철소재(鐵素材)의 다량 부장, 철제갑주(鐵製甲冑)의 출현, 철제농기구의 발전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발전 등의 현상은 가야사회로의 이행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것은 문헌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3세기 말 김해 가락국에서부터 나타난 큰 정치적인 변화가 인근 가야제국으로 파급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완만한 발전을 보이던 안야국도 낙동강하류역의 정치적 변동에 연동하여 안라국으로 재편된 것으로 파악된다. 4세기대 이후 함안지역에서 김해 가락국뿐만 아니라 신라계 및 왜계 등 외래계 토기문화의 양상이 다양하게 보이는 것은 안라국으로의 전환과정에서 보다 넓은 교역망을 갖추고 비약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4세기대 이후 안라국의 실재를 잘 보여주는 것은 광개토대왕비문이다. 광개토대왕비문 경자년(400) 기록에는 왜가 신라를 침입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고구려는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안라인수병(安羅人 戍兵)’이라는 단어가 세 차례 나타나고 있다. ‘안라인수병’을 이해하는 입장은 다양하므로 여기에서의 안라가 함안의 안라국을 지칭하는 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안라인수병에 대한 해석 여부를 떠나서 당시 안라가 고구려 남정군과의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은 사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당시 고구려의 남정을 고구려-신라 연합과 백제-왜-가야 연합의 대립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김해 가락국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고 본다. 전기가야연맹의 일원이었던 안라국은 가락국, 왜와 공동으로 고구려와 맞서 싸웠지만 실제 전투는 김해 일대에서 펼쳐졌으며 안라국은 국읍을 비롯한 중심부가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지 않았으므로 전쟁의 피해는 한결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구려 남정 이후에도 자신의 국력을 유지하면서 기존의 전기가야연맹에 참여하였던 가야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은 안라국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는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은 안라국의 영역 확대를 보여주는 독자적 토기양식인 불꽃무늬토기[火焰文土器]의 확산에서 증명되고 있다.


안라국의 권역

그렇다면 안라국의 권역은 어느 정도였을까? 사실 안라국의 지방통치체제나 영역 확대를 보여 주는 기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영역이나 국왕의 통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함안지역에 현존하는 성곽의 분포와 고고자료의 검토를 통하여 대략의 정치권역을 설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함안분지를 둘러싼 산 위에는 어느 시기에 축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산성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안라국은 인접한 국가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산성을 축조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러한 산성의 분포에 따라 안라국의 지배력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추정할 수 있다.

안라국의 북쪽에는 낙동강, 남강이 있어 자연적인 방어수단이 되었다. 서쪽에는 방어산성이 있는데, 이곳은 백제의 진출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에 있는 여항산성과 파산봉수는 안라국이 남쪽 해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이자 동시에 남해안을 통한 외적을 침입을 대비한 시설물로 보인다.

또 대현관문은 함안군 여항면과 마산시 진북면의 경계지역에 있는데 진동만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안라국의 중요한 경계지역이었을 것이다. 동쪽에 있는 포덕산성은 마산疎♧¯ 방면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이므로 그 북쪽에 있는 성지봉산성, 검단산성, 성산성, 안곡산성, 칠원산성과 연결되어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에 대비한 방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곽의 배치로 볼 때 안라국의 권역은 칠원의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금의 함안군 일대였다.

5세기대 함안의 대표적인 토기인 불꽃무늬토기의 분포를 통해서도 안라국의 지배권역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토기가 조사되는 지역은 함안분지내의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외곽지대에는 칠원면 오곡리유적, 마산시 현동유적, 창원시 도계동유적, 의령 예둔리유적, 유곡리고분군, 봉두리고분군, 진북 대평리고분군, 진양 압사리유적 등이다.

분포지역으로 보아 당시 안라국의 영역은 함안을 중심에 두고 서쪽의 진주 일부지역, 북동쪽의 창원 일부지역, 서북쪽의 의령 일부지역, 남동쪽으로는 마산의 진동지역 등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권역이 멸망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6세기대에 이르면 백제,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로 인하여 권역의 축소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6세기대 안라국은 남부 가야제국을 주도해 가면서 동쪽과 서쪽에서 잠식해 들어오는 백제와 신라에 대하여 군사적 또는 외교적으로 대항하였으며, 왜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가야제국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문헌자료에서 엿볼 수 있다.


6세기 안락국 대외관계 문헌
6세기의 사정을 기록하고 있는 『일본서기』계체(繼體)·흠명기(欽明紀)에는 가야지역을 둘러싼 주변국들, 즉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 여러 나라가 서로 각축을 벌이는 모습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는 많은 위험이 내포되어 있어 철저한 사료 비판을 해야 한다. 이 시기 역사 자료들이 대부분 백제삼서(百濟三書)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지만 8세기 일본의 고대 천황주의사관에 의해 왜곡 윤색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대체적인 동의를 얻고 있는 내용 가운데 안라를 중심으로 하는 대외관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백제가 기문[전북 남원], 대사[경남 하동]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로써, 기문을 상실한 가라국은 백제에 대립하여 신라와 결혼동맹(522~529년)을 체결하였다. 안라국은 백제의 기문지역 진출에 대해서 묵인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가라와 반목하였다. 이러한 가야제국의 갈등을 틈타서 신라는 가야지역의 도가(刀伽)·고파(古跛)·포나모라(布那牟羅) 3성을 함락시킨 후 또한 북쪽 경계의 5성을 함락시키면서 차츰 가야지역을 잠식해갔다. 이 시기에 안라는 백제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신라와는 적대적인 경향을 보였다.

제2기는 백제가 기문·대사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신라가 낙동강 서남부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안라의 외교적 역할이 두드러진 시기이다. 529년 안라가 주도한 고당회의(高堂會議)-이하 안라회의-는 백제와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에 대하여 가야지역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안라는 의도적으로 백제를 배제하였다. 즉 백제가 안라회의에 참여하였으나, 백제의 대표는 고당에 오르지도 못하였다. 이는 백제가 대사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라 남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라지역을 잠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대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도 낮은 관등의 관리를 파견하였으므로 안라회의 자체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안라의 성장을 대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안라회의가 성공하지 못함에 따라 백제와 신라는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계속하였다. 백제는 하동에서 함안 사이의 지역에 걸탁성(乞城)을 축조하였고, 신라는 남가라, 탁기탄 지역을 멸망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라는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 안라에 파견된 왜의 사신)를 이용하여 안라의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즉 백제의 안라에 대한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신라와 외교적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신라와의 외교활동을 주도한 것이 일본부였던 것은 안라가 백제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고자 했던 것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안라의 외교정책에 대하여 백제의 성왕(成王)은 이미 멸망한 남가라·탁기탄·탁순의 재건이라는 명분으로 두 차례에 걸친 사비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안라를 비롯한 가야제국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백제가 계속적으로 가야지역에 군령성주(郡令城主)를 두어 안라지역으로의 진출의도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라 또한 안라지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안라의 외교정책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안라는 고구려와 밀통하여(548년) 백제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안라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는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가 백제를 구원하여 고구려가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안라의 의도는 무산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안라와 백제의 사이가 매우 소원한 관계로 변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신라와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3기는 안라 주도의 외교적 활동이 성공을 거두지 못함에 따라 안라가 다시 친백제적인 성향으로 전환했던 시기이다. 안라가 다시 백제와 화친하면서 안라는 백제와 신라가 충돌하였던 관산성전투(554년)에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전쟁에 참여하였던 가야의 군대가 2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안라국은 이 전쟁에 국운을 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이 신라에 패배하였고 가야제국은 차례차례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라 멸망의 결정적 계기는 관산성전투의 패배였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관산성전투 이후 가야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하였다. 555년 비사벌(比斯伐, 창녕)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고, 557년에는 감문주(甘文州, 김천)를 설치하였으며, 561년에 창녕 순수비(巡狩碑)를 건립하였던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라국이 멸망했던 때는 언제쯤일까? 『일본서기』흠명기 22년(561)조에 보이는 “신라가 561년 아라(阿羅) 파사산에 성을 축조하여 일본에 대비했다”는 내용에서 안라국의 멸망을 추정할 수 있다. 아라는 곧 안라국이며, 파사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함안군 산천(山川)조 및 봉수(烽燧)조에 나오는 ‘파산(巴山)’으로 비정할 수 있다.

파산은 지금의 봉화산으로서 봉수대는 안라국이 해안으로 진출하는 루트인 진동지역과 함안의 경계지역에 있으며, 봉화산 북쪽 최고봉상에 위치하여 남으로 진해만(진동만)과 북쪽으로는 함안 일대를 비롯하여 낙동강과 남강 너머 의령까지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파산은 안라국의 중요전략기지였을 것이므로 이 지역에 신라가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미 안라가 신라에 의해 복속되었음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일본서기』흠명기 23年(562)조에 “어떤 책에는 21년(560)에 임나가 멸망했다”라는 기록을 참조해 본다면 안라의 멸망시기는 560년에서 561년 사이로 볼 수 있다. 특히 안라는 가야제국의 중심국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이러한 안라국의 멸망을 전하는 기록이 실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안라국의 멸망은 560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라국의 흔적은 현재 함안군 가야읍의 말산리와 도항리에 말이산고분군이라는 대형무덤들로 남아 있다. 이 유적은 1917년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말이산34호분(현재 4호분), 말이산5호분(현재 25호분) 등이 발굴조사 된 후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86년 국립창원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도항리14-1호, 14-2호가 조사되었다. 이 2기의 대형무덤은 도항리고분군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함안지역에서 광복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 연구자에 의한 발굴조사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러다가 1991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도항리35호분과 그 주변지역을 발굴조사하여 청동기시대 고인돌 8기와 집자리 1동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도항리 일대가 선사시대부터 인간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해에는 가야읍 아파트 공사 중에 발견된 초대형 덧널무덤인 ‘마갑총(馬甲塚)’을 통해 5세기 전·중반 안라국 지배층 고분문화의 성격과 양상 규명 및 안라국 철기문화의 우수성을 알 수 있었다. 이 고분은 길이 6.9m, 너비 2.8m, 깊이 1.1m의 긴 타원형의 묘광내에 판재상의 목재로 짠 덧널이 설치된 대형의 덧널무덤이다. 유구의 북쪽 벽은 굴착공사로 인하여 파괴된 상태였지만, 중앙에 매장된 무덤주인공의 흔적과 그 좌우에 가지런한 상태로 놓인 말갑옷은 그 동안 영남의 각 지역에서 확인된 것에 비하여 부장상태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 유구의 명칭을 마갑총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 무덤에서는 말갑옷 뿐만 아니라 말의 얼굴을 덮어 보호하는 말머리가리개[馬冑]의 조각으로 추정되는 여러 점의 판상철편도 확인되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는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의 정확한 성격 규명을 위해 1992~1996년까지 5차례의 연차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고총고분인 5호분, 8호분, 15호분 등과 널무덤 20여기, 덧널무덤 20여기, 구덩식돌덧널무덤 10여기, 돌방무덤 3기 등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안라국 지배층의 무덤 변천과정과 당시 안라국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97~1998년에는 도항리와 말산리 일대의 도로 확장공사 및 단독주택 신축공사로 인하여 발굴조사가 필요하게 되자 경남고고학연구소에 의해 모두 5차례의 시굴 및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널무덤 38기, 독무덤 3기, 덧널무덤 37기, 구덩식돌덧널무덤 4기가 조사되었다. 또한 2002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는 말산리의 건물 신축공사 도중 발견된 돌덧널 길이 8.65m, 너비 1.65m의 초대형 구덩식돌덧널무덤 1기를 조사하였다.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 이 유적에 고분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삼한시대부터였음을 알 수 있었으며 이 시기의 유물들은 구릉의 북쪽에서 출토, 채집되었다. 이 구릉에 원형 봉토분이 발생한 시기는 5세기 초경으로 추정된다. 대형 봉토분들은 입지상 좋은 지점에 위치하면서 구릉의 북쪽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조성된 경향을 보이며, 대형분의 사이와 구릉의 사면에는 중·소형분이 분포한다. 유적의 연대는 삼한시대에서 6세기까지이다.

이제 안라국 사람들이 남긴 유물을 살펴 보자. 먼저 안라국의 토기에 대해 살펴 보면 대체로 4세기 전반부터 고식도질토기가 생산되었는데 굽다리접시, 짧은목항아리, 화로모양그릇받침, 손잡이잔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특히 4세기대에 안라국 토기를 대표할 수 있는 工자형굽다리접시는, 전반에는 굽다리가 길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차츰 짧아지면서 5세기대의 불꽃무늬굽다리접시와 그 계통이 연결된다.

5세기대에는 앞 시기의 토기보다 그 형태와 종류가 더 다양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며, 무덤에 부장되는 양도 많아졌다. 이 시기 안라국을 대표할 수 있는 토기는 굽다리에 불꽃모양의 투창이 뚫려 있는 불꽃무늬굽다리접시를 비롯하여 삼각형투창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 등이 있다. 이외에도 수레바퀴모양토기, 등잔형토기, 종형토기도 제작되었다.

6세기에 접어들면서 굽다리접시와 뚜껑 등의 토기류는 그 형태가 조잡해지고 규모가 작아졌다.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짧아지고, 손잡이가 붙은 것도 나타났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고령계, 경주계, 창녕계의 토기가 유입되어 안라국 토기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안라국의 무기를 살펴 보면 공격용무기로는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화살촉 및 화살통, 투겁창[鐵鉾] 등이 있고, 방어용무기는 투구와 갑옷 등이 조사되었다. 의례용도구들도 출토되었는데, 덩이쇠, 미늘쇠, 점치는 뼈[卜骨] 등이다. 안라국의 말갖춤은 고구려와 백제의 말갖춤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제작·사용되었으며 신라의 말갖춤이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함에 비해 실용적인 것이 특징이다. 말안장가리개[鞍橋], 발걸이[鐙子], 말띠드리개[杏葉], 재갈[轡] 등이 출토되었다.

안라국의 장신구는 주로 유리, 옥, 수정, 마노, 비취 등을 이용하여 귀걸이, 반지, 목걸이 등으로 이용하였다. 또 생산도구로는 도끼, 낫, 쇠스랑, 괭이, 가래 등이 출토되었고, 그 외에도 실을 뽑을 때 사용하는 가락바퀴 등이 주로 발견되고 있다.

함안지역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 가운데는 주변의 가야 여러나라, 또는 백제와 신라, 일본 등지에서 제작되어 이 지역의 무덤에 매납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래계 유물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 자료들은 토기가 대부분으로서 굽다리접시, 뚜껑, 항아리 등이 주류를 이룬다. 주로 5세기 중·후반대에는 창녕의 비사벌, 김해의 남가라계의 유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는 백제와 신라, 고령의 가라국과 고성의 고자국 유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유물들은 각 시대별로 안라국의 대외교류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안라국의 국읍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지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의 기록인 『함주지(咸州誌)』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즉 가야국의 옛터는 부존정(扶尊亭)의 북쪽에 있다고 했는데, 그 기록으로 보아 부존정은 지금의 가야동 쾌안 뒷산(해발 79m)으로 추정된다. 가야동이 안라국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이유는 문헌기록도 있지만 초석, 우물, 토축흔적 등의 고고학적 유적과 더불어 내성과 외성의 2중 구조로 된 봉산산성이 배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도읍지가 대부분 2중성의 구조로 된 것과 일치한다.

또한 주변 여러 지역에서 신읍(臣邑, 신하들의 생활주거지), 선왕동(先旺洞, 은퇴한 노왕이나 안라국 멸망 이후 왕족이 모여 살던 곳), 궁뒤(왕궁지의 뒤편) 등과 같은 왕궁지와 관련된 지명이 전하고 있다. 비록 전해지는 지명이긴 하지만 옛 안라국의 영화를 알려주는 왕궁을 추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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