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도 해상무역 (The maritime Trade of Ancient Indian )

스리랑카 신화(Srilanka; Ceylon)에서 비자야(Vijaya)의 왕자가 북인도에서 항해를 해서 700명 수행원과 함께 실론섬에 도착하여 싱할라(Singhala) 왕국을 수립하는 것으로 나와 있고 인도 역사서 마하완사에 BC 54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신화를 사실적인 관점으로 볼 때 700명의 수행원과 코끼리,등을 실을 수 있는 정도의 큰 선박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과 남인도 실론섬으로 향해할 수 있는 항로와 항해술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BC 3세기 북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Mauriya) 아소카왕(Asoca) 시대에는 해상업무 행정기구가 있어서 체계적이고 일괄적인 해상업무가 이루어 졌다. 예를 들면 선박건조,항해 선장,불고포교사,개척지 관할,등 관할하였다.  아소카왕의 해외정책적 불교 전파로 실론섬에 불교가 전파가 되었고 타 해외지역에도 불교와 인도문화, 행정법,철학,등이 전파되었다.
 
  주제에서 걷 가지로 현재 파키스탄,아프카니스탄에 있던 유목민족 캄보자는 카보자 드바라버티 무역로(Kamboja Dvaravati Caravan)로  구자라트 지방에 도착하여 로마,실론섬 그리고 더 멀리 오늘라 캄보디아까지 진출하여 보석과 말 무역을 하고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캄보자가 캄보디아라는 왕 칭호에 바르만(Varman)을 사용하는 것이 한 근거가 된다.  그외 언어,문화,정치제도,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머지는 각자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불교자료에 따르면 실론섬에서 서바나(Savannabhumi; 말레이반도)까지 수백 킬로미터가 되고 순풍을 만나면 7일만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김해 금관가야 건국자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 보주태후님께서 인도 아유타(아요디야 ;Ayodihya) 왕국에서 김해에 도착하였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있다.  신화로만 여겼던 내용이 몇몇 뜻있는 학자와 재야 학자에 의해 조금씩 규명되고 있다. 몇몇기 논에서 중국 보주지방을 파헤져 행로를 주장하는 분이 계시고 진짜 인도 아유타 지방에서 왔다는 분과 기타 주장이 있다.    실론섬에서 말레이 반도까지 7일 이면 말레이 반도에서 광동성까지 7일 그리고 김해까지 7일 넉넉하게 잡아 1달 이면 한반도나 일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세기 경에  향로 다밧길을 통해서 고대 인도들이 무역을 하였고 저 멀리 극동 한반도,일본까지 진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대의 바닷길 문헌으로 반고가 쓴 『漢書』에서는 중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곳에 있던 국가들이 바닷길을 통해 교류했을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내용이 있다. 책에서는 한 무제 이래로 동남아․인도 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조공무역을 행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벌써 이러한 형태의 무역이 형태가 있었다고 믿기는 어렵지만 후대에까지 황지국(남인도 칸치국 추정)에서 사절단이 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지속적인 접촉이 유지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후한대의 2세기경에 천축․대진․단국․엽조 등지에서 사절단이 왔다는 기록이 보이고, 동로마(大秦)의 사신을 사칭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인들의 기록도 있어 바닷길이 예전부터 중요한 교역로로 쓰이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吳 역시 지정학적으로 서역의 육상 교역로와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신 해상활동이 활발하였다. 당시 부흥했던 베트남 남부의 부남(Funan)국과 중천축국(대월지 ; 쿠샨 Kusan, Komboja)의 교류도 흥미롭다. 두 나라 사이의 교류는 중국․인도 사이의 중계무역에 도움이 되었으며 부남국은 후대에 등장하는 스리비자야, 사일렌드라, 말라카 같은 동남아 중계무역 국가의 선례가 되었다. 바닷길을 통한 교류는 吳가 멸망한 후 晉의 통일시기에도 계속되었다. 이 때 국가의 중심이 된 문벌귀족들은 산호․비취 등의 사치품에 관심이 있어 부남․참파 등 20여개 국가들과 교역하였다. 바닷길의 쇠퇴는 북방민족의 화북 지방 점령시기를 기점으로 한다. 이때 쫓겨난 진의 황족과 민중은 남부에 겨우 자리 잡았으며(東晋) 경제적으로 발달한 화북 지방의 점령, 북방민족에 의한 약탈과 파괴로 사치품에 대한 수요는 급감하였기 때문이다.(기원후 30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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