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트라 해 (그리스어 紅海)  박선협  webmaster@mestimes.co.kr  [매스타임스]

에리트라 해(海)란?

‘로마의 평화’라고 일컬어졌던 제정로마시대, 호화사치를 찾아 나선 서방 사람들은 진기한 동방의 산물에 동경의 눈길을 보냈다. 그것은 로마 상인의 부풀어 오른 동방에의 진출을 자극시켰고 부추겼다. 그 판도는 대해를 넘어 인도, 이윽고는 인도지나에 도달하였다. 이것은 기원전후의 웅대한 남해 항해시대를 밝혀 주는 귀중한 증언이다.

오늘날 지도를 펴놓고 보더라도 에리트라 해(海)라는 이름의 바다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이 이름은 기원 1~2세기의 서방인(로마인이나 그리스인)이 오늘의 인도양, 아라비아 해, 페르시아 만, 벵골 만 주변을 아울러 부른 명칭이다. 글자 뜻으로 보면 그리스어의 에리트라란 붉음(赤)을 의미한다 해서 홍해(紅海)를 가리키고 있으나, 당시는 선박이 동방무역을 위해 운항한 모든 해양, 즉 오늘날 널리 알려진 ‘남해’ 정도의 막연한 해역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스어로 쓰인 이 책은, 지금 남아 있는 고대의 많지 않은 희귀한 저작물 중의 하나지만 저자이름이 적혀져 있지 않다. 기재되어 있는 달력(1~3월)이 로마 명과 이집트 명을 함께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이 책의 저자가 이집트에서 상업을 경영한 그리스인일 듯싶다는 것을 추측하는 데 그친다. 이 책의 성립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기원 1세기 전후의 작품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이 책은 해상 루트에 의한 동방과의 교역을 알릴 의도로 쓰였다.

항해로, 거리, 각 정박 항구명, 그곳의 수출입 품목에 대한 기술이 특히 상세하다. 한편 승무원 수, 여행장비, 육상에서의 구체적인 상거래와 알선모양을 기술한 것은 빈약하며 불친절하다고 소문날 정도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이 결코 황당무계한 안내서가 아닌 것은 거의 동시대의 저작, 즉 스트라본(전 64년~후 21년)의 지리지(地理誌)나 브리니우스(후 23~79년)의 박물지(博物誌)ꡕ등의 기술 내용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는 점에서도 확실하다. 그리고 발굴에 의한 고고학상 고증에 의하여서도 그 신빙성이 확인되고 있다.

앞의 두 책에 대하여 이 책의 특이한 지위는 저자가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이 안내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정박항마다의 수출입품 리스트에 있어서는, 이 책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알 수가 없을 것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전문(全文) 64절에서 보듯이 단편에 지나지 않으면서, 고대 교역사상의 수수께끼를 풀어헤치는 데는 불가결한 저작이다.
다른 한편 이 책이 당시 동방무역의 커다란 이익을 눈앞에 두고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상인, 혹은 서둘러 상인흉내를 탐했던 사람들에게 있어, 항해, 교역상의 주의, 정보를 들려주는 귀중한 지도서였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듯 동방무역에 관한 ‘안내서’가 나타나게 되었던 기원 1세기경의 세계란 어떤 정황이었을까.

먼저 로마는 기원전 30년, 프톨레마이오스 조(朝) 이집트를 영토에 편입시키고,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재위 전 27~후 14년)가 그 후 2백 년간 계속된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의 반석을 쌓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 아래 로마시민의 생활은 날로 불어나는 사치풍조를 휘감고 장신구, 생활필수품에 이르기까지 동방의 진기한 물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앞 다투어 사들이기에 혈안이다시피 하였다.
이른바 이것이 동서교역의 융성을 재촉한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다른 한편 동방의 중국도 이 무렵 후한시대(후 25~220년)에 해당, 서역의 영역확대에는 지극히 야심적인 시대였다.

후한의 무장(武將)으로 서역제국을 삼켰던 반초(班超)가 대진국(大秦國: 로마동방영토)에 감영(甘英)을 파견(후 92년)했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이 로마와 후한의 두 제국은 서로 그 손길을 펼치면서도 직접적으로 활발한 교섭을 갖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다.

그럴 것이 당시 두 제국의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는 페르시아 방면에는 파르치아 국(안식국, 安息國)이 있어 이 나라와 로마와는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 로마가 동방의 산물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아라비아 상인의 중개를 거치든가 아니면 바닷길로 동방에 향하여 배를 띄워 산물을 직접 구입하든가 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상인에게 이익이 컸던 것은 중개료를 필요로 하지 않은 해로(海路)였으나, 당초는 연안전달의 방법밖에 없었고 역시 각 기항지에서 아라비아인에 의하여 세금을 징수당했다. 그것이 기원 1세기 전후에 계절풍(힛파로스의 바람)이 발견됨에 따라 로마 선박이 직접 인도까지 도달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에 의해 로마 세계와 동방과의 직접교역을 매우 활발히 하게 되어,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이 책과 같은 남해항로 이른바 교역의 안내서라 할 수 있는 저작도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서방이 동방과의 교역을 행함에 있어 다량의 교역품을 한꺼번에 그것도 육로에서와 같이 번잡한 과세를 바칠 걱정도 없이 수송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바닷길이 개척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난파의 위험은 안고 있었으나 바다는 매력적인 코스였다. 마치 그에 응하기라도 하는 듯 인도의 여러 항구에는 멀리 중국이나 인도지나로부터의 산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고대에 있어서 인도와의 교역을 최초대량으로 행한 것은 서방 상인(주로 그리스 상인)이었으나 기록에 남아 있는 인도와의 해상교통의 단서를 열어놓은 것은 중국이 2세기나 빠르다.
전한서(前漢書) 지리지에서는 광동성 혹은 인도지나 동북부의 해안지방으로부터 남인도 동해안의 황지국(黃支國)에 이르는 왕로(往路), 그리고 귀로, 무역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왕래가 중국・인도 무역의 발전에 연결고리를 이루지는 못했으며, 인도의 유용성을 먼저 인식한 것은 멀리 지중해 주변의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에 중국과 인도와의 중간지대 인도지나에서 일어난 나라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다. 부남국(캄보디아)은 기원 1세기 말에서 2세기 사이에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건국설에는 인도로부터의 도래자(渡來者)와 토착민 여자 지배자와의 인연이 쓰여 있다.

그리고 이 부남국의 활동시기(후 2~3세기)와 거의 같은 연대의 오크에오 유적에서는 당시의 유물이 다수 출토되고 있으나 이들 중에서 중국계통의 것은 극히 미미하다. 남인도로부터 왔다고 생각되는 로마화폐형 메달이나 그리스, 소아시아에 널리 행해진 기법에 의한 장신구 따위의 출토가 많다.

결국 이 나라의 서방 편중의 자세를 밝혀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이 책 ꡔ안내기ꡕ 89쪽에서는 인도나 인도지나 방면에서 활약한 선박을 세 종류로 나누고 있으나 그중에서도 ‘언덕을 행한 배’의 어원이 선스크릿인 것을 보면, 당시 인도 이동의 교역에 관해서는 인도선박이 주로 활약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처럼 인도 주변국에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기원 1세기경의 남해 해상교통은 인도~인도지나에서는 주로 인도선박이 활약하였고, 인도의 동해안을 포함한 그 서쪽의 대양에서는 주로 로마선박이 활약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향유(香油)의 꿈을 좇아

서방에서는 옛날부터 향유나 몰약(沒藥)이 진기하고 귀중하게 전해 왔다. 이것은 나무에다 금을 긋거나 또는 자연적으로 흘러나온 수지(樹脂)로서 황색 투명하였다.
로마 상인들은 생활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향유를 찾아 헤맸다. 그것은 로마시민의 사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항해요 여행길이었다. 로마시민의 생활 속에 향유는 신(神), 몰약은 의사, 황금은 왕이라는 의식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13세기의 대여행가 마르코 폴로도 그 여행기 중에서 페르시아 국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3인의 박사(혹은 왕)가 어느 날 예언자의 탄생을 소문에 전해 듣고는 과연 그는 신일까 의사일까 아니면 현세(現世)를 다스릴 왕이 될 사람일까를 확인하기 위해 손에 각각 향유, 몰약, 황금을 가지고 서방을 향해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신약성서의 「마태복음서」에 등장한다. 그러나 성서의 경우 헌상품의 내용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으나 그것을 제공받는 자가 신이냐 의사냐 또는 왕이냐는 부분은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 향유는 신, 몰약은 의사, 황금은 왕이라는 생각이 페르시아 국에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성서는 이것을 원용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을 극적으로 클로즈업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면 이처럼 기원 전후에 사람들의 생활에 이미 깊고 널리 스며들었다고 여겨지는 향유나 몰약은 어떤 식물에서 얻어진 것일까.

겉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 방향성(芳香性) 고무수지로 향의 재료를 뽑는 데 쓰였다. 다만 향유가 백색으로 달콤하고 우아한 향내를 발산하는 데 대하여, 몰약은 자극성이 강한 향기를 낸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때문에 향유는 제사나 의식에 즐겨 사용되어 페르시아인들의 이야기에 있는 것처럼 신의 이미지와 연결지어져 있다. 몰약은 그 자극성을 살려 약제로 중용(重用)되었던 까닭에 의사를 연상시키게 하였을 것이다.

전 5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미라 만드는 법에도 이 몰약이 청정제(淸淨劑), 방부제의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향료로서의 이들 식물의 사용기원은 언제부터였을까.

향료의 사용기원에 대해서는 종래 이집트의 제5~6왕조(전 2,500~전 2,400년경) 때부터라는 설이 압도적이었다. 실제로 향로(香爐)가 당시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그런데 앗가드(전 3,000년경 오리엔트에 개설된 도시국가군을 포함한 최초의 왕조)에도 향유와 몰약을 나타내는 설형문자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어, 어느 쪽이 향료사용의 앞장을 섰는지 단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여기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향유산지라고 일컬어진 남부 아라비아는 향료를 북방의 이집트 혹은 오리엔트에 공급했을 뿐, 독자적인 문명을 쌓아 올리지는 못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1950년 이후의 남부 아라비아의 미국인에 의한 조직적인 발굴은 이 고대 아라비아의 문명의 일각(一角)에 새 빛을 던졌다.
그것은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 이전의 문명인 동시에 독자적인 문자까지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연구단계에서는 그 문자의 기원도 전 2천 년에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서부터 전 9백 년이라는 여러 설이 분분하여 종잡을 수 없다.

그 위에 현대의 아라비아 반도의 정치정세, 습관 따위에 의한 상세한 연구를 어렵게 하는 정황에 있어 세밀하고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고대 아라비아의 모습이 분명해진다면 이집트, 오리엔트에 비견할 만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전설적인 시바의 여왕을 탄생시킨 고대 아라비아의 땅은 향료를 독점함에 따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부(副)를 쌓아 올렸다.

솔로몬 왕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시나이 반도까지 발길을 옮긴 여왕은 그 소문에 걸맞은 위대한 왕의 지혜에 감복한 나머지 금붙이, 보석, 향료를 다량 헌정하였다 한다. 이때처럼 엄청난 향료가 솔로몬 왕에게 바쳐진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을 것이다.

고대의 향료무역을 도맡다시피 하였던 아라비아 사람들은 그 뒤에도 육로・해로의 동서무역 중계자로서 번영을 누렸다.

브리니우스의 ꡔ박물지(博物誌)ꡕ는 12세기 비잔틴의 사본을 통하여 오늘날에 두루 알려지고 있다. 이 사본에 세계지도가 첨부되어 있으며 원추도법(圓錐圖法)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경도 180도, 남위 20도에 이르는 반구도(半球圖)로 남북미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그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아프리카 동해안 남부와 동남아시아의 연안부가 인도양을 둘러싼 것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인도양 위를 부는 계절풍은 4~10월 중순에 걸쳐 남서풍과, 1~3월에 걸친 북동풍이 있다. 특히 1월은 강풍으로 정확하게 불어오는 탓에 브리니우스(77년 박물지를 저작)는 그 작품 안에서 인도출항일을 이집트력의 티비(Tybi)의 달(12월 27일~1월 25일) 초순이 아니면 다음달 메치르(Mechir)의 달 제6일까지로 한정하고 있다.

이 계절풍은 안내기에도 나오는 바와 같이 ‘힛파로스의 바람’이라고 불렸다.
힛파로스라는 무역선의 내왕에 의해 이 계절풍이 발견된 연대는 확실치 않다. 기원전 1세기경이었다는 것과 기원후 1세기 중엽이라는 설로 갈라져 있다.
어느 쪽이든 서방 사람들에 의한 이 계절풍의 발견은 인도・로마 간의 무역사상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