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타이 민족과 한민족의 관계(펌)

그리스인들이 스키타이 페르시아인들은 사카라고 불렀는데, 넓은 의미로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활동하던 백인종 유목민족(페르시아계 유목인과 같은 의미) 전체를 통칭하며, 좁은 의미로는 페르시아 다리우스왕이 그리이스와 전쟁을 벌였던 스키타이 국가를 말하는데, 대개 스키타이 위치는 크림반도를 포함한 흑해 북부 초원지대이며, 넓게는 동경 30도 선상의 우크라이나 북부의 중심에 있는 키예프(Kiev)에서부터 동경 60도 선상의 우즈베케스탄 서북부의 끝에 있는 아랄(Aral)해[咸海]까지에 걸쳐 활동하였다.

스키 타이란 말의 어원은 ‘사슴’이다. 나중에 ‘사슴’에 대한 설명은 자세히 하기로 하고 낙빈기의 금문에서 자신의 문장을 ‘사슴’으로 그린 자가 누구인지를 찾아보았다.

소호금천씨(함)의 딸 문文과 전욱고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중여곤(곤곤)인데 그의 문장기호가 바로 사슴이다. 전욱고양씨의 아버지가 ‘창의’인데 이 역시 천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다.

다시 ‘스키타이’의 어원에 대하여 알아보자. 스키타이의 한국어는 ‘색 탁’이다. ‘색, 탁은 고 와 동일한 뜻으로 성城이라는뜻이었다. 즉 스키타이는 동일한 뜻을 두 번 겹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색’은 북방에서 ‘새끼’라는 뜻으로 ‘스키’ ‘사키’등으로 되었다.

즉 고구려가 세워질 당시 고구려는 먼저 있던 나라인 ‘고구리’ ‘색구리’ ‘탁구리’ 또는 ‘색리국’ ‘탁리국’ ‘고리국’을 이어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세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를 부르는 이름이다. 즉 색, 탁, 고는 같은 뜻이다. 고등의 손자가 색부루 단군이다. 색부루 단군의 후손들은 모두 고씨를 성씨로 썼다. 그러므로 고, 색, 탁은 같은 성씨이다.

스키타이의 상징은 사슴뿔이라고 이미 말씀드렸다. 신라의 금관은 바로 사슴뿔의 형상이며 금관을 만든 민족은 오직 삼국과 아프가니스탄 밖에는 없다. 즉 페르시아 위 쪽에 있던 민족이 한반도로 이주해온 것이다. 백제의 칠지도도 역시 사슴뿔의 형상이다. 그러면 사슴의 그림이 엄청많이 등장하여야만 할 것 아닌가? 몽골의 알타이 지방에 가 보면 온통 천지가 사슴그림이다. 알타이라는 말 자체가 황금인데, ‘알타이’ 역시 ‘스키타이’와 같은 뜻이다. 즉 ‘아리+타이’로 구성된 단어이다.

알타이 지방 순록 암각화

색의 페르시아나 인도식발음이 ‘샤카’이다. 즉 ‘석가모니’에서 ‘석가’는 ‘샤카’를 한문식으로다시 옮겨 쓴 것이다. 그러므로 샤카족은 모두 고구려의 ‘고’씨를 부르는 말이다. 이 고씨들을 ‘마馬’라고도 부른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5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었는데 가장 으뜸인 종족이 마가이다. 즉 마가馬加가 바로 고씨인 것이다. ‘마가’가 변하여 ‘마기’가 되었고 그것을 스페인어로는 ‘마고’라고 한다. ‘마기’는 페르시아에서 배화교의 승려를 부르는 말이다.

좌우간 스키타이 족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부족이며 최초에 철기를 다루던 부족이다. 세계사에서는 힛타이트족이 최초로 철기를 발명한 부족이라고 하는데 사실 힛타이트 족은 스키타이족으로부터 갈려져나간 부족이다.

스키타이족의 다른 이름이 ‘샤카’족 인데 일본어로 ‘시카’는 ‘사슴’을 뜻한다. BC 2000년경에 ‘아’가 ‘이’로 바뀌는 음운현상이 있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바로 ‘샤카’가 ‘시카’로 바뀐 것이다.

치우는 여신으로 이집트의 ‘이시스’이며 이가 곧 ‘아르테미스’이며 또는 ‘페르세포네’ 로마에서는 ‘코레’라는 여신이라고 이미 말씀드렸다. 페르세포네의 상징동물은 맷돼지이며, 가끔은 곰으로도 나타난다. 그런데 아르테미스 여신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바로 ‘사슴’이며 그녀는 ‘사슴’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몽골 암각화 전문연구가인 김호석박사와 예서원의 최삼주 실장이 알타이지방에 가서 실제로 찍은 사진들이다. 아래 호랑이처럼 보이는 동물은사실 맷돼지이다. 맷돼지는 치우의 상징이므로 사슴 그림을 끄릴때면 항상 같이 등장하는 것이다.

스키타이 사하 ‘鮮’ 탐사기 - 주채혁(전 강원대 사학과)

조회 수 7285 추천 수 0 2010.08.23 19:28:21

스키타이 사하 ‘선(鮮)’ 탐사기
주채혁(전 강원대 사학과 교수)       

  울란바아타르 스텝에서 숨쉬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여기가 어딘지 아주 잘 모를 수가 있다. 생태사나 생태현실에 관해서도 그렇고 역사나 격변중의 역사현실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리가 눈뜬장님이라면 자기비하가 너무 심한 걸까? 갈라보고 쪼개보며 비교분석한 것을 맥을 짚어 정리해보지 않아서다.

  일례를 들면 울란바아타르시를 굽들아 흐르는 톨강이나 셀렝게강 및 오르홍강은 모두 바이칼 호수로 흘러들어 북류(北流)하는 북극해권이고, 오논강이나 헤르렝강처럼 칭기스칸의 태생지 부르칸(不咸)산과 접맥되는 강은 훌룬호와 부이르호를 거쳐 몽골의 기원지 에르구네강을 에둘러 아무르(일명 흑룡黑龍)강을 통해 동류하는 태평양권이다. 전자는 물이차서 거북이(龜)와 호랑이가 못 살고 거대 제국의 발전이 불가능했지만, 후자는 물이 그리 차지는 않아 거북이와 호랑이가 살 수 있으며 유목국가는 보통 목·농이 어우러져야 이루어지고 그래서 동북아시아 유목제국의 기원지가 모두 다 훌룬부이르 몽골스텝·눈(嫩)강평원임은 북방민족사학계에서 공인된 지가 이미 오래다.


  곰녀(熊女)와 호녀(虎女)의 사랑싸움얘기로 점철되는 「단군(檀君)신화」의 태반도 물론 여기다. 조선(朝鮮)은 애초에 중국인이 한자로 그렇게 적었으니 중국발음으로 읽어 ‘아침의 나라’(朝Zhao國)가 아니고 ‘차아탕’(朝Chao族: 순록치기)의 나라임이 밝혀진 사실은,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적인 금세기 일대의 사건일 수 있다. 「조선(朝鮮) 차아복‘누우델친’(순록유목민|馴鹿‘遊牧民’: Chaatang) 기원설」이기 때문이다. 정녕 몽·한은 그 창업 주도집단이 ‘누우델친’(Нүүдэлчин: Pastoral nomad: 유목민)기원이어서 우선 그 시원 생업태반이 일가일 수 있다. 물론 이론(異論)이 제기돼 치열한 과학적인 논증을 둔 진지한 토론이 많을수록 좋다. 
  우리가 차아탕 누우델친(순록치기 유목민)의 본향이라 할 레나강 유역 사하(새|塞: 야쿠츠크)를 본격적으로 탐사한 것은 2006년 6월 26일~7월 1일에 걸친 5일간이다. 2000년 5월경에 헤이룽장성 사회과학원 보르지긴. 쇼보 교수(몽골사)에게 레나강~예니세이강 일대의 순록 주식 이끼밭(鮮)에 관해 정보를 얻고 2004년 8월 초순에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과 조용헌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부부가 동참했던 사하 답사를 했지만 여기서 순록치기와 그 드넓은 이끼밭(蘚: Niokq의 鮮: Sopka)을 직접 만나고 달려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영하 72도까지 내려가는 세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알려진 사하의 오이미아콘 언저리에 위치한 한디가 압끼다 수림 툰드라 순록 여름유목지대로 답사를 떠나면서 필자는 『순록치기가 본 조선. 고구려. 몽골』[2008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의 초고를 들고 갔다. 2006년 6월 21일에는 이에 관해 야쿠츠크 국영TV의 인터뷰에도 응했다.

 

황금순록.jpg

[사진 1] 울야프 고분 출토 스키타이 유물| 마두황금순록‘뿔’탈[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탐사단은 필자(몽골유목사학), 김천호 교수(식생활문화학), 최준 박사(민속사학), 반기동 현지 기독교 선교사(북방몽골로이드 역사 연구생), 조영광 교수(중국인| 식생활문화학)와 삐까 에벤족 여대생 및 총을 멘 50세 전후의 길잡이 사냥꾼이었다. 한여름에 툰드라로 드는 산야에는 순록의 주식인 눈빛 흰 이끼(蘚)가 지천으로 널려 있기 마련이다. 며칠을 달려도 가없이 펼쳐지는 이러한 순록의 목초지(鮮)는 흰 이끼가 툰드라의 흰 눈 속으로 자취를 감출 때까지 이어진다.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입에서 “조선은 순록유목민의 나라!”라라는 탄성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올 만큼 어마어마한 장관이고 알려지지 않은 무진장한 비경이다. 그 응달에 이끼가 나는 밑밑한 산등성이의 선(鮮)들이 겹겹이 좍좍 거대한 선(線)을 그리며 뻗어나간 웅장한 광경을 감상하며 “아, 차아탕의 후예인 우리에게 선의 예술이 이래서 생겨났구나!” 하고 감탄했다. 저습지대 순록 목초와 더불어 자라는 낙엽송이 있고 앙증스럽게 작지만 버드나무와 진달래도 있다. 우리와 역사적인 인연이 무던히도 끈질긴 수목들인가 보다. 


  물레질해 실을 자아내며 읊조리던 우리네 할머니의 고저굴곡이 없이 펑퍼짐한 노랫가락이 꼭 이곳의 그것을 빼닮았다. 1993년 8월초에 훕스굴 에린칭룸베 설산(雪山) 차아탕 유목지 곁을 지나며 이 후미진 이국땅에서 우리말을 쓰는 이는 필자뿐이어서 혼자 우리 타령 비슷한 가락을 흥얼대며 외로움과 두려움을 달랠 적에, 올 초에 타계한 몽골샤먼 연구자 오. 푸렙 교수가 “당신의 그 가락이 꼭 설산 위의 차아탕(순록치기)의 그것을 닮았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 순록을 정식으로 만나「조선 순록유목민기원설」을 제기하고 나온 것은 그로부터 6년 후인 1999년 8월 11일 훌룬부이르맹 오룬춘기 박물관에서였고 그 가락을 다시 상기한 것은 또 그로부터 7년 후인 2006년 6월 하순에 사하 에벤(鮮=小山: Sopka)족 할머니 노래를 듣고서였다. 15년만의 자각인 셈이다. 산악 밀림지대(大山: Gora)와 너무 다른 무한히 평평한 대지생태를 닮아나는 소리가락일까. 개인날 아침이면 날이 가물려면 운다는 뻐꾸기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SBS와 KBS 텔레비전 방송국 취재팀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순록치기 유목 핵심지역 관계 내용들만 찍어내는 탐사로정으로는 이러한 감격 속에서 순록치기 생태현장을 몸소 직접 체험하기가 매우 어렵다. 중고 봉고차에 배낭과 함께 실려, 금광 채굴을 위해 근래에 새로 뚫은 아슬아슬한 험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순록유목 중심지대.jpg

[지도 1] 북동아시아 순록유목 중심지대

   목적지인 한디가 압기다 여름 순록유목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또 약 20Km를 순록을 타고 더 들어가야 한다. 말은 등에 안장을 놓고 타지만 순록(Chaabog: Цаа буга)은 목과 어깨부위에 안장을 얹고 탄다. 게다가 순록 목초지에는 이끼와 풀뿌리가 흙에 뒤엉켜 생겨난 당라순(Danglasun)이라는 늪지대가 있다. 당라순은 툰드라의 빙수 늪에 생긴 작은 디딤돌 같은 것이어서 잘못 디디면 얼음물에 빠지기 일쑤다. 이런 풍토에 적응한 순록의 발가락은 당라순을 움켜쥐고 걷게 진화돼 왔다. 고도의 균형 감각이 없으면 순록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아 사냥해먹고 살아낼 도리가 없다. 우리 무당이 작두를 타고 걷는 기의 집중과 균형미는 이에서 비롯된 걸까? 여기는 너무 추어서 양이 못살고 살아 따라다니는 음식인 양이 없는 데서는 몽골경기병이 작전을 할 수 없다. 물론 스텝의 타르박(乾獺)굴에 발만 빠져도 치명상을 입는 몽골말이 순록목초지를 내달릴 수가 없기도 하다.
  도중에 물을 마시면 긴장이 풀려 중도에 낙오한다고 현지 가이드가 일러줘서 꼬박 5시간 반을 물 한 모금도 못 마시며 걷고 타고, 그 길 아닌 길인 순록목초지를 소나무 지팡이로 균형을 잡으며 또 걸었다. 노인대원들은 너무 자주 떨어져서 순록을 못 타게 하고 젊은이들만 타고 걸었다. 병원이 있을 리 없는 현지에서의 낙상이 우려돼서다. 목이 타고 순록목초지가 누런 황색으로 뿌옇게 눈에 들어왔다. 균형을 가까스로 잡아가며 순록을 타고 온 젊은이들은 그날 밤 내내 허리가 아파서 신음을 해야 했다.

  삐까는, 사회주의 집단목장화로 이동성 본질이 거세된 순록유목업이 어렵게 되어 백수로 헤매던 아버지가 병들어 죽고 근근이 애들을 돌보며 막일을 해오던 어머니도 병이 들어 입원했으나 입원비가 없어 나앉는 판에 본인도 대학을 중퇴하고 미용사 노릇을 시간제로 하던 터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도시에선 그토록 풀이 죽어있던 에벤족 처녀였다. 그런데 자기 생업 생태태반인 수림툰드라 순록치기 여름유목지에 돌아오자마자 삐까가, 돌연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야생마가 되어 나는 듯 산야를 치달렸다. 3살적에 이곳을 떠났단다. 그런데도 생태태반이란 이런 마술적인 세계인가보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처녀가 되면서 광대뼈가 솟아 지금은 창피하게 느낀단다. 
   수림툰드라 끄라이(邊地)의 새벽은 오들오들 떨렸다. 화덕의 불이 꺼지니 온통 소동이 일어났다. 가이드가 군불을 지피고서야 다시 잠들이 들었다. 화덕 곁에서 땅바닥에 낙엽송 가지를 깔고 그 위에 곰이나 순록의 모피(Fur)를 겹쳐 얹고 누어서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담요를 몇 겹 겹쳐 깔아도 땅바닥의 한기(寒氣)가 차단되지 않아서 자연섭리의 오묘함을 새삼 실감했다. 모깃불도 효과가 있기는 했으나 악머구리 끓듯 윙윙대며 떼로 달려드는 모기를 막을 방도는 모기장을 치는 길밖엔 없었다. 순록의 천적이 모기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늘한 바람이 스치기만 하면 그 지겨운 모기떼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 최저온도가 영하 40~45도까지 내려가 너무 추워서 호랑이도 못산다는 대흥안령 북부의 최고 혹한지대인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의 껀허(根河)일대가 순록유목제국의 중심보루([槁離國])가 됐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비상식량으로 가지고간 누룽지와 볶은 콩이 현지음식에 비위가 상해 뒤집힌 속을 달래주고 허기를 채워주었다. 이번 학기에 몽골제국시대사 박사학위논문 2편을 심사해 통과시키고 온 터라 피로가 계속 쌓여온 데다가 일교차가 수십~100도까지 나서 감기를 달고 다니고 목가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순록을 잡아 요리하고 가죽을 손질하는 법이나 순록치기의 세수법이며 유제품을 만들어 보관하는 법을 유심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양치기들의 그것과 거의 상통했다. 순록 도살과정에서 모기가 순록 가죽을 뚫고 몸속에 유충을 심어 새끼손가락만 하게 자라고 있는 걸 발견하고 이지대 생존실태의 엄혹함을 재삼 실감키도 했다.
  순록치기의 문화를 양치기가 계승하고 상호소통하며 살아왔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울야프 고분 출토 스키타이 유물인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품 마두황금순록‘뿔’탈 유물을 상기케 된다. 말에는 물론 뿔이 없다. 수림툰드라의 기(騎)순록 순록유목민의 계승자가 스텝의 기마 양유목민임을 보여준다. 오가는 길에 수림툰드라지대의 샘 파기도 관찰했다. 장작더미를 언 땅위에 쌓아놓고 불을 오래 지피면 얼음이 녹아 땅이 꺼져 웅덩이가 생기고 물이 고인다. 그걸 소와 순록이나 곰과 늑대들이 마시고 산다. 이 지대의 현행 순록유목 60~70%가 자본가가 시장을 겨냥해 투자해 경영하는 것이고 전통적인 순록치기 양식은 점점 급속히 사라져가는 중이라는 정보도 확보했다.

쿠마河 부근.jpg

[사진 2]. 鮮(Сопка: 小山); 대흥안령 북부 헤이룽장성 쿠마하(河) 부근 소재

   돌아오는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길 없는 길을 오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비가 와서 기나긴 샛강물이 불어 차가 못 건너갈 수 있다는 바람에 예약한 비행기 시간에 못 갈 형편이 될 뻔도 했다. 특별히 총을 멘 가이드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길을 찾아 홀로 떠난 터에 다시 귀로마저 잃고 헤매는 100분여 시간동안을 선(鮮)의 당라순 습지 위에 앉아 기다리는 그 공포의 순간순간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다. 굶주린 늑대 떼와 곰의 기습을 받는 날엔 도무지 대책이 없는 상황이어서 벌벌 떨며 싸늘한 보슬비가 뿌리는 가운데도 배고프고 졸려서 감겨오는 눈을 서로 살을 꼬집어 억지로 띄우며 “예서 이렇게 졸면 이대로 죽는다!”고 계속 각성시켜주면서, 가슴 졸이던 수림툰드라 순록유목지대 대탈출 추억이다.
  여기, 이 아까운 지면을 사하 순록목초지 탐사기록으로 이렇게 채우는 건, 특히 북아시아 몽골로이드 유목태반사에서의 그 압도적인 비중 점유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 관한 한 전문가나 비전문가를 불문하고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우려 함에서다. 2001년 8월초에 처음으로 장대한 타이가인 동·서 사얀(鮮: Sayan)산맥 중의 투바에 가서 투바대학교 사학과의 스키타이사 전공자 헤르테크 여교수를 만났더니 놀랍게도 스키타이(Scythia)도 사하(Saxa)도 소욘(鮮: Soyon)도 모두 젖을 주는 암순록 수간(Sugan)에서 나온 이름이란다.

  모음과 모음사이의 'g'가 탈락되는 북방몽골로이드 언어의 관행에 따라 선(鮮: Son)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흑해일대에서 우랄-알타이 지역으로 올라왔다는 사실은 원주민들에게는 상식이기도 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유목사를 공부해옵네 하던 필자의 무지가 너무나 부끄럽고 놀라울 따름이다. 문제는 그 선이 순록목초지(Ewen: 鮮)이고 선은 바로 몽골과 한국의 선조인 고조선(古‘朝鮮’)·선비(鮮卑)의 그 선(鮮)이라는 점이다. 몽골족의 기원지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에서는 아직도 Korean을 선어(鮮語)로 말하고 선문(鮮文)을 쓰는 선족(鮮族)이라고 한다. 그 몽골본향엔 조선(朝鮮)도 한(韓)도 없다. 몽·한이 모두 선족(鮮族)-‘순록치기’의 후예인 동족 ‘선’겨레라는 것이다. 필자는 일찍이 이렇게 설파한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5,000년 전부터 15,000년간 몽골고원은 빙하기로 동토(Tundra)지대여서 이곳에서 사람을 먹여 살릴 식량자원은 순록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순록시대’라 할 장대한 생태 생업사 배경이 있었음을 각별히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순록시대의 토대 위에 그 후 ‘순록유목의 창세기’가 중동부 시베리아 북극해권에서 쓰였음을 전제로 하고서야 동북아시아 유목제국의 시원사적 거대토대를 복원할 수 있게 마련이다.

  이런 거대하고 장구한 한랭 고원 저습지대 순록유목태반사를 거세시킨 「몽골국사」의 비극은, 칭기스칸 몽골세계제국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사안(史眼)으로 들여다보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한랭 고원 건조지대 스텝 기마(騎馬) 양(羊)유목 기원의 칭기스칸 ‘몽골 기마양유목제국사’가 특히 몽골 사회주의체제 와해 이후부터 지나치게 압도적으로 부각되면서 그 위대하고 장엄한 뿌리인 북방 몽골로이드의  ‘순록유목제국사’가 「몽골국사」에서 아예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몽골국사 복원사상의 가장 치명적인 비극이라고 하겠다.” 


  이런 역사적인 전개과정에서 동북아시아 유목제국의 태반으로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을 공유하고 있는 이상은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많든 적든 이러저러한 계승관계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몽골족이 직접적으로 기마 양유목을 배운 것은 돌궐 지배 하나 또는 영향권 안에 들어서이니, 돌궐의 서진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통해서건 그 유산을 물려받아서건 위구르한(回鶻汗)국이 멸망한 840년 이후의 일이다.

  그로부터 훌룬부이르 몽골 수림툰드라지대에서 본격적으로 몽골스텝으로 진입하면서 양유목을 배웠고 양유목을 발전시키면서 비로소 말을 타고 양을 몰고 활을 쏘게 돼 기마사술(騎馬射術)이라는, 당말·오대·송초 변혁기 이래의 최첨단 제철기술과 결합된 유목무력을 갖추게 돼서 뒷날 몽골 유목세계제국을 창업할 토대를 마련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혼|Xонь(羊) 이라는 몽골어가 실은 돌궐어임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이는, 돌궐과의 접촉이 있기 이전의 핵심 순수몽골인인 'Nirun Mogol'인은 양을 몰랐거나 양치기(牧羊)가 적어도 주된 목축업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양치기의 보조수단으로 발달한 기마사술이라는 최첨단 유목무력도 보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5년 7월 2일 울란바타르 호텔 로비에서 한껏 들뜬 억양으로 “주교수, 내가 뭔가 보여줄 거야!”라고 외친 이가 있었다. 유언이 될 이 말을 남긴 이는, 1950년대 중반에 씨마늘을 걸머지고 충남 서산에서 한국학을 연구하겠다며 무작정 상경했던 촌티 나게 검게 탄 당시의 시골소년 한국무가(巫歌)연구자 김태곤 교수였다. 1996년 1월 25일에 나는 서울의대 병원 영안실에서 김선배를 마지막 보게 됐다. 영하 4~50도를 오르내리는 사하를 한겨울에 적응과정도 없이 예순을 코앞에 둔 나이로 네 번이나 넘나들다가 입원중에 기도(氣道) 협착으로 돌연사한 터였다.

  필자와는, 김선배가 당시에 찬반론의 극과 극을 오가던 이 풋내기 연구자의 처용가의「처용(處容)은 거북이」(왕팔단|王八蛋: 뱀에게 마누라 뺏긴 웅구|雄龜놈; 현무신주|玄武神主)라는 논문을 과감히 『한국민속학』(6, 한국민속학회 1973)에 처음 게재케 해준 심정의 인연이 있다.

 너무 추어서 사하엔 개구리(Мэлхий)는 살고 거북이(Яст Мэлхий)는 못살지만, 아둔하고 게으른 필자는 두 번째 현지탐사를 하고 이제야 김태곤 선배가 왜 사하-순록유목 기원지 선(鮮)에 그토록 한사코 몰입했었는지를, 북방몽골로이드의 유목본질은 농경정착문화와는 달리 이끼(蘚)나 양초(羊草)와 같은 ‘유목목초’를 따라 끈질기게 시공을 옮겨 다니면서만 읽어낼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새삼 깨우치고 있다.

발해고구려학회

http://www.palhae.org/gnubrd4/bbs/board.php?bo_table=pds2&wr_id=201&page=6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들 간의 민족 문화적 관계에 대하여-Abaev N. Viacheslavo -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들 간의 민족 문화적 관계에 대하여 


                            Abaev N. Viacheslavovitch(러시아 투바대학)
                                               
                                                               
원(原)몽골인들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고대 한국민족의 기원과 함께 사얀-알타이 민족그룹의 이동, 주변 민족들 간의 영향력 행사등과 맞물려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이 민족간의 이동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행해졌고, 동쪽 아무르강 연안, 만주지역, 그리고 한반도에까지 그 여파가 미쳤고, 동쪽으로 이동하는 이러한 과정 속에 현대 몽골어와 부리야트어가 만들어지게까지 될 정도였다.(빅토로바, 1958)

 
원몽골어와 고대 투르크 언어들은 흉노의 언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사얀-알타이 지역 동부의 산악-타이가지역에서 이 두 언어의 모태가 형성되어 점차로 동부 사얀에서 아무르강 상류까지, 몽골 알타이를 지나 현재의 중국 신강지역을 따라 남쪽의 황해까지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언어의 흐름은 서기 전 3세기 경 고대 흉노의 거대한 유목제국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고대 중국문헌에 나오는 여러 흉노어의 관련 단어들은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일본인 학자 시라토리 꾸라끼띠는 흉노어는 투르크어계통에 속한다고 주장했다.(시라토리, 1970, 4권, 1-8쪽) 그러나 람스테트는 흉노의 언어에서 아직 몽골어와 투르크어로 갈라지지 않은 상태인 알타이어계통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람스테트, 1937, 81-91쪽) 이에 러시아 학자인 L.N. 구밀레프는 흉노의 언어는 투르크어계통이라고 굳게 확신하였다.(구밀레프, 1960, 48-49쪽) 하지만 L. 라게티같은 학자는 이러한 논의들에 대해 가급적 언급을 피하며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요구했다.(라게티, 1950, 141-149쪽)

여러 연구결과에 따르면, 흉노 언어의 기원은 우랄언어들이고 특히 그중에서도 핀-위구르어, 사모예드어, 케트어같은 고아시아어일 것이라는 의견이 옳다고 본다. 또한 고대 투르크어와 몽골어의 구분은 우랄 인접지역 숲 속에 살던 민족들이 사얀-알타이, 남우랄 지역 그리고 이 후 중앙아시아 숲-스텝과 대유라시아 평원으로 이동함에 따라 생겨났다는 주장도 옳다고 본다. 이와 같은 민족들의 이동은 결국 우랄-알타이계 민족들과 스키타이같은 이란계 민족들, 아리아인이라 부르는 인도-유럽계 민족들 간의 적극적인 상호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민족간의 만남들은 왜 투르크-몽골어 언어요소 안에 이란 언어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어안에 우랄어, 특히 핀-위구르어의 요소들이 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대부분의 몽골학 연구자들은 몽골어는 궁극적으로 고대 투르크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앙아시아의 동쪽과 퉁구스-만주부족의 영향을 받은 극동지역의 우랄-알타이어를 근간으로 형성되고 분화되었다고 여긴다. 그와 동시에 고대한국어가 주요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 한국어의 영향으로 투르크-몽골계 민족들의 정치문화에 대한 중요한 단어가 만들어진다. 사얀-알타이어어의 '사까(    )'와 '한(  )'과 어근에서 같이 하는 '까간(      또는 '한')'이란 단어가 이것이다. 이 단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어원 설명이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첫 번째 설명은 스키토-시베리아의 민족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당시 사람들이 숭배했던, 예를 들어 사코-스키타이와 투르크-몽골계 부족들에게 신화적인 조상 할머니인 '알란-호아(알란호)'같은 순록이나 사슴 토템에서 나왔다는 의견이다. 두 번째 설명은 다음과 같다. '까-간(뚜바어로 '하안')'은 '피'를 뜻한다. 이 피는 단순한 피가 아닌 '혈통'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왕족의 피란 뜻이다. '까간'은 한편으로는 사코-스키타이인들이 '항금뿔을 가진 순록의 산' 알타이와 관련이 있다.

'위서(魏書)' 41장에 따르면 중국 대륙에 뚜파(Tufa)족은 '남양'왕조를 세웠고, 또바(Toba)족은 북위(386-534년)를 세웠는데, 이들은 서로 가까운 친척부족이라고 써있다. 또한 위서에는 또바, 썅비(      ), 쥬잔(    ) 그리고 아바르(오브르이)족과 현대 헝가리인들의 조상이라고 생각되는 쥬잔족들과의 관계도 무척 친밀했다고 밝히고 있다.(따스낀, 47,48쪽) 러시아 문헌에는 쥬잔(중국어로는 쥬앙)의 일부가 서쪽으로 즉 유럽으로 아바르라는 이름으로 현재 헝가리의 빤노니 지방을 정복했다고 한다.

 이 아바르인들은 결국 헝가리민족을 형성했으며, 또한 알타이(우랄) 언어요소도 전파시켰다. 이러한 언어적 요소가 이런식으로 한국어에도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빅토로바, 1980, 131쪽)

 
흥미로운 것은 야쿠트어에서 '또파(Topa)'는 '순록'을 뜻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투르크-몽골어에서는 또파란 '고개', '산정상'을 뜻한다. 이는 민족명인 '뚜바(띄바)'가 우랄어계통에서 '울창한 숲으로 덮힌 고원'이란 어원을 갖는 것과 관련이 있다. 민족명이 가지는 어원적 의미는 지명(地名)뿐만 아니라 인명(人名)과도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칭기스칸의 조상중 하나이자 몇몇 전설에 따르면 아무르 유역에 살고 항상 물고기 껍데기로 만든 옷을 입었다던 도부메르겐은 개인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주변 민족명, 지명이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위에 잠깐 서술한 쥬잔족은 사얀의 지명 그리고 사까의 민족명과 관련이 있다. 어근들을 풀어보면 쥬잔족은 '순록의 민족'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사얀은 '사까의 민족들'이란 뜻이 나온다. 그런데 사까 자체도 순록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쥬잔, 사얀, 사까는 같은 뜻의 말인 것이다.


서부 부리야트의 '뚠까(    )'라는 지명도 주목할 만하다. 이곳은 몽골비사에 나오는 '뚠까이뜨(      )'를 연상시키는 현대 뚜바의 성씨(姓氏)인 '돈각(      )'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N.P. 샤스찌나는 '뚠까이뜨'의 어원은 'tongho', 즉 '숲'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B.I. 따따린쪠프는 뚠까이뜨와 돈각, 뚠까는 발음만이 비슷하게 들릴 뿐, 실제 뜻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돈각은 뚜바어의 동사 '둔'이 중심어이며 이 말은 투르크어의 '똔'인데 이것은 '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따따린쪠프의 의견으로 뚠까의 어원을 살피기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와 발음상 비슷한 단어들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베리아에 있는 한 민족인 '퉁구스(      )', 강이름인 '퉁구스카', 이루쿠츠크에 있는 큰'퉁구스'강 그리고 '썅비'와 같이 흉노의 붕괴이후 등장했으며 러시아 학자들이 고몽골인들로 생각하는 중국의 민족지적 개념인 '둥후(    )'와 뚜바의 돈각과의 관계는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른바 '썅비'는 몽골인들의 직접적인 조상들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주채혁 교수에 의하면 '썅비'는 고대 한국의 민족이자 정치체인 '조선'의 원류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썅비'의 어원을 제공한 성스러운 산 '썅비샨(        )'과 '달라이-노드(    -  )'호수는 흥미롭다. 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달라이-노르 호수는 당시 '쮸이룽(        )'이라고 불렀고, 현대에는 '훌룽(      )', '꿀룽(      )', '훌룽-부이르(      -    )'라고 부른다. 주채혁 교수에 따르면 '다쌴비샨(            )'은 이 호수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으며, 대흥안령 산맥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V.S. 따스낀은 호수는 아르군(    )강과 연결되어있으며 현대 지도에는 표시되어있지 않지만 달라이-노르 호수를 끼고 흐른다고 한다.(따스낀, 363쪽, № 8)

시라또리를 위시하여 일련의 부리야트 학자들은 이 아르군 강을 전설적인 '에르구네-쿤(      -  )'으로 여긴다. 하지만 좀더 연구해본 결과 필자는 에르구네-쿤이 두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가 뚜바남쪽에 있는 웁스-후르 호수와 떼스-헴강이다. 두 번째 에르구네-쿤은 아르군 상류와 대흥안령산맥이다. 이 두 곳이 몽골인들과 동(東)우량하이인들의 역사적 고향인 것이다.
한국-투르크-몽골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민족 단어중 하나인 '함(  )'은 학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 말은 사얀-알타이 민족들에게 '샤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L.K. 헤르쩩은 '함'의 어원에 대해 두 가지의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함'은 고아시아 사얀-알타이어에서 '강(江)'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헴(  )'에서 온 말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어의 '강(江)'은 헴-함을 거쳐 강이라는 발음을 가졌을 것이다. 또 다른 그의 이설은 '함'은 '까간'처럼 '혈통'이란 뜻이 있다고 한다.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부르한과 텡그리라는 종교관을 가진 사얀-알타이 민족들의 샤머니즘의 요소들은 타이가지대 시베리아와 극동에 사는 유목민들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얀의 동쪽과 동북쪽에서 고대 투르크인들과 고대 몽골인들과 더불어 살던 퉁구스-만주 민족들과의 접촉과 상호관계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동아시아에서 두드러진다. 그래서 성산(聖山)의 하나인 '우환(      , 중국어로 '치산')에 살던 '둔후(    )'족의 지역상황에 특별한 관심이 쏠린다. 따스낀에 따르면 우환산맥에서 '우환'족이 이름을 얻었을 것이라 하는데, 이 산맥은 중국인 판이에 따르면 랴오뚱에서 북서쪽으로 수천마일 떨어져 있다고 한다.(따스낀, 6-7쪽) 따스낀은 이 산맥이 아무르 상류 쪽일 것이라고 단정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최근까지 에벤끼족이 살았던 부리야트 공화국의 끼진긴스끄 아이막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몽골어에서 '붉다'라는 뜻의 '울라간(      , 또는 '울란(    )', 중국어의 '치산'도 '붉은 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에서 어원을 찾으려는 시도는 무척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부리야트의 지명들은 투르크어나 에벤키어 또는 고아시아어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환이라는 민족명칭에서 퉁구스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우환산에 대해 고대문헌에서는 '오관(ogwan)'이라고 표현을 했다. 이것은 아마도 트랜스바이칼지역에 살았을 퉁구스부족 '우왕(    , 또는 '구이(  )', 갸이(  )')'와 명칭이 유사하다.(바인슈쩨인, 1972, 119쪽) 당서(唐書)에 보면 '우왕'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있다. "...그들에게는 양과 말이 없다.

대신 순록을 가축처럼 기른다. 이끼를 먹이고 수레를 끌게 한다."(비츄린, 1950, 1권, 350쪽) 여기서 수레란 순록이 끄는 썰매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7세기에 쓰여진 이 기록의 신뢰성에 대해 바이슈쩨인은 순록업의 기원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만약 순록업을 주로하는 삶의 양태를 안다면, 순록이 끄는 썰매에 대해 의심할 바 없다."라고 하였다.(바인슈쩨인, 1972, 120쪽) 여기서 하나 덧붙인다면 우환과 둔후가 고대 몽골인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따스낀은 다른 문헌을 토대로 우환을 우왕으로 읽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따스낀, 7-9, 483쪽)

신빙성에 다소 문제는 있지만 좀 더 오래된 중국 문헌에는 북아시아의 동부지역에서 5세기말에도 순록업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499년에 쓰여진 중국 문헌 '난시(      )'에는 '푸산(    )'에 있는 어떤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순록에 썰매를 매서 다니며, 순록의 젖으로 꾸므이스를 만든다고 쓰여져 있다.(비츄린, 1950, 2권, 47쪽)

많은 사얀-알타이 민족들, 예를 들어 동뚜바의 또드진, 그들의 친척관계인 또팔라르 그리고 다르하뜨, 쏘이요트인들은 사모예드인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순록 썰매를 끌고 다니며, 순록업을 퉁구스인들보다 먼저 했을 것이다. 또한 우랄-알타이계열 민족들뿐만 아니라 이란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을 만났을 것이다. 문헌을 보면 순록업은 사얀지방에서 먼지 시작되었고, 여기서부터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을 볼 수 있다.(바인슈쩨인, 1991, 292쪽) 바인슈쩨인은 고고학자 B.A. 슈람꼬의 툰드라지대 민족에겨서 볼 수 있는 순록썰매에 쓰는 용구와 유사한 것이 스키타이에도 서기전 4세기에 존재했을 것이라는 의견(슈람꼬, 1988, 233-237쪽)에 반박하였다.

바인슈쩨인은 사얀지역에서 순록을 기르기 시작한 최초의 시기를 기원전 1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순록업의 시작은 스텝지역에서 밀려들어온 목축업을 하는 민족들이 타이가 지역에서 사냥을 하던 사모예드계 부족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바인슈쩨인, 1991, 291쪽) 다시 말해 사얀지역의 순록업은 목축업자, 정확히 말하면, 말을 기르던 민족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V.K. 다르쟈와 O.K. 슈의라빠를 위시한 뚜바 연구자들은 바인슈쩨인과 다른 의견을 낸다. 그들은 순록업과 목축업은 우랄-알타이와 사얀의 산악-타이가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순록업과 목축업은 숲과 숲-스텝의 사냥꾼들과 어부들의, 채취경제에서 농업단계로 넘어가 태평양 연안지역까지 진출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문화-경제생활의 총체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동시에 그들은 기존의 목축업의 방법들을 잊어가면서 전문적이 순록업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활동범위는 숲 툰드라 지역과 유라시아 북부의 툰드라 평원까지 넓어졌다.
사얀지역의 순록업은 산악 타이가 지역에서 순록업이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안에 사얀에서 동쪽으로 사는 민족, 특히 트랜스 바이칼지역의 에벤키에게 순록업을 전달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비교적 최근까지 퉁구스인들을 '말(馬) 퉁구스인'과 '순록 퉁구스인'으로 나누어 불렀다.
필자의 견해로는 유라시아의 유목문명 현상은 목축업의 과정에서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타이가 사냥꾼들의 농업, 목축업, 순록업 등 생업문화의 총체적인 결과로 인해, 또는 숲과 스텝 부족들의 민족문화적 협동관계의 결과로 형성되었다. 자연적으로 옛날에 어느 정도 목축업과 말 사육을 번갈아 했던 민족들은 조금씩이나마 농업도 하면서 유라시아 대 평원 전지역에 급격히 퍼져나갔다. 더불어 순록업자들, 예를 들어 사얀인들은 스키타이, 흉노 등 스텝제국들이 형성되기 전에 일찌감치 동쪽과 남동쪽으로 이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의 순록업과 이동이 일찍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적지는 물론이거니와 정착민들(중국인들)의 문헌에서도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바인슈쩨인에 따르면 퉁구스의 순록업은 서기 무렵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서기 일천년 중반 무렵 그들의 순록업에 대한 내용이 중국문헌에 등장한다.(바인슈쩨인, 1972, 120쪽) 그러나 이것을 믿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 중국문헌 자체의 신뢰성이다. 생활상의 묘사, 민족의 특징에 대한 묘사는 다른 스텝지역의 유목민에 더 가깝게 기술했고, 산악타이가지대에 대한 많은 부분이 빠져있다. 둘째로 순록에 얹는 안장은 나무와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그것은 고고학적 유물로 남기에는 오래 보존되지 않는다. 셋째 순록은 안장없이 탈 수 있다. 특히 키가 작은 퉁구스인과 청소년들은 안장을 사용하지 않았다. 뚜바-또드진인들은 겨울에 순록에게 썰매를 매어 짐을 옮기게는 하였지만, 사람들은 스키를 탔다. 스키가 순록보다 더 빠르기 때문이었다.

사얀-알타인들과 고대 한국인들과의 민족문화 관계에 대한 보충자료들은 흉노와의 부족구성의 문제와 그들의 종교-신화적 분석, 고대 한국인들과의 신화계보의 비교를 하게 한다. 많은 연구자들은 중국에서는 흉노의 왕족을 '후양(    )'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주목한다. 하지만 문제는 '후양'으로 발음되고 씌여지게 된 납득할만한 근거를 중국문헌에서 찾을 수 없다. 흉노, 투르크, 몽골의 신화와 전설은 기본적인 세부사항은 서로 일치한다. 몽골의 왕족 칭기스칸 보르드쥐긴의 신화적 조상은 '끼얀(    )'이며, 이 가문의 증조부는 '끼야트(    )'인 것에서 앞의 '후양'의 어원에 대한 의문을 풀 수가 있다. 다른 한편 끼얀은 이란의 왕족 '케이아니드'와 관계가 있다. 또한 늑대의 자궁에서 또는 산의 동굴, 계곡(세 가지 다 신화적 사고에서는 같은 것이다.)에서 출생한 고대 위구르민족의 엘리트층과도 관계가 있다. 위구르의 '위(  )'는 '산에 있는 동굴'을 뜻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북부 지역에서 조상의 탄생신화의 장소는 동굴이나 산의 협곡과 관련이 있으며, 남부 지역은 궤짝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알려진 대로 동굴과 궤짝은 유라시아지역에서 세상을 태어나게 한 '우주의 알'을 뜻한다. 그러나 사얀-알타이와 중앙아시아에 사는 민족들처럼 한국인들에게도 우주알로부터의 세상의 창조라는 고대의 모티브는 인성을 가진 조상의 출현까지만 통용되었다. 주몽의 탄생설화를 보면, "알을 깨자 그가 거기서 나왔다. 갓 태어난 아이는 완성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쟈르일가시노바, 1972, 86쪽) 한국신화에서 문화영웅 또는 조상들은 하늘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탄생은 거의 땅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단군은 태백산에서, 김수로는 구지봉에서, 김알지는 금산주변의 처녀림에서 태어났다.
지배자들의 이름은 흉노의 지배 부족과 사얀-알타이 부족들 간의 민족적 관계를 가리킨다. 고대 중국역사서에 따르면 흉노의 강력한 중앙정부체제는 서기전 209년 아버지 뚜만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모대(마오둥)와 관련이 있다. 모대의 군대는 서기전 201년까지 10년 가까이 중국문헌에 동쪽에 사는 오랑캐라는 뜻의 '동호'부족을 압박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모대란 이름은 뚜만(    )이라는 이름처럼 고대 사얀-알타이의 부족인 '마아드이(    )'부족과 관련이 있는 씨족명이다. 뚜만도 뚜마뜨(    )부족과 관련이 있다. 뚜마뜨 족은 사얀-알타이 지역과 중앙아시아의 '뚜바스(    )', '또바(    )', '떼파(    )', '찌파(    )', '뚜판(      )'족의 시족 공동체이다. 이 씨족명은 한국 북부에 있는 한자로는 '대지의 문'이란 뜻이 있는 '두만강'의 명칭과 관련이 있다.

한국과의 유사점은 더 제시할 수 있다. 뚜바의 뚜마뜨는 마찬가지로 '호르-뚜마뜨(  -    )'로도 불리었다. '호르'는 하나의 큰 민족집단을 이루는데, 이 '호르'를 어근으로 하여 고대 사얀-알타이(알타이, 뚜바, 하카시아)민족들을 '호오라이(      )', '혼고라이(        )', '우량하이(      )'로 불렀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대한국의 '고려(고구려)'도 '호르'를 어근으로 하여 만들어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전설에는 강물의 신의 딸로부터 태어난 주몽이 시조라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 주몽왕이 나라를 세웠다. 그는 북부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물의 신의 딸이다."라고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자를가시노바, 1972, 86쪽) 주몽에 대한 신화 속에 서술된 고구려 사람들과 북쪽의 부여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들의 문화와 삶에 대해 서술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상고지'의 필자는 "동방의 오랑캐들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고구려인들)은 부여에 뿌리를 둔 한 분파이다. 그들의 언어는 서로 거의 같다."(끄류꼬프, 64쪽) 고구려 민족의 역사에 대해 연구를 한 R.SH. 자를가시노바는 이러한 상황은 북쪽의 퉁구스-만주족이 고구려 문화원류에 여러 요소를 가미하게 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주몽에 관한 신화는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들과의 민족문화상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특히 헤로도투스에 의해 스키타이로 잘못 알려졌고, 흉노의 융기와 함께 동아시아에서 흑해연안까지 주름잡았던 '싹'족의 신화와 유사하다. 서기전 2000년말부터 1000년 초까지 치끼, 구르이, 뗄레족과 다른 이란어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들, 위그로-핀어를 사용하는 부족들, 고대 투르크 민족들은 서로 연합하여 강력한 부족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강력한 씨족 연합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끊이지 않는 이동과 전쟁 속에서 멀게는 중앙아시아의 동쪽과 남쪽까지 침투하였다. 중국문헌에 의하면 이들을 '치디(    )'라고 불렀는데, '붉은 오랑캐'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들이 인종적으로 백인에 가깝다보니 더 붉게 보여서 그렇게 부른 것으로 여긴다. '붉다'라는데서 알수 있듯 붉은 색은 스키타이인들, 다시말해 귀족들인 전사집단의 특별한 상징이다.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인들의 종교에 대해 헤로도투스는 그들이 강물의 신을 숭배하고 제물을 바친다고 하였다. 뚜바어로 '아릭-부가(    -    )', '깊은 곳의 지배자'란 이름을 가진 전설적인 왕 '아르폭싸이(        )'는 싸코-스키타이의 한 씨족장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 제의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와 동시에 물에 대한 제의는 대지의 여신이며, 가정의 화로를 지켜주면, 산의 주인이자, 산의 동굴에서 왕권에 대한 상징물을 씨족장들에게 선사하는 '따비띠(      )'에게 바치는 제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산에 있는 동굴은 강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대지의 문'의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지의 문'인 두만강은 이러한 종교-신화적인 관념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부족명칭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헴-칙(  -  )'은 '강에 사는 치키인들', '또바(    )'는 '땅의 주인', '또곤(    )'은 '대지'란 뜻이 있따. 아마도 뚜바나 티벳이란 명칭도 위와 같은 명칭들이 확대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여하간 주몽이라는 이름도 이러한 음운학적 토대에서 만들어진 이름일 것이다.
요점을 정리해보면 뚜바의 사키-치키들은 케렉수르문화와 황금뿔을 가진 성스러운 순록이 그려져 있는 '순록돌(사슴돌)'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화의 확대는 직접적으로 한반도에 미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정해 보건데, 첫째, 이 문화의 영향은 간접적으로 사얀-알타이 사얀-알타이 부족들, 즉 처음에는 사키-치키인들을 통해, 그 다음에는 흉노제국에 의해 실행되었을 것이다. 둘째, 흉노가 원몽골인들과의 협력관계의 과정에서 둔후를 정복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한국의 신화는 사얀-알타이 민족들과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몇 가지 관념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단군신화이다. 신화 속에서 곰은 고대 한국인들의 국가인 조선의 시조로써 여겨진다. 곰에 대한 신성함은 사얀-알타이민족들에게의 성산(聖山)제의와 볼 수 있다. 사얀-알타이와 중앙아시에서는 신성한 산을 '하의라칸(        )'이라고 부른다. 이는 '곰산'이란 뜻이다.
구조와 내용에서 단군 신화는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간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그것은 최고 권력과 또한 거기에 걸맞는 상징이 천상의 최고신으로부터 집권부족의 대표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정치문화의 계승과 관련된 전통에서 주로 볼 수 있다. '뗀리 굿(        )' - '하늘의 신',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말은 흉노의 지배자에 대한 형용구와 직함이다. 흉노라는 명칭에도 고대 위구르어로 '하늘의 태양'이라는 뜻의 '꾼 뗀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군'이란 이름도 단순한 이름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추측하기에는 '하늘의 신-태양'이라고 여겨진다.
이런식으로 흉노가 고대 한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을 증명되었다. 또한 반대로 고대 한국에서 흉노로의 영향은 이른바 '호르'라 불리는 사얀-알타이민족의 하위 민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호르'란 말은 고대 고려(고구려)라는 말로 변해갔다. '호르'의 다른 명칭인 '훈고라이(        )'는 '훈가르(      , 헝가리)' 등이 되었다.

흉노는 십중팔구 스텝과 숲-스텝을 휘젖고 다녔을 것이다. 흉노의 구성원에는 우랄-알타이계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둔후족(썅비족)은 주채혁교수의 의견대로 이끼의 길을 따라 산악-타이가지대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퉁구스-만주인들에 동화해가면서 흉노보다 먼저 아무르강 연안지역, 소흥안령산맥, 대흥안령산맥, 만주, 한반도에 도달했다.
주채혁교수의 사얀-알타이인들과 고대 한국인들간의 혈통적 연관성에 대한 결론은 러시아의 유전학자 자하로프와 뚜바 국립대 도르쥬교수가 한국인과 뚜바의 소얀, 끄르그이스 성씨 사람들의 머리털 100개를 가지고 실험을 해서 입증하고자 하였다. 자하로프 박사는 이러한 미토콘드리아 DNA검사는 그 DNA자체가 모계라인을 따라 전달되기 때문에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다고 하였다. 아직까지 분자검사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확실한 결과를 위한 남성의 유전자라 할 수 있는 Y-염색체 검사도 불가피하다. 지금까지의 결과로는 자하로프 교수의 말에 의하면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북부 중국인과 비슷하다고 한다. 하지만 북부 중국인들은 흉노, 투르크, 고 몽골인 등이 서로 동화되어 만들어진 민족이다.
아직까지 DNA의 핵타입에 대해서 컴퓨터를 이용한 분석이 완료되지는 않았지만 사얀-알타이에서 남자들이 이주해왔다는 설도 입증될 것으로 보인다. 뚜바 신문 '에피르(    )'에 이것과 관련해서 논문을 투고하면서 따찌아나 우이눅-오올이 독일에서 한 실험에 대해서도 서술을 하였다. 이것은 야쿠트인들의 유전자를 조사한 내용인데, 야쿠트인, 부리야트인, 몽골인과 일본인의 유전자가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내용은 필자가 주장하는 바와도 일치한다. 먼저 야쿠트인과 부리야트인들은 사얀-알타이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알타이인, 뚜바인, 하카시아인들은 일본인들의 조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조상은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에 들어갔다고 본다.

한편 뚜바인들의 유전자를 조사해보면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조상도 사얀-알타이에서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고아시아 민족들이 순록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주채혁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말을 키우는데 능했을 뿐만 아니라 순록업도 잘 행했다고 한다. 필자는 이 이론에 동의하면서 덧붙인다면, 사얀-알타이에 살던 사모예드인과 위구르-핀 민족들은 순록업을 먼저 고대 투르크인들에게 전했을 것이며, 그 다음에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사는 퉁구스-만주인들과 원몽골인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은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는 씨족의 그룹은 유라시아의 다른 민족들처럼 목축을 하는 전사, 전사귀족, 사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 민족형성그룹들은 고대 중국, 특히 '중원(中原)'에 사는 사람들과는 아무 직접적인 관계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권력은 비록 후대에 들어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중국인들의 이주에 의해 형성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국 고대 문화형성에 있어서 중국 본토에서 도망 온 기자(      )같은 사람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국측 사료에서도 이들은 그저 '오랑캐국'의 '오랑캐'들 틈에서 잠시 쉴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되레 반대로 남만주지역에 거주했던 한국인들이 흉노에 의해 중국 본토로 들어가 흉노, 썅비, 고대 투르크, 고대 몽골인들처럼 중국인들의 인종적, 민족적 원류를 갖추는데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