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읽기]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글쓴이: 김태식  날짜: 2004.02.23. 05:41:24   조회: 181   글쓴이IP: 211.245.244.85
삼한시대 ‘낙랑·왜’와 교역 활발
가야 후기에 창원지역에는 탁순국(卓淳國)이 자리잡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창원시의 옛 지명은 굴자군(屈自郡)인데, <삼국유사>와 <고려사>에는 구사군(仇史郡)이라고 나오며, <일본서기>에는 구사모라(久斯牟羅), 또는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이라고도 나온다.

다양하게 남아있는 유적들
창원지방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은 발견된 바 없고, 청동기시대 유적은 더러 발견되었다. 즉, 창원시 남산 유적, 외동, 가음정동 민무늬토기 포함층과 진해시 성내동(웅천) 출토 민무늬 토기 등을 비롯하여, 창원시 외동, 토월동, 가음정동, 용지동, 동읍 덕천리, 용잠리, 화양리, 신방리, 남산리, 북면 외감리 등에서는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었다. 창원시 남산 유적은 마을이 야산의 구릉에 높이 조성되어 있고 그 전체가 사람 두 길 이상되는 환호(環濠)에 둘러싸여 있는 방어성 취락 유적으로서, 이미 청동기시대에 창원지방에 농경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2년부터 1993년 사이에 걸쳐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덕천리 1호 지석묘는 길이 8미터, 폭 6미터, 깊이 4.5미터의 토광 하단에 석곽을 설치하고 그 위를 판석과 괴석으로 3단에 걸쳐 덮은 후 다시 흙을 덮고 지석과 상석을 설치한 것이었다. 그 외곽에는 방형의 주구(周構:주위를 도랑으로 판 것)가 만들어져 있고 안쪽으로는 높이 40~50센티미터의 석축이 쌓여 있었다. 유물로는 민무늬 토기 평저옹, 홍도, 대롱구슬 일괄, 간돌검, 간돌화살촉, 비파형동검 등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묘역을 갖춘 대형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기는 최초의 일로서, 지석묘 유적 단계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계급분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다.

기원 전후한 시기 이후의 유적으로는 분묘와 성지가 있는데, 목관묘 및 목곽묘 유적으로는 창원시 가음정동, 반계동, 도계동, 봉곡동, 봉림동, 불모산동, 서상동 고분군, 동읍 다호리 고분군, 북면 화천리, 동전리 고분군, 진해시 성내동(웅천) 고분군 등이 있고, 옹관묘 유적으로는 삼동동 고분군이 있다. 창원시 토월동 진례산성, 동읍 무성성지, 북면 화천리 성지 등은 해당시기의 성지로 추정된다.

위의 고분군 중에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다호리 1호분인데, 봉분이 없고 길이 278센티미터, 너비 85센티미터, 깊이 205센티미터의 토광에 길이 240센티미터의 통나무형 목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부장품으로는 세형동검, 철검, 철제 고리자루 손칼, 청동투겁창, 쇠투겁창, 판상철부, 쇠따비, 성운문 거울, 청동 띠고리, 오수전, 청동말종방울 등의 금속기와, 휴대용 화장품곽을 비롯하여 검집, 원형두, 방형두, 원통형 칠기, 뚜껑, 각형 칠기, 붓, 부채 등의 칠기류, 유리구슬, 민무늬토기와 와질토기 편 등이 출토되었다.

유물 가운데에서 성운문 거울, 오수전, 띠고리, 청동말종방울, 유리구슬, 칠기 화장품곽 등의 중국 한나라식 유물은 평양 정백동이나 경주 조양동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서, 이 시기에 한반도 남부지역과 낙랑과의 교섭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목관의 형태나 청동기, 철기 및 칠기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는 다른 독창적인 세형동검 문화의 전통을 보인다. 따라서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경남 해안지대에서 창원지방에 가장 선진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창원시 도계동 및 다호리 분묘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나, 기원후의 시기에 이들은 다호리 초기와 같은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지는 못했다고 보인다. 이는 같은 시기에 김해 양동리나 대성동 고분군이 번성하는 것과는 대조된다. 4세기경의 창원 도계동 18호 목곽묘는 길이 350센티미터, 너비 160센티미터, 잔존 깊이 55센티미터의 토광 안에서 철제 손칼 2점, 투겁창 2점, 미늘쇠 1점, 도끼 2점, 낫 1점, 끌 1점 등의 철기류와 적갈색 양이부소호 2점, 회청색 고배 2점, 원저단경호 1점, 유개대부호 1점 등이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창원지방의 중심지가 아닌 도계동 고분 축조 집단도 어느 정도의 세력은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패통 유적지로는 창원시 외동 성산패총, 가음정동, 남산동 패총, 진해시 웅천 패총, 진해 패총, 용원동 패총 등이 있다.

일본과의 교류
<일본서기> 신공 섭정 46년(366)조에서 백제는 창원의 탁순국을 매개로 해서 왜국과 통교하기를 원했고, 탁순국 '말금한기(末錦旱岐)'는 왜로 통하는 길을 묻는 백제사신에게 자문해주고 왜국사신에게 백제사신의 말을 전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탁순사람 '과고'를 보내 왜국사신의 시종을 백제로 인도해주기도 했으며, 탁순국은 왜국 사신 일행이 귀국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또한 신공기 49년(369)조의 기사에서, 탁순국은 왜군의 집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서기>가 전하는 이런 기사들이 얼마나 진실을 전하고 있는 지는 분명치 않으나, 창원 탁순국은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정치집단이었음은 확실하다. 4세기대 이후의 어느 시기에 창원지역에 탁순국이 자리잡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양직공도> 백제국사 전의 ‘탁국(卓國)’과 <일본서기>의 ‘탁순국(卓淳國)’이 바로 그것이다. 창원 반계동 고분군은 6세기의 것으로서 25호분에서 쇠망치, 쇠집게 등의 단야구가 출토되어 이들이 제철집단임을 알 수 있으며, 23호분에서는 고령 양식의 유개대부 장경호, 단추형 꼭지 뚜껑 단각고배, 개배, 유개대부 파수부발 등이 출토되어, 이들이 대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창원 탁순국의 왕 또는 유력자로 추정되는 '아리사등'은 대가야의 맹주권을 인정하며 후기 가야연맹의 한 소국으로 편입되어 있다가, 522년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 당시 따라온 수행인원 중 창원지방에 배치된 사람들이 돌연 신라 관복으로 갈아입자, 그 수행인원들을 신라로 쫓아보내는 자주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이를 트집삼아 탁순국을 공격하고, 백제군이 함안 안라국 주변의 걸탁성까지 진주해오자, 탁순국은 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왜국의 사신단도 구사모라=기질기리성에 머물면서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자, 아리사등은 백제, 신라에게 사신을 보내 회의를 요청했다. 백제는 군대를 더욱 전진시켜 칠원에 구례모라성을 쌓고 주둔하면서 탁순국을 압박했다. 그러자 탁순국 내부에서는 백제에게 투항하자는 일파와 신라에 투항하자는 일파가 있었는데, 그 왕이 신라에 종속되기를 원했다. 그 멸망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530년대 후반의 어느 시점이었다고 추정된다.

신라는 탁순국을 복속시켜 굴자군으로 삼았으며, 경덕왕이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영현은 칠제현(함안군 칠원면), 합포현(마산시), 웅신현(진해시 성내동)의 셋이다. 이는 멸망시기 탁순국의 영역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보여준다. 혹은 멸망 직전의 탁순국이 신라에게 협조적인 자세를 보여 전쟁없이 투항했기 때문에 신라에 의하여 군현 편제될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탁순국 당시보다 넓은 영역을 신라로부터 배정받은 때문일 수도 있다.
<김태식(홍익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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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 초록불 | 2008/02/24 20:21 | *..역........사..* |

신공황후 46년, [일본서기] 연대로는 246년 봄 3월에 탁순국卓淳國에 사신을 보냈다. 탁순의 왕 말금한기末錦旱岐는 이런 요지의 말을 전했다.

"244년 7월 중순에 백제인 구저, 미주류, 막고莫古 세 사람이 와서 '백제왕이 동방의 귀한 나라 일본에 다녀오라고 했는데 그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바다가 멀고 풍랑이 심하니 큰 배가 있어야 갈 수 있다고 하니 '배를 준비하겠다. 귀한 나라의 사신이 오면 꼭 우리나라에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왜의 사신은 종자와 탁순인을 붙여 백제로 가게 했다. 백제의 초고왕은 매우 기뻐하며 보물을 나눠주고 일본에 조공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위 내용은 [환단고기]와 맞먹을 뻥이라 하겠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왜는 표류한 임나인을 만난 적이 있고, 신라라는 존재도 "신"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백제와 접촉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탁순국을 통해서 백제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위 기사 속에 담긴 유일한 진실이겠다. (말금한기에서 末錦은 일본서기 독음이 makomu이고 寐錦은 mukimu로 우리 발음은 같지만 일본어에서는 발음이 다르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백제의 초고왕은 재위기간이 166년에서 214년이다. [일본서기]와 연대가 맞지 않는다. 저 왕이 근초고왕이라면 재위 기간이 346년에서 375년이 되는데, 연대를 2갑자 내리면 364년의 일이 되기 때문에 연대가 맞는다. 특히 저 기사에 나오는 사람 중 막고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조에 나오는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틀림없다. 따라서 저 일이 일어난 때는 364년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위 접촉의 결과 신공황후 47년, 즉 365년에 백제는 왜에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 막고가 사신으로 갔다. 이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백제 측의 공물이 신라 측의 공물에 비해 형편없어서 이를 따지자, 백제 사신은 이런 말을 한다.

"길을 잃어 사비신라沙比新羅에 이르렀는데 그들이 우리를 3개월간 감금했고 결국 죽이려고 했다. 그들을 저주하자 그것을 두려워해서 죽이지 않고 공물만 바꾼 뒤에 이 일이 알려지면 돌아오는 길에 죽이겠다고 해서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었다."

이에 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이 일을 책망했다고 한다.

위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백제가 왜에 가기 위해서는 신라의 영향권 안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신빙성이 전혀 없으므로 따질 필요가 없다. [일본서기]에는 신라 앞에 이런저런 말이 붙는데, 앞서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복하겠다고 할 때도 고금신라栲衾新羅라는 말을 쓰고 있다. 혹시 신라가 여럿 있었던 것은 아닐까? (栲衾은 takuhusuma라고 읽으며 신라에 붙는 마쿠라고토바(枕詞=특정 단어 앞에 나오는 수식어)라고 한다. 沙比新羅(sahisira)는 草羅(sahira)라고도 적는 삽량주歃良州를 가리킨다는 의견도 있다. - 알려주신 모님께 감사.)

그리고 신공황후 49년 [일본서기] 연대 249년에 신라를 공격한다. 이것이 신공황후의 두번째 신라 공격인 셈이다. (솔직히 "일본을 공격한다"라는 농담만큼 뜬금없다.)

3월 왜군은 탁순에서 백제군과 합류했다. 그러나 군대가 적었다. 그래서 추가 군대가 백제에서 온다. 이 백제군을 이끈 장수가 목라근자木羅斤資다. 훗날 문주왕(재위 475-478)을 웅진으로 도피시킨 목협만치의 아버지다. 엄마야, 249년에 부대를 이끌던 장군의 아들이 475년에도 살아있다고? [일본서기]를 보다보면 이런 좀비들을 좀 만날 수 있다. 다음 회에 다른 사람을 소개하겠다.

목라근자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때는 429년으로, 3갑자를 내려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다음 구절이 문제가 된다.

백제-왜 연합군은 신라를 격파했다. 그 뒤 비자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탁국(口+彔)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쪽의 고해진(古奚津), 남만의 침미다례(忱彌多禮)도 정벌했고, 이 모든 것을 백제에게 주었다. 이 위세에 놀라 비리(比利), 피중(辟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했고 이 또한 백제의 것이 되었다. 백제의 초고왕과 왕자 구수(뒤의 근구수왕)는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칠 것이라 약속했다.

여기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다시 등장한다. 이들의 등장이라면 연대는 2갑자를 내려서 이 일이 369년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답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429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목라근자의 등장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이다. 그것은 이런 이유다. 신라본기에는 431년에 왜의 공격이 있었다고 나온다. 이 공격은 실패했다. 433년에는 백제에서 화친의 사절이 온다. 나는 목라근자가 바로 이 화친의 사절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연히 신라 공격 같은 것은 있지 않았다.

위의 내용만 잘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서기]는 탁순이 일본에 우호적인 나라인 것처럼 썼고, 심지어 탁순에서 정벌군이 출발했다는 식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목라근자가 정벌한 일곱나라 이름에 탁순이 들어가 있다. 탁순은 본래 우호적인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탁순을 정벌하지 않고 탁순에서 신라 정벌군이 떠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백제는 가야와 남방 정벌에 나서면서 신라와는 우호 관계를 맺은 것이다. 목라근자는 이때 우호의 표시로 신라 여인과 결혼하는데, 그 신라 여인의 아들이 바로 목만치(=목협만치=목리만치)다.

이렇게 되면 이 무렵은 비유왕 때가 되겠다. 비유왕 때에 이런 일에 대해서 감을 잡을만한 무슨 기록이 있을까?

비유왕 2년(428)에 왜국의 사신이 왔는데, 따라온 사람이 50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가야 정벌에 어떤 정보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비유왕은 다음해 가을에 중국의 유송에 사신을 파견한다. 중국과의 교류는 전전대왕인 전지왕 때 동진과 교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전대왕 구이신왕 때는 중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없다. 전지왕은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의 관직을 제수받았고, 비유왕도 이 관직을 물려받았다. 이런 활발한 대외 활동은 백제의 남방 정벌에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무렵 왜도 활발한 국제 외교를 펼치는 중이었다. [송서]에는 왜의 사신이 425년 와서 사지절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요구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유송은 안동장군왜국왕의 지위만 내렸다. 안동장군은 진동장군보다 낮은 지위다. 유송은 백제의 지위를 높여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451년에 유송은 왜의 줄기찬 노력에 굴복해서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의 직을 내려주었다. 백제는 빠지고 대신 가라가 들어갔다. 왜 처음에는 가라가 없었을까? 왜는 오국제군사가 되는 것보다는 육국제군사를 유지하기 바랐던 것 같다. 임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라를 다시 넣은 이유는 그것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백제가 공략한 7국은 임나의 땅이었다. 흠명천황 23년조(562년)를 보면 알 수 있다.

춘정월, 신라는 임나의 관가를 쳐 없앴다. (한 책에 말하기를 21년에 임나가 망했다고 한다. 통틀어 임나라 하고, 세분해서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 다라국多羅國,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乞湌國, 임례국稔禮國 합해서 10국이다.

붉게 표시한 세 나라가 신공황후기에도 나오는 나라다. 신공황후기에 나오는 7국이 가야 지방이라는 증거다. 562년은 진흥왕 23년이다. 이 해에 이사부와 사다함이 대가야를 정벌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기로 한다.

364년 백제는 왜와 처음 접촉했다. 이 상황에서 바로 연합군을 결성한다든가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또한 이 시기에 백제는 고구려와 갈등관계에 놓여 있었다. 369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쳐들어왔다. 가야 정벌은 3월, 고구려의 침입은 9월이다. 백제는 평양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거두고 있다. 정말 이 해에 북방과 남방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했다면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근초고왕과 일본 사신과의 동맹의 맹세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맹세에 후광을 더하기 위해 비유왕 대의 가야 정벌을 근초고왕 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닐까?

앞서 나는 이 가야 정벌을 429년의 일로 본다고 했다. 그것은 400년에 있었던 고구려군의 원정과 관련이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따르면 고구려는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 보기 5만의 대군을 파견한다. 이것이 바로 400년이다. 이때 고구려는 신라성에서 남거성에 이르기까지 가득찬 왜인을 몰아내고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함락시킨다. 이들 성을 지키는 일은 신라인들이 맡았다. 고구려 군의 일부는 신라에 남아 신라의 국정을 좌우하다가 눌지왕의 즉위 후 신라에서 철군한다. 눌지는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신라 독자 노선을 걷는다. 이 이야기는 이미 [신라, 희망의 5세기]에서 한 바 있다.

소지 마립간 3년(481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백제와 가야의 병력이 출동한다. 가야가 언제부터 백제와 같이 움직인 것일까? 각자 독자적으로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나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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