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부여, 고구려 고고학〉-부여문화의 원류와 서단산문화-
작성자 청초쪼꼬 2007.06.08. 17:19 http://blog.naver.com/tomorrowx
부여의 기원과 그 문제점
- 목 차 -
Ⅰ. 머리말
Ⅱ. 부여의 기원
1. 부여에 주목해야하는 이유
2. 부여의 세력권과 실체
3. 서단산문화와 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
Ⅲ . 부여의 문화와 문제점
1. 고고학으로 알아보는 부여의 문화
2. 부여사 연구의 문제점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집단에 있어 정체성(identity) 문제의 핵심은 동아리 내부의 동질성의 확인과 다른 집단과의 차별성을 인식함에 있다. 곧 그것은 우리의 남과 다름을 인식함과 다름 아니다.
그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움직임 속에서 고고학적 연구는 많은 자료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고고학적 자료도 예전에는 고고학 문화를 일정 집단의 동질적이고 규범적인 틀로 보는 대신 오늘날에는 문화적 진화와 사회적 변화에서 기능적으로 작용하는 체계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에 족속과 집단의식에 대한 고고학 연구에 보다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접근하게 된 것은 민족성, 혹은 동족성은 정치적, 경제적 관계와 관련된 사회적 조직화의 한 양상으로서 특히 집단 상호간의 경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후과정고고학이 출현하고 이후부터이다. 따라서 민족성 혹은 동족성이란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는 주관적인 정체의식으로서 실질적인 역사적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된다.1)
이처럼 종속성이 가지고 있는 복합성과 유동성이 인식되면서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 족속추정을 시도하는 것이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특히 전 세계 각지에서 식민제국의 붕괴 이후 성립된 제 3세계 민족국가들이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 자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경쟁적으로 대두되면서 양상은 보다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선의적이거나 악의적이거나 고고학 자료의 정치적 이용이 결과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은 족속 추정에 있어서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역사학이나 인류학 또는 고고학이 발달하지 못하여 우리나라의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시기에 우리민족의 기원을 이미 사람이 이주해 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중앙아시아나 몽골, 시베리아 등지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2) 게다가 중국학계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으로 최근 몇 년간 중국동북지방, 만주지역에 있던 문헌상의 옛 민족들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하지만 재미와 흥미를 위해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그 속에서 부여는 주몽이 태어난 곳이기는 하나 적대관계 속에서 오히려 중국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실상 우리에게는 민족이라는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에 우선 우리가 부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부여문화의 기원에 대해 논하기 전에, 부여 문화를 향유하던 세력범위와 고고학 측면에서 부여의 문화에 대해 짧게나마 알아보겠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부여 기원 연구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나름대로 제시하고자 한다.
Ⅱ. 부여의 기원과 정의
1. 부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3)
그동안 학계에서도 부여사는 발해사와 더불어 한국사의 주류에서 벗어난 변경의 역사로 취급되고 있다. 주로 고구려의 원류로서, 그리고 고구려의 정복대상으로서 부차적인 관심만 가져왔기에 부여사 자체에 대한 연구는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에 넣으려는 근래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예맥족의 역사인 부여를 너무나 당연하게 그들의 역사로 다루고 있는 사실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이 부여사의 현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여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우리학계에서는 부여4)가 우리의 민족의 주요 종족인 ‘예맥’족이 세운 국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구려의 건국세력이 바로 부여에서 분파해 나간 점을 들 수 있다.
부여의 터전은 지금의 만주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는데, 거기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그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집단이 나왔다. (계루부 왕실) 주몽집단은 압록강 일대에 진출하여 졸본부여, 곧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5) 그러자 압록강 유역에서 먼저 살던 주민들 중 일부 (비류, 온조집단)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한강유역에서 백제를 세웠다. 이들도 부여족이었기에 백제는 그 왕실의 성을 부여씨라고 했고, 동명사당을 두어 부여를 세운 동명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한 서기 6세기 중반에 이르러, 나라의 이름을 남부여6)라고 고치기도 했다. 이처럼 부여는 고구려 ․ 백제 왕실의 뿌리 구실을 했다. 최근 경상남도의 가야가 있던 지역에서 청동솥을 비롯해 북방 유목민족이나 부여 계통의 유물들이 나오는데, 부여 사람들의 움직임이 한반도 남부 지방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견해7)도 있다.
게다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시조 대조영도 우리 발해는 “ 부여, 옥저, 변한, 조선의 땅과 바다 북쪽 여러나라의 땅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하여 부여를 자신들의 오래 된 조상의 나라로 보았다. 중국 송나라 때의 역사책 《무경총요》에서도 발해가 “부여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으로 본래 예맥의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와 백제처럼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았다.
이렇듯 부여의 세력이 커지면서 그 곳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 집단이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발해를 세웠다는 점에서 부여의 역사는 우리 고대 국가의 출발점에서 중요한 디딤돌이었고, 부여족은 우리 겨레를 형성한 주요 종족의 하나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부여는 중앙집권화 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 직전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1) 박양진, 1998, 「族屬추정과 夫餘 및 鮮卑 고고학자료의 비교분석」
2) 윤내현, 『우리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지식산업사
3) 송호정, 2005, 『부여 ․ 옥저 ․ 동예사: 만주지역 우리역사의 원료』, 「컴퓨터파일」,부여편
4) 근대 역사학의 단초를 열었던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기존의 기자-마한-신라로 이어지는 한족(韓族)중심의 정통론을 부정하고, 부여주족론(夫餘主族論)을 제기하였다. 신채호는 우리민족이 하나의 종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종족이 연합하여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중에서 가장 주동력이 되는 한 종족을 주족(主族)으로 간주하고, 그렇지 못한 종족을 객족(客族)으로 취급하여 주족을 중심으로 민족사를 서술해야 한다고 보았다. 신채호는 부여족이 주족, 지나족(支那族)․ 말갈족․ 여진족․ 선비족․ 토족(土族: 韓族과 濊貊등)․몽고족․ 일본족을 객족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사천년 동국역사는 부여족 성쇠소장(盛衰消長)의 역사.”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민족의 역사, 국사는 곧 부여족의 역사라는 것이다. 신채호가 말하는 부여중심의 역사는 고조선사에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다.
- 송호정, 2005, 『부여 ․ 옥저 ․ 동예사: 만주지역 우리역사의 원료』, 「컴퓨터파일」,부여편
5) 묘제상으로 볼때 부여와 고구려가 크게 달라 양자간의 관계를 의심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삼국지』고구려전에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 등 여러 가지 사항이 부여와 같은 점이 많다고 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두나라의 시조 및 건국신화가 같다는 것은 필경 양자가 역사적 기원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기동, 「한국민족사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 연구 37호(2005.3)
6) 472년 蓋鹵王이 고구려의 남침 위협에 직면하여 고구려를 견제할 목적으로 北魏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신의 나라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선세에는 고구려가 舊款을 돈독하게 존중했습니다.“고 한 것을 보면 제의 부여씨 왕실이 고구려와 동족, 동원으로 믿었던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聖王은 587년 왕도를 泗沘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라고 개칭했다. 이는 지배층의 종족의식에 호소하면서 加一層의 단결과 분발을 촉구한 조치로 이해된다.
7) 1990년대 초 한반도 김해지방의 3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는 가야고분에서 북방민족의 특유의 청동솥인 오르도스형 이 출토되어, 이를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길림성 북부 부여족의 이주에 의한 소산으로 적극 검토해 볼만하다고 申敬澈교수가 제기했다. 285년 옥저로 망명했던 부여족이 항해술을 이용, 동해안 항로를 따라 김해지방에 내려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 배경으로 가야의 철이 동예에도 익히 알려진 바 있어 이를 구입하기 위해 김해를 내왕했던 점을 들고 있다. 이것은 기마민족의 일본열도 정복설을 크게 뒷받침하는 측면이 강하다. - 이기동, 위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