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부여의 기원과 문제점
작성자 청초쪼꼬 2007.06.08. 17:19 http://blog.naver.com/tomorrowx
2. 부여의 세력권과 실체
(1)부여의 중심지와 세력권
부여의 문화의 기원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부여의 세력범위 및 위치설정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중국 및 우리학계는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제 문헌사료 등을 참작, 부여의 초기 중심지를 길림시 일대, 더 구체적으로는 초기 부여의 왕성을 길림시 동단산(東團山)남성자(南城子)로, 그리고 기원후 4세기 이후의 부여 중심지역을 농안지방으로 파악하고 있다.
부여의 초기 중심지를 길림으로 비정한다는 전제 아래 기원후 3세기경까지의 부여의 세력권이 ‘약수’곧 제 1송화강(동류 송화강)을 그 북한(北限)으로 동으로는 장광재령, 서로는 이통하 유역, 그리고는 남으로는 휘발하 유역을 포섭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또 혹자는 이를 좀 더 구체화시켜 기원후 1~3세기 부여국은 대략 북으로는 눈강과 송화강 일대까지 포괄하면서, 서쪽으로 조올하(洮兀河)하류의 건안(乾安) ․ 장령(長岭) ․ 쌍요(雙遼)등지를 경계로 하며,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접하고, 동으로 위호령(威虎嶺)을 경계로 목단강(牧丹江)유역에 이르고, 남으로는 길림 합달령(哈達嶺)을 경계로 휘발하 이북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한다.
(2)부여와 북부여, 동부여
부여의 위치설정에 있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및 중국측 여러 사료와 「광개토왕릉비문」, 「모두루묘지」등에는 ‘부여-동부여-북부여-졸본부여(卒本)’라 지칭되는 다양한 부여의 기록이다. 이것은 마치 네 개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 사실은 부여사 인식체계를 짜는데 적지 않은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핵심은 북부여, 동부여의 실체구명 여하에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간단히 세 가지 유형화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부여와 북부여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동부여는 따로 떼어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들은 북부여와 부여를 동일한 것으로 보면서 부여가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북부여로 불렸다고 판단하고 있다.
둘째, 부여, 북부여를 별개의 실체로 보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동부여를 포함하여 세 개의 실체로 파악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동부여를 부여나 북부여와 일치시키는 의견도 있다.
셋째, 세 개의 부여를 모두 동일한 실체로 파악하는 방법이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현재 학계에서 통설로 보고 있는 첫 번째 유형을 통해 부여와 북부여, 동부여 실체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다.
이 견해는 본래 주몽의 고향은 송화강 유역의 북부여로서 기원후 5세기 말 고구려에 합병되었고, 동부여란 3세기 말 선비족 모용시의 공격을 받은 북부여의 일족이 세운 나라인바, 광개토왕대에 고구려에 통합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북부여’란 탁리국(槖離國) 출신의 동명집단이 중심이 되어 길림지방을 그 중핵지로 기원전 3~2세기 말경 ‘국가’를 형성, 기원후 4세기 중반경 농안지방으로 그 중심지를 이동, 이후 494년까지 존속한 바 있는 ‘부여’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 ‘동부여1)’란 고구려 건국 당초부터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기원 후 285년 선비 모용외의 제 1차 강습으로 부여(북부여)의 일부 핵심 지배집단이 옥저지방으로 망명하여 건국한 나라로서, 41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사행동에 의하여 공멸되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부여의 위치를 설정 해보면 다음 그림과 같다.
3.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와 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2)
부여의 기원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들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된다. 청동기문화인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와 부여의 건국신화에 바탕을 둔 탁리국의 문화로 추정하는 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이다.
(1)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길림시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서단산문화3)이다. 주거지는 반지하식이고, 주로 석관묘를 조성하였으며 교상횡이호(橋狀橫耳壺)와 길쭉한 방망이 모양의 석부 및 쌍공의 반월형석도를 특징으로 하는 청동기 문화이다. 대체로 동쪽으로 장광재령, 서쪽으로 이통하와 동요하 상류, 북쪽으로 납림하, 남쪽으로 휘발하를 경계로 하여 길림성 중부에 분포하고 있었으니, 종래의 부여 범위와 비슷하다. 이 문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주목을 받아 왔고, 발굴조사와 연구가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다. 종래는 이 문화의 주인공이 숙신족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지금은 부여 건국의 기반이 된 예족의 산물로 보는 데에 별로 이견이 없다.
오늘날, 우리학계는 동북아시아 주민이동의 큰 줄기인 고아시아족(Palio-Asiatics)과 알타이어족의 움직임에 주목하면서, 우리 청동기문화의 향유자인 예맥족이 신석기문화의 담당 주민이었던 고아시아족을 정복·흡수·동화·통합하는 과정이 한민족의 형성과정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형성과 기원, 그리고 고조선·부여·고구려 주민의 정체성을 논함에 있어 그 출발점이 되는 것은 예맥이다. 우리 민족의 기원·형성 문제 해명을 위한 노력은 Altai어족에서 갈라져 나온 하나의 독립된 민족단위인 예맥의 실체 구명 문제로 집약된다. 또 그것은 고조선과 부여 및· 고구려의 주민 구성과 문화 계통을 밝히는 문제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4)
(2)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
두번째는 서단산문화 북쪽에 분포하고 있는 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이다. 1974년에 조원현 백금보유적을 발굴한 뒤에 처음 백금보문화란 명칭을 붙였고, 같은 해에 대안 한서유적을 발굴하면서 두 개 층위를 확인하여 하층은 청동기시대인 백금보문화, 상층은 초기철기시대인 한서2기문화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말을 전후하여 고리국(탁리국)에서 발생한 내분으로 동명으로 표기되는 집단이 남쪽 예족의 선주지역에 와서 부여국을 건립하였다. 이 내용은 왕충이 쓴 『논형』에 잘 보인다. 이것을 흔히 우리는 동명성왕 설화5)라고 한다. 당시 부여인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옛적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설화에 따르면 부여의 시조 동명은 본래 북이(北夷)국왕의 시녀가 햇빛을 몸 안에 받아들여 낳은 자이다. 성장하면서 신이(神異)한 바가 많으므로 왕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죽이려 하자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를 건너 부여 땅에 와서 왕이 되었다. 이런 비슷한 신화를 가진 나라가 바로 고구려이다. 동명신화는 바로 부여족 계통의 여러 집단이 공유하였던 건국신화로 고구려의 주몽신화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를 그대로 따른다면 탁리국은 부여에서 북쪽으로 큰 강을 건넌 곳에 위치하게 되어 송화강, 눈강 건너에 분포하고 있는 이들 문화와 연결시킬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백금보 문화에 뒤이어 나타난 한서2기문화를 대체로 문헌의 탁리국 소산물로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탁리국 주민들이 제2송화강 중류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예지(穢地)‘로 남하하여 서단산문화를 누리던 부여 선주민과 융합하여 부족국가 부여를 건립하였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려할 점이 있다. 첫째로 부여의 동명설화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고 당시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방의 주민들이 공유하던 설화로서 역사적 실체는 거의 담지 않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까지 백금보문화-한서2기문화에 속하는 유적들이 여기저기 산견되어 발견됨으로써 섣불리 부여와 연계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상호 이웃해 있는 문화 사이에 공통적인 요소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니, 만약에 동명전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그것은 교류의 결과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단순히 몇 가지 요소로서 전설을 증명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두 번째로 탁리국의 문화로 비정되는 고고학문화가 탁리국으로 비정할 정도로 상당한 정치, 사회적 발전을 이룩한 증거가 있는지, 길림성 중부 지역의 서단산문화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우월하거나 대등한 수준인지, 길림성 중부 지역의 토착사회가 외부 집단의 이주와 정착을 쉽게 허용할만한 이유가 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1) 한편 ‘동부여’의 입지 문제와 관련하여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혼춘(琿春)을 중심지역으로 하는 두만강 유역이라고 보는 견해와 단결문화(團結文化-크로우노브카문화)를 남긴 북옥저 지역에 주목하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 혼춘을 중심으로 하는 두만강 유역 ‘북옥저’지방은 고구려가 국초부터 그 세력을 진출시킨 지역이었던 점에 주목하여 이 동부여의 입지를 혼춘이 아닌 화룡(和龍)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주장되기도 한다.
2) 예맥문화권안에 서단산문화와 백금보, 한서, 망해둔 문화가 속하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보면 모두 예족계통의 문화, 예족을 기원으로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3) 하지만 이 청동기 문화연대는 B.C. 8세기경까지로 소급되고 있지만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청동제품은 전반적으로 빈약하고 또한 이를 모델로 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동검을 내제화(內製化)하지 못하는 등 서쪽의 요동(遼東)지방 청동기 문화에 비해 현저한 열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하여 부여의 국가형성은 서단산문화가 종말을 고할 무렵인 B.C. 3세기 말경이후로 보고 있다. -이기동, 「한국민족사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 연구 37호(2005.3)
4) 이 문제와 관련, 학계는 '예·맥·예맥'의 상호관계, 곧 예와 맥이 동일한 종족으로 파악될 수 있는가 여하를 밝힘을 논의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먼저 예맥동종설의 입장에서, '예맥'이라는 명칭은 예족과 맥족을 합친 범칭이 아니라, '맥'족인 고구려를 지칭하며, 한대 이후 '예'와 '(예)맥'은 동일 계통 내에서 각각 구분되는 실체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예맥동종설의 관점을 따르더라도, '예맥'이란 연칭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로서 선진시대부터 '예'와 '맥'으로 표기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이 '예맥'은 '예'와 '맥'이라는 각기 별개의 단칭을 가진 지역적으로 분별되는 동일 종족이었던 것이다. 곧 '맥족'은 요동과 한반도 일부에 분포하며, '예족'의 주지는 길림·송화강 및 눈강 유역 그리고 한반도 일부로 비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이 예와 맥의 주지를 일정 지역에 고정시켜 이해하는 것보다 그들이 거주하던 넓은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제사상의 시간적 선후 관련성을 유념하여 고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진 시대 이래 예와 맥은 고조선·부여·고구려 등 여러 국가의 계기적인 성립·발전과 더불어 부단한 변화상을 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경우 맥의 주지를 '예'라 하지 않고, 예의 그것을 일부 '예맥'이라 지칭하기는 했어도 '맥'이라 한 적이 없었음은 눈여겨 볼 점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이들 예와 맥이 남쪽의 '한족'과 더불어 한민족 구성의 근간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와는 다소 다른 시점도 없지 않다. 곧 이런 입장은 종래의 예맥 문제 연구 성과를 주민이동론과 분포설로 분별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이 견해는 고구려를 세운 족속으로 거론되는 선진 문헌 상 '맥족'이란 고대 황하 유역 주민들이 그 북방의 족속들을 지칭하던 일종의 범칭으로서, 특정한 족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이 견해는 분포설이 사실이라 할 경우라도, 북중국 방면의 맥족은 한국인의 기원이나 고구려사와의 관계에서 볼 때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본다. 또 이런 입장은 이동설 역시 동이족 혹은 맥족의 이동 과정이나 그 결과물이 考古學 상으로 논증되어야만 그 유의미성이 확인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박경철, 2006, 「예맥․ 부여와 고구려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
5)“ 옛날 북방에 탁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그녀는)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마구간에 옮겨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천제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은 달아나서 남쪽의 엄호수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동명이 물을 건너간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고로 북이(北夷)지역에 부여국이 있게 되었다.”-《논형》왕험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