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의 출생과 가게 [출처 : 위키 백과)


출생과 가계 1851년 2월 23일에 조선 충청도 회덕군[5] 에서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안동 김씨 문충공 김상용의 9대손인 김병태(金炳台)와 부인 은진 송씨 (* 대유학자 송시열 있음)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외삼촌 송인식(宋寅植)의 집으로, 살결이 '백옥같이 곱고 희다'고 '옥균'이라 지었다고 한다.

김옥균 선생 유허 충청남도 기념물 제 13 - 1호 (위치 :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


6살 때 김옥균은 5촌 당숙이자 당대 정계 거물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가 됐다. 당시 유력 집안에 적자가 없는 경우 일가 친척 중 양자를 들여 정치적 지위와 제사를 잇게 하는 경우는 흔했어도 맏이를 양자로 보내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그는 친아버지인 김병태의 결정으로 세도가 집안에 입양가게 됐다.


    그러면 사영대감 김병기 (金炳冀, 1818년~1875년) 생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생부는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의 증손 김영근인데 9촌숙이 되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金左根)의 양자가 되었다. 순원왕후의 조카뻘이 된다. 184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정3품 당하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 1848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 1849년 철종 즉위 후, 다시 승진하여 성균대사성이 된 뒤에 종2품으로 거듭 승진, 예조참판(禮曹參判), 이조참판(吏曹參判] ) 등을 지냈다.
그 뒤 거듭 승진하여 1853년 총융사(摠戎使), 훈련대장,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공조판서(工曹判書) 등 각조의 판서직을 두루 역임하고, 1862년 판돈령부사로 전임되었다. 그 뒤 종일품 의정부좌찬성(左贊成)으로 있을 때, 1863년 12월 철종이 급서하자 조대비와 후계문제를 놓고 갈등하였으며, 고종이 1864년 흥선대원군이 섭정으로 집권하자 광주부유수로 좌천되었다. 이후 외직을 전전하다가,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좌찬성(左讚))에 이르렀다.
안동김씨 세도가 한창일 때 몰락왕족으로 파락호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과도 교류하며 어려움에 처했던 흥선대원군을 재정적으로 도운 관계로, 뒷날 안동김씨 일족이 대부분 숙청되었을 때에도 살아남아 관직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김동인과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에서는 흥선군의 주요 정적이자, 흥선군을 면박하는 역할로 묘사된다. 문집에 《사영집》이 있다.]

  김옥균(金玉均)은 어려서부터 문장·시·글씨·그림·음악 등에 두루 다재다능했다. 입양 후엔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 해 유명한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과거 준비만 전념했다. 11살 때 양부 김병기가 외직에 나갈 순번이 돼 강릉 부사로 갔다. 옥균도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해 송담 서원에서 배웠다.[8] 강릉은 서인의 원조 율곡 이이의 고향으로, 율곡의 사당을 모신 그곳에서 노론의 학통을 이었다. 5년 후인 16세 때 다시 중앙으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상경했다.
1870년 당시 홍문관 제학으로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박규수의 문하가 됐다.

박규수는 누구일까?
[박규수(朴珪壽, 1807년 10월 27일 ~ 1877년 2월 9일)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규학(珪鶴), 자는 환경(桓卿→瓛卿) 또는 정경(鼎卿), 호는 환재(桓齋→瓛齋), 헌재(獻齋), 환재거사(瓛齋居士) 등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가 깊었고, 제네럴 셔먼 호를 격퇴하고 경복궁 재건의 총책임을 맡는 등 흥선대원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의 학문 및 사상의 계승자로서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후 양무 운동처럼 서양 기술의 선택적 도입과 국제 통상을 주장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 등 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으며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는 위정척사파의 명분론을 반대하고, 막후에서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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