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후(韓侯)와 고조선(古朝鮮)

 

증산도, 참 진리의 세계 http://blog.naver.com/gnbone/220270570656 참조한 글입니다.

 시경(詩經) ‘한혁(韓奕)’편을 깊이 생각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한혁(韓奕)은 한후(韓侯)하는 인물을 칭송하여 지은 시인데 우리의 상고사(上古史)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겨례와 관련된 부분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임금께서 한후(韓侯)에게 퇴()와 맥()을 맡기셨다. 한후가 엄()과 북쪽 나라들을 모두 맡아 이로서 그 수장()이 되었다. ”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한후(韓侯)가 퇴(; ‘읽기 가능)와 맥()을 다스리는 통치자임을 알 수 있다. 여기 퇴()은 기록에 잘 보이지 않아 알기는 어렵지만 맥()과 함께 예()가 동북방을 대표하는 족으로서 예맥(穢貊)이라는 하나로 통칭한다.   

신용하 교수님은 고대 중국인들은 ’,’’,’’,’등으로 음차 표기했다가 변음되어 (Ye)’ 발음하게 되었다.‘고 하였고   고() 윤내현 교수님은 ()가 예()로 소리가 변화되기 쉬운 점에서 퇴()는 예()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어쨌든 퇴()가 예()가 아니더라도 예맥(穢貊)에 속한다고 본다.

 예맥(穢貊)은 동이(東夷)이므로 이 들을 다스리는 한후는 고조선족(古朝鮮族)임을 알 수 있다. 한후는 엄()과 북쪽 나라들도 다스렸다고 하였는데 이 지역은 사기(史記) 조세가(趙世家) 조양자(趙襄子)의 산동 일대와 그 북쪽이다. 한후의 통치 영역은 중국의 북쪽에서 동쪽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수많은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백만(百蠻) 즉 수많은 오랑캐라고 표현했다.

 시경에서 한후는 주나라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제후인 것처럼 노래하고 있지만 이것 사실일 수 가 없다. 한후는 수많은 거수국을 거느린 대국이었지만 후세에 중원이 천자의 나라로 행세하며 춘추필법(春秋筆法) 즉 대의명분을 밝히는 논법으로 왜곡하여 기록한 것일 뿐이다.



 서주(西周) 여왕(厲王) (BC 855 ~ BC841), 100 여개가 넘는 도시국가들이 나타날 때라 연()나라는 소국으로 태행산맥(太行山脈) 서쪽, 지금의 태원(太原) 부근에 도읍을 하고 있었다

그 동쪽의 산동반도에는 동이(東夷)의 국가들이, 지금의 북경 일대는 변한(弁韓; 번조선(番朝鮮))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변한의 도읍은 안덕향(安德鄕, 현재 하북성 당산시(唐山市))이었다. 이러 시대를 배경으로 한후 (변한의 단군)와 주나라 왕 사이에 인척관계가 맺어지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한후가 장가를 들었는데 주여왕(周厲王)의 생질입니다. 저 큰 한성은 연나라 군사가 완성하였다.”

韓侯取妻 汾王之甥. 溥彼韓城 燕師所完.

 한후는 연나라와 인척관계를 맺었는데 주()나라 분왕(汾王)의 조카를 아내로 맞아 연나라의 사위가 되었으며 연의 병사들이 한후의 큰 성을 완성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분왕(汾王)()나라 여왕厲王)을 말하는데 성질이 사납고 잔악하며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 막되어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분수(汾水)가 흐르는 한후의 땅으로 도망하여 얻은 이름이다.

 

한후에 관하여는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두 번의 기록이 보인다.

 ()나라 성왕(成王) 12(재위: 기원전 1,100년경)

왕병(王兵)과 연나라 병사들이 한성(韓城)을 지었다. 왕이 한후에게 (작위를) 명하였다.

()나라 선왕(宣王) 4(기원전 824)

왕이 명하여 궤보(蹶父)를 한()에 보냈다. 한후가 내조하였다.

 

성왕의 병사와 연의 병사들이 한후의 성을 지었다고 한혁에서과 같은 내용을 말하였다.

궤보(蹶父)를 한()에 보내고 또 한후가 주나라에 온 것은 한혁의 내용처럼 한후가 궤보의 딸과 혼인하였기 때문에 서로 오고 간 것이다.

 위 두 기록에 보이는 한후는 시간적으로 270년의 차이가 있으므로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 확실한데도 한혁에는 두명의 한후가 각각 있었던 일을 특정한 한명의 한후에 관한 일인 것처럼 기록하였다.

 사학자들 가운데 한후(韓侯)를 주()나라의 제후국인 한나라 제후로 보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일 수 가 없다. 한나라가 제후국이 된 것은 전국시대가 시작된 서기전 403년으로 진()나라가 한(),(),()로 나뉜 때부터 이다. 그러나 한후는 그 보다 이런 4 ~6백년전의 인물이다.

또한 한나라는 공국(公國)인 진()나라가 셋으로 나누어진 작은 나라로 후국(侯國), 백국(伯國) 아래 자국(子國)이었다.   만약 한혁(韓奕)의 한후(韓侯)가 제후국 한()의 통치자였다면 한후(韓侯)’가 아닌 한자(韓子)’로 불러야 마땅하다.   실제로 주()의 제후국이었던 한()의 통치자들은 한무자(韓武子), 한선자(韓宣子), 한경자(韓 子) 등으로 불렸다.

끝으로 한후(韓侯)가 누구인지 고찰해 보면 한혁(韓奕), 죽서기년(竹書紀年)에 한후의 나라를 한()이라고 하였는데 한후는 삼한(三韓) 가운데 중국의 북쪽 및 동북쪽을 다스린 변한(弁韓), 변한의 단군(檀君, Dangu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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