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지도 [七支刀]

  • 글쓴이: 임영주 조회수 : 13 09.01.04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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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百濟) 왕이 왜왕(倭王) 지(旨)에게 하사한 철제(鐵製) 칼로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신궁에 있으며 길이가 74.9cm인 철로 만들어진 칼이다.

    길이 74.9cm의 칼로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되어 있으며 1953년에 일본국보로 지정되었다. 곧은 칼의 몸 좌우로 가지 모양의 칼이 각각 3개씩 나와 있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으므로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국에는 이에 관한 문헌기록이나 실물이 없으나,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記)에 "백제가 일본에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이 재위할 무렵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뛰어난 백제의 제철 기술을 보여준다. 단철(鍛鐵)로 만들어졌으며, 칼몸[刀身]의 앞뒷면에는 61자(字)가 금상감(金象嵌)되어 있다. 오랫동안 비장되어오다가 최초로 공개된 것은 1874년 이소노카미신궁의 대궁사(大宮司) 간마사도모[菅政友]가 명문을 판독하여 발표하면서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학자들의 노력으로 대체적인 내용과 미지의 글자가 추가 판독되었으나, 그 명문의 마멸 부분 및 그 해석에서 이견(異見)을 보이고 있다. 최근의 명문해석에 따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앞면)태□(泰□) 4년 □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백병(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후왕(旨를 가리킴)에게 줄 만하다. (뒷면)선세(先世) 이래 아무도 이런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자왕(百慈王)은 세세로 기생성음(奇生聖音:길상어)하므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든다. 후세에 길이 전할 것이다(1993.6월 蘇鎭轍의 해석)."

    남북한과 일본 학계에서는 칠지도에 적힌 연호와 전래경위에 관련하여 서로 대립된 주장을 펼쳐왔으며 4가지 이설들이 존재한다. 첫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내려준 것이라는 설, 둘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이라는 설, 셋째, 동진의 왕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전해주었다는 설, 넷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대등한 관계에서 전해주었다는 설 등이 있다. 하지만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에서 보듯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백제왕이 중국의 연호나 사용하는 제후와 같은 존재였다면 왜왕을 '후왕(侯王)'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이름이 지(旨)인 왜왕은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찬(讚)·진(珍)·제(濟)·흥(興)·무(武)의 '왜오왕(倭五王)'과 같은 신분의 왜의 지배층으로서 백제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는 귀족으로 보았다. 이렇게 해석할 때 부월(斧鉞) 및 도검(刀劍)의 하사(下賜)가 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신표(信標)라는 성격과도 부합하며, 하사 동기도 왜왕에 대한 일본열도 내에서의 대표권을 승인하는, 종주·신속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1935∼1936년에 부여 군수리 사지(軍守里寺址)에서 칠지도의 일부로 여겨지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 네이브 백과사전

  • ◎石上神宮 七支刀

    한일고대사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天理市 석상신궁(石上神宮; 근초고대왕 화호)에 있는 한 자루의 칼이다. 이 칼의 이름은 칠지도(七支刀)이고. 그 형상은 오랜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상징한다.칠지도의 길이는 75cm 이며 도신(刀神)의 양쪽에는 3개의 사슴뿔과 같은 가지가 달려있다. 중요한 것은 그 도신 의 양면에 61자의명문(銘文)이 금으로 상감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명문을 처음으로 읽은 사람은 1873년부터 1877년까지 석상신궁의 대궁사(大宮司) 이었던 관정우(菅政友)로 도신 의 녹을 벗겨낸 사람이다. 그런데 국내외 학계의 일부에서는 그 당시 관정우가 일본측에 불리한 명문의 일부 글자를 삭제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사정 때문에 칠지도의 명문해석은 한일고대사의 진위를 가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칠지도 에 대한 기록을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 찾아보면 『신공(神功) 52년 백제의 구저(久 )가 칠지도 와 칠자경(七子鏡)을 비롯하여 각종의 귀한 보물(重 )을 가져왔다』하였고 또한 응신기「 應神記」에도『백제국주(百濟國主) 조고왕(照古王; 근초고대왕)이 횡도(橫刀) 및 대경(大鏡)을 보냈다』하여 백제 근초고왕 때 이 칠지도 가 왜에 전해진 것으로 되어있다. 1천6백년 동안 석상신궁에서 신물(神物)로 보존되어온 칠지도 가 만들어진 4세기 후반 백제의 국력을 살펴보면 지나 대륙(중국) 쪽으로는 요서부터 양자강을 거쳐 유성[오늘의 광서(廣西) 자치구 유주(柳州)의 유성(柳城)] 까지 장악하고 있었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왜열도는 백제왕족을 비롯한 백제인 들이 대거 쇄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에서 만든 칠지도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泰和四年五月十一日丙牛正陽. 造百練鐵七支刀. □酸百兵. 宜供供侯王.□□□□作.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 傳示□世』

    이 명문에서 「태화4년(泰和四年)」의 태화는 지나(중국)의 동진 연호(東晉年 )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로 돼있지만 이때 대륙까지 석권하고 있던 백제가 하필 동진의 연호를 빌려 썼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태화」4년 (369)은 근초고왕 24년으로 이 무렵은 백제가 사방을 크게 아우르던 시기인 것이다. 다음 「□벽백병(□酸百兵)」에서 □부분에는 희미하게 글씨가 보이는데. 「출(出)」또는「생(生)」과 닮은 글자로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맥으로 보아「개(豈)」로 읽음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벽(酸)」도 자전에서 보면「피(避)」와 함께 통용할 수 있는 글자이므로 이 명문을 개피백병(豈避百兵)으로 읽으면 「백병을 어찌 피하겠느냐」는 뜻이 된다. 이는 곧 백제의 군사적 위력을 크게 과시하는 것이다. 이어 「의공공후왕(宜供供 侯王)」에서 후왕(侯王) 은 백제에서 왜로 보낸 왕을 말하는 것이며 공공(供供)의 「공(供)」을 자전에서 찾으면 「급(給)」의 뜻과 함께 「봉(奉)」(받들음) 의 뜻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공공(供供)」은 말 그대로 「받들고 받들라」는 뜻이다.

    그 다음 「□□□□작 (□□□□作.)」은 어떤 글자가 빠졌는지를 짐작할 수가 없지만 「백제□세□(百濟□世□)는 「백제왕세자(百濟王世子)로 읽는데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기생성음(奇生聖音)」은「신령스럽게 태어난 샌님」이라는 뜻인데, 여기서의「샌님」은 지금도 쓰이지만 고대국가에서는 더 올린 경칭으로 사용됐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을 검토해서 다시 칠지도의 명문을 풀어 읽으면 다음과 같다.

    「태화사년 오월 십일일 병오정양. 조백연철칠지도.泰和四年 五月 十一日 丙午正陽. 造百練鐵七支刀. 개피백병. 의공공후왕. □□□□작. 豈避百兵. 宜供供候王. □□□□作. 선세이래미유차도. 백제왕세자기생성음.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고위왜왕지조. 전시후세. 故僞倭王旨造. 傳示後世.」 『「태화사년 오월 십일일 병오정양」에 백번(百番)이나 쇠붙이를 단야(鍛冶)하여 이 칠지도를 만들었다. 어찌 「백병」을 피하겠느냐. 마땅히 「후왕」을 받들고 받들라. 선사 이래로 이와 같은 칼은 아직 없었다. 백제왕세자는 신령스럽게 태어난 샘님이다. 그래서 왜왕이 되는 것이고 그런 취지에서 이 칼을 만들었다.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라.』 이 칼을 1천6백여년 동안 잘 보존해 오고있는 석상신궁은 백제근초고왕을 시조로 하는 물부수(物部首)로부터 연원이 시작한다. 이 신궁은 물부씨(氏) 그 후손들인 삼(森=모리)씨들이 명치유신 이후 일제시대를 빼고는 그 이전부터 지금 까지 궁사로 신불인 칠지도를 지키고 있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백년 동안 논쟁을 몰고 온 한자루의 칼 칠지도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의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는 칠지도(七支刀)라 불리는 보물이 전해져 오고 있다. 칠지도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특별한 전시가 있기 전에는 쉽사리 관람할 수 없는 고대의 유물이다. 쇠로 만들어진 긴 몸체 좌우에 여섯 개의 가지가 엇갈리게 배열되어 몸체 부분을 포함하면 모두 일곱의 가지를 가진 창과 같은 형상이다. 칼날에 해당하는 가지의 가장자리가 얇고 중심부는 두꺼워, 칼(刀)이라기보다는 검(劍)이라 불러야 좋을 듯하지만, 몸체에는 금상감(金象嵌)으로 칠지도라 새긴 뚜렷한 명문(銘文)이 있다.

    칠지도 몸체의 양면에 홈을 파고 금실을 박아 글자를 새긴 이 금상감 명문은 백제에서 칠지도를 만들 때 새긴 것으로, 백제(百濟)가 왜(倭)에 전달하였던 일종의 외교문서였던 셈이다. 따라서 이 명문은 그 당시의 역사적 사실, 특히 고대 한일관계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이다.

    그러나 칠지도 명문은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질 때부터, 금상감의 글자가 심하게 떨어져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칠지도의 상태와 자료적 가치로 인해 그 해석과 역사적 의미의 규명을 둘러싸고 거의 100여년에 가까운 한일간의 뿌리 깊은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동안의 연구를 통하여 명문의 판독에 관해서는 한일 고대사학계가 의견 일치에 도달하였던 부분도 적지 않으며, 칠지도 명문의 해석과 의미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칠지도 연구를 한 지 100여 년이 된 지금이라고 해서, 칠지도 명문 전부가 확실하게 판독된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 이와 같은 연구성과를 계승하면서, 명문의 판독에서 한일 양국이 일치하고 있는 내용을 기초로 칠지도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밝혀보고자 한다. 칠지도 명문이 백제에서 제작되어 왜에게 주어졌던 것이 분명한 만큼, 이를 바탕으로 백제와 왜의 관계, 나아가서는 고대 한일관계사의 역사적 일면을 밝혀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녹을 벗기자 드러난 칼에 새긴 글씨

    칠지도 명문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한 것은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 : 주지)였던 스가 마사토모(菅政友)였다. 그는 1874년부터 1877년까지 약 4년간 이소노카미 신궁에 재직하면서 신궁의 보물창고에 대대로 보관돼오던 칠지도를 조사하였고, 이로써 1,500년 가량이나 봉인되어 소장돼오던 칠지도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칠지도를 처음으로 접한 그는 심한 녹에도 불구하고 약간씩 빛나고 있던 금분을 통해 명문의 존재를 확신하였고, 칠지도를 덮고 있던 녹을 쇠줄로 연마하여 금상감의 명문을 드러냈다. 이로써 칠지도는 이전까지 일본 신도(神道)의 신령스런 경배 대상이었던 것에서 고대사 연구의 기초적 자료로서 그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다만 이러한 조사 결과가 곧바로 발표된 것은 아니었다. 스자가 칠지도 명문에 관한 메모를 작성한 것은 그로부터 10여년 가량이 지난 1885년경이었고, 1898년 사망 후 출간된 『스가마사토모 전집』(1908년)에 이를 포함한 또 한 편의 칠지도에 관한 메모가 함께 수록되면서 비로소 공표되었다. 이처럼 공표가 늦어진 것은 칠지도를 소장하고 있었던 이소노카미 신궁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8) 이후라는 일본의 국가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고대 일본 지배씨족의 하나였던 모노노베씨(物部氏)가 자신의 조상을 모시는 씨족의 사당(氏社)으로 세운 것이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는 신도의 경전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많은 신들의 이름이 보이고 있지만, 신사(神社)로서 그 명칭이 확인되는 것은 이세 신궁(伊勢神宮), 미와 신사(三輪神社)와 더불어 이소노카미 신궁이 전부이다. 아울러 이소노카미 신궁이 세워진 자리는 원래 야마토 왕권(大和王權)의 무기고가 있었던 곳이었고, 칠지도 역시 무기고 안에 보관되고 있었던 보물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칠지도는 물론 그것이 보관되어 있던 장소 자체가 고대 일본의 신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칠지도에 접근하는 것조차 쉽사리 허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령한 보물에 손을 대어 조사한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스가가 이소노카미 신궁의 주지로 재직하던 당시는 메이지 유신을 통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일본의 천황은 살아 있는 신으로서 국가신도의 정점으로 받들어지던 시기였다. 따라서 그가 아무리 신궁의 주지였다고는 한, 황실의 신령스런 보물인 칠지도에 손을 대어 연마까지 하였던 사실이 알려진다면 '황실모독죄' 내지는 '국가신도의 이단자'로서 처벌받을 수도 있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스가가 칠지도 명문의 조사에 관한 메모를 주지직을 그만두고도 10여 년이나 지나서야 작성하고, 또 그 공표가 더 늦어지게 된 데에는 이런 이유들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이처럼 어렵게 이루어진 조사와 공표였지만, 서둘러 거칠게 이루어졌던 조사과정으로 말미암아 칠지도 명문은 많은 훼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엑스선이나 적외선 촬영과 같은 시설은 물론 요즈음 치과의사가 사용하는 연마기 같은 것도 없었던 당시로서는, 쇠녹을 제거하고 명문을 드러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란 스가가 술회하고 있는 것처럼 쇠줄로 갈아보는 것 뿐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연마과정에서 금상감의 일부가 녹과 함께 떨어져나가기도 했을 것이며, 글자를 새긴 흠이나 녹이 스는 과정에서 생긴 틈새에 금분이 날아와 부착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1,500년 만에 세상에 얼굴을 내민 당대의 귀중한 문자자료인 칠지도 명문이었지만, 이미 그 출현과정에서 많은 훼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헌상품인가 하사품인가

    칠지도 명문을 최초로 확인한 것은 스가였으나, 일본학계에 그 존재와 의미를 처음으로 공표한 것은 호시노 히사시였다. 1891년에 「칠지도고(七枝刀考)」를 발표한 그는 이소노카미 신궁의 주지에게서 받은 실측도를 통해 『일본서기(日本書記)』 진구(神功) 52년의 기사(記事)에서 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쳤다(獻上)'고 전하는 칠지도와 같은 물건으로 추측하였다.

    칠지도 연구의 100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00여 년이나 되는 연구성과 모두를 열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칠지도 명문의 연구는 북한과 남한에서도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모두 다루기는 어렵다. 일본, 북한, 남한의 칠지도 명문 연구 중 특징이 있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만을 소개해보자.

    호시노는 칠지도의 실물 모양이 『일본서기』의 기술과 일치한다고 보아, 『일본서기』에서와 같이 칠지도(七枝刀)로 명명했지만, 1894년경 두번째 조사에 임했던 스가는 재직시보다 더 강하게 연마하여 명문에 칠지도(七枝刀)라고 새겨진 것을 확인하고, 처음에는 여섯 개의 가지를 보고 육차도(六叉刀)라 했던 것을 칠지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칠지도라는 명칭의 정착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여러 사람에 의해 몇 차례의 실물조사가 행해져 명문 판독상의 진전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비교적 안정된 판독은 후쿠다 도시오(福田 ○男)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는 1946년부터 3년에 걸쳐 세 차례의 정밀한 실물조사를 진행하여 새로운 문자의 판독과 함께 명문 판독의 대강을 확정하였다.

    그가 앞면에서 '후왕(侯王)', 뒷면에서 '백제(百濟)'와 '왜왕(倭王)'의 문자를 새롭게 판독했던 것은 칠지도 명문 연구상 중요한 업적이었으며, 이전에 비해 정밀하고 합리적인 해석문을 제시했다. 또한 앞면 첫머리의 연호(年號)는 태화(泰和)로 읽혀지지만 중국의 연호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음이 서로 통하는 태화(太和)가 태화(泰和)로 새겨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즉 칠지도에 새겨진 '태화 4년(泰和四年)'은 중국 동진(東晋)의 연호인 '태화 4년(太和四年)'으로, 곧 369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백제와 왜왕을 새롭게 판독하였던 성과를 더해 『일본서기』진구 52년(372년)에 백제가 왜에 칠지도(七枝刀)와 칠자경(七子鏡)을 바쳤다는 내용과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칠지도 명문(369년)과 『일본서기』(372년) 사이에 연대의 차이는 있지만 전자가 백제에서 칠지도가 만들어진 해를 나타낸다면, 후자는 칠지도가 왜에 전해진 연대를 보연준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일본서기』의 연대 기술에 문제가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므로 서로 모순되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백제가 칠지도를 왜왕에게 바친 이유도 『일본서기』가 전하는 것과 같이 해석하였다. 즉 진구 49년(369년)에 왜(倭)가 가야[가라 칠국(加羅七國)]를 정복하여 백제에 주자, 진구 52년(372년)에 백제는 이에 감사하는 뜻으로 칠지도(七枝刀, 七支刀)를 왜에 바쳤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전에 없었던 정밀한 판독작업이 뒷받침됨으로써 근년까지 일본학계의 통설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백제가 왜에 칠지도를 바쳤다는 소위
    '헌상설(獻上說)'의 전형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현재 일본의 모든 연구자가 이러한 해석을 추종하는 것은 아니다. 칠지도 명문이 백제와 왜 사이의 상하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백제와 왜의 초기 외교관계를 보여주는 기념비로 보아야 한다는 '대등설(對等說)'이 제시되기도 하였고, 칠지도를 보낸 직접적인 주체가 '백제 왕세자'임에 주목하여 백제 개로왕 14년(468년)에 왕세자였던 문주왕이 국정을 전담하는 상좌평에 취임한 기념으로 제작하여 왜에 증여한 것으로 해석하는 '증여설(贈與說)'도 제시되고 있다.

    한편 북한과 남한에서도 칠지도 명문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일본의 연구가 명문의 판독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면, 실물에 접할 수 없었던 북한과 남한의 연구자들은 칠지도 명문의 역사적 의미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북한의 김석형은 중국에 '태화(泰和)'라는 연호가 없었으므로 백제의 독자적 연호로 볼 것을 주장하면서 '후왕(侯王)'은 백제왕에 대한 왜왕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백제왕이 4∼5세기경에 이소노카미 신궁 일대를 영역으로 하는 백제계 분국의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1966년에 발표된 이 연구는 일본학계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른바 분국론(分國論)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분국론이란 삼한과 삼국의 주민들이 일본열도의 각지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성립시킨 정치체들이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본국에 대해 분국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손영종은 김석형의 연구를 계승하면서 명문에서 판독되는 날짜의 간지(日干支)를 통해 '태화(泰和)'가 백제의 연호라는 주장을 보강하였다. 일본의 연구처럼 '태화(泰和)'를 '태화(太和)'로 볼 때, 태화(太和) 4년(372년) 5월 13일은 임신(壬申)이며, 5월 16일은 을미(乙未)이므로 어느 쪽도 명문의 병오(丙午)와는 일치하지 않으므로, 중국의 연호가 아니라 백제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연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태화(泰和)'는 백제의 전지왕(琠支王)이 즉위하면서 사용한 연호로 태화(전지왕) 4년(408년) 5월 13일의 일간지가 병오로 명문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판독자가 5월 16일이라 하는데도 5월 13일로 본 것은 다수의 불확실한 판독을 추종하는 것보다 병오라고 확실하게 판독되는 날짜의 간지에 비중을 두어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고구려 덕흥리 고분 묵서명(墨書銘)에 고구려 왕의 신하였던 진(鎭)이 '후왕(侯王)'으로 쓰여 있으며, 5세기 중엽에 백제와 왜가 중국에서 받은 장군호를 비교할 때, 안동장군(安東將軍)의 왜왕은 진동장군(鎭東將軍)의 백제왕에 비해 한품계 아래였으므로, 칠지도 명문의 '후왕'은 백제왕에 종속하고 있었던 왜왕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한국의 연구는 1973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칠지도의 정교한 복제품이 도입되면서부터 활발해졌는데, 대체로 북한과 같은 하사설(下賜說)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병도는 통일신라 이전의 금석문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없으므로 태화(泰和)는 백제의 연호이며,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의 연구를 수용하여 뒷면의 '백제왕세자기생(百濟王世子奇生)'을 백제의 왕세자인 기생(奇生)으로 읽었다. 기생(奇生)은 근구수왕(近仇首王)의 이름 귀수(貴須)와 일치하므로 '백제왕세자'는 근구수왕을 가리키고, 태화는 근구수왕의 아버지 근초고왕이 재위 24년(369년)부터 사용한 연호라고 해석하였다.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는 태화(泰和) = 태화(太和)로 보면서 472년에 백제가 북위에 사신을 파견했던 것과 5세기 후엽에 백제가 국내적으로 후왕제(侯王制)를 실시하고 있었던 점을 들어, 태화(太和) 4년은 동진의 연호(372년)가 아니라 북위(北魏)의 연호(480년)로 파악하였다.

    이상과 같이 칠지도 명문에 관한 연구는 한국·북한·일본 학계의 많은 관심 속에 진행되어 무려 100여 년의 세월이 경과하였으나, 아직 뚜렷한 결론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앞으로 새로운 글자가 판독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만큼 글자가 어떻게 보인다거나, 이 글자는 이렇게 보아야 한다든가 하는 논의는 더 이상 불필요하다.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확실한 자료가 보충되지 않는 한, 칠지도 명문 중에서도 확실하게 판독되거나 모든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문자를 중심으로 누가 더 합리적인 해석을 하는가 하는 쪽으로 연구의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생각한다.

    백제의 왕세자가 왜왕에게 주다

    칠지도의 양면에는 모두 61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로 각 면이 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서로 구분되고 있다. 61자의 수효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칠지도의 가장자리에 두른 금선(金線)안에 명문이 새겨 있음을 참고할 때, 문자의 수효에 대한 견해는 없다. 칠지도의 양면이 같은 모양이기 때문에 앞면과 뒷면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면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명문 연구의 편의상 첫머리에 연호가 오는 부분을 앞면으로 하고, 다른 면을 뒷면으로 구분하고 있다. 칠지도 명문에는 전혀 판독이 되지 않거나 판독할 수 없는 것을 □로, 의심이 가거나 논란이 있는 것을 (?)로 표시하여, 현재 비교적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명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生벽百兵宜供供侯王□□□□(祥?)
      [뒷면] 先世以來未有比刀百濟王世子奇生聖(德?)고6爲倭王旨造傳示後世

    ◎ 泰(和?)四年

    명문의 첫머리에 오는 이 구절은 대부분의 칼(刀劍), 거울(鏡), 솥등의 금문(金文)과 같이 제작연도를 나타내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글자의 남은 상태가 좋지 않다. 태(泰)는 확실하나, 화(和)는 완전치 않아 화(禾) 또는 여(女)와 비슷한 변의 획이 보일 뿐이다. 따라서 태화(泰和), 태시(泰始, 265년), 태초(泰初, 465년) 등으로 판독되었고, 중국사서와 금문에 보이는 음통(音通)의 원칙이 적용된 것으로 보아 태화(泰和 = 太和, 369년 ·477년)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확정적일 수는 없으며, 태화(泰和)가 중국왕조의 연호로 사용된 적이 없어 백제의 독자적인 연호로 볼 가능성도 있다. 결국 '泰(和?)四年'은 268년·372년·468년·480년설 모두가 성립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정도로 제한해야 할 것이다.

    ◎ 五月十六日丙午正陽

    이 구절은 칠지도가 제작된 월일과 시간을 나타낸다. '五月一日' 또는 '五月十三日'로 판독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육안으로도 '五月十六日'임이 확인되고 있다. 오월(五月)은 음력의 중하(中夏)로서 가장 더운 달이다. 병오(丙午)의 병(丙)은 불의 형(火兄)에 해당하고, 오(午)는 정남(正南)의 방향을 나타낸다. 제작시간에 해당하는 정양(正陽)은 하루 중 불의 기운(火氣)이 가장 성한 때이다. 따라서 칠지도는 불의 기운이 가장 성한 달과 날과 시를 택하여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러한 제작시기에 관한 구절은 중국, 일본, 한국에서 청동이나 철로 제작된 금문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정확한 제작시간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좋은 청동이나 철을 뽑을 수 있고, 이러한 소재로 거울이나 칼이 잘 만들어지도록 기원하려는 듯이 더 중요하였다. 결국 칠지도 제작의 정확한 시간이라기보다는 좋은 칠지도를 제작하려는 바람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돼오던 길상구(吉祥句)를 답습한 것으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태화 4년을 어느 시기로 보고 그 해의 5월 16일이 병오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논의는 별 다른 의미가 없게 된다.

    ◎ 造百練鋼七支刀

    이 구절은 칼의 명칭과 제작방법을 나타낸다. 강(鋼)을 철(鐵)로 읽은 적도 있으나, 금속조직의 연구로 칠지도가 강(鋼)을 재료로 하였음이 밝혀졌다. 수없는 담금질과 망치질로 강철(鋼鐵)의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 生○百兵

    이 구절은 칠지도의 효험을 나타낸 것으로, 좋은 재료를 가지고 정성을 들여 만들었기 때문에, 백병(百兵)을 물리칠 수 있다는 뜻이다. 백병은 모든 무기 또는 많은 군사를 의미하지만, 액(厄)을 쫓는다는 주술적인 뜻도 담고 있다.

    ◎ 宣供供侯王

    위와 같이 만들었고 위와 같은 효험을 가지고 있으니, 후왕(侯王)에게 주기에 적합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후왕은 누구이며, 그 지위는 어떠한가?

    뒷면의 명문에 의해 후왕이 칠지도를 받는 왜왕임은 분명하지만, 칠지도를 주는 백제에 대해 어떤 위치였던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백제가 천자(天子)와 같은 입장에서 왜를 제후(諸侯)와 같이 표현했다고 보는 입장과 금문에 쓰이는 상투적인 길상구(吉祥句)로서 상하관계는 무의미하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공공(供供)은 일반적으로 제공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같은 두 자를 중복해 쓸 필요는 없다. 다른 금석문에 공공(供供)이 공공(恭恭)과 같이 쓰였던 예에 주목하여 '순순한' 또는 '예의 바른'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따라서 최초의 교섭제의에 '순순히 따르는' 왜왕에게 칠지도의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백제의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으로 해석함이 옳을 것이다.

    ◎ □□□□(祥?)

    이 구절에서는 맨 끝자만이 작(作)과 비슷하게 익혀왔을 뿐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 칠지도를 만든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뒷면의 명문에서 백제의 왕세자가 만들었음이 분명히 드러나므로 제작자의 이름을 두 번씩 썼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물론 백제 왕세자는 책임자였고 실제 제작하였던 기술자의 이름이 쓰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기술자에 불과한 공인(工人)의 이름이 주관자였던 왕세자 앞에 쓰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다른 금석문의 용례에 따라 '영구히 크게 길하리라(永年大吉祥)''와 같은 상투적인 길상구의 내용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先世以來未有比刀

    뒷면의 첫 구절인 이 문장은 '이러한 모양의 칼은 일찍이 없었다.'로 해석된다.

    ◎ 百濟王世子奇生聖(德?)故爲倭王旨造

    칠지도를 주고받았던 주체를 밝히고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구절이다. 덕(德?)은 진(晋) 또는 음(音)으로 읽혀, 백제가 중국 동진(聖晋 = 東晋)의 권위에 의존하여 제작하였다거나, 불교사상의 영향(聖音 = 佛音)이 언급되는 등, 각양각색의 해석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백제 왕세자(百濟王世子) 기생(奇生)이 성스럽고 덕이 있는 까닭으로 왜왕 지(倭王旨)를 위해 만들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백제의 왕세자 기생은 누구이며, 왜왕 지(旨)는 누구인가? 기생은 백제 근초고왕의 아들로 뒤에 근구수왕이 되는 귀수(貴須) 또는 구수(仇首)의 다른 표현이다. 즉 근구수왕은 375년에 왕위에 오르므로 그 이전인 근초고왕대(346∼374년)에 왕세자로서 왜왕을 위해 칠지도의 제작을 주관하였던 것이다. 지(旨)는 체(替)와 글자의 모양이 비슷하고, 체(替)는 찬(贊)과 비슷하므로 5세기 후반의 중국사서에 보이는 왜의 오왕(五王) 중 왜왕 찬(倭王讚)으로 볼 수 있는데, 찬(讚)은 『일본서기』의 오진왕(應神王)에 해당한다고 보는 설이 있다.

    물론 이 구절의 세부적인 해석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분명하며 현재의 한일 고대사학계가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사실은 백제 왕세자와 왜왕이야말로 칠지도를 주고받았던 주체였다는 사실이다. 즉 칠지도 명문은 백제왕이 아니라, 백제의 왕세자가 왜왕에게 칠지도를 주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구절에서 백제의 왕세자가 왜왕에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 傳示後世

    이 구절은 지금까지 없었던 칠지도를 백제에서 만들어 보내니 왜왕은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보이도록 하라는 주문 내지는 부탁의 의미로 해석된다.

    이상으로 칠지도 명문의 각 구절을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명문의 전체를 현대어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앞면]  태화 4년(372?) 여름의 가운뎃날 5월에 불의 힘이 가장 왕성한 16일 병오(丙午)의 날 정오(正陽)의 때에 수없이 두드려 강철의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모든 병기의 해를 물리 칠 수 있으니, 공손한 후왕에 적합할 것이다. 오랫동안 좋은 효험이 있기를 기원한다.

      [뒷면]  이제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인 기생(奇生)이 성스럽고 덕이 있어 왜왕인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보이기를 바란다.

    칠지도와 역사의 진실

    『일본서기』는 진구 49년(369년)에 왜가 가야의 일곱 나라를 정복하여 백제에게 주었고, 진구 52년(372년)에 이에 보답하는 뜻으로 백제가 구저(久低) 등을 사신으로 보내 칠지도와 칠자경을 비롯한 각종의 보물을 바쳤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이 칠지도에 관련된 단 하나의 문자기록이고 보니, 칠지도 명문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가 일본 중심적으로 창작·왜곡·윤색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한일 고대사학계의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연구자들 중에 위와 같은 기술을 역사적 사실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왜가 가야를 정벌하였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백제가 왜에게 가야의 땅을 받았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러한 기술에서 역사성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은 백제가 왜와 외교적 교섭을 시작하던 것과 관련된 전승이란 점뿐이며, 백제에 앞서 왜와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가야가 그 중개에 관여하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기술은 4세기 중엽 백제가 가야를 통하여 왜와의 외교관계를 시작하였던 역사적 사실이 일본 또는 백제 중심적으로 꾸며진 결과이다. 즉 『일본서기』만으로 칠지도 명문의 의미를 해석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반대로 동시대의 자료인 칠지도 명문을 기초로 『일본서기』의 내용을 바로잡는 것이 객관적일 것이다.

    칠지도 명문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주고받은 주체의 기술이다. 주는 사람이 백제의 왕세자로 되어 있고, 받는 사람이 왜왕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만큼 분명한 것은 없다. 따라서 왜왕은 백제의 왕세자에 대응되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칠지도는 백제가 친선외교의 제안으로 왜에 주었던 일종의 하사품이었으며, 『일본서기』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일본 중심적으로 왜곡하여 기술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근년의 일본학계는 과거의 주장에서 일보 후퇴하여 "칠지도 명문을 가지고 백제와 왜의 상하관계를 논단하는 것은 잘못이며, 백제와 왜 사이의 초기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 제한해서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현존하는 칠지도 명문에 의한 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칠지도 명문의 역사적 진실이란 4세기 중·후엽에 백제가 왜와 우호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이전까지 왜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수한 모양의 칼을 제작하여 보냈던 것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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