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 수정천황(神井名川耳)        

신무의 황자에 수연이명이란 이름이 나오는데 무내숙니(귀수의 장자)를 달리 꾸민 인물로서 서기 수정전기에 수연이명을 역시 신무의 중자인 신정명천이존과 그 형 신팔정이명이 제거하는 스토리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그 서형 수연이명은 나이가 들고 조정의 일을 오래 하였다. 그래서 일을 맡기고 친히 하게 했다. 그런데 그 왕은 뜻을 단단히 세워 품고 있는 마음씨가 원래 인의에 어긋나 국상중에 (천황의) 위엄과 복록을 마음대로 했다. 나쁜 마음을 품고 두 아우를 죽이려고 했다. 때는 태세 을묘(서기전 582년)다』      

『(11월) 신정명천이존이 그 형 신팔정이명과 함께 몰래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잘 막아내었다. 산능의 일을 마치자 궁부치언에게 활을 만들게 하고 왜단부 천진진포에게 화살촉을 만들게 하고 시부(矢部)에게 화살을 만들게 하였다. 활과 화살이 다 되었을 때 신정명천이존은 (*1)수연이명(手硏耳命)을 사살하려고 하였다...(중략)...신정명천이존이 그 문을 밀쳐 열었다. 신팔정이명은 수족이 떨려 활을 쏠 수가 없었다. 그때 신정명천이존이 그 형이 가지고 있던 활과 살을 빼앗아 잡고서 수연이명을 쏘았다. 한 대를 가슴에 맞추었다. 두 번째 화살을 등에 맞추었다. 드디어 죽였다. 이에 신팔정이명은 부끄러워 자복했다. 신정명천이존에게 양보하여 "나는 형이지만 유약해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그대는 무용이 뛰어나 원흉을 스스로 죽였다. 마땅히 그대가 천위에 나아가 황조의 업을 이어야 한다. 나는 그대를 도와 신기에 제사지내는 것을 맡겠다"라고 했다. 이가 곧 다신(多臣)의 시조다』

수연이명(手硏ㅇㅇ)란 이름에서 다기시[手硏]는 불구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은 신대기 상5단의 4신출생장에서 「3년이 지나도 다리로 일어서지 못한」 질아(蛭兒)로서 무내숙니를 가리키고 있다. 도로가 평탄하지 않다는 말은 사람얼굴로 치면 '곰보'라는 뜻을 가지는 연결고리다.                                      
     
무내숙니의 이칭에 이가가시고오[伊香我色男]가 있는데 시고오[色男/色雄/色乎]는 시고오[醜男]라는 뜻으로서 이들 이칭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백제를 배신하여 밉다는 뜻이다. 고사기 대국주신 국양조에 「이즈모[出雲]의 다기시[多藝志]의 오바마[小浜]」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천수일(=무내)이 출운신의 조가 되었다고 한 것과 연결고리다. 다기시[手硏]=다기시[多藝志]인 것이다. 이 다기시의 오바마는 서기 신대기 상8단 이설6 말미의 소언명명설화에 나오는 이사사[五十狹狹] 해변이다. 소언명명이 무내이기 때문이다.    

(*1) 「'다기시'는 도로가 평탄하지 않은 모습, 또는 다리 등이 오므라들어 바로 설 수 없는 모습<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1/199p/주12>」      

수연이명은 두 동생의 서형(庶兄)이라 하여 혈통이 다름을 시사하고 있다. 서기에는 두 동생으로 나와서 응신의 형인 예진별명은 빠져있으나 예진별명은 무내숙니가 제거된 후 몇 달만에 역시 전사했다. 그래서 둘만 등장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고사기에는 신팔정이명의 형으로 언팔정이명이 나와 수연이명의 동생이 셋이라고 했다. 그런데 성씨록에는 언팔정이명이 신팔정이명의 아들로 나온다. 언팔정이명은 수연이명을 제외한 신팔정이명의 형제가 전부 셋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꾸민 것이다.        

고사기 신무기 다기시미미(手硏ㅇㅇ; 무내숙니,수연이명,)의 반역조에 보면 신팔정이명이 장협국조의 조로 나오는데 서기 신대기 하9단 이설4에는 구주 서남부에 事勝國勝長狹이란 인물이 나오고 이 인물이 바로 신팔정이명이며 이 지역은 천일창이 건설한 구주신라 영역이므로 천일창=응신=신무=신팔정이명인 것이다. 이설4에는 事勝國勝神이란 이름도 등장하고 염토노옹이란 별칭이 있다 했는데 아라사등이다. 장협이 아들인데 그 부왕에게는 神이라 호칭하여 격을 높인 것이다.
             
신대기 하11단에서도 아라사등을 달리 꾸민 언파불합존의 아들이 넷 나오는데 무내숙니인 오뢰명이 포함되어 있다. 또 신팔정이명은 신무를 달리 꾸민 인물이고 그 동생에게 양위를 하는 것을 보면 응신은 당대로 끝나고 이복동생 진언이 진왕이 되는데 이가 바로 신정명천이존이라고 할 수 있다. 갈성에 도읍했다 하여 가야계임을 시사하고 있다. 갈성은 가라성이고 곧 가라국이라는 뜻이다. 즉 수정천황은 응신의 이복동생 진언을 등재한 인물인 것이다. 대륙사서에 찬왕(讚王=응신)의 아우 珍王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다기시미미를 제거한 이 해가 태세 을묘 즉 서기전 582년이라 했는데 신무기에는 무오년 5월조에 기술되어 있고 실사상으로는 서기 384년으로서 단순히 보아도 966년이나 인상한 것이다. 신무와 수정의 순서는 대화왕조의 왕재위순서와 맞춘 것이다.      

3세부터 8세까지는 기사도 거의 없는 천황들이라서 누구를 꾸며 실었는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9세 개화천황(稚日本根子彦大日日)        

개화천황은 가야왕 아라사등을 등재한 인물로 판단된다. 개화천황의 중자가 후에 숭신천황이 되는데 숭신은 응신을 재등재한 인물로서 응신을 중자로 하는 인물은 아라사등일 수밖에 없다.    

開化란 한풍시호는 열도를 최초로 대규모로 개척했다는 의미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이름이다. 열도에 선진문명을 본격적으로 열었다는 뜻이다. 그 개척설화가 신대기 상8단의 팔기대사설화, 수인기 2년 시세조의 액유각인설화다. 팔기대사설화는 시마네현의 이즈모[出雲] 제철단지를 개척한 것을 꾸민 것이고 액유각인설화는 열도의 북쪽 지금의 후꾸이현의 쯔누가[角鹿/敦賀]를 개척한 설화다.

또 청녕천황(白髮武廣國押稚日本根子)과 선화천황(武小廣國押盾)으로도 등재되어 있는데 청녕의 화풍시호에는 '稚日本根子'라는 동일한 키워드가 들어 있고 선화와는 '化'자 돌림이기도 하고 선화의 화풍시호에는 청녕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는 '廣國押'이라는 키워드가 들어 있다. 청녕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는 '백발'은 신대기 하9단 이설4와 신무전기에 등장하는 염토노옹과의 연결고리인데 아라사등은 서기에서 노인으로 종종 등장하여 예언을 하는 듯한 기사가 있고 고사기 경행기 왜건명의 동국정벌에도 불을 피우는 노인으로 등장하여 九夜十日을 예언하고 있는 것도 사례 중의 하나다.        


10세 숭신천황(御間城入彦五十瓊殖)  

이 천황의 소개기사에 「...幼好雄略(유호웅략)...」이라는 구절이 있어 웅략천황과 동일인물임을 암시해주고 있는데 웅략은 응신을 재등재한 인물이다. 또 한풍시호는 '神'자가 들어 있는 시호 넷 중의 하나인데 신공을 제외하면 신무, 숭신, 응신이 전부 동일인물이기 때문이다.      

서기 숭신기 12년 9월조에 '御肇國天皇(어조국천왕)'이라 하여 시조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신무도 시조라 고 '始馭天下 之天皇'이라 하였고 시조가 둘일 수는 없으므로 숭신이 신무와 동일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신무=숭신=응신)인 것이다. 어(御: 임금)는 존칭이고 조국(肇國)은 '초개국(初開國)'을 의미한다.

서기 숭신기 10년 9월조에는 귀수대왕(근구수; 근초고왕의 아들)의 12만 대군과 접전을 벌여 도강하는 백제군을 기습수공하여 귀수대왕을 전사시키고 대승을 거둔 후에 패퇴하는 백제군을 추격하여 승전을 구가하는 대목이 달리 꾸며져 실려 있다.      

『무식안언(武埴安彦)이 처 오전원과 더불어 모반을 꾀하여 군사를 이끌고 갑자기 이르렀다. 길을 각 나누어 남자는 산배로부터, 여자는 대판으로부터 帝京을 공격하여 들어오려고 하였다. 이때 천황은 오십협근언명을 보내 오전원의 군사를 쳤다. 대판에서 막아 모두 대파했다. 오전원을 죽이고 그 군사를 모두 참했다. 다시 大彦을 和邇臣의 원조 언국즙과 함께 보내 산배를 향하여 식안언을 쳤다. 그때 기옹을 화이의 무조판 위에 놓았다. 정병을 이끌고 나아가 那羅山에 올라 싸웠다...(중략)...나라산을 떠나 진격하여 輪韓河에 이르러 식안언과 더불어 강을 사이에 끼고 진을 치고 서로 도발했다. 고로 사람들이 그 강의 이름을 바꾸어 挑河라 하였다. 지금 泉河라 하는 것은 말이 변한 것이다. 식안언이 바라보고 언국즙에 물었다. "어찌하여 너는 군사를 일으켜 왔는가". 답하기를 "너는 역천무도하여 왕실을 넘어뜨리려 하고 있다. 고로 의병을 일으켜 너의 반역을 치려고 한다. 이는 천황의 명이다"라고 했다. 이에 각자 활쏘기를 다투었다. 무식안언이 활을 먼저 언국즙에게 쏘았으나 맞히지 못했다. 언국즙이 나중에 식안언을 쏘았는데 가슴을 맞혀 죽였다. 그 군사들이 두려워 물러났다. 추격하여 하북에서 깨뜨렸다. 참수가 반을 넘었다. 시신이 많아 넘쳤다. 그래서 그곳을 하부리소노[羽振苑]이라 한다. 또 그 군사들이 무서워 도망갈 때 대변[屎]이 바지[ ]에서 새어 떨어졌다. 그래서 갑옷을 벗어버리고 도망하였다. 도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我君' 하고 외쳤다. 고로 그때 사람들이 갑옷을 벗은 곳을 가와라[伽和羅]라 하였다. 바지에서 대변이 떨어진 곳을 구소바까마[屎 ]라 하였다. 지금 구스바[璋葉]라 하는 것은 말이 변한 것이다. 또 땅에 머리를 조아린 곳을 '我君'이라 한다』  

식안언(埴安彦)은 효원천황의 황자인데 「埴安의 음훈 '하니야스'는 "진흙 속에서 쉬는 것", 즉 진흙에 묻힌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근구수왕(귀수대왕)이 근강전에서 전사하여 비파호에 잠긴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윤영식/1987년/387p>」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적절한 풀이로 본다.  
      
그런데 여기서 식안언(=귀수대왕)을 전사시킨 인물이 언국즙인데 성씨록에는 다음과 같이 초고대왕(근초고왕)의 후손으로 나온다.      

和邇部; 天足彦國押人命三世孫 彦國葺命之後也(우경황별)              

아마다라시[天足]는 아마데라스[天照]와 같아 천족언국압인명은 천조대신이므로 초고대왕이다. 그 3세손(=손자)은 무내숙니, 침류왕, 진사왕 셋인데 이 중에서 가야와 협력하여 초고대왕과 귀수대왕을 차례로 전사시킨 인물은 무내숙니다. 언국즙명이 무내숙니인 것이다. 와니[和邇]는 와니[王仁]를 같은 음의 다른 한자로 바꾼 성씨다.  

지금 이 기사는 귀수대왕의 12만 대군이 가야군의 기습수공을 당하여 귀수대왕이 전사하고 패주하는 장면이다. 서기로 384년 2월이다. 근강전투와의 연결고리로 「기옹을 와니[和邇]의 무조판 위에 놓았다」라고 했다. 기옹은 근강전투에서 강을 막았던 물막이를 뜻하고 '와니'는 왕인 즉 귀수대왕을 가리키며 무조판은 언덕이름이다. 와가라가와[輪韓河]는 근강을 달리 이름지은 것 같다.        

오전원(吾田ㅇ)을 죽였다는 것은, 여성은 영토를 은유하고 아다[吾田]가 '아라가야땅'이라는 뜻이므로 가야본국과 구주를 빼앗겼다는 뜻이다. 하후리소노[羽振苑]는 원래 시체를 버리는 곳이라 하는데 백제군의 전사자가 많았다는 뜻이다.  

「바지에서 대변이 떨어진 곳을 구소바까마[屎곤 ]라 하였다. 지금 구스바[樟葉]라 하는 것은 말이 변한 것이다」라는 것은 이 전투가 귀수대왕의 군대와 싸운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구소바까마'라는 것은 핑계고 구스[樟]>구스[貴須]라는 키워드로 패주하는 측이 귀수대왕의 군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사기에서는 구스바[久須婆]라고 하여 휘인 須를 넣어 지었다. 근강전투에서 이긴 쪽은 가야의 예진별명, 예전별명, 진언, 무내숙니 등이다.  

위의 인용문에 이어서 보면 대물주신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대물주신이 밤에만 오므로 처가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하니 처 왜적적희명에게 대물주신이 자신의 형체를 보여주는데 예쁜 작은 뱀[美麗小蛇]으로 변하여 나타난다. 가야계는 해신으로서 용 또는 뱀으로 은유된 경우가 서기에 여러 차례 기술되어 있는데 그 사례 중의 하나다. 대물주신은 가야계이며 이것이 숭신기에 실려 있는 것은 숭신이 대물주신이라는 암시다.  

서기 수인기 2년 시세조에 화풍시호 미마기[御間城]에서 미마나[任那]가 나왔다고 했으나 이것은 원래음 가나[任那]를 숨기기 위해 지어낸 음이다. '미마나'의 어원을 보면 숭신천황의 화풍시호에 들어있는 '어간성(御間城)'에서 어(御)는 존칭이니 떼고 간성(間城)을 반도어로 생각해보면 '사이/새 間'이다. 성(城)은 金城>新羅의 예에서 보듯이 羅, 那, 國과 대치해 쓸 수 있는 말이다. 여기서 '사이/새 間'의 훈 '새'의 음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뜻이 다른 '새 新'으로 한자를 바꿀 수 있다. 따라서 '間>新'으로 '城>羅'로 치환을 하면 新羅가 되고 이것은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의 아라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를 한역한 新羅와 같아진다.      

※ "아라사등의 황우설화" 참조

숭신천황의 시호에 이런 키워드를 넣어둔 것은 이 인물이 아라가야출신임을 알려주기 위해 지어 붙인 것이다. 서기 384년에 귀수대왕을 전사시키고 백제군을 대파한 가야측은 예진, 예전, 진언, 무내 등인데 그 중에서 시조로 등재할 만한 인물은 응신뿐이다.    

서기 숭신기 9년 3월조에 묵판신과 대판신이 나오는데 묵판신은 고사기 이중기의 응신의 이칭 묵강중왕과 '墨'으로 연결되므로 응신이고 대판신은, 대판 근방 난파에서 가야의 기습화공에 말려 전사한 초고대왕을 가리킨다. 오오[大]>近, (ㅅ+아래아)(ㄲ+아래아)>(사까, 소꼬)이므로 오오사까[大坂]는 '近速古'와 같은 뜻이다. 소꼬[速古]는 초고대왕의 열도시호다. '오오사까'라는 지명도 초고대왕의 시호에서 나온 것이다.            

서기 숭신기 65년 7월조에는 임나국의 소나갈질지가 등장하는데 중자 응신을 천황으로 등재하고 그 부왕을 본국의 사신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숭신기 60년 7월조에는 무일조명이 하늘에서 가져온 신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무내숙니가 가지고 도왜한 형칠지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성씨록을 보면 가야계 모야씨와 주길씨가 숭신의 후손으로 나타난다.    

下毛野朝臣; 崇神天皇皇子 豊城入彦命 之後也(좌경황별)
上毛野朝臣; 下毛野朝臣同祖 豊城入彦命五世孫 多奇波世君 之後也.....(좌경황별)
池田朝臣;    上毛野朝臣同祖 豊城入彦命十世孫 佐太公 之後也(좌경황별)
住吉朝臣;    上毛野同祖 豊城入彦命五世孫 多奇波世君 之後也(좌경황별)      

상모야, 하모야는 계체기에 등장하는 毛野臣의 후손인데 숭신의 후손으로도 나오는 것이다. 다까하세[多奇波世]는 응신의 형 예진의 이칭이다. 주길신사는 가야계 네 신을 모신 신사로서 제신이 예진, 예전, 신공 등이다. 숭신은 가야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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