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롱하우스
ⓒ 김비아
강을 따라 길은 계속되어 저녁 무렵에 드디어 다약족 마을 탄중이수이(Tanjung Isuy)에 닿았다. 칼리만탄의 원주민인 그들은 말레이계 사람들이 해안 지대를 차지하면서 내륙의 고원이나 강으로 이동했다. 토착 종교는 애니미즘이지만 기독교로 많이 개종했다고 한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마을의 롱하우스를 둘러보았다. 원래 다약 사람들은 롱하우스에서 함께 살았지만 그건 이미 옛날 이야기다. 가이드북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 이 일대에 있는 롱하우스들은 관광객을 위해서 70년대부터 지방 정부에서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독특한 조각이며 군상들이 무척 매력 있었다. 일부 다약족은 마을에 살지 않고 정글 속에 흩어져 살아가는데, 그들을 발견하기란 무척 어렵다고 한다.

수리야디씨가 마을 이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버팔로 의식 같은 것은 이미 끝나서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무얼 볼 수 있냐고 물으니 다약족의 전통춤을 20만 루피아를 내면 볼 수 있다고 했다. 2만원 정도 되는 돈이기에 그러자고 했다.

나는 밝은 낮에 보기를 원했지만 낮에는 농사지으러 가기 때문에 밤에만 가능하단다. 강가라서 농토는 보이지 않았기에 어디에서 농사를 짓느냐고 물어보았다. 두 시간 정도 걸어가면 농장이 있어서 매일 그 먼 길을 오간다고 했다. 강가에 사는 이유는 아마도 물을 구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약속한 8시가 되어서 롱하우스에 갔다. 날은 이미 져서 어두운데, 꼬맹이들부터 시작해서 할아버지까지 마을 사람들이 전통 옷으로 차려입고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색채와 장식이 감탄할 만큼 무척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흐릿한 조명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예쁘장한 소녀 하나가 다가오더니 내게 선물로 목걸이를 걸어주고 머리띠도 둘러 준 다음에 내 자리라며 의자로 안내했다. 롱하우스는 춤꾼, 악사들, 그리고 구경나온 다른 마을 사람들로 이내 가득찼다.

혼자 보기엔 정말 과분한 춤이었다. 한 마디로 기대 이상이었다. 농사, 사냥, 전쟁, 출산, 치료, 태어난 아이들에게 이름 짓기 등의 춤이 무려 두 시간 동안 이어졌다. 갖가지 마을 축제와 의례 때마다 추던 춤을 공연용으로 줄여서 한데 모아놓은 것이었다.

어린 꼬마들까지 춤에 가세해 제 몫을 해내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뿐만 아니라 접시를 돌리는 다약 소녀들의 표정과 미소는 무척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여행의 피곤을 잠시 잊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그런 표정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에. 나이드신 어머니들의 능숙한 동작, 할아버지들의 신들린 듯한 몸놀림도 놓칠 수 없는 장면이었다. 피리 소리, 북 소리를 따라서 꿈결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 김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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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비아
이곳 마을들은 대개 자급자족으로 생활하므로 현금이 귀할 것이다. 내가 낸 돈은 마을 공동 자금으로 쓰인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고작 이만원에 온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는 춤은 그들과 나의 삶의 방식에 얼마나 큰 차이가 놓여 있는지를 깊이 느끼게 한다.

칼리만탄은 인도네시아에서도 가난한 지역에 속하지만 목재를 비롯해서 석유, 천연가스까지 돈 되는 것은 죄다 여기에 있으니 개발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은 결국 자본을 소유한 외지인들인 모양이다.

춤이 끝나고 칼리만탄의 그 단단한 나무로 만든 조각품도 몇 개 샀다. 원래 다약 여인들은 귓볼에 구멍을 뚫어서 금속 고리를 매단 후 귓볼을 어깨까지 길게 늘어지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조각상 속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깨까지 늘어뜨린 귓볼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만쫑(Mancong) 마을로 출발했다. 탄중 이수이에서 만쫑까지 이어지는 강길은 양 옆으로 숲이 무성하다. 긴코 원숭이가 간간이 모습을 나타냈고 색색의 새들이 날아왔다 사라져갔다.

다들 농사지으러 갔는지 만쫑 역시 고요했다. 롱하우스를 둘러보고 거리를 거닐다가 학교가 눈에 띄었다. 문이 열려 있어서 그 틈으로 교실 풍경이 내다 보였다. 학생들도 나를 발견하고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쳐다보았다.

▲ 학교
ⓒ 김비아

▲ 다약족 여인, 햇살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곡식 가루를 발랐다.
ⓒ 김비아
만쫑에서도 축제나 의식을 볼 기회는 없었다. 수리야디씨가 다음 일정을 물어왔을 때, 내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나 있었다. 여행을 지속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틀 내내 종일 모터보트 위에서 보낸 몸이 더이상 피곤을 견뎌낼 수 없었던 까닭이다.

배의 소음과 진동, 딱딱한 바닥, 강 바람은 기운을 완전히 소진시켰으며, 탄중푸팅에서부터 시작해서 일주일을 물 위에서 보내면서 뭍과 산이 그리워 견딜 수 없었다. 어제의 감탄은 어디로 갔는지, 어서 빨리 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혼자 여행을 하다보면 외로운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지만 마하깜에서는 유독 그랬다. 아마 말 통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도 이유 가운데 하나였으리라. 수리야디씨를 제외하고는 의사 소통이 불가능했고, 여행자라고는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사람 사는 동네는 어디나 매한가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이 광막한 강, 그 지류를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을 영위하고 있는 마하깜은 내게는 쉽게 가까워질 수 없는, 그런 다른 세계였다. 자신에게 속한 수많은 동물과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풍요롭다 할 만한 칼리만탄의 대자연은 내게 다소 거칠고 위압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힘겨운 보트 여행 말고 다른 가능성을 탐색해 보기로 했다. 땅을 밟고 싶어서 마을에서 가까운 정글을 트레킹할 수 있냐고 수리야디씨에게 물었다. 아쉽게도 그는 이곳 문화나 트레킹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결국 걸음을 돌이켜서 꼬따반군까지 되돌아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바람이 점점 세게 불더니 물결이 많이 쳤다. 나는 보트가 뒤집어지지나 않을까 무척 염려했는데, 보트를 모는 노인은 괜찮다는 미소를 보내왔다. 곧 이어 강물은 잠잠해졌고 그 위를 보트는 쏜살같이 달렸다.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꼬따반군에 닿았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다. 버스도 끊긴 뒤였다. 따뜻한 물에 씻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밖에 없었던 나는 마을에서 지프를 고용하여 그 밤에 사마린다까지 갔다. 그리고 가장 좋다는 호텔 머사라로 직행했다. 사마린다에 오니 비로소 사람 사는 동네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심심하면 오지 타령을 해왔으면서도 역시 내게 문명 세계는 친숙한 곳이었나 보다.

피곤과 외로움으로 서둘러 떠나오기만 했을 뿐 그곳의 삶과 문화를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또 여유있게 즐기지도 못한 것이 마하깜 여행이었다. 돌이켜보면 많이 부족하고 아쉬운 날들.

그렇지만 그 끝모를 강을 가랑잎 같은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달리던, 드넓은 하늘과 강 사이를 빠져나가던 순간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세상은 그토록 넓었으며 천 개의 얼굴을 지닌 자연은 인간 삶의 방식도 그만큼 다양하게 규정짓고 있음을 마음에 새긴 시간이었다.
2003-10-0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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