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족캠프의 모든 아이들이 기념촬영을 위해 모였다
ⓒ 오문수
1994년부터 아카족 캠프를 시작한 데이빗의 얘기다. 그가 방콕에서 멀리 떨어진 태국 북부 지역의 산악 오지를 방문했을 때 두살바기 수쿤야는 땅바닥에서 놀고 있었다. 하지만 "수쿤야가 설사와 기관지, 옴이나 수많은 마을 어린이를 죽음으로 몰고간 질병에서 벗어나 학교를 다닐수 있을까?" 하고 의심을 품었다.

그는 아카족 어린이들을 알기위해 치앙마이 대학교에서 고산족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그가 생생히 기억한 것은 12살에서 16살까지 강간당하거나 성노예가 되어 임질 매독 에이즈 등의 성병에 걸린 소녀들에 관한 의사들의 보고였다.

▲ 수쿤야가 이렇게 컸다. 식당에서 식사준비 중이다
ⓒ 오문수
수쿤야에게 마음이 끌린 그는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무 죄도 없는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지은 걸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는 장래에 대한 기회도, 희망도 보이지 않고, 평범한 부모에게서도 보호를 받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생명이었다.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종일 밭에서 일해야 했다. 만약 그녀가 아무 이유도 모를, 그리고 예기치 못한 첫 파도인 질병에서 살아남는다면, 다음은 이익이나 노리개를 위한 목표가 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수쿤야의 아버지가 딸을 교육시켜 달라고 읍소를 하며 그를 찾은 것은 6년 후의 일이다. 데이빗과 아카는 그녀를 도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당시 숙소도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쿤야의 아버지는 막무가내로 대나무와 풀들을 베어와 허락만 떨어지면 오두막을 지을 참이었다. "어떻게 거절할 수 있는가?"

그녀는 항상 친구들과 학교 다닐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행복해한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인생에 아무 가치도 없을 것 같은 작은 아이가 최우수 학생이 된 것이다. 그녀는 쉽게 배우고 자신이 지닌 지식을 다른 아이들에게 전한다.

수쿤야는 현재 중학교 1학년이다. 아카센터에서 고등학교에 보낼 돈도 없고, 상급학교 진학을 희망하는 아이들이 30명이나 된다는 것도 잘 안다. 아버지가 돈 벌어오기를 원할지 혹은 집에 돌아오기를 바라는지 몰라 걱정이다. 그녀는 또다시 혹독한 시련의 세계로 갈 것인가, 아니면 희망의 빛이 보이는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에 고민하고 있다.

▲ 페인트팀 팀장인 솜차이. 곧 호주에서 발목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 오문수
아카캠프의 페인트팀 팀장은 14살 된 솜차이다. 어려서부터 한쪽 발목이 90도 정도 굽혀진 장애를 가지고 있다. 아침 5시에 기상해 6살부터 또래이하의 아이들을 통솔하며 건물 지붕에 올릴 슬레트에 페인트칠하는 것을 감독하고 문이나 철근 페인트를 도맡는다.

때로는 아이들 몸에 페인트가 덜 묻도록 비닐을 씌워주거나 마스크도 주지만, 아이들 옷 절반은 페인트 범벅이다. 하지만 호주의 한 정형외과 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해 주겠다고 약속해 수술날짜를 기다리며 들떠있다.

▲ 도마뱀을 잡고 놀고 있다
ⓒ 오문수
전기 드릴을 이용해 철근에 구멍을 뚫고 창틀을 만드는 스치는 14살이다. 말이 별로 없고 조용하지만 일만 끝나면 어린 동생들과 함께 돈치기 놀이에 여념이 없다. "집에 돌아가고 싶냐?"고 묻자 고개만 가로 저었지만 의사소통이 안돼 이유를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아침이면 경운기 머리를 붙인 사발이를 몰고 동생들을 학교에 등교시킨다.

▲ 장수풍뎅이 암놈을 고무밴드로 묶어 강제로 교미를 시키는 놀이가 유행이다
ⓒ 오문수
용접팀장인 모파는 용접공부를 체계적으로 못했지만 캠프내의 모든 문짝과 용접을 도맡아한다. 말없이 일하다가 밥먹고는 옆구리를 쿡 쥐어박으며 미소를 보내는 아이다.

그 밖에 자원봉사자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미초와 미오, 그리고 페오는 항상 싱글거리며 봉사자들에게 "부족한 것은 없는가? 더 먹고 싶은 것은 없는가"를 묻는다.

캠프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어린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노동력 착취는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이 왜 일찍 일어나야 하는가에 대해 이해가 됐다. 일하는 법을 배우고 기술을 배워야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잡히며 일상생활에 들어가는 경비를 줄여야만 학비를 댈 수 있기 때문이다.

5시 30분까지 점호와 기도를 마치고 작업현장에 투입된다. 용접, 페인트, 잡초베기, 식사준비, 청소 및 빨래 등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어린이들의 손으로 직접 이루어진다. 데이빗과 아사가 전체적인 운영과 모금을 책임지고, 나머지 스탭들은 교육과 작업현장의 진도와 공정에 대해 논의하고 필요한 자재는 캠프에 사는 아사의 동생이 시내에서 사온다.

모든 작업현장에는 팀이 조직되어 있으며 팀장의 지시하에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제 갓 들어온 어린 동생들은 선배들이 일을 가르치고 아프거나 힘들면 감싸주며 형제같은 분위기다.

4시 하교 후 곧 바로 작업복을 갈아입고 4시 반부터는 오후 일과가 시작되어 6시에 끝난다. 저녁밥을 먹고 쉬는 시간에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논다. 돈치기, 구슬치기, 고무줄놀이, 신발던지기. 도구가 없으면 들판에 나가 잠자리를 잡고 도마뱀꼬리를 붙잡고 논다.

▲ 전통 의상을 입은 아카족 엄마들이 맛있는 음식을 싸가지고 자녀들을 방문했다
ⓒ 오문수
지난 금요일은 한 달에 한번 있는 어머니 날이다. 부모가 없는 50명을 제외한 엄마들이 학교를 방문 후 캠프에 자식들을 찾아보고 돌아가는 현장은 각양각색의 모습이었다. 모처럼 엄마를 만난 6살 먹은 어린이는 따라간다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또 조금 철이든 아이는 엄마가 옥수수와 닭다리 죽순 떡 등의 13가지나 싸준 비닐 주머니를 들고 잔치 기분이고, 엄마가 오지 않은 아이는 부러움에 침만 삼키며 주위를 빙빙돈다.

▲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자 6살 먹은 아이가 따라간다고 떼를 쓰며 울자 형이 달래고 있다
ⓒ 오문수
비록 풍요롭지 못하지만 세상의 사랑과 관심속에 소통의 끈을 연결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겐 앞날에 대한 희망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남해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

2007-08-12 09:26   오마이 뉴스
[경인뉴스]  2008년 06월 23일 (월)                                                                          전상천junsch@kyeongin.com

아카족  발전센터  루카 목사

"아편중독  탈출 재활교육에 앞장… 가난 굴레벗기 '1가족 1소 지원'"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바로, 바로 당신이랍니다."

아편 생산지로 악명높은 태국 치앙마이의 소수민족인 '아카족'의 부흥을 이끈 인물 루카 목사. 그는 아편에 중독된 자신과 같은 민족인 아카족을 재활 및 교육으로 빈곤을 퇴치하고 있다.

푸른경기21 연수단이 태국 치앙마이서 국경으로 이동해  방문한 '아카족 발전센터'(Aka tribe development center). 이 센터는 루카 목사를 비롯, 10명 안팎의 직원들이 100여명의 인근 아카족 아이들을 기숙교육시키고 있다.

루카 목사가 지난 1999년에 시작한 센터는 인근의 가난한 가정의 7~8세 가량의 아동이나 부모없는 고아 등 20명을 모아 놓고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편 교회지도자 등 교육전문가를 육성해왔다.

루카 목사는 우선 고산서 살고 있는 아카족이 아편 중독과 빈곤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 교육과 의료가 시급하다고 판단, 빈곤 퇴치프로그램을 운영해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는 아카족 1가족당 소 1마리를 지원한 후 3마리까지 키우게 한 뒤 소로 생계 및 자녀 교육비로 지원토록 했다.

이어 한가정이 소 3마리가 넘게 되면 이웃 가정에 분양하게 하는 수법으로 저마다 '살찐 소'를 재산밑천으로 삼아 가난서 벗어날 수 있도록 원동력을 제공했다.

루카 목사는 아카족의 희망인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각 가정이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아카족이 거주하는 고산지대의 기후 등을 고려해 소득증대 차원서 '차'나무를 키우도록 장려하고 있다.  일부 성인들중 아편 등에 중독돼 살지 않기 위해서 육체노동을 통한 생계유지가 가능하도록 지원한 것이다.
루카 목사의 이 같은 계획도 FTA 체결 등으로 외국 농산물이 몰려들면서 수입이 줄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아카족은 이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작은 토대를 마련하는 중이다. 아카족은 더이상 빈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와 각종 NGO단체 등이 아카족 빈곤 퇴치를 위해 '태국 아카족 지원 재단'(Thai-Aka Ministries Foundation)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센터에서 만난 학생들이 치는 기타 등 각종 교육자재에 모두 '한국'에서 지원된 것임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최근 고양의 한 교회에선 '교인들중 복된 일이 생길 때마다 소 한마리값을 헌물로 내 놔 아카족에게 보내주기로 약속'하는 등 국경지대 소수민족을 돕기 위한 도움이 잇따르고 있다.

한국을 한차례 방문하기도 했던 루카 목사는 "미신 등을 숭배하던 아카족이 기독교로 모두 개종케 된 것은
   
부모님의 한결 같은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아카족 아이들이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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