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발전사에 있어 가장 큰 두 가지 동기라면 불의 발견과 철의 발견이다.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다시 철기시대로 발달해 감에 따라 각 시대의 사회적 생산력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쇠는 인류가 발전하는 문명의 지렛대 역할을 하는 한편, 힘의 상징으로 국가를 장악했고 부와 영광을 함께 누렸다.

사람들의 지혜에 의해 쇠를 처음으로 녹여낸 것은 서기전 2050년경. 메소포타미아 우르탑 옆에 쇠를 녹인 가마자리와 쇠 찌꺼기가 발견됐다. 동양에서는 서기전 1100년경 중국 은나라의 유적이 발견되었지만 널리 이용된 것은 서기전 770년 무렵 춘추전국시대.

우리나라는 서기 200년경부터며 이 철을 직접 생산하는 최초의 철광지가 울산이다. 울산 북구 달천동 산 20-1번지 일원으로 삼한~조선시대까지 철광석의 원산지였고 철광석 산출은 국가의 기반산업으로 삼국시대 국가의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 출토된 철기 비소 함량이 달천광산 철광석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으로 볼 때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으로 기록된다. 따라서 달천철장은 삼한시대부터 중요 산업유적이며, 조선시대 철광산지이다.

철장이란 철의 원료인 토철이나 철광석을 캐던 곳을 일컫는다. 달천동 및 상안동 일대에 분포하는 이 유적은 원래 이름인 달내에서 유래하였다. 그 역사는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중국 문헌 '후한서'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한(漢), 예(濊), 왜(倭)가 여기서 철을 가져가며 모든 시장에서 철을 사용하여 매매하는 것이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곧 철이 당시에는 화폐경제에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우리나라 문헌에 달천철장이 등장하는 시기는 조선시대 세종조부터로 '세종실록지리지'에 1452년 달천에서 생산된 철 1만2500근이 수납됐다고 명기돼 있다.

울산의 자랑이자 역사인 쇠생산을 축하하고 옛 울산의 선조들이 철광을 깨면서 노래를 불렀던 쇠부리 놀이. 울산의 정서를 표현했다는 울매가를 부르며 쇠부리 놀이를 행해 왔던 것을 기념하여 오늘날 쇠부리 축제로 승화 시켰다.

쇠부리란 철성분이 다량 함유된 광물을 쇠를 뽑아내는 광물작업이다. 쇠부리 과정에서 많은 인력이 필요했지만 그 가운데 특히 풀무를 밟아 바람을 내는 불매꾼(풀매꾼의 경상도 사투리)의 역할은 대단했다.

8명씩 조가 되어 선조 후조 모두 16명의 불매꾼이 불매질을 하면서 힘을 돋구고 불매꾼의 행동을 일치시키자 소리를 하는 것을 '불매소리'라고 한다.

쇠부리를 녹여 내던 장소를 쇠부리터라라고 하며 달내(달천) 철장에서 나온 토철은 흙과 비슷한 상태로 파내어져 가마니에 담아졌다. 이 덩어리는 십리, 백리 밖으로 이송됐다.

울산 북구문화원 홍중곤 자문위원은 "울산은 쇠와 함께 지내온 역사의 산실로 울산의 문화축제는 거두절미하고 쇠불이 축제가 근원이다"라고 말한다.

올해로 제 3회째를 맞는 쇠부리축제는 옛 쇠부리 놀이를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학술적 세미나를 가미해 그 의미를 한층 수준을 높였다.

더 나아가 울산 북구문화원은 울산의 취약한 문화콘텐츠에 역사적 철기문화와 현대의 산업 철기문화와 현대의 산업 철기문화, 노동문화에다, 울산의 전통 및 역사, 문화가 어우러지는 가장 이상적인 비전으로, 달천철장 역사 테마파크의 개발을 추진 중이다. 또 하나의 울산 랜드 마크를 준비하는 과정인 것이다.

한반도에 철기시대를 연 땅 울산. 울산에서 이뤄지던 쇠부리가 자취를 감춘 지 반세기를 지난 지금 '울산 달내 쇠부리'는 민속문화로 다시 태어났다. 이 놀이는 단순한 민속놀이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흥망성사의 내력을 간직한 역사의 키워드다.

쇠의 장악을 바탕으로7~8세기의 통일신라는 당대 지구상 최고의 문명을 누렸다. 주변국들이 멸망과 혼란을 거칠 때 부흥의 시기의 원동력이 되었던 달내철장.

울산의 삶과 같이하며 쇠의 문화를 전파하여 우수한 국가의 면모를 과시, 그 정기를 모아 우리나라 산업수도의 위용을 펼치고 있는 울산의 고민은 옛 선조들의 위대함을 지켜 나가는 것이다.
2007-04-24 16:44 오마이뉴스
울산쇠부리의 터 달천철장  
작성일: 2001/02/12      수정일: 2001/02/15      작성자: 이양훈

울산쇠부리의 터 달천철장(達川鐵場)



울산광역시 북구 농소동 농서지역인 달천리에 울산의 대표 민속인 울산쇠부리의 발원지이며 토철의 공급지였던 달천철장(達川鐵場)이 있다. 지금은 매립공사가 한찬 진행중인 이 철장은 삼한시대 이전부터 약 10여년전까지 2천500여년간 채굴되어 온 철산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산지이다.

이 달천철장에서 산출된 철은 일본에도 건너갔고 또 이 달천철장의 제철기술자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초기 철산업(鐵産業)을 일으켰고 늘어난 생산력이 일본 고대국가를 형성시켰다.

고대 울산의 대표산업은 염철(鹽鐵)인데 소금은 울산에 염포란 지명이 대표하고 철은 이 달천철장과 쇠부리민속으로 대표된다.

조선시대까지 울산 달천철장(達川鐵場)에서 산출된 쇠로 만든 가마솥이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에 팔려 나갔는데 이는 우리나라 민요에도 등장하고 있다.

울산을 비롯 경주와 청도, 밀양지역에 걸쳐 약 250여곳의 야철유적이 땔감이 풍부하고 물이 있는 산간계곡에 남아있다. 흔히 쇠부리터로 불리는 이 야철유적에서의 토철제련은 일제시대 초까지 있었고 이 제련에서 생산된 우수한 철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야와다(八幡)제철소에 군납용으로 납품되었다.

사실 일본은 이 울산의 달천철장에서 생산된 철로 세계2차대전을 치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달천의 철은 품질이 우수했다. 달천의 철만이 일본의 총기류 내부강선(內部鋼線)용으로 쓰였다 전한다.

달천의 철은 황비철(黃砒鐵) 성분이 섞인 자철광이다. 황비철은 철에 비소(AS)성분이 든 것이다. 이 비소성분은 달천철광만의 특유의 성분으로 이 비소가 다른 철산지의 철과 달천철을 구분하게 한다.

일본의 고대유적에서 발굴되는 철유물들에서도 비소가 검출되었다. 1992년 일본 신일본제철사에서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 고대철유물들마다 비소가 다량 발견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철산지는 비소와 무관하며 비소의 철은 한반도 울산 달천의 것이 분명하며 이 철이 철정(鐵鋌)형태로 건너온 것이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등장하는 변진의 철은 바로 울산 달천철장의 철이기도 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석탈해는 단야족(鍛冶族)이라고 했는데 단야족은 야철세력을 의미한다. 석탈해는 철기술을 바탕으로 사라벌에 입성해 왕이 됐는데 그 철은 바로 이 울산의 달천철장(達川鐵場)의 철이다. 이는 최근 달천철장 일원에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단야족의 유구로도 확인된다.

석탈해는 다파나국 출신으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데 그 다파나국은 왜국(대마도)의 동북 1천리라 했으니 다파나국은 바로 울산이다. 그외 여러 사실로 미루어 보아 신라 4대 석탈해왕은 울산출신임이 틀림없다. 석탈해 이후 150년간 신라석씨왕조가 열리니 울산세력들이 신라왕이 된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달천철장은 지금 날로 파괴되어가고 있다.

택지지역으로 지정되어 그 정지작업이 바삐 이뤄지고 있다. 옛날 지하 250미터에 이르던 수직갱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매립과 합께 주변 어디에서도 광산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울산인들의 문화적 무관심이 달천철장을 파괴하고 있다.


2000년 12월 일본제철학회의 교수들과 학자들이 연명으로 울산시에 탄원서를 보내왔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울산광역시 시장 귀하

달천철광산 보존 요망서

일본히로시마대학 문학부 고고학연구실 야철연구회 회장 시오미(히로시마대학 명예교수)

謹啓

시장님께서 늘 건강하시며 안녕하실 줄 믿습니다. 초면에 실례를 무릅쓰고 글을 올리는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고대야철을 연구하는 단체로 일본학술회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듣자니 귀市의 도시계획에 의거해 달천철광산이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합이다. 달천철광산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을 포함한 고대 동아시아의 고대국가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철생산지입니다. 당시의 철 생산과 유통을 고찰함에 있어 이 광산은 예사로 소중한 유적이 아닙이다.
이런 귀중한 유적을 귀市의 도시계획과 공존시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급히 보존요망서와 보존요망서명부(연명부)를 첨부해 올리오니 배려하시어 보존토록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끝으로 귀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첨부된 연명부에는 시오미 회장외 타대학 교수등 일본 전국의 야철연구회 회원 40여명이 서명했다.

이토록 소중한 국제문화재가 무참히 사라져 가는 것은 울산지도층과 관련학계의 무관심, 시민들의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울산쇠부리의 원류 달천철장(達川鐵場)이 보존되도록 시민들이 뜻을 모으고 당국은 도시계획을 변경해야 한다.

달천철장 시내에서 먼 곳이 아니다. 북구 농서초등학교 뒤에 있다. 농소 쌍용아진아파트 뒷길로 올라가면 바로 이 달천철장을 내려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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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양 킴(Kim)의 기원 사카(Saka)의 금륜왕(金輪王)

글쓴이 : 자유겨레

날짜 : 08.08.27

조회 : 187

 

    동 서양 킴(Kim)의 기원 사카(Saka)의 금륜왕(金輪王) 아소카왕(BC 262~220)의 팔리어 자료 Kimbila, Kimila, Kimmila Kimsīla kimatta, Kimsuka... Kimsila Sutta: Translated from the Pali( Sutta Nipàta) venerable Anuruddha: Venerable Nandiya and venerable Kimbila (. Cålagosingasuttaü)
   
샤카족 왕족으로 분류된 킴( Kim)씨 기록은 팔리어 자료이다. 세존 당시의 2500년의 상황을 당시의 마가다 표준어로 기록한 것이다. 유러피언 Kim의 존재를 탄생시킨 사카족 Kim이라는 이름이 Old Norse지역에서 유래했다면 그것은 바이킹과 켈트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영국에서는 아일랜드.웨일즈,브레톤,코니시지역이고 독일과 스칸디나비아를아우르는 지역이지요. 이들의 조상은 키메리언 khimerian이라 불리는 코카서스 스키타이족으로 보고 있으나 사실 스키타이는 사카(saka), 중국에서는 색(
)족이라 불리웠던 B.C3천년 이전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을 그 선조로 봅니다. 이들은 흑해연안에서 우랄동쪽까지 안드로노브문화공동체를 유지했던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들로 알려져 있기도합니다
   
문제는 이 색족 즉 사카족이 인도-이란어 계통의 종족이었느냐 아니면 중앙아시아 몽골리언 의 혼혈이었느냐가 고고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Kim) 발음 동양과 서양 인도에서 공통발음 왜 김(
)씨를 발음 그대로 금()으로 발음하지 않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다시말해 Kim이 있었고 그것을 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가설은 지역명에 있어서도 김해(金海)와 금마군(金馬郡)의 발음상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닌가 합니다. 다시 말해 Kim계열이 존재했던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별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지요. 신라 가야 샤카족 전통의 계승노력 신라: 가이성참석종(加以姓參釋種) 편두거매금지존(偏頭居寐錦至尊) 어습범음 (語襲梵音)탄설족다라지자(彈舌足多羅之字) : 게다가 성()마다 석가의 종족에 참여하여 편두인 국왕 같은 분이 삭발하기도 했으며, 언어가 범어(梵語)를 답습하여 혀를 굴리면 불경의 글자가 되었다........ 가야: 고대국 건국신화에서 유독 가락국만이 그 건국이 불교와 관련지어진다. 수로왕은 건국한 다음해에 궁성터를 찾아다니다가 신답평(新畓坪)이란 곳에 이르러 이 곳은 비록 땅은 좁지만 16나한과 7성이 살 만한 곳이어서 궁성터에 적격이라고 말한다. 가락국을 일명가야국이라고 하는데, 가야란 말은 인도어로서 불교와 관련이 된다.
   
샤카족의 정신문화 세계민족의 통합 우주가 소멸해도 자기행위의 정보는 소멸하지 않는다. 시 공간이 바뀌더라도 반드시 자기가 받게된다.(자기자제와 통제) 창조주와 창조주 위의 존제들을 포함한 신의 윤회에 대한 가르침이다. 자타카(윤회전생)의 가르침을 통한 생명의 존중과 자유주의 원천이다. 우주의 팽창과 수축의 수 많은 기간을 고찰해보면, 수 많은 생명들 중에서 부모 형제자매 자식이 아닌자가 거의 없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민족 차별을 넘어서는 진정한 세계민족을 통합할 정신문화의 기반입니다. 최초의 통치자는 주민들의 직접 참여로 지배자를 선출하는 직접 민주주의 시초이며 그 최초의 통치자를 민주왕(
民主王)이라 하였다. 최초의 인간사회의 발달함에 따라 구성원들 간에 갈등이 발생하자 제일 먼저 정치집단이 발생하였다. 그 다음으로 필요성에 의해 종교집단이 발생헸다. 샤카족 사회는 제정분리의 사회였으며, 사람들은 신분이 아닌 직업에의해 구분되었다. 샤카족의 정신과 문화에서 그리스 로마의 자유정치가 탄생하였다. 동 서양 샤카족의 대 통합(대 몽골리안 ) 많은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Kim이라는 존재를 탄생시킨 사카족이다. Kim이라는 이름이 Old Norse지역에서 유래했다면 그것은 바이킹과 켈트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명확합니다.영국에서는 아일랜드.웨일즈,브레톤,코니시지역이고 독일과 스칸디나비아를아우르는 지역이다. 인도-이란어족의 주요 유전자적 구성에서 인도북부 즉 사카족의 본류라 할 수 있는 지역의 종족에서 서쪽 보다는 중아아시아나 동아시아인의 유전적 영향이 선사시대로 소급해 우세하다는 보고가 2003 11 European Journal of Human Genetics 지에 발표되었다
    이스라엘인종의 기원과 몽골인의 캐릭터 Researches Into The Ethnic Origins Of Israel by C. F. Parker, B.A., page 37: “It must be confessed that they (the Hittites) were not a handsome people. They were short and thick of limb, and the front part of their faces was pushed forward in a curious and somewhat repulsive way. The forehead retreated, the cheekbones were high, the nostrils were large, the upper lip protrusive. They had, in fact, according to the craniologists, the characteristics of a Mongolian race. Like the Mongols, moreover, their skins were yellow and their eyes black. They arranged the hair in the form of a ‘pigtail’, which characterizes them on their own and the Egyptian monuments quite as much as their snowshoes with upturned toes. In Syria they doubtless mixed with the Semitic race, and the further south they advanced the more likely they were to become absorbed into the native population. The Hittites of Southern Judah have Semitic names and probably spoke a Semitic language. Kedesh continued to bear to the last its Semitic title, and among the Hittite names which occur further north there are several which display a Semitic stamp.” (If one  could observe one  of Esau’s wives today, she probably would look somewhat like an Albanian Turk.) 이스라엘인종의 기원를
추적했던 성경고고학자 파커는 그의 글에서 이집트와 히타이트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몽골인의 캐릭터에 무척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난다.
    BC 2
천년경이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새로운 유형'(new Type) At any rate foreign brides were entering the royal harem, and the exclusive traditions of Egypt were being set at defiance. Senusert II had a favourite wife called Nefert, "the beautiful", who appears to have been a Hittite. Her son, Senusert III, and her grandson, Amenemhet III, have been referred to as "new types". 1 Their faces, as is shown plainly in the statuary, have distinct non-Egyptian and non-Semitic characteristics; they are long and angular--the third Senusert's seems quite Mongoloid--with narrow eyes and high cheek bones. There can be no doubt about the foreign strain. EGYPTIAN MYTH AND LEGEND With Historical Narrative, Notes on Race Problems, Comparative Beliefs, etc. by Donald Mackenzie Gresham Publishing Co., London p. 235 서기전 1800년경 이집트를 정복했던 히타이트의 힉소스이래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새로운 유형'(new Type)이 등장했고 그들은 분명히 셈계통이나 지중해, 아프리카 계통이 아니라 몽골로이드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참고 자료 붓다의 탄생지 네팔동부(몽골리언 산악인) 고다마 붓다의 몽골리언 설을 지지하는 또 한사람의 학자는 붓다가 구르카출신 (몽골리언 산악인)임을 여러모로 입증하는 '라이 짐마달'(Rai-Zimmdar)입니다. 짐마달은 고다마붓다가 인도북부출신이라는 점에서 네팔동부출신임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는 '구르카의 전설'(The Legend of the Gurkhas)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It is true that ancient and medieval  Nepal, particularly eastern Nepal, claims to possess considerable literature of historical significance but, most of them treat mythology and early history in the same spirit which leaves onl y a rather confused list of names of dynasties and kings.
고대와 중세에 네팔동부인들이 풍부한 역사성을 갖는 문학작품들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대부분 그것들은 신화와 고대의 정령들에 관한 것인데 왕들과 왕조에 대한 모호한 기록으로 인해 혼란스럽기는하다. The Kirati tribe of eastern Nepal, who are today generally identified as the Rais, Limbus, Yakkhas and Lepchas consider themselves to be some of the pre-brahminic peoples. 동네팔의 키라티부족은 현재 라이스,림부스,야카스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자신이 브라만시기 이전 사람들 (
아리안침입이전)이라고 생각한다 Of all these tribes, the Rais used to maintain elaborate dynastic accounts in manuscripts known as “Bangsawali”, and according to these accounts, they settled down in Nepal in the 15000th year of the Dwaper Age. (Kali Age, the present age,followed Dwaper in mythological reckoning, some 8000 years ago). 이중에서 라이스부족은 '방사왈리'(Bangsawali)라는 기록을 인용해 자신들이 15천년째 드와파 년에 그곳에 정주했다고 한다. 15천년 드와파 연대를 칼리연대와 현재력으로 계산해 보면 8천년전이다. Indian mtDNA gene pool 인도-이란어족의 주요 유전자적 구성에서 인도북부 즉 사카족의 본류라 할 수 있는 지역의 종족에서 서쪽 보다는 중아아시아나 동아시아인의 유전적 영향이 선사시대로 소급해 우세하다. (2003 11 European Journal of Human Genetics) The Indian mtDNA gene pool appears to be more closely related to the east Eurasian gene pool (including central, east and southeast Asian populations) than the west Eurasian one  (including European and Caucasian populations). ==> 인도인의 DNA유전자 풀은 유러피언이나 코카서스서쪽보다 유라시안동쪽에 (중앙아시아,동아시아, 남아시아를 포함) 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다. Within India, northeastern tribes are quite distinct from other groups; they are more closely related to east Asians than to other Indians. ==> 인도내에서 북동그룹 종족은 다른 그룹과 분명히 다른 차별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보다 더 동아시아인에 가까이 관련되어 있다.

http://www.breaknews.com/bbs.html?Table=ins_bbs8&mode=view&uid=11179&page=21

2003. 9. 월간조선(글쓴이:金 秉 模)
김병모(金秉模) 考古學 여행 ① 그리스-알타이-신라를 이어 준 汗血馬의 질주

新羅의 신화·알타이의 눈보라·무덤 속의 女戰士·曲玉·금관·積石목곽분·싸랑·솟대·샤먼…
그 속에 감춰진 우리의 原形과 만나다
民族의 뿌리를 찾아서

비로소 피부로 접한 알타이 文化

알타이는 산 이름이다. 동시에 산맥 이름이며, 그 주변 지역의 이름이다. 중앙아시아 내륙지방의 고원지대에 알타이산이 솟아 있고 알타이 산맥이 東西로 흐른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카자흐인, 퉁구스인, 브리야트인, 에벤키인, 야쿠트인, 몽골인 등이 넓은 의미의 알타이족들이다. 이들의 각종 언어는 모두 알타이어족에 속하며 한국어와 일본어와도 깊은 親緣(친연) 관계에 있다.

나의 알타이에 대한 관심은 박시인 교수가 소개한 알타이 신화 때문이었다. 朴교수는 알타이 지역을 답사해 보지 못한 채 2차 자료만 가지고 알타이 문화를 소개하였지만, 그 내용에는 한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 수두룩하였다. 이를테면 영특한 새로서 까마귀의 기능이라든지, 씨족의 조상이나 최초의 왕이 등장하는 장소가 「신령스러운 나무(神樹)」 밑이라는 것 같은 내용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三足烏(삼족오)나, 鷄林(계림:경주)에서 발견되는 김알지 설화 같은 것이었다. 그런 내용을 읽어 가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어는 알타이 계통의 언어다. 왜 가까운 중국어와 비슷하지 않고 저 멀리 알타이와 가깝단 말인가? 이런 소박한 의문에 대한 역사적·인류학적 해답이 없던 시절은 의외로 오래 계속되었다. 1990년 이후 러시아가 문호를 개방하고 나 같은 인문학 연구자들이 광활한 시베리아와 스텝지대를 자유롭게 탐사할 수 있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글자로만 접하던 알타이 문화를 피부로, 肉聲(육성)으로 만날 수 있었음은 참으로 커다란 행운이었다.

스키타이 女戰士의 모자

알타이 남서쪽에 살고 있는 카자흐족의 민속신앙에 위대한 샤먼의 탄생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즉, 아기를 낳고 싶은 여인이 커다란 나무 밑에서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다. 그 간절한 소원이 하늘의 절대자에게 전달되면 새들이 날아와 나무 위에 앉는다. 그러면 그 여인이 잉태한다. 엑스터시 과정이다. 그런 과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커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 나무 - 새- 엑스터시 잉태- 위대한 샤먼의 탄생이라는 圖式이다. 그래서 알타이 문화권에서 태어난 유능한 지도자는 모두 아버지가 없다.

한국사에서도 탄생과정이 신화로 처리되어 있는 사람이 씨족의 始祖(시조)나 왕으로 등장한 경우가 많다.

신라의 朴赫居世(박혁거세)와 김알지의 부모가 불분명하고, 昔脫解(석탈해)와 金首露(김수로)도 누구의 후손인지 모른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동쪽 이시크(Issyk) 고분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경 사람인 스키타이 여자 戰士(전사)는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의 디자인과 똑같아서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알타이에 발굴되어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은 여자 귀족의 높이 올린 머리장식에서 금으로 만든 새가 여러 마리 달려 있어 솟대에도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음을 보여 준 사실이다.

신라 자비마립간의 여동생인 鳥生夫人(조생부인)은 이름도 새가 낳은 부인이라는 뜻이지만 그 여인의 직업도 의례를 관장하는 祭官(제관)이었다. 신라와 유사한 민족구성과 문화양상을 지닌 弁辰(변진)에서 大家(대가)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고 한다(魏志 東夷傳).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인 실물로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 조각품에 나무 위에 새들이 앉아 있는 것들은 한둘이 아니고, 경주 瑞鳳塚(서봉총)에서 발굴된 신라 금관은 여성용이었는데, 머리 부분에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었다. 하늘나라로 영혼을 인도하는 새들임에 틀림없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역사 속의 새는 아마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해(太陽)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일 것이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 형식은 積石墓(적석묘·Cairn)로서 기마민족의 전통이다. 통나무집에다 시신과 부장품을 집어넣고 막돌로 둥글게 덮는 모양이다. 그 문화를 스키타이-알타이式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된다. 금관의 제작시기는 5~6세기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金씨계 인물들이다.

金씨계의 조상은 김알지이다. 그는 계림에서 발견한 상자 속에 있던 어린아이였다. 같은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도 하늘에서 날아온 말이 놓고 간 알(卵)에서 탄생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한국의 신화체계는 하늘에서 成人(성인)으로 내려와 통치자가 되는 고조선의 桓雄(환웅)이나 부여의 解慕漱(해모수)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알이나 상자(櫃)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전자를 天孫(천손)신화라 부르고 후자를 卵生(난생)신화라고 부른다. 아시아에서 천손신화는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알타이, 몽골족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농경민족인 대만의 빠이완족, 타이족, 자바족, 인도의 문다족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즉 천손신화는 北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족들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南아시아의 농경민족들의 신화이다.

漢字로 금(金)이라는 뜻은 「쇠(鐵)」의 뜻과 「순금」의 의미도 있지만 역사에 등장한 신라 김알지로 시작되는 「김」은 순금의 뜻이다.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김(金)이라는 말의 뜻이 기마민족의 언어인 알타이어로 「금(Gold)」이라는 뜻이다. 멀리 터키어에서부터 퉁구스어, 브리야트어, 몽골어에 이르기까지 알트, 알튼, 알타이 등이 모두 알타이어족의 공통적인 의미로 금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라 金氏族들은 일단 알타이 문화지역 출신이라는 심증은 충분하다.


신라인의 이중 구조: 북방+남방族

신라 金씨의 조상인 김알지의 이름도 알타이 계통 사람이라는 암시로 여겨진다. 알지-알치-알티로 어원 추적이 가능하므로 김알지의 이름은 알타이 출신 金씨라는 뜻으로 Gold-Gold라는 뜻이 중복된 흥미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김알지가 알타이 계통의 인물이라는 것은 그의 탄생설화가 얽혀 있는 곳이 鷄林(계림)으로 알타이적인 영웅탄생에 나무(神木)와 직결되어 있고, 그의 후손들의 무덤인 경주의 신라 왕족들의 積石木槨(적석목곽) 형식의 무덤들은 북방 기마민족들의 매장 전통을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김알지는 계림에서 발견된 상자 속에서 동자의 모습으로 발견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상자 속에서 동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난생신화의 구조이다. 나무, 즉 神木에서 주인공이 태어난다는 내용은 분명히 기마민족인 알타이적 천손신화인데, 정작 태어나는 순간은 남방 농경민족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으로 분장되어 있다.

왜 그럴까?

기마민족이면 떳떳하게 기마민족식 (알타이 민족의 신화인 하느님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天孫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하지 못하고 왜 구차하게 농경인들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처럼 탄생하였다고 꾸며져 있을까? 여기에 초창기 신라의 통치계층 인구들의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경주지방에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인 인구가 살고 있었다. 이는 경주 지역의 수많은 고인돌이 증명하고 있다. 그 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소수의 기마민족이 이민 왔다.

신라인들은 삼국지 위지 東夷傳(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辰韓(진한)족이다. 중국 서북쪽의 秦(진)나라에서 노역을 피하기 위하여 이민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다수의 토착 농경인들 위에 통치자로 군림하기에는 인구가 모자랐다. 하는 수 없이 여러 代(대)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드디어 미추왕(麻立干) 때 처음으로 金氏系 인물이 최고통치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때 소수의 기마민족 출신 金氏系 인물이 다수의 농경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농경인들처럼 난생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분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궤짝 속에서 동자로 발견된 주인공이 북방계 토템인 신령스러운 나무, 즉 계림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꾸몄을 가능성이 짙다.

현대에 와서도 각종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후보자가 평소 믿지도 않던 불교의 부처님 點眼式(점안식)에도 참석하고, 한 번도 가 보지 않던 시장에 가서 아주머니들의 손을 붙잡는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치권으로 부상하려는 사람들이 별의별 변신방법을 다 동원하는 현상은 똑같다.

알타이 고분에서 미라로 발견된 동양계 여인의 盛裝한 모습에서 올린 머리에 장식된 순금제 새들이 있다. 이 새들도 주인공의 탄생과 죽음에 깊이 관여하였던 영혼의 새들로서 여주인공의 혼을 天上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신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관의 이마 부분에 커다란 새의 날개 한 쌍(鳥翼形 裝飾)이 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고대인의 영혼관이다.


南아시아적 생활+北아시아적 정신

얼마 전까지 나에게는 큰 근심이 있었다. 내가 대표로 되어 있는 유네스코 산하 국제박물관협의회(ICOM·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의 한국지부에서 세계총회를 서울로 유치하는 데 성공한 뒤였다. ICOM 총회는 3년에 한 번씩 개최되며 한 번은 박물관 문화가 일찍 발달한 유럽에서 다음 한 번은 非유럽 국가에서 개최해 왔다.

ICOM의 회원국은 145개국이고 등록회원수가 평균 1만7000명이다. 총회에 참석하는 인원은 평균 2000~2500명으로 주최도시가 얼마나 문화적 흡인력이 있느냐가 최대의 관건이고, 주최 측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홍보하느냐에 따라 참가인원이 크게 달라진다. 2004년의 서울 대회는 ICOM 100여 년의 역사상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행사인 만큼 세계의 수많은 박물관 전문가들이 지대한 관심을 표해 오고 있어서 어느 대회보다 큰 규모의 행사가 될 전망이다.

그런데 세계대회를 하려면 본부 집행위원회가 인정하는 로고를 디자인하여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준비위원들은 지난 몇 달 동안 고민을 하였다. 아시아에서 처음 하는 행사이니까 로고의 내용을 아시아인 공통의 상징으로 할까, 아니면 서울市에서 개최하니까 서울의 상징인 북한산, 청와대, 남대문에서 로고를 딸까. 또는 이번 대회의 주제가 무형문화재이니까 탈춤이나 사물놀이를 내용으로 하느냐를 놓고 갑론을박하였다. 사람마다 주장이 그럴듯하고 어느 아이디어 하나 버릴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위에 열거된 상징들은 이미 다른 행사에서도 한두 번 이상 사용되었음직한 것들이라는 공통성이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명언이다. 한국 토착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유산으로는 농경문화의 상징으로 고인돌이 있고, 北아시아인들의 敬天(경천)사상을 상징하는 솟대(Totem Pole)가 있다. 한국에 수만 개나 남아 있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중에 나타난 南아시아 지역의 벼농사 기술자들 사회의 매장풍속이다. 반면에 솟대는 알타이, 야쿠티아, 바이칼, 몽골 지역 사람들의 神鳥思想(신조사상)이 그 뿌리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국인의 경제방식은 南아시아적인 농경생활이었다. 그러나 정신세계는 北아시아적인 敬天사상이 지배해 왔다.

솟대 위에 앉은 새는 지상의 인간들이 하늘에 계신 절대자를 향하여 祈福(기복) 행위를 할 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媒介者(매개자)이다. 그래서 端午祭(단오제) 때 솟대를 세우고 솟대 위에 새를 깎아 앉힌다. 새가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神鳥사상이 퍼져 있는 알타이 문화권 전역에서 고루 발견된다. 카자흐족, 퉁구스족, 위구르족, 브리야트족, 몽골족, 한국, 일본의 민속이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는 반드시 새가 등장한다.


솟대를 로고로 채택한 까닭

중국 고전 山海經(산해경)에 기록된 少昊國(소호국)에서는 모든 공경대부가 새(鳥)일 만큼 새들은 東아시아의 신화 속에서 중요한 주인공들이다.

신라 金氏 왕들의 조상인 김알지가 계림에서 발견되었을 때 온갖 새들이 노래하였다고 하며, 고구려 고분벽화의 태양 속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가 있음은 너무도 유명하다.

일본 古墳時代(고분시대)의 벽화에는 死者(사자)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船)의 항해사로 새들이 앉아 있다. 나라(奈良)의 후지노키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에는 십여 마리의 새들이 앉아 있다. 일본 神祠(신사)의 입구를 지키는 도리(鳥居: 門)도 새들이 앉는 곳이다.

이 모두가 알타이 문화권의 오랜 전통으로부터 현대 민속으로 계속되고 있는 솟대의 원형들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神鳥사상은 뿌리가 깊은 것이고 동북아시아 전체에 흐르고 있는 문화의 맥이다.

한국적인 것이 틀림없지만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도도히 흐르는 문화의 저류를 민속행사에 등장하는 솟대를 통하여 실감한다. 이처럼 새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있는 중요한 토템이자 東아시아 여러 민족의 공통적 토템이기에 아시아에서 처음 개최되는 세계 박물관 총회에 로고로 사용해도 격조에 맞을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로고는 단오제의 솟대를 기초로 하여 도안되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르기 직전의 흰색 오리 두 마리가 앞뒤로 앉아 있는 모습이 탄생하였다. 최선호 화백의 작품이다.

알타이산 북쪽은 고원지대로서 예니세이江의 발원지이다. 옛날부터 유목민들이 양(羊)을 기르며 평화롭게 살고 있는 땅인데 철기문명이 확산되면서 여러 민족이 드나들게 되었다. 지금 이 지역의 주민들은 러시아의 영향으로 백인들과 황인종이 섞여 있지만, 옛날에는 아시아계 몽골족 들이 이 땅의 주인이었다.


알타이 기사의 부적-曲玉의 의미

그 증거는 그림으로 남아 있다. 루덴코라는 학자가 이 지역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2500년 전에 만들어진 고분들을 발굴하여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이 보고서는 1953년 러시아어로 출판되었고 1970년에야 영어로 번역되었다.

필자가 이 고분들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적석목곽묘이었기 때문이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보다 시간적으로는 약 900년 가량 빠른 것들이지만, 어쩌면 그렇게 구조가 같은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즉, 통나무집에 사람과 유물이 들어 있고 그 위에 막돌을 두껍게 덮어 놓은 형식이다.

어느 민족이든 고분 구조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좀처럼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고분의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은 주인공들이 생전에 유사한 사유세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어쩌면 종족적인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신라인과 파지리크人과의 관계에 대하여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다. 파지리크 5호 고분에서 나온 물건 중 통나무집 벽에 걸어 놓았던 모직 담요 펠트(Felt)가 있다. 수놓아 그린 그림에 두 사람이 보인다. 왼쪽 사람은 의자에 앉았는데, 동양인 얼굴에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이고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발굴자는 이 사람을 여성으로 보고 있다. 머리에는 가죽 같은 재질로 만든 관을 쓰고 있다. 왼손에 구불구불한 가지가 많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어서 직업은 샤먼(巫師)이라고 해석되었다.

오른쪽 사람은 말 위에 앉은 남자 기사인데 튜닉형의 半두루마기를 입고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감아 올린 아랍인 型이다. 목 뒤로 날리는 스카프로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말은 다리가 긴 아라비아 계통의 말로서 옛날 漢(한) 武帝(무제)가 흉노를 격퇴하기 위해 간절하게 원했던 汗血馬(한혈마)이다.

두 사람 중에 샤먼은 크게 그렸고 기사는 상대적으로 작은 비례로 그려져 있다. 고대 그림 기법으로 지체가 높은 사람은 크게, 낮은 사람은 작게 그려진 것을 감안하면 동양계 여인이 그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주인공임을 알 수 있고, 아랍인 기사는 아마도 멀리서 온 방문객이거나 용병쯤으로 해석된다.

내가 이 그림에서 눈여겨본 부분은 말에 달려 있는 曲玉(곡옥)이었다. 곡옥은 굽은 옥으로 커다란 머리와 가는 꼬리로 구성되고 머리 부분에 구멍이 뚫려 끈을 꿰어 매달 수 있는 장신구이다. 대부분 푸른 玉 제품이고 때로는 金製 또는 石製도 있다. 신라 왕족의 금관, 목걸이, 허리띠에 여러 개 달려 있어서 신라미술품 연구에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다.

신라 왕족들이 왜 曲玉 장식을 좋아했는지, 왜 曲玉이 동물의 태아 때 모양을 하고 있는지, 사람마다 제각기 의견들을 제시하였다. 어떤 이는 맹수의 발톱 모양이니까 유능한 사냥꾼의 장식이라고 그럴듯한 해석을 하였고, 또 다른 이는 초승달 모양이므로 月神(월신)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철학적 해석을 시도한 적도 있다. 어느 의견도 1970년에 나온 S. 루덴코의 파지리크 보고서를 보지 못하고 내린 추측들이었다.

한국고대사에서 曲玉은 신라, 가야에서만 유행하였다. 고구려, 백제에서는 인기가 없는 디자인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曲玉의 의미를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데, 한국 문화의 영향권 안에 있던 일본 이외의 외국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었으므로 비교연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추측성 의견들만 난무하였었다.

파지리크의 曲玉은 기사가 탄 말의 가슴에 한 개, 콧잔등에 한 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보고서의 그림으로는 그 색깔이 코발트색으로 그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이 바뀐 레닌그라드의 에르미타지(Hermitage) 박물관에서 내가 본 실물은 신라의 曲玉과 같은 색인 초록색에 가까웠다.


신라와 그리스는 馬로 연결

曲玉의 의미는 지루한 추적 끝에 生命(생명)의 상징이라고 결론이 났다. 그리스에서는 이런 모양의 장식을 가지(Egg Plant)라고 부르고, 씨(種)를 잘 퍼뜨리는 열매로 규정하고 있다. 신라에서 왕으로 등장한 사람의 친부모의 금관에서만 曲玉이 달려 있는 현상도 曲玉의 의미가 多産(다산)과 관계 있는 것으로 쉽게 이해된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곡옥으로 장식한 말을 타고 있는 남자가 파지리크가 있는 알타이 지역의 원주민인 몽골로이드(Mongoloid)가 아닌 이란-아랍계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2500년 전 알타이 지역을 방문한 아랍계 기사는 누구인가? 혹시 黑海(흑해)지역에서 맹주 노릇을 하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족은 아닐까.

그리스와 교역하며 화려한 그리스 문화에 눈이 부셔 엄청난 생필품을 주고 그리스의 금·은·옥 제품을 다량으로 구입하던 바로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후에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투스가 만난 용맹하고 민첩한 스키타이족이었다면 그 사람의 말에 장신구로 달려 있는 曲玉은 그리스에서 처음 디자인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고 보니 신라 유물 중에 동물 뿔 모양의 술잔인 角盃(각배)도 그리스, 스키타이, 알타이 지역에서 고루 발견되고 경주에서 발견된 기와에 그려진 날개 달린 天馬(천마)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페가수스(Pegasus)라고 해석해야 될 판이다. 그렇다면 신라인과 그리스인은 비록 時空을 달리하였지만 스키타이-알타이를 통한 말의 문화로 단단히 연결되었던 것 같다.

이쯤 되면 나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도대체 고고학이라는 학문은 고금의 동서양을 떠도는 이상한 구름에서 문득문득 내리는 비와 무지개를 찾는 작업인 듯하여서이다.

에르미타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의 주인공인 기사여, 그대는 왜 푸른 곡옥으로 장식한 말을 타고 오셨는가? 파지리크에 왔더니 그곳 샤먼이 선물로 알타이 원산의 옥으로 깎은 曲玉을 부적 삼아 선물로 준 것인가?


이시크의 적석목곽묘에서 발견된 女戰士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인 알마티 동쪽으로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이시크(Issyk) 호수가 있다. 중국의 天山山脈(천산산맥)의 한 자락이 남북으로 달리는 끝자락에 스키타이 마지막 시기의 고분군이 있다. 이 지역은 고도가 높아서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만년설이 녹은 물이 흘러내려 이시크澔로 들어간다. 스키타이 왕족들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땅에다 조상을 모셨다.

이시크는 알타이 남쪽 天山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있다. 현재는 카자흐스탄의 영역이고, 옛날에 스키타이족의 마지막 활동 무대이다.

스키타이 문화는 BC 8세기부터 BC 3세기 사이에 꽃피웠는데 이시크 시기는 BC 3세기에 해당된다. 알타이산의 북쪽 고원인 파지리크 문화보다 약 3세기 늦은 시기이다. 이시크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쿠르간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 몇 개를 러시아系 카자흐인 고고학자 아키세브 교수가 발굴하였다.

유물로는 순금 장식으로 덮은 갑옷을 입은 청년 戰士(전사)가 발견되어 「황금인간」이란 별명이 생겼다. 이 황금인간은 최근 프랑스 과학자들에 의하여 17세 전후의 여성으로 판명되어 또 한 번의 충격을 주었다. 남성 중심의 기마민족 사회에서 최고 통치자급의 의상과 유물을 갖고 있던 사람이 여성이라면 이 여성의 생전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실로 많은 연구과제를 던지고 있는 인물이다.

알타이 지방의 여러 곳을 탐사하던 중 알아낸 귀중한 한마디 말이 바로 「사랑」이란 단어의 뜻이다 한국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자 모든 유행가 노랫말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말의 뜻은 의외에도 알타이 언어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었다. 알타이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로 세계적인 악명을 날리고 있다. 몽골 루트, 시베리아 루트, 중국 루트가 있는데 필자는 몽골·시베리아 루트는 과거에 탐사하였고 마지막으로 중국 루트를 탐사하게 되었다.

1996년 여름, 모험심에 가득 찬 소년들처럼 동문 임상현, 김두영, 김명용 제씨가 필자와 함께 항공편으로 실크로드(비단길)의 오아시스인 신강 위구르족 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에 도착하였다. 전세 낸 9인승 마이크로 버스에 몸을 싣고 북쪽으로 800km나 펼쳐진 중가리아 사막을 17시간이나 걸려 건너갔다

알타이는 산의 이름이다. 알타이산에서 동쪽으로 내달리는 산맥 이름이 알타이 산맥이고, 그 북쪽의 고원지대가 알타이 지방이다. 알타이라는 말은 금(Gold)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알타이 산맥 중에 해발 4974m의 만년설을 머리에 쓴 友誼峰(우의봉·중국식 이름) 밑에 마을이 있었다. 하늘 아래 첫 번째 마을이었는데, 이름도 아르타이(阿勒泰)이다. 그곳에서 알타이어를 사용하며 살고 있는 유목민 카자흐족 마을에서 인류학 조사를 하던 중 듣게 된 이야기가 바로 사랑 이야기이다.

유목민들에게는 귀한 손님에게 부인을 하룻밤 빌려 주는 풍습이 있다.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주인 남자는 부인을 텐트 속에 남겨 둔 채 집을 나가는 풍습이다. 인류학 용어로 貸妻婚(대처혼)이다. 어느 날 카자흐족 마을에 중국인 畵家(화가) 한 사람이 오게 되었다. 그 마을의 絶景(절경)인 깊은 계곡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였다.



밤이 되자 카자흐족 남편은 손님 대접을 잘 하려는 풍습대로 텐트 속에 손님과 자기 부인을 남겨 둔 채 집을 나갔다. 남겨진 두 남녀는 좁은 텐트 속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두 남녀의 잠자리 사이에는 베개를 하나 놓아 도덕적인 경계를 삼았다. 아무도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은 채 며칠이 흘렀다.

하루는 벼랑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손님에게 여인이 間食(간식)인 양젖을 가져왔다.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 여인이 쓰고 있던 실크 스카프가 그만 바람에 날려 깊은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유목민에게 실크는 비싼 보석을 주고 중국에서 수입한 귀중품이다. 실크로드라는 경제용어가 있으니 알 만한 일이다.

아악! 여인의 비명 소리에 사정을 알게 된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수십 길의 벼랑을 기어 내려가 스카프를 주워다 여인에게 주었다. 그 순간 여인이 기이한 소리로 절규하는 게 아닌가.

『싸랑! 싸랑!』 소리를 지르며 손에 쥐어 준 스카프를 다시 골짜기 밑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이었다.


싸랑-무정한 바보

싸랑. 그 의미는 「무정한 바보」라고 한다. 손님은 자기에게 싸랑이라고 소리친 카자흐 여인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을까.

우리 탐사 단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현지 안내인의 설명이 걸작이었다. 한 뼘 높이의 베개도 못 넘는 남자가 어떻게 수십 길 아래의 벼랑 밑까지 내려갔다가 기어서 올라올 수 있느냐는 의미의 바보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 기마민족의 동질성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40代의 카자흐 族長(족장) 아들과 한국인 탐사대원들은 양젖과 馬腸(마창: 말 순대)을 안주 삼아 경쟁적으로 독주를 마시고 대취하였다.

오래 전에 헤어진 알타이족들끼리의 혈연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듯이 경쟁적으로 산타이주(三臺酒)를 여러 병 비웠다. 수 만 리 먼 곳에서 찾아온 우리들에게 꼭 하룻밤만 지내고 가라는 카자흐인의 간곡한 청을 들어 줄 수 없었던 게 못내 아쉬웠다. 떠나오는 우리 등에다 대고 카자흐인들의 합창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싸랑! 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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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秉 模
1940년 서울 출생. 서울大 고고인류학과 졸업. 이탈리아 국제문화재연구소 및 영국 런던고고학연구소 수학. 영국 옥스퍼드大 철학 박사. 한양大 문화인류학과 교수. 안면도 고남리 패총, 二聖山城 발굴작업 주관. 1993~1995년 한국 고고학회 회장. 現 한국 전통문화학교 총장.
http://wondreams.hihome.com/temasogo_hanhyulm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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