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55> 성왕과 가야(임나) 삼총사
부제: 임나(가야) 3총사 :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
백제의 역사에는 목라근자(木羅斤資 : ? ~?)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구체적인 생몰연대는 알 수가 없지만 근초고왕·근구수왕 때의 장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에 관한 기록이 한국쪽에서는 거의 없고 주로 『일본서기』에 나옵니다. 일본에서는 '모꾸라 곤시(Mokurakonshi)'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이 당시의 말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가급적 이 말들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그는 현재의 창녕·경산·함안·합천·고령 등의 가야와 신라 지역을 공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신라의 여인을 맞아 모꾸마치[목만치(木滿致 또는 목리만치)]를 낳습니다. 모꾸마치(木滿致)는 구이신왕에서 문주왕의 시기에 활약한 백제의 유명한 대신입니다.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소가씨(蘇我氏)가 나옵니다. 천황보다 더 큰 권력을 1백여년을 장악했던 집안입니다. 그런데 이 소가씨가 바로 이 모꾸마치(木滿致)의 후예로 알려져 있죠. 모꾸마치는 개로왕의 조신(朝臣)으로 국란을 당하자 피신하여 문주왕(475~477)을 등극시켰던 사람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 천황이 모꾸마치를 일본으로 불러들였다고 하는데 그 후 백제에서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없고 『일본서기』에는 소가노마치[소가만치(蘇我滿智)]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일본 조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인물은 성씨에 차이가 있지만 이름이 같고 활약한 시기가 같은데다가 한반도에서 활약한 이후 일본으로 갔고 이후에는 일본에서만 기록이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대체로 동일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물론 소가노마치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을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가노마치의 행태를 보면 그는 모꾸마치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모꾸라곤시[목라근자(木羅斤資)]의 아들이 모꾸마치[목만치(木滿致)]였고 이 사람이 바로 『일본서기』의 소가노마치(蘇我滿智)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들의 이름들이 모꾸마치의 출신을 짐작하게 합니다. 먼저 소가노마치(蘇我滿智)의 가계를 보시죠.
소가노마치(蘇我滿智) ― 소가노가라꼬[蘇我韓子(소가한자)] ― 소가노코마[(蘇我高麗(소가고려)] ) ― 소가노이나메[蘇我稻目(소가도목)] ― 소가노우마꼬[蘇我馬子(소가마자)] ― 소가노젠도꾸[蘇我善德(소가선덕)] ― 소가노이루까[蘇我入鹿(소가입록)]
이들 소가씨 가문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후반까지 약 100여년 간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이름이 한국인을 의미하는 한자(韓子 : 한국아이), 고려(高麗) 등이 나타나고 있고 특히 소가노이루까(蘇我入鹿)의 정식이름은 소아대랑임신안작(蘇我大郞林臣鞍作)인데2) 여기서 안작(鞍作)이라는 이름은 백제계의 씨족명과 같고 씨에 해당하는 임씨(林氏)는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백제인 목귀(木貴)의 후예"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꾸마치는 475년까지는 가야지역에 남아 그 지역의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3) 그렇다면 모꾸마치 즉 소가노마치는 가야지역이 바로 자신의 영역이니 이 지역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했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의 성왕과 일본의 킨메이 천황이 유난히 이 가야지역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른 천황의 기록에서는 보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즉 가야지역 구체적으로 보면 임나 지역(금관가야 : 현재의 김해지역)에 대한 킨메이 천황과 성왕의 집착은 마치 동일인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일본의 천황이 가야지역에 대해 이만큼 집착한 예는 잘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일부(일본)에서는 킨메이 천황이 임나 출신의 왕자가 아닌가 하는 말이 돌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킨메이 천황이 소가씨의 혈통과 어떤 관계가 있을 수도 있겠군요.
6세기 당시의 가야지역은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습니다. 신라가 강성해지기 시작하자 정치관계가 더욱 복잡하게 된 것입니다.
4~5세기의 가야는 철생산이 풍부하여 여러 정치 세력들에 철을 공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삼국지』「변진(弁辰)」조에는 가야의 철이 한(韓), 예(穢), 낙랑(楽浪), 대방(帯方) 등에 까지 철을 공급된 내용이 기록되어있죠. 이것은 한편으로는 고구려, 신라, 부여(반도부여 및 열도부여) 등의 공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야는 근초고왕의 정벌 이후 전통적으로 부여계(백제, 야마토)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5세기경 고구려가 신라를 강력하게 지원함에 따라 큰 타격을 받게되었고, 6세기 경에는 신라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친신라계와 친부여계로 분열되어 가야 자체의 결속력이 매우 약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532년 법흥왕이 본가야(本伽倻: 金官國)를 병합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고 561년 신라 장군 이사부(異斯夫)가 대가야(大伽倻)를 평정함으로써 가야는 사실상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와 맞물려 6세기 이후 『삼국사기』에 줄기차게 나타나 신라를 괴롭히던 왜(倭)가 사라져 버립니다. 즉 『삼국사기』에는 500년 이후 왜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 시기에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기 때문입니다. 한창 신라의 침공으로 정신이 없는데 웬 침략을 하겠습니까?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고, 554년 백제·가야 연합군이 관산성에서 신라에 대패한 이후 대부분 가야의 소국들은 신라에 투항합니다. 6세기 중반 대가야도 신라에 멸망당합니다(562). 즉 전기가야 연맹의 수장이었던 금관가야(현 김해 지역)는 532년에 멸망하고 후기가야연맹의 맹주였던 대가야는 562년 멸망한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500년 이전의 신라를 줄기차게 공격한 왜(倭)는 일본(日本)이 아니라 경남해안 지방의 가야인 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이 시대의 왜구(倭寇)는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 남해안 지방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던 가야인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즉 가야의 멸망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력은 반도부여계입니다. 당시의 국제정세나 성왕의 심경을 알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성왕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로부터 신라는 무도하였고 식언(食言)을 하고 신의를 위반하여 탁순(卓淳)을 멸망시켰다. 옛날에는 (신라가) 우리에게 둘도 없는 충직한 나라[股肱之國]였으나 이제는 사이좋게 지내려 해도 오히려 후회하게 될 뿐이다."4)
당시 반도 부여(백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고 잃었던 한강유역을 회복해야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가야지역(임나)을 반도부여의 영역으로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가야지역은 신라와 각축을 해야했고 한강유역의 회복은 신라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되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던 것이지요. 이 상황에서 반도부여는 결국 두 지역을 모두 신라에 빼앗기게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됩니다.
성왕의 숙부인 게이타이 천황은 527년(? : 게이타이 21년) 오미노게누노오미(近江毛野臣)를 대장으로 삼아 가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지만 신라의 사주를 받은 이와이(磐井)의 반란으로 실패로 끝났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반도와 열도의 역사에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게이타이 및 그의 직계 자손들이 멸족을 당했으며 다른 하나는 금관 가야(이른바 임나)의 김구해왕은 532년에 왕자 2명을 데리고 신라에 항복하고 있습니다(금관 가야의 멸망). 일부에서는 소가씨가 이 금관가야의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을 일본의 천황으로 옹립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말입니다. 왜냐하면 부여계의 직계혈통이 아닌 사람으로 천황을 옹립했을 경우 정통성의 시비는 물론이고 당시 소가씨가 이런 정치적 상황을 무시하면서까지 천황을 옹립할 정도로 권력을 독점하지는 않았던 상황입니다. 오히려 킨메이 천황과의 연합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이 소가씨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가씨는 킨메이 천황가와 겹겹이 혼인을 함으로써 '소가씨의 시대'를 열어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킨메이 천황은 친소가씨(親蘇我氏) 계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킨메이 천황이 과연 성왕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많은 분석을 필요로 합니다.
게이타이 천황의 직계 혈족들이 몰살당했고 이후 소가씨와 킨메이의 연합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소가씨(임나)와 킨메이(야마토)를 이어주는 사람으로 성왕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따라서 설령 킨메이 천황이 성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 두 사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지지기반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세 사람 즉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을 연결하는 고리는 임나 즉 가야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마치 임나 삼총사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다시 홍윤기 교수와 고바야시 교수가 제기한 '성왕 = 킨메이 천황' 이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갑시다. 우리는 이 분석을 통해 '성왕 = 킨메이 천황'라는 가설을 밝힐 수 없을지는 몰라도 열도 부여의 역사를 보다 심도있게 이해하는 계기는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앞서 본 대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성왕과 깊이 관련되어있고 이것이 성왕과 킨메이 천황이 동일하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부분을 살펴봅시다.
임나일본부와 관련하여 특이한 점은 『일본서기』에서는 킨메이 천황조에 이른바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들이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임나일본부는 이미 그 일부를 살펴보았고 그 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던 사안이라 여기서 상세히 다룰 필요는 없지만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한일합방을 앞두고 강조하게 된 대표적인 정치적 사안이기도 합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반까지 약 2백여 년 동안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그 지배기구로서 임나일본부라는 것을 두었다는 것이 골자인데 이것을 요약 정리한 사람은 서울의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스에마쯔 야스카즈(末松保和)였지요.
우케다 마사유키(請田正幸)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부는 유라쿠 천황조에 1건이 있기는 하지만 설화적 요소가 강하여 조작으로 의심이 되고 나머지는 킨메이 천황조에 집중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우케다마사유키 교수는 제25대 부레쯔 천황 이전에 나타나는 임나 관련 기사들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선언하였습니다.5)
그렇다면 킨메이 천황, 한반도로 말하면 성왕 때에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었고 성왕 이후에는 임나일본부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기록상으로 임나문제에 관해 야마토 정권이 임나일본부에 직접적인 의사를 전달한 예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다만 백제를 통해서 의사를 표시한 예는 4회나 확인이 됩니다. 『일본서기』킨메이 천황 4년 4월, 11월, 5년 2월, 11월 등입니다.6) 즉 임나일본부는 야마토의 직속기관이 아니라 백제의 직속기관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것은 성왕이 열도에 대해 많은 일본계 관료들을 보낸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즉 이 시기에 백제 - 가야 - 열도의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체제(Communication System)가 제대로 구축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관료들이 반도와 열도로 교환 근무하였을 것입니다.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 문제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시기는 게이타이 천황 ― 킨메이 천황의 시기의 대략 50여년입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중국과 사신을 교환한 흔적이 전혀 없으며 고구려와 신라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왔지만 일본은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7) 즉 백제 - 가야 - 열도의 통치구조를 제대로 구축하려고 한 시기이기 때문에 대외적인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 성왕의 꿈은 백제 - 가야 - 일본을 연결하는 범부여 제국의 건설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남부여였던 것이지요. 만약 가야가 신라나 고구려에 넘어가게 되면 남부여는 허리가 짤리는 형국입니다. 만약 백제와 야마토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면 임나의 상실이 일본의 국가적인 과제가 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도 성왕의 이러한 정치적 책동에 대하여 방치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가야 - 왜 지역이 백제와 강하게 결합된다면 신라는 북으로는 고구려라는 강력한 세력에 의해 큰 압력을 받아야 하고 남으로는 범부여 제국이라는 강력한 세력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는 운명만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신라는 두 가지의 국가 전략을 수립한 듯합니다. 신라의 한반도 남부 전략은 가야의 소국들을 멸망시켜 백제의 허리를 자르는 것이고, 한반도 북부 전략은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틀을 잡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전략의 한 가운데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이지요.
『일본서기』킨메이 천황 23년 (562)에 "신라는 임나의 관가를 쳐 없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 해가 신라가 대가야를 병합한 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기록이 또 있습니다. 신라가 가야를 빼앗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달리 『송서(宋書)』에서는 신라가 백제로부터 가야를 빼앗았다고 되어있습니다.8) 다시 말하면 가야는 남부여(백제 : 반도부여)가 지배하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나니 임나일본부니 하는 것도 결국은 백제의 지배영역에 속하는 기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임나일본부가 외교교섭 창구의 역할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요시노 마코트(吉野誠) 교수에 따르면,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은 『일본서기』 이외에 없으며, 8세기 초에 완성된 『일본서기』는 천황 통치의 정통화를 목적으로 한 책인데, 이 목적과 관련해서, 한반도 국가들이 원래 번국(蕃國)이었던 만큼 일본에 복속돼야 한다는 점, 천황이 한반도 국가들을 조공국으로 거느리는 존재라는 점 등을 보여주는 것이 주요한 주제였다는 것입니다.9) 다시 말해서 요시노 교수의 분석은 이 같은 천황국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이에 맞추어 변조되었고 임나일본부도 그 하나의 예라는 주장인데 타당한 분석입니다.
이와 같이 그 동안 논란이 극심했던 임나일본부 역시 만약 성왕이 킨메이 천황과 동일인이거나 천황과 백제왕계가 같은 계보라면, 상당한 일관성이 있게 됩니다. 즉 임나일본부는 백제의 직속기관이었고 가야 역시 백제의 지배영역(또는 백제가 가야 연합세력의 맹주역할)에 속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킨메이 … [관계 모호] … 성왕 → 임나일본부의 관계의 관계는 킨메이 천황과 성왕이 동일인일 가능성을 증가시킵니다. 쉽게 말해서 백제의 성왕 또는 킨메이 천황이 동일인이면, 이 분은 백제(반도부여 또는 남부여) - 가야(임나일본부) - 왜(열도부여)를 제대로 통치한 것이며, 백제 - 가야 - 열도의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체제(Communication System)를 제대로 구축한 임금이 되는 것이죠.
무엇보다도 임나에 대한 심정적인 태도가 성왕과 킨메이 천황이 거의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킨메이 천황은 죽는 날까지 임나의 부흥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킨메이 천황 32년에 천황은 황태자의 손을 잡으며 "그대는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라. 옛날처럼 두 나라가 친하면 죽어서도 한이 없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도 서거합니다. 그런데 이 말투가 성왕이 임나에 대해 말하는 부분과 거의 흡사합니다. 성왕의 임나에 대한 행한 많은 연설들이 『일본서기』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몇 가지를 보시죠.
"과거 우리의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께서 가야에 계신 여러분들과 처음으로 서로 사신을 보내고 이후 많은 답례들이 오고가 관계가 친밀해져서 마치 부자나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었습니다."10)
"우리는 마치 형제처럼 가까우니 우리는 그대들을 아들이나 아우로 생각하니 그대들도 우리를 아버지나 형처럼 대하세요."11)
『일본서기』에는 킨메이 천황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성왕이 연설을 하는 장면들이 많이 연출됩니다만 이것은 오히려 조작된 사료라는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킨메이 천황이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게이타이 천황의 아들이라면 이들은 사촌 간이고 서열상으로도 대등하고,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의 관계를 본다면 오히려 성왕이 킨메이 천황보다도 서열이 더 높을텐데 마치 성왕이 황제의 명을 받은 신하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요시노 마코토(吉野誠) 교수의 지적처럼 『일본서기』가 정치적 목적으로 내용들을 많이 조작했다는 증거가 되는 부분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봅시다.
"성왕이 임나일본부에게 말했다. '천황(킨메이 천황 - 필자 주)이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만일 임나가 멸망하면 그대(성왕 - 필자 주)는 거점이 없어질 것이고 임나가 흥하면 그대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지금 임나를 재건하여 옛날과 같게하여 그대를 도우며, 백성을 어루만지고 기르게 하라'고 하셨다. 나는(성왕 - 필자 주) 삼가 천황의 조칙(詔勅)을 받들어 송구한 마음으로 가슴이 벅차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임나가 융성하게 할 것을 기원하였다. 나는 옛날처럼 오래 천황을 섬길 것이다."12)
위의 말은 실은 성왕이 한 말로 추정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도 천황이라는 말이 이 시대에는 없었고 따라서 조서(詔書)나 조칙(詔勅)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지요. 『일본서기』에 헤아릴 수도 없이 나타나는 백제왕이 천황에게 올리는 표(表)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과의 관계를 참고해보더라도, 백제 성왕의 서열과 킨메이 천황의 서열이 대등했거나 오히려 부여계 전체로 본다면 성왕의 서열이 더 높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처럼 오래 천황을 섬길 것이다"는 말도 앞뒤가 맞지 않지요. 지금까지 본대로 야마토를 실질적으로 개척한 사람은 근초고왕·근구수왕이고 유라쿠 천황이 곤지왕인데 언제 누가 어떤 천황을 섬긴다는 말입니까? 또 이 때까지도 열도의 통일도 제대로 되지 못했는데 누가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겠습니까?
위에서 인용된 문장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의 작문 실력을 보여주는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관의 태도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거늘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역사를 날조하는 수준이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나 북한(DPRK)의 주체사상 하의 한국사 편찬 수준과 다르지 않군요. 이것이 어떻게 역사가 됩니까? 그리고 왜 이런 사실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고 국민들이 모두 믿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열도쥬신(일본)은 위험한 나라입니다. 지금이라도 이런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반도쥬신(한국)은 소중화주의 근성에 빠져 역사를 왜곡·날조한다면, 열도쥬신은 소중화주의뿐만 아니라 유아독존식 사관으로 역사를 날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들의 행태는 쥬신의 미래를 한없이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소중화주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반도(한국)는 자기비하(自己卑下)에 빠져있고, 열도(일본)는 과대망상(誇大妄想)에 빠져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성왕의 그 많은 말들은 그저 남부여 제국으로서 백제(반도부여) - 가야(임나) - 일본(열도부여) 등이 하나의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제 기록들로 보면 타당합니다. 그리고 이 가야 지역이 매우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신라가 가야를 점령하지 못하게 하려는 성왕의 노력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기록입니다.
제가 보기엔 『일본서기』 킨메이 천황조에 있는 임나에 대한 수많은 연설들은 사실상 한 사람이 한 말로 추정됩니다. 만약 킨메이 천황과 성왕이 다른 인물이었다면 굳이 성왕의 입을 통해서 킨메이 천황의 말이 나올 이유가 없지요. 그저 사신이나 신하를 통해서 전달하거나 조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기록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까 킨메이 천황이 성왕과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말입니다.
필자 주
(2) 참고로 고대의 일본에서는 만주 쥬신들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씨와 성을 따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아시끼다군 일라(葦北君日羅)라고 하면 葦北은 지명에서 따온 씨이고 君은 수장에서 전환된 성이고 日羅가 이름이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90쪽.
(3) 김현구, 앞의 책, 67쪽.
(4) 『日本書紀』欽明 5년 冬10月
(5) 請田正幸「6世紀前期の日韓關 - 任那日本府を中心とし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 11』40쪽.
(6) 김현구 「6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387쪽.
(7)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55쪽.
(8) 김현구, 앞의 책, 76쪽.
(9) 요시노 마코트(吉野誠) 『동아시아속의 한일천년사』(책과함께 : 2005)
(10) 킨메이 천황 2년에 성왕이 가야 사람들에게 한 말. 원문은 "欽明 二年 夏四月 百濟聖明王謂任那旱岐等言…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遣使相 通厚結親好 以爲子弟"(『日本書紀』欽明天皇 2年 여름)
(11) "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與故旱岐等始約和親 式爲兄弟 於是 我以汝爲子弟 汝以我爲父兄"(『日本書紀』欽明天皇 2年 가을)
(12) 『日本書紀』欽明天皇 2年
큰가야제국
- 임나(가야) 3총사 :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 2009.02.16
- 가야와 백제의 30년 전쟁 - 가야의 본토수복 전쟁 2009.02.16 1
- 가락국과 부여남하설 2009.02.16
- 가야의 정치구조 -'부체제' 논의와 관련하여- 2009.02.16
- 가야 정치체제 (Gaya’s Political System ) 2009.02.16
임나(가야) 3총사 :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
가야와 백제의 30년 전쟁 - 가야의 본토수복 전쟁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 (4) / 가야의 본토수복전 2005/02/27 02:26
http://blog.naver.com/wjdrudtkdsla/80010587323 |
서기 369년 열도의 후왕으로 부임한 무내를 회유한 가라의 근강모야신이 6만 대군을 이끌고 본토수복전을 전개하나 백제에 완패하고 열도로 철수한다.
서기 계체기 21년 6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근강모야신은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임나로 가서 신라에 패한 바 있는 남가라, 녹기탄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임나에 합하고자 하였다』
신공기 49년(서기 369년) 3월조에는 6만의 가라군이 가라본토로 진입하여 백제군과 전투를 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황전별,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았다. 구저 등과 함께 군사를 정돈해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렀다. 바야흐르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이때 누군가가 말하기를 "군사가 적으면 신라를 깨뜨릴 수 없다. 다시 사백, 개로를 보내 군사를 늘려줄 것을 요청해라"고 말했다. 그래서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이 두 사람은 그 성을 모르는 사람이다. 다만 목라근자만은 백제장수다]에게 명해 정병을 이끌고 사백, 개로와 함께 가게 했다. 탁순국에 모두 모여 신라를 공격하여 이겼다. 이어서 비자발, 남가라, 녹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거듭 군사를 이동하여 서쪽을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의 침미다례를 베어[屠] 백제에 주었다. 이에 그 왕인 초고와 왕자 귀수가 역시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비리(比利), 피중(피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 4읍은 절로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왕 부자, 황전별, 목라근자 등이 같이 의류촌(意流村/지금 州流須祇라 한다)에서 만났다. 서로 보고 기뻐했다. 두터운 예로써 보냈다. 천웅장언만 백제왕과 더불어 백제국에 이르러 피지산(피支山)에 올라 맹세했다. 또 고사산(古沙山)에 올라 반석 위에 같이 앉았다. 그때 백제왕이 맹세하여 말하기를 "만일 풀을 깔고 앉으면 불에 탈 우려가 있고 또 나무를 잡고 앉으면 물에 떠내려갈 우려가 있다. 고로 반석에 앉아서 맹세하면 오래도록 썩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후 천추만세에 끊임없고 다함없이 항상 서번을 칭하며 춘추조공 하리다"라고 하였다. 천웅장언을 데리고 수도[都下]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저 등을 딸려보냈다』
백제와 가라의 결전
백제가 서기 367년에 가라를 병탄한 후 서기 368년에 경진주신이 도왜하여 출운에서 대기귀신으로부터 국양을 받아내고 이듬해 서기 369년에 무내를 후왕으로 파견하자 가라는 무내를 회유한 후 연합으로 백제에 다시 대항하여 본토수복을 위한 결전을 하게 된 것이다. 본국을 빼앗긴 후 2년만인 서기 369년 3월에 근강모야신이 6만의 대군을 이끌고 가라본토 수복을 위해 진입하자 백제는 다시 남해안 가라칠국을 완전히 격파하고 빼앗은 사건이다.
등장인물
우선 이 전역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황전별, 녹아별, 구저, 사백, 개로, 목라근자, 사사노궤, 초고왕, 귀수왕자, 천웅장언 등이다. 이들이 실사상 각각 누구인지를 비정하는 것이 실사를 바로 해석하는 지름길이다.
황전별은 응신
황전별, 녹아별이 나오는데 이 인물들은 가야측이다. 황전별은 '아라다와께'라고 읽는데 '아라[荒]'>'阿羅'이고 '田'은 응신의 화풍시호 예전별명에서 딴 연결고리다. '別'은 존칭이다. 성씨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止美連; 尋來津公同祖 豊城入彦命之後也 四世孫 荒田別命男 田道公被遣 百濟國 娶止美邑吳女 生男持君 三世孫熊 次新羅等...
(이하생략)...(河內國皇別)
풍성입언명의 4세손 황전별의 아들 다지[田道]도 나오는데 '다지'도 응신이다. 지군(持君)이란 이름에서 모지[持]는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무쯔[牟都/六], 무지[貴], 마다[末多/派/岐/股], 모도[本], 마도[薯童/末通], 모다[牟大] 등과 같은 '마다'계열 이름이다.
출신국명 시라기[新羅]를 바로 이름으로도 쓰고 있다. 풍성입언명은 가야가 개척한 구주북부 풍국(=후꾸오까현 일대)의 이름을 키워드로 하여 지은 아라사등의 이칭이다. 풍국을 개척한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풍성을 붙인 것이다.
응신과의 대수차이는 두 이름이 서기기사에 등장하는 연대를 감안하여 늘린 것이다. '마다'계열 이칭 무지[貴]가 들어간 이름을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荒荒公; 任那國 豊貴王 之後也(攝津國諸蕃)
아라아라[荒荒]>阿羅阿羅이고 아라라[荒荒]로 읽어도 阿羅羅가 되어 마찬가지다. 임나가 아라가야와 동체임을 말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들의 국호 '시라기'를 성씨로 삼은 경우를 하나 더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新良貴; 彦波염武노자草葺不合尊男 稻飯命之後也 是出於新良國 卽位國主 稻飯命出於新羅國王者祖合(右京皇別)
시라기[新良貴]라는 성씨의 조는 언파염무노자초즙불합존이라는 긴 이름은 가지고 있는데 통상 줄여서 언파불합존이라고 부르는 신무의 父다.
도반명은 신무의 형이고 신무가 응신(=예전)이므로 그 형 예진별명인 것이다. 도반명이 시라기.노.구니[新良國/新羅國] 출신이고 신라국주도 했다고 하는데 이 신라는 구주 서남단에 있던 천일창의 신라국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들의 본국 아라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新羅를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천일창이 응신이고 그들 부자·형제들이 개척한 고대국가이기 때문이다.
도미.노.무라지[止美連]조의 '심래진공'을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廣來津公; 上毛野朝臣同祖 豊城入彦命之後也(河內國皇別)
廣來津公; 下養公同祖 豊城入彦命四世孫 大荒田別命之後也(大和國皇別)
성씨록 주에 '광(廣)'이 '심(尋)'으로 기재된 저본도 있다하므로 '광래진공'은 위의 '도미.노.무라지[止美連]'조의 '심래진공'과 동일한 성씨다. 대황전별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는데 황전별인 응신(=예전별명)을 기준으로 그 형 예진별명에게 '큰 大'자를 붙인 것이다. 조가 같다는 '상모야'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上毛野朝臣; 下毛野朝臣同祖 豊城入彦命五世孫 多奇波世君之後也 大泊瀨幼武天皇(諡雄略)御世 努賀君男百尊...(중략)...百尊男德尊 孫斯羅...(이하생략)...(左京皇別)
풍성입언명의 5세손으로 나오는 다까하세[多奇波世]가 응신의 형 예진별명이다. 위의 '광래진공'조에서는 4세손으로 나왔으나 서기기사에 등장하는 연대를 감안하여 대수를 조정한 것이다.
역시 후손 중에 국호를 이름으로 삼은 시라기[斯羅]가 있다. 斯羅가 新羅인 것이다. 이 가미쯔게노[上毛野], 시모쯔게노[下毛野] 성씨가 바로 계체기 21년 6월조의 근강모야신(=아라사등)의 후손인 것이다. 노[野]를 누[野], 나[野]로 읽는 경우도 있다. 상모야와 조가 같은 주길씨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住吉朝臣; 上毛野同祖 豊城入彦命五世孫 多奇波世君之後也(左京皇別)
스미요시[住吉]는 가야계 성씨이자 지명이다. (*1)주길신사는 가야 응신의 삼형제와 신공을 제신으로 모신 신사다. 서기 이중전기에서 태자(=초고대왕)를 화공으로 전사시키는 주길중황자가 있는데 이 인물은 주길신사의 남신 셋 중에서 '가운데[仲]'란 뜻이고 아라사등의 중자인 것이다. 그래서 이칭에 '仲/中'자가 종종 따라다니는데 황극기의 中大兄도 응신이다.
다까하세[多奇波世]는 다까하세[竹葉瀨/竹合]라고도 하는데 다까[多奇/竹]는 다께[武/建]와 같아 장남을 나타내는 접두어로 쓰이고 있는 것이고 여기서도 보면 원래는 다께[竹/武/建]이던 것을 다까[竹/多奇]로도 발음하므로 열도어에서 '에'와 '애'는 구분이 되지 않아 때로는 (*2)'아'로도 발음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데라스[天照]가 아마다라시[天足/天帶]로 발음되는 것도 같은 경우인데 이 경우는 '으'가 '이'와 교체되어 쓰이는 현상도 동시에 볼 수 있다.
(*1) 위치에 대한 설이 두 가지가 있는데 1) '和名抄'에 「攝津國·兎原郡·住吉鄕(현 神戶市 東灘區 住吉)」이라고도 하고 또 하나는 2) '화명초'에 「섭진국·주길군(현 大阪市 住吉區)으로 현 住吉大社('연희신명식'의 섭진국 주길군 住吉坐神社)가 있는 곳」이라 한다. 주길대사는 大阪市 住吉區 住吉町에 있고 서향이다. 本殿은 동편 안쪽 제1전으로부터 전방으로 순서대로 제2전, 제3전이 있고 제3전의 남쪽에 제4전이 있다. '住吉大社神代記'에 의하면 제신은 제1전은 표통남, 제2전은 중통남, 제3전은 저통남, 제4전은 姬神의 궁으로 氣長足姬皇后로 되어 있다.
(*2) 邪馬臺는 '야마다이'로 발음하는 것이 아니고 '야마다'로 발음해야 하며 이것이 후대에 서기에서 열도를 지칭하는 말로써 야마다[山田]로도 표기되고 야마도[倭/大倭/和/大和/日本/大日本/東]로도 쓰이게 된 것이다. (ㄷ+아래아)>(다, 도)로 갈라졌다. 말하자면 '야마또'의 어원은 야마다[邪馬臺]인 것이다.
녹아별은 무내숙니
가가.노.와께[鹿我別]는 무내숙니다. 무내의 이칭에 이가가[伊賀我], 이가가[伊香我], 히가가[日香蚊] 등이 있는데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다. '가가'라는 발음이다.
穗積朝臣; 石上同祖 神饒速日命五世孫 伊香色雄命之後也(左京天神)
穗積臣; 伊香賀色雄男 大水口宿니之後也(左京天神)
采女朝臣; 石上朝臣同祖 神饒速日命六世孫 大水口宿니之後也(右京天神)
佐爲連; 速日命六世孫 伊香我色乎命之後也(左京天神)
신요속일명에서 神과 命은 존칭이고 요[饒]는 요[餘]와 발음이 같고 글자모양이 거의 같은 것을 이용하여 살짝 바꾼 것이고 "요[饒]>요[餘]씨 성의, 이름에 '速'자 들어간 왕[日]"이란 뜻으로 백제 초고대왕이다. 이것이 신공기 46년조부터 55년조까지 등장하는 초고왕의 다른 표기 速古王과 '速'자를 키워드로 하여 연결되는 것이다.
'좌위련'조를 보면 그냥 '속일명'이라고도 기재하고 있다. 이가시고오[伊香色雄]나 이가가시고오[伊香賀色雄/伊香我色乎]는 전부 동일인물이며 한자가 달라지거나 글자가 한 자 빠져도 계보를 보면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이름에서 중간에 '가가'란 발음을 따서 지은 이칭이 녹아별인데 別은 존칭이고 가가[鹿我]인 것이다.
또 이 이름에 든 '사슴 녹(鹿)'자는 이 인물의 또 다른 이칭 소가이루까[蘇我入鹿]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원래는 3세손 즉 손자이지만 요속일과 서기기사에 등장하는 연대차를 고려하여 대수를 적당히 늘린 것이다.
이 '가가'란 발음을 키워드 삼아 만들어 쓴 사례를 하나 더 보면 서기 신대기 하9단 천손강림장 본문에 경진주신이 무옹퇴신과 함께 열도로 건너가 대기귀신과 그 아들 사대주신으로부터 나라를 이양 받는 내용이 나오고 그 말미에 있는 이설에 보면 경진주신에게 끝까지 저항하는 성신 '가가세오[香香背男]'가 나오는데 이 인물도 무내숙니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구저는 귀수태자
구저가 귀수태자라는 것도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오랠 久', '근본 저'인데 이 이름의 뜻은 "영원한[久] 시조님[저]"이라는 뜻이다. 시호 "고귀하신[貴] 시조님[首]"과 같은 격이다. 지금 이 기사에서는 일인이역하고 있는 것이다.
목라근자=천웅장언=침류왕
모꾸라곤시[木羅斤資]는 침류왕이다. 모꾸라[木羅]=마꾸라[枕]이기 때문이다. 곤시[斤資]>곤시[近子]>太子인 것이다. 천웅장언도 침류왕인데 이름 침류에서 나가스[流]의 발음을 따고 존칭 '별 彦'을 붙여 서기 신무전기에 등장하는 이칭 나가스.네.히꼬[長髓彦]를 짓고 여기서 다시 '스[隨]'를 뺀 나머지로 나가히꼬[長彦]를 만든 것이다.
천웅의 千도 사실은 天인데 같은 음의 글자로 바꾼 것이고 熊은 '크다'는 뜻이다. 천웅장언은 "백제의 큰 장언"이라는 뜻이다. 역시 일인이역을 하고 있다.
관련 당사국
이 전역에 등장하는 국명을 열거해 보면 서기를 쓴 주체인 일본 그리고 백제, 신라 그리고 소국이름으로 비자발, 남가라, 녹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침미다례가 있고 소읍으로 비리, 피중, 포미지, 반고 등 네 개가 있고 지명으로 고해진, 의류촌(=주류수기), 피지산, 고사산 등이 나온다.
일본
일본은 이 당시에 없었다. 8세기에 서기를 지으면서 기원전 7세기부터 있었던 것처럼 꾸민 것일 뿐이다. 열도 최초의 통일왕조는 가라의 응신이 서기 390년에 세운 대화왕조이기 때문이다. 그 21년 전인 지금은 일본도 왜도 없다. 다만 그 이전에 있던 열도의 소국들을 일러 대륙사서 등에서 일반적으로 왜라고 칭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를테면 비미호의 야마다도 왜국이라 했고 그 후 응신이 세운 대화왕조도 왜라고 불렀던 것이다.
신라
이 신라는 아라가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를 한역한 것으로 경주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가라의 이칭 신라를 이용하여 마치 적대국인 것처럼 꾸미고 가라 연합체 내의 소국들 이름을 열거하며 줄줄이 정벌한 것처럼 이중구조로 기술해둔 것뿐이다.
소국들
비자발(比自발)>비지발>빚발로 표기할 수 있고 뜻은 '빛벌/빛땅'이고 지금의 경남 창녕으로 비정된다. 다른 표기로 비사벌(比斯伐)>비시벌>빗벌로 표기되고 뜻도 동일하다. 이것을 보면 '빛[光]'의 사국시대 고어형태[音]는, 단독으로 발음될 경우 현대어 '빛'과 음가가 같은 '빚', '빗'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斯]와 지[自]는 현대어에서 사이시옷(사이지옷)이라 할 수 있다. (발=火+本)
남가라는 김해 정도로 보이며 사기 김유신열전에서 유신비(庾信碑)를 인용한 문구에도 금관가야를 南加耶라고 부르고 있다. 안라는 창원·함안 정도로, 다라는 합천으로 비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라는 소가야로 보면 고성 정도일 것 같다.
합천은 고명이 대야(大耶) 또는 대량(大良)인데 야(耶)=라(羅)=라[良]이고 '大'는 복모음이 없는 열도어로 음독하여 '다'로 읽혔고 '多'로 표기될 수 있으므로 多羅=大耶로 본다. 기타 침미다례는 제주도고 녹국과 탁순은 불명이다. 사실 이런 소국들 이름도 아라가야, 금관가야(=임나), 대가라(고령이 아님)가 전부 동체였음을 감안하면 자잘하게 찢어서 이야기를 꾸민 것을 알 수 있다.
침미다례(枕彌多禮)의 경우는 최초 훈독 '(ㅌ+아래아+ㅁ)[枕]'이 음독 '침[枕]'으로 바뀌고 다시 글자모양이 흡사하고 음이 같은 침[침]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침=心 방변+枕-木)
그런데 최초 발음 '탐/톰'을 유지하려는 기분으로 발음하면 '미' 발음이 자연스럽게 첨가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원래는 '탐다례', '톰다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톰/탐[枕]은 '토막'의 뜻이므로 '토막땅'이라고 할 수 있고 '섬[島]'과 같은 의미인 것 같다.
또 훈독 (ㅌ+아래아+ㅁ)[枕]>(톰, 탐)으로부터 한자가 탐[耽]으로 바뀌어 탐라[耽羅]로 쓰인 것 같다. 여기서 다시 '탐모라', '담모라', '다모라'라는 음이 나올 수 있다.
백제와 가야 사이에 가야본토를 두고 일대결전을 벌인 것을 마치 왜와 백제의 연합이 경주신라를 격파하고 그 땅을 빼앗아 백제에 준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결과를 보면 그 빼앗긴 영역이 전부 가야영역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겉보기 문장만 보아도 이런 것은 경주신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여기서 말하는 신라가 가라임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또 고령에 있던 대가야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한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지승람 고령현조에서 2가야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후대에 신라에 투항한 시기나 인물도 다른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입장을 뒤집어 기술
백제가 가야에게서 빼앗은 것을 마치 왜가 신라로부터 빼앗아 백제에게 준 것처럼 입장을 뒤집어서 기록한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신공이란 인물은 실사상 가야왕족을 모델로 하여 꾸며진 인물이므로 이 경우는 백제를 낮춘다든가 적으로 한다든가 하여 입장을 거꾸로 기록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천황이 백제왕족으로 비정되는 인물일 때는 가야가 적으로 등장하곤 한다. 이런 것은 일본서기 기술기법의 일종이다.
주류수기
州流須祇는 뒤의 '수기'란 말이 문제다. 주류수기가 반도어, 열도어 복합어이기 때문이다. 須祇는 발음이 '스기'로서 '스기[城]'와 같다. 즉 州流城으로서 이것이 뒷날 백제부흥운동에 나오는 주유성(州柔城/周留城)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실사가 아니고 상징적인 분식기사이기 때문이다.
기타 지명들도 불명인데 일일이 비정한다는 것 자체도 사실은 별로 의미 없는 일이다. 인물도, 국명, 지명도 전부 꾸며져 있고 사건의 성격도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반석 위에 앉은 의미
그런데 위의 신공 49년조 기사 속에는 일본왕실의 중요한 비밀이 하나 들어있다.
『唯千熊長彦與百濟王 至于百濟國 登피支山盟之 復登古沙山 共居磐石上 時百濟王盟之曰 若敷草爲坐 恐見火燒 且取木爲坐 恐爲水流 故居磐石而盟者 示長遠之不朽者也 是以 自今以後 千秋萬歲 無絶無窮...』
『천웅장언만 백제왕과 더불어 백제국에 이르러 피지산(피支山)에 올라 맹세했다. 또 고사산에 올라 반석 위에 함께 앉았다. 그때 백제왕이 맹세하여 말하기를 "만일 풀을 깔고 앉으면 불에 탈 우려가 있고 또 나무를 잡고 앉으면 물에 떠내려갈 우려가 있다. 고로 반석에 앉아서 맹세하면 오래도록 썩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후 천추만세에 끊임없고 다함없이...』
석상에 앉은 왕실의 황조신
지금 이 문장에 등장한 인물은 단 둘이다. 천웅장언과 초고왕인데 각각 침류왕과 초고대왕이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이 어디에 앉았는가? 「共居磐石上」 > 「함께 磐石上에 앉았다」 > "(초고대왕과 침류왕이) 함께 (磐)石上에 앉았다" > "(초고대왕과 침류왕이) 함께 石上神宮에 鎭坐했다」라는 암호가 들어있는 것이다.
석상신궁의 제신은 셋이다 주제신은 초고대왕이고 나머지 둘은 귀수대왕과 침류왕이다. 일본왕실의 세 황조신인 것이다.
또 서기 이중전기를 보면 태자가 화공을 당하여 쫓기다가 石上·振의 神宮에 진좌하는 사건이 기술되어 있는데 「太子便居於石上振神宮」> 「태자는 石上 후루[振]의 神宮에 편히 머물렀다」라고 나오고 이 태자가 곧 신공기에서 "(磐)石上에 앉은 백제 초고왕"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중천황은 초고대왕을 등재한 인물인 것이다. 후루[振]는 석상의 지명인데 후루[布留/布瑠]라고도 한다. 그것도 신공기에서 「居磐石上」, 이중기에서 「居於石上振神宮」이라 하여 동사도 같은 '居'자를 쓰고 있는 것이다.
왕실의 영원무궁을 기원
또 「示長遠之不朽者」, 「千秋萬歲 無絶無窮」 두 구절은 인현천황의 화풍시호 "億計>億年之大計"에 해당하는 의미인 것이다.
인현천황의 이름에 島稚子, 大石尊이 있고 모든 천황 중에서 유일하게 諱가 있다[大脚, 大爲라고도 한다]. 일본왕실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도치자는 이장낙존과의 연결고리이고 大石이 석상신궁과의 연결고리다.
오호시[大脚], 오호스[大爲]라고 읽고 있는데 '이'와 '으'는 교체되어 쓰이므로 결국은 한자만 달랐지 오호시[大石]와 음도 같다. 또 오호아시[大脚]로도 읽을 수 있어 '큰 아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때 아침은 아스까[飛鳥]를 가리키며 이 '새[鳥]'는 '흰깃큰수리[羽白熊鷲]', 白鳥, 봉황새[鸞]로 은유된 귀수대왕인 것이고 백제왕으로서는 아신왕의 직계손인 무령왕에 해당되고 아신왕의 사서상의 모든 이칭은 '아침'에 해당되는 고어 '아시', '아지'로 조어되어 있다.
이런 모든 일련의 연결고리들은 8세기초 당대의 열도에서 한다하는 가야·백제의 대문인들이 수십 명이 모여 수십 년을 걸려서 치밀하게 짜 맞춘 것들이지 우연의 일치가 결코 아닌 것이다.
귀수대왕을 등재한 민달기 31년 7월조에 錦部首大石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초고대왕임을 알려주기 위한 합성이름이다.
錦部首; 神饒速日命十二世孫 物部目大連之後也(山城國天神)
錦部連; 三善宿니同祖 百濟國速古大王之後也(河內國諸蕃)
신요속일명에서 '신'과 '명'은 존칭이고 이름만은 요속일인데 "요[饒]>요[餘]씨 성의, 이름에 '速'자 들어간 왕[日]"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고 같은 금부씨의 조인 백제국 속고대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금부수대석은 錦部首라는 성씨와 인현천황의 이름 大石尊을 따서 지은 초고대왕의 이칭인 것이다.
위와 같은 분위기를 반영한 신의 이름에 국상입존이 있다. 서기 신대기 상1단에 등장하는 황조신 國常立尊의 이름 속에 들어있는 '도꼬시(나)에[常/長/永久]'는 왕실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도꼬[床]와도 음이 같아 磐石 같은 床石과도 의미가 통한다. 암석은 고래로 십장생에도 들어있듯이 영구, 영원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국상입존'이란 이름을 뜻으로 풀면 "나라를 반석 같이 단단히 세운 신"이라는 뜻으로서 다름 아닌 일본왕실의 시조 초고대왕인 것이다.
백제의 열도정복을 위한 사전정지작업
초고대왕이 손자인 천웅장언(=침류) 앞에서 천추만세 서번을 칭하고 춘추로 조공을 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분식을 해놓았다. 가라칠국평정은 백제가 열도를 가야로부터 접수하기 위해서 세 차례에 걸쳐 가야본국을 침탈했으나 가야가 6만의 대군을 이끌고 본국을 탈환하러 열도에서 반도로 진입하여 가라본토를 사이에 두고 일대결전을 벌인 것이었고 이것은 백제가 열도를 가야로부터 빼앗기 위한 사전정지작업 성격이었다.
이 전투에서 가라가 완패하고 응신이 열도로 철수하는 장면이 신공기 50년 2월조의 다음과 같은 기사다. 「荒田別等還之」 > 「황전별 등이 돌아왔다」.
이 이후부터는 전장이 열도로 바뀐다. 가라 본국은 이때 망해버린 것이고 그 주력은 새로 개척한 열도에서 백제로부터 독립된 왕국건설을 꿈꾸고 있고 백제는 그마저 빼앗으려고 열도로 건너가 계속해서 가야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이때부터 20년 간이나 더 지속되는 것이다.
같은 시기의 사기기록
서기 369년은 사기 근초고기 24년에 해당하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9월) 고구려왕 사유가 보기 2만을 이끌고 치양에 와서 주둔하면서 민가를 침탈했다. 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보내 치양에 이르러 급습을 해 깨뜨리고 5천 명의 포로를 잡았다. 그 포로와 노획한 것을 장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1월) 한수의 남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했다. 기치는 모두 황색을 썼다』
군대사열이란 큰 전투를 우회표현하는 분식일 수 있고 황색기라는 것이 대륙식으로 하자면 천자가 사용하는 색깔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사기저자들이 그런 의미로 썼다면 바로 이 해에 만든 칠지도에서 보다시피 (백제왕 대왕> 백제태자 왜왕> 백제세손 왜후왕)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고도 볼 수 있다. 대왕은 천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39년인데 백제기사와 아귀를 맞추어 썼기 때문에 "군사 2만을 보내 남으로 백제를 쳤으나 치양에서 패배했다"고 나오고 신라는 내물왕 14년인데 기사가 없다. 가야와 백제의 실사는 "고려인은 옛날부터 고려땅에서만 살았다"라는 반도사관에 입각하여 완전히 절사해버린 것이다.
가락국과 부여남하설
가락국과 부여남하설
2006.07.01 조원영 / 합천박물관 학예사, 문화재 감정위원
1990년 발굴이 시작된 김해 대성동고분군은 전기 가야제국을 주도했던 가락국 지배자집단의 공동묘역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가락국의 국가 형성 문제, 가락국 지배세력의 정체 등 가야라는 국가에 대한 새로운 문제점이 다각도로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가야의 성립과 정치적 동향에 대한 문제는 역사학계나 고고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견해가 나오지 않고 있다. 연구자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한 견해를 제시하면서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지만 기초적인 역사자료가 빈약하여 상당부분 추론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합일점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대체로 역사학계에서는 가야의 어원과 변천, 문헌에 나타나는 가야 관련 기록을 기반으로 고고학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가야사의 시작을 설명하는데 1~3세기의 변한을 가야사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놓고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변한의 역사를 가야사에 포함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3세기는 변한의 역사이고 가야의 성립은 3세기 말 4세기 초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이다. 경북대 주보돈 교수는 전자를 전기론(前期論), 후자를 전사론(前史論)으로 명명하였다.
이 가운데 전사론은 3세기 말 4세기 초가 한국고대사 더 나아가 고대 동아시아사 전체가 커다란 정치적 변동의 시기였다는 고고학계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즉 부산대 신경철 교수는 가야라고 불리우는 여러 정치세력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를 3세기 말 4세기 초로 보고 이를 기준으로 삼한시대와 가야시대를 구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야가 성립되었다는 것은 한반도 남부에서 이전의 삼한사회와 국가체의 성격, 지배권력의 강도면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본격적인 삼국시대가 성립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은 가야사회 성립에 대한 획기적인 발상을 잉태하게 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고분에서 고고학자들은 무엇을 보았기에 전기론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3세기 말 4세기 초의 시기를 주목하게 되었을까?
신경철 교수는 ‘3세기 말의 대변혁’이라고 표현할 만큼 한반도 남부사회를 뒤흔든 변화의 물결이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대체 그 변화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지금부터 김해 대성동고분군 발굴을 주도했던 신경철 교수의 견해를 통하여 이 시기의 정치적 변동을 추적해 보도록 한다.
3세기 말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는 신라, 가야토기로 불리는 도질토기이다. 도질토기의 등장을 기점으로 하여 가야사회는 큰 변화를 보였다. 도질토기는 섭씨 1,200도 전후의 높은 온도에서 구운 환원염 소성의 단단한 토기를 말한다. 도질토기 출현 이전의 삼한시대 토기는 섭씨 700~90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구운 환원염 소성의 와질토기였다.
도질토기는 최근의 조사 성과에 의하면 3세기 말 낙동강하류역 김해와 부산지역에서 가장 먼저 출현하여 영남지방 각지로 퍼져 나갔다. 처음 만들어진 도질토기는 두귀달린항아리(兩耳附壺)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귀달린항아리는 중국 북방에서 만들어진 독특한 토기 형태이므로 가야에서 출현한 도질토기는 이전부터 제작되고 있었던 와질토기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북방토기문화를 결합시켜 만들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도질토기는 북방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질토기가 한반도 남부의 어느 지역보다도 김해, 부산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편 이 지역에서는 도질토기와 함께 순장의 풍습도 가장 먼저 출현하였다. 순장은 주인이 죽으면 노비나 가신을 죽여서 함께 묻는 것을 말한다. 변한시대에는 한반도 남부에 이러한 풍습이 없었던 것이 3세기 말에 나타났던 것이다. 김해 대성동 29호분에서는 목걸이로 사용되었던 유리제옥류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이 무덤 주인공의 발치에 놓여 있었다. 이 옥류가 발견된 곳 주변에는 아무런 부장품도 놓여지지 않은 꽤 넓은 빈 공간이 있었는데 이곳이 목걸이를 착용한 사람이 안치된 곳으로 보인다. 따라서 적어도 2인 이상의 순장자가 안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순장에는 사람 외에 소나 말 등의 동물을 희생시키는 행위가 있는데, 대성동유적에서도 동물 순장이 확인되었다. 김해 대성동 1호분 으뜸덧널의 덧널 위에서 소의 아래턱뼈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소나 말의 목을 베어, 머리를 덧널 위에 놓는 것은 북방유목민족의 동물 순장형태와 동일한 것으로, 김해 대성동유적의 순장은 북방의 습속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수노하심(楡樹老河深)의 중간층 무덤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소와 말의 순장이 확인되었다.
영남지역 고분에서는 이처럼 동물의 머리만을 잘라 매장주체부 부근에 놓은 것도 있지만, 매장주체부를 원형으로 둘러 싼 도랑(溝)에 희생시킨 말의 몸통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전자가 북방의 습속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영남지역에서 발전된 순장의 형태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세기 말 영남지역에서는 이러한 순장의 풍습이 다른 고분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로지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부산 복천동고분군 단 두 곳에서만 나타난다. 이 두 고분군은 각각 낙동강하류역의 서쪽과 동쪽지역을 관할하는 지배자집단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순장은 특정 지배자집단에서만 행해진 매장의례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김해 가락국의 지배집단은 김해 대성동고분 축조집단과 부산 복천동고분 축조집단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순장자의 숫자나 부장된 유물의 질적인 면으로 보아 김해 대성동고분군 축조집단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순장의 풍습은 주변지역으로 파급되어 신라의 경우에는 가야의 영향을 받아 4세기 중엽 이후부터 순장이 행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순장 풍습을 전해주었던 원류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써 ‘오르도스형 청동솥’이라고 불리는 유물이 있다. 이 솥은 북방유목민족들의 독특한 청동솥으로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2점, 김해 양동리고분군에서 1점이 출토되었다. 원래 이 솥은 북방민족들이 사용하던 취사도구의 일종인데, 북방민족은 목축을 하면서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녔기 때문에 양 귀에 끈을 꿰어 말 안장에 매달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가야지역에서 이 청동솥은 지배층만이 소유할 수 있는 대단히 귀한 물건인데 세부 형태나 제작기법이 부여의 중심지였던 중국 길림성 북부 지역 출토품과 유사하므로 그 지역에서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김해 대성동 45호분에서는 큰칼을 일부러 구부려 부장시키는 사례가 발견되었고, 김해 대성동 29호분은 덧널을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사례는 최근의 가야지역 발굴조사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무기를 의도적으로 훼손하여 무덤에 부장하거나 덧널을 불에 그을리는 행위는 흉노, 선비, 부여 등 북방유목민족의 특별한 장례행위로 이것이 도질토기의 출현, 오르도스형 청동솥의 매납과 동시에 가야의 매장의례에 행해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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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말에 이와 같은 북방유목민족과 관련 있는 문물과 습속의 등장을 기점으로 가야지역에서는 철제의 갑주(甲?, 갑옷과 투구), 그리고 기마용의 말갖춤이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다. 영남지역에서 발굴된 갑주로는 북방유목민족의 독특한 기마용 갑주의 영향으로 제작된 것과, 재래의 가죽이나 나무로 만든 갑옷이 모델이 된 영남지역 특유의 철제 갑옷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갑주의 원류지인 북방유목민족의 무덤에서는 철제 갑주가 출토되는 경우가 드물며 거의 가죽제 갑주가 보편적인 것에 비하여 가야지역에서는 오히려 철제 갑주의 출토량이 북방보다도 월등히 많다. 신체 보호에 보다 효율적인 철제 갑주가 다량으로 제작된 것에서 철의 왕국이라고 불릴 만한 가야지역의 왕성한 철기문화가 그 저변에 깔려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기마용 말갖춤도 이 무렵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부산 복천동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출현하였는데, 최근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말갖춤의 직접적인 원류지도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으로 판명되었다. 즉 말갖춤 가운데 재갈과 고삐는 중국 동북지역의 선비, 부여계통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대표적인 북방문물이라 할 수 있다.
이 기마용 말갖춤의 등장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그 이전 시기까지의 전투형태인 보병전에서 기병전으로 전투양상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때부터 비로소 먼 거리까지 원정하여 정복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철제의 갑옷과 투구, 말갖춤의 출현은 이때부터 낙동강하류역의 가야사회가 본격적인 군대의 보유와 함께 바야흐로 전쟁의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과 습속을 통해 볼 때 3세기 말 4세기 초에 낙동강하류역에서는 이전 시기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북방문물의 유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묘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3세기를 전후한 영남지역의 주된 묘제는 덧널무덤(木槨墓)이었다. 덧널이라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는 시신과 함께 많은 부장유물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의 매장시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덧널무덤보다 먼저 사용되었던 널무덤은 시신만 매장할 수 있는 규모의 매장시설이므로 많은 물품을 부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덧널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많은 물품을 무덤 속에 부장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존재가 등장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부터 계급의 분화가 더욱 현저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남지역의 덧널무덤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2세기 후반의 김해 양동리 162호묘임이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었다. 3세기 말 4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이 덧널무덤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즉 이전의 덧널무덤은 변한과 진한의 구별이 없이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음에 비해 이 시기에는 가야와 신라지역의 덧널무덤이 서로 현격하게 달라진 것이다.
즉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후반까지는 덧널무덤의 무덤구덩이가 폭과 길이의 비율이 2:3 정도 되는 폭이 넓은 덧널무덤[Ⅰ류덧널무덤]을 공통으로 채용하고 있었는데, 3세기 말이 되면 김해와 부산을 주축으로 하는 가야지역은 폭넓은 덧널무덤[Ⅱ류덧널무덤]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음에 비해,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지역은 폭과 길이의 비율이 1:3~5 정도의 폭이 좁은 덧널무덤을 축조하였다.
이처럼 이 시기에 공동의 묘제로 사용되었던 덧널무덤이 갑자기 분화된 것은 이때부터 양 지역이 이전 시기와는 다른 정치적 환경에 직면했다고 설명할 수는 없을까? 이것은 철제 갑옷과 투구, 철갑으로 무장한 기병을 보유한 집단이 낙동강하류역에 등장한 데 따른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가야지역의 급격한 정세변화가 진한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를 촉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낙동강하류역의 덧널무덤도 Ⅰ류덧널무덤과 Ⅱ류덧한다널무덤을 비교하면 무덤구덩이의 평면 특징은 같지만 내용은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즉 Ⅱ류덧널무덤은 Ⅰ류덧널무덤에는 없었던 순장의 습속이라든가 부장품을 후하게 넣는 후장(厚葬) 등 무덤의 내용에는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또 Ⅰ류덧널무덤에는 부장유물의 배치가 무덤주인공의 허리쪽 말하자면 덧널의 한쪽길이를 따라 일렬로 되어 있던 것이 Ⅱ류덧널무덤에는 무덤주인공의 발치 아래쪽으로 배치되는 변화를 보였다.그런데 Ⅱ류덧널무덤을 축조하면서 앞시기의 무덤을 파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왜 그랬을까? 무덤을 축조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해서였을까?
이 시기에 생산력의 증대와 더불어 인구가 증가하면서 가용할 수 있는 토지가 부족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자도 있다. 또 일본 야요이시대에 친족관계에 있는 피장자들을 매장할 때 독무덤(甕棺墓)을 중복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으므로 중복된 덧널무덤의 주인공들은 친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자도 있다.
그러나 앞 시기 무덤을 파괴하는 현상이 그 전에는 이 지역에 전혀 보이지 않았던 점, 북방문물과 습속이 이 지역에 유입됨과 동시에 앞 시기 무덤에 대한 파괴행위가 행해지고 있다는 점, Ⅱ류덧널무덤이 앞 시기 무덤의 바닥까지 철저하게 파괴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는 점에서 무덤주인공들을 혈연적인 관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Ⅱ류덧널무덤을 축조하였던 집단이 앞 시기의 무덤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그들 집단의 무덤을 조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앞 시기의 체제와 관념을 완전히 부정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3세기 말 낙동강하류역에 이전의 무덤을 파괴하면서 기존의 정치체제마저도 부정할 수 있는 북방문물과 관련을 가진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상과 같은 북방문물과 습속, 그리고 영남지역 묘제에서 추정되는 낙동강하류역과 경주지역과의 정치적 긴장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먼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북방문화가 전파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추정이다. 하지만 단순한 문화의 전파라면 도질토기의 발생이나 순장의 습속이 우선 북부지역으로부터 차츰 남하하는 현상이 보여야 할 것인데, 한반도의 동남단인 낙동강하류역에서 가장 먼저 출현하였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들 북방문화를 문헌에 보이는 3세기 말 진한과 서진의 교섭 기록을 중시하여 교역의 산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기록대로라면 이러한 북방문화가 어느 곳보다도 진한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경주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 것이 당연할 텐데 실제로는 낙동강하류역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납득할 수 있는 의견이 아니다. 더욱이 북방문화가 등장하는 시점에 낙동강하류역과 경주지역의 묘제에 차이가 생겼다는 점에서도 단순한 교역론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3세기 말 낙동강하류역에 나타난 이동 제반현상은 북방문화를 소유한 특정주민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즉 도질토기, 청동솥, 갑옷과 투구, 말갖춤 등 북방문물만의 유입이라면 북방문화의 전파 내지는 교역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문물과 동시에 순장, 무기의 훼손, 덧널을 불에 그을리는 행위 등 북방의 습속까지 나타나고 있는 점은 이러한 습속이 몸에 배인 종족이 이 지역에 이주했을 경우에만 가능한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당시 상황에서 어떤 종족이 이 지역으로 들어왔을까?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확인되는 현상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종족은 바로 부여족이다. 또 하나 그런 추정의 근거가 되는 것이 중국측 기록이다. 중국의 『진서(晋書)』동이열전(東夷列傳) 부여국조(夫餘國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무제 때에는 자주 와서 조공을 바쳤는데, 태강 6년(285)에 이르러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왕 의려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무제는 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부여왕이 대대로 충성과 효도를 지키다가 몹쓸 오랑캐에게 멸망되었음을 매우 가엾게 생각하노라. 만약 그의 유족으로서 나라를 회복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방책을 강구하여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하게 하라.”
이에 유사가 보고하기를 “호동이교위인 선우영이 부여를 구원하지 않아서 기민하게 대응할 기회를 놓쳤습니다”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선우영을 파면시키고 하감으로 교체하였다.
이듬해에 부여후왕 의라는 하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하감은 전열을 정비하고 독우 가침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 또한 그들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가침이 모용외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모용외의 군대는 물러가고 의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
→ 武帝時 頻來朝貢 至太康六年 爲慕容所襲破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帝爲下詔曰 夫餘王世守忠孝 爲惡虜所滅 甚愍念之 若其遺類足以復國者 當爲之方計 使得存立 有司奏護東夷校尉鮮于不救夫餘 失於機略詔免 以何龕代之 明年 夫餘後王依羅遣詣龕 求率見人還復舊國 仍請援 龕上列 遣督郵賈沈以兵送之 又要之於路 沈與戰 大敗之 衆退 羅得復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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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부여 왕은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로 피신하였으며, 이듬해 부여후왕이 진나라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회복하였다는 것이다. 옥저로 갔다는 국왕의 자제들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이들 집단이 옥저를 출발하여 동해안 루트를 따라서 낙동강하류역에 와서 정착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 집단이 기존의 재지지배층을 교체하면서 김해 대성동고분을 축조한 세력이었으며 가락국을 성립시킨 주체였다. 따라서 가락국은 부여의 국가, 사회시스템을 그대로 옮겨온 집단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국가 성립부터 강력한 국가시스템과 기마군단 등 군대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3세기 말 4세기 초에 북방 부여족의 일부가 남하하여 낙동강하류역을 정복하였다는 신경철 교수의 이른바 ‘부여족 남하설’은 역사적 사실의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가야의 성립, 더 넓게는 삼국의 성립시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공백상태에 있던 4세기대의 가야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주목해야 할 견해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가야 관계기록은 212년(신라본기 내해왕 17년조)의 기록 이후 481년(신라 소지왕 3년조) 다시 그 모습을 보일 때까지 무려 269년 동안의 기록이 없는 상태이다. 광개토왕릉비문 400년 경자년조에는 ‘임나가라’라는 명칭으로 가야관계기록이 전하며, 중국 남북조시대 남제(南齊)의 역사를 기록한 『남제서』에는 가라 국왕 하지(荷知)가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어 5세기대의 가야는 상당한 힘을 가진 정치집단으로 역사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3세기 말부터 4세기대는 우리의 역사에서 가야를 찾아 볼 수 없다. 이러한 기록의 공백과 함께 그 동안의 옛 가야지역 발굴조사 또한 5세기대 이후의 유적에 집중되어 있어 4세기대의 가야사는 알 수 없는 시간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 부여족 남하설은 가야사에 있어서 잃어버린 4세기대를 복원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다만 이것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될 수 있을지는 다각도로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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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떻게 한반도 남부에서 지배세력의 재편이라는 큰 변화를 가져왔던 사건이 『삼국사기』와 같은 문헌기록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을까? 물론 이러한 일들은 역사속에서 비일비재하게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당시 부여인들이 문자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앞의 기록에서 보듯이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로 교류를 했으므로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농경정착민들과 달리 이동성이 강한 그들의 성격상 기록의 보존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는 기록으로 남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활동이 원래의 모습과 다르게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낙동강하류역에 들어온 이 집단은 피정복자들의 눈에는 침입자들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기존의 토착민들과 동화하면서 정착하였을 것이므로 후에 그들의 역사를 기록할 때 자신들을 정복자로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신화 등의 형식으로 표현했을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군가에 의해 침입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정복했던 당사자가 그 후의 역사 전개과정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현재 우리들에게 가야에 대한 역사를 전해주는 자료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지만 이것은 3세기 말에 비해 훨씬 이후에 만들어진 책이다. 더구나 『삼국사기』처럼 신라 중심적인 편찬 자세를 취한 기록에서 가야의 구체적인 정황이 제대로 반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해보면 부여족 남하와 관련된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한편 부여족 남하설은 한국판 기마민족설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40년대 일본의 동양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에 의해 제기되었고, 1970년대 미국의 동양학자 레드야드교수에 의해 보완된 ‘기마민족설’은 ‘일본열도 내 기마민족 정복왕조론’의 약칭으로 고대 일본이 동북아시아 계통의 외래 기마민족에 의해 정복당했다고 보는 학설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서기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 북방의 오호민족(五胡民族)이 중국의 화북지방으로 이동할 무렵, 고구려와 가까운 퉁구스 계통의 북방 기마민족의 일부가 새로운 무기와 말을 가지고 한반도로 남하하여 한반도 남부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한 변한지역을 정복하였다고 한다.
또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조에 보이는 삼한세력의 연맹장인 진왕(辰王)은 이 남하한 퉁구스계 족속의 지배자였다는 것이다. 이들 기마민족은 4세기 초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 북큐슈 츠쿠시(筑紫) 지방에 도착하여 토착세력을 정복하여 왜·한 연합왕국을 건설하였다. 이후 4세기 말경에는 다시 키나이(畿內)로 진출하여 야마토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전자를 제1차 건국으로, 후자를 제2차 건국으로 보았다.
이 가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애초부터 한국사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사에 대입하게 되면 일본열도내 세력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는 점에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관점이라는 것이다. 즉 야마토 정권을 세운 기마민족은 원래의 근거지였던 한반도 남부 지역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특정 종족의 이동과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관점에서 출발한 부여족 남하설이 기마민족설의 재판이 아닐까 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여족 남하설은 이러한 기마민족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역사를 보는 관점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에가미 나미오는 일본열도를 정복한 기마민족이 일본열도로 건너가기 전의 근거지였던 한반도 남부지역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다고 파악한 데 비하여 신경철 교수는 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왜계(倭系) 유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마민족설을 그대로 따른다면 이 유물들은 왜에 의한 가야 지배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유물 출토양상은 당시 가락국이 왜보다는 훨씬 선진지역이었음을 보여주며, 이 지역이 왜에게 선진문화의 전달창구로서의 역할을 한 것을 증명해준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파형동기(巴形銅器), 통형동기(筒形銅器), 벽옥제품(碧玉製品)들은 일본 고분시대 전기 수장들의 특수물품으로 왜의 수장이 가야의 철을 중심으로 한 선진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일종의 성의 표시로 바친 교역품의 일부로 파악된다. 특히 그 동안 일본에서만 출토되던 통형동기와 같은 유물은 그 원류가 가야쪽에 있었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이러한 점은 기마민족설에서 말하는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가설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부여족 남하설은 앞으로도 많은 검토와 연구가 축적되어야 하는 현재진행형의 학설이다. 이를테면 3세기 말 4세기 초에 별다른 지배층의 교체 없이도 경주지역은 덧널무덤의 평면형태가 변화하고 있으나 특정종족의 정복이 수반되었음에도 선행 무덤의 파괴는 있었지만 이전 시기와 동일한 무덤형태를 고수했던 것에 대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또 선행 무덤의 파괴를 과연 정복의 결과로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인지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에 대해서도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되어 단순한 북방문물의 전파 및 교섭의 산물이 아니라 북방민족의 직접적인 이동의 결과라는 것을 보다 더 명쾌하게 밝혀 주어야 할 것이다.
부여족 남하설이 당시의 역사적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헌에서 외면당한 3세기 말 4세기대 가야를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만으로도 이 학설은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
더욱이 가야라는 국가의 성립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고, 지배세력의 성격을 명확히 함으로써 가야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켰으며, 북방민족의 정치적 변동을 한반도 남부사회와 연결하여 가야사를 동아시아 고대사의 흐름 속에서 살펴 볼 수 있는 큰 틀을 제시하였다. 또한 제2의 임나일본부설이라 할 수 있는 기마민족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오히려 가락국에 대한 왜의 문화적 종속성을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왜곡된 임나일본부설을 불식시켰다.
1990년 김해 대성동의 얕은 언덕에서 1700여년 만에 찬란한 햇빛 속에 드러난 무덤들은 이처럼 그들의 자태만으로도 잊혀진 가야의 역동적인 역사를 우리들에게 조용히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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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레시안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3> 압록강을 건너 한강으로
기사입력 2008-10-24 오전 8:09:56
부여계가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한국의 사학계는 부정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부여계의 남하에 대한 연구는 일본에서는 상당히 진행되었고 거의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록 가운데 신라의 경우 내물왕(356~402),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346~375), 고구려는 태조왕(53~146) 이전은 전설시대라고 하여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본 연구의 큰 흐름은 만주 지역에서 모용씨(慕容氏)에 의해 크게 격파된 부여계가 옥저쪽으로 피난 갔다가 대방으로 진출하여 백제를 건국했거나 한반도의 한족(韓族)과 연합하여 고대국가 백제를 건설했다는 논리인데 일본에서는 거의 정설로 되어있습니다.
이나바 이와끼치에 따르면, 285년 경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공격을 받은 부여의 잔여 세력들이 동옥저로 피난하여 정착했다가 4세기초 대방 땅으로 들어가서 백제를 건국한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이나바이와끼치는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 위례성(慰禮城)을 들면서 위례라는 말이 만주어의 우라(江城)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추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석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이왕 즉 부여왕 울구태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방을 무조건 황해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이 당시는 고이왕(234~286) 말년에 해당하는데 고이왕은 대방 땅으로 들어가서 백제를 건국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 대방 땅에서 요동부여(또는 남부여)를 건설했다가 공손씨(公孫氏)의 몰락과 함께 한반도 쪽으로 남하해갔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합니다. 설령 이 때 사용된 대방이 황해도라고 한다면 그것의 원인은 모용씨의 공격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이전에 위나라 명제(明帝)의 명을 받은 사마의와 관구검에 의한 공손씨(公孫氏) 토벌이 그 이유라는 것입니다.
부여계의 역사에 대해 가장 주목할 만한 견해는 일본사학계에서 만주사에 대한 토대를 구축했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입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대표적인 식민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라토리는 4세기 초 동북아시아에서는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에서 한족(漢族)을 몰아내었고 전연을 건설한 모용씨(慕容氏)가 크게 성장하여 주변을 압박한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 과정에서 부여계가 대이동을 했으며, 이 대이동으로 한반도에서도 씨족제도(clan system)에 기반 했던 백제(伯濟)가 고대국가 백제(百濟)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4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백제를 포함한 삼한은 씨족제도 수준에 불과했는데 부여계의 대이동에 의해 고대국가로 탈바꿈했다는 말입니다.
285년 모용씨에 의해 큰 타격을 받은 부여왕가의 일족이 옥저(현재의 함흥 지역)로 피난 갔다가 313년 대방군이 축출되자 주변의 예맥과 함께 서진하여 대방을 점령하기 위해 국제전쟁에 참가하던 가운데 한반도에서 북상한 강력한 세력인 백제의 걸사(乞師)의 요청을 받고 이들을 구원하고 연합하여 통일국가로 백제를 형성하였다고 시라토리구라키치는 주장합니다. 당시 새로운 국가는 부여족에 의해 장악되어 지배층을 형성하게 되었고 삼한의 한족(韓族)들은 피지배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적인 정권교체는 백제라는 나라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 주요한 예가 된다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타당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당시 한강유역의 백제(伯濟)를 과대평가했다는 것과 부여계의 이동을 대방군의 점령이라는 사건과 연계를 시킨 것입니다. 즉 시라토리의 분석의 문제점은 당시 삼한 지역에서 절대강자였던 백제가 부여족과 연합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백제라는 존재가 드러나지 않으며 백제가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소국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고 그 이름 또한 백제(伯濟)로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의 미약한 소국들 가운데 절대 강자는 오히려 만주에서 이동한 부여계입니다. 그들은 한 때 공손연과 더불어 중원을 도모했던 사람들이고 『후한서』와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들 요동지역의 부여계는 당시로서는 고대국가로서도 대규모인 2만여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즉 『삼국사기』(태조대왕 69)에는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가 군사 2만을 이끌고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니) 고구려가 대패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라토리구라키치의 분석은 대륙의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한반도 남부의 정치세력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본 것도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이왕 계열의 부여계의 남하는 공손연의 몰락과 관계된 것이지 모용씨와 관계있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더구나 대방군의 점령(245)과 연계시키는 것도 잘못입니다. 시기적으로 너무 늦게 일어난 일이라 맞지 않습니다.
모용씨의 타격으로 부여계가 궤멸한 것은 285년으로 이 때는 고이왕(234~286)이 서거한 시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북사』등에는 구태(고이왕)라는 분이 백제의 건국시조로 나타나는데 그러면 도대체 언제 백제를 건국하여 발전시킵니까? 고이왕이 한반도로 내려오기 전에 백제는 없었지요. 한반도에는 수십개의 소국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이름없는 백제(伯濟)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바로 246년(고이왕 12년에 해당) 위나라와 고구려의 요동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전쟁의 후반부에서 고구려는 유격전술과 탁월한 전투의지로 위군을 결국 몰아냅니다.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전쟁이 종결되어 압록강에서 요하지역까지는 상당한 힘(Power)의 공백상태가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한반도 남부로 내려간 부여계는 상당한 시간적 여유를 벌게 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 시기 부여계의 적은 위나라와 고구려였습니다. 고이왕의 부여계는 상대적으로 약화된 틈을 최대한 활용한 것입니다. 또 다른 수혜자는 선비계의 모용씨입니다. 즉 위-고구려 전쟁으로 양국이 모두 타격을 받은 사이에 모용씨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부여계는 각종 체제정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임나일본부설을 제창하여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주장한 스에마쓰 카즈요시(末松保和)는 만주에서 크게 침공을 받고 고립된 부여계가 옥저지역(현재의 함경도 지역)을 거쳐 마한(馬韓)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인 백제(伯濟) 지역으로 남하하여 머무르다가 마한을 통일하였고 이 과정에서 350년경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견해의 문제점은 부여계의 이동이 3차에 걸쳐서 일어난 점을 간과하고 있으며 『북사』,『주서(周書)』,『수서(隋書)』등에 명백히 구태(仇台)가 백제를 건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일본의 백제 건국에 대한 인식은 주로 만주에서 모용씨(慕容氏)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이에 쫓겨서 옥저 지역(함경도)으로 피신하였다가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국을 건설하였다는 것이 주된 논리입니다. 이것은 일본사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또 백제가 건국된 시기는 모용씨가 제국을 선포한 시기(352년)와 백제가 중국에 조공을 시작한 때(372년) 사이에 백제의 건국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즈노유(水野祐) 교수는 "백제의 건국연대는 4세기 전기 근초고왕이 즉위한 346년경이며, 신라의 건국도 356년 경"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본의 사학계는 고구려가 강성해지고 그 세력이 남하하면서 생긴 위기감이나 압박이 백제와 신라의 건국을 촉진하였다는 식으로 분석하는 경우가 많지요. 예를 들면,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고구려의 남하에 자극되어 늦어도 4세기 중엽에는 백제, 신라 등의 국가가 형성되었다."라고 하고 우에다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4세기 초 고구려의 강대화는 조선 남부의 정치세력에도 변동을 주어 제 한국의 지역통합을 자극하여 마한의 통일에 의한 백제왕국의 출현,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신라왕국의 건설 등이 그 구체화된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사카모토요시타네(坂元義種) 교수는 "370년에 마한에 백제가, 진한에 신라가 대두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일본사학계의 분석은 한국사학계와 마찬가지로 관념 속에 탁상에서 논의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남하는 백제의 건국과정과는 실제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고구려의 남하는 오히려 열도부여의 건설을 촉진한 것입니다. 반도부여는 부여계의 이동에 의해 생긴 세력이지 고구려의 남하에 자극을 받아서 생긴 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일본사학계 논리의 문제점은 ① 백제의 시작을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한다는 점, ② 부여가 한반도와의 연계를 가진 시기를 근초고왕 이후로 보고 있다는 점, ③ 모용씨 이전의 변화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으며 고이왕계가 한반도 방면으로 남하해 온 점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 ④ 일본의 건국과 관련하여 백제의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하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본 사학계의 연구태도의 이상한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일본 사학계에서는 백제의 기점을 고이왕으로 보면 안된다는 절박함이 있다는 얘깁니다. 부여계의 남하가 열도부여의 야마토 왕조를 건국한 사실에 대해서 이들은 이미 다 아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백제의 시작을 굳이 근초고왕으로 본다는 것은 열도부여가 반도부여(백제)를 거점으로 하여 성립되었다는 점을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설령 야마토 왕조가 근초고왕 또는 개로왕의 후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궁극적으로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열도에 도달한 시기를 근초고왕대로 잡게 되면, 한반도는 부여계가 단지 지나쳐가는 장소에 불과하게 된다는 논리지요. 즉 부여계는 만주에서 열도로 이동하여 일본을 건설을 하였는데 한반도 지역의 반도부여의 거점이나 지원은 불필요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열도를 장악한 부여계가 군대를 돌려 한반도를 식민지화할 수 있었다는 논리를 만들어가는 작업이지요.
하나의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백제가 한강에서 자생하여 거대 제국을 만들었다는 한국의 사학계만큼이나 한심한 것이 일본의 사학계입니다. 이들은 서로를 식민지화하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 같습니다. 한국은 일본을 무조건 백제의 식민지라고 합니다. 반대로 일본은 한국이 일본의 오랜 식민지였다고 합니다.
일본의 연구 가운데 고이왕에 주목한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예컨대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는 『주서(周書)』와 『수서(隋書)』의 기록(구태라는 자가 있어 대방의 고지에 백제를 세웠다)들을 근거로 하여 백제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미천왕은 사마염의 서진(西晉)이 무너지고 모용씨가 중국의 군현을 압박함으로써 요서지역의 힘의 공백 상태가 초래되었는데 고구려의 미천왕(300~331)은 이런 정세를 활용하여 낙랑과 대방을 합병합니다. 이후 미천왕은 구태(仇台)라는 인물을 대방의 고지에 파견하여 군사령관으로 삼았는데 구태는 주로 중국인 주민들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고 합니다. 그후 342년 전연(모용씨)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큰 타격을 입었을 때 구태는 자립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것입니다.
오카다 히데히로의 견해는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구태에 대한 분석이 잘못되었습니다. 즉 오카다히데히로의 견해는 ① 구태를 미천왕 당시의 인물로 추정한 점(사실은 부여왕 울구태), ② 구태가 새로운 점령지의 군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는 근거를 알 수가 없다는 점, ③ 모용씨의 성장으로 요동·요서 지역이 사실상 전쟁터가 되어있는데 그 와중에서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점 등의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제의 건국에 있어서 구태의 역할을 강조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억측에 가까운 견해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여계의 남하에 대한 일본의 여러 연구들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부여족 남하설'과 '기마민족 신라정복설' 등으로 더욱 체계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여족 남하설의 내용은 부여족이 김해 지역을 점령하고 금관가야를 건국했다는 것인데 그 근거는 대성동고분군과 동래의 복천동 고분군 가운데 3세기말에서 5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구릉 정상부의 목곽묘라는 것입니다. 이 지역들은 구야국과 독로국의 중심 지역인데 3세기 말부터 도질 토기의 출현과 함께 북방의 유목민족 특유의 유물과 습속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대성동 유적과 양동리 유적에서 출토된 오로도스형 동복(양쪽에 끈을 매달 수 있는 이동식 솥)은 부여의 중심지였던 길림성 북부지역의 출토품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물론 그 근거는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으로 부여가 사실상 와해되고 그 일파가 장백산맥을 넘어 북옥저(현재의 두만강 하류 지역)로 이동했다가 다시 동해안 해로를 통해 김해지역에 정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마민족 신라정복설'의 주된 내용은 3세기말부터 4세기 초 사이에 동아시아 기마민족의 대이동의 와중에서 그 일부가 신라 쪽으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신라의 적석목곽분(금관총, 천마총 등)이 유독 경주 분지에만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적석목곽분은 주로 중앙아시아에 널리 분포되어있는 것으로 유목민족들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입니다. 그런데 이 적석목곽분이 4세기 초에서부터 6세기 초까지 느닷없이 경주를 중심으로 조성되었고 그 주인공은 왕족과 귀족들이었으며 이 고분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이 대부분 북방계의 유물이라는 점 등을 들고 있습니다.
가야의 정치구조 -'부체제' 논의와 관련하여-
[출처] 문사철 http://cafe.daum.net/koreanLHP/DW/167http://cafe.daum.net/koreanLHP/DW/167')">
가야의 정치구조-'부체제' 논의와 관련하여-
백승충 白 承 忠(釜山大)
1. 머리말
근래 한국고대국가론의 전개와 함께 사회발전단계에 대한 전향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가야 관련 고고자료의 축적에 따라 가야의 시원이라든지 사회발전단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야의 시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형편이지만, 적어도 사회발전단계에 대한 시각에서는 '부체제'의 논의 등 가야에서의 '고대국가' 성립 가능성을 한층 높혀 주고 있다. 즉 '연맹'이라는 외형적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재해석과 함께 사회운용의 원리라는 내적 발전의 측면이 강조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합천 출토 토기에 새겨진 '下部思利利' 명문은 가야에서의 '部'의 존재 유무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아래에서는 가야의 왕권을 중심으로 정치구조의 변화양상을 살펴볼 것인데, 왕호의 변화 특히 《日本書紀》에 보이는 '旱岐'층의 분화와 '下部思利利' 명문을 통해 가야에서의 왕권의 의미를 검토할 것이다.
2. 왕호의 변화
가야제국 가운데 사서상으로 '가야'로 범칭되거나 '대가야[락]'로 불리어진 것은 김해 가락국(혹은 남가라)과 고령 가라국 뿐이다. 후대인들의 인식상으로 두 지역이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기술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가야 당대의 정치형세를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6(5)가야' 관념도 마찬가지이다). 함안의 안라국도 가야의 중심세력일 가능성이 높은데, 史書上으로 '가야' 혹은 '대가야'로 칭해진 결정적인 자료는 없지만 《日本書紀》에 '안라왕'의 용례가 보이므로 6세기 중반대에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했음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연맹체'(혹은 '소연맹체')의 존재가 상정된다면, 연맹제국에 대한 왕권의 행사가 제도적·실질적인 측면에서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야의 사회구조상, 삼국과는 달리 '통합보다는 분립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왕권의 확인에는 어려움이 있다.
왕호의 변화와 관련하여 우리 사서에서는 모두 '왕'으로 통칭되고 있기 때문에 그 변화과정을 알기가 어렵다. <駕洛國記>에서는 '9간'이 수로왕을 추대하고 있으므로 干→王으로의 이행과정은 확인된다. 그러나 '간'의 경우 원형은 '간기' 혹은 '한기'인데, 존칭 어미인 '기(혹은 지)'가 탈락하는 것은 6세기 중반이고, 《日本書紀》에서도 멸망할 때까지 '한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駕洛國記>에 보이는 '9간(기)'의 용례는 각간·아질간·급간 등의 직제와 마찬가지로 가야 당대의 것으로 볼 수 없고, 아마 신라에 편입된 이후 그 영향을 받아 첨입된 것이 확실하다. 다만 《日本書紀》 繼體·欽明紀에는 '王' '大人' '旱岐' 등 다양하게 보이고 있어 주목되는데, 먼저 계체기 이전의 관련 용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蘇那曷叱知(崇神65년 7월, 垂仁 2年 是月)
소나갈 질지(숭신65년 7월, 수인2년 시월)
(2) [都奴我]阿羅斯等, 于斯岐阿利叱智干岐(垂仁 2年 是月)
[도노아]아라사등, 우사기 아리 질지 간기(수인2년 시월)
(3) 卓淳王末錦旱岐(神功 46年 3月)
탁순왕 말금한기(신공 46년3월)
(4) 加羅國王 己本旱岐, 兒 百久至 阿首至 等, 加羅國王 妹 旣殿至(神功 62年)
가라국와 기본 한기, 아 백구지 아수도등, 가라국와 매 기전지(신광62년)
(5) 任那左魯那奇他甲背(顯宗 3年 4月)
임나 좌어나기타 갑배(현종 3년4월)
기년이라든지 내용 자체는 신빙성을 두기가 어려운데, (1)(2)의 叱知·阿羅斯等·干岐는 '(大)臣智'의 뜻을 가진 존칭 어미로서 가야의 왕호로서는 처음 등장하는 용례이다. 그러나 于斯岐/阿利/叱智/干岐의 경우 왕호가 중복되고 있기 때문에 그 선후관계를 알 수가 없는데, 阿利 계통인 阿羅斯等과 '一云'으로 전하는 '干[旱]岐'는 계체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른 시기 왕호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叱智[知]'의 '叱'은 모두 'ㅅ.ㅿ.ㄷ' 등의 음을 표시하므로 《三國志》<魏書> 東夷傳 韓條의 '臣智' 계통이 아닌가 하는데, '毛麻利(叱)智'(신공5년 3월)라고 하여 신라에도 보인다. '신지'는 삼한의 국 가운데 '대국'의 지배자를 가리키는 존칭인데, 3세기대의 변한 즉 가야에서는 구야국과 안야국의 지배자만이 이것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위의 '蘇那曷叱知'는 물론 《三國志》 韓條의 '狗邪秦支廉' 용례 모두 김해 가락국과 연결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三國遺事》 <駕洛國記>와 王曆에 전하는 가락국의 왕명과 왕족명(分叱水爾叱)에 '叱 혹은 尸'가 사용되고 있어 주목된다. 물론 인명에 붙는 어미인 '知' 혹은 '干'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데(阿叱干 등), 이후 '叱'은 '사이 시옷'으로 쓰여지다가 생략되고 6세기대에는 인명의 어미인 '智[知]' 즉 '치'만이 남게된다.
다음으로는 (3)의 卓淳/王/末錦/旱岐인데, 이것도 왕호가 중복되고 있다. 탁순국 관련 기록은 신공 49년조까지 연이어 보이는데, 기년을 조정하더라도 기사내용에는 의문점이 많다. 《日本書紀》에서 '王' 혹은 '旱岐'는 6세기 중반에 주로 보이고 있고, '말금'은 6세기 전반까지 쓰이고 있는 신라의 고유왕호인 '寐錦'과 음통한다. 麻立干의 異寫로서 君長 혹은 始祖로 해석하기도 하고, 음운상 이사금 즉 '니시기미/니시거미'→'니기미/니거미'에 대한 음차로 보기도 한다. 일본어에서 '니기'가 '君'의 훈차임을 참고해 본다면, 지배자의 뜻에서 유래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매금'은 광개토왕비문에도 보이므로 신라에서는 5세기 이후에는 사용된 것이 분명하지만, 가야에서의 위의 하나의 용례만 보이기 때문에 신라와 것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질 수는 없다고 하겠다.
한편 백제기를 인용하고 있는 (4)의 '己本旱岐'는 '가라국왕' 혹은 '한기'로 불리어지고 있다. '己本'은 인명임이 분명한데,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고호' 혹은 '고호무'(북본)로 발음되기 때문에 가락국의 왕계 가운데 찾아보면 구형왕과 통하는데, 그러나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으며 신라가 아닌 백제로 망명하고 있는 점이 차이가 있다. 또한 '임오년'이라고 하여 고령 가라국 멸망 해와 같은데, 가라국의 왕계 가운데는 이와 음통하는 인명은 발견할 수 없다. 이로서 추론해 보면 왕명은 가락국의 것을 취하고 멸망연대는 가라국의 것을 취한 조작된 기사가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위의 기사는 신공 62년의 사실이라기 보다는 가라국 멸망 때의 사정을 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加羅國王', '旱岐', '旱岐의 兒' 용례는 멸망 무렵에 보이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5)의 '任那佐魯那奇他甲背' 용례는 任那(총칭)+佐魯(특정 지역)+那奇他(인명)+甲背(백제의 관명)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나기타'는 5세기 후반 가야의 대세력으로 추정된다. 가야계 인명에 백제계통의 관명이 붙은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데, 아마 백제의 가야지배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덧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는 계체·흠명기의 용례인이다.
(6) 阿利斯等, 加羅의 己富利知伽, (安羅의) '國主'와 '國內大人一二'(繼體 23年 3月).
(7) 任那王 己能末多干岐[己能末多라함은 阿利斯等일 것이다](繼體 23年 4月).
(8) 阿利斯等, 久禮斯己母, 奴須久利(繼體 24年 9月).
(9) 卓淳의 (國)主(欽明2년 4월), 國의 函跛旱岐, 印支彌와 阿鹵旱岐(同 5年 3月條).
(10) '任那復建' 모임의 참석자(欽明 2年 4月條, 5年 11月條)
(11) 安羅王 加羅王(欽明 5年 11月條)
(6)(7)(8)에 보이는 阿利斯等(아리시도)은 '아리히도'와 통하여 그 원형은 '알 사람'인데, 혹 '阿利斯等'의 '斯'는 '叱'과 통하기 때문에 혹 '아릿·아랫'→'아래'의 음차로서 '下'를 나타내고, '等(도우)'은 '都利=公'으로서 달·들·돌·도(道, 훈으로는 梁)의 음차이기 때문에 '아리사등'은 '아랫도리'가 되어 '下等' 혹은 '下公'으로 표기가 가능하다. '干岐'로도 나오기 때문에 아리사등은 '하간기'로 볼 수 있어 한기층의 분화로 볼 수 있지 않을가 한다. (6)의 己富利知伽는 미상으로 처리하고 있는데, '고호리찌가'로 발음된다. 대벌간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 보다는 '간'의 인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6)의 '국주'는 안라왕을 지칭하는 것인데, (9)에서는 탁순국·탁국의 경우 '국주'가 '한기'로 칭하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6)의 '國內大人'은 다른 사례에서는 '國人'으로도 줄여서 사용되기도 하는데, '안라회의'에 참가하고 있는 신라·백제·왜 등의 '國外大人'의 상대개념이다. 국주에 이어 '國內大人 預昇堂者一二'으로 기술되고 있는 점을 볼 때 안라의 국주 즉 '안라왕'과 함께 '회의'에 참여하고 있어 국사와 관련된 중요한 회의 '국정참여집단' 내지는 '의사결정집단'으로 추정된다. 안라내에 1∼2인 이상 복수로 존재하므로 최고귀족계급으로서 일단 안라왕에 종속적인 '한기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점은 이후 '任那復建'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안라의 차한기가 3인으로 나오고 있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大人의 이 같은 성격은 고구려에서 大人=大加=古鄒加라는 등식이 성립하다든지, 夫餘에서 '大人'이 금 은으로 장식한 모자를 쓰는 등 상층귀족계급을 지칭하고 있다든지, 沃沮에서 고구려에 신속된 이후 使者가 되어 토착 渠帥와 함께 다스리는 존재로 나타나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각 국의 '대인'의 위상이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복속 집단의 장 혹은 유력자를 '大人'으로 편재하고 있음은 동일하다고 하겠다. 왜의 경우 '大人'이 下戶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묘사되고 있고, 고구려에서는 東部·西部 '大人' 등의 용례로 자주 나오고 있어 참고된다. 다만 《일본서기》의 용례에서, '大人'은 훈으로 '우시'이기 때문에 '下'의 훈인 '아루시'와 대비되어 혹 '上'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고, '우시' 즉 윗사람으로 보아 '上人' '首位'를 뜻하는 것으로 볼 여지는 있다. 이렇게 보면 대인은 구체적 사례가 보이는 '차한기'와 대비되는 '상한기'와 동일한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9)의 '阿鹵旱岐'가 주목된다. 근래 이 인물을 안라와 관련짓기도 하는데, 그러나 같은 해 11월조에 '안라왕'이 따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아로한기=안라한기=안라왕의 등식은 성립할 수 없다. '아로한기'는 안라왕 아래 소속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은데, '아로'는 일반적으로 인명으로 보고 있으나 '下'의 훈인 '아루'와 통하기 때문에 '하한기'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下'와 '次'는 같은 뜻이므로(동일인물에 쓰여지고 있다), '아로한기'는 안라에서 대인으로 범칭되는 상한기에 대비되는 '하[차]한기'의 구체적인 사례가 아닌가 한다.
(10)은 두 차례에 걸쳐 소집된 '任那復建'을 위한 모임의 참석자 명단이다.
<표> '임나복건(任那復建)' 모임 참석자 명단
참석자들은 '모한기(某旱岐)'와 '모수위(某首位)'(가라·다라 加羅·多羅)를 칭하고 있고, 여기에는 '旱岐(혹은 君)'와 '旱岐(혹은 君)의 子'들이 주체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旱岐는 君(기미)과 같은 격으로 쓰여지고 있는데, 군(君)은 군주·국주 (君主·國主)로서 '대국의 왕'과는 구별되는 '소국의 지배자'을 지칭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兒'는 '소국의 왕자'로 볼 수 있는데, 旱岐 혹은 그 '兒'를 파견하고 있는 졸마 산반해 사이기 자타 구차(卒麻·散半奚·斯二岐·子他·久嗟) 등은 이들 소국의 범주에 들 것이다. '한기의 兒'의 경우 모두 소국에서 칭해지고 있는데, '한기=소국의 지배자'의 등식이 성립하기 때문에 '兒'는 소국의 王子에 해당한다. 王子가 국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국에서는 어느 정도의 가부장적 세습체제가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안라·가라·다라 등은 旱岐를 직접 파견하지 않고, 하위직 인물을 파견하는 등 위의 소국들과는 격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참가제국의 면면을 볼 때 일부는 '한기'의 일부는 가라에, 일부는 안라에 속하지 않았을까 추론되는데, 정확한 실상은 알 수 없다. 다만 신공기를 제외하고는 임나제국에 의해 '왕'으로 불리어진 예는 (11) 한 기사밖에 없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흠명기 2년조에 성왕은 근초고왕대의 사정을 언급하면서 안라·가라·탁순한기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상통했다는 기사에서 '한기'가 쓰이고 있어 위의 '왕'의 용례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기술은 물론 백제의 가야제국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시간적인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旱岐'→'王'으로의 왕호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旱岐'는 중국사서와 《日本書紀》에서만 보이는데, 신라에서 많이 보이는 '간지(干支)'의 이사(異寫)이다. 신라의 경우 중국의 남조계통 사서에는 '旱支', 북조계통의 사서에는 '(尺)干'만이 보이는데, 계통의 차이인지 아니면 시간적 차이인지 검토의 여지가 있다. 다만 가야의 경우 합천 매안리비의 '四(十)干支'라든가 창녕 계성고분군 출토 토기에서 '大干' 명문 등 당대의 자료에서는 '干(支)' 계통만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安羅의 次旱岐(3人)는 下旱岐로도 표기되고 있는데, 上旱岐 혹은 旱岐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下級旱岐인 것으로 추측된다. 한기는 안라·다라에서만이 그 분화현상이 확인되는데, 가야의 한기는 멸망 때까지 '왕'과는 별도로 존재한 최고위 신분층이다. 가라·안라 등 우세 집단의 지배자는 '상한기'라고 하여 동질성을 부각시키기보다는 격을 달리하여 '왕'으로 불리면서 이들 한기층과는 구별했을 것이다.
'首位'는 加羅와 多羅에서만 보이는데, 加羅에는 '上首位', 多羅에는 '二首位'로 나온다. 다라국의 경우 '하한기'에 대비되는 존재로 '이수위'가 나오고 있는데, 자전상으로 '수위'의 '首'는 일반적인 의미로는 '선두' '상위'를 가리키는데, '君'과 통하고 또한 '大人'의 뜻도 있다고 한다. 이를 한기층과는 다른 비간계통의 가라국 직할지의 관제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어쨌든 사료상·고고자료상 가라와 다라는 다른 국들보다는 훨씬 일체감을 보인다는 점이 주목된다. '수위'로 칭해지는 구체적인 인물로는 '古殿奚'와 '訖乾智'가 있는데, 가라의 상수위로 나오는 '古殿奚'는 계체기의 '旣殿奚'(계체기 7년·11년)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문제는 전자는 '가라의 상수위'로 표기한 반면 후자에서는 '반파' 소속으로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약 30년의 뒤에 '가라의 상수위' 칭호가 추가된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그 사이 반파의 지배층이 '가라연맹체'에 완전히 귀속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수위층은 일단 한기층과는 별도로 존재하는데, 가라국왕의 직할지 내지는 '가라연맹체' 전체의 중요한 현안을 해결하기 파견된 인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보면 주변 소집단을 통합한 가야의 대세력인 안라와 가라는 왕, (상)한기, 하한기 등 최소한 세 계층으로 분화되고 가라와 다라에서는 '수위층'이 별도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상한기가 하한기에 대해 초월적 권력을 가진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지는 못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기간의 문제이고(실제 '상한기'의 용례는 보이지 않음) (11)에서와 같이 '왕'이라는 엄연한 초월적 권위는 별도로 인정되어야 할 것 같다. 가야의 한기층의 분화와 관련해서는 신라의 냉수리비와 봉평비에 보이는 간지층의 변화 양상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3. 가야의 왕권과 '제한기회의'
'아리사등' '대인'을 포함하여 한기층으로 구성된 대국의 상급귀족들은 왕권 아래에 놓이면서 고구려의 '제가회의' 혹은 신라의 '6부회의=제간기회의'와 같은 정책결정집단의 구성원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 한기층은 각종 정기·비정기 회의에 참석하였을 것인데, 정기적인 모임은 각종 제사 때 이루어졌을 것이고 비정기적인 모임은 공동의 군사·외교적인 문제 및 국내외 제국내 혹은 제국간 중요사항이 있을 때 이루어졌을 것이다(안라회의·임나복건회의 등). 봉평비를 통해 신라에서의 정월 15일이 6부인 전체의 의례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가야에서도 정월은 제사가 있는 달로서 특기되고 있어 주목된다. 당시 가야가 백제의 압박을 받던 시기임을 참고해 볼 때 가야에서도 이 날을 기해 한기층을 중심으로 군사·외교상의 중요사항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三國遺事》<駕洛國記>에는 가락국의 제사일로서 정월 3·7일, 삼월 계욕일, 5월 5일, 8월 5일·15일과 허왕후 기일인 3월 1일, 수로왕 기일인 3월 23일 등이 전하는데, 이 때에도 왕을 비롯하여 '한기층'이 모여 회의를 열었을 것이다. 신라의 경우를 참고해 볼 때 신왕의 즉위 의례가 행해진 정월에도 정기회의가 열렸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왕은 제의 및 각종 회의를 주도하는 연맹장 즉 왕권의 성격을 띠었을 것인데, 적어도 가라나 안라는 이 같은 수준의 사회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나한기들이 성왕의 세 계책에 대해 그 결정을 각각 안라왕과 가라왕에게 미룬 사례, 양산 출토 고령형토기(장경호)(6세기 중반 추정)의 '大王' 명문, 합천 매안리 가야비의 '而□村四(十)干支'(531년?)라는 구절 등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이외에도 가라연맹체를 주도한 맹주적 성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몇 가지 더 제시할 수 있다.
①자력으로 南齊에 견사하고 있다든지 本國 즉 '加羅' 전체의 王임을 천명하여 그 칭호를 요청하고 있는 점
②5세기 후반∼6세기 전반 신라는 가라국에 대하여 대등한 관계로서 인식한 점(구원병파견과 청혼의 성립)
③백제에 기문.대사의 반환 요청
④백제의 압박 속에 '대사' 방비를 위한 축성작업과 군사동원, 가라 소속 가야제국의 결속을 위한 우륵 12곡의 제작
⑤"탁국의 函跛旱岐가 加羅國에 다른 마음이 있어, 신라에 내응하여 加羅는 밖에서부터의 싸움과 합쳐 싸웠다."라는 구절은 곧 탁국이 신라에 경도되어 가라연맹체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는 점 등이다.
특히 우륵 12곡의 제작 동기, '수위층'이 공통으로 보이는 가라와 다라의 특수한 관계, 그리고 '종자(從者)의 제현산치(諸縣散置)' 등의 구절을 통해서는 대국 중심의 '지방'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고, '대왕'은 신라·백제의 경우 주변지역에 대한 통합과정과 어느 정도 진척되어 지배 이데올로기가 갖추어진 시점에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가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맹주권 행사를 확인할 수 있는 이상의 자료를 참고해 볼 때, 가라연맹체의 극성기는 남제(南齊)에 견사(遣使)하는 하지항대(荷知王代)에서 우륵 12곡이 만들어지는 희실(嘉悉王代)에 걸치는 50년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479년∼520년대). 이후 백제가 주도한 두 차례의 '임나복건' 모임을 통해 가라연맹체는 분열 양상을 보이지만, 안라의 경우는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군사·외교상의 단일 창구를 운영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3. 가야의 '부' 문제
가야 특히 고령 가라국에서의 '부체제'의 존재 문제는 근래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가야에서 '부체제' 논의를 촉발시킨 것은 합천 저포리 4호분 봉토 출토 단경호 구연부에 새겨진 5자의 토기명문이다. 구연부에 글자를 새기는 경우는 중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데, 만약 본 명문이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로 판독된다면 '하부(下部)'는 부명이 되고 '사리리(思利利)'는 인명이 된다. 《日本書紀》의 가야인명 용례를 참고해 보면 대개 3∼4자 많고 인명의 어미로서 '利'가 사용된 예가 많이 보이고 있다. 《日本書紀》에는 대개 부명+관등명+인명의 원칙은 지키고 있으나, 고구려의 경우 부명+인명의 예도 보이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는 되지 않는다. 자전상의 '部'는 지역·구역·경계·장소 등의 범칭에서부터 주군현 등 행정구획의 통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몽고에서는 부락을 편제하면서 기(旗)가 합하여 부(部)가 되고, 부(部)가 합하여 맹(盟)이 된다고 하고, 중국 남북방 종족에서는 취락의 칭호로서 '8부대인(8部大人)'의 용례가 보인다. 기존의 연구에서도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부' 용례의 다양성으로 인해 그것의 일률성·정형성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삼국에서는 소도를 중심으로 지방세력을 편제한 공통점은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볼 때 대국인 가라국 인근 합천지역에서 '下部' 명문이 출토된 것을 우연한 것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라국 내부의 '하부'의 존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 '思利利'의 출신지역이다. 백제의 관료나 기술자 혹은 百濟 下部人 혹은 백제와의 교류 등과 결부하여 '思利利'를 백제 출신으로 보기도 하지만 가야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당시 가라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 행사는 충분히 예상되지만 가야 잠식 이후 기문·대사에서와 같이 백제의 지방관인 '군령·성주'의 파견 등 백제(百濟)의 하부인(下部人)이 가야지역에 상주할만한 적극적인 계기는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부(下部)'는 우륵12곡(于勒12曲)의 '상하가라도(上 下加羅都)'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加羅'와 '都'가 공통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은 주목되는데, 이들 용례는 중심지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都'는 자전상으로도 왕기 중심의 백리의 땅(채지), 제후의 下邑, 행장구획명 등으로 사용되고 있어 왕기 중심의 땅을 지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部'와 '都' 모두 왕경을 중심으로 쓰인 용어라는 점에 일단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가라국의 왕권은 주변 소집단들에게 '下部'라는 部名을 사용토록 할 정도로 가야지역 가운데서도 선진적이었거나 중심부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며 '수위층'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 본 명문 출토 고분군의 유물이 크게는 고령계통의 영향을 받지만(고령계토기) 합천 옥전고분군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有刺利器 등) 가라국(池山洞古墳群)→玉田古墳群, 玉田古墳群→苧浦里로 이어지는 가라연맹체의 중층적 구조도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상·하가라도는 왕기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고, 상·하부는 전자에 의해 관할되는 직할지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가라연맹체를 구성하는 제국들이 대개 가라의 대외교통로상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지만 삼국과 같이 지방세력이 중앙귀족화한 구체적인 사례는 찾기가 어렵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가야 전체를 통할하는 '제한기회의체'를 상정하는 것이 주저되는데, 만약 상정된다고 하더라도 그 범위는 광역의 가야제국이 아니라 직할지 내지는 인근 지역에 국한될 가능성이 높다. 즉 가야에서는 전 지역에 각 부가 편제될 정도로 아직 주체제가 지방에까지 확산되지는 않은 이완된 통치구조를 가졌고, 부체제의 적용은 '수위층'과 연결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가야 정치체제 (Gaya’s Political System )
홍익대 김태식
가야의 정치체제가 어떤 수준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가야에는 국(國)을 칭하는 10여 개의 정치체, 즉 소국(小國)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기 분립되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고, 그들 사이에는 하나의 맹주국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聯盟體)라는 통합된 질서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고, 그 맹주국이 하나가 아니라 3~4개 있어서 몇 개의 소지역연맹체(小地域聯盟體)를 이루고 있었을 뿐이라는 견해도 있고, 백제나 신라와 같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이루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모든 견해는 각자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야의 여러 소국들은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4세기 이전의 전기 가야연맹 시기에, 변한 소국의 지배자인 거수(渠帥)들 사이에는 세력 크기에 따라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라는 다섯 등급의 호칭이 있었습니다. 이는 변한 소국들 사이에서 상호간의 규모와 서열에 따라 일정한 차등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 구야국 신지[拘邪秦支]와 안야국 축지가 가장 서열이 높았으며, 다른 소국들은 대외 관계에 있어서 그들의 결정을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발굴된 1~4세기의 유물과 유적이 함안보다는 김해 지방에서 훨씬 더 풍부하게 출토된 점으로 보아, 안야국(安邪國)보다는 구야국(狗邪國)이 더 우월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므로 변한 12국은 김해의 가락국(=구야국=가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전기 가야 소국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세기 이후의 후기 가야연맹 시기에는, 가장 많을 때는 20개 소국, 적을 때는 10개의 소국들이 고령의 대가야국(=가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소국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소국들의 지배자는 크기나 규모에 따라 호칭이 달랐으나 대체로 한기(旱岐),차한기,하한기,간기(干岐; 간지),검감,군(君)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맹주국의 지배자는 ‘왕(王)’의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시기에 고령의 대가야국(大加耶國)만이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나, 540년대 이후로는 함안의 안라국(安羅國)도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어서, 가야의 여러 소국들이 그 내부에서 남북 이원체제(南北二元體制)를 이루고 있었던 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맹장의 권한으로는, 소속국에 대한 세금 징수, 인력 동원 또는 징발, 소국 사이의 분쟁에 대한 조정, 전쟁과 같이 연맹 전체에 영향이 미치는 중요 대외정책의 결정, 연맹체의 결정에 불복하는 소국에 대한 징계 등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연맹장은 소속국 수장의 지위를 보장해 주고, 소속국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가야 연맹장의 권한은 때로는 강하게 발휘되기도 하였으나, 주변 정세의 변동이나 내분 등의 요인에 의하여 약하게 발휘되기도 하는 유동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령의 대가야국만은 휘하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신라와 같은 부체제(部體制)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부체제’란 현대의 연방제 국가와 비슷하게, 그 내부에 여러 소국들이 있어서 그들의 자치권이 인정되나, 외교권은 왕권에 의하여 통제되어 외부적으로는 단일한 국가 이름을 사용하고 대외관계의 창구가 단일화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부체제를 이루었다면, 이는 이미 중앙집권체제를 이룬 고대국가 초기 상태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에 대한 증거가 너무 미약하여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Gaya’s Political System ▶ The Gaya Confederation, the rights of the Confederation's leader, and the “Bu System” Historians are divided over Gaya's political system. Gaya was comprised of ten political bodies called Guk (國), or small states. The states existed separately, but were integrated as a confederation under the direction of one leading state. The leading state was not actually just one state, but represented three or four states within a regional confederation. The Gaya, some historians have argued, established a centralized state system that resembled that of Baekje or Silla. The predominant view, however, is that Gaya's small states formed a confederation. At the time of the early Gaya Confederation before the fourth century, five levels were recognized among the states. These levels were Sinji, Heomcheuk, Beonye, Salhae, and Eupcha. Each varied in size and influence. Among the states of Byeonhan, Guya-guk's Sinji and Anya-guk's Chukji ranked highest, so other small states could not but follow their decisions in foreign relations. As more relics from the first to fourth centuries have been found in Gimhae than in Haman, Guya-guk must have been more powerful than Anya-guk. Therefore, it can be argued that the twelve states of Byeonhan were integrated into Garak-guk (Guya-guk or Gaya-guk) at Gimhae to form the early Gaya Confederation. By the advent of the late Gaya Confederation in the fifth century, at least ten and at most twenty small states had formed a state confederation with Goryeong's Daegaya-guk (Gara-guk) at its head. The rulers of the small states used the title Hangi (旱岐) or Gun (君) in general, but specific titles varied according to the size or scale of states. The ruler of the Confederation's leading state used the title “King” (王). In general, Daegaya-guk laid claim to the title of “King.” However, after the 540s, Haman's Anla-guk also used the title. This tells us that many of Gaya's small states were part of another Gaya political system in the interior. Kings had far-reaching rights within the Confederation. The kings had the right to levy taxes and requisition labor from all states under their jurisdiction. They also resolved disputes or conflicts among confederation members, formulated foreign policy, and rebuked or punished disobedient member states. Confederation leaders buttressed chiefs’ positions and protected attached states in the event of invasions. However, the power of the Gaya Confederation's leader was not necessarily consistent and could vary as a result of external or internal pressures. Many historians believe that onl y Goryeong's Daegaya-guk managed to construct a “Bu System” (部體制) as in Silla by integrating the small states under its command. A “Bu System” was a feudal-like state, or collection of several fiefdoms with some degree of self-government. Such fiefdoms shared a common currency and acted as one unit on questions of foreign policy. If Gaya constructed a “Bu System” it would mean that it had achieved the true status of an ancient state with centralized authority. While this is an intriguing argument, the evidence in favor of this view is still scanty at best.
[영문]
The Political system
Taesi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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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문사철 http://cafe.daum.net/koreanLHP
가야연맹체제(加耶聯盟體)의 각부제 성립여부(部體制 成立與否)에 대한 소론(小論)
김태식 金 泰 植 (弘益大)
1.
하나의 정치세력이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대개 小國-小國聯盟體-部體制의 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보이는데, 가야(加耶)는 과연 고대국가 초기 단계에 해당하는 부체제(部體制)를 이루었을까?
가야제국이 연맹체를 이루었는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 반면에, 가야는 이미 部體制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즉, 5세기 후반 이후의 대가야국(大加耶國)은 단순히 주변을 포함하는 연맹체의 맹주국에 머무르지 않고 중앙집권화가 상당히 진전되어, 관료조직이 정비되고 부체제(部體制)가 성립되는 등, 백제, 신라에 비견될 수 있는 령성국가(領域國家)로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야사를 이처럼 발전적으로 보려는 연구자가 많아지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나,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적용할 수 있는가는 좀더 새겨볼 여지가 있다.
특히 많은 학자들이 합천 저포리 출토 호(壺; 전날(신라(新羅) 시대(時代)) 고승(高僧)이나 귀족(貴族)을 화장(火葬)하여 뼈를 갈아 담아 묻던 단지)에 새겨진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 명문을 들고 합천지역의 정치체인 多羅國이 대가야의 下部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이 호(壺)의 존재 만으로는 증거가 부실하다. 왜냐하면 그 평저광구호(平底廣口壺)는 대개 6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것으로서, 그 시기에는 가야가 일시적으로 백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고 또한 <<日本書紀>> 흠명(欽明) 2년 및 5년 조에는 多羅國이 외교상으로 加羅國과 구별되는 나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당시에 多羅國이 대가야의 下部로 속해 있었다면 두 차례의 泗 會議 때 자신의 독자적인 사신을 파견할 수 없어야 마땅할 것이다. 540년대 이후로 가야지역의 여러 소국들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그로부터 문물의 전수를 받기도 하고, 또한 당시의 백제에는 호부호방제(五部五方制)가 확립되어 사료상 '하부모모(下部某某)'라는 인명 표기가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 인명이 백제에서 파견된 관료나 기술자의 것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2.
여기서 약간 관점을 돌려서 신라의 部體制에 대한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가야와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출토유물상으로 보아서도 대략 4세기대까지는 유사한 발전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가 언제부터 部體制로 들어갔다고 하면 시기상으로 일정하게 가야와 비교될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신라의 部體制 성립 시기에 대한 諸說로는 나물마립간이전 2부체제설(4세기 중엽∼7세기 전반; 末松保和 1936), 자비마립간 12년설(469년; 李丙燾 1937), 나물마립간이전∼지증마립간대설(4세기 중엽∼6세기초; 金哲埈 1952), 눌지마립간대∼소지마립간대설(5세기초∼5세기말; 盧泰敦 1975), 유리왕 9년설(A.D.32년; 丁仲煥 1962, 李文基 1981, 李鍾旭 1982, 崔在錫 1987), 이사금시기 3부체제설(1∼5세기 후반; 朱甫暾 1992), 紀年修正 유리왕 9년설(3세기 중엽; 全德在 1992) 등이 있다.
기존설의 추이를 살펴 보면 초기에는 신라의 部體制 성립 시기를 5세기 후반 이후로 보았으나, 최근으로 올수록 그 시기를 점점 올려잡아 3세기 중엽까지 올라갔으며, 그 중에는 1세기초로 올려잡은 견해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신라의 국가 권력 집중도를 초기에는 낮게 평가하다가 점차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部體制에 대한 개념이 학자에 따라 점차 변화함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이며, 혹은 <<三國史記>> 초기 기록의 신빙성 및 紀年 문제에 대한 理解의 相異에서 오는 혼란도 있다고 하겠다.
그중에서 部體制의 개념 변화 추이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초기에는(이병도) 都城의 행정구역을 6부로 구분하고 그 위에 6部貴族制가 운영된 시기를 6部制라고 칭하였다. 두 번째로 部體制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고(김철준) 이를 체계화한 단계에 와서는(노태돈) 연맹 소속국들의 외교권이 왕권에 의하여 통제되어 대외관계의 窓口가 단일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시기를 중시하였다. 세 번째로 최근에 와서는(주보돈, 전덕재) 部體制를 맹주국의 중앙집권 능력이 비교적 강화된 연맹체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첫 번째 개념의 都城 중심의 6부귀족제는 신라에서 5세기 후반에 일단 성립하였다고 하나, 가야에서 이런 정도의 중앙집권체제를 달성한 흔적은 찾기 어렵다. 두 번째 개념의 部體制는 신라에서 4세기 후반 내지 5세기 전반에 성립하였다고 하나, 가야에서는 성립 여부가 불투명하다. 세 번째 개념의 部體制는 신라에서 3세기 후반이면 성립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런 정도의 것이라면 후기가야연맹이 융성하는 5세기 후반에는 물론 달성되어 있고 전기가야연맹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3세기 후반경에도 같은 위치에서 논할 수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가야에 대하여 충분한 문헌 기록은 없다고 하여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통하여 3∼4세기 당시의 신라-가야 사이에 대등한 전투 장면을 추정할 수 있고, 3세기 후반부터 4세기에 걸치는 김해 대성동 고분과 경주 구정동 및 황성동, 월성로 고분의 사이에는 목곽의 규모와 유물의 질량 면에서 별다른 차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세 번째 개념의 部體制는 아직 정밀한 개념 정리가 부족하고, 충분한 학계의 공감을 획득하였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3.
그렇다면 가야가 두 번째 개념의 部體制 단계에 도달하였는가의 여부를 대략 살펴 보고자 한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小國聯盟體와 部體制의 차이점이다. 이에 대한 기존 설의 개념 정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즉, 部가 成立된 삼국의 왕은 삼한의 辰王과 같은 단순한 연맹장과는 다르니, 辰王 혹은 馬韓王의 실제상의 위치와 기능은, 언어와 풍습 또는 동일한 지역 등에 따른 연대의식(連帶意識)을 갖고 있는 한족전체(韓族全體)의 상징적인 지도자로서, 주로 종교행사나 일시적인 외족(外族)과의 전쟁 등에서 전체의 통솔자로서 활약하였을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반 통치행정 면에선 그는 諸韓國 중 비교적 큰 目支國의 長일 뿐이고, 餘他의 諸部族國家들은 漢과 독자적으로 교섭도 하면서 자치적으로 움직여 나갔다고 하였다. 그에 비하여 삼국의 部의 성립은 삼국의 발흥지역의 諸部族들이 어떤 한 有力部族을 중심으로한 집권력에 의해 그 운동력의 일부를 상실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諸部聯盟體의 일원으로 통합되어짐을 뜻한다. 그중에서도 對外交涉窓口의 一元化는 곧 대내적으로 초부족적인 국가체제의 성립을 의미하니, 각부의 自治權은 인정되나 外交權과 貿易權은 박탈당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 위에 나타난 개념 정의를 위주로,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가야연맹체의 내외 상황을 살펴 보자.
대가야의 가실왕(嘉悉王)은 가야금(加耶琴)을 만들고나서 악사(樂師)인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于勒)에게 12곡을 만들게 하였다. 또한 우륵 12곡 중에 사자기(師子伎)와 보기(寶伎)라는 2개의 기악곡(伎樂曲)을 제외하고 나머지 10개는 대가야를 포함한 각 소국의 고유 음악을 가야금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마다 국가의 전통적인 의례(儀禮)를 행하는 날에 각 소국의 장(長)이 대표로 대가야의 궁정에 모여 그들의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는 행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성열현(省熱縣)은 현재의 의령군 부림면으로서 <<日本書紀>> 흠명기(欽明紀)에는 기인지국(斯二岐國)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대가야의 왕은 연맹체에 소속된 다른 小國의 사람을 자신의 신하로 임명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연맹체에서의 연맹장의 권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대가야의 궁정에서 벌어졌을 12곡의 연주는 部體制의 유지를 위한 제전행사(祭天行事)의 일환으로 행해졌을 것인데, <<三國志>> 魏書 東夷傳에서 部體制의 단계에 있었던 고구려의 '國中大會'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단순한 연맹체였던 三韓에도 五月祭와 十月祭와 같은 농경의례가 있었다고 하니, 이것만으로는 대가야가 部體制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6세기초의 어느 시기에 경북 고령의 발파국(伴跛國), 즉 대가야는 전북 남원, 임실 방면의 기문(己汶)을 영유하는 문제를 놓고 백제와 다투었다. 또한 子呑(자탄; 진주시)과 帶沙(대사; 하동군 고전면)에 성을 쌓아 滿奚(만해; 광양시 광양읍)에 이어지게 하고, 봉화·척후와 저택·누각을 설치하여 日本에 대비하였으며, 爾列比(이열비; 의령군 부림면)와 麻須比(마수비; 창녕군 영산면)에 성을 쌓아 麻且奚(마저해; 삼랑진읍)·推封(추봉; 밀양시)에까지 뻗치고, 사졸과 병기를 모아서 신라(新羅)를 핍박하였다. 그리고 백제와 왜가 다사진(多沙津), 즉 전남 하동군 고전면 일대의 나루터에서 국제적인 교역을 이루려고 하자, 대가야가 군사를 보내 이를 물리친 적이 있다.
이렇게 볼 때 대가야는 대외관계와 관련하여 자신의 고유 영역을 넘어 다른 소국의 경역인 남원, 임실, 하동에서 백제, 왜 등과 다투었고, 하동방면으로는 그 지역을 수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내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역시 자신의 고유 영역을 넘어 연맹체 내의 다른 소국의 경역인 진주, 고전, 부림, 영산 등에 성을 쌓고 방어 건물을 설치하고 그 외곽으로 군대를 출동시키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정도의 영도력(領導力)을 가진 대가야가 단순히 종교적이거나 심리적인 연맹장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엄연히 부체제(部體制)를 유지한 고대국가의 왕(王)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면 대외적 외교의 측면은 어떠할까? 479년에 가라왕 하지(加羅王 荷知)가 독자적으로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 가라국왕(輔國將軍加羅國王)'의 작호를 받고, 481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신라를 돕기 위하여 彌秩夫(미질부; 포항시 흥해읍)에 군대를 파견한 것 등을 보면, 가야가 이미 고대국가적인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5세기 후반이후 6세기초까지의 대가야는 고대국가로 보아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541년과 544년의 두 차례에 걸쳐 백제와 가야연맹체 사이에 벌어진 泗 會議 및 그를 둘러싼 경과를 검토해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듯하여 앞의 단정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 즉, 가야연맹 전체에 대한 중요한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백제는 중신회의(重臣會議)를 거쳐 성황(聖王) 혼자서 외교에 임하고 있는데 비하여, 가야연맹에서는 安羅(함안), 加羅(고령), 卒麻(함양), 散半奚(초계·쌍책), 多羅(합천), 斯二岐(의령 부림), 子他(진주), 久嗟(고성) 등 여러 소국에서 모두 대표자를 파견하여 직접 自國의 견해를 대표하고 있다.
이로 보아 가라국(대가야), 안라국, 다라국에서는 각각 그 밑의 2인자 내지 관료로 보이는 次旱岐(차한기=下旱岐상한기), 上首位(상수위), 下旱岐(하한기 또는 二首位 이수위)를 보내고, 다른 소국들은 그 지배자로 보이는 한기(旱岐) 또는 한기(旱岐)의 아들을 보내서, 각 소국간에 지배체제 발전 수준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라와 안라의 두 나라에는 각기 王이 있다고 하여 다른 소국들로부터 초월적인 지위를 인정받기도 하였으나, 대가야나 안라도 외교권을 독점한 면모를 보이지는 못하고 있다. 대가야나 안라 중에 어느 나라가 부체제(部體制)를 확립하고 있었다면 적어도 그 주변에 상당한 세력이 있으면서도 사신을 파견하지 못한 곳이 몇 군데라도 있어야 하는데, 위에 거명된 가야연맹 내 소국들은 -신라와 백제에게 병합된 곳들을 제외하고는- 대가야(大加耶)나 안라(安羅)의 지근(至近)한 곳에 있으면서도 모두 사신을 보내고 있다.
이는 4세기말의 신라왕 누한(樓寒)이 전진(前秦)에 가두(衛頭)를 사신으로 보냈다거나, 5세기초의 신라 눌지마립간이 고구려와 왜에 대한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水酒村干 伐寶靺(수주촌간 벌보말), 一利村干 仇里(일리촌간 구리) , 利伊村干 波老(이윤촌간 파노) 세 사람의 추천을 받아 良州干 朴堤上(랑주간 박제상)을 사신으로 보냈다는 사실, 즉 이해 관계 있는 小國들의 대표자를 다 함께 파견하지 않고, 국가 전체를 대표하여 1인의 사신을 보냈다는 것과 대비가 된다. 또한 520년 경의 정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梁職貢圖>> 百濟國使傳의 이른바 '旁小國'에도 가야연맹체 쪽의 小國은 卓(창원), 叛波(고령), 前羅(함안), 多羅(합천), 上己文(남원), 麻連(광양) 등의 多數가 나오고 있는데 비하여, 신라 쪽의 국명으로는 오직 斯羅(경주) 하나만 나올 뿐이다. 이는 백제측의 관점만을 보이는 사료로서의 한계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시의 신라가 이미 외교적으로 낙동강 東岸의 廣域을 대표하는 유일한 국가라는 것이 인정되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部體制가 확립된 신라 영역 내에서는 국가 집권세력의 일원이 된 部이든 지방의 小國(侯國)이든 대외적인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야연맹 쪽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사비회의에 갔었던 가야연맹집사(加耶聯盟執事)들은 신라에도 외교를 위해 갔었고, 加羅나 安羅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던 적도 있었다. 여기서 그들이 가라, 즉 대가야나 안라에서 회의를 하면 대가야 왕이나 안라 왕도 그곳에 참석하여 제한기회의(諸旱岐會議)의 면모를 띠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참석자들의 면모는 마치 유일령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에서 공론(共論)하여 교(敎)를 내렸던 '칠오아(七王)'의 배열과 거의 비슷하다.
영수리비(冷水里碑)에도 '부(部)'라는 표기 없이 '사달(沙喙), 달(喙),본피(本彼), 기피(斯彼)'라고만 나오므로, 흠명기(欽明紀)에서 '國'字를 빼고 '安羅, 加羅, 卒麻, 散半奚, 多羅, 斯二岐, 子他' 등으로 나오는 면모와 똑같다. 신라의 경우에 本彼와 斯彼의 대표자가 단지 '干支'로만 나오고, 가야의 경우에 卒麻, 散半奚, 斯二岐, 子他의 대표자가 旱岐(또는 旱岐兒)로만 나오는 것도 같다. 이러한 유사성은 사회제도의 유사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6세기 전반의 가야연맹도 신라에 비하여 그다지 뒤떨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대다수의 6부 귀족이 恒常的으로 수도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비하여, 가야는 각 소국의 旱岐들이 모두 分居하고 있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신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신라 왕을 유일한 왕권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제도가 상당히 발달한 것에 비하여, 가야는 대가야 유일의 왕권이 그다지 오래가지 못하고 권위에 손상을 입어 安羅와 왕권을 分占하고 있었다는 치명적인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諸旱岐會議(신라의 경우 諸干會議 또는 六部貴族會議)의 開催 頻度도 신라와 가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의사 결정 형태의 외형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가야는 두 번째 개념의 엄밀한 部體制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약간 무리를 해서 가야쪽을 유리하게 두둔하여 가야의 部體制 성립을 강변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大加耶를 중심으로 한 後期加耶聯盟體는 5세기말 6세기초의 전성기에 일시적으로 部體制 단계에 이르렀다가 530년대의 왕권 약화 과정을 거쳐 540년대에는 다시 小國聯盟體 단계로 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논의한 것을 종합해 볼 때, 만일 部體制의 개념이 연맹 소속국들의 외교권이 맹주국에 의하여 통제되어 대외관계의 창구(窓口)가 단일화되는 현상까지 포함해야 한다면 가야연맹은 궁극적으로 部體制를 성립, 또는 정착시키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으나, 최근의 추세처럼 部體制를 맹주국의 중앙집권 능력이 비교적 강화된 연맹체 정도로 인식한다면 가야도 신라와 비슷한 시기에 이미 部體制가 성립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경우와 엄밀하게 비교하여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과제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