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개국설화에 대한 검토*

백 승 충**

머리말

1. 김해 가락국(駕洛國)의 개국설화

1) 내용 분석

2) 전승과정

2. 고령 가라국(加羅國)의 개국설화

1) 내용 분석

2) 전승과정

맺음말

머리말

가야의 개국설화에 대한 연구는 최근까지도 다방면에 걸쳐 진행되어 왔다. 신화학에서는 대개 ‘천손강림(天孫降臨)’ 설화의 한 유형으로, 국문학에서는 농경사회의 전통 내지는 민속제례의 일면으로, 민속학에서는 ‘즉위의례’의 측면에서 각각 접근하고 있다. 이들 견해는 해당 분야 나름대로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것인데, 그러나 각기 고유 학문의 틀 속에서만 이루어졌고 대개는 ‘수로설화’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개국설화 전반적인 파악에는 한계가 있음도 분명하다. 이러한 한계의 보완 내지 극복은 역사학 쪽에서의 연구로서만이 가능한데,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국내 학계의 경우, 이병도는 가락국의 ‘6란설화’는 ‘6가야연맹체’를 결성하던 때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서 원래는 ‘1란설화’가 맞고, 가라국과 가락국의 혈연적 종지관계(宗支關係)는 3세기 전반 가야연맹의 결성을 방증하는 것으로 보았다. 김철준은 가라국 개국설화에서 정견모주(正見母主)를 ‘가야산신(伽倻山神)’이라고 한 것은 ‘가야산’이 주산(主山)으로서 가야제국을 포괄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가락국의 개국설화가 1단계 설화라고 한다면 이것은 2단계의 것으로서 이후 고대국가로 발전했다면 신라 중고왕실의 ‘진종설(眞種說)’과 같은 3단계로 나아갔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정중환은

제1부 낙동강의 여명 <1> 철의 해양왕국

◆1천7백년전 시간여행

경남 김해시 중심부의 나지막한 구릉지인 봉황대(鳳凰臺). 금관가야(가락국)의 국읍(國邑)이 있었다는 곳.

봉황대 바로 아래에 바닷물이 출렁거린다. 김해평야는 형상도 흔적도 없다. 남쪽은 남해, 서쪽은 해반천이 바다와 만나는 강어귀, 동쪽은 낙동강 지류인 예안천이 실개천처럼 흐른다.

밀물이 되면 봉황대 앞 항구에 한·중·일의 큰 배들이 진을 치고 사신들과 장사꾼들이 모여 한바탕 거래를 펼친다. 철기를 납작하게 가공한 판상철부(板狀鐵斧) 꾸러미도 보인다.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사적 제261호)는 주로 서민들이 오순도순 모여사는 갯마을이다. 이곳 마을어귀에도 바닷물이 찰방거린다. 사람들은 물때를 맞춰 갯가에서 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며 살아간다. 서기 4~6C 예안리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터에 대규모 매장지를 마련해 뼈를 묻었다.

1천7백여년전 고(古) 김해만의 낯선 풍경이다. 학계의 발굴조사와 연구로 김해지역의 옛 풍경들이 하나씩 되살아나고 있다.

부산대 윤선(지질학) 교수는 “김해시 장유면 수가리 패총의 단면과 예안리 고분의 지질, 주변의 해식동을 조사한 결과, 당시 해수면은 지금보다 5~6m 높았다”며 “1~3C 금관가야는 천혜의 항구를 확보해 번창할 수 있었으나, 4C를 전후해 육지가 서서히 융기해 항구를 상실,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가야시대때 김해 일원이 내만이었다는 것은 수가리, 농소리, 회현리, 예안리 패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당시 지형연구 및 정확한 해안선 복원은 과제다.

◆되살아나는 금관가야

지난 여름, 김해 봉황동 유적지 남측에서 문화재 발굴작업을 벌이던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팀은 가볍게 전율했다. 이곳 습지 퇴적토에서 삼국시대 토기편과 4~5C대의 목주(木柱), 목열(木列)시설이 나왔기 때문.

경남발전연구원 이성주 역사문화센터장은 “좀더 파내려가야 정확한 것이 드러나겠지만, 목주 목열 등의 유구로 볼때 금관가야의 접안시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선착장 유적이 확인될 경우 해양왕국 금관가야의 실체는 한층 뚜렷해진다.

김해 봉황대는 조선시대때부터 금관가야의 왕궁터로 알려졌던 곳. 지난 92~93년 발굴 조사결과 왕궁의 부속시설로 추정되는 방어시설과 가야인의 집자리, 환호(環濠), 조개더미 등이 확인됐다. 이밖에 골각기, 숫돌, 철기, 슬래그(철 찌꺼기), 송풍관이 함께 출토돼 가야사회의 철기문화시스템을 엿보게 했다.

봉황대 인근 구릉지에는 초기 철기시대 유적인 ‘회현리 패총’이 있다. 1907년 발견돼 일본인들에 의해 조사된 이 패총에서는 많은 조개더미와 가야토기, 세형동검, 탄화미, 화천(貨泉) 등이 나와 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 가운데 화천은 가야사 조명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화천은 서기 9년 신(新)나라를 세운 중국의 왕망이 주조한 화폐로, 평양 등 서북한지역, 바다 건너 일본의 규슈북부와 오사카만 등지에서 두루 발견됐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는 “당시 황해도~일본열도를 왕래하려면 2년 가량이 걸렸다. 반면 화천은 10년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이 기간에 화천이 동북아 곳곳을 돌아다녔다는 것은 당시의 교역이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말해준다”며 “김해는 당시 동북아시아 유일의 중개 무역항이었다”고 지적했다.

봉황대는 2001년 2월 인접한 회현리 패총과 더불어 ‘김해 봉황대 유적’으로 확대 지정됐으며, 현재 ‘가야유적 체험촌’이 조성되고 있다. 이곳의 산책길에는 아직도 2천여년전의 조개껍데기와 토기편이 흩어져 있어 묘한 감흥을 준다.

◆가야의 힘

가야 제국(諸國)의 힘의 원천은 철과 바다였다. 가야의 대·소국들은 분립 속에서 때때로 협력하며 고도의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교역로를 개척했다.

철은 가야의 힘이자 경제였다. 철기제작 및 가공은 당시로선 첨단기술이었다. 생활도구, 농기구, 무구류 등에 두루 사용된 철 기술은 시대를 초월할 만큼 뛰어났다.

가야의 철제품은 김해, 동래, 함안, 고령, 합천 등 가야고분 곳곳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신라와 일본의 고분에서 수입품의 일부가 나오고 있다. 전기가야의 판상철부, 후기가야의 철정(덩이쇠)이 바로 그런 유물이다. 철정은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져 철기의 소재나 화폐로 사용됐다.

가야 제국의 교역로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대가야의 교역루트와 관련, 경북대 박천수(고고학) 교수는 고령~거창~함양~운봉고원~섬진강 수계 코스를 설정, “산간분지의 대가야가 정치적 통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철을 이용한 지역내의 교역과 5C 후기 남해안으로 통하는 대외 교역로를 확보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함안의 아라가야 역시 진동만과 마산만으로 통하는 두개의 해상 교역로를 열어 세력을 유지했다는 연구(남재우·창원대 강사)가 있다.

임효택 동의대 박물관장은 “김해의 금관가야는 지정학적으로 오늘날 싱가포르를 연상케한다”며 “2C 후반~4C는 낙동강 하류지역 가야철기의 전성시대였다”고 말했다.
[국제신문 연재]
http://wondreams.hihome.com/temasogo_gayas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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