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문사철 http://cafe.daum.net/koreanLHP/DW/167http://cafe.daum.net/koreanLHP/DW/167')">주소 복사

가야의 정치구조-'부체제' 논의와 관련하여- 
                                                                                                   백승충 白 承 忠(釜山大)

1. 머리말

근래 한국고대국가론의 전개와 함께 사회발전단계에 대한 전향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가야 관련 고고자료의 축적에 따라 가야의 시원이라든지 사회발전단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야의 시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형편이지만, 적어도 사회발전단계에 대한 시각에서는 '부체제'의 논의 등 가야에서의 '고대국가' 성립 가능성을 한층 높혀 주고 있다. 즉 '연맹'이라는 외형적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재해석과 함께 사회운용의 원리라는 내적 발전의 측면이 강조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합천 출토 토기에 새겨진 '下部思利利' 명문은 가야에서의 '部'의 존재 유무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아래에서는 가야의 왕권을 중심으로 정치구조의 변화양상을 살펴볼 것인데, 왕호의 변화 특히 《日本書紀》에 보이는 '旱岐'층의 분화와 '下部思利利' 명문을 통해 가야에서의 왕권의 의미를 검토할 것이다.

2. 왕호의 변화

가야제국 가운데 사서상으로 '가야'로 범칭되거나 '대가야[락]'로 불리어진 것은 김해 가락국(혹은 남가라)과 고령 가라국 뿐이다. 후대인들의 인식상으로 두 지역이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기술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가야 당대의 정치형세를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6(5)가야' 관념도 마찬가지이다). 함안의 안라국도 가야의 중심세력일 가능성이 높은데, 史書上으로 '가야' 혹은 '대가야'로 칭해진 결정적인 자료는 없지만 《日本書紀》에 '안라왕'의 용례가 보이므로 6세기 중반대에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했음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연맹체'(혹은 '소연맹체')의 존재가 상정된다면, 연맹제국에 대한 왕권의 행사가 제도적·실질적인 측면에서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야의 사회구조상, 삼국과는 달리 '통합보다는 분립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왕권의 확인에는 어려움이 있다.
왕호의 변화와 관련하여 우리 사서에서는 모두 '왕'으로 통칭되고 있기 때문에 그 변화과정을 알기가 어렵다. <駕洛國記>에서는 '9간'이 수로왕을 추대하고 있으므로 干→王으로의 이행과정은 확인된다. 그러나 '간'의 경우 원형은 '간기' 혹은 '한기'인데, 존칭 어미인 '기(혹은 지)'가 탈락하는 것은 6세기 중반이고, 《日本書紀》에서도 멸망할 때까지 '한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駕洛國記>에 보이는 '9간(기)'의 용례는 각간·아질간·급간 등의 직제와 마찬가지로 가야 당대의 것으로 볼 수 없고, 아마 신라에 편입된 이후 그 영향을 받아 첨입된 것이 확실하다. 다만 《日本書紀》 繼體·欽明紀에는 '王' '大人' '旱岐' 등 다양하게 보이고 있어 주목되는데, 먼저 계체기 이전의 관련 용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蘇那曷叱知(崇神65년 7월, 垂仁 2年 是月)
       
소나갈 질지(숭신65년 7월, 수인2년 시월)
(2) [都奴我]阿羅斯等, 于斯岐阿利叱智干岐(垂仁 2年 是月)
       
[도노아]아라사등, 우사기 아리 질지 간기(수인2년 시월)
(3) 卓淳王末錦旱岐(神功 46年 3月)
         탁순왕 말금한기(신공 46년3월)  
(4) 加羅國王 己本旱岐, 兒 百久至 阿首至 等, 加羅國王 妹 旣殿至(神功 62年)
        
가라국와 기본 한기, 아  백구지 아수도등, 가라국와 매 기전지(신광62년)
(5) 任那左魯那奇他甲背(顯宗 3年 4月)
   
       임나 좌어나기타  갑배(현종 3년4월)

기년이라든지 내용 자체는 신빙성을 두기가 어려운데, (1)(2)의 叱知·阿羅斯等·干岐는 '(大)臣智'의 뜻을 가진 존칭 어미로서 가야의 왕호로서는 처음 등장하는 용례이다. 그러나 于斯岐/阿利/叱智/干岐의 경우 왕호가 중복되고 있기 때문에 그 선후관계를 알 수가 없는데, 阿利 계통인 阿羅斯等과 '一云'으로 전하는 '干[旱]岐'는 계체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른 시기 왕호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叱智[知]'의 '叱'은 모두 'ㅅ.ㅿ.ㄷ' 등의 음을 표시하므로 《三國志》<魏書> 東夷傳 韓條의 '臣智' 계통이 아닌가 하는데, '毛麻利(叱)智'(신공5년 3월)라고 하여 신라에도 보인다. '신지'는 삼한의 국 가운데 '대국'의 지배자를 가리키는 존칭인데, 3세기대의 변한 즉 가야에서는 구야국과 안야국의 지배자만이 이것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위의 '蘇那曷叱知'는 물론 《三國志》 韓條의 '狗邪秦支廉' 용례 모두 김해 가락국과 연결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三國遺事》 <駕洛國記>와 王曆에 전하는 가락국의 왕명과 왕족명(分叱水爾叱)에 '叱 혹은 尸'가 사용되고 있어 주목된다. 물론 인명에 붙는 어미인 '知' 혹은 '干'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데(阿叱干 등), 이후 '叱'은 '사이 시옷'으로 쓰여지다가 생략되고 6세기대에는 인명의 어미인 '智[知]' 즉 '치'만이 남게된다.

다음으로는 (3)의 卓淳/王/末錦/旱岐인데, 이것도 왕호가 중복되고 있다. 탁순국 관련 기록은 신공 49년조까지 연이어 보이는데, 기년을 조정하더라도 기사내용에는 의문점이 많다. 《日本書紀》에서 '王' 혹은 '旱岐'는 6세기 중반에 주로 보이고 있고, '말금'은 6세기 전반까지 쓰이고 있는 신라의 고유왕호인 '寐錦'과 음통한다. 麻立干의 異寫로서 君長 혹은 始祖로 해석하기도 하고, 음운상 이사금 즉 '니시기미/니시거미'→'니기미/니거미'에 대한 음차로 보기도 한다. 일본어에서 '니기'가 '君'의 훈차임을 참고해 본다면, 지배자의 뜻에서 유래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매금'은 광개토왕비문에도 보이므로 신라에서는 5세기 이후에는 사용된 것이 분명하지만, 가야에서의 위의 하나의 용례만 보이기 때문에 신라와 것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질 수는 없다고 하겠다.

한편 백제기를 인용하고 있는 (4)의 '己本旱岐'는 '가라국왕' 혹은 '한기'로 불리어지고 있다. '己本'은 인명임이 분명한데,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고호' 혹은 '고호무'(북본)로 발음되기 때문에 가락국의 왕계 가운데 찾아보면 구형왕과 통하는데, 그러나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으며 신라가 아닌 백제로 망명하고 있는 점이 차이가 있다. 또한 '임오년'이라고 하여 고령 가라국 멸망 해와 같은데, 가라국의 왕계 가운데는 이와 음통하는 인명은 발견할 수 없다. 이로서 추론해 보면 왕명은 가락국의 것을 취하고 멸망연대는 가라국의 것을 취한 조작된 기사가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위의 기사는 신공 62년의 사실이라기 보다는 가라국 멸망 때의 사정을 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加羅國王', '旱岐', '旱岐의 兒' 용례는 멸망 무렵에 보이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5)의 '任那佐魯那奇他甲背' 용례는 任那(총칭)+佐魯(특정 지역)+那奇他(인명)+甲背(백제의 관명)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나기타'는 5세기 후반 가야의 대세력으로 추정된다. 가야계 인명에 백제계통의 관명이 붙은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데, 아마 백제의 가야지배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덧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는 계체·흠명기의 용례인이다.

(6) 阿利斯等, 加羅의 己富利知伽, (安羅의) '國主'와 '國內大人一二'(繼體 23年 3月).
(7) 任那王 己能末多干岐[己能末多라함은 阿利斯等일 것이다](繼體 23年 4月).
(8) 阿利斯等, 久禮斯己母, 奴須久利(繼體 24年 9月).
(9) 卓淳의 (國)主(欽明2년 4월),  國의 函跛旱岐, 印支彌와 阿鹵旱岐(同 5年 3月條).
(10) '任那復建' 모임의 참석자(欽明 2年 4月條, 5年 11月條)
(11) 安羅王 加羅王(欽明 5年 11月條)

(6)(7)(8)에 보이는 阿利斯等(아리시도)은 '아리히도'와 통하여 그 원형은 '알 사람'인데, 혹 '阿利斯等'의 '斯'는 '叱'과 통하기 때문에 혹 '아릿·아랫'→'아래'의 음차로서 '下'를 나타내고, '等(도우)'은 '都利=公'으로서 달·들·돌·도(道, 훈으로는 梁)의 음차이기 때문에 '아리사등'은 '아랫도리'가 되어 '下等' 혹은 '下公'으로 표기가 가능하다. '干岐'로도 나오기 때문에 아리사등은 '하간기'로 볼 수 있어 한기층의 분화로 볼 수 있지 않을가 한다. (6)의 己富利知伽는 미상으로 처리하고 있는데, '고호리찌가'로 발음된다. 대벌간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 보다는 '간'의 인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6)의 '국주'는 안라왕을 지칭하는 것인데, (9)에서는 탁순국·탁국의 경우 '국주'가 '한기'로 칭하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6)의 '國內大人'은 다른 사례에서는 '國人'으로도 줄여서 사용되기도 하는데, '안라회의'에 참가하고 있는 신라·백제·왜 등의 '國外大人'의 상대개념이다. 국주에 이어 '國內大人 預昇堂者一二'으로 기술되고 있는 점을 볼 때 안라의 국주 즉 '안라왕'과 함께 '회의'에 참여하고 있어 국사와 관련된 중요한 회의 '국정참여집단' 내지는 '의사결정집단'으로 추정된다. 안라내에 1∼2인 이상 복수로 존재하므로 최고귀족계급으로서 일단 안라왕에 종속적인 '한기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점은 이후 '任那復建'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안라의 차한기가 3인으로 나오고 있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大人의 이 같은 성격은 고구려에서 大人=大加=古鄒加라는 등식이 성립하다든지, 夫餘에서 '大人'이 금 은으로 장식한 모자를 쓰는 등 상층귀족계급을 지칭하고 있다든지, 沃沮에서 고구려에 신속된 이후 使者가 되어 토착 渠帥와 함께 다스리는 존재로 나타나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각 국의 '대인'의 위상이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복속 집단의 장 혹은 유력자를 '大人'으로 편재하고 있음은 동일하다고 하겠다. 왜의 경우 '大人'이 下戶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묘사되고 있고, 고구려에서는 東部·西部 '大人' 등의 용례로 자주 나오고 있어 참고된다. 다만 《일본서기》의 용례에서, '大人'은 훈으로 '우시'이기 때문에 '下'의 훈인 '아루시'와 대비되어 혹 '上'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고, '우시' 즉 윗사람으로 보아 '上人' '首位'를 뜻하는 것으로 볼 여지는 있다. 이렇게 보면 대인은 구체적 사례가 보이는 '차한기'와 대비되는 '상한기'와 동일한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9)의 '阿鹵旱岐'가 주목된다. 근래 이 인물을 안라와 관련짓기도 하는데, 그러나 같은 해 11월조에 '안라왕'이 따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아로한기=안라한기=안라왕의 등식은 성립할 수 없다. '아로한기'는 안라왕 아래 소속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은데, '아로'는 일반적으로 인명으로 보고 있으나 '下'의 훈인 '아루'와 통하기 때문에 '하한기'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下'와 '次'는 같은 뜻이므로(동일인물에 쓰여지고 있다), '아로한기'는 안라에서 대인으로 범칭되는 상한기에 대비되는 '하[차]한기'의 구체적인 사례가 아닌가 한다.
(10)은 두 차례에 걸쳐 소집된 '任那復建'을 위한 모임의 참석자 명단이다.

<표> '임나복건(任那復建)' 모임 참석자 명단

참석자들은 '모한기(某旱岐)'와 '모수위(某首位)'(가라·다라 加羅·多羅)를 칭하고 있고, 여기에는 '旱岐(혹은 君)'와 '旱岐(혹은 君)의 子'들이 주체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旱岐는 君(기미)과 같은 격으로 쓰여지고 있는데, 군(君)은 군주·국주 (君主·國主)로서 '대국의 왕'과는 구별되는 '소국의 지배자'을 지칭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兒'는 '소국의 왕자'로 볼 수 있는데, 旱岐 혹은 그 '兒'를 파견하고 있는 졸마 산반해 사이기 자타 구차(卒麻·散半奚·斯二岐·子他·久嗟) 등은 이들 소국의 범주에 들 것이다. '한기의 兒'의 경우 모두 소국에서 칭해지고 있는데, '한기=소국의 지배자'의 등식이 성립하기 때문에 '兒'는 소국의 王子에 해당한다. 王子가 국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국에서는 어느 정도의 가부장적 세습체제가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안라·가라·다라 등은 旱岐를 직접 파견하지 않고, 하위직 인물을 파견하는 등 위의 소국들과는 격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참가제국의 면면을 볼 때 일부는 '한기'의 일부는 가라에, 일부는 안라에 속하지 않았을까 추론되는데, 정확한 실상은 알 수 없다. 다만 신공기를 제외하고는 임나제국에 의해 '왕'으로 불리어진 예는 (11) 한 기사밖에 없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흠명기 2년조에 성왕은 근초고왕대의 사정을 언급하면서 안라·가라·탁순한기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상통했다는 기사에서 '한기'가 쓰이고 있어 위의 '왕'의 용례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기술은 물론 백제의 가야제국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시간적인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旱岐'→'王'으로의 왕호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旱岐'는 중국사서와 《日本書紀》에서만 보이는데, 신라에서 많이 보이는 '간지(干支)'의 이사(異寫)이다. 신라의 경우 중국의 남조계통 사서에는 '旱支', 북조계통의 사서에는 '(尺)干'만이 보이는데, 계통의 차이인지 아니면 시간적 차이인지 검토의 여지가 있다. 다만 가야의 경우 합천 매안리비의 '四(十)干支'라든가 창녕 계성고분군 출토 토기에서 '大干' 명문 등 당대의 자료에서는 '干(支)' 계통만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安羅의 次旱岐(3人)는 下旱岐로도 표기되고 있는데, 上旱岐 혹은 旱岐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下級旱岐인 것으로 추측된다. 한기는 안라·다라에서만이 그 분화현상이 확인되는데, 가야의 한기는 멸망 때까지 '왕'과는 별도로 존재한 최고위 신분층이다. 가라·안라 등 우세 집단의 지배자는 '상한기'라고 하여 동질성을 부각시키기보다는 격을 달리하여 '왕'으로 불리면서 이들 한기층과는 구별했을 것이다.

'首位'는 加羅와 多羅에서만 보이는데, 加羅에는 '上首位', 多羅에는 '二首位'로 나온다. 다라국의 경우 '하한기'에 대비되는 존재로 '이수위'가 나오고 있는데, 자전상으로 '수위'의 '首'는 일반적인 의미로는 '선두' '상위'를 가리키는데, '君'과 통하고 또한 '大人'의 뜻도 있다고 한다. 이를 한기층과는 다른 비간계통의 가라국 직할지의 관제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어쨌든 사료상·고고자료상 가라와 다라는 다른 국들보다는 훨씬 일체감을 보인다는 점이 주목된다. '수위'로 칭해지는 구체적인 인물로는 '古殿奚'와 '訖乾智'가 있는데, 가라의 상수위로 나오는 '古殿奚'는 계체기의 '旣殿奚'(계체기 7년·11년)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문제는 전자는 '가라의 상수위'로 표기한 반면 후자에서는 '반파' 소속으로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약 30년의 뒤에 '가라의 상수위' 칭호가 추가된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그 사이 반파의 지배층이 '가라연맹체'에 완전히 귀속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수위층은 일단 한기층과는 별도로 존재하는데, 가라국왕의 직할지 내지는 '가라연맹체' 전체의 중요한 현안을 해결하기 파견된 인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보면 주변 소집단을 통합한 가야의 대세력인 안라와 가라는 왕, (상)한기, 하한기 등 최소한 세 계층으로 분화되고 가라와 다라에서는 '수위층'이 별도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상한기가 하한기에 대해 초월적 권력을 가진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지는 못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기간의 문제이고(실제 '상한기'의 용례는 보이지 않음) (11)에서와 같이 '왕'이라는 엄연한 초월적 권위는 별도로 인정되어야 할 것 같다. 가야의 한기층의 분화와 관련해서는 신라의 냉수리비와 봉평비에 보이는 간지층의 변화 양상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3. 가야의 왕권과 '제한기회의'

'아리사등' '대인'을 포함하여 한기층으로 구성된 대국의 상급귀족들은 왕권 아래에 놓이면서 고구려의 '제가회의' 혹은 신라의 '6부회의=제간기회의'와 같은 정책결정집단의 구성원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 한기층은 각종 정기·비정기 회의에 참석하였을 것인데, 정기적인 모임은 각종 제사 때 이루어졌을 것이고 비정기적인 모임은 공동의 군사·외교적인 문제 및 국내외 제국내 혹은 제국간 중요사항이 있을 때 이루어졌을 것이다(안라회의·임나복건회의 등). 봉평비를 통해 신라에서의 정월 15일이 6부인 전체의 의례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가야에서도 정월은 제사가 있는 달로서 특기되고 있어 주목된다. 당시 가야가 백제의 압박을 받던 시기임을 참고해 볼 때 가야에서도 이 날을 기해 한기층을 중심으로 군사·외교상의 중요사항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三國遺事》<駕洛國記>에는 가락국의 제사일로서 정월 3·7일, 삼월 계욕일, 5월 5일, 8월 5일·15일과 허왕후 기일인 3월 1일, 수로왕 기일인 3월 23일 등이 전하는데, 이 때에도 왕을 비롯하여 '한기층'이 모여 회의를 열었을 것이다. 신라의 경우를 참고해 볼 때 신왕의 즉위 의례가 행해진 정월에도 정기회의가 열렸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왕은 제의 및 각종 회의를 주도하는 연맹장 즉 왕권의 성격을 띠었을 것인데, 적어도 가라나 안라는 이 같은 수준의 사회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나한기들이 성왕의 세 계책에 대해 그 결정을 각각 안라왕과 가라왕에게 미룬 사례, 양산 출토 고령형토기(장경호)(6세기 중반 추정)의 '大王' 명문, 합천 매안리 가야비의 '而□村四(十)干支'(531년?)라는 구절 등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이외에도 가라연맹체를 주도한 맹주적 성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몇 가지 더 제시할 수 있다.

①자력으로 南齊에 견사하고 있다든지 本國 즉 '加羅' 전체의 王임을 천명하여 그 칭호를 요청하고 있는 점
②5세기 후반∼6세기 전반 신라는 가라국에 대하여 대등한 관계로서 인식한 점(구원병파견과 청혼의 성립)
③백제에 기문.대사의 반환 요청
④백제의 압박 속에 '대사' 방비를 위한 축성작업과 군사동원, 가라 소속 가야제국의 결속을 위한 우륵 12곡의 제작
⑤"탁국의 函跛旱岐가 加羅國에 다른 마음이 있어, 신라에 내응하여 加羅는 밖에서부터의 싸움과 합쳐 싸웠다."라는 구절은 곧 탁국이 신라에 경도되어 가라연맹체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는 점 등이다.

특히 우륵 12곡의 제작 동기, '수위층'이 공통으로 보이는 가라와 다라의 특수한 관계, 그리고 '종자(從者)의 제현산치(諸縣散置)' 등의 구절을 통해서는 대국 중심의 '지방'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고, '대왕'은 신라·백제의 경우 주변지역에 대한 통합과정과 어느 정도 진척되어 지배 이데올로기가 갖추어진 시점에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가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맹주권 행사를 확인할 수 있는 이상의 자료를 참고해 볼 때, 가라연맹체의 극성기는 남제(南齊)에 견사(遣使)하는 하지항대(荷知王代)에서 우륵 12곡이 만들어지는 희실(嘉悉王代)에 걸치는 50년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479년∼520년대). 이후 백제가 주도한 두 차례의 '임나복건' 모임을 통해 가라연맹체는 분열 양상을 보이지만, 안라의 경우는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군사·외교상의 단일 창구를 운영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3. 가야의 '부' 문제

가야 특히 고령 가라국에서의 '부체제'의 존재 문제는 근래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가야에서 '부체제' 논의를 촉발시킨 것은 합천 저포리 4호분 봉토 출토 단경호 구연부에 새겨진 5자의 토기명문이다. 구연부에 글자를 새기는 경우는 중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데, 만약 본 명문이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로 판독된다면 '하부(下部)'는 부명이 되고 '사리리(思利利)'는 인명이 된다. 《日本書紀》의 가야인명 용례를 참고해 보면 대개 3∼4자 많고 인명의 어미로서 '利'가 사용된 예가 많이 보이고 있다. 《日本書紀》에는 대개 부명+관등명+인명의 원칙은 지키고 있으나, 고구려의 경우 부명+인명의 예도 보이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는 되지 않는다. 자전상의 '部'는 지역·구역·경계·장소 등의 범칭에서부터 주군현 등 행정구획의 통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몽고에서는 부락을 편제하면서 기(旗)가 합하여 부(部)가 되고, 부(部)가 합하여 맹(盟)이 된다고 하고, 중국 남북방 종족에서는 취락의 칭호로서 '8부대인(8部大人)'의 용례가 보인다. 기존의 연구에서도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부' 용례의 다양성으로 인해 그것의 일률성·정형성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삼국에서는 소도를 중심으로 지방세력을 편제한 공통점은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볼 때 대국인 가라국 인근 합천지역에서 '下部' 명문이 출토된 것을 우연한 것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라국 내부의 '하부'의 존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 '思利利'의 출신지역이다. 백제의 관료나 기술자 혹은 百濟 下部人 혹은 백제와의 교류 등과 결부하여 '思利利'를 백제 출신으로 보기도 하지만 가야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당시 가라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 행사는 충분히 예상되지만 가야 잠식 이후 기문·대사에서와 같이 백제의 지방관인 '군령·성주'의 파견 등 백제(百濟)의 하부인(下部人)이 가야지역에 상주할만한 적극적인 계기는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부(下部)'는 우륵12곡(于勒12曲)의 '상하가라도(上 下加羅都)'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加羅'와 '都'가 공통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은 주목되는데, 이들 용례는 중심지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都'는 자전상으로도 왕기 중심의 백리의 땅(채지), 제후의 下邑, 행장구획명 등으로 사용되고 있어 왕기 중심의 땅을 지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部'와 '都' 모두 왕경을 중심으로 쓰인 용어라는 점에 일단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가라국의 왕권은 주변 소집단들에게 '下部'라는 部名을 사용토록 할 정도로 가야지역 가운데서도 선진적이었거나 중심부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며 '수위층'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 본 명문 출토 고분군의 유물이 크게는 고령계통의 영향을 받지만(고령계토기) 합천 옥전고분군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有刺利器 등) 가라국(池山洞古墳群)→玉田古墳群, 玉田古墳群→苧浦里로 이어지는 가라연맹체의 중층적 구조도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상·하가라도는 왕기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고, 상·하부는 전자에 의해 관할되는 직할지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가라연맹체를 구성하는 제국들이 대개 가라의 대외교통로상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지만 삼국과 같이 지방세력이 중앙귀족화한 구체적인 사례는 찾기가 어렵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가야 전체를 통할하는 '제한기회의체'를 상정하는 것이 주저되는데, 만약 상정된다고 하더라도 그 범위는 광역의 가야제국이 아니라 직할지 내지는 인근 지역에 국한될 가능성이 높다. 즉 가야에서는 전 지역에 각 부가 편제될 정도로 아직 주체제가 지방에까지 확산되지는 않은 이완된 통치구조를 가졌고, 부체제의 적용은 '수위층'과 연결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야 소국의 연맹체의 상황, 연맹장의 권한, 신라 부체제(部體制)와의 비교
                                                                                                                 홍익대 김태식


가야의 정치체제가 어떤 수준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가야에는 국(國)을 칭하는 10여 개의 정치체, 즉 소국(小國)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기 분립되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고, 그들 사이에는 하나의 맹주국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聯盟體)라는 통합된 질서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고, 그 맹주국이 하나가 아니라 3~4개 있어서 몇 개의 소지역연맹체(小地域聯盟體)를 이루고 있었을 뿐이라는 견해도 있고, 백제나 신라와 같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이루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모든 견해는 각자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야의 여러 소국들은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4세기 이전의 전기 가야연맹 시기에, 변한 소국의 지배자인 거수(渠帥)들 사이에는 세력 크기에 따라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라는 다섯 등급의 호칭이 있었습니다. 이는 변한 소국들 사이에서 상호간의 규모와 서열에 따라 일정한 차등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 구야국 신지[拘邪秦支]와 안야국 축지가 가장 서열이 높았으며, 다른 소국들은 대외 관계에 있어서 그들의 결정을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발굴된 1~4세기의 유물과 유적이 함안보다는 김해 지방에서 훨씬 더 풍부하게 출토된 점으로 보아, 안야국(安邪國)보다는 구야국(狗邪國)이 더 우월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므로 변한 12국은 김해의 가락국(=구야국=가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전기 가야 소국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세기 이후의 후기 가야연맹 시기에는, 가장 많을 때는 20개 소국, 적을 때는 10개의 소국들이 고령의 대가야국(=가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소국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소국들의 지배자는 크기나 규모에 따라 호칭이 달랐으나 대체로 한기(旱岐),차한기,하한기,간기(干岐; 간지),검감,군(君)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맹주국의 지배자는 ‘왕(王)’의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시기에 고령의 대가야국(大加耶國)만이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나, 540년대 이후로는 함안의 안라국(安羅國)도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어서, 가야의 여러 소국들이 그 내부에서 남북 이원체제(南北二元體制)를 이루고 있었던 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맹장의 권한으로는, 소속국에 대한 세금 징수, 인력 동원 또는 징발, 소국 사이의 분쟁에 대한 조정, 전쟁과 같이 연맹 전체에 영향이 미치는 중요 대외정책의 결정, 연맹체의 결정에 불복하는 소국에 대한 징계 등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연맹장은 소속국 수장의 지위를 보장해 주고, 소속국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가야 연맹장의 권한은 때로는 강하게 발휘되기도 하였으나, 주변 정세의 변동이나 내분 등의 요인에 의하여 약하게 발휘되기도 하는 유동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령의 대가야국만은 휘하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신라와 같은 부체제(部體制)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부체제’란 현대의 연방제 국가와 비슷하게, 그 내부에 여러 소국들이 있어서 그들의 자치권이 인정되나, 외교권은 왕권에 의하여 통제되어 외부적으로는 단일한 국가 이름을 사용하고 대외관계의 창구가 단일화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부체제를 이루었다면, 이는 이미 중앙집권체제를 이룬 고대국가 초기 상태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에 대한 증거가 너무 미약하여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영문]

Gaya’s Political System

 

         The Gaya Confederation, the rights of the Confederation's leader, and the “Bu System”

 

The Political system

 

Historians are divided over Gaya's political system. Gaya was comprised of ten political bodies called Guk (), or small states. The states existed separately, but were integrated as a confederation under the direction of one   leading state. The leading state was not actually just one   state, but represented three or four states within a regional confederation. The Gaya, some historians have argued, established a centralized state system that resembled that of Baekje or Silla. The predominant view, however, is that Gaya's small states formed a confederation.

At the time of the early Gaya Confederation before the fourth century, five levels were recognized among the states. These levels were Sinji, Heomcheuk, Beonye, Salhae, and Eupcha. Each varied in size and influence. Among the states of Byeonhan, Guya-guk's Sinji and Anya-guk's Chukji ranked highest, so other small states could not but follow their decisions in foreign relations.

As more relics from the first to fourth centuries have been found in Gimhae than in Haman, Guya-guk must have been more powerful than Anya-guk. Therefore, it can be argued that the twelve states of Byeonhan were integrated into Garak-guk (Guya-guk or Gaya-guk) at Gimhae to form the early Gaya Confederation.

By the advent of the late Gaya Confederation in the fifth century, at least ten and at most twenty small states had formed a state confederation with Goryeong's Daegaya-guk (Gara-guk) at its head. The rulers of the small states used the title Hangi (旱岐) or Gun () in general, but specific titles varied according to the size or scale of states. The ruler of the Confederation's leading state used the title “King” (). In general, Daegaya-guk laid claim to the title of “King.” However, after the 540s, Haman's Anla-guk also used the title. This tells us that many of Gaya's small states were part of another Gaya political system in the interior.

Kings had far-reaching rights within the Confederation. The kings had the right to levy taxes and requisition labor from all states under their jurisdiction. They also resolved disputes or conflicts among confederation members, formulated foreign policy, and rebuked or punished disobedient member states. Confederation leaders buttressed chiefs’ positions and protected attached states in the event of invasions. However, the power of the Gaya Confederation's leader was not necessarily consistent and could vary as a result of external or internal pressures.

Many historians believe that onl  y Goryeong's Daegaya-guk managed to construct a “Bu System” (部體制) as in Silla by integrating the small states under its command. A “Bu System” was a feudal-like state, or collection of several fiefdoms with some degree of self-government. Such fiefdoms shared a common currency and acted as one   unit on questions of foreign policy. If Gaya constructed a “Bu System” it would mean that it had achieved the true status of an ancient state with centralized authority. While this is an intriguing argument, the evidence in favor of this view is still scanty at best.

 

Taesi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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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문사철 http://cafe.daum.net/koreanLHP 
가야연맹체제(加耶聯盟體)
각부제 성립여부(部體制 成立與否) 대한 소론(小論)

김태식 金 (弘益大)

1.
하나의 정치세력이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대개
小國-小國聯盟體-部體制 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보이는데, 가야(加耶) 과연 고대국가 초기 단계에 해당하는 부체제(部體制) 이루었을까?
가야제국이 연맹체를 이루었는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 반면에, 가야는 이미
部體制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 5세기 후반 이후의 대가야국(大加耶國) 단순히 주변을 포함하는 연맹체의 맹주국에 머무르지 않고 중앙집권화가 상당히 진전되어, 관료조직이 정비되고 부체제(部體制) 성립되는 등, 백제, 신라에 비견될 수 있는 령성국가(領域國家)로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야사를 이처럼 발전적으로 보려는 연구자가 많아지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나,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적용할 수 있는가는 좀더 새겨볼 여지가 있다.

특히 많은 학자들이 합천 저포리 출토 호(
壺; 전날(신라(新羅) 시대(時代)) 고승(高僧)이나 귀족(貴族)을 화장(火葬)하여 뼈를 갈아 담아 묻던 단지) 새겨진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 명문을 들고 합천지역의 정치체인 多羅國 대가야의 下部 해당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이 호(壺) 존재 만으로는 증거가 부실하다. 왜냐하면 그 평저광구호(平底廣口壺) 대개 6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것으로서, 그 시기에는 가야가 일시적으로 백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고 또한 <<日本書紀>> 흠명(欽明) 2년 및 5년 조에는 多羅國 외교상으로 加羅國 구별되는 나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당시에 多羅國 대가야의 下部 속해 있었다면 두 차례의  會議 때 자신의 독자적인 사신을 파견할 수 없어야 마땅할 것이다. 540년대 이후로 가야지역의 여러 소국들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그로부터 문물의 전수를 받기도 하고, 또한 당시의 백제에는 호부호방제(五部五方制) 확립되어 사료상 '하부모모(下部某某)'라는 인명 표기가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 인명이 백제에서 파견된 관료나 기술자의 것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2.
여기서 약간 관점을 돌려서 신라의
部體制 대한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가야와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출토유물상으로 보아서도 대략 4세기대까지는 유사한 발전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가 언제부터 部體制 들어갔다고 하면 시기상으로 일정하게 가야와 비교될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신라의
部體制 성립 시기에 대한 諸說로는 나물마립간이전 2부체제설(4세기 중엽∼7세기 전반; 末松保和 1936), 자비마립간 12년설(469; 李丙燾 1937), 나물마립간이전지증마립간대설(4세기 중엽∼6세기초; 金哲埈 1952), 눌지마립간대소지마립간대설(5세기초∼5세기말; 盧泰敦 1975), 유리왕 9년설(A.D.32; 丁仲煥 1962, 李文基 1981, 李鍾旭 1982, 崔在錫 1987), 이사금시기 3부체제설(1∼5세기 후반; 朱甫暾 1992), 紀年修正 유리왕 9년설(3세기 중엽; 全德在 1992) 등이 있다.

기존설의 추이를 살펴 보면 초기에는 신라의
部體制 성립 시기를 5세기 후반 이후로 보았으나, 최근으로 올수록 그 시기를 점점 올려잡아 3세기 중엽까지 올라갔으며, 그 중에는 1세기초로 올려잡은 견해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신라의 국가 권력 집중도를 초기에는 낮게 평가하다가 점차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部體制 대한 개념이 학자에 따라 점차 변화함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이며, 혹은 <<三國史記>> 초기 기록의 신빙성 및 紀年 문제에 대한 理解 相異에서 오는 혼란도 있다고 하겠다.

그중에서
部體制 개념 변화 추이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초기에는(이병도) 都城 행정구역을 6부로 구분하고 그 위에 6部貴族制 운영된 시기를 6部制라고 칭하였다. 두 번째로 部體制 대한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고(김철준) 이를 체계화한 단계에 와서는(노태돈) 연맹 소속국들의 외교권이 왕권에 의하여 통제되어 대외관계의 窓口 단일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시기를 중시하였다. 세 번째로 최근에 와서는(주보돈, 전덕재) 部體制 맹주국의 중앙집권 능력이 비교적 강화된 연맹체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첫 번째 개념의
都城 중심의 6부귀족제는 신라에서 5세기 후반에 일단 성립하였다고 하나, 가야에서 이런 정도의 중앙집권체제를 달성한 흔적은 찾기 어렵다. 두 번째 개념의 部體制 신라에서 4세기 후반 내지 5세기 전반에 성립하였다고 하나, 가야에서는 성립 여부가 불투명하다. 세 번째 개념의 部體制 신라에서 3세기 후반이면 성립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런 정도의 것이라면 후기가야연맹이 융성하는 5세기 후반에는 물론 달성되어 있고 전기가야연맹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3세기 후반경에도 같은 위치에서 논할 수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가야에 대하여 충분한 문헌 기록은 없다고 하여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통하여 3∼4세기 당시의 신라-가야 사이에 대등한 전투 장면을 추정할 수 있고, 3세기 후반부터 4세기에 걸치는 김해 대성동 고분과 경주 구정동 및 황성동, 월성로 고분의 사이에는 목곽의 규모와 유물의 질량 면에서 별다른 차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세 번째 개념의 部體制 아직 정밀한 개념 정리가 부족하고, 충분한 학계의 공감을 획득하였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3.
그렇다면 가야가 두 번째 개념의
部體制 단계에 도달하였는가의 여부를 대략 살펴 보고자 한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小國聯盟體 部體制 차이점이다. 이에 대한 기존 설의 개념 정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成立 삼국의 왕은 삼한의 辰王 같은 단순한 연맹장과는 다르니, 辰王 혹은 馬韓王 실제상의 위치와 기능은, 언어와 풍습 또는 동일한 지역 등에 따른 연대의식(連帶意識) 갖고 있는 한족전체(韓族全體) 상징적인 지도자로서, 주로 종교행사나 일시적인 외족(外族)과의 전쟁 등에서 전체의 통솔자로서 활약하였을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반 통치행정 면에선 그는 諸韓國 중 비교적 큰 目支國 뿐이고, 餘他 諸部族國家들은 독자적으로 교섭도 하면서 자치적으로 움직여 나갔다고 하였다. 그에 비하여 삼국의 성립은 삼국의 발흥지역의 諸部族들이 어떤 한 有力部族 중심으로한 집권력에 의해 그 운동력의 일부를 상실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諸部聯盟體 일원으로 통합되어짐을 뜻한다. 그중에서도 對外交涉窓口 一元化 곧 대내적으로 초부족적인 국가체제의 성립을 의미하니, 각부의 自治權 인정되나 外交權 貿易權 박탈당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 위에 나타난 개념 정의를 위주로,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가야연맹체의 내외 상황을 살펴 보자
.
대가야의 가실왕(
嘉悉王) 가야금(加耶琴) 만들고나서 악사(樂師)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于勒)에게 12곡을 만들게 하였다. 또한 우륵 12곡 중에 사자기(師子伎) 보기(寶伎)라는 2개의 기악곡(伎樂曲) 제외하고 나머지 10개는 대가야를 포함한 각 소국의 고유 음악을 가야금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마다 국가의 전통적인 의례(儀禮) 행하는 날에 각 소국의 장(長) 대표로 대가야의 궁정에 모여 그들의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는 행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성열현(
省熱縣) 현재의 의령군 부림면으로서 <<日本書紀>> 흠명기(欽明紀)에는 기인지국(斯二岐國)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대가야의 왕은 연맹체에 소속된 다른 小國 사람을 자신의 신하로 임명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연맹체에서의 연맹장의 권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대가야의 궁정에서 벌어졌을 12곡의 연주는 部體制 유지를 위한 제전행사(祭天行事) 일환으로 행해졌을 것인데, <<三國志>> 魏書 東夷傳에서 部體制 단계에 있었던 고구려의 '國中大會'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단순한 연맹체였던 三韓에도 五月祭 十月祭 같은 농경의례가 있었다고 하니, 이것만으로는 대가야가 部體制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6
세기초의 어느 시기에 경북 고령의 발파국(
伴跛國), 즉 대가야는 전북 남원, 임실 방면의 기문(己汶) 영유하는 문제를 놓고 백제와 다투었다. 또한 子呑(자탄; 진주시)帶沙(대사; 하동군 고전면)에 성을 쌓아 滿奚(만해; 광양시 광양읍)에 이어지게 하고, 봉화·척후와 저택·누각을 설치하여 日本 대비하였으며, 爾列比(이열비; 의령군 부림면)麻須比(마수비; 창녕군 영산면)에 성을 쌓아 麻且奚(마저해; 삼랑진읍推封(추봉; 밀양시)에까지 뻗치고, 사졸과 병기를 모아서 신라(新羅) 핍박하였다. 그리고 백제와 왜가 다사진(多沙津), 즉 전남 하동군 고전면 일대의 나루터에서 국제적인 교역을 이루려고 하자, 대가야가 군사를 보내 이를 물리친 적이 있다.

이렇게 볼 때 대가야는 대외관계와 관련하여 자신의 고유 영역을 넘어 다른 소국의 경역인 남원, 임실, 하동에서 백제, 왜 등과 다투었고, 하동방면으로는 그 지역을 수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내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역시 자신의 고유 영역을 넘어 연맹체 내의 다른 소국의 경역인 진주, 고전, 부림, 영산 등에 성을 쌓고 방어 건물을 설치하고 그 외곽으로 군대를 출동시키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정도의 영도력(
領導力) 가진 대가야가 단순히 종교적이거나 심리적인 연맹장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엄연히 부체제(部體制) 유지한 고대국가의 왕(王)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면 대외적 외교의 측면은 어떠할까? 479년에 가라왕 하지(
加羅王 荷知) 독자적으로 중국 남제(南齊)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 가라국왕(輔國將軍加羅國王)'의 작호를 받고, 481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신라를 돕기 위하여 彌秩夫(미질부; 포항시 흥해읍)에 군대를 파견한 것 등을 보면, 가야가 이미 고대국가적인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5세기 후반이후 6세기초까지의 대가야는 고대국가로 보아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541년과 544년의 두 차례에 걸쳐 백제와 가야연맹체 사이에 벌어진
 會議 및 그를 둘러싼 경과를 검토해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듯하여 앞의 단정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 , 가야연맹 전체에 대한 중요한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백제는 중신회의(重臣會議) 거쳐 성황(聖王) 혼자서 외교에 임하고 있는데 비하여, 가야연맹에서는 安羅(함안), 加羅(고령), 卒麻(함양), 散半奚(초계·쌍책), 多羅(합천), 斯二岐(의령 부림), 子他(진주), 久嗟(고성) 등 여러 소국에서 모두 대표자를 파견하여 직접 自國 견해를 대표하고 있다.

이로 보아 가라국(대가야), 안라국, 다라국에서는 각각 그 밑의 2인자 내지 관료로 보이는
次旱岐(차한기=下旱岐상한기), 上首位(상수위), 下旱岐(하한기 또는 二首位 이수위)를 보내고, 다른 소국들은 그 지배자로 보이는 한기(旱岐) 또는 한기(旱岐) 아들을 보내서, 각 소국간에 지배체제 발전 수준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라와 안라의 두 나라에는 각기 있다고 하여 다른 소국들로부터 초월적인 지위를 인정받기도 하였으나, 대가야나 안라도 외교권을 독점한 면모를 보이지는 못하고 있다. 대가야나 안라 중에 어느 나라가 부체제(部體制) 확립하고 있었다면 적어도 그 주변에 상당한 세력이 있으면서도 사신을 파견하지 못한 곳이 몇 군데라도 있어야 하는데, 위에 거명된 가야연맹 내 소국들은 -신라와 백제에게 병합된 곳들을 제외하고는- 대가야(大加耶) 안라(安羅) 지근(至近) 곳에 있으면서도 모두 사신을 보내고 있다.

이는 4세기말의 신라왕 누한(
樓寒) 전진(前秦) 가두(衛頭) 사신으로 보냈다거나, 5세기초의 신라 눌지마립간이 고구려와 왜에 대한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水酒村干 伐寶靺(수주촌간 벌보말), 一利村干 仇里(일리촌간 구리) , 利伊村干 波老(이윤촌간 파노) 세 사람의 추천을 받아  良州干 朴堤上(랑주간 박제상) 사신으로 보냈다는 사실, 즉 이해 관계 있는 小國들의 대표자를 다 함께 파견하지 않고, 국가 전체를 대표하여 1인의 사신을 보냈다는 것과 대비가 된다. 또한 520년 경의 정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梁職貢圖>> 百濟國使傳 이른바 '旁小國'에도 가야연맹체 쪽의 小國 (창원), 叛波(고령), 前羅(함안), 多羅(합천), 上己文(남원), 麻連(광양) 등의 多數 나오고 있는데 비하여, 신라 쪽의 국명으로는 오직 斯羅(경주) 하나만 나올 뿐이다. 이는 백제측의 관점만을 보이는 사료로서의 한계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시의 신라가 이미 외교적으로 낙동강 東岸 廣域 대표하는 유일한 국가라는 것이 인정되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部體制 확립된 신라 영역 내에서는 국가 집권세력의 일원이 된 이든 지방의 小國(侯國)이든 대외적인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야연맹 쪽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사비회의에 갔었던 가야연맹집사(
加耶聯盟執事)들은 신라에도 외교를 위해 갔었고, 加羅 安羅 모여서 회의를 하였던 적도 있었다. 여기서 그들이 가라, 즉 대가야나 안라에서 회의를 하면 대가야 왕이나 안라 왕도 그곳에 참석하여 제한기회의(諸旱岐會議) 면모를 띠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참석자들의 면모는 마치 유일령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에서 공론(共論)하여 교(敎) 내렸던 '칠오아(七王)'의 배열과 거의 비슷하다.    
영수리비(
冷水里碑)에도 '부(部)'라는 표기 없이 '사달(沙喙), 달(喙),본피(本彼), 기피(斯彼)'라고만 나오므로, 흠명기(欽明紀)에서 '' 빼고 '安羅, 加羅, 卒麻, 散半奚, 多羅, 斯二岐, 子他' 등으로 나오는 면모와 똑같다. 신라의 경우에 本彼 斯彼 대표자가 단지 '干支'로만 나오고, 가야의 경우에 卒麻, 散半奚, 斯二岐, 子他 대표자가 旱岐(또는 旱岐兒)로만 나오는 것도 같다. 이러한 유사성은 사회제도의 유사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6세기 전반의 가야연맹도 신라에 비하여 그다지 뒤떨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대다수의 6부 귀족이
恒常的으로 수도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비하여, 가야는 각 소국의 旱岐들이 모두 分居하고 있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신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신라 왕을 유일한 왕권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제도가 상당히 발달한 것에 비하여, 가야는 대가야 유일의 왕권이 그다지 오래가지 못하고 권위에 손상을 입어 安羅 왕권을 分占하고 있었다는 치명적인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諸旱岐會議(신라의 경우 諸干會議 또는 六部貴族會議)開催 頻度 신라와 가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의사 결정 형태의 외형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가야는 두 번째 개념의 엄밀한 部體制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약간 무리를 해서 가야쪽을 유리하게 두둔하여 가야의 部體制 성립을 강변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大加耶 중심으로 한 後期加耶聯盟體 5세기말 6세기초의 전성기에 일시적으로 部體制 단계에 이르렀다가 530년대의 왕권 약화 과정을 거쳐 540년대에는 다시 小國聯盟體 단계로 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논의한 것을 종합해 볼 때, 만일
部體制 개념이 연맹 소속국들의 외교권이 맹주국에 의하여 통제되어 대외관계의 창구(窓口) 단일화되는 현상까지 포함해야 한다면 가야연맹은 궁극적으로 部體制 성립, 또는 정착시키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으나, 최근의 추세처럼 部體制 맹주국의 중앙집권 능력이 비교적 강화된 연맹체 정도로 인식한다면 가야도 신라와 비슷한 시기에 이미 部體制 성립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경우와 엄밀하게 비교하여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과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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