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 김태식
가야의 정치체제가 어떤 수준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가야에는 국(國)을 칭하는 10여 개의 정치체, 즉 소국(小國)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기 분립되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고, 그들 사이에는 하나의 맹주국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聯盟體)라는 통합된 질서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고, 그 맹주국이 하나가 아니라 3~4개 있어서 몇 개의 소지역연맹체(小地域聯盟體)를 이루고 있었을 뿐이라는 견해도 있고, 백제나 신라와 같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이루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모든 견해는 각자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야의 여러 소국들은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4세기 이전의 전기 가야연맹 시기에, 변한 소국의 지배자인 거수(渠帥)들 사이에는 세력 크기에 따라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라는 다섯 등급의 호칭이 있었습니다. 이는 변한 소국들 사이에서 상호간의 규모와 서열에 따라 일정한 차등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 구야국 신지[拘邪秦支]와 안야국 축지가 가장 서열이 높았으며, 다른 소국들은 대외 관계에 있어서 그들의 결정을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발굴된 1~4세기의 유물과 유적이 함안보다는 김해 지방에서 훨씬 더 풍부하게 출토된 점으로 보아, 안야국(安邪國)보다는 구야국(狗邪國)이 더 우월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므로 변한 12국은 김해의 가락국(=구야국=가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전기 가야 소국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세기 이후의 후기 가야연맹 시기에는, 가장 많을 때는 20개 소국, 적을 때는 10개의 소국들이 고령의 대가야국(=가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소국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소국들의 지배자는 크기나 규모에 따라 호칭이 달랐으나 대체로 한기(旱岐),차한기,하한기,간기(干岐; 간지),검감,군(君)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맹주국의 지배자는 ‘왕(王)’의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시기에 고령의 대가야국(大加耶國)만이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나, 540년대 이후로는 함안의 안라국(安羅國)도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어서, 가야의 여러 소국들이 그 내부에서 남북 이원체제(南北二元體制)를 이루고 있었던 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맹장의 권한으로는, 소속국에 대한 세금 징수, 인력 동원 또는 징발, 소국 사이의 분쟁에 대한 조정, 전쟁과 같이 연맹 전체에 영향이 미치는 중요 대외정책의 결정, 연맹체의 결정에 불복하는 소국에 대한 징계 등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연맹장은 소속국 수장의 지위를 보장해 주고, 소속국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가야 연맹장의 권한은 때로는 강하게 발휘되기도 하였으나, 주변 정세의 변동이나 내분 등의 요인에 의하여 약하게 발휘되기도 하는 유동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령의 대가야국만은 휘하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신라와 같은 부체제(部體制)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부체제’란 현대의 연방제 국가와 비슷하게, 그 내부에 여러 소국들이 있어서 그들의 자치권이 인정되나, 외교권은 왕권에 의하여 통제되어 외부적으로는 단일한 국가 이름을 사용하고 대외관계의 창구가 단일화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부체제를 이루었다면, 이는 이미 중앙집권체제를 이룬 고대국가 초기 상태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에 대한 증거가 너무 미약하여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Gaya’s Political System ▶ The Gaya Confederation, the rights of the Confederation's leader, and the “Bu System” Historians are divided over Gaya's political system. Gaya was comprised of ten political bodies called Guk (國), or small states. The states existed separately, but were integrated as a confederation under the direction of one leading state. The leading state was not actually just one state, but represented three or four states within a regional confederation. The Gaya, some historians have argued, established a centralized state system that resembled that of Baekje or Silla. The predominant view, however, is that Gaya's small states formed a confederation. At the time of the early Gaya Confederation before the fourth century, five levels were recognized among the states. These levels were Sinji, Heomcheuk, Beonye, Salhae, and Eupcha. Each varied in size and influence. Among the states of Byeonhan, Guya-guk's Sinji and Anya-guk's Chukji ranked highest, so other small states could not but follow their decisions in foreign relations. As more relics from the first to fourth centuries have been found in Gimhae than in Haman, Guya-guk must have been more powerful than Anya-guk. Therefore, it can be argued that the twelve states of Byeonhan were integrated into Garak-guk (Guya-guk or Gaya-guk) at Gimhae to form the early Gaya Confederation. By the advent of the late Gaya Confederation in the fifth century, at least ten and at most twenty small states had formed a state confederation with Goryeong's Daegaya-guk (Gara-guk) at its head. The rulers of the small states used the title Hangi (旱岐) or Gun (君) in general, but specific titles varied according to the size or scale of states. The ruler of the Confederation's leading state used the title “King” (王). In general, Daegaya-guk laid claim to the title of “King.” However, after the 540s, Haman's Anla-guk also used the title. This tells us that many of Gaya's small states were part of another Gaya political system in the interior. Kings had far-reaching rights within the Confederation. The kings had the right to levy taxes and requisition labor from all states under their jurisdiction. They also resolved disputes or conflicts among confederation members, formulated foreign policy, and rebuked or punished disobedient member states. Confederation leaders buttressed chiefs’ positions and protected attached states in the event of invasions. However, the power of the Gaya Confederation's leader was not necessarily consistent and could vary as a result of external or internal pressures. Many historians believe that onl y Goryeong's Daegaya-guk managed to construct a “Bu System” (部體制) as in Silla by integrating the small states under its command. A “Bu System” was a feudal-like state, or collection of several fiefdoms with some degree of self-government. Such fiefdoms shared a common currency and acted as one unit on questions of foreign policy. If Gaya constructed a “Bu System” it would mean that it had achieved the true status of an ancient state with centralized authority. While this is an intriguing argument, the evidence in favor of this view is still scanty at best.
[영문]
The Political system
Taesi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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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문사철 http://cafe.daum.net/koreanLHP
가야연맹체제(加耶聯盟體)의 각부제 성립여부(部體制 成立與否)에 대한 소론(小論)
김태식 金 泰 植 (弘益大)
1.
하나의 정치세력이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대개 小國-小國聯盟體-部體制의 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보이는데, 가야(加耶)는 과연 고대국가 초기 단계에 해당하는 부체제(部體制)를 이루었을까?
가야제국이 연맹체를 이루었는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 반면에, 가야는 이미 部體制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즉, 5세기 후반 이후의 대가야국(大加耶國)은 단순히 주변을 포함하는 연맹체의 맹주국에 머무르지 않고 중앙집권화가 상당히 진전되어, 관료조직이 정비되고 부체제(部體制)가 성립되는 등, 백제, 신라에 비견될 수 있는 령성국가(領域國家)로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야사를 이처럼 발전적으로 보려는 연구자가 많아지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나,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적용할 수 있는가는 좀더 새겨볼 여지가 있다.
특히 많은 학자들이 합천 저포리 출토 호(壺; 전날(신라(新羅) 시대(時代)) 고승(高僧)이나 귀족(貴族)을 화장(火葬)하여 뼈를 갈아 담아 묻던 단지)에 새겨진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 명문을 들고 합천지역의 정치체인 多羅國이 대가야의 下部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이 호(壺)의 존재 만으로는 증거가 부실하다. 왜냐하면 그 평저광구호(平底廣口壺)는 대개 6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것으로서, 그 시기에는 가야가 일시적으로 백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고 또한 <<日本書紀>> 흠명(欽明) 2년 및 5년 조에는 多羅國이 외교상으로 加羅國과 구별되는 나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당시에 多羅國이 대가야의 下部로 속해 있었다면 두 차례의 泗 會議 때 자신의 독자적인 사신을 파견할 수 없어야 마땅할 것이다. 540년대 이후로 가야지역의 여러 소국들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그로부터 문물의 전수를 받기도 하고, 또한 당시의 백제에는 호부호방제(五部五方制)가 확립되어 사료상 '하부모모(下部某某)'라는 인명 표기가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 인명이 백제에서 파견된 관료나 기술자의 것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2.
여기서 약간 관점을 돌려서 신라의 部體制에 대한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가야와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출토유물상으로 보아서도 대략 4세기대까지는 유사한 발전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가 언제부터 部體制로 들어갔다고 하면 시기상으로 일정하게 가야와 비교될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신라의 部體制 성립 시기에 대한 諸說로는 나물마립간이전 2부체제설(4세기 중엽∼7세기 전반; 末松保和 1936), 자비마립간 12년설(469년; 李丙燾 1937), 나물마립간이전∼지증마립간대설(4세기 중엽∼6세기초; 金哲埈 1952), 눌지마립간대∼소지마립간대설(5세기초∼5세기말; 盧泰敦 1975), 유리왕 9년설(A.D.32년; 丁仲煥 1962, 李文基 1981, 李鍾旭 1982, 崔在錫 1987), 이사금시기 3부체제설(1∼5세기 후반; 朱甫暾 1992), 紀年修正 유리왕 9년설(3세기 중엽; 全德在 1992) 등이 있다.
기존설의 추이를 살펴 보면 초기에는 신라의 部體制 성립 시기를 5세기 후반 이후로 보았으나, 최근으로 올수록 그 시기를 점점 올려잡아 3세기 중엽까지 올라갔으며, 그 중에는 1세기초로 올려잡은 견해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신라의 국가 권력 집중도를 초기에는 낮게 평가하다가 점차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部體制에 대한 개념이 학자에 따라 점차 변화함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이며, 혹은 <<三國史記>> 초기 기록의 신빙성 및 紀年 문제에 대한 理解의 相異에서 오는 혼란도 있다고 하겠다.
그중에서 部體制의 개념 변화 추이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초기에는(이병도) 都城의 행정구역을 6부로 구분하고 그 위에 6部貴族制가 운영된 시기를 6部制라고 칭하였다. 두 번째로 部體制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고(김철준) 이를 체계화한 단계에 와서는(노태돈) 연맹 소속국들의 외교권이 왕권에 의하여 통제되어 대외관계의 窓口가 단일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시기를 중시하였다. 세 번째로 최근에 와서는(주보돈, 전덕재) 部體制를 맹주국의 중앙집권 능력이 비교적 강화된 연맹체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첫 번째 개념의 都城 중심의 6부귀족제는 신라에서 5세기 후반에 일단 성립하였다고 하나, 가야에서 이런 정도의 중앙집권체제를 달성한 흔적은 찾기 어렵다. 두 번째 개념의 部體制는 신라에서 4세기 후반 내지 5세기 전반에 성립하였다고 하나, 가야에서는 성립 여부가 불투명하다. 세 번째 개념의 部體制는 신라에서 3세기 후반이면 성립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런 정도의 것이라면 후기가야연맹이 융성하는 5세기 후반에는 물론 달성되어 있고 전기가야연맹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3세기 후반경에도 같은 위치에서 논할 수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가야에 대하여 충분한 문헌 기록은 없다고 하여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통하여 3∼4세기 당시의 신라-가야 사이에 대등한 전투 장면을 추정할 수 있고, 3세기 후반부터 4세기에 걸치는 김해 대성동 고분과 경주 구정동 및 황성동, 월성로 고분의 사이에는 목곽의 규모와 유물의 질량 면에서 별다른 차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세 번째 개념의 部體制는 아직 정밀한 개념 정리가 부족하고, 충분한 학계의 공감을 획득하였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3.
그렇다면 가야가 두 번째 개념의 部體制 단계에 도달하였는가의 여부를 대략 살펴 보고자 한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小國聯盟體와 部體制의 차이점이다. 이에 대한 기존 설의 개념 정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즉, 部가 成立된 삼국의 왕은 삼한의 辰王과 같은 단순한 연맹장과는 다르니, 辰王 혹은 馬韓王의 실제상의 위치와 기능은, 언어와 풍습 또는 동일한 지역 등에 따른 연대의식(連帶意識)을 갖고 있는 한족전체(韓族全體)의 상징적인 지도자로서, 주로 종교행사나 일시적인 외족(外族)과의 전쟁 등에서 전체의 통솔자로서 활약하였을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반 통치행정 면에선 그는 諸韓國 중 비교적 큰 目支國의 長일 뿐이고, 餘他의 諸部族國家들은 漢과 독자적으로 교섭도 하면서 자치적으로 움직여 나갔다고 하였다. 그에 비하여 삼국의 部의 성립은 삼국의 발흥지역의 諸部族들이 어떤 한 有力部族을 중심으로한 집권력에 의해 그 운동력의 일부를 상실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諸部聯盟體의 일원으로 통합되어짐을 뜻한다. 그중에서도 對外交涉窓口의 一元化는 곧 대내적으로 초부족적인 국가체제의 성립을 의미하니, 각부의 自治權은 인정되나 外交權과 貿易權은 박탈당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 위에 나타난 개념 정의를 위주로,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가야연맹체의 내외 상황을 살펴 보자.
대가야의 가실왕(嘉悉王)은 가야금(加耶琴)을 만들고나서 악사(樂師)인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于勒)에게 12곡을 만들게 하였다. 또한 우륵 12곡 중에 사자기(師子伎)와 보기(寶伎)라는 2개의 기악곡(伎樂曲)을 제외하고 나머지 10개는 대가야를 포함한 각 소국의 고유 음악을 가야금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마다 국가의 전통적인 의례(儀禮)를 행하는 날에 각 소국의 장(長)이 대표로 대가야의 궁정에 모여 그들의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는 행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성열현(省熱縣)은 현재의 의령군 부림면으로서 <<日本書紀>> 흠명기(欽明紀)에는 기인지국(斯二岐國)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대가야의 왕은 연맹체에 소속된 다른 小國의 사람을 자신의 신하로 임명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연맹체에서의 연맹장의 권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대가야의 궁정에서 벌어졌을 12곡의 연주는 部體制의 유지를 위한 제전행사(祭天行事)의 일환으로 행해졌을 것인데, <<三國志>> 魏書 東夷傳에서 部體制의 단계에 있었던 고구려의 '國中大會'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단순한 연맹체였던 三韓에도 五月祭와 十月祭와 같은 농경의례가 있었다고 하니, 이것만으로는 대가야가 部體制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6세기초의 어느 시기에 경북 고령의 발파국(伴跛國), 즉 대가야는 전북 남원, 임실 방면의 기문(己汶)을 영유하는 문제를 놓고 백제와 다투었다. 또한 子呑(자탄; 진주시)과 帶沙(대사; 하동군 고전면)에 성을 쌓아 滿奚(만해; 광양시 광양읍)에 이어지게 하고, 봉화·척후와 저택·누각을 설치하여 日本에 대비하였으며, 爾列比(이열비; 의령군 부림면)와 麻須比(마수비; 창녕군 영산면)에 성을 쌓아 麻且奚(마저해; 삼랑진읍)·推封(추봉; 밀양시)에까지 뻗치고, 사졸과 병기를 모아서 신라(新羅)를 핍박하였다. 그리고 백제와 왜가 다사진(多沙津), 즉 전남 하동군 고전면 일대의 나루터에서 국제적인 교역을 이루려고 하자, 대가야가 군사를 보내 이를 물리친 적이 있다.
이렇게 볼 때 대가야는 대외관계와 관련하여 자신의 고유 영역을 넘어 다른 소국의 경역인 남원, 임실, 하동에서 백제, 왜 등과 다투었고, 하동방면으로는 그 지역을 수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내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역시 자신의 고유 영역을 넘어 연맹체 내의 다른 소국의 경역인 진주, 고전, 부림, 영산 등에 성을 쌓고 방어 건물을 설치하고 그 외곽으로 군대를 출동시키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정도의 영도력(領導力)을 가진 대가야가 단순히 종교적이거나 심리적인 연맹장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엄연히 부체제(部體制)를 유지한 고대국가의 왕(王)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면 대외적 외교의 측면은 어떠할까? 479년에 가라왕 하지(加羅王 荷知)가 독자적으로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 가라국왕(輔國將軍加羅國王)'의 작호를 받고, 481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신라를 돕기 위하여 彌秩夫(미질부; 포항시 흥해읍)에 군대를 파견한 것 등을 보면, 가야가 이미 고대국가적인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5세기 후반이후 6세기초까지의 대가야는 고대국가로 보아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541년과 544년의 두 차례에 걸쳐 백제와 가야연맹체 사이에 벌어진 泗 會議 및 그를 둘러싼 경과를 검토해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듯하여 앞의 단정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 즉, 가야연맹 전체에 대한 중요한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백제는 중신회의(重臣會議)를 거쳐 성황(聖王) 혼자서 외교에 임하고 있는데 비하여, 가야연맹에서는 安羅(함안), 加羅(고령), 卒麻(함양), 散半奚(초계·쌍책), 多羅(합천), 斯二岐(의령 부림), 子他(진주), 久嗟(고성) 등 여러 소국에서 모두 대표자를 파견하여 직접 自國의 견해를 대표하고 있다.
이로 보아 가라국(대가야), 안라국, 다라국에서는 각각 그 밑의 2인자 내지 관료로 보이는 次旱岐(차한기=下旱岐상한기), 上首位(상수위), 下旱岐(하한기 또는 二首位 이수위)를 보내고, 다른 소국들은 그 지배자로 보이는 한기(旱岐) 또는 한기(旱岐)의 아들을 보내서, 각 소국간에 지배체제 발전 수준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라와 안라의 두 나라에는 각기 王이 있다고 하여 다른 소국들로부터 초월적인 지위를 인정받기도 하였으나, 대가야나 안라도 외교권을 독점한 면모를 보이지는 못하고 있다. 대가야나 안라 중에 어느 나라가 부체제(部體制)를 확립하고 있었다면 적어도 그 주변에 상당한 세력이 있으면서도 사신을 파견하지 못한 곳이 몇 군데라도 있어야 하는데, 위에 거명된 가야연맹 내 소국들은 -신라와 백제에게 병합된 곳들을 제외하고는- 대가야(大加耶)나 안라(安羅)의 지근(至近)한 곳에 있으면서도 모두 사신을 보내고 있다.
이는 4세기말의 신라왕 누한(樓寒)이 전진(前秦)에 가두(衛頭)를 사신으로 보냈다거나, 5세기초의 신라 눌지마립간이 고구려와 왜에 대한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水酒村干 伐寶靺(수주촌간 벌보말), 一利村干 仇里(일리촌간 구리) , 利伊村干 波老(이윤촌간 파노) 세 사람의 추천을 받아 良州干 朴堤上(랑주간 박제상)을 사신으로 보냈다는 사실, 즉 이해 관계 있는 小國들의 대표자를 다 함께 파견하지 않고, 국가 전체를 대표하여 1인의 사신을 보냈다는 것과 대비가 된다. 또한 520년 경의 정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梁職貢圖>> 百濟國使傳의 이른바 '旁小國'에도 가야연맹체 쪽의 小國은 卓(창원), 叛波(고령), 前羅(함안), 多羅(합천), 上己文(남원), 麻連(광양) 등의 多數가 나오고 있는데 비하여, 신라 쪽의 국명으로는 오직 斯羅(경주) 하나만 나올 뿐이다. 이는 백제측의 관점만을 보이는 사료로서의 한계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시의 신라가 이미 외교적으로 낙동강 東岸의 廣域을 대표하는 유일한 국가라는 것이 인정되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部體制가 확립된 신라 영역 내에서는 국가 집권세력의 일원이 된 部이든 지방의 小國(侯國)이든 대외적인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야연맹 쪽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사비회의에 갔었던 가야연맹집사(加耶聯盟執事)들은 신라에도 외교를 위해 갔었고, 加羅나 安羅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던 적도 있었다. 여기서 그들이 가라, 즉 대가야나 안라에서 회의를 하면 대가야 왕이나 안라 왕도 그곳에 참석하여 제한기회의(諸旱岐會議)의 면모를 띠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참석자들의 면모는 마치 유일령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에서 공론(共論)하여 교(敎)를 내렸던 '칠오아(七王)'의 배열과 거의 비슷하다.
영수리비(冷水里碑)에도 '부(部)'라는 표기 없이 '사달(沙喙), 달(喙),본피(本彼), 기피(斯彼)'라고만 나오므로, 흠명기(欽明紀)에서 '國'字를 빼고 '安羅, 加羅, 卒麻, 散半奚, 多羅, 斯二岐, 子他' 등으로 나오는 면모와 똑같다. 신라의 경우에 本彼와 斯彼의 대표자가 단지 '干支'로만 나오고, 가야의 경우에 卒麻, 散半奚, 斯二岐, 子他의 대표자가 旱岐(또는 旱岐兒)로만 나오는 것도 같다. 이러한 유사성은 사회제도의 유사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6세기 전반의 가야연맹도 신라에 비하여 그다지 뒤떨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대다수의 6부 귀족이 恒常的으로 수도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비하여, 가야는 각 소국의 旱岐들이 모두 分居하고 있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신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신라 왕을 유일한 왕권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제도가 상당히 발달한 것에 비하여, 가야는 대가야 유일의 왕권이 그다지 오래가지 못하고 권위에 손상을 입어 安羅와 왕권을 分占하고 있었다는 치명적인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諸旱岐會議(신라의 경우 諸干會議 또는 六部貴族會議)의 開催 頻度도 신라와 가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의사 결정 형태의 외형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가야는 두 번째 개념의 엄밀한 部體制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약간 무리를 해서 가야쪽을 유리하게 두둔하여 가야의 部體制 성립을 강변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大加耶를 중심으로 한 後期加耶聯盟體는 5세기말 6세기초의 전성기에 일시적으로 部體制 단계에 이르렀다가 530년대의 왕권 약화 과정을 거쳐 540년대에는 다시 小國聯盟體 단계로 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논의한 것을 종합해 볼 때, 만일 部體制의 개념이 연맹 소속국들의 외교권이 맹주국에 의하여 통제되어 대외관계의 창구(窓口)가 단일화되는 현상까지 포함해야 한다면 가야연맹은 궁극적으로 部體制를 성립, 또는 정착시키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으나, 최근의 추세처럼 部體制를 맹주국의 중앙집권 능력이 비교적 강화된 연맹체 정도로 인식한다면 가야도 신라와 비슷한 시기에 이미 部體制가 성립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경우와 엄밀하게 비교하여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과제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