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마무사,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전쟁의 역학구조상 상대방이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다면 그 장비를 재빨리 모방하거나 보다 개선해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중국은 개마무사가 무적이라는 것을 알고도 개마무사를 주력군으로 육성하지 않았다.


물론 중국 역사를 통틀어 기마병을 전혀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기병은 북방기마민족들이 중국을 점령했을 때 또는 중국의 용병으로 이민족들을 활용했을 때 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이 개마무사의 위용을 잘 알고 있음에도 개마무사를 채택하지 않은 이유로 학자들에 따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요인으로는 중국의 제철 능력의 한계 때문으로 인식한다.


쉽게 이야기해 보면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 능력이 있었던 데 반해 중국에서는 철 생산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철의 종류를 구분할 때는 탄소 함유량을 기준으로 한다. 탄소 함량에 따라 주철(선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1.7~4.5%), 강철(탄소 함량 0.035~1.7%), 함유량이 적은 연철(시우쇠, 단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0.035% 이하)로 나뉘는데 용도에 따라 적절한 것을 택한다. 이 중에서 강철이 가장 늦게 발견됐다.


성질이 다른 철을 만드는 기본 제련 방식은 유사하다. 과거에 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두 가지로 바로 철광석과 숯이다.


산화철은 700~800도의 낮은 온도에서 환원되므로 철은 액체 상태로 되지 않고 절반쯤 녹다 만 상태에서 굳는다. 이렇게 얻은 연철(괴련철)을 단조하면 철기를 만들 수 있다. 제련로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이 간단한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는 이러한 공정을 거쳐 철기를 제작했다.


http://blog.eduhope.net/files1/5/chamfirst/images/200707/240942124.jpg')" src="http://blog.eduhope.net/files1/5/chamfirst/images/200707/240942124.jpg" onl oad="setTimeout('fixImage(6739097)',300)" align=left border=0>▲ 훈족(흉노)의 공격. 기동력 있는 기마병의 공격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죽음과 파괴를 상징할 정도로 그 위용을 떨쳤다.  ⓒFrank Frazetta 작품 


고대 사극에서 자주 보이는 것은 좋은 칼을 만들기 위해 용광로에서 나온 철을 불에 달구고 두드리기를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쇠를 두드리면 단단해지는 것은 쇠의 금속 성질 때문이다. 쇳덩이를 현미경으로 자세히 확대해서 보면 네모, 육각형, 오각형 등 모양만 다양한 게 아니라 크기도 제각각이다. 당연히 이런 조직들이 온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성을 나타내게 된다.


두드리는 동안 괴련철 속의 규소 등 이물질이 압출되고 조직이 치밀해진다. 그리고 이물질 중 배출되지 않는 것도 조직 안에 고루 분산되므로 조직이 균일화되고 전체적 강도가 높아지게 된다. 또한 가열된 괴련철을 숯에 넣으면 숯의 탄소가 철에 흡수돼 자연스레 철의 표면은 적당한 탄소를 함유한 괴련강(塊鍊鋼 : wrought iron)이 되며 이를 침탄법이라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쇠의 날과 등의 두께를 달리하면 쇠의 성질을 인공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쇠의 색깔이 황혼 빛에 이르는 순간을 포착해, 안쪽 날부터 시작해 등 부분까지 순간적으로 물에 담그는 것을 반복했다. 날 부분은 갑작스레 담금질하면 갈라질 수 있기 때문에 손끝에서 나오는 숙련된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이런 과정을 수백 번에 걸쳐 반복하면서, 날 부분은 강하게 만들고 가운데와 등 부분은 약하지만 유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칼은 칼의 표면 부분만 탄소가 함유된 강철이고 그 안쪽은 여전히 연철이므로 칼을 사용함에 따라서 표면의 강철은 부서지게 되고 칼이 강한 충격을 받으면 쉽사리 휘게 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칼 한 자루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인력이 너무도 과다하다는 점이다.


침탄법으로 철을 만들 수 있지만 청동처럼 철을 주물로 부어 칼의 형태를 만들고 마무리 단조를 통하면 칼의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 이를 선철(주철, cast iron)이라고 한다. 그런데 철을 녹이기 위해서는 순철의 경우 1천535도 이상이 돼야 하는데 고대에 1천500도 이상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장인들은 용융점을 낮추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그 비결은 철에 탄소가 함유될수록 녹는점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때의 연로로 질이 좋은 숯을 사용한다.


제련로 안의 온도가 올라가면 CO 가스가 형성된다. 제련로 안의 온도가 700~800도에 이르면 CO 가스에 의해 철산화물이 Fe2O3 → Fe3O4 → FeO → Fe 순으로 환원되며 환원된 철은 탄소와 접촉하여 Fe3C로 된다.


한편 제철로 안의 온도가 1천50-1천100도에 이르면 광석 중에 포함돼 있던 맥석 성분이 석회와 작용하여 광제가 1천20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액체 상태의 선철과 분리된다. 따라서 제철로 안에서는 쇳물과 용융된 광재가 생기는데 광제는 쇳물보다 비중이 작으므로 쇳물 위로 뜰 때 이를 분리하여 쇳물을 뽑아낼 수 있는데 이때의 선철은 약 3~4퍼센트의 탄소가 함유돼 있다.


선철(주철)은 보통 백색주철과 회색주철로 나뉘는데, 백색주철은 탄소가 탄화물 형태로 결합돼 흰색을 띠므로 백색주철(철탄소합금계 가운데서 용융점이 1천130도로 가장 낮은데도 주조성이 좋으며 강도가 높고 내마모성이 좋다)이라고 부르며 회색주철은 탄소가 흑연형태로 포함되면서 겉면에 퍼져 회색빛을 띠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쇳물을 그대로 주형에 부어 칼을 만들면 외형은 나무랄 데 없는 칼이지만 나무 등을 세게 치면 곧바로 깨져버린다. 날을 세우려고 망치로 두드려도 깨져버리고 숫돌로 갈아도 워낙 경도가 높아 제대로 날이 서지 않는다.


관건은 주철에서 탄소를 적당히 제거하는 것으로 비밀은 주철을 고열에서 일정시간 가열해 주는 것이다. 주철 표면의 탄소가 산소와 결합하여 제거된다. 또한 철은 온도 변화에 따라서 탄소함유율이 낮은 페라이트상과 탄소 함유율이 높은 오스테나이트상을 오가므로 이 과정에서 철 내부의 탄소가 유리돼 한 곳으로 뭉쳐 흑연덩어리를 형성해 철 자체의 탄소량이 감소한다. 이렇게 가열가공을 거쳐 탄소량을 2.3~3.4퍼센트로 만든 전성주철(展性鑄鐵) 혹은 가단주철(可鍛鑄鐵)은 연성이 있어 어느 정도의 단조작업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방법의 문제는 재가열 과정에서 철이 산화되는 것은 물론 탄소량의 감소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철 내부의 흑연괴로 인한 경도 약화로 농기구 등을 만드는 데는 문제가 없으나 무기에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고강도의 철 즉 강철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장인들은 고강도의 철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소위 선철에서 손쉽게 탄소를 제거하는 방법인데 가장 먼저 개발된 방법은 초강법(炒鋼法)이다. 초강법은 녹은 상태의 주철에 고운 흙이나 산화철 가루 등 탈탄제(脫炭劑)를 넣고 저어서 주철의 탄소가 철광석 가루와 결합하여 제거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탄소가 제거되면 철의 용융점이 높아져서 곧 굳게 되므로 잘 저어주고 센 불로 계속 가열하여야 한다. 이 경우 약 2퍼센트의 탄소를 함유하는 비교적 고품질의 강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의 문제점은 탄소 함유량을 정확히 조절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의 방법은 관강법(灌鋼法)이다. 주철과 순철(연철)을 함께 섞어 열을 가하면 탄소함유율이 높은 주철이 1천200도 내외에서 먼저 용해된다. 순철은 주변의 주철로부터 탄소를 흡수하면서 용융점이 낮아져 1천300-1천400도에서 녹아 주철과 섞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탄소량이 과다한 주철은 탄소를 잃고 탄소량이 부족한 순철은 탄소를 얻게 돼 적절한 탄소량을 가진 강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강법은 초강법에 비하여 탄소량의 조절이 보다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http://blog.eduhope.net/files1/5/chamfirst/images/200708/060103092.jpg')">▲ 개마무사와 방패, 고구려는 질 좋은 철제무기를 사용하여 적들과의 전투에서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 


고고학사에 의하면 기원전 25세기경 수메르에서 철기를 만들었으며 강철은 아르메니아 지역의 히타이트족이 기원전 2천 년경에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강철을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것이 아니라 연철의 표면을 침탄법으로 열처리하여 강철로 변화시킨, 질이 낮은 것이다. 이 기술은 히타이트족이 계속 주조법을 독점하다가 그들이 멸망하자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철이 생산된 지 거의 10세기가 지난 기원전 12-10세기가 돼서야 이란,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및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강철이 제련된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중국에서의 철기 사용은 기원전 1100년경으로 올라가지만 기원전 7세기인 춘추전국시대에 비로소 주철의 주조가 가능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에서 진정한 철기시대가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이때의 제강법은 단철을 여러 번 불에 넣어 단련함으로써 강철을 얻었으므로 백련강(百鍊鋼) 천련강(千鍊鋼)이란 명칭만으로도 그 제조의 어려움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단조에 의해 생산되는 철제무기는 매우 고가여서 극히 일부에서만 사용됐으므로 정작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통일제국 성립 후까지도 여전히 청동제 무기만을 사용했다. 청동을 사용하는 진나라가 철기를 사용하는 열국들을 격파한 것은 고대사의 미스터리 중에 하나이다.


초강법(炒鋼法)이나 주철탈탄강법(鑄鐵脫炭鋼法)을 사용한 강철은 한나라 초기인 기원전 1세기경에 비로소 나타나며 이후 더 이상의 제철기술 발전이 미미하여 문화혁명기까지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제철이 이루어진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문화가 진전됐다는 학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철기는 중국보다 당연히 늦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철기시대가 언제 시작됐느냐는 문제는 대체로 두 가지 설로 나뉜다. 그 하나는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에 ‘명도전(明刀錢)’과 함께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철기문화가 들어왔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한나라의 금속문화가 도입됐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중국 전국시대의 유적지 가운데 철기가 출토된 지방은 20여 군데에 이르고 있는데 대부분의 지방이 고조선 영역이다. 이것은 이들 유물이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인들에 의해 개발됐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즉 중국과 완전히 다른 청동기술을 발전시킨 고조선에서 철기도 독자적으로 발전됐다는 뜻이다. 특히 고조선은 그 당시 세계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첨단 기술인 강철을 주조하는 기술까지 갖고 있었다.


평양의 강동군 송석리 1호 석관 무덤에서 나온 직경 15센티미터, 두께 0.5센티미터의 쇠로 된 둥근 거울은 앞면이 매끈하고 뒷면에 1개의 꼭지가 붙어 있는데 절대 연도가 무려 3104±17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탄소 함량이 낮은 강철은 용광로에서 선철과 산화제를 작용시켜 얻는데 이 쇠거울의 화학 조성은 탄소가 0.06%, 규소 0.18%, 유황이 0.01%인 저탄소강이었다.


더구나 탄소가 적은 저탄소강임에도 불구하고 굳기가 연철보다 강하고 유황도 매우 적은 양이다. 일반적으로 탄소 함유량이 1.0% 미만인 저탄소강은 온도가 적어도 1천500도 이상 되는 용광로에서 직접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쇠거울은 연철이나 선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 아니고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쇳물로 주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ttp://blog.eduhope.net/files1/5/chamfirst/images/200708/060103019.jpg')">▲ 진천 석장리 제철용 송풍관. 한민족이 질 좋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을 사용 등으로 추정한다.  ⓒ 


평양시 강동군 항목리에서 출토된 쇠줄칼은 연대가 다소 내려가는 기원전 7세기경의 탄소 공구강인데 겉면에 격자 문양이 나 있어 줄칼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재질은 탄소가 약 1.0%, 규소 0.15%, 유황이 0.0007%였으며 줄칼에 단접부가 없고 높은 온도에서만 형성되는 조직을 갖고 있다. 이 쇠줄칼도 쇠를 완전히 용융한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으므로 중국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강철다운 강철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는 강철의 비율을 볼 때 고조선 장인들이 제련로 안의 온도를 적어도 1천400도 정도 유지한 상태에서 철을 14-16시간 정도 녹여냄으로써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조선 장인들이 이와 같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의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 등 덕분이다.


고조선 영역의 철 생산지는 매우 광범위하다. 대표적인 것은 은율 일대 노천 철광상으로 철제 망치와 징이 출토됐다. 또한 『고광록』에는 요하 하류 지역(요동)인 안산과 철령(쌍성), 개주(개평), 요양, 승덕, 심양 등지에서 주로 자철광과 적철광을 채취하여 철을 생산했다고 적혀 있다.


고조선 지역에서 생산된 강철이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서아시아에서도 강철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저급품이었다. 그런데 고조선에서 생산된 강철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고온의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질 좋은 것으로 그 연대도 무려 기원전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한민족이 건설한 2번째 국가로 추정되는 부여의 경우도 철기 생산에 있어서는 선진국이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의 군사들이 투구ㆍ활ㆍ화살ㆍ칼ㆍ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거의 다 철로 만든 것이다.


부여 영역에는 오늘날의 길림성, 흑룡강성,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 일대 등 철 생산지가 많다. 무산군 범의구석 유적에서도 연철제품이 발굴됐고 이들은 기원전 7-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곧바로 다음 단계인 선철 생산 단계로 이어진다.


강철은 기원전 2-1세기에 제련됐는데 무산군에서 발견된 강철 도끼는 탄소가 1.55퍼센트, 규소가 0.10퍼센트, 망간이 0.12퍼센트, 연이 0.07퍼센트, 유황이 0.08퍼센트였다. 이 도끼는 탄소의 함유량이 1퍼센트 이상인 매우 단단한 극경강으로 부여 사람들이 제품의 용도에 맞게 철을 자유자재로 다루었음을 보여준다.


고조선과 부여의 제철 기술이 고구려로 전승돼 각종 장비를 질 좋은 철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2001년과 2004년 아차산 제4고구려보루에서 출토된 철기를 대상으로 최종택, 박장식 교수가 금속학적 미세조직을 분석한 결과 연철을 대상으로 한 침탄제강법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관강법(灌鋼法)으로 강철을 만든 흔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고구려에서 고대 철기기술의 양대 산맥으로 볼 수 있는 두 가지 제강법은 물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제강법을 사용하여 각 제품에 알맞은 철기를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고구려 독자의 철강 기법으로 여러 가지 철기를 만들었다는 뜻이며, 고구려의 철기문명 수준이 매우 뛰어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동천왕이 철기병 즉 개마무사 5천 명을 동원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철의 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개마무사 1인당 말 갑옷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갑옷 무게 2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여 10킬로그램을 휴대한다고 해도 최소한 70킬로그램의 철이 소요된다. 이를 5천 명에 적용한다고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350톤의 철이 필요하며 예비량을 가정한다면 최소한 500여 톤이 필요하다.


http://blog.eduhope.net/files1/5/chamfirst/images/200708/060103166.jpg')">▲ 강원도 철령에서 발굴된 3세기경의 철마군단(고구려연구회 제공).  ⓒ 


현대의 제철 기술로는 500여 톤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약 1800년 전에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앞선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구려의 저력은 중국보다 앞선 철기문명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고려할 때 최근 인기 있는 TV 역사드라마에서 부여가 강철을 만들 수 있는 초강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절절 매고 있을 때, 중국의 한나라는 철기군을 운용하고 있는 모습은 실제의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우리 민족은 중국 한(漢)족에 비해 문명의 수준이 뒤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계속)


참고문헌
「고구려를 다시보자(2) 벽화로 본 고구려」, 이태호, 동아일보, 2004.03.22
『한국의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역사의 아침, 2007
『조선기술발전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4
고조선에서의 제철 및 철재 가공기술의 발전, 박영초, 조선고고연구, 1989년 1호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이종호, 컬쳐라인, 2000
『조선광업사』, 리태형, 공업종합출판사, 1991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 장한식, 풀빛, 1999
「환도산성과 한강유역에서 출토된 철기에 나타난 고구려의 철기기술」, 박장식, http://blog.naver.com/bestchoi21?Redirect=Log&logNo=20013974168


/이종호 과학저술가 
2007.07.31 ⓒScienc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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