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균 김옥균에 대해 역사 책에 갑신정변에 대해 나오고 해서 모두 알고 있습니다.

개화파 지도자로서 몇 가지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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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http://blog.daum.net/ileejj/1533 강의자료 7 : 고균 김옥균의 삶과 사상 


김옥균을 두고 흔히 초기개화파 또는 급진개화파라고 부른다. 이는 뒤의 온건개화파와 구분해서 붙여진 것이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들은 꾸준히 정치개혁을 도모했고 끝내 혁명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으려 했다. 이들이 추진한 방향을 두고 부르주아 혁명이라 평가하기도 하고 급격한 정치개혁 노선을 지향했다고도 한다. 


김옥균 등의 정치적 지향은 첫째로 자주독립을 꼽는다. 


김옥균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양 각국은 모두 독립국이다. 어느 나라를 따질 것 없이 독립한 연후에야 화친할 수 있는데 조선이 홀로 중국의 속국이 되어 있으니 심히 부끄럽다. 조선이 어느 때에 독립하여 서양 여러 나라와 동열(同列)에 서겠는가? 〈신중환 공초〉, 《추안급국안》


이 말은 곧 우리가 완전독립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래 전통적 외교노선인 사대교린정책을 불식하고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사대명분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개항 이후 청나라는 조선과의 전통적 외교관계를 들어 마치 속국처럼 다루고, 외교 · 통상조약에서 먼저 자국과

의 교섭 또는 허락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세워 끊임없이 압력을 가해왔다. 이것이 바로 자주적으로 서양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장애요인이 되었다. 또 임오군란 이후 청국상인이 조선에 진출하고, 흥선대원군이 톈진에 구류되는가 하면 이홍장의 막하 오장경(吳長慶)이 서울에 주둔하면서 군문제독(軍門提督)이라는 이름으로 내정간섭을 직접적으로 진행시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개항 이후 일본, 미국을 비롯한 서양과의 교섭에서 조선은 완전한 자주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김옥균은 전통적 외교노선을 비판하고 청국의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여 새로운 국제 시대에 조선이 내정 · 외교에서 철저한 자주노선을 수립할 것을 역설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애국주의와 부국강병을 지향했다. 이것이 확립되지 않으면 외래 자본주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자주독립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 김옥균이 지향한 정체(政體)는 〈한성순보〉의 논설 〈구미입헌정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3권 분립과 양원제를 주축으로 한 의회제도, 이를 토대로 한 입헌군주제 아래에서의 국왕의 위치와 정부의 역할 등을 소개했다. 이는 봉건적 전제군주제도를 폐지하고 근대적 입헌군주정치를 지향해야 할 필요성을 기저에 깔고 있다. 

한편 황현은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성공시키고 미국의 대통령제처럼 번갈아가며 그들이 군장이 되려 했다고 쓰고 있다.(황현 《오하기문》) 한마디로 김옥균이 입헌군주제와 대통령제,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채택하려 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봉건군주제도를 타파하려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런 기저 위에서 봉건제도의 개혁을 꾸준히 추진했다.


김옥균은 봉건신분제인 양반제의 폐지를 열렬히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양반제가 존재하는 한 평등을 이룩할 수 없다는 논지였다. 이와 함께 초기개화파들은 문벌의 타파를 추진했다. 세도정치 또는 족벌정치의 온상인 문벌의 타파가 선행되어야 양반제도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 관료제도의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행정기구의 개폐로부터 시작되었다. 임오군란 뒤 그들이 만든 기구인 기무처(機務處)에 이런 내용이 잘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들은 궁중예산제도를 확립하여, 왕궁에서 사사로이 무한정 쓰는 경비를 한정하게 했고, 국가재정수입을 호조의 단일 기구에서만 관장하도록 했으며 근대적 군사제도의 실시를 추진했다. 


그밖에 그들은 풍속의 변화를 꾀했다. 


그 중에서 복제의 개선, 색의(色衣)의 장려와 단발의 시행을 가장 중시했다. 이들은 벼슬아치들에게 도포나 장식이 많은 관복을 고쳐 두루마기로 통일시켰으며 일반 백성에게는 색의를 권장했다. 이는 실질 있는 풍속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근대문물 수입을 위해 학교의 설치, 통신제도의 개선, 기예의 장려 등을 도모했다. 


그들은 종래의 역마제(驛馬制, 역을 기준으로 한 파발)를 바꾸어 우정국을 설치했고, 전보를 보급하기 위해 전선국을 설치했으며, 각지에 어학학교 · 기예학교 등을 두었다. 또 인재양성을 위해 유학생을 일본 · 중국에 파견하여 어학과 기술을 익히게 했고, 근대적 출판 · 언론을 보급하기 위해 박문국을 설치하고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이러한 기구와 제도의 개혁과 풍속 · 문화운동은 단순한 개량의 수준이 아니었다. 비록 실학자의 주장을 수용한 면도 있고 선진문물의 영향을 입은 바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근대지향이라는 면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들의 이런 근대지향성은 번번이 수구파에 의해, 특히 복제개선 등에서 제대로 실현해 보지 못하고 좌절하는 수가 흔했다.  1895년에 전면적으로 단행된 ‘단발의 실시’를 놓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난 사례를 보아도 이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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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갑신정변의 주역들로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이다. 프랑스 혁명가 나폴레옹 상징인 손을 옷에 넣고 있다.



개화파 갑신정변 생사와 이후 참여 조직


갑신정변 김옥균_180507.pptx


관련 문서]

1> 박영효, <갑신정변>, <순종실기 :신민 14호>, 신민사, 1926.
2> 문일평, <사외이문비사(史外異聞秘史)>: 호암전집(3), 조광사, 1946.
3> 신복룡, <사외이문비사(史外異聞秘史)>: 호암전집(3), 조광사, 1946.
4> 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 <동아일보> 193512)
5> 김옥균, <갑신일록>



개화사상가 유대치는 양반 출신

글 동아일보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2007 1 09

 

전남 장성군 북이면 송산리에서 발견되 유대치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비명.

백의유대치월헌홍규지묘(白衣劉大致月軒洪奎之墓)라고 적혀있다. 탁본 제공 유영심씨

개화당의 개혁정치를 뒤에서 조종했다고 하여 백의정승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유대치. 의원으로 알려졌던 그는 역관 출신인 친구 오경석(1831 – 1879)과 더불어 대표적인 중인층 개화파 지도자로 꼽혔다. 그런 그가 양반 출신일 가능성을 면밀히 분석한 논문이 발표됐다. 지난해 상한(常漢.상놈) 계층이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을 구명한 갑신정변 연구를 펴낸 박은숙 서울시사연구소 연구원이 한국인물사연구제ㅎ4호의 유대치의 신분과 정세인식에서 밝힌 내용이다.

개화당 연구의 대가인 고 이광린 서강대 명예교수는 숨은 개화사상가 유대치’(1973)’에서 유대치의 본명으로 알려진 유홍기(劉洪基)가 연관을 많이 배출한 한양 유씨의 족보에 1831년생으로 등장하는 점에 주목했다. 유대치는 김옥균의 갑신일록과 윤치호의 윤치호 일기에 자주 등장하다가 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뒤 행적이 묘연해진다. 신뢰할 만한 기록은 그가 오경석의 아들이자 제자인 위차 오세창을 데리고 경기도 광주와 가평으로 피신 중 변소에 간다면 나간 뒤 사려졌다는 위창의 회고가 마지막이다. 이 때문에 이 교수의 유홍기= 유대치추정은 학계의 정설이 됐다. 박 연구원은 이를 반증하는 자료를 제기했다. 우선 전남 장성군 북이면 송산리에서 발견되 강릉 유씨 유홍규(유홍규, 1814 – 1884)의 묘비명이 있다. 묘비명에는 유홍규가 백의정승으로 불린 유대치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박 연구원을 이 묘비가 1924년 이전부터 있었다는 주민 증언도 채록했다. 1911년 발행된 강릉 유씨 족보에 유홍규가 대치로 개명했으면 개화당을 지도한 백의정승이라는 가필된 기록도 발견됐다.

1882 11 11일자 승정원 일기에 유대치가 벼슬을 하지 않은 양반인 유학(幼學)이어서 부사용(副司勇)이라는 종9품의 관직을 내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1869년 발간된 한양 유씨 족보에는 유홍기가 이미 사용이란 관직을 받았다는 모순된 기록이 나온다.

 박 연구원은 유대치 중인설은 그가 역관의 집에서 태어나 의()를 업으로 했다는 후대의 기록(1944년 발간된 김옥균 전)과 중인의 집단 거주지였던 광교 부근 관철동 에서 살았다는 정황 증거에 근거한다.”김옥균, 박영효 등 최고 문벌 양반과 교제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히려 양반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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